트라쉬불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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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라쉬불로스는 고대 아테네의 군 지휘관이자 정치인으로, 기원전 411년 쿠데타와 삼십인 참주 정권에 반대하며 민주정을 수호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 함대를 이끌고 여러 해전에서 승리했으며, 삼십인 참주를 몰아내고 민주정을 부활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코린토스 전쟁에서도 활약했으나, 기원전 388년 아스펜두스에서 암살당했다. 트라쉬불로스는 유능한 군사 지도자이자 민주주의 옹호자로 평가받지만,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고집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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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쉬불로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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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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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트라쉬불로스 |
로마자 표기 | Teurasyibullos |
원어 이름 (그리스어) | Θρασύβουλος |
출생 | 기원전 455년 ~ 기원전 441년경 |
사망 | 기원전 388년 |
사망 장소 | 아스펜도스(현재의 세리크, 안탈리아 주, 튀르키예) |
군사 경력 | |
소속 | 아테네 |
계급 | 장군 |
참전 | 펠로폰네소스 전쟁 키노세마 해전 아비도스 해전 키지쿠스 해전 아르기누사이 해전 필레 전투 뮌키아 전투 피레아스 전투 코린토스 전쟁 네메아 전투 코로네아 전투 |
2. 어린 시절과 초기 경력
트라쉬불로스의 어린 시절이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의 아버지는 리쿠스(Λύκος|Lykosgrc)였고,[1] 아테나이의 데메 스테이리아 출신이었다.[2] 그는 기원전 455년에서 441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원전 430년대 후반에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결혼하여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기원전 413년, 대규모의 아테네 원정군이 시켈리아에서 전멸하는 참패를 겪었다. 이 패배는 아테네를 전례 없는 위기로 몰아넣었다. 에게해 전역의 동맹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 함대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다. 아테네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비축 자금을 투입하여 함대를 재건하고, 남은 배들을 사모스에 보내 전진 해군 기지를 건설했다.
기원전 411년 아테나이 해군 장군으로 임명된 트라쉬불로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반기에 여러 중요한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를 이끌며 활약했다.[14][15][16][17][18]
그가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는 점은 여러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여러 차례 상당한 개인 비용이 드는 트리에라르크 직책을 맡았으며,[3] 기원전 4세기에는 그의 아들이 10 탈렌트에 달하는 큰 금액의 벌금을 낼 수 있었다.[4]
기원전 411년 이전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아 그 이전의 활동은 알 수 없으나, 기원전 411년경에는 친민주주의 성향의 정치인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는 아테나이 제국주의와 팽창주의를 지지했으며, 페리클레스 시대의 민주정을 강력히 옹호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 경력 동안 이러한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또한 민주정 내에서 포퓰리즘으로 볼 수 있는 파벌을 이끌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데모스테네스는 트라쉬불로스를 "위대하고 뛰어난 웅변가" 중 한 명으로 평가했고,[5]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아테나이인들 중 가장 큰 목소리"를 가졌다고 언급했다.[6] 아테나이의 장군 코논은 트라쉬불로스를 "결단력 있는 조언자"로 묘사했다.[7]
3. 기원전 411년 쿠데타
이러한 혼란 속에서 오랫동안 아테네의 민주정을 뒤엎으려 했던 귀족 세력은 과두정치 수립을 위한 음모를 꾸미고 공개적으로 정부 변화를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계획에는 민주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던 알키비아데스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과두정치 세력은 사모스에서 먼저 계획을 실행에 옮겼고, 현지의 과두파 세력을 부추겨 비슷한 음모를 꾸미도록 유도했다.[8]
