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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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6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 수학자, 종교 지도자이며, 피타고라스 학파의 창시자이다. 그의 생애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지만, 이오니아 지방의 사모스 섬에서 태어나 이집트, 바빌론 등지를 여행하며 지식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수비학, 음악,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만물의 근원을 수로 파악하는 독특한 철학을 제시했다. 피타고라스는 영혼의 윤회를 믿고 채식을 옹호했으며, 그의 학파는 엄격한 규율과 비밀주의를 유지했다. 피타고라스 정리는 그의 업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플라톤을 비롯한 후대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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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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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피타고라스 |
로마자 표기 | Pytagoras |
한자 표기 | 피타고라스 (彼得哥拉斯) |
출생 | 기원전 570년경, 사모스 |
사망 | 기원전 495년경 (75세), 크로토네 또는 메타폰툼 |
국적 | 고대 그리스 |
철학적 배경 | |
시대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 |
지역 | 서양 철학 |
학파 | 피타고라스 학파 |
관심 분야 | |
주요 관심사 | 윤리학 수학 형이상학 음악 이론 신비주의 정치학 종교 |
주요 사상 | 공동체주의 윤회 천구의 음악 귀속 아이디어: 5개의 기후대 5개의 정다면체 비율 피타고라스 정리 피타고라스 음률 지구 구체설 채식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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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기 자료
피타고라스의 생애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매우 드물며, 대부분 후대의 기록에 의존하고 신뢰성이 낮아 그의 삶은 어렴풋한 윤곽만 파악할 수 있다. 당대 작가들이 남긴 자료가 부족했고, 피타고라스 학파(피타고리안)를 둘러싼 비밀주의 때문에 허구적인 이야기가 사실처럼 전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허구적인 구전들은 피타고라스에 관한 상세한 자료를 남긴 신플라톤주의 작가들을 통해 주로 전해졌는데, 이들은 신과 관련된 이야기나 신성의 증거로 여겨지는 내용까지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51] 이로 인해 아폴론이 그의 아버지라거나, 피타고라스가 초인적인 총명함을 가졌고 넓적다리가 황금으로 되어 있었다거나, 아바리스가 황금 화살을 타고 그에게 날아왔다거나, 동시에 여러 장소에 나타났다는 등 많은 신화가 생겨났다.
피타고라스의 생애 연구는 주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포르피리오스, 이암블리쿠스가 남긴 후대의 자료에 의존하게 된다. 이들 외에도 크세노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헤로도토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소크라테스 등의 초기 언급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타고라스 학파에 관해 독립적인 저술을 남겼으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52][1] 대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디케아르코스, 아리스토크세노스, 헤라클리데스 폰티코스 등이 같은 주제로 글을 남겼다. 이들의 저술은 비교적 전설이나 개인적인 의견이 덜 포함되어 있어, 포르피리오스와 이암블리코스가 활용한 가장 신뢰할 만한 출처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은 가능한 진술만을 고려하려 하지만, 모든 있을 법한 이야기를 사실로 가정하면 피타고라스의 활동 영역이 극도로 방대해지는 문제가 있다.
피타고라스 본인의 저술은 남아있지 않으며, 그의 삶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피타고라스의 삶에 대한 초기 자료들은 간결하고 모호하며, 종종 풍자적이다. 가장 초기의 자료 중 하나는 그의 동시대인인 그리스 철학자 콜로폰의 크세노파네스(기원전 570년경-478년경)가 쓴 풍자시로 추정된다. 이 시에서 크세노파네스는 피타고라스가 매 맞는 개의 울음소리에서 죽은 친구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개를 때리지 말라고 중재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크로톤의 알크마이온(기원전 450년경 활동)은 피타고라스와 같은 시기 크로톤에 살았던 의사로, 자신의 저술에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을 다수 포함시켜 그를 개인적으로 알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00년경 활동)는 피타고라스를 "므네사르쿠스의 아들 피타고라스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탐구를 실천했고, 이 글들에서 골라 스스로 지혜를 만들어냈다. - 많은 학습, 교활한 악행"이라고 비판하며 교활한 사기꾼으로 조롱했다.
반면, 그리스 시인 키오스의 이온(기원전 480년경-421년경)과 아크라가스의 엠페도클레스(기원전 493년경-432년경)는 자신들의 시에서 피타고라스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역사가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기원전 484년경-420년경)는 피타고라스를 가장 위대한 그리스 교사 중 한 명으로 묘사하며, 그가 추종자들에게 불멸을 얻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다만 헤로도토스 기록의 정확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 철학자 크로톤의 필롤라우스(기원전 470년경-385년경)에게 귀속된 글들은 후대에 피타고라스의 것으로 여겨진 수리론과 음악 이론을 설명하는 가장 초기 텍스트이다. 고대 아테네의 수사학자 이소크라테스(기원전 436년경-338년경)는 피타고라스가 이집트를 방문했다고 기록한 최초의 인물이다.
피타고라스 생애에 대한 주요 자료 대부분은 로마 시대에 작성되었다. 이 시기에는 이미 피타고라스 학파의 역사가 희미해져 재구성하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독일의 고전학자 발터 부르케르트는 지적한다. 후기 고대 시대에 작성된 피타고라스의 고대 전기 세 편이 현존하는데, 모두 신화와 전설로 가득 차 있다. 이 중 가장 오래되고 존경받는 것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견해》에 포함된 내용이다. 이후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포르피리오스와 이암블리코스가 쓴 두 전기는 부분적으로 기독교의 부상에 대응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후대 자료들은 초기 자료보다 훨씬 길고 피타고라스의 업적을 더욱 환상적으로 묘사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제자들의 소실된 저술 내용을 인용하고 있어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기도 하다.
피타고라스가 조직한 교단은 비밀주의를 엄격히 지켜 내부 정보를 외부로 누설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위반자는 처벌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교단 내부의 연구 기록이나 피타고라스 본인의 저작물은 후세에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피타고라스 개인의 언행이나 인물상은 교단 궤멸 후 흩어진 제자들의 저작, 후대의 전기, 수학 관련 서적의 주석 등 간접적인 정보를 통해 재구성될 뿐이다. 그의 초상이나 조각상 역시 모두 후대의 전언과 상상에 기반한 것이며, 실제 모습은 알 수 없다.
3. 생애
피타고라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사실이 매우 드물다. 그의 삶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후대에 기록된 것이며 신뢰하기 어렵고, 종종 신화적인 이야기가 섞여 있어[51] 어렴풋한 윤곽 정도만 파악할 수 있다. 특히 피타고라스 학파의 비밀주의 때문에 그의 가르침이나 행적에 대한 당대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후대의 신플라톤주의 작가들이 남긴 기록들은 신격화된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었다.[51] 따라서 그의 생애 연구는 주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포르피리오스, 이암블리코스 등의 후대 기록에 의존하게 된다.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6세기 중엽, 에게 해 동부의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므네사르코스로, 티레 출신의 보석 세공사 또는 상인이었다고 전해진다.[45][46] 그의 어머니 피타이스는 사모스 출신이었다.[3] 피타고라스는 어려서부터 리라 연주, 그림, 운동 등 좋은 교육을 받았다.
젊은 시절 그는 지식을 얻기 위해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밀레토스의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스승 탈레스의 권유로 이집트로 유학하여 기하학, 천문학, 종교적 밀의 등을 배웠다고 한다. 이후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으로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 약 12년 동안 머물며 그곳의 학자들에게 지식을 전수받았다고도 전해진다. 이러한 유학 이야기는 후대에 덧붙여진 전설적인 요소가 많을 수 있다.
약 60세가 되었을 무렵 고향 사모스로 돌아왔으나, 당시 사모스는 참주 폴리크라테스의 독재 하에 있었다. 학문 연구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 때문에 기원전 532년경 피타고라스는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 도시인 크로토네로 이주했다.
