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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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호는 명나라 정덕제 시기에 권력을 잡았던 8명의 환관 집단을 지칭한다. 이들은 황제를 보좌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특히 유근을 중심으로 정치, 재정,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 팔호는 황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부를 장악하고, 탐욕과 부패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반대 세력을 탄압했다. 그러나 유근의 몰락을 시작으로 팔호의 권력은 점차 쇠퇴했고, 이후 이들은 숙청되거나 실각했다. 팔호의 등장은 환관 정치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로, 유교 학자들은 팔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중국 역사에서 환관 정치의 어두운 그림자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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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호 | |
|---|---|
| 개요 | |
| 시기 | 명나라 무종 (정덕제) 통치 시기 |
| 주도 인물 | 유근 |
| 성격 | 권력 남용, 부패 |
| 구성원 | |
| 주요 구성원 | 유근, 장영, 곡영, 마영성, 구현, 위빈, 고봉, 나상 |
| 별칭 | 팔호 (八虎) |
| 역사적 배경 | |
| 정덕제의 즉위 | 정덕제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환관들의 영향력 증대 |
| 유근의 등장 | 유근이 정덕제의 신임을 얻어 권력 장악 |
| 권력 남용 | |
| 주요 행위 | 재정 착취 인사 전횡 군사적 영향력 행사 |
| 정치적 부패 | 관리 매관매직, 부정부패 심화 |
| 몰락 | |
| 원인 | 정덕제의 변심 관리들의 탄핵 민중의 불만 고조 |
| 유근의 처형 | 유근이 반역죄로 처형되면서 팔호 세력 약화 |
| 영향 | |
| 정치적 영향 | 명나라 정치 부패 심화 및 국정 혼란 초래 |
| 사회적 영향 | 민중의 불만 증가 및 사회 불안 야기 |
| 평가 | |
| 역사적 평가 | 명나라 최악의 환관 정치 사례 중 하나로 평가 |
2. 명나라 환관 정치의 배경
2. 1. 중국의 환관
환관은 거세된 남자로, 여성에게 방해되거나 위험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에 황실 및 귀족 가문에서 하인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환관은 종종 하렘 경비병과 시중으로 황실에서 활용되었다. 하렘은 남성 후계자를 생산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졌으며, 환관은 믿을 만한 보호자였다.[1]명나라 이전부터 환관은 중국에서 강력한 정치 세력이었다. 당나라 시대에는 821년부터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환관이 "실세"였다. 그들은 친위대와 궁정 비서실을 통제했고, 8명의 황제 중 7명을 선택했으며, 아마도 2명의 황제를 살해했을 것이다.[2]
홍무제(1328-1398)는 환관의 권력을 우려했다. 그는 "환관은 행정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적힌 비석을 세우고, 그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2] 그는 "환관을 자신의 눈과 귀로 사용하는 사람은 장님과 귀머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홍무제의 뒤를 이은 많은 황제들은 환관에게 통치를 맡기려 했고, 명나라는 환관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다.[1] 15세기 말에는 10,000명의 환관이 궁궐에서 일했다.[3]
황제와 그의 아내 및 후궁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종종 황실의 아들들을 맡았다. 종종 이러한 신뢰는 환관이 궁궐 경비병, 군 지휘관 또는 황실 감찰관으로 임명되는 데까지 이어졌다. 그들은 궁정의 사치스러운 작업장을 통제하고 지방과 외국에서 오는 조공을 관리했으며, 종종 해외 공식 사절단의 수장이 되었다.[1] 이러한 권력은 환관에게 뇌물을 통해 부자가 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들은 또한 결국 비밀 경찰을 통제하여 협박과 부패를 통해 국가를 통제할 수 있었다.[4]
2. 2. 홍무제의 환관 억제 정책과 실패
2. 3. 정덕제의 즉위와 환관의 발호
정덕제는 부친의 사망 이후 1505년 14세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5] 통치 초기부터 젊은 황제는 정부 관료들을 불신하고 자신을 키우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환관들에게 편향된 태도를 보였다. 황제의 측근에는 황태자 시절부터 그를 보좌했으며 정덕제가 즉위한 직후 개인 수행원이 된 8명의 환관이 있었는데, 이들을 '팔호'라고 불렀다. 팔호는 황궁뿐만 아니라 비밀 첩보기관과 군대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신속하게 장악했다. 이에 더해 그들은 자신의 친척들을 왕조 내 영향력 있는 직위와 역할에 임명했다.[5]그룹의 지도자로 부상할 유근은 1506년 초 궁중 음악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는 황제의 여흥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했다. 그는 이 역할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황제가 매우 좋아할 만한 오락 아이디어를 내놓았다.[5] 황실 엘리트 내 여러 그룹은 유근의 승진과 젊은 통치자에 대한 그룹의 명백한 영향력에 경각심을 느꼈고, 그리하여 팔호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6]