트라쉬불로스가 이 음모에 얼마나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도널드 케이건은 트라쉬불로스가 초기에 음모에 가담하여 온건한 과두정치를 지지하려 했으나, 음모 주도 세력의 극단적인 행동에 실망하여 돌아섰다고 주장한다.[9] 반면 R. J. 벅은 트라쉬불로스가 음모가 시작될 당시 사모스에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관련이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10]
아테네에서는 과두파의 음모가 성공하여 민주정이 무너지고 400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과두정권(400인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사모스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사모스의 민주주의자들은 음모를 미리 알아채고 네 명의 주요 아테네인, 즉 장군 레온과 디오메돈, 트라쉬불로스, 그리고 당시 호플리테스였던 트라실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들의 지원과 아테네 군인 및 선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사모스 민주파는 과두파의 쿠데타 시도를 막아낼 수 있었다.[8]
사모스의 민주파는 이 승리 소식을 알리기 위해 아테네로 배를 보냈지만, 도착하자마자 승무원들은 체포되었다. 새로운 과두정권에게 민주주의의 승리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사모스의 아테네 군대는 기존 장군들을 해임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가 더 확고한 인물들로 새로운 장군들을 선출했는데, 트라쉬불로스와 트라실로스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군대는 "도시(아테네)가 우리에게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선언하며,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계속하는 동시에 민주정을 수호하기로 결의했다.[11]
장군이 된 트라쉬불로스가 가장 먼저 추진한 일 중 하나는 알키비아데스의 소환이었다. 이는 쿠데타 이전부터 그가 지지해 온 정책이었다. 트라쉬불로스는 선원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계획에 대한 지지를 얻어낸 후, 직접 항해하여 알키비아데스를 데리고 사모스로 돌아왔다. 이 정책의 목표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원을 스파르타로부터 끊어내는 것이었다. 당시 알키비아데스가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인 티사페르네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알키비아데스는 트라쉬불로스 등과 함께 장군으로 선출되었다.[12] 이 무렵, 에우보이아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아테네의 400인 정권은 무너졌고, 이후 더 폭넓은 형태의 과두정을 거쳐 결국 민주정으로 복귀하게 되었다.[13]
4. 군사적 활약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배한 후, 친스파르타 성향의 과두정인 삼십인 정권이 들어섰다. 트라쉬불로스는 테바이로 망명해야 했다. 삼십인 정권은 공포정치를 펼치며 귀족, 부유층 등 반대 세력을 숙청했고, 아테네에 거주하던 외국인인 메토이코이의 재산을 몰수하고 처형하기도 했다.
삼십인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지자 트라쉬불로스는 민주파의 지도자로서 내전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아티카 북부의 퓔레 요새를 점령하고 과두파의 토벌군을 물리쳤다. 이후 세력을 키워 피레아스의 무니키아로 진군하여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과두파를 지원하기 위해 스파르타 군대가 도착하자 민주파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트라쉬불로스는 메토이코이와 노예들에게 시민과 동등한 세금 부담 특권(grc)을 약속하며 도움을 호소했다.
결국 내전은 스파르타 왕 파우사니아스의 중재로 마무리되었고, 아테네는 다시 민주정으로 돌아왔다. 트라쉬불로스는 특사로서 화해를 추진하는 한편, 피레아스에서 돌아온 민주파 참가자 모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려 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기원전 401년에는 엘레프시나로 도망쳤던 삼십인 정권의 잔당과도 화해를 이루었다. 그는 민주정 회복을 위해 내전에 참여했던 비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보상을 제안하여 실현시켰다.참여 시점 보상 내용 퓔레 요새 점거 초기부터 참가한 자 시민권 피레아스 무니키아 전투 참가자 시민과 동등한 세금 부담 특권 (grc) 그 이후 참가자 시민과 동등한 세금 부담 특권 (grc)
민주정이 부활한 후 트라쉬불로스는 아테네의 재건에 힘썼다. 이후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스파르타와 맞서 싸웠고, 전쟁 중 레스보스에서 전사했다.