크로토네에서 그는 피타고라스 학파를 설립하여 많은 제자를 모으고 철학, 수학, 종교 등을 가르쳤다. 학파는 엄격한 규율과 공동생활을 특징으로 했으며, 점차 정치적인 영향력도 키워나갔다. 학파 출신들이 크로토네를 비롯한 주변 도시의 중요 직책을 맡게 되면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학파의 엘리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성향, 그리고 비밀주의는 일부 시민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기원전 510년경 크로토네가 이웃 도시 시바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 반감을 품은 세력(일부 기록에서는 학파 가입을 거절당한 킬론이 주도했다고 함)이 학파의 모임 장소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많은 학파 구성원들을 살해했다. 이 혼란 속에서 피타고라스는 크로토네를 탈출하여 메타폰툼으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단식 중 사망, 추격자들에게 살해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피타고라스 자신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제자들을 통해 계승되고 발전되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그의 사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으며, 때로는 종교 단체로 여겨지기도 했다. 오늘날 피타고라스와 관련된 많은 일화와 전설은 그의 사후 제자들이나 후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 1. 이집트 및 외국 유학설
피타고라스의 생애에 관한 정확한 사실은 드물고 대부분의 정보가 후대의 것이라 신뢰하기 어려우며, 종종 신화적인 요소가 섞여 있어[51] 그의 삶은 어렴풋한 윤곽 정도만 알 수 있다.[51]
전통적으로 피타고라스는 근동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다고 여겨지며, 특히 이집트에서 공부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 기원전 4세기 이소크라테스 시대에는 피타고라스가 이집트에서 유학했다는 이야기가 이미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피타고라스는 밀레토스의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아래에서 공부하였고, 스승 탈레스의 주선을 받아 이집트로 유학을 떠나 23년 동안 나일강 연안의 여러 신전을 다니며 멤피스의 사제들에게서 기하학과 천문학 등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헬레니즘 시대의 작가 안티폰은 피타고라스가 파라오 아마시스 2세로부터 직접 이집트어를 배웠고, 디오스폴리스 (테베)에서 이집트 사제들과 함께 공부했으며, 그들의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유일한 외국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중기 플라톤주의 작가 플루타르코스는 피타고라스가 이집트 방문 중에 이집트 사제 헬리오폴리스의 오에누피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기록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피타고라스가 이집트의 수석 예언자 손키스의 제자였다고 언급했다. 일부 고대 작가들은 피타고라스가 기하학과 영혼 윤회 교리를 이집트인들에게서 배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고대 작가들은 피타고라스가 이집트 외 다른 지역에서도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페르시아의 마기 또는 조로아스터에게서 배웠다는 설, 페니키아인들에게 산술을, 칼데아인들(혹은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사와 서기들)에게 천문학을 배웠다는 설이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피타고라스가 나중에 크레테를 방문하여 에피메니데스와 함께 이다 동굴로 갔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3세기까지는 유대인들에게서도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나타났으며, 3세기 궤변가 필로스트라투스는 인도의 현자 또는 짐노소피스트에게서도 공부했다고 주장했다. 이암블리코스는 이 목록을 더욱 확장하여 피타고라스가 켈트족과 이베리아인들과도 함께 공부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다양한 유학설과는 대조적으로, 기원전 2세기의 소설가 안토니우스 디오게네스는 피타고라스가 꿈 해석을 통해 모든 교리를 스스로 발견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3. 2. 그리스 스승
고대 자료에는 피타고라스가 다양한 그리스 출신 사상가들에게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부는 사모스의 헤르모다마스를 스승으로 지목한다.[5] 헤르모다마스는 사모스 출신의 랩소디 전통을 대표했으며, 그의 아버지 크레오필로스는 그의 경쟁 시인 호메로스의 손님이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사람들은 프리에네의 비아스, 탈레스 또는 아낙시만드로스 (탈레스의 제자)를 스승으로 꼽는다. 기원전 520년 이전에, 피타고라스는 그보다 약 54세 연상인 밀레토스의 탈레스를 만났을 수도 있다. 탈레스는 철학자, 과학자, 수학자, 기술자였다.
다른 전통에서는 신화 속 음유 시인 오르페우스를 피타고라스의 스승으로 칭하며, 이는 오르페우스교 신비주의를 나타낸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피타고라스가 도리아 방언으로 신들에 관해 쓴 "성스러운 담론"에 대해 기록했는데, 그들은 이 담론이 피타고라스가 레이베트라에서 오르페우스교 신비주의에 입문할 때 오르페우스교 사제 아글라오파무스에 의해 피타고라스에게 받아쓰게 한 것이라고 믿었다. 이암블리코스는 오르페우스를 피타고라스의 언어 사용 방식, 그의 영적 태도, 그리고 그의 숭배 방식의 모델로 꼽았다. 이암블리코스는 피타고라스주의를 피타고라스가 오르페우스, 이집트 사제, 엘레우시스 신비주의, 그리고 다른 종교적, 철학적 전통에서 배운 모든 것의 종합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허구적임에도 불구하고,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이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을 주목할 만한 정도로 받았다고 여겨진다.
피타고라스를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다양한 그리스 현자 중에서는 시로스의 페레키데스가 가장 자주 언급된다.[6] 피타고라스와 페레키데스 모두에 대해 유사한 기적 이야기가 전해졌는데, 그중에는 영웅이 난파를 예언하는 이야기, 영웅이 메시나 정복을 예언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가 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지진을 예언하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아마도 기원전 2세기에 살았던 역설 기술 작가 아폴로니우스 파라독소그래푸스는 피타고라스의 기적적인 사상이 페레키데스의 영향의 결과라고 규정했다. 또 다른 이야기, 아마도 신피타고라스주의 철학자 니코마코스에게서 비롯된 이야기인데, 페레키데스가 늙어 델로스 섬에서 죽어가자 피타고라스가 그를 돌보고 존경을 표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한다. 사모스의 역사가이자 참주인 사모스의 두리스는 페레키데스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묘비명을 애국심을 갖고 자랑했는데, 그 묘비명에는 피타고라스의 지혜가 자신의 지혜를 능가한다고 적혀 있었다. 피타고라스를 페레키데스와 연결하는 이러한 모든 언급을 근거로, 페레키데스가 피타고라스의 스승이었다는 전통에 역사적 근거가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피타고라스와 페레키데스는 또한 영혼과 윤회에 대한 유사한 견해를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아리스토크세누스 (기원전 4세기)의 말을 인용하여 피타고라스가 그의 도덕 교리의 대부분을 델포이의 여사제 테미스토클레아에게서 배웠다고 진술한다. 포르피리오스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만 그 여사제를 아리스토클레아(''Aristokleia'')라고 부른다. 고대 학자들은 또한 피타고라스의 종교적이고 금욕적인 특이함과 오르페우스교 또는 크레타 신비주의의 유사성,[7] 또는 델포이 신탁 사이의 유사성을 언급한다.[8]
3. 3. 크로톤에서의 활동
