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발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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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발트 1세는 샹파뉴 백작이자 나바라 왕이다. 샹파뉴 백작으로서는 샹파뉴 왕위 계승 전쟁을 겪으며 프랑스 왕실과 갈등과 협력을 반복했고, 샹파뉴 내정을 개혁했다. 나바라 왕으로서는 산초 7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카스티야, 아라곤, 잉글랜드와 조약을 맺고 푸에로를 문서화하는 등 내정을 다스렸다. 1238년에는 십자군에 참여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트루베르로서 시를 짓기도 했다. 1253년 팜플로나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뒤는 아들 테오발도 2세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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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발트 1세 | |
|---|---|
| 기본 정보 | |
![]() | |
| 칭호 | 나바라 국왕 샹파뉴 백작 |
| 원어 이름 | 프랑스어: Thibaut 스페인어: Teobaldo 일본어: テオバルド |
| 출생일 | 1201년 5월 30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샹파뉴 백령, 트로아 |
| 사망일 | 1253년 7월 8일 |
| 사망지 | 나바라 왕국, 팜플로나 |
| 매장지 | 팜플로나 대성당 |
| 왕가 | 샹파뉴 가문 |
| 통치 | |
| 나바라 국왕 즉위 | 1234년 |
| 나바라 국왕 퇴위 | 1253년 |
| 이전 국왕 | 산초 7세 |
| 다음 국왕 | 테오발트 2세 |
| 샹파뉴 백작 즉위 | 1201년 5월 30일 |
| 샹파뉴 백작 퇴위 | 1253년 7월 8일 |
| 이전 백작 | 테오발트 3세 |
| 다음 백작 | 테오발트 2세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테오발트 3세 |
| 어머니 | 블랑슈 드 나바르 |
| 배우자 | 제르트뤼드 드 다그스부르 아녜스 드 보주 마르그리트 드 부르봉 |
| 자녀 | 블랑슈, 브르타뉴 여공 테오발트 2세 베아트리스, 부르고뉴 여공 앙리 1세 |
2. 샹파뉴 백작 시대
티보 4세는 아버지 티보 3세가 사망한 후 태어나 샹파뉴 백작위를 계승받아 유복자로 불렸다. 21세가 될 때까지 어머니 블랑슈가 섭정을 맡아 나라를 다스렸다. 어머니는 필리프 2세를 후견인으로 삼았고, 티보 4세는 프랑스 궁정에서 성장했다. 1209년과 1213년에 어머니와 필리프 2세 사이에 신종 의례 (오마주)에 관한 약속과 보증금 지불이 두 번 이루어졌으며, 1214년 이후에는 어머니의 후견 아래 샹파뉴를 다스렸다.[1]
샹파뉴 가문(블루아 가문)은 십자군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할아버지 앙리 1세는 십자군에 참여했다가 귀국 후 1181년에 사망했고, 백부 앙리 2세는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예루살렘 국왕이 되었다 (1192년 - 1197년). 아버지 역시 제4차 십자군에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조프로아 드 빌아르두앵, 장 드 브리엔, 장 드 조앙빌 등 가신 중에도 십자군 관계자가 있었다.[2]
그러나 티보 4세는 즉위 초반, 백부 앙리 2세의 딸들인 필리파와 그의 남편 에라르 1세와의 상속 분쟁에 휘말렸다. 이 분쟁은 1216년부터 1222년까지 이어졌으며, 샹파뉴 가문에 대한 영주들의 반란, 카페 왕조와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대립 등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블랑슈와 티보 4세 모자는 필리프 2세와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지지를 받아 유리하게 분쟁을 이끌었고, 1221년 에라르 부부는 샹파뉴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블랑슈 모자는 에라르 부부에게서 몰수했던 영토를 돌려주고 연금을 지급하며 화해했다.[3] 1234년에는 필리파의 언니인 키프로스 왕 위그 1세의 비 앨리스에게도 영토와 현금 4만 리브르를 제공하여 상속권을 포기하게 했다. 하지만 현금이 부족하여 블루아, 샤르트르, 상세르, 샤토당을 프랑스 왕 루이 9세에게 매각해야 했다.[3][4] 또한, 백부와 아버지의 십자군 원정으로 샹파뉴 가문은 이미 막대한 빚을 지고 있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2. 1. 샹파뉴 왕위 계승 전쟁 (1215년 ~ 1222년)