4. 1. 키노세마 전투 (기원전 411년)
기원전 411년, 트라쉬불로스는 키노세마 전투에서 아테네 함대의 우익을 지휘했다. 그는 함대의 측면을 확장하여 스파르타 함대의 포위 기동을 저지함으로써 아테네의 패배를 막았다. 이 전투는 결국 아테네의 중요한 승리로 끝났다.[14]
4. 2. 아비도스 전투 (기원전 411년)
키노세마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트라쉬불로스는 또 다른 아테네의 승리인 아비도스 전투에서도 아테네 함대의 한 부대를 지휘했다.[15]
4. 3. 키지쿠스 전투 (기원전 410년)
트라시불로스는 기원전 410년 키지쿠스 전투에서도 아테네 함대의 일부를 지휘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 전투는 아테네의 결정적인 승리로 기록된다. 전투 당시 아테네군은 알키비아데스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를 미끼로 사용하여 스파르타 함대를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해상으로 유인했다. 스파르타 함대가 유인책에 걸려들자, 트라시불로스와 테라메네스가 지휘하는 아테네 함대의 주력 부대가 스파르타군의 후방에 나타나 퇴로를 차단했다.[16]
궁지에 몰린 스파르타군은 근처 해변으로 상륙하여 탈출을 시도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즉시 병력을 상륙시켜 버려진 스파르타 선박들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해변에는 페르시아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이들은 스파르타군을 지원하며 아테네 상륙군을 다시 바다로 몰아내려 했다. 이 위기 상황을 목격한 트라시불로스는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즉시 상륙하여 알키비아데스 부대를 지원했다. 동시에 테라메네스에게는 인근의 아테네 육군과 합류하여 해변의 아테네군을 증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러 방향에서 증원된 아테네 병력의 압도적인 공세에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연합군은 결국 패배하여 후퇴했고, 아테네군은 파괴되지 않은 모든 스파르타 선박을 나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16]
4. 4. 트라키아 원정 (기원전 409년 ~ 408년)
기원전 409년과 408년 동안 트라쉬불로스는 계속해서 아테네 함대의 지휘를 맡았으나, 이 시기 그의 구체적인 행적을 상세히 추적하기는 어렵다. 그는 주로 트라키아 지역에서 활동하며 제국을 위해 도시들을 되찾고, 해당 지역에서 아테네로 들어오는 조공(세금)의 흐름을 복원하는 데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07년, 트라쉬불로스는 포카이아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파견된 함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리산드로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함대가 노티움 전투에서 아테네 주력 함대를 격파하면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 패배는 당시 아테네의 유력자였던 알키비아데스의 정치적 몰락과 추방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트라쉬불로스 역시 이 여파로 알키비아데스에 의해 즉시 지휘관 자리에서 해임되었거나, 혹은 임기가 끝난 후 다시 선출되지 못했다. 어떤 경우든, 그는 이 시점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적인 직책에서 물러나 있었다.[17]
4. 5. 아르기누사이 전투 (기원전 406년)
기원전 407년 노티움 전투 패배 이후 지휘에서 물러났던 트라쉬불로스는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 전투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17] 이 전투에서 그는 미틸레네에 펠로폰네소스 함대에 의해 봉쇄된 제독 코논을 구출하기 위해 파견된 아테네 구원 함대의 삼단노선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아르기누사이 전투는 아테네의 중요한 승리로 끝났다.[18]
전투가 끝난 후, 지휘관들은 코논을 봉쇄하고 있던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추격하기 위해 함대의 주력을 이끌고 떠났다. 이때 트라쉬불로스와 그의 동료 삼단노선 지휘관이었던 테라메네스에게는 전투 중 침몰한 배의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임무가 맡겨졌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폭풍이 몰아치면서 구조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구조대는 육지로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적게는 1,000명에서 많게는 5,000명에 이르는 수많은 아테네 병사들이 익사하는 비극이 발생했다.[18]
이 사건은 아테네 역사상 가장 큰 정치적 스캔들 중 하나로 비화되었다. 아테네에서는 재앙의 책임을 두고 테라메네스와 전투를 지휘했던 장군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장군들은 처형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트라쉬불로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논쟁에 거의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9]
5. 삼십인 정권과 민주정 복원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 아이고스포타미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항복했다. 스파르타의 제독 리산드로스는 아테네에 친스파르타 성향의 과두정, 이른바 삼십인 정권을 세웠다.[20] 이 정권은 극단적인 통치를 펼치며 많은 시민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심지어 온건파 정치인 테라메네스마저 숙청했다. 삼십인 정권의 공포 정치 아래 아테네의 귀족, 부유층, 반대 세력뿐만 아니라 아테네에 거주하던 외국인인 메토이코이까지 탄압받았다.[20] 이러한 폭정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수많은 아테네인들이 테베 등지로 망명했다.
과두정에 초기부터 반대했던 트라쉬불로스 역시 정권 수립 직후 테베로 추방되었다.[21] 그는 테베의 지도자 이스메니아스 등의 지원을 받으며 아테네 민주정 복원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기원전 403년, 트라쉬불로스는 소수의 망명자들과 함께 아테네로 돌아와 아티카 북부의 퓔레 요새를 점거하며 민주파 봉기의 시작을 알렸다. 그의 군대는 점차 세력을 불려 피레아스로 진격하여 무니키아 언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과두파 군대를 격파하고 지도자 크리티아스를 사살하는 등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22]
승리 이후 삼십인 정권의 잔당은 엘레프시나로 도주했고, 아테네의 과두파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궁지에 몰린 과두파는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강경파 리산드로스 대신 상대적으로 온건한 왕 파우사니아스를 파견했다. 파우사니아스는 군사적 개입으로 민주파를 압박하면서도, 더 이상의 혼란을 원치 않아 양측의 협상을 중재했다.[23] 이 중재 결과, 아테네에는 민주정이 복원되었고, 과두파 지지자들은 엘레우시스로 물러나는 것이 허용되었다.