황제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세 명의 대학사는 대신들의 지지를 받아 그룹의 처형을 요구했고, 고위 환관들은 황제가 고려할 가능성이 더 높은 처벌로 유배를 주장했다. 마침내 공동 계획이 합의되어 황제에게 유근의 처형과 그룹의 다른 구성원들의 궁정 추방을 요구하는 직접적인 청원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유근은 자신의 심복으로부터 음모에 대한 통보를 받고 1506년 10월 27일 일곱 명의 다른 환관들과 함께 정덕제 앞에서 자비를 구했다. 황제는 그들의 호소를 받아들여 다음 날 자신의 여가 시간에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소식을 들은 즉시 대학사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사임했고, 많은 고위 관리들이 그 뒤를 따랐다.[5]
이 음모는 저지되었고, 환관들의 권력에 대한 대부분의 견제는 함께 제거되었다. 유근은 그에게 반대하는 자들에게 보복하여 여러 고위 정부 인사의 해임, 고문 사건, 투옥을 잇따라 일으켰다. 1507년 2월, 고위 대학사의 해임을 항의한 21명의 관리가 매를 맞고 평민 신분으로 강등되었다.[5] 1507년 말까지 궁궐에서 유근의 공포 통치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유근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유 황제"와 그의 동료 환관으로 알려져 있었다.[7]
3. 팔호의 구성원
3. 1. 유근 (劉瑾)
유근(劉瑾, 1451년 2월 28일 ~ ?)은 산시성 싱핑 시 출신 환관으로, 본래 성은 담(譚)씨였다.[8] 스스로를 웅변가라 생각하여 환관이 되기로 결심했으며, 환관이 된 후 유(劉)라는 다른 환관에게 입양되어 유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8] 1480년대 황궁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1492년 성화제의 묘에서 황태자인 미래의 정덕제를 섬기게 되면서 그의 총애를 받았다.[8]정덕제는 부친의 사망 이후 1505년 14세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정덕제 즉위 후 유근은 종고감의 수장이 되었고, 점차 더 많은 권력과 영향력을 얻어 '팔호(八虎)'의 리더로 부상했다.[8] '팔호'는 황태자 시절부터 정덕제를 보좌한 8명의 환관 집단으로, 정덕제 즉위 직후 황궁, 비밀 첩보기관, 군대의 요직을 장악하고 친척들을 왕조 내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임명했다.
1506년 초, 유근은 궁중 음악을 담당하게 되어 황제의 여흥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고 황제의 총애를 얻었다.[5] 그러나 황실 엘리트들은 유근의 승진과 팔호의 영향력에 위협을 느껴 음모를 꾸몄다.[6] 대학사들은 대신들의 지지를 받아 팔호의 처형을 요구했고, 고위 환관들은 유배를 주장했다. 결국 유근의 처형과 다른 구성원들의 추방을 요구하는 청원이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유근은 심복으로부터 음모를 미리 알고 1506년 10월 27일 다른 환관들과 함께 정덕제에게 자비를 구했다. 황제는 이들의 호소를 받아들였고, 이 사건으로 대학사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사임하고 많은 고위 관리들이 뒤따랐다. 이 음모는 저지되었고, 환관들의 권력에 대한 견제는 대부분 제거되었다.
이후 유근은 반대자들에게 보복하여 여러 고위 인사의 해임, 고문, 투옥을 일으켰다.[5] 1507년 2월, 고위 대학사의 해임을 항의한 21명의 관리가 매를 맞고 평민으로 강등되었다.[5] 1507년 말, 유근은 "유 황제"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7]
유근은 사례감의 수장이 되어 황제에게 오가는 칙령을 변경하는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10] 그는 황실 참모의 수장이 되어 고위 관리들로부터 뇌물을 받았으며, 13명의 지방 관리들에게 연간 3번 2만 냥의 은을 요구하기도 했다.[10] 군사적으로도 영향력이 커져 모든 군사 행동은 그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8] 구대용 아래 서창이 재건된 후, 유근은 황제를 설득해 ''내신창''을 만들고 동창과 서창을 감독하게 하여 권력을 강화했다. 내신창은 유근과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박해했으며, 1,000명 이상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8] 그는 부패로 얻은 돈으로 고향에 궁전을 짓기도 했다.
관리들이 유근을 체포하고 소지품을 몰수하기 위해 파견되었을 때, 집 수색 중 총 12,057,800냥의 금과 259,583,600냥의 은, 보석, 가짜 인장, 황제를 상대로 한 음모에 사용하기 위한 칼이 숨겨진 부채가 발견되었다.[10] 유근은 능지처참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3일 동안 3,357번이나 베어졌다.