기원전 532년경, 피타고라스는 사모스의 참주 폴리크라테스의 통치를 피해[9]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지였던 크로토네(오늘날의 크로토네, 칼라브리아)에 정착했다.[10] 당시 그의 나이는 약 40세였다. 그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등지에서 배운 지식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크로토네에서 피타고라스는 피타고라스 학파(또는 피타고라스 교단)를 설립하고 많은 젊은이들을 철학자와 정치가로 양성했다. 그는 뛰어난 카리스마와 웅변술을 바탕으로 빠르게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했으며, 크로토네의 엘리트 계층에게 조언자 역할을 수행했다. 후대의 기록들은 그의 연설이 사람들을 사치스러운 생활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전하기도 한다.[11]
피타고라스 학파는 종교적, 철학적 공동체이자 정치 집단의 성격을 띠었으며, 엄격한 규율과 비밀주의를 특징으로 했다. 내부 정보를 외부에 누설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학파는 점차 성장하여 수백 명의 신도를 모았고, 지역 유력자의 후원을 받으며 세력을 확장했다. 피타고라스는 제자였던 테아노와 결혼하기도 했다.[47]
학파 구성원들은 크로토네를 비롯한 여러 도시의 정치에 참여하여 주요 직책을 맡았고, 기원전 6세기 말에는 상당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학파의 배타적인 성격과 피타고라스의 보수적인 정치 성향, 그리고 사상 전파에 대한 지나친 열정은 일부 시민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바리스가 크로토네를 침공했을 때, 피타고라스 학파 출신 장군이 활약하여 오히려 시바리스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학파 가입을 거절당한 인물(혹은 입학 시험에 떨어진 학생)이 퍼뜨린 거짓 소문, 즉 피타고라스 추종자들이 전리품을 독점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학교를 습격하여 불을 질렀고, 이 과정에서 피타고라스를 보호하려던 제자 서른여덟 명이 살해되었다. 피타고라스 본인은 메타폰툼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3. 4. 가족과 친구
헤로도토스,[2] 이소크라테스, 그리고 다른 초기 작가들은 피타고라스가 므네사르쿠스(Mnesarchus)[2][2]의 아들이었고, 동부 에게 해의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한다.[2][2][2][2] 그의 어머니는 사모스 출신의 피타이스(Pythais)라고 전해진다.[3][3]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피타고라스가 "사랑의 쾌락에 빠지지 않았다"고[2] 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보다 약해지고 싶을 때"만 성관계를 가지라고 경고했다고 한다.[2] 반면, 포르피리오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테아노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크레타 출신으로 피테낙스의 딸이었다.[2] 포르피리오스는 피타고라스와 테아노 사이에 텔라우게스와 아리그노테라는 두 아들과[2] 미아라는 딸이 있었다고 기록했다.[2] 미아는 "크로톤의 처녀들 중에서, 그리고 아내가 되었을 때는 기혼 여성들 중에서 으뜸이었다"고 묘사된다.[2] 그러나 이암블리코스는 이 자녀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2] 대신 피타고라스의 할아버지 이름을 딴 므네사르쿠스라는 아들만 있었다고 주장한다.[2] 이 아들은 피타고라스가 후계자로 지명한 아리스테우스에게 양육되었고, 훗날 학파를 물려받았다고 한다.[2] 수다에서는 피타고라스에게 텔라우게스, 므네사르쿠스, 미아, 아리그노테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고 기록한다.[12]
테아노라는 이름과 관련해서는 기록이 다소 혼란스럽다. 이암블리코스는 테아노를 크로톤의 브론티누스의 아내로 언급한다.[2]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같은 이름의 테아노가 피타고라스의 제자였으며,[2] 피타고라스의 아내 테아노는 그녀의 딸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2]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테아노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들이 당시에도 존재했으며,[2] 그녀의 몇 가지 의견을 인용하기도 했지만,[2] 이 글들은 현재 위서로 여겨진다.[2]
레슬러 밀로는 피타고라스의 가까운 동료였다고 전해지며,[2] 무너지는 지붕 아래에서 피타고라스의 생명을 구했다는 일화가 있다.[2] 다만 이 연관성은 육상 코치였던 다른 피타고라스라는 인물과의 혼동일 수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2]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밀로의 아내 이름을 미아라고 기록했다.[2]
3. 5. 죽음
피타고라스 학파는 크로토네의 정치에 참여하여 점차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기원전 510년, 시바리스와의 전쟁에서 크로토네가 승리하는 데 피타고라스 학파가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쟁 승리 후, 일부 시민들이 민주주의 헌법을 제안했을 때 피타고라스 학파는 이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킬론과 니논이 이끄는 민주주의 지지자들과의 갈등이 깊어졌다. 특히 킬론은 과거 피타고라스 학파 가입을 거절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킬론과 니논의 추종자들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모임을 습격했다. 이 공격은 밀로의 집이나 다른 회합 장소에서 이루어졌으며, 건물에 불을 지르고 많은 학파 구성원들을 살해했다고 한다. 일부 기록에서는 피타고라스 학파 입학시험에서 떨어진 한 학생이 퍼뜨린 거짓 소문(승전 후 노획품을 학파가 독점했다는 내용)이 시민들의 분노를 사 학교 습격과 방화로 이어졌고, 이때 피타고라스를 보호하려던 제자 38명이 살해되었다고도 설명한다. 다만, 이러한 공격에 대한 기록들은 서로 상충하는 부분이 있으며, 후대에 일어난 반-피타고라스 학파 봉기와 혼동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피타고라스 본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1. 크로톤에서 폭도들이 집에 불을 지르자 도망쳤으나, 콩밭 가장자리에 몰려 목이 잘려 죽었다.
2. 아크라가스인과 시라쿠사인 사이의 전투에서 아크라가스 편으로 싸우다 패주했는데, 콩밭을 피하려다 시라쿠사 군에게 따라잡혀 죽었다. (헤르미포스의 설)
피타고라스가 콩을 극도로 싫어하고 학파 전체에 콩 섭취를 금지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콩이 성기나 지옥의 문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했고, 단순한 건강상의 이유(소화, 수면)나 정치적 이유(선거 제비뽑기 사용)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49] 그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 설 중 콩밭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그의 기이한 신념과 연결되어 전해진다.[49]
4. 철학
피타고라스는 우주론, 수학, 과학, 그리고 미학을 하나의 체계로 묶어, 이 세계가 단 하나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질서정연한 전체임을 입증하고자 하였다.[53] 그는 만물의 근원을 수로 보았으며, 우주의 모든 현상이 수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피타고라스 학파를 창설하여 수의 성질 연구를 통해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10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테트라크튀스를 신성한 상징으로 여겼다.
피타고라스 개인 또는 학파가 다양한 수학적 정리를 발견했다고 전해지지만, 개별 성과를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아폴로도로스의 시에는 피타고라스가 유명한 정리를 발견하고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는 구절이 있으나,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정리인지, 특히 피타고라스 정리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하며, 피타고라스 학파의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고려할 때 제물 봉헌 자체의 사실 여부도 의심스럽다.
피타고라스의 철학은 조로아스터교나 도교처럼 이원론에 기반하며, 현상 세계를 설명하는 열 쌍의 대립항을 제시했다. 또한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을 받아 윤회 사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그의 수학 및 윤회에 대한 사상은 플라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에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이원론적 대립항을 기록으로 남겼다.