권력을 되찾은 트라쉬불로스는 과두 정권의 핵심 인물 소수를 제외한 모든 관련자에게 사면을 선포하여 정치적 보복을 막고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이러한 관용적인 조치와 민주정 회복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올리브 관을 수여받았다.[21] 또한 트라쉬불로스는 민주정 복원 과정에 참여했던 비시민들에게 약속했던 보상을 이행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봉기 초기 퓔레 점령부터 참여한 이들에게는 완전한 시민권을, 피레아스 전투 참가자들에게는 시민과 동등한 세금 부담 특권(이소테레이아)을 부여할 것을 제안했으나, 시민권 부여는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했다. 기원전 401년에는 엘레프시나로 물러났던 과두파 잔당과도 최종적으로 화해를 이루었다.
이후 트라쉬불로스는 민주정이 복원된 아테네의 재건에 힘썼으며,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아테네의 장군으로 활약하며 스파르타와 싸웠다. 그는 전쟁 중 레스보스 섬에서 전사했다.
5. 1. 퓔레 점령 (기원전 403년)
기원전 404년, 아이고스포타미 전투에서 패배한 아테네는 항복하였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종결되었다. 스파르타의 해군 사령관 리산드로스는 아테네에 30인 참주로 알려진 과두 정부를 세웠다. 이 정부는 많은 시민을 처형하고 소수에게만 권리를 부여하는 등 극단적인 통치를 펼쳤으며, 온건파 과두 정치인 테라메네스마저 처형했다. 이러한 폭정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수많은 아테네인들이 테베로 망명했다.[20]트라쉬불로스는 30인 참주의 과두 정치에 초기부터 반대했던 인물 중 하나였으며, 정권이 수립되자 테베로 추방되었다.[21] 테베에서 그는 지도자 이스메니아스와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환영과 지원을 받으며 아테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기원전 403년, 트라쉬불로스는 70명의 망명자를 이끌고 아티카와 보이오티아의 경계에 위치한 요새화된 지역인 퓔레를 점령했다. 폭풍으로 인해 30인 참주 군대는 즉각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고, 그 사이 많은 망명자들이 트라쉬불로스에게 합류했다. 이후 아테네의 스파르타 수비대와 아테네 기병대가 공격해오자, 트라쉬불로스는 700명으로 늘어난 병력을 이끌고 새벽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스파르타 병사 120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를 패주시켰다.
닷새 후, 트라쉬불로스는 퓔레에 200명을 남겨두고 1,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테네의 항구인 피레우스로 향했다. 그는 피레우스를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인 무니키아 언덕을 점령하고 요새화하여 다가올 공격에 대비했다. 스파르타 수비대의 지원을 받은 30인 참주 군대가 피레우스로 진격해왔다. 트라쉬불로스의 군대는 수적으로 5대 1의 열세였지만, 유리한 지형을 점하고 있었고 과두 정부군의 혼란을 틈타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 전투에서 망명자들은 과두 정부군을 격퇴하고 30인 참주의 지도자 크리티아스를 사살하며 승리했다.[22]
이 승리 이후, 살아남은 30인 참주 세력은 엘레우시스로 도망쳤고, 아테네 내의 과두파 사이에서는 내분이 일어났다. 새로운 지도자들이 선출되었지만 트라쉬불로스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이전의 공격적인 리산드로스 대신, 상대적으로 온건한 성향의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를 파견했다. 파우사니아스의 군대는 트라쉬불로스의 군대를 상대로 힘겨운 전투 끝에 간신히 승리했지만, 더 이상의 충돌을 원치 않아 트라쉬불로스 측과 아테네의 과두 정부 세력 간의 합의를 주선했다. 이 합의를 통해 아테네에는 민주주의가 회복되었고, 엘레우시스로 물러나기를 원하는 과두파는 그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허용되었다.[23] 권력을 되찾은 트라쉬불로스는 극소수의 핵심 과두파 인물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사면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승리한 민주파가 과두파에게 가혹한 보복을 하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그의 관용적인 조치와 민주정 회복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트라쉬불로스는 동료 시민들로부터 올리브 왕관을 수여받았다.[21]
5. 2. 피레아스 전투 (기원전 403년)