3. 2. 장용 (張永)
장용(張永, 1470-1532)은 바오딩 신청현 출신으로, 정덕제 치세 동안 황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여러 요직을 맡았다. 호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유화된 토지를 획득하고,[11] 비밀 경찰 조직인 동창과 화기 훈련 기관인 선기영을 통제했다.[12] 1510년에는 군사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안화왕의 반란을 진압했다.[9]유근의 치세 동안 장용은 그의 오른팔 역할을 했으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군사적 역량 덕분에 권력에서 제거되지 않았고, 양일청과 공모하여 유근을 제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2] 유근 사후에는 팔호 중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9] 1511년 10월, 수도 주둔군 예비병에서 6,000명의 병사를 선발하여 특별 훈련을 받도록 황제에게 요청하여 승인받았다.[9] 1514년 7월에는 몽골 침략에 대비한 작전을 지휘했다.[9]
정덕제 사후, 장용은 일반 환관으로 지위가 떨어졌고, 가정제에 의해 은퇴했다.[13][12] 그러나 1529년까지 어느 정도 권력을 회복하여 예부상서가 되었으나, 곧 사망했다.[12]
3. 3. 고봉 (高鳳)
유근 사후, 가오펑(高鳳)은 웨이빈과 함께 사례감 책임자 중 한 명이 되었다.[10][16] 가오펑에 대한 정보는 이 외에 제한적이다.3. 4. 마영성 (馬永成)
마영성은 허베이의 霸州 또는 文安縣 출신이었다.[9] 도적 상황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했는데, 그들이 황제에게 호의를 얻을 수 있도록 뇌물을 받았다.[9] 마영성은 명나라 시대에 첩보 및 비밀 경찰 기관으로 운영되었던 동창(東廠)을 장악했다.[9]3. 5. 구대용 (谷大용)
구다용(谷大用)은 비밀경찰 스타일의 정보 기관인 서창(西廠)의 수장으로 알려져 있다. 정덕제(正德帝)는 더 포괄적인 정보 기관을 갖기 원했기에 25년간 폐쇄되었던 서창을 1506년 구다용을 수장으로 다시 열었다.[12] 서창은 유근(劉瑾)이 체포된 후 폐쇄되었지만, 정덕제는 여전히 구다용을 꽤 호의적으로 생각했다.1511년 8월, 구다용은 군사 업무 총괄 감독관으로 임명되었고, 수도 남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 유(劉) 형제의 반란군과 싸웠다.[12] 반란 진압에 대한 보상으로 그의 동생들과 형은 백작이 되었다.[9]
그의 가족 구성원들은 왕조 내에서 중요한 지위와 역할을 맡았다. 예를 들어, 구다용의 아버지는 장용(張勇)의 아버지와 함께 금의위를 지휘할 권한을 받았다.
그는 또한 베이징에서 자선 건설 사업을 벌였다. 1508년에는 새로운 전당을 지은 도교 백운관(白雲觀)에 큰 종을 기증했다. 1510년과 1512년에는 남원(南園)의 영통묘(靈通廟), 도시 서문 밖의 염법사(延法寺), 그리고 호국사(護國寺, 중앙아시아 승려들을 수용하기 위해)를 복원했다. 그는 황제와 황실의 기부금을 사용하여 이러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는데, 이는 황제의 허가와 요청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구다용은 또한 자신의 프로젝트 중 적어도 하나를 선택하여, 멀리 떨어진 서산에 있는 낡은 사찰을 복원하여 "밝고 빛나는 구역"으로 만들었다.[14]
정덕제 사망 후, 그는 잠시 명예를 얻었지만, 난징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14][12]
3. 6. 구취 (丘聚)
그는 동창을 담당했지만, 유근이 체포된 후 직위를 잃었다.[12] 팔호의 전기에서 가끔 언급되지만, 그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12]3. 7. 위빈 (魏彬)
웨이빈(魏彬)은 황제에게 항복한 3,000명의 이민족으로 구성된 '산첸잉'(三千營) 수비대의 지휘를 맡았다.[12] 웨이빈은 홍샹스(Hongshangshi)를 건설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점을 쳐서 베이징 남쪽 교외에 적합한 매장지를 찾았고, 1514년에 그곳에 홍샹스를 건설했다. 이 땅은 황제에 의해 공식적으로 기증되었고, 사찰은 웨이 경 사당(Sir Wei's Temple)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은 사과 과수원과 기타 특이한 나무들로 유명했다.[14] 류진이 처형된 후, 웨이빈은 가오펑(高鳳)과 함께 예부의 수장 중 한 명이 되었다.[16][10] 웨이빈은 자징제(嘉靖帝)의 즉위와 함께 은퇴하게 되었다.[12]3. 8. 나상 (羅祥)
나상(羅祥)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지만, 팔호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5]4. 팔호의 정치적 영향력
4. 1. 정덕제와 팔호

정덕제는 재위 초 류근을 비롯한 7명의 환관들을 측근으로 두었다. 그는 환관들의 정부 내 역할을 제한하라는 대학사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1506년부터 그들에게 중요한 재정 및 군사적 역할을 부여했다.[16] 정덕제는 국사 처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제국의 대부분의 일을 환관들에게 맡겼다. 예를 들어, 다양한 황실 사업 자금 조달을 위해 개인 자금을 사용하는 대신 팔호(八虎)의 아이디어를 듣고 새로운 세금 징수를 시행했다.[16]