4. 1. 수학 혹은 수론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이 수라고 주장했으며[53], 우주론, 수학, 과학, 그리고 미학을 하나로 묶어 세계를 단일 법칙에 지배되는 정돈된 전체로 파악하려 했다.[53] 피타고라스 학파는 무한(無限)이나 한계를 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일종의 신성한 공포를 느꼈고, 현실의 경계를 정하고 질서를 부여하며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규칙을 수에서 찾고자 했다.[53] 우주에 대한 미학적이면서도 수학적인 관점은 피타고라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평가받는다.[53]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위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학에 전념했으며, 이 학문을 처음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학문을 연구함으로써 그 원리가 모든 것의 원리라고 믿게 되었다."라고 기록했다.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학을 실용적 응용보다는 순전히 신비주의적인 이유로 사용했다.[51] 그들은 모든 것이 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52][53] 숫자 1(모나드)은 만물의 기원을,[51] 숫자 2(디아드)는 물질을 상징했다.[51] 숫자 3은 시작, 중간, 끝을 가지며 평면 삼각형을 정의하는 최소 점의 수이기에 "이상적인 수"로 여겨졌고, 신 아폴론의 상징으로 존경받았다.[52] 숫자 4는 사계절과 사원소를,[52] 숫자 7은 행성의 수이자 리라의 현의 수이며 아폴론의 탄생일(매달 7일)과 관련되어 신성시되었다.[52] 또한 홀수는 남성을, 짝수는 여성을 나타내며,[53] 숫자 5는 홀수(3)와 짝수(2)의 합이므로 결혼을 상징한다고 믿었다.[53][51]
숫자 10은 "완전한 수"로 간주되어[53][51] 피타고라스 학파는 10명 이상 모이지 않음으로써 이를 존중했다.[52] 피타고라스는 1부터 4까지의 수를 더하면 10이 되는 점들을 삼각형 모양으로 배열한 테트락티스를 고안했다고 전해진다.[51][52]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테트락티스는 최고의 신비적 중요성을 지닌 상징이었으며,[51][52][51] 이암블리쿠스에 따르면 제자들이 테트락티스를 두고 맹세할 정도로 신성하게 여겼다고 한다.[52][51][51][52]
이러한 수비학적 가르침이 피타고라스 본인의 것인지, 아니면 후기 학파 철학자인 크로톤의 필롤라오스가 발전시킨 것인지에 대해서는 현대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52] 월터 부르케르트는 피타고라스를 카리스마 있는 정치적, 종교적 스승으로 보면서도,[51] 수(數) 철학은 실제로는 필롤라오스의 혁신이라고 주장한다.[51] 부르케르트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수를 직접 다루거나 수학에 중요한 공헌을 하지 않았으며,[51] 피타고라스 학파가 실제로 행한 수학은 단순한 증명 없는 산수 수준이었지만, 이 산술적 발견들이 수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본다.[53][51]
피타고라스는 오늘날 여러 수학적 발견, 특히 피타고라스 정리로 가장 유명하지만,[51][52] 고대 역사가들은 그가 실제로 수학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53][51] 피타고라스 정리[39] 외에도 음악,[40] 천문학,[41] 의학 분야의 발견들이 그에게 귀속되기도 한다.[42] 기원전 1세기경부터 피타고라스는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정리, 즉 를 발견한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51][51] 전설에 따르면 그는 이 정리를 발견하고 신들에게 황소 100마리(백우제)를 제물로 바쳤다고 하지만,[51][53] 키케로는 피타고라스가 살생을 금했다는 점을 들어 이 이야기를 부정했고,[51] 포르피리오스는 제물로 바친 소가 반죽으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하기도 했다.[51]
피타고라스 정리 자체는 피타고라스 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바빌로니아와 인도에서 이미 알려져 사용되었다.[53][51][51][52] 피타고라스는 이 정리를 그리스에 처음 소개했을 가능성이 있다.[53][51] 일부 수학사학자들은 피타고라스나 그의 제자들이 최초로 이 정리의 증명을 제시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51] 부르케르트는 고대에 피타고라스가 어떤 정리를 증명했다고 여겨진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다.[53] 또한 바빌로니아인들이 피타고라스 수를 활용한 방식을 볼 때, 그들이 정리의 일반적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설형 문자 자료에 어떤 형태의 증명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피타고라스의 전기 작가들은 그가 5개의 정다면체와 비례 이론을 처음 발견했다고도 기록했다.[51]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6세기에 만물에 수가 내재하며, 우주는 인간의 주관이 아닌 수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숫자와 계산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사상을 확립했다. 그는 화음 구성부터 행성 궤도까지 다양한 현상 뒤에 수적 원리가 있음을 발견하고, "우주의 모든 것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선언했다. 그가 창시한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의 성질 연구를 통해 우주의 진리를 탐구했으며, 입단 시 어려운 수학 시험을 통해 자질 있는 자들만 선발하여 고대 세계의 저명한 수학 연구 기관으로 발전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다양한 수학적 정리를 발견했지만, 개별 성과가 피타고라스 본인의 것인지 다른 학파 구성원의 것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이들의 성과 대부분은 유클리드 기하학 원론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피타고라스는 수의 조화와 완전성을 중시하여 완전수와 친화수 등을 신성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지식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 학파의 일원인 히파소스가 무리수를 발견했을 때, 피타고라스 학파는 정수나 분수로 표현할 수 없는 수의 존재가 자신들의 믿음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고 여겨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학파는 무리수의 존재를 비밀에 부치려 했으나 히파소스가 이를 공표하려 하자 그를 추방하거나 바다에 던져 죽였다고 전해진다.
피타고라스의 철학은 조로아스터교나 도교처럼 이원론에 기반하며, 현상 세계를 설명하는 열 쌍의 대립항(예: 한계와 무한, 홀수와 짝수, 빛과 어둠 등)을 제시했다. 그의 수학 및 윤회 사상은 플라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이 대립항들을 언급했다. 피타고라스는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을 받아 윤회 사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4. 2. 음악 혹은 화음론
피타고라스는 음향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음악의 목적이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54], 음의 협화를 현 길이의 비례로 설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자신은 저작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이론은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을 통해 후세에 전해졌다.[54]
전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대장장이가 망치로 모루를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음정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보에티우스는 저서 『음악의 원리』에서 피타고라스가 대장간 망치 소리의 협화음을 듣고 망치 무게와 음정의 관계를 연구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네 개의 망치 무게가 12:9:8:6의 단순한 정수비를 이룰 때 협화음이 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원리가 망치의 무게에는 적용되지 않고, 악기 현의 길이나 관의 길이에 적용된다. 피타고라스는 이후 현악기나 피리 실험을 통해 현의 길이가 진동수, 즉 음정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러한 음정 법칙을 확인하기 위해 모노코드라는, 한 줄의 현과 움직이는 브릿지로 구성된 실험 도구를 발명했다고도 전해진다.
피타고라스는 주요 음계의 음정에 해당하는 수의 비율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8] 그는 옥타브를 2:1, 완전 5도를 3:2, 완전 4도를 4:3으로 정의했으며, 완전 5도와 완전 4도의 차이인 온음은 9:8로 계산했다.[48] 피타고라스 음률은 바로 이 3:2 비율의 완전 5도를 반복하여 쌓아 올려 만든 음률 체계이다.[54] 이는 중국의 삼분손익법과 동일한 원리이다. 피타고라스 콤마는 이 음률 체계에서 발생하는 이명동음 간의 미세한 음정 차이를 말한다.
피타고라스에게서 유래한 또 다른 음악 관련 믿음은 "천구의 음악" 이론이다. 이는 행성과 별들이 수학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각각의 천체가 특정 음을 내고 이것이 조화를 이루어 우주적인 교향곡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이다.[48] 포르피리오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일곱 무사가 실제로는 함께 노래하는 일곱 행성이라고 가르쳤다.
피타고라스 사후 그의 추종자들은 음악 이론 학파를 형성했지만, 피타고라스의 학설이 고대 그리스의 실제 음악 연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낮다고 여겨진다.[48]
4. 3. 미론(美論)
피타고라스는 우주론, 수학, 과학, 그리고 미학을 하나의 체계로 묶어, 이 세계가 단 하나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질서정연한 전체임을 입증하고자 하였다.[53] 그는 특히 조화를 핵심적인 가치로 여겼으며, "조화는 미덕이다. 건강과 모든 선 그리고 신성 역시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했다.[55]4. 4. 수비학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학을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신비주의적인 이유로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그들은 "모든 것의 원리가 수의 원리"라고 믿었으며[53], 우주 전체가 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53] 이러한 믿음은 현실의 경계를 정하고 질서를 부여하며,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규칙을 숫자에서 찾으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53]피타고라스 학파는 각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 숫자 1 (모나드)은 모든 것의 기원을 상징했다.
- 숫자 2 (디아드)는 물질을 나타냈다.
- 숫자 3은 시작, 중간, 끝을 가지며 평면 삼각형을 정의하는 가장 작은 점의 수이기 때문에 "이상적인 숫자"로 여겨졌고, 신 아폴론의 상징으로 존경받았다.
- 숫자 4는 사계절과 사원소를 의미했다.
- 숫자 7은 당시 알려진 행성의 수이자 리라의 현의 수였으며, 아폴론의 생일이 매달 7일에 기념되었기 때문에 신성한 숫자로 간주되었다.
- 홀수는 남성을, 짝수는 여성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 숫자 5는 홀수(남성) 3과 짝수(여성) 2의 합이므로 결혼을 상징했다.