기원전 404년 아이고스포타미 전투 패배 후 아테네에는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에 의해 30인 참주로 알려진 과두 정부가 들어섰다. 이 정부는 많은 시민을 처형하고 권리를 제한했으며, 온건파 테라메네스마저 처형하는 등 극단적인 통치를 펼쳤다. 이에 위협을 느낀 많은 아테네인들이 테베로 망명했다.[20]과두정에 반대했던 트라시불로스 역시 테베로 추방되었으나[21], 테베 지도자 이스메니아스 등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 복귀를 준비했다. 기원전 403년, 트라시불로스는 망명자 70명을 이끌고 아티카와 보이오티아 경계의 필레를 점령했다. 폭풍 덕분에 30인 참주 군대의 즉각적인 공격을 피했고, 그 사이 많은 망명자들이 합류했다. 이후 아테네의 스파르타 수비대와 기병대가 공격해오자, 700명으로 늘어난 트라시불로스의 군대는 기습 공격으로 스파르타군 120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를 패주시켰다.
닷새 후, 트라시불로스는 필레에 200명을 남기고 1,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테네의 항구인 피레우스로 진격했다. 그는 항구를 내려다보는 무니키아 언덕을 점령하고 요새화하여 30인 참주 군대의 공격에 대비했다. 스파르타 수비대의 지원을 받은 30인 참주 군대가 피레우스로 진격해왔다. 트라시불로스의 군대는 수적으로 5대 1의 열세였지만, 유리한 지형을 활용하고 혼란에 빠진 과두정 군대를 상대로 이점을 살렸다. 전투 결과, 트라시불로스의 망명자 군대는 과두정 군대를 격퇴하고 30인 참주의 지도자 크리티아스를 전사시켰다.[22]
이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살아남은 30인 참주 세력은 엘레우시스로 도주했고, 아테네 내부의 과두정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새로운 지도부가 선출되었지만 트라시불로스를 막지 못하고 결국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다. 스파르타는 이전과는 달리 강경파 리산드로스 대신 상대적으로 온건한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를 파견했다. 파우사니아스의 군대는 트라시불로스 군대를 상대로 힘겹게 승리했지만, 더 이상의 강경 진압을 꺼려 양측 간의 협상을 중재했다. 이 협상 결과 아테네에는 민주정이 회복되었고, 과두정 지지자 중 원하는 이들은 엘레우시스로 물러나는 것이 허용되었다.[23] 권력을 되찾은 트라시불로스는 소수의 극렬 과두파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사면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승리한 민주파의 보복을 막았다. 이러한 관용적인 조치로 그는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올리브 관을 수여받았다.[21]
6. 민주정 복원 이후
기원전 403년, 스파르타 왕 파우사니아스의 중재로 아테나이는 민주정으로 복귀했다. 트라쉬불로스는 민주정 복원 이후 주요 지도자로 부상했지만, 곧 아르키누스에게 국가 수장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는 그가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정치 활동에 대한 보수를 부활시키고, 삼십인 정권에 맞서 싸운 모든 메토이코이(외국인 거주자)와 외국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려 했다.[24]
트라쉬불로스는 특사를 통해 내전으로 분열된 아테나이의 화해를 추진했으며, 기원전 401년에는 엘레프시나로 도망쳤던 삼십인 정권의 잔당과도 화해를 이루었다. 그는 피레아스에서 함께 싸웠던 모든 이들에게 시민권을 인정하려 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내전에 참여한 비(非)시민들에게는 기여도에 따라 다음과 같은 보상을 제안하여 실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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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 |
시민과 동등한 세금 부담 특권 (이소테레이아) | |
시민과 동등한 세금 부담 특권 (이소테레이아) | |
처음에는 스파르타를 자극하지 않으려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하고 페르시아의 지원 가능성이 보이자 공세적인 외교 정책을 주장하며 다시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아테나이의 장벽 재건을 시작했으며, 네메아 전투와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나이 군을 직접 지휘했다. 그러나 두 전투에서의 패배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켰고, 크니도스 해전에서 승리하여 스파르타의 해상 제국 야망을 꺾은 코논에게 다시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었다.[24]
코논이 아테네 함대를 이끌며 승리를 거두는 동안 트라쉬불로스는 한동안 정치적 전면에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392년, 코논이 사르디스에서 페르시아 총독 티리바주스에게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뒤 키프로스에서 사망하자, 트라쉬불로스는 페르시아의 평화 제안을 거부하는 세력을 이끌며 다시 아테나이 정치의 중심에 섰다.