정덕제는 궁궐 오락에 몰두하며 팔호의 뜻을 따랐고, 이는 그들을 크게 신뢰하게 만들었다. 1516년 황궁을 떠나 선화로 이주하려 했을 때 대학사와 관리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1517년 9월 8일 다시 이동을 시도하여 구대용에게 거용관을 지나 யாரும் 따라오지 못하게 지시했다. 구대용이 이 명령을 실행하여 다른 관리들은 황제가 1518년 베이징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16]
정덕제가 환관을 신뢰하여 팔호는 권력에서 제거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그는 그들에게 용포를 하사했는데, 이는 범죄에 대한 면책 특권을 상징했다.[8] 이러한 신뢰에 대한 유일한 도전은 류근의 체포였으며, 이는 다른 팔호의 도움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16]
4. 2. 정책 및 개혁
1506년 팔호를 권력에서 몰아내려는 청원이 실패한 후, 유근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1507년 3월, 그는 자신과 다른 팔호가 최고 지방 관료와 동등한 지위와 권한을 가지며 모든 행정 또는 사법 문제를 조사할 수 있는 조서를 발표했다. 모든 공식 문서는 부(部) 또는 내각(內閣)에 보내지기 전에 먼저 그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16] 그는 또한 이전에는 관리에게 사용된 적이 없는, 그리고 심각한 범죄에만 적용되던 사소한 위반, 즉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리들에게 칼 형벌을 내림으로써 관례를 깨뜨렸다. 유근은 1507년 여름까지 수도와 지방의 황실 행정을 통제했다.[16]
환관들은 궁궐 내에서 역할을 확대하여 나머지 정부 구조를 통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많은 직책은 1506년 청원 이후 정부 숙청 이후 팔호에게 돌아갔다. 예를 들어, 예감(禮監)의 환관인 정감(Director of Ceremonies)은 일반적으로 서창 또는 동창을 통제했으며, "거의 무제한의 경찰 및 정부 권한"을 행사하는 금의위도 통제했는데, 금의위에는 매우 두려운 감옥이 있었다.[3]
정보 및 공포 기구인 창(廠)은 팔호가 운영했다. 구거는 동창을, 고대용은 서창을, 유근은 내행창을 운영했다. 황실 대신, 감찰, 군인, 민간인을 포함한 많은 용의자들이 체포되어 심하게 구타당하고 때로는 살해당했다. 내행창의 금의위가 구타와 고문의 많은 부분을 수행했다. 체포된 사람들의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8] 유근이 강탈 혐의로 체포된 후 서창과 내행창은 폐쇄되었지만, 황제는 고대용을 여전히 총애하여 서창을 재개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반발이 너무 심해서 결국 폐쇄된 채로 남았다.[8] 반면에 동창은 정덕제 사후 해산될 때까지 다른 책임자 아래에서 몇 년 동안 운영되었다.
유근은 권력을 잡았을 때 자신과 동료 환관들에게 유리하도록 정부 구조를 대대적으로 변경했지만, 결코 실현되지 않은 훨씬 더 많은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환관이 모든 정부 부처의 모든 관료의 상급자인 제국을 만들고 싶어했는데, 이는 중국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규모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한 그의 급진적인 개혁의 대부분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는 문관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코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16]
1506년, 유근은 황제를 위한 세입을 늘리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세입 감소가 부실한 관리와 부패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일반적인 조사를 실시하고 무능한 관리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16] 유근은 많은 새로운 세금을 시행하고 정부 관리의 부패와 무능에 맞서 싸웠다. 그는 또한 막대한 뇌물을 받는 것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1508년 6월, 유근은 곡물 재고 조사를 명령했다. 그는 비서와 감찰을 중국 전역에 파견하여 얼마나 많은 사료와 건초가 구매되었는지, 은으로 교환되었는지 또는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그는 또한 지역 엘리트들의 남용을 겨냥하여 무능한 관리들에게 징역형이나 곡물로 지불되는 막대한 벌금을 부과했는데, 이 곡물은 북서쪽으로 운송되었다.[9] 복건과 사천에서 유근은 관료들이 더 이상 은이 없다고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은광에 추가세를 부과했다. 그는 그를 불쾌하게 하는 관리들에게 막대한 벌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벌금을 피하기 위해 그에게 뇌물을 주기 시작했다.[16]
유근은 또한 군사 농업 식민지에 대한 조사를 시행했는데, 이것이 결국 1510년 안화왕 반란으로 이어졌다.[9]
4. 2. 1. 정부 통제