숫자 10은 1, 2, 3, 4의 합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수로 여겨졌으며, 피타고라스 학파는 이를 존경하여 10명 이상 모이지 않았다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10개의 점을 삼각형 모양으로 배열한 테트락티스(Tetractys)를 고안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최고의 신비적 중요성을 지닌 상징이었다. 이암블리쿠스는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이 테트락티스를 두고 맹세할 정도로 이를 신성하게 여겼다고 기록했다. 현대 학자 앤드류 그레고리는 피타고라스와 테트락티스의 연관성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수비학적 가르침이 피타고라스 본인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후대의 피타고라스 학파 철학자인 크로톤의 필롤라오스가 발전시킨 것인지에 대해서는 현대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월터 부르케르트는 피타고라스를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 보면서도, 그에게 귀속된 수의 철학은 실제로는 필롤라오스의 혁신이라고 주장한다. 부르케르트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숫자를 직접 다루거나 수학에 큰 공헌을 하지 않았으며, 그가 실제로 행한 수학은 단순한 산수 수준에 머물렀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산술적 발견들이 수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피타고라스는 수의 조화와 질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 완전수와 친화수를 종교적으로 숭배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때로 비합리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학파의 일원인 히파소스가 무리수를 발견했을 때, 피타고라스 학파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발견자를 처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정수나 분수로 표현할 수 없는 수의 존재가 그들의 수 중심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위협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피타고라스의 철학은 조로아스터교나 도교처럼 이원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세상을 이해하는 열 가지 대립항(예: 한정-무한정, 홀수-짝수, 하나-여럿 등)을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에서 이 대립항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피타고라스는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을 받아 윤회 사상을 받아들였다고 여겨지며, 이러한 그의 수학 및 윤회 사상은 플라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5. 피타고라스 학파의 종교적 경향
플라톤과 이소크라테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23] 그가 크로톤에 세운 조직은 '학교'라고 불렸지만,[24] 여러 면에서 수도원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종교적 결사체였다.[25] 추종자들은 피타고라스와 서로에게 서약하고 종교적이고 금욕적인 의무를 수행하며, 그의 철학적 이론을 연구했다.[25] 이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며 외부인을 배제하고 서로에게 헌신했다.[26]
후대의 이암블리코스와 포르피리오스는 이 학파 조직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지만, 이들의 주된 관심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피타고라스를 신이 보낸 신성한 인물로 묘사하는 데 있었다.[28] 특히 이암블리코스는 '피타고라스적인 삶의 방식'을 당시 기독교 수도 공동체에 대한 이교도적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은 영혼이 신들의 삶에 참여하여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초기 피타고라스 학파 내에는 '마테마티코이'(μαθηματικοί|mathematikoigrc, "학습자")와 '아쿠스마티코이'(ἀκουσματικοί|akousmatikoigrc, "청취자")라는 두 그룹이 존재했다. '아쿠스마티코이'는 전통적으로 신비주의, 수비학, 종교적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로 여겨지며, '마테마티코이'는 보다 지적이고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분파로 간주된다. 그러나 두 그룹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없었을 수 있으며, 많은 학파 구성원들이 두 접근 방식을 병행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수학 및 음악 연구는 아폴론 숭배와 관련되었을 수 있다.[29] 피타고라스 학파는 음악이 영혼을 정화한다고 믿었으며, 육체 운동과 묵상 역시 이들의 종교적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5. 1. 채식 및 금욕주의
피타고라스 종교의 주요 교리는 영혼의 윤회를 믿는 것과 콩을 먹는 것을 죄악시하는 것이었다. 이 종교는 한때 국가의 관리권을 획득하고 성인들의 규칙을 세웠으나, 갱생되지 못한 사람들이 콩을 동경하여 반역을 저질렀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플라톤과 이소크라테스는 피타고라스가 무엇보다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고 말한다.[23] 그가 크로톤에 세운 조직은 "학교"라고 불렸지만,[24] 여러 면에서 수도원과 유사했다.[25] 추종자들은 피타고라스와 서로에게 서약하여 종교적이고 금욕적인 의무를 수행하고 피타고라스의 종교적, 철학적 이론을 연구했다.[25] 이 종파의 구성원들은 모든 재산을 공동 소유로 했으며[26] 외부인들을 배제하고 서로에게 헌신했다.[26] 고대 자료에는 피타고라스 학파가 스파르타인들처럼 공동으로 식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27] 피타고라스 학파의 격언 중 하나는 κοινὰ τὰ φίλων|koinà tà phílōngrc("친구들 사이에는 모든 것을 공유한다")이었다.[26]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은 영혼이 신들의 삶에 참여하여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가르침은 "상징"(symbola)으로 알려졌으며,[30] 구성원들은 비회원에게 이러한 상징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침묵의 맹세를 했다.[30] 공동체의 법을 따르지 않는 자는 추방되었으며,[30] 남은 구성원들은 마치 그들이 죽은 것처럼 그들을 위한 묘비를 세웠다.[30] 피타고라스에게서 비롯된 여러 "구술 어록"(akoúsmata)이 남아 있는데,[30] 피타고라스 학파의 구성원이 어떻게 희생을 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신들을 존경해야 하는지, 어떻게 "여기에서 움직여야" 하는지, 어떻게 매장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30] 이러한 어록 중 많은 부분이 의례적 순수성의 중요성과 부정함을 피하는 것을 강조한다.[30] 예를 들어, 레오니트 즈무드가 피타고라스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 내린 어록은 그의 추종자들이 모직 의복을 입는 것을 금지한다.[30] 다른 현존하는 구술 어록은 피타고라스 학파가 빵을 부수거나, 칼로 불을 쑤시거나, 부스러기를 줍는 것을 금지하고[30] 사람이 항상 왼쪽보다 오른발 샌들을 먼저 신어야 한다고 가르친다.[30] 그러나 이러한 어록의 정확한 의미는 종종 불분명하다.[30] 이암블리코스는 이 어록 중 몇 가지에 대한 원래의 의례적 의도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묘사로 보존하고 있지만,[30] 이는 겉보기에 나중에는 유행을 타지 못했는데, 이는 포르피리오스가 이들에 대한 뚜렷이 다른 윤리-철학적 해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30]
피타고라스 종교결사의 구체적인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 콩을 멀리할 것
- 떨어진 것을 줍지 말 것
- 흰 수탉을 만지지 말 것
- 빵을 뜯지 말 것
- 빗장을 넣지 말 것
- 철로 물을 젓지 말 것
- 빵을 덩어리 째로 뜯어 먹지 말 것
- 화환의 꽃을 뜯지 말 것
- 말 위에 앉지 말 것
- 심장을 먹지 말 것
- 공로를 다니지 말 것
- 제비로 하여금 사람의 지붕을 나누어 쓰지 못하게 할 것
- 냄비를 불에서 꺼냈을 때, 재 속에 냄비 자리를 남겨 두지 말고 그 자리를 저어서 없앨 것
- 불빛 곁에서 거울을 보지 말 것
- 침상에서 일어날 때는 침구를 말고, 주름을 펴 잠자리의 흔적을 남기지 말 것
피타고라스 어록 | 아리스토텔레스/이암블리코스에 따른 원래 의례적 목적 | 포르피리오스의 철학적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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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가지 마십시오."[30] | "부정한 것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30] | "이것으로 그는 대중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금지했고, 소수와 교육받은 자들의 의견을 따르도록 했습니다."[30] |
"그리고 반지 위에 신들의 형상을 착용하지 마십시오"[30] | "그것들을 착용함으로써 더럽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30] | "사람들은 신들의 가르침과 지식을 즉시 손에 넣고 모든 사람에게 보이게 해서는 안 되며, 대중에게 전달해서도 안 됩니다."[30] |
"그리고 마시는 컵의 손잡이(귀)에서 신들에게 술을 부으십시오"[30] | "신성한 것과 인간적인 것을 엄격하게 분리하려는 노력"[30] | "그에 따라 그는 수수께끼처럼 신들은 음악으로 존경하고 찬양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귀를 통과하기 때문입니다."[30] |
피타고라스 학파는 음악이 육체의 정화와 마찬가지로 영혼의 정화라고 믿었다.[29] 피타고라스에 대한 일화 중에는 그가 한 덕 있는 여성의 집에 침입하려는 술 취한 젊은이들을 만났을 때, 긴 장단격을 가진 엄숙한 곡을 불렀고 소년들의 "맹렬한 고집"이 진정되었다고 한다.[29] 피타고라스 학파는 또한 육체 운동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는데,[29] 치료적인 무용, 매일 아침 경치 좋은 길을 따라 걷기, 그리고 육상 경기는 피타고라스적인 삶의 주요 요소였다.[29] 또한 매일 아침과 저녁에 묵상하는 시간을 갖도록 권장했다.[29]
피타고라스 학파는 또한 여러 식단 금지를 수반했다.[31] 피타고라스는 잠두와 생선, 가금류와 같이 희생물로 바쳐지지 않는 동물의 고기 섭취를 금지했다는 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31] 그러나 이 두 가지 추정은 모두 반박되었다.[32] 피타고라스 학파의 식단 제한은 윤회 교리에 대한 믿음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었을 수 있다.[31] 일부 고대 작가들은 피타고라스를 엄격한 채식주의 식단을 시행하는 사람으로 제시한다.[31]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는 아르키타스의 제자인데, "피타고라스는 매우 순수하여 살인과 살인자를 피했기 때문에 동물성 식품을 삼갔을 뿐만 아니라 요리사와 사냥꾼으로부터도 거리를 두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33] 다른 권위자들은 이 진술에 반박한다.[34] 아리스토크세노스에 따르면,[35] 피타고라스는 쟁기질에 사용된 황소와 수양의 고기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동물성 식품의 사용을 허용했다.[36] 헤라클레이데스 폰티쿠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희생된 동물의 고기를 먹었고[36] 육류에 의존하는 운동선수들을 위한 식단을 확립했다.[36]
