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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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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하는 14세기 말 해서여진 출신으로 명나라 군대에 포획된 후 환관으로 활동하며, 명나라 영락제 치세에 아무르강 유역 원정을 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1409년부터 1432년까지 여러 차례 누르간 지역을 원정하며, 명나라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영녕사를 건립했다. 이후 요동 지역 방어를 담당했으나, 말년에는 여진족과의 내통 혐의로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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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하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이시하
원어 이름중국어: 亦失哈
로마자 표기: Yìshīhā
몽골어: ᠢᠰᠢᠬᠠ
로마자 표기: Isiq-a
직업명나라 탐험가, 외교관
활동 기간1409년 - 1451년
국적명나라

2. 어린 시절

이시하는 해서여진 출신으로 여겨지며,[3][4] 그의 출자에 대해서는 『명사』 등에 기록이 부족하여[24] 명확하지 않은 점이 많다. 그러나 『명실록』에는 그가 "해서 여진인"의 친족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원말 명초 여진인 수령 샤앙하와 연관된 해서 여진의 유력 가문 출신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배경은 훗날 이시하가 여진족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말, 명나라 홍무제는 아들들을 왕으로 봉하여 변경 방어를 맡기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중 북방 방어를 담당하던 연왕 주체(훗날의 영락제)는 여러 차례 북방 원정에 나서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다. 홍무 28년(1395년), 연왕 주체는 해서 여진을 공격하여 샤앙하 세력을 격파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시하가 명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혀 연왕을 섬기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3]

이후 그는 환관이 되어 명나라 황실에서 활동했으며, 중요한 환관이었던 왕진과 조길상 밑에서 일하기도 했다.[3] 현대 역사가들은 그가 황실 정치에 참여하고 만주족(여진족) 출신인 영락제의 후궁들을 섬기면서 점차 두각을 나타냈을 것으로 추정한다.[5][6]

홍무제 사후 건문제가 즉위하자, 연왕 주체는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가 되기 위해 정난의 역을 일으켰다. 당시 이시하의 구체적인 행적은 불분명하지만, 영락제를 섬겼던 다른 여진인들처럼 이 정변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3. 아무르강 원정

명나라 영락제(재위 1402–1424) 시기, 환관 정화인도양으로 대규모 원정을 떠나고 사신 진정이 육로로 티무르 제국의 수도 헤라트에 도달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또 다른 환관인 이시하 역시 북방 아무르강 유역으로의 원정을 이끌었다.[7]

1409년, 이미 만주 남부의 해서여진, 건주여진과 관계를 맺고 있던 영락제는 이시하에게 아무르강 하류 지역 원정을 지시했다. 이는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야인여진에게 명나라의 힘을 과시하고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명나라가 몽골과 전쟁을 벌일 때 후방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3]

이시하는 1411년부터 선덕제 시기인 1432년까지 총 아홉 차례[4]에 걸쳐 아무르강 유역으로 원정을 떠났다. 주요 활동 거점은 현재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방의 티르 마을 근처로, 명나라는 이곳을 特林|특린중국어이라 불렀다. 이시하는 이곳에 누르간 도지휘사사를 설치하여 아무르강 유역 일대를 명나라의 간접적인 영향력 아래 두려 했으며[3], 이는 과거 원나라가 동정원수부를 두었던 지역이기도 했다.[8]

또한 이시하는 티르 절벽에 관음보살을 모시는 영녕사(永寧寺)라는 불교 사찰을 건립하고(1413년), 이후 현지 사정으로 파괴된 사찰을 재건(1432년)하기도 했다.[3][8][17] 각 사찰 건립 시에는 원정을 기념하는 비석(영녕사비)을 세웠는데, 이 비석에는 중국어, 몽골어, 여진어 세 가지 문자로 원정의 경과와 현지 풍속 등이 기록되어 있다.[3][9] 이 비석들은 현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르세니예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10][18][19]

원정 대상이었던 '야인여진'은 특정 부족 명칭이라기보다는 아무르강 유역에 거주하던 퉁구스계 민족이나 니브흐족[11] 등 여러 집단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시하의 마지막 원정은 1432년 누르간 족장의 교체를 지원하는 임무였으며, 이후 명나라의 공식적인 누르간 원정은 중단되었다.[3][16] 이시하의 원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시기별로 나누어 하위 문단에서 설명한다.