1506년 팔호(八虎)를 권력에서 몰아내려는 청원이 실패한 후, 유근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1507년 3월, 그는 자신과 다른 팔호가 최고 지방 관료와 동등한 지위와 권한을 가지며 모든 행정 또는 사법 문제를 조사할 수 있는 조서를 발표했다. 모든 공식 문서는 부(部) 또는 내각(內閣)에 보내지기 전에 먼저 그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16] 그는 또한 이전에는 관리에게 사용된 적이 없는, 그리고 심각한 범죄에만 적용되던 사소한 위반, 즉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리들에게 칼 형벌을 내림으로써 관례를 깨뜨렸다. 유근은 1507년 여름까지 수도와 지방의 황실 행정을 통제했다.[16]환관들은 궁궐 내에서 역할을 확대하여 나머지 정부 구조를 통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많은 직책은 1506년 청원 이후 정부 숙청 이후 팔호에게 돌아갔다. 예를 들어, 예감(禮監)의 환관인 정감(Director of Ceremonies)은 일반적으로 서창 또는 동창을 통제했으며, "거의 무제한의 경찰 및 정부 권한"을 행사하는 금의위도 통제했는데, 금의위에는 매우 두려운 감옥이 있었다.[3]
정보 및 공포 기구인 창(廠)은 팔호가 운영했다. 구거는 동창을, 고대용은 서창을, 유근은 내행창을 운영했다. 황실 대신, 감찰, 군인, 민간인을 포함한 많은 용의자들이 체포되어 심하게 구타당하고 때로는 살해당했다. 내행창의 금의위가 구타와 고문의 많은 부분을 수행했다. 체포된 사람들의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8] 유근이 강탈 혐의로 체포된 후 서창과 내행창은 폐쇄되었지만, 황제는 고대용을 여전히 총애하여 서창을 재개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반발이 너무 심해서 결국 폐쇄된 채로 남았다.[8] 반면에 동창은 정덕제 사후 해산될 때까지 다른 책임자 아래에서 몇 년 동안 운영되었다.
유근은 권력을 잡았을 때 자신과 동료 환관들에게 유리하도록 정부 구조를 대대적으로 변경했지만, 결코 실현되지 않은 훨씬 더 많은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환관이 모든 정부 부처의 모든 관료의 상급자인 제국을 만들고 싶어했는데, 이는 중국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규모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한 그의 급진적인 개혁의 대부분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는 문관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코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16]
4. 2. 2. 재정
1506년, 유근(劉瑾)은 황제를 위한 세입을 늘리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세입 감소가 부실한 관리와 부패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일반적인 조사를 실시하고 무능한 관리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16] 유근은 많은 새로운 세금을 시행하고 정부 관리의 부패와 무능에 맞서 싸웠다. 그는 또한 막대한 뇌물을 받는 것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예를 들어, 1508년 6월, 유근은 곡물 재고 조사를 명령했다. 그는 비서와 감찰을 중국 전역에 파견하여 얼마나 많은 사료와 건초가 구매되었는지, 은으로 교환되었는지 또는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그는 또한 지역 엘리트들의 남용을 겨냥하여 무능한 관리들에게 징역형이나 곡물로 지불되는 막대한 벌금을 부과했는데, 이 곡물은 북서쪽으로 운송되었다.[9] 복건과 사천에서 유근은 관료들이 더 이상 은이 없다고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은광에 추가세를 부과했다. 그는 그를 불쾌하게 하는 관리들에게 막대한 벌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벌금을 피하기 위해 그에게 뇌물을 주기 시작했다.[16]
유근은 또한 군사 농업 식민지에 대한 조사를 시행했는데, 이것이 결국 1510년 안화왕 반란으로 이어졌다.[9]
5. 팔호에 대한 저항
강흠은 유근이 중요한 관리들을 파면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유근을 "하찮은 종"이라고 부르며, 다른 모든 사람들이 유근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는데 어째서 황제가 그를 그토록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또한 유근을 권좌에서 몰아낼 수 있다면 자신의 머리라도 내놓겠다고 말했다.[9] 이러한 발언으로 강흠은 매를 맞고 투옥되었으며, 정덕제에게 유근을 처형할 것을 계속 촉구하다 결국 사망했다.[9]
1506년 6월 유근이 황실 내시부의 수장이 되자, 내각 대학사들은 경악했고 이 조치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묵살당했다.[16]
5. 1. 초기 반대
5. 2. 한문의 1506년 상소
한문은 1506년 10월 27일 호부 상서로서 황제에게 팔호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황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부 상서 서진은 황제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지만, 내각 대학사들은 고위 환관들을 설득하여 황제가 상소에 서명하도록 했다. 조정 대신들은 다음 날인 10월 28일 아침, 황제에게 형 집행을 요청하기로 합의했다.그러나 류진의 측근이 이 계획을 류진에게 알렸고, 팔호는 황제에게 자비를 구했다. 류진은 황제에게 예감 지휘관인 환관이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내각 대학사들과 협력하고 있다고 모함했다. 황제는 류진을 신임하여 공모자들을 해임하고 류진을 예감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다른 팔호는 여러 환관 기관과 군사 요직을 장악했고, 해임된 고위 환관들은 남경으로 추방되었으나 암살당했다.