분명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피타고라스는 콩을 몹시 싫어했다. 그 때문에 피타고라스 학파는 콩을 먹지 않는 규칙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했다. 이 기이한 습성은 미신이 많았던 당시에도 이상하게 여겨졌으며, 그 이유에 대한 여러 추측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콩은 성기에 닮았거나, 지옥의 문에 닮았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또한 "먹지 않는 편이 위장에 좋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단순한 건강상의 이유라고도 하며, 게다가 "선거 때 제비뽑기에 사용되기 때문이다"라는 정치적 이유였다고도 한다.[49]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철학가 열전》에서 피타고라스의 최후에 관한 4가지 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그는 콩밭을 지나 도망가는 것보다, 추격자에게 붙잡혀 죽는 것을 선택했다.[49]
5. 2. 영혼의 윤회사상
피타고라스의 주요 가르침 중 하나는 모든 영혼이 불멸하며, 죽음 후에 영혼이 새로운 몸으로 옮겨간다는 믿음인 ''윤회''였던 것으로 보인다.[14][15] 피타고라스에 따르면 혼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불멸하는 실체이며, 몸이 소멸할 때마다 다른 동물의 몸속으로 들어간다고 보았다. 이를 혼의 전이설이라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크세노파네스, 키오스의 이온, 헤로도토스에 의해서도 언급된다.[14] 그러나 피타고라스가 윤회가 일어난다고 믿었던 구체적인 본질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엠페도클레스는 그의 시에서 피타고라스가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헤라클레이데스 폰티쿠스의 기록을 인용하여, 피타고라스가 스스로 기억할 수 있는 네 번의 전생을 살았다고 말했다고 전한다.[15]
첫 번째 생은 헤르메스의 아들인 에탈리데스였는데, 그는 모든 과거의 환생을 기억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다음 생에는 일리아스에 잠시 언급되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유포르보스로 환생했다. 그 후에는 헤르모티무스라는 철학자가 되었으며, 아폴론 신전에서 과거 생인 유포르보스의 방패를 알아보았다고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알려진 환생은 델로스의 어부인 피루스였다. 한편, 디케아르쿠스는 피타고라스의 과거 생 중 하나가 아름다운 고급 창부였다고 보고하기도 했다.[16]
5. 3. 신비주의
피타고라스는 '''천구의 조화'''라는 신비로운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행성과 별들이 수학적 방정식에 따라 움직이며, 각각의 움직임이 음표에 해당하여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교향곡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이었다.[1] 포르피리오스는 피타고라스가 일곱 무사가 실제로는 함께 노래하는 일곱 행성이라고 가르쳤다고 전한다.[2]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로트렙티코스》에서 피타고라스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질문했을 때, 그는 '천체를 관찰하기 위해'라고 말했고, 자신은 자연의 관찰자였으며, 삶으로 넘어간 것도 이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고 기록했다.피타고라스는 점술과 예언을 행했다고 전해진다.[3] 특히 그리스 문자를 이용한 점술(아이소프세피)의 창시자로 여겨지는데,[4] 이암블리코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스키타이의 사제 아바리스에게 동물의 내장을 이용하는 점술 대신 '숫자 점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이 숫자 점술이 신들의 천상 숫자에 더 가깝고 순수하며 신성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오늘날 알려진 단순화된 형태의 '''피타고라스 수비학'''과는 구별되며, 단어의 문자 값을 수학적으로 줄여 1에서 9까지의 단일 값(pythmenes|피트메네스grc, 근[19] 또는 기저 숫자[20])을 얻는 아이소프세피 기술을 포함했다.[19][21] 이러한 수비학은 비잔틴 제국 시대에 발전했으며, 서기 2세기 영지주의자들에게서 처음 나타났다.[21] 아이소프세피는 점술 외에도 교리적 우화 해석, 의학적 진단 및 치료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었다.[21]
피타고라스 사상의 핵심에는 숫자에 대한 신비주의적 믿음이 있었다. 그는 기원전 6세기경 우주의 모든 현상이 수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숫자와 계산을 통해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화음의 원리부터 행성의 궤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현상 뒤에 수가 존재함을 깨닫고, 마침내 '''만물은 수다'''라고 선언했다. 그가 창시한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의 성질 연구를 통해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으며, 10을 완전한 수로 여겨 10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삼각형 모양의 테트라크튀스를 신성한 상징으로 삼았다.
피타고라스는 수의 조화와 질서를 절대적으로 중시하여 완전수나 친화수 등을 종교적으로 숭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때로 독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학파의 일원인 히파소스가 무리수(분수나 정수로 표현할 수 없는 수)를 발견했을 때,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로 이루어진 완벽한 세계라는 자신들의 믿음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이를 은폐하려 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학파는 이 발견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으나 히파소스가 이를 어기고 공표하려 하자, 그를 처형했거나 바다에 빠뜨려 죽게 했다고 전해진다.
피타고라스의 철학은 이원론에 기초하여 현상 세계를 열 쌍의 대립항(예: 유한/무한, 홀수/짝수, 빛/어둠 등)으로 설명하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에서 이 대립항들을 언급했다. 또한, 피타고라스는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을 받아 영혼 불멸설과 윤회 사상을 가르쳤다고 여겨지며, 이러한 사상은 후대의 플라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피타고라스는 델로스, 스파르타, 플리우스, 크레타 등 그리스 여러 지역을 방문하며 종교 지도자나 사제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22]
6.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정통 후계자를 Πυθαγόρειοι|피타고리오이grc라 부르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Πυθαγορισταί|피타고리스타이grc라고 불렀다. 피타고라스 학교 졸업생들에게는 공공 활동 참여가 권장되었다. 이 학교의 유명한 졸업생은 다음과 같다.
- 코스의 히포크라테스
- 헤라클레이데스
- 필롤라오스
- 아르키타스
- 민수그라시오스
7. 전설
피타고라스의 삶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고, 그에 대한 정보 대부분은 후대의 것이거나 신뢰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그의 실제 삶보다는 어렴풋한 윤곽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동시대 기록이 부족하고 피타고라스 학파 특유의 비밀주의 때문에, 종종 사실 대신 꾸며낸 이야기가 많아졌다. 특히 신플라톤주의 작가들이 피타고라스에 관한 상세한 자료를 남기면서, 그를 신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내용도 비판 없이 받아들여졌다.[51] 이 과정에서 많은 신화와 전설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아폴론 신이 그의 아버지라거나, 피타고라스가 초인적인 총명함을 지녔다거나, 넓적다리가 황금으로 되어 있다거나, 아바리스가 황금 화살을 타고 그에게 날아왔다거나, 동시에 여러 장소에 나타났다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정교한 성인전의 대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타고라스를 마술사나 초인적인 인물처럼 묘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남아있는 글 조각에서 피타고라스가 황금으로 된 넓적다리를 가졌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를 올림픽 경기에서 공개적으로 보여주기도 했으며, 히페르보레아의 아바리스에게 보여주며 자신이 "히페르보레아의 아폴론"임을 증명하려 했다고 한다.[37]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피타고라스가 한 번은 메타폰툼과 크로톤에서 동시에 목격되었다고 기록했다.[38]
다른 전설들도 많다. 아폴론의 사제에게 받은 마법 화살로 먼 거리를 날아다니며 의식을 치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피타고라스가 코사스 강(오늘날의 바젠토 강)을 건널 때, 강물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맞이하는 소리를 여러 사람이 들었다고도 한다. 로마 시대에는 피타고라스가 아폴론의 아들이라는 전설이 널리 퍼졌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피타고라스가 헤르메스 트리메기스투스(이집트의 신 토트와 동일시됨)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전설 속 피타고라스는 주로 흰 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색 화관을 썼으며, 트라키아식 바지를 입었다고 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피타고라스가 놀라운 자제력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묘사했다. 그는 늘 쾌활했지만, 웃음이나 농담, 쓸데없는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동물을 다루는 데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 조각에는 피타고라스가 자신을 문 독사를 거꾸로 물어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포르피리오스와 이암블리코스는 피타고라스가 한때 황소에게 파바 콩을 먹지 않도록 설득했고, 파괴적인 곰에게 다시는 살아있는 것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도록 설득했으며 곰은 그 약속을 지켰다고 보고한다.