샹파뉴 왕위 계승 전쟁은 1215년 에라르와 필리파와의 갈등으로 인해 시작된 전쟁이다. 이 전쟁은 티보가 성년이 된 1222년 이후에야 해결되었다.[3] 티보는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여 그들의 권리를 매입했다. 1234년, 티보는 필리파의 언니인 앨리스 키프로스 여왕의 권리를 사들이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썼다. 1222년의 해결은 티보의 문제를 끝내지 못했는데,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8세의 심기를 건드렸다.[4]초반에 티보는 예루살렘에서 사고로 사망한 백부 앙리 2세의 딸들, 즉 둘째 딸 Philippa of Champagne|필리파 드 샹파뉴|필리파영어와 그녀의 남편 라메르 공 Erard of Brienne-Ramerupt|에라르 드 브리엔|에라르 1세영어와의 상속 분쟁에 시달렸다. 이 분쟁은 1216년 초부터 티보 4세가 성년이 되는 1222년까지 이어졌다. 당시 샹파뉴 가문에 대한 영주층의 반란과 왕가·카페 왕조와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신성 로마 황제프리드리히 2세에 대항하는 벨프 가문의 대립 관계도 얽혀 있었다. 블랑슈-티보 4세 모자에게는 필리프 2세와 로마 교황호노리우스 3세가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분쟁을 유리하게 진행했으며, 에라르 부부는 1221년에 샹파뉴에 관한 권리를 포기했다. 블랑슈 모자는 에라르 부부로부터 몰수했던 영토를 반환하고 연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화해하여 분쟁은 마침내 진정되었다.
2. 2. 프랑스 왕실과의 갈등과 협력
티보 4세는 프랑스의 루이 8세(1223년 ~ 1226년)와 유대인 정책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1223년 11월 8일, 루이 8세는 '유대인에 관한 법령'을 통해 유대인 부채에 대한 이자를 무효화하고, 원금을 3년 안에 유대인에게 상환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유대인에게 빚진 부채는 영주의 통제 하에 두도록 하였다. 영주들은 유대인을 대신하여 부채를 징수하고 수수료를 챙겼다.[1]26명의 남작이 루이 8세의 조치를 따랐지만, 티보 4세는 따르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세금을 통해 추가 수입을 얻는 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티보 4세와 그의 어머니 블랑슈는 샹파뉴 백국 섭정 통치 기간 동안 이 수입에 의존했다. 샹파뉴의 수도 트로예는 라시가 한 세기 전에 살았던 곳으로, 번성하는 유대인 인구를 유지하고 있었다. 티보 4세가 유대인에 대한 루이 8세의 정책 시행을 거부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다.[2]
1226년 알비 십자군의 일환인 아비뇽 포위전에서 티보 4세는 최소한의 복무 기간인 40일만 채우고 돌아갔다. 루이 8세는 그가 떠난 직후 이질로 사망했고, 티보 4세가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9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섭정 초기에 티보 4세는 뤼지냥의 위그 10세, 브르타뉴의 피터 1세와 함께 국왕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으나, 섭정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음모를 포기했다.[3]
티보 4세가 루이 8세의 미망인이자 섭정인 카스티야의 블랑슈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웬도버의 로저는 티보 4세가 여왕에 대한 열정으로 루이 8세를 독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매튜 파리는 프랑스 귀족들이 루이 9세에게 티보 4세에게 결투를 신청하도록 부추겼으나 블랑슈가 막았다고 덧붙였다. 티보 4세는 궁정에서 영향력을 키웠지만, 다른 남작들은 샹파뉴 백국의 강화에 질투심을 느꼈다.[4]
1229년부터 1230년까지 불만을 품은 남작들이 샹파뉴를 침략했다. 바르의 헨리 2세 백작은 동쪽에서, 위그 4세 공작은 남쪽에서 샹파뉴를 공격했다. 티보 4세는 로렌과 동맹을 맺고 조인빌의 시몬의 도움을 받아 바르 백국을 공격했고, 블랑슈 여왕의 개입으로 갈등은 멈췄다.[5]