1506년 10월 28일, 조정 대신들은 황제가 팔호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것이라는 발표를 듣고, 거의 모든 내각 대학사들이 사임했다. 류진은 이를 수리하고, 1506년 12월 13일 한문을 모함하여 해임했다. 1507년 2월에는 내각 대학사들의 해임을 항의했던 21명의 고위 관료들이 처벌을 받고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류진에게 반대하는 관료들은 탄압을 받았다.
5. 3. 1508년 익명서 사건
1508년 7월 23일, 환관들은 유근의 죄를 고발하는 익명서를 황제에게 제출했다.[16] 유진은 이 편지가 관리들이 쓴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조사하여 모든 궁궐 관리들을 체포했다.[16] 그는 환관이 편지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들을 석방하고, 그들을 조사하기 위해 보안 기관을 설립했다.[16] 그는 관련된 환관들을 남경으로 추방했다.[16]5. 4. 안화왕의 난
유금은 산시성의 세금을 인상했고, 세금 체납자들을 체포하여 구타했다.[16] 이로 인해 성(省)의 군인들이 분노했다. 당시 지역의 왕이었던 안화 왕은 환관들의 권력에 이미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환관들이 제국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어서가 아니라 설득력으로 그들의 지위를 얻었다고 믿었다.[8] 따라서 안화 왕은 반란을 일으킬 기회라고 판단했다. 1510년 5월 12일, 그는 연회를 열고 군인들을 불러 모아 참석한 관리, 장교, 환관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유금을 격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킨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반란은 19일 만에 그의 기병 지휘관 중 한 명의 배신으로 끝났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장용과 양일청은 안화 왕을 수도로 호송하여 처형했다.[16]5. 5. 유근에 대한 내부 반발
장용은 군사적 역량 때문에 유근의 다른 적들처럼 해임할 수 없었다.[8] 유근은 나머지 팔호들을 독재자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은 종종 그들에게 위임했다.[8] 이러한 태도는 나머지 팔호들이 그를 맹렬히 미워하게 만들었다.[16] 이 균열은 결국 유근의 몰락으로 이어졌다.6. 팔호의 몰락
6. 1. 유근의 몰락
1510년 무렵, 유근과 장용의 관계는 상당히 악화되었다. 장용은 군대 감찰관으로서 황실 군대의 안화왕의 반란 진압을 감독하기 위해 섬서로 파견되었다.[5] 그의 여정에는 1507년 유근에 의해 해임되어 앙심을 품었던 군대 최고 사령관 양일청이 동행했다. 양일청은 유근이 장용의 생명을 위협하는 작전을 계획하고 있다고 설득했다.[5] 그는 유근이 황제를 암살하고 자신의 종손을 왕위에 앉힐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그 계획은 1510년 9월 17일에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했다.[16]9월 13일, 황제는 팔호와 함께 연회를 열었고, 유근이 먼저 떠났다. 장용은 황제에게 유근의 계획을 알렸고, 그와 나머지 팔호는 황제를 설득하여 유근을 체포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경비병을 보냈다. 황제는 유근의 막대한 재산을 보고 그가 유죄라고 판단했다.[16]
재판에서 유근은 처음에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평소의 수법을 시도했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도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호소했다. 황실 후궁이 왜 황제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많은 갑옷을 숨겨두었는지 묻자 그는 말을 멈췄다. 황제는 확신했고, 유근은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9월 27일에 시작된 처형은 3일 동안 지속되었다. 그의 재산은 몰수되어 황제의 재정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었다.[16]
6. 2. 유근 사후
1510년에 이루어진 유근의 처형은 팔호가 황제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크게 감소시켰다.[6] 유근이 구축한 환관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는 시스템은 그의 사후 관리들에 의해 신속하게 해체되었다.[6] 그러나 정덕제는 남은 팔호 구성원들에게 계속 권한을 위임했다. 그는 여전히 재정적 안보가 필요했기에, 환관들이 그들의 업무를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관리들로부터 필요한 물품과 노역을 가져갈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16] 그는 위빈과 고봉을 새로운 사례감의 감독관으로 임명했으며, 나머지는 계속해서 수비대와 감시 기관을 운영하도록 했다.정덕제 사후, 많은 팔호가 추방되었다.[16]
7. 유산 및 평가