일부 학자(리드베그)는 피타고라스 스스로 이런 전설들을 퍼뜨렸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그레고리).
피타고라스에 대한 부정적인 전설도 퍼졌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사모스의 헤르미푸스가 전한 이야기를 재전하는데, 이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한때 지하 방에 들어가 모든 사람에게 그가 지하 세계로 내려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 방에 몇 달 동안 머물렀고, 그의 어머니는 그의 부재 중에 일어난 모든 일을 비밀리에 기록했다. 그가 이 방에서 돌아온 후, 피타고라스는 그가 떠났을 때 일어났던 모든 것을 이야기하여 그가 실제로 지하 세계에 있었음을 모두에게 설득하고 그들이 그를 아내와 함께 신뢰하도록 이끌었다.
8. 피타고라스 정리
피타고라스는 오늘날 그가 발견했다고 전해지는 수학적 발견, 특히 피타고라스 정리로 가장 유명하다.[39] 그러나 고전 역사가들은 그가 실제로 수학 분야에 어떤 중요한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39]
적어도 기원전 1세기부터 피타고라스는 일반적으로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기하학의 정리인 피타고라스 정리를 발견한 인물로 여겨져 왔다. 이는 수식으로 a² + b² = c²와 같이 표현된다. 유명한 전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이 정리를 발견한 후 신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황소 한 마리, 혹은 백 마리의 소(백우)를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하지만 키케로는 피타고라스가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지했다는 믿음을 근거로 이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았다. 후대의 포르피리오스는 제물로 바친 황소가 실제 동물이 아니라 반죽으로 만든 모형이었다고 주장하며 전설을 설명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사실 피타고라스 정리는 피타고라스 시대보다 수 세기 앞서 바빌로니아인과 인도인에게 이미 알려져 있었고 실제로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피타고라스가 이 정리를 그리스 세계에 처음으로 소개했을 가능성은 있다. 일부 수학사학자들은 피타고라스나 그의 제자들이 이 정리의 최초 증명을 제시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자 발터 부르케르트(Walter Burkert)는 고대 기록 어디에도 피타고라스가 어떤 정리를 증명했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주장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더욱이, 바빌로니아인들이 피타고라스 수를 활용한 방식을 보면, 그들이 이 원리가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설형 문자 자료 속에 어떤 형태의 증명 방법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9. 후대의 영향
피타고라스 학파는 기원전 4세기 초까지 마그나 그라에키아, 플리우스, 테베 등지에 상당한 규모의 공동체를 유지하며 그 명맥을 이어갔다. 특히 피타고라스 학파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아르키타스는 타렌툼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당대 최고의 철학자 중 한 명인 플라톤과도 깊은 친분을 나누었다.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서양 철학의 거두 플라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이 피타고라스 학파의 가르침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플라톤의 중기 대화록, 특히 메논, 파이돈, 국가 등에서는 수(數)와 영혼, 우주론 등에 대한 피타고라스적 사유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후 피타고라스 학파의 가르침은 기원전 1세기경 신피타고라스 학파의 등장과 함께 다시 부활하여 고대 후기 사상계에 영향을 미쳤다. 피타고라스의 영향력은 철학뿐만 아니라 예술, 건축, 과학, 종교, 문학 등 후대 서양 문화의 다양한 영역으로 폭넓게 확장되었다.
9. 1. 예술과 건축
그리스 조각은 피상적인 외관 너머의 영원한 실재를 표현하고자 했으며, 초기 아르카익 조각은 단순한 형태로 삶을 표현했는데, 이는 가장 초기의 그리스 자연 철학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연이 이상적인 형태로 표현되며, 수학적으로 계산된 유형(εἶδος|에이도스grc)으로 표현된다고 믿었다. 건축가들은 치수를 변경하면서 수학을 통해 영속성을 전달하고자 했다. 모리스 보우라는 이러한 아이디어가 "만물은 숫자이다"라고 믿었던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기원전 6세기 동안,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 철학은 그리스 조각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스 조각가와 건축가들은 미적 완벽함 뒤에 숨겨진 수학적 관계(규범)를 찾으려 했다. 아마도 피타고라스의 아이디어를 활용하여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는 자신의 저서 ''카논''에서 아름다움이란 재료의 비례가 아니라, 부분들 간의 상호 관계 및 전체와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 건축 양식에서는 모든 요소가 수학적 관계로 계산되고 구성되었다. 리스 카펜터에 따르면 2:1의 비율은 "도리스식 양식의 생성 비율이며, 헬레니즘 시대에 일반적인 도리스식 열주는 음표의 리듬을 두드린다"고 한다.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에 따라 설계된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는 포르타 마조레 바실리카(Porta Maggiore Basilica)이다. 이 건물은 로마 황제 네로 치하에 피타고라스 학파를 위한 비밀 예배 장소로 건설된 지하 바실리카였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비밀주의 강조와 피타고라스가 사모스 섬의 동굴에 은둔했다는 전설 때문에 지하에 건설되었다고 여겨진다. 바실리카의 앱스는 동쪽에, 아트리움은 해돋이를 존중하여 서쪽에 배치되었다. 입문자들이 정화 의식을 치를 수 있는 작은 수영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입구가 있다. 건물 전체는 피타고라스 수비학에 따라 설계되었으며, 성소의 각 테이블은 7명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세 개의 통로가 하나의 제단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아폴론의 통일성에 접근하는 영혼의 세 부분을 상징한다. 앱스에는 시인 사포가 리라를 안고 레우카디아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아폴론이 그녀 아래에서 보호의 손길을 내미는 모습은 영혼의 불멸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을 상징한다. 성소 내부는 거의 완전히 흰색으로 칠해졌는데, 이는 흰색이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신성한 색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로마에 건설한 판테온 역시 피타고라스 수비학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 사원의 원형 평면, 중심축, 반구형 돔, 그리고 네 개의 추분점과의 정렬은 우주의 질서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견해를 상징한다. 돔 정상의 단일 오쿨루스는 모나드와 태양신 아폴론을 상징한다. 오쿨루스에서 뻗어 나오는 28개의 리브는 달을 상징하는데, 28은 피타고라스 달력에서 한 달의 날짜 수와 같기 때문이다. 리브 아래의 5개의 코퍼 링은 태양과 달의 결합을 나타낸다.