3. 1. 영락제 시기 (1차 ~ 5차 원정)

정난의 변을 통해 즉위한 영락제 (재위 1402–1424)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했다. 이 시기 환관 정화인도양으로 대규모 원정을 떠났고, 사신 진정이 육로를 통해 티무르 제국의 수도 헤라트에 도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환관인 이시하 역시 북방으로의 원정을 이끌었다.[7] 영락제는 이미 만주 남부의 해서여진, 건주여진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1409년에는 이시하에게 아무르강 하류 지역 원정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야인여진에게 명나라의 힘을 과시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수립하며, 명나라가 동몽골과 전쟁을 벌일 때 후방의 위협을 없애기 위한 목적이었다.[3] 영락 원년(1403년) 남만주에 건주위, 북만주에 올자위가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다수의 여진인이 명나라에 조공했으며, 흑룡강 유역에는 명나라가 설치한 기미 위소가 다수 존재했다.

=== 제1차 원정 (1411년) ===

약 2년간의 준비 끝에, 1411년 이시하는 1,000여 명의 병력과 25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길림시에서[3] 숭가리강을 따라 내려가 아무르강으로 진입했다. '야인여진'은 이 원정에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이시하는 부족 지도자들에게 선물을 제공하고, 명나라가 特林|특린중국어이라 부르던 곳, 현재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방의 티르 마을 근처에 누르간 도지휘사사를 설치했다.[3] 이곳은 과거 원나라가 1260년부터 1320년까지 동정원수부를 두었던 지역이기도 했다.[8] 누르간 도지휘사사는 아무르강 유역 대부분과 숭가리강, 우수리강, 우르미강, 무링강, 넨강 유역을 관할했다.[4] 이시하는 현지 유력자들을 모아 명나라 관직을 부여했으며[27], 이는 직접 통치보다는 기미 정책에 따른 회유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1412년 여름, 이시하는 누르간의 유력자인 준토노(俊土奴), 탑실(塔失) 등 178명의 '야인여진' 조공 사절단을 데리고 명나라 수도로 돌아왔다.[3][28] 영락제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11개의 위소(지아만(吉阿滿)·올랄(兀喇)·순민(順民)·낭하아르(囊哈兒)·고로(固嚕)·만족(滿涇)·하아만(哈兒蠻)·탑정(塔丁)·야손륜(野孫倫)·가목(假木)·불사목(弗思木))를 신설했다.[28] 또한, 과거 몽골 제국이 설치했던 누르간 지역의 역참(자무치) 제도를 재정비하도록 명령했다.[29]

=== 제2차 원정 (1413년 ~ 1414년) ===

1860년경 티르 절벽 꼭대기에 있던 비석 기둥. 이시하의 두 번째 사찰 관련 유적으로 추정된다.


1412년 겨울, 이시하는 다시 영락제의 명을 받아 누르간 방면으로 출발하여 1413년부터 1414년까지 약 1년간 티르에 머물렀다.[5] 이 원정 기간 동안 이시하는 "해외 고이 제민(海外苦夷諸民)", 즉 마미야 해협 건너편 사할린 섬 중부의 구이(고이)(사할린 아이누)에게까지 조공을 촉구했다고 전해진다.[30] 일부 증거(명나라 예부에서 발급한 인장이 흑룡강성 이란현에서 발견됨)는 1413년 이시하가 사할린 섬 인근 해안을 방문하여 현지 부족장에게 명나라 관직을 수여했음을 시사한다.[4]

이 원정은 조선에도 알려져, 『조선왕조실록』에는 영락 11년(1413년) 정월부터 4월까지 길림 방면에서 대규모 선박 건조 작업이 있었고, 명군이 230척(혹은 23척의 오기)의 배로 송화강을 따라 내려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31]