기원전 389년, 트라쉬불로스는 삼단 노선 함대를 이끌고 에게 해로 원정을 떠났다. 이 원정의 목적은 여러 도시에 조세를 징수하고, 스파르타에 맞서 민주정을 지키려던 로도스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잔티움을 점령하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통행세를 부과했으며, 에게 해의 여러 섬에서 조세를 징수하는 등, 과거 아테네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25] 그러나 기원전 388년, 함대를 이끌고 에게 해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 아스펜두스 인근에서 병사들이 농지를 약탈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밤중에 습격을 받아 자신의 막사에서 살해당했다.[26]
트라쉬불로스의 원정은 단기적으로 아테나이의 영향력을 크게 확장시키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는 페르시아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테네 제국의 부활을 우려한 페르시아는 스파르타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페르시아 함대가 헬레스폰트 해협에 나타나 아테나이의 곡물 수송로를 위협했다. 결국 아테나이는 기원전 392년에 거부했던 불리한 조건(안탈키다스 조약)으로 스파르타 및 페르시아와 평화를 맺게 되었다. 트라쉬불로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군사적 성과는 페르시아의 개입으로 인해 장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갔다.[27]
7. 코린토스 전쟁과 죽음
기원전 403년 민주정이 부활한 후, 트라쉬불로스는 주요하고 명망 있는 지도자가 되었지만, 곧 아르키누스에게 국가 수장의 자리를 내주었다. 트라쉬불로스는 당시 기준으로는 다소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책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치 활동에 대한 보수를 부활시키고, 삼십인 정권에 맞서 함께 싸웠던 모든 메토이코이(외국인 거주자)와 외국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자 했다. 초기에는 스파르타를 자극하지 않으려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코린토스 전쟁이 시작되고 페르시아의 지원 가능성이 열리자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하며 다시 아테나이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아테나이의 장벽 재건을 시작했으며, 네메아 전투와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나이 군대를 직접 지휘했다. 그러나 이 두 전투에서의 패배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켰고, 크니도스 해전에서 승리하여 스파르타의 해상 제국 건설 야욕을 꺾은 코논에게 다시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었다.[24]
코논이 아테나이 함대를 이끌고 연승을 거두는 동안 트라쉬불로스는 몇 년간 정치적으로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392년, 코논이 사르디스에서 열린 평화 회담에 참석했다가 페르시아 총독 티리바주스에게 투옥되고, 풀려난 뒤 아테나이로 돌아오지 못한 채 키프로스에서 사망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평화 제안을 거부하는 파벌을 이끌던 트라쉬불로스는 다시 아테나이 정치의 정점에 섰다. 기원전 389년, 그는 삼단 노선 함대를 이끌고 에게 해 주변 도시들로부터 조세를 징수하고, 스파르타에 맞서 민주 정부를 지키려 애쓰던 로도스를 지원하는 원정에 나섰다. 이 원정을 통해 트라쉬불로스는 비잔티움을 점령하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통행세를 부과했으며, 에게 해의 여러 섬들로부터 조세를 걷는 등, 과거 기원전 5세기 아테나이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25] 기원전 388년, 함대를 이끌고 에게 해 남쪽으로 항해하던 중, 그의 군대가 아스펜두스의 농경지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아스펜두스 주민들은 밤에 아테나이 진영을 기습했고, 트라쉬불로스는 자신의 막사에서 살해당했다.[26]
그러나 트라쉬불로스가 이 원정에서 거둔 성과는 페르시아의 개입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5세기에 에게 해에서 몰아냈던 아테나이 제국과 유사한 세력이 다시 등장하자 위협을 느낀 페르시아는 스파르타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페르시아 함대가 헬레스폰트에 나타나 아테나이의 곡물 수송로를 위협했다. 결국 아테나이는 기원전 392년에 거부했던 것과 동일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트라쉬불로스의 마지막 원정은 아테나이의 영향력을 일시적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했지만, 페르시아의 견제로 인해 장기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27]
8. 평가
트라쉬불로스는 성공적인 군사 지휘관이자 아테네 민주주의의 확고한 수호자로 높이 평가받는다.[28][29][30] 특히 30인 참주의 폭정에 맞서 민주정을 회복시킨 그의 역할은 고대 역사가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나 후대의 파우사니아스 등에 의해 크게 찬사를 받았다.[21][32] 또한, 정권 탈환 후 보여준 관용은 아테네의 정치적 안정에 기여한 중요 요인으로 꼽힌다.[31]
그러나 동시에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변화된 시대 상황 속에서도 과거의 제국주의적 영광을 고수하려 했다는 점에서 현대 역사가들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33][34] 그의 능력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알키비아데스와 같이 더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들의 그늘에 가려지기도 했다.