티보 4세는 공격을 막아냈지만, 샹파뉴의 경제는 십자군 부채와 전쟁으로 피폐해졌다. 그는 블로아, 상세르, 샤토덩에 대한 종주권을 팔아야 했다. 1229년 침략 직전, 나바라의 블랑슈가 사망했다. 1231년에는 두 번째 부인 보제 아녜스가 사망하여 블랑슈만이 남았다. 티보 4세는 1232년 부르봉의 마가렛과 재혼했다. 1233년 앨리스 여왕이 상속 전쟁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위협하자, 티보 4세는 그녀에게 돈을 지불하여 주장을 포기시켰다.[6]
2. 3. 샹파뉴의 내정 개혁
트로예에서 태어난 티발트 1세는 샹파뉴 백작 티보 3세와 나바라의 블랑슈의 아들이었으며, 나바라 국왕 산초 6세의 막내딸이었다.[1] 아버지는 티발트 1세가 태어나기 일주일도 채 안 되어 사망했고, 어머니 블랑슈는 티발트 1세가 21세가 되는 1222년까지 샹파뉴 백국을 섭정으로서 통치했다.티발트 1세는 프랑스의 통치 시스템을 본떠 샹파뉴의 내정 개혁을 통해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지방 행정, 재판, 통화 제도를 개혁하여, 지방 관리 프레보 위에 바이이를 두고 백작령을 6개 구역으로 나누어 재정과 재판을 담당하게 했다. 트루아에는 바이이의 법정 외에 상소를 접수하는 재판소를 설치했다. 통화 통일을 꾀하여 지방 조폐소에 손을 댔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0]
경제에도 주목하여 샹파뉴 대시장을 보호하고 트루아에 여러 시장을 소유했다. 1230년에는 트루아와 프로방에 특허장을 주어 코뮌 결성을 인가하고, 도시민에 대한 징세 기관 설치를 결정, 재판의 판결과 벌금 수입을 확보하면서도 재판권을 도시와 나누어 가졌다.[10]
3. 나바라 왕 테오발도 1세 시대
테오발도 1세는 샹파뉴와 나바라 두 지역의 통치자로서,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프랑스 왕 루이 8세를 섬기며 1224년 라 로셸 포위전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곧 루이 8세와 대립했다. 1226년 알비 십자군 때 아비뇽에서 무단으로 진을 철수하면서 대립이 명확해졌다. 루이 8세가 급사하자 왕비 블랑슈 드 카스티유를 짝사랑한 티보 4세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루이 9세의 대관식 참석도 허락되지 않았다. 루이 9세 즉위 후 모후 블랑슈가 섭정이 되자, 1227년 1월 브르타뉴 공국 섭정 피에르 1세, 라 마르슈 백작 위그 10세 드 뤼지냥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블랑슈에게 설득되어 3월에 반란에서 이탈했다. 다른 귀족들도 왕가와 화해하여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5]
이후 궁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했지만, 앞선 반란 이탈로 다른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1229년부터 전투가 시작되었고, 1230년에는 피에르 1세와 위그 10세의 보복으로 샹파뉴 백작령과 트루아가 포위되었으나, 왕태후의 원군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6][7][8]
1231년 아내 아녜스가 사망하자 피에르 1세로부터 관계 회복 제안을 받고 그의 딸 욜랑드와 재혼하려 했지만, 교황에게 금지되었다. 1236년, 딸 블랑슈를 피에르 1세의 아들 장 1세와 결혼시켜 관계를 회복하고 위그 10세와도 동맹을 맺었지만, 루이 9세와 다시 대립했을 때 왕의 압력으로 동맹이 해체되어 항복했다. 이후 국왕 측에 남았지만, 1234년에는 블로와, 샤르트르, 상세르, 샤토댕을 왕에게 매각했다. 이는 1230년 전쟁 뒷수습과 알릭스에게 지불할 자금 마련 목적이었으며, 블랑슈에게 설득되어 블로와를 포기해야 했다.[9]
전쟁과 영지 할양에도 불구하고 샹파뉴 경영에 힘썼다. 영지 획득, 성 건축, 인접지와의 경계 확정에 힘썼으나, 이는 제후들의 반감을 사 1230년 전쟁을 일으켰다. 내정도 정비하여 샹파뉴 백작령의 일체화를 목표로 했다. 프랑스 통치 시스템을 본떠 지방 행정, 재판, 통화 제도를 개혁했다. 지방 관리 프레보 위에 바이이를 두고 백작령을 6개 관할 구역으로 나누어 재정과 재판을 담당하게 했으며, 바이이 법정 외에 상소를 접수하는 재판소를 트루아에 설치했다. 통화 통일을 꾀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샹파뉴 대시장을 보호하고 트루아에 여러 시장을 소유했으며, 1230년 트루아와 프로방에 특허장을 주어 코뮌 결성을 인가하고 도시민 징세 기관 설치를 결정, 재판 수입을 확보하면서도 재판권을 도시와 나누어 가졌다.[10]