유교 학자들은 환관을 권력을 찬탈한 자로 여겼는데, 그들이 과거 제도와는 별개로 권력을 얻었기 때문이다.[1] 게다가 때로는 황제에게 강력한 환관을 직접 비판했던 어사들은 유근의 패배를 중국 제국의 강인함의 승리로 여겼다. 1624년, 어사 양련은 황제에게 환관 위충현을 탄핵할 것을 간청했는데, 그는 서신에서 환관이 궁궐 생활 이외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근을 언급하며 "왕진과 유근과 같은 오만하고 불법적인 환관들조차 즉시 처형되었다. 그래서 왕조는 오늘날까지 지속되었다"고 말했다.[1]
유교 학자들이 쓴 역사에서 팔호와 특히 유근을 포함한 환관들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유근은 정덕제의 통치 말기에 반란이 발발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1513년에 쓰여진 1510년 반란에 대한 최초의 완전한 이야기인 "강회에서 진압된 반란"에서 왕오(王鏊)는 유근이 반란의 책임자라고 주장하며 "정덕 초년에 반역적인 환관이 불법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의] 잔혹한 형벌과 폭정으로 [그는] 온 바다를 독살했다. 온 바다가 혼란에 빠졌고 격변했다. 반역적인 환관이 처형되자 수많은 강도/반란군이 일어났다"고 썼다. 《강해견구집》에서 주운명은 유근의 학대가 제국을 반란으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유근을 더 긍정적으로 묘사한 명나라 역사가 중 한 명은 료신이로, 그는 "유근의 '규정 변경'에 대한 간략한 연구"에서 곡물 재고 조사는 유근이 뇌물이나 복수를 얻으려는 욕망보다는 북부 및 서부 국경의 곡물을 보충해야 할 필요성에 더 기인했다고 주장한다.[9]
《무종실록》에서 유근은 다시 매우 부정적인 방식으로 묘사된다. 그가 때때로 강도 행위를 막기 위해 쉴 새 없이 일했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그가 반도들과 개인적으로 연관되어 그들의 반란을 지원했다는 주장도 있어, 그의 반란과의 관계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듯하다.[9] 유근의 몰락과 함께 반란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건들 사이의 관계는 불분명하다.[9]
1510년 반란의 일본 최고 학자인 니시무라 겐쇼는 이 반란이 계략을 꾸미는 환관들에게 조정이 장악당하면서 정덕제의 약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는 환관들이 운영하는 광범위한 정보망이 제국을 공황 상태에 빠뜨렸고 황실 영지가 농민들을 그들의 토지와 생계에서 몰아내 반란에 더 많은 지원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9]
7. 1. 유교적 관점에서의 평가
유교 학자들은 환관을 권력을 찬탈한 자로 여겼는데, 그들이 과거 제도와는 별개로 권력을 얻었기 때문이다.[1] 1624년, 어사 양련은 황제에게 환관 위충현을 탄핵할 것을 간청하면서, 환관이 궁궐 생활 이외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왕진과 유근과 같은 오만하고 불법적인 환관들조차 즉시 처형되었다. 그래서 왕조는 오늘날까지 지속되었다"고 말했다.[1]유교 학자들이 쓴 역사에서 팔호와 특히 유근을 포함한 환관들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유근은 정덕제의 통치 말기에 반란이 발발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다. 1513년에 쓰여진 1510년 반란에 대한 최초의 완전한 이야기인 "강회에서 진압된 반란"에서 왕오(王鏊)는 유근이 반란의 책임자라고 주장하며 "정덕 초년에 반역적인 환관이 불법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의] 잔혹한 형벌과 폭정으로 [그는] 온 바다를 독살했다. 온 바다가 혼란에 빠졌고 격변했다. 반역적인 환관이 처형되자 수많은 강도/반란군이 일어났다"고 썼다. 《강해견구집》에서 주운명은 유근의 학대가 제국을 반란으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9]
반면에, "유근의 '규정 변경'에 대한 간략한 연구"에서 료신이는 곡물 재고 조사는 유근이 뇌물이나 복수를 얻으려는 욕망보다는 북부 및 서부 국경의 곡물을 보충해야 할 필요성에 더 기인했다고 주장하며 유근에 대한 다소 긍정적인 평가를 제시하였다.[9] 《무종실록》에서 유근은 다시 매우 부정적인 방식으로 묘사된다. 그가 때때로 강도 행위를 막기 위해 쉴 새 없이 일했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그가 반도들과 개인적으로 연관되어 그들의 반란을 지원했다는 주장도 있어, 그의 반란과의 관계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듯하다.[9] 1510년 반란의 일본 최고 학자인 니시무라 겐쇼는 이 반란이 계략을 꾸미는 환관들에게 조정이 장악당하면서 정덕제의 약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9]
7. 2. 현대적 관점에서의 평가
유교 학자들은 환관을 권력을 찬탈한 자로 여겼는데, 그들이 과거 제도와는 별개로 권력을 얻었기 때문이다.[1] 유교 학자들이 쓴 역사에서 팔호와 특히 유근을 포함한 환관들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유근은 정덕제의 통치 말기에 반란이 발발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9] 1513년에 쓰여진 1510년 반란에 대한 최초의 완전한 이야기인 "강회에서 진압된 반란"에서 왕오(王鏊)는 유근이 반란의 책임자라고 주장하며 "정덕 초년에 반역적인 환관이 불법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의] 잔혹한 형벌과 폭정으로 [그는] 온 바다를 독살했다. 온 바다가 혼란에 빠졌고 격변했다. 반역적인 환관이 처형되자 수많은 강도/반란군이 일어났다"고 썼다. 《강해견구집》에서 주운명은 유근의 학대가 제국을 반란으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어사 양련은 황제에게 환관 위충현을 탄핵할 것을 간청했는데, 그는 서신에서 환관이 궁궐 생활 이외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근을 언급하며 "왕진과 유근과 같은 오만하고 불법적인 환관들조차 즉시 처형되었다. 그래서 왕조는 오늘날까지 지속되었다"고 말했다.[1]