8. 1. 긍정적 평가
트라쉬불로스는 성공적인 군사 지휘관으로 널리 인정받는다. 대부분의 고대 역사가들은 기원전 411년 아테네의 주요 승리들의 공을 알키비아데스에게 돌렸지만,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와 같은 일부는 이러한 전투에서 트라쉬불로스가 수행한 결정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도널드 케이건과 R. J. 벅과 같은 현대 역사가들도 이러한 분석을 지지하며, 여러 전투에서 아테네 전략 수립에 기여한 트라쉬불로스의 역할, 특히 키지쿠스 전투에서 그의 결정적인 행동이 알키비아데스 군대의 패배를 막고 아테네의 잠재적 패배를 놀라운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을 지적한다.[28][29] R. J. 벅은 트라쉬불로스가 "고대 역사 기술의 반(反)민주주의 전통"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작가들이 민주주의의 강력한 옹호자였던 그의 업적을 축소했다고 주장했다.[30]그는 활동 기간 내내 아테네 민주주의를 반대 세력으로부터 지켜냈다. 기원전 411년, 사모스인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신뢰했던 소수의 저명한 시민 중 한 명이었으며, 400인 정권과의 갈등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함대를 이끌도록 선택되었다. 이후 30인 참주에 맞서 싸울 때, 그는 다른 이들이 주저할 때 자신의 목숨을 걸고 행동했으며, 그의 이러한 행동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신속한 회복에 크게 기여했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는 다음과 같이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이 가장 고귀한 행동은 전적으로 트라쉬불로스의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이 임명한 30인 참주가 아테네를 노예 상태로 억압하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많은 시민들을 추방하거나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나누어 가졌을 때, 그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 사람이었다."[21]
역사가 존 파인은 트라쉬불로스와 다른 민주주의자들이 30인 참주를 몰아낸 후 보여준 관용이 아테네에 안정적인 정부를 재건하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 그리스 세계의 많은 도시 국가들이 내전과 보복의 악순환에 빠졌던 반면, 아테네는 기원전 3세기 말까지 중단 없이 통일되고 민주적인 상태를 유지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정복이나 혁명으로 중단되기는 했지만 로마 시대까지 민주주의의 명맥을 이어갔다.[31]
2세기 로마 시대의 여행 작가인 파우사니아스는 트라쉬불로스를 30인 참주 타도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업적들을 근거로 "모든 유명한 아테네인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하며, 심지어 페리클레스보다 더 위대하다고 평가했다.[32]
이처럼 트라쉬불로스는 아테네의 애국자이자 원칙을 지키는 민주주의자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4세기의 아테네가 제국주의 정책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현대 역사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한다.[33] R. J. 벅은 민주주의와 페리클레스 치하의 제국이 절정에 달했던 격동의 시대에 성장한 트라쉬불로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겪은 파괴적인 손실로 인해 그 시대의 회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34]
트라쉬불로스는 유능한 장군이었고, 특히 해상전에서 성공적이었으며, 유능한 연설가였지만, 더 카리스마적이거나 눈부신 성공을 거둔 지도자들에게 자주 가려지거나 밀려났다. 벅은 그를 역사의 흐름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선 후에도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켰고, 조국의 암울한 시기에 명성을 떨쳤던 또 다른 제국주의 정책 옹호자인 윈스턴 처칠과 비교했다. 20년의 두드러진 활동 기간 동안, 지도자이든 아니든, 트라쉬불로스는 전통적인 아테네 제국 민주주의의 꾸준한 옹호자로 남았고, 411년에 처음 등장했을 때 옹호했던 바로 그 대의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8. 2. 부정적 평가
트라쉬불로스는 아테네의 애국자이자 원칙 있는 민주주의자로 칭찬을 받았지만, 현대 역사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한다. 특히 기원전 4세기 아테네가 더 이상 제국주의 정책을 유지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된다.[33] 역사가 R. J. 벅은 민주주의와 페리클레스 치하 제국의 절정기에 성장한 트라쉬불로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파괴적인 패배로 인해 과거 제국의 영광을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34]트라쉬불로스는 유능한 장군이었고, 특히 해상전에서 뛰어났으며, 유능한 연설가였지만, 더 카리스마 넘치거나 화려한 성공을 거둔 지도자들에게 자주 가려지거나 밀려났다는 평가도 있다.