1238년 테오발도 1세는 Barons' Crusade영어로 불리는 원정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제6차 십자군을 통해 협상으로 예루살렘을 획득했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무력으로 이슬람교도를 타도하려 했다. 그러나 계획은 좌절되었고, 테오발도 1세 등 프랑스 제후들의 소규모 출진이 이루어졌다.[12][13][14]
1239년 여름 팔레스타인에 상륙한 십자군은 거의 싸우지 않았다. 이미 예루살렘 등 영토는 기독교도 측에 있었고 휴전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발도 1세 등은 아크레 궁정에서 시를 짓고 아스칼론에서 축성을 했다. 아이유브 왕조 궁정 양측으로부터 동맹 제안을 받고 협상하여 요르단 강과 지중해 사이 예루살렘 왕국 영토를 확대, 하틴 전투 이전 수준으로 만들었다. 이는 제1차 십자군에 필적하는 영토적 성과였지만, 현지 정치 정세를 이용한 결과였다. 1240년 말, 잉글랜드에서 온 콘월 백작 리처드가 도착하기 전, 예루살렘 주도권 다툼을 싫어하여 팔레스타인을 떠났다. 그레고리오 9세의 뜻을 받아 원정한 콘월 백작도 싸우지 않고, 아이유브 왕조로부터 영토를 받고 아스칼론 축성만 하고 돌아갔다.
1245년 팜플로나 주교와 영지 수입 문제로 다투다 파문되었고, 1247년 로마로 가서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고 파문을 해제받았다. 자금 마련을 위해 환전상에게 트루아 시장 수입을 5년 동안 선불로 지불하고, 상품 판매세와 경범죄 벌금을 변제에 충당하는 등 만년에도 중대한 사건을 일으켜 샹파뉴를 동요시켰다. 나바라는 관습법(푸에로)과 신분제 의회가 위세를 떨치고 있어 그쪽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11]
1253년 팜플로나 왕궁에서 사망했고, 장남 테오발도 2세가 나바라와 샹파뉴를 계승했지만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1256년까지 어머니 마르그리트가 섭정으로 통치했다.[15]
3. 1. 나바라 왕위 계승
테오발트는 그의 삼촌 산초 7세가 사망하자 나바라의 왕이 되었다. 테오발트는 산초 7세가 죽었을 당시 팜플로나에 있었고, 즉시 왕국의 ''푸에로스''를 확정했다. 이는 그의 자원과 명성을 크게 높여, 그의 통치는 더욱 평화롭고 번영하게 되었다. 1229년, 이전에 테오발트 4세와 갈등을 겪었던 북부 프랑스의 영주와 남작들은 그가 나바라의 새 왕으로서 입지가 강해져 도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내버려 두었다.[11]티보 1세는 왕으로서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잉글랜드 왕국과 조약을 맺었다. 그는 샹파뉴 귀족들에게 정부의 대부분을 위임하고, 나바라를 재정 기능과 공공 질서 유지를 기반으로 하는 4개의 새로운 구역으로 나누었다. 그는 ''Cartulario Magno''에서 법률 성문화 작업을 시작했고, 당시까지 체계적으로 기록되지 않고 왕국의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던 바스크 전통을 따라 유지된 ''푸에로 헤네랄''로 알려진 나바라 전통을 문서화했다.[11]
카스티야의 지지를 얻고자 그는 딸 블랑슈를 미래의 알폰소 10세와 약혼시켰다. 결혼 협약에 따라 레온의 페르난도 3세는 티보가 살아있는 동안 기푸스코아의 땅을 제공했지만, 나바라 군주들이 오랫동안 요구해 왔던 알라바의 땅은 제공하지 않았다. 기푸스코아를 얻으면 칸타브리아 해로 직접 접근할 수 있게 되지만, 이 동맹은 나바라를 카스티야의 봉토로 통합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듬해 티보는 딸을 그의 가까운 십자군 동맹 드뢰 백작 피에르의 아들인 브르타뉴 공작 장 1세와 약혼시켰다.[11]
1234년, 외할아버지의 형제인 나바라 왕 산초 7세가 사망하면서 나바라 왕가가 단절되었고, 어머니 블랑슈가 산초 7세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에 티보 4세가 테오발도 1세로서 나바라 왕위를 계승했다. (아라곤 왕 하이메 1세도 후보였으나 사퇴했다).[11]
3. 2. 남작 십자군 (1239년)
1239년, 티보 1세는 성지로 십자군을 이끌었다. 군사적으로 남작 십자군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외교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아크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아내에게 시를 썼고, 아스칼론으로 이동하여 성을 짓기 시작했다.[11]십자군 군대가 아스칼론으로 행군하는 동안, 부르고뉴의 위그를 비롯하여 바르의 앙리 2세, 몽포르의 아모리 6세가 이끄는 400명의 기사 부대가 가자에서 무슬림 군대와 교전하기로 결정했다. 이 부대는 티보 1세의 군대가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도착하기 전에 패배했다.[11]