9. 2. 초기 기독교
초기 기독교인들 중 많은 수가 피타고라스를 깊이 존경했다. 유세비우스 (서기 약 260년 ~ 340년), 카이사레아의 주교는 그의 저서 『히에로클레스 반박』에서 피타고라스의 침묵의 규칙, 검소함, "특별한" 도덕성, 그리고 현명한 가르침을 칭찬했다. 유세비우스는 다른 저서에서 피타고라스를 모세에 비유하기도 했다. 교부인 예로니모 (서기 약 347년 ~ 420년)는 그의 서한에서 피타고라스의 지혜를 칭찬했고, 또 다른 서한에서는 피타고라스가 영혼 불멸을 믿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며, 기독교인들이 그로부터 이 교리를 물려받았다고 시사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서기 354년 ~ 430년)는 피타고라스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윤회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서도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에서 피타고라스가 자신을 "현자"가 아닌 "지혜를 사랑하는 자" 즉 ''philosophos''라고 부를 만큼 겸손했다는 사실을 칭찬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 다른 구절에서 피타고라스의 평판을 옹호하며, 피타고라스가 결코 윤회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9. 3. 근대 과학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저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 서문에서 헬리오 중심설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여러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을 언급했다. 그는 기원전 4세기에 완전한 헬리오 중심 모델을 개발했던 비(非)피타고라스 학파 천문학자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에 대한 언급은 의도적으로 생략하며, 자신의 모델이 근본적으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것이라고 설명했다.요하네스 케플러는 스스로를 피타고라스 학파라고 생각했다. 그는 '음악 우주론'이라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교리를 믿었으며, 이 교리 뒤에 숨겨진 수학적 방정식을 찾는 과정에서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을 발견했다. 케플러는 이 주제에 관한 자신의 책 제목을 피타고라스 학파의 가르침을 따라 ''세계의 조화''(Harmonices Mundi)라고 지었다. 책의 결론 부분에서 그는 천상의 음악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고 묘사하며, "피타고라스의 잔에서 관대하게 한 모금 마시고 따뜻해졌다"고 적었다. 그는 또한 피타고라스를 모든 코페르니쿠스 학파의 "조상"이라고 불렀다.
아이작 뉴턴은 우주의 수학적 조화와 질서에 대한 피타고라스 학파의 가르침을 굳게 믿었다. 뉴턴은 다른 사람의 발견에 대한 공로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의 공로는 피타고라스에게 돌렸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과학자가 "논리적 단순성의 관점을 연구의 필수적이고 효과적인 도구로 간주하는 한 플라톤주의자 또는 피타고라스 학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의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어떤 의미에서 플라톤과 피타고라스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현대 물리학에 더 가깝다. 전자는 수학자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사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기준으로 화이트헤드는 아인슈타인과 그와 같은 다른 현대 과학자들이 "순수한 피타고라스 학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선언했다.
9. 4. 채식주의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는 그의 서사시 『변신 이야기』 제15권에서 피타고라스를 등장시켜 그가 추종자들에게 엄격한 채식주의 식단을 따르도록 간청하는 연설을 하는 모습을 허구적으로 묘사했다. 이 연설은 아서 골딩이 1567년에 영어로 번역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통해 근대 초 영어권 독자들에게 피타고라스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오비디우스가 묘사한 피타고라스의 채식주의 옹호 연설은 후대의 많은 작가와 사상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존 던은 그의 시 "영혼의 진보"에서 이 연설에 담긴 교리의 의미를 탐구했으며,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드 몽테뉴는 그의 에세이 "잔혹함에 대하여"에서 동물의 학대에 대한 도덕적 반대를 표명하며 이 연설을 세 번이나 인용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그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이 연설을 언급했으며, 존 드라이든은 1700년에 출판한 『고대와 현대의 우화』에 피타고라스가 등장하는 장면의 번역을 포함시켰다. 존 게이의 1726년 우화 "피타고라스와 시골 사람" 역시 육식을 폭정과 연결하며 이 연설의 주제를 되풀이했다. 체스터필드 백작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피타고라스의 연설을 읽고 감명받아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1840년대에 '채식주의'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영어권에서는 채식주의자를 '피타고라스 학파'라고 불렀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는 "피타고라스 식단에게"라는 제목의 송가를 썼고,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스스로 피타고라스 식단을 실천하며 채식주의를 지지했다.
9. 5. 서양 밀교
초기 근대 유럽 밀교는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에 크게 의존했다. 독일 인문주의 학자 요하네스 로이힐린 (1455–1522)은 피타고라스주의를 기독교 신학과 유대교 카발라와 통합했다. 그는 카발라와 피타고라스주의 모두 모세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았으므로 피타고라스가 카발리스트였다고 주장했다. 그의 대화록인 ''lat''(1494)에서 로이힐린은 피타고라스의 테트락티스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한 이름 YHWH에 비유하며, 테트라그람마톤의 네 글자 각각에 피타고라스의 신비주의적 가르침에 따라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다.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3권짜리 논문인 ''비밀 철학에 관하여''는 피타고라스를 "종교적 마법사"로 언급하며, 피타고라스의 신비주의적 수비학이 초천상적 수준에서 작동한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이는 당시 높은 천상의 영역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던 종교적 용어였다. 프리메이슨은 크로톤에서 피타고라스가 설립한 공동체를 의도적으로 모델로 삼아 그들의 사회를 만들었다. 장미십자회는 피타고라스의 상징을 사용했으며, 로버트 플러드 (1574–1637)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자신의 음악 작품이 피타고라스의 영감을 받았다고 믿었다. 존 디는 피타고라스 사상, 특히 모든 것이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일루미나티의 창시자인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피타고라스를 강력히 숭배했으며, 그의 저서 ''lat''(1787)에서 사회가 피타고라스의 크로톤 공동체와 더 유사하도록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그의 오페라 ''마술 피리''에 메이슨과 피타고라스의 상징을 통합했다. 실뱅 마레샬은 그의 6권짜리 1799년 전기 ''fr''에서 모든 시대의 모든 혁명가들이 "피타고라스의 후계자"라고 선언했다.
9. 6. 문학

단테 알리기에리는 피타고라스 수비학에 매료되어 그의 대표작 신곡에서 지옥, 연옥, 천국에 대한 묘사를 피타고라스의 숫자에 기반하여 구성하였다. 단테는 피타고라스가 단일성을 선으로, 다원성을 악으로 보았다고 기록했으며, ''천국'' 제15곡 56-57행에서는 "다섯과 여섯은 이해하면, 단일성에서 빛을 발한다"고 선언한다. 숫자 11과 그 배수는 ''신곡'' 전체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되는데, 각 편(지옥, 연옥, 천국)은 33개의 칸토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서론 격인 첫 칸토가 추가된 ''지옥'' 편은 예외적으로 총 34개의 칸토로 구성된다. 또한 단테는 지옥의 여덟 번째 원에 있는 아홉 번째와 열 번째 '볼지아'(Malebolge, 악의 구렁텅이)의 둘레를 각각 약 35.41km와 약 17.70km로 묘사했는데, 이는 π의 피타고라스적 근사치인 22/7의 분자와 분모에 해당한다.
미국의 초월주의자들은 고대의 ''피타고라스의 생애''와 같은 전기들을 이상적인 삶의 지침서로 여겨 읽었다. 특히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토머스 테일러가 번역한 이암블리코스의 ''피타고라스의 생애''와 스토바이오스의 ''피타고라스의 격언''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자연관 역시 원형(原型)에 상응하는 이미지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관념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피타고라스가 제시한 '우주의 음악'이라는 개념은 소로우의 대표작 ''월든''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주제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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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lus Gell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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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 of Gre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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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 Py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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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 Pyth, Varia Historia, Diog VIII
[38]
논문
Herodian
[39]
논문
Diog VIII, Non posse suav. vivi sec. Ep.
[40]
논문
Ptol. Harm., Diog VIII
[41]
논문
Diog VIII, Hist. Nat.
[42]
논문
Diog VIII
[43]
논문
Tusc. Disput.
[44]
문서
사모스 섬의 피타고라스
[45]
웹사이트
Iamblichus and the Foundations of Late Platonism
https://books.google[...]
Brill
[46]
웹사이트
Measuring Heaven: Pythagoras and his influence in thought and Art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47]
문서
티로스의 포르피리오스, 피타고라스의 삶, 테아노, 수다 사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
[48]
간행물
Pythagoras
[49]
웹사이트
피타고라스와 콩
https://www.aozora.g[...]
[50]
문서
Tusculan Disputations, Diogenes Laërtius
[51]
논문
Adhort. ad Philos.
[52]
논문
Met.
[53]
서적
미의 역사
열린책들
[54]
백과사전
서양 음악의 역사-고대음악
글로벌 세계대백과
[55]
서적
철학가들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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