무종실록에서 유근은 다시 매우 부정적인 방식으로 묘사된다. 그가 때때로 강도 행위를 막기 위해 쉴 새 없이 일했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그가 반도들과 개인적으로 연관되어 그들의 반란을 지원했다는 주장도 있어, 그의 반란과의 관계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듯하다.[9] 유근의 몰락과 함께 반란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건들 사이의 관계는 불분명하다.[9]
반면, 유근을 더 긍정적으로 묘사한 명나라 역사가 중 한 명은 료신이로, 그는 "유근의 '규정 변경'에 대한 간략한 연구"에서 곡물 재고 조사는 유근이 뇌물이나 복수를 얻으려는 욕망보다는 북부 및 서부 국경의 곡물을 보충해야 할 필요성에 더 기인했다고 주장한다.[9] 1510년 반란의 일본 최고 학자인 니시무라 겐쇼는 이 반란이 계략을 꾸미는 환관들에게 조정이 장악당하면서 정덕제의 약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는 환관들이 운영하는 광범위한 정보망이 제국을 공황 상태에 빠뜨렸고 황실 영지가 농민들을 그들의 토지와 생계에서 몰아내 반란에 더 많은 지원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9]
7. 3. 환관 정치의 폐해
황제가 선택한 팔호가 착용한 용포는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게 되었고, 이는 출세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팔호는 많은 소년과 청년들에게 거세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믿게 하여 거세를 하도록 설득했다.[8]팔호는 중국 고전 역사서와 현대 학문에서 환관이 중화 제국에서 얼마나 큰 권력을 가졌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중국 고전 설화집에서도 팔호와 그들의 악명이 여러 번 언급된다. 내행창의 수장인 유근은 관료들에게 무릎을 꿇고, 때로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태형을 명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가졌다.[13] 내행창은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체포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또한 동창은 "제국의 공포 기구"이자 "게슈타포와 같은 조직"이라고 칭해졌다.[13]
8. 대중문화 속 팔호
8. 1. 고전 문화
유진은 여러 희곡과 소설에 등장한다.[17]청나라 시대에 인기를 얻은 희곡 《파먼사》는 유진을 소재로 한 가장 유명한 희곡으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45년에 발견되었다. 이 고전적인 경극에서 유진은 "내 성은 류, 이름은 진... 일곱 살에 거세되어 2년 후 황궁에 들어갔다... 정덕 황제가 즉위하도록 도왔다"는 대사와 함께 붉은 얼굴로 분장한 인물(하화롄, xiahualian)로 묘사되는데, 이는 유진의 "거친 특성과 강렬한 권력"을 나타낸다. 《파먼사》는 유명한 살인 사건을 다루며, 유진은 법정에 재심을 명령하여 범인들을 처벌하는 결단력 있는 인물로 묘사되지만, 그의 결정은 자신의 어머니인 황태후의 지원이나 견제를 받는다. 이 희곡은 유진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묘사하며, 서태후가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1950년에 촬영된 유명한 비디오 녹화본과 몇몇 유명한 오디오 녹음본이 있다.[17]
청나라 시대에 쓰여진 소설 《팔검칠협 오의평문전후전(八劍七俠五義平門前後傳)》과 《산먼지에(三門街)》에서 유진은 황제에게 아름다운 여성과 풍경을 약속하며 수도의 안전을 벗어나 쑤저우로 유인하고, 칭저우, 산둥에 기반을 둔 세 명의 산적 두목과의 연계를 이용하여 황제의 수행단을 공격하게 하는 음모를 꾸미는 인물로 등장한다. 황제는 형제 쌍둥이의 용감함으로 구출된다.[9]
린지우를 권력에서 제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항카이는 유진과 같은 신핑 출신이어서 그를 소재로 한 많은 희곡을 썼다.[17]
8. 2. 대중문화
2015년 비디오 게임 어쌔신 크리드 크로니클: 차이나에서 팔호는 주요 적대 세력으로 등장하며, 중국에서 상당한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템플 기사단의 고위 구성원으로 묘사된다. 게임은 주인공인 사오 쥔이 수년 전 중국 암살자 형제단을 숙청한 것에 대한 복수로 팔호들을 하나씩 사냥하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게임 내에서 표적으로 등장하는 팔호는 가오 펑, 구 다용(게임에서는 위 다용으로 개명), 웨이 빈, 추 주, 장 용 단 5명이며, 나머지 팔호들은 게임 시작 전에 사망한 것으로 언급된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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