티보는 당시 서로 대립하고 있던 다마스쿠스의 아이유브 왕조와 이집트와 협상하여, 후자(남부)에 대항하여 전자(북부)와 조약을 체결하여 예루살렘 왕국이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 그리고 갈릴리 지역 대부분과 보포르 성과 사페드와 같은 많은 템플 기사단의 성을 되찾았다.[11] 그는 또한 이집트와 휴전을 협상했다. 어떤 동시대 자료에서는 심지어 요르단 강과 지중해 사이의 모든 땅이 십자군의 손으로 다시 넘어갔다고 암시하기도 한다.[11]
십자군의 궁극적인 성공(영토 면에서 제1차 십자군 이후 가장 성공적인 십자군)이 티보 1세의 의도에 얼마나 기인하는지, 아니면 얼마나 우연한 일이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는 콘월 백작 리처드가 도착하기 전인 1240년 말에 팔레스타인에서 돌아왔는데, 이는 더 이상 사업의 지도력과 방향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11] 그가 유럽으로 가져온 기념품에는 다마스쿠스에서 가져온 "프로방스" (라틴어 이름 로사 갈리카 '오피시날리스', 약제상 장미)라는 장미를 "투구" 안에 넣어서 가져온 것과 진짜 십자가 조각, 그리고 현대에 샴페인 (와인)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샤르도네 포도가 포함되어 있었다.[11]
3. 3. 팜플로나 주교와의 갈등
테오발도 1세는 팜플로나 주교 페드로 히메네스 데 가솔라와 갈등을 겪었는데, 페드로 히메네스 데 가솔라는 1250년에 지방 종교 회의를 열어 그를 파문했다.[11] 티보 1세는 교황 재판에 응하지 않았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그에게 왕의 특권을 부여하여 그를 파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교황청뿐이라고 하였다.4. 트루베르로서의 티보 4세
티보 4세는 트루바두르로도 알려져 있으며, 재능 있는 시인이었다. 작시가 500편 이상, 작곡이 400편 이상 있었다고 하며, 현재도 약 60편 정도의 시가 남아 있고, 그 중에는 멜로디가 전해지는 것도 있다. 시는 연애에 관한 것이 많아, 기사와 시골 처녀의 사랑 이야기나, 궁정에서의 연애 모습을 그린 것도 있다. 왕태후 블랑슈와 사랑에 빠졌다고 하며, 남긴 시의 대부분은 블랑슈에게 보낸 것이라고 하고, 여성에 대한 사모로 괴로워하는 마음을 적어 내려갔으며, 시에서 언급하는 "안주인", "그분"은 블랑슈를 가리킨다고 여겨진다.[16]
조상이 시인이었던 것도 티보 4세가 시인으로 성장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아키텐 공작기욤 9세는 최초의 트루바두르로 여겨지며, 증조부모는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기욤 9세의 손녀)이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조모 마리 드 프랑스는 남프랑스에서 전래된 사랑의 문화를 퍼뜨렸다. 티보 4세는 남불의 문화가 감도는 트루아의 궁정에서 자랐으며, 전쟁과 연애의 비교론을 전개하며 시를 제작해 갔다. 크레티앵 드 트루아, 장 드 조앙빌, 뤼트뵈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트루아 출신 시인으로 세상에 인정받았으며, 작품은 책으로 출판되어 널리 퍼졌다.[17]
정치가로서는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시인으로서는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역사적인 흐름인 왕권의 집중에 저항하여 지방의 대귀족의 권위와 궁정 문화를 지키려고 싸웠다는 해석이 있으며, 그것이 시의 매력으로 이어진다고 평가받는다.[18]
5. 결혼과 자녀
테오발트는 세 번 결혼했다. 1220년 다그스부르크의 게르트루드와 결혼했으나,[15] 2년 후 이혼했다. 그들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1222년, 보죄의 아그네스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15] 이 결혼으로 최소 한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 브르타뉴 여공 블랑슈
아그네스는 1231년에 사망했다. 테오발트는 부르봉의 마르그리트와 세 번째로 결혼했다.[15] 테오발트와 마르그리트는 여섯 자녀를 두었다.