8. 3. 종합적 평가
트라쉬불로스는 성공적인 군 지휘관으로 널리 인정받는다. 대부분의 주요 고대 역사가들은 기원전 411년 아테네의 극적인 승리에 대한 공로를 알키비아데스에게 돌렸지만,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전투에서 트라쉬불로스가 수행한 결정적인 역할을 지적했다. 도널드 케이건과 R. J. 벅과 같은 최근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분석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여러 전투에서 아테네의 전략 수립에 트라쉬불로스가 기여한 역할, 특히 키지쿠스에서 그가 취한 결정적인 행동이 알키비아데스 군대의 패배를 막고 아테네의 잠재적인 패배를 놀라운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을 강조한다.[28][29] R. J. 벅은 트라쉬불로스가 "고대 역사 기술의 반 민주주의 전통"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작가들이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 중 한 명이었던 그의 업적을 축소했다고 주장한다.[30]트라쉬불로스는 경력 내내 아테네 민주주의를 반대 세력으로부터 지켰다. 그는 사모스인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신뢰했던 인물이었으며, 기원전 411년 400인 정권과의 갈등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함대를 이끌도록 선택된 몇 안 되는 저명한 시민 중 한 명이었다. 이후 30인 참주에 반대하면서, 트라쉬불로스는 다른 이들이 주저할 때 자신의 목숨을 걸고 행동했으며, 그의 행동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신속한 회복에 크게 기여했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가장 고귀한 행동은 전적으로 트라쉬불로스의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이 임명한 30인 참주가 아테네를 노예 상태로 억압하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많은 시민들을 추방하거나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나누어 가졌을 때, 그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 사람이었다.[21]
존 파인은 트라쉬불로스와 다른 민주주의자들이 30인 참주를 몰아낸 후 보여준 관용이 아테네에 안정적인 정부를 재건하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고 지적한다. 그리스 세계의 많은 도시 국가들이 내전과 보복의 악순환에 빠진 반면, 아테네는 기원전 3세기 말까지 중단 없이 통일되고 민주적인 상태를 유지했으며, 여러 차례 정복이나 혁명으로 중단되기는 했지만 수 세기 후 로마 시대까지 민주주의가 지속되었다.[31]
2세기의 여행 작가인 파우사니아스는 트라쉬불로스를 30인 참주 타도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업적들을 이유로 "모든 유명한 아테네인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하며, 심지어 페리클레스보다 더 위대하다고 여겼음을 분명히 했다.[32]
이처럼 트라쉬불로스는 아테네의 애국자이자 원칙 있는 민주주의자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그는 기원전 4세기 아테네가 더 이상 과거의 제국주의 정책을 유지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현대 역사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한다.[33] R. J. 벅은 민주주의와 페리클레스 시대 제국의 전성기에 성장한 트라쉬불로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겪은 파괴적인 손실로 인해 그 시대로의 회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34]
트라쉬불로스는 유능한 장군이었고, 특히 해상전에서 성공적이었으며, 유능한 연설가였지만, 더 카리스마적이거나 눈부신 성공을 거둔 지도자들에게 자주 가려지거나 밀려났다. 벅은 그를 역사의 흐름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선 후에도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켰고, 조국의 암울한 시기에 명성을 떨쳤던 또 다른 제국주의 정책 옹호자인 윈스턴 처칠과 비교했다. 20년간의 두드러진 활동 기간 동안, 지도자로서든 아니든, 트라쉬불로스는 전통적인 아테네 제국 민주주의의 꾸준한 옹호자로 남았고, 411년에 처음 등장했을 때 옹호했던 바로 그 대의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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