| 이름 | 비고 |
|---|---|
| 엘레오노르 | 1233년 출생, 요절 |
| 페테르 | 요절 |
| 마르그리트 | 1255년 로렌 공작 프리드리히 3세와 결혼[15] |
| 테오발도 2세 | 이사벨라와 결혼, 이사벨라는 프랑스 루이 9세의 딸[2] |
| 베아트리스 |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와 결혼[2] |
| 엔리케 1세 | 아르투아의 블랑슈와 결혼[2] |
테오발트는 적어도 두 명의 사생아 딸을 두었다.
알 수 없는 정부와의 사이에서 아그네스를 두었고, 아그네스는 알바라신 4대 영주인 알바르 페레스 데 아사그라와 결혼했다.
로페스 데 라다의 딸이자 나르본의 브루니센데의 딸인 마르케사 로페스 데 라다와의 사이에서 마르케사 길 데 라다를 두었고, 마르케사 길 데 라다는 아라곤 자메 1세 왕의 사생아 아들인 히하르 남작 페드로 페르난데스와 결혼했다.
6. 사망
티보 1세는 남은 생애의 대부분을 나바라와 샹파뉴를 오가며 보냈다. 그는 팜플로나 주교 페드로 히메네스 데 가솔라와 갈등을 겪었는데, 페드로 히메네스 데 가솔라는 1250년에 지방 종교 회의를 열어 그를 파문했다. 티보 1세는 교황 재판에 응하지 않았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그에게 왕의 특권을 부여하여 그를 파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교황청뿐이었다. 티보 1세는 샹파뉴를 여러 번 방문한 후 팜플로나에서 사망했다. 그는 팜플로나 대성당에 묻혔다. 그의 뒤는 장남인 티보 2세가 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차남인 앙리 1세가 이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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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中央大学人文科学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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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中央大学人文科学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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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エラールはシャンパーニュの領主たちや[[ロレーヌ公国|ロレーヌ]][[ロレーヌ公|公]][[ティボー1世 (ロレーヌ公)|ティボー1世]](カペー朝の同盟者フリードリヒ2世と対立していた[[ブラウンシュヴァイク=リューネブルク]][[ブラウンシュヴァイク君主一覧|公]][[オットー1世 (ブラウンシュヴァイク=リューネブルク公)|オットー1世]]の支持者)を味方に付けて反乱を起こしたが、[[1218年]]に教皇ホノリウス3世により妻や同盟者たち共々[[破門]]され休戦を余儀無くされた。ティボー1世もフリードリヒ2世の支援を受けたブランシュの軍に本拠地[[ナンシー]]を包囲され降伏、1221年の和睦に至った。この前年に当たる[[1220年]]にティボー4世はティボー1世の未亡人ゲルトルートと結婚したが、フリードリヒ2世の許可を得ていなかったため不興を買い、1222年に教会から近親婚を理由に[[婚姻の無効|婚姻を無効]]にされ、[[1223年]]にアニェス・ド・ボジューと再婚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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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中央大学人文科学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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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ブルト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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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1227年末、ルイ9世の叔父[[フィリップ・ユルプル]]が不満分子を集めて王を誘拐する企てに加担したが、誘拐が失敗してフィリップらが蜂起すると、ティボー4世は討伐に向かい自ら軍を率いたブランシュに降伏、反乱鎮圧に加わった。以後2人は親密になるが、これが人々の疑惑を掻き立て、反王党派の詩人ユエ・ド・ラ・フェルテが頻繁に2人を中傷した[[シャンソン]]を町中で歌い、ティボー4世がブランシュの愛人となり国事へ介入しているという噂を流した。2人の関係は不明だが、歴史家[[ジャック・ル・ゴフ]]は中傷だと結論付け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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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サン=ド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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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中央大学人文科学研究所
[9]
서적
ブルト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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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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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バー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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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大学人文科学研究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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ハラ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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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バード
[15]
서적
バード
[16]
서적
ブルトン
[17]
서적
中央大学人文科学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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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中央大学人文科学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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