영락 11년(1413년) 9월 22일, 이시하는 티르 절벽 위에 관음보살을 모시는 불교 사찰인 영녕사 (永寧寺, 영원한 평화의 사찰)를 건립하고[32], 자신의 원정을 기록한 영녕사비(정식 명칭: 칙수노아간영녕사기碑)를 세웠다. 이 비문은 중국어, 몽골어, 여진어 세 가지 언어로 작성되었다.[3][9] 현재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르세니예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비석에는 현지 주민들이 활쏘기와 낚시에 능하며, 물고기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0]

당시 '야인여진'에 대한 상세한 민족지학적 자료는 중국 기록에 부족하지만, 이들은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퉁구스계 민족과 니브흐족[11] 등 여러 집단을 포괄하는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중반 기록에 따르면 티르는 니브흐족의 정착지였으며[12][13], 인근에는 또 다른 퉁구스계 민족인 울치족도 거주했다.[14]

=== 제3차 ~ 제5차 원정 ===

선덕 연간에 세워진 『중수영녕사기』 비문에는 "영락(永樂) 중, 상(上, 영락제)이 내관(內官) 이시하 등을 명하여... 다섯 차례 그 나라(누르간)에 이르게 하였다(凡五次至其國)"[34]는 기록이 있어, 영락제 재위 기간 동안 이시하의 누르간 원정은 총 5차례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영락 9년(1411년)과 영락 11년(1413년)의 원정을 제외한 나머지 세 차례의 원정에 대해서는 『명실록』을 포함한 사료에 구체적인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상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다만, 선덕 연간에 누르간에 파견되었던 조선총병관(造船總兵官) 유청(劉淸)이 "영락 18년(1420년)에 누르간에 이르렀다"고 기록한 점으로 미루어, 영락 18년(1420년)에서 영락 19년(1421년) 무렵에 또 한 차례의 원정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3], 나머지 두 차례 원정의 시기와 내용은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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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 시기 동안 누르간의 원주민들은 명나라 조정에 여러 차례 조공 및 무역 사절단을 보냈다.[3] 이시하의 원정은 영락제의 적극적인 대외 확장 정책의 일환으로, 북방 경략과 기미 정책을 통해 명나라의 영향력을 아무르강 유역까지 확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2. 선덕제 시기 (6차 ~ 7차 원정)

영락제가 사망하고 홍희제의 짧은 치세 동안 대외 원정은 잠시 억제되었으나, 선덕제(재위 1425–1435)가 즉위하면서 누르간(奴兒干)에 대한 정책은 다시 이어졌다.

홍희 원년(1425년) 11월, 선덕제는 이시하(亦失哈)와 그의 부하 1,050명에게 원정 비용으로 사초(賜鈔)를 지급하고[35], 요동의 조선총병관(造船總兵官) 유청(劉清)에게 누르간 원정에 사용할 선박 건조를 지시했다. 선덕 원년(1426년) 5월경, 이시하는 6번째 원정에 나서 흑룡강을 따라 내려가며 여진족을 회유하고 누르간에 도착했다.[36] 그는 영녕사(永寧寺)를 정비하고 현지 유력자들과 조공 무역을 진행한 뒤, 겨울을 보낸 뒤 선덕 2년(1427년) 여름경 명나라 수도로 귀환했다. 같은 해 8월, 고랑올위(考郎兀衛)의 극철(克徹), 둔하위(屯河衛)의 부얀투(不顔禿), 툭두하위(禿都河衛)의 탈니가(脫你哥) 등[37][38][39] 흑룡강 유역의 여진족 유력자들이 이시하를 따라 명나라에 조공하러 왔다.

이시하가 귀환한 직후인 같은 해 9월, 다음 원정이 계획되었는데, 기존의 3배인 3,000명의 병력을 동원하는 최대 규모로 계획되었다.[40] 그러나 대규모 원정 준비는 송화강 선창(船廠)에 큰 부담이 되어 "조선(造船)과 운량(運糧)에 소비되는 바가 실로 막대하고", "조선이 쉽지 않은"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선덕 4년(1429년) 12월, 선덕제는 원정 계획을 일시 중단시키고, 이시하에게는 준비된 물자를 요동 관청 창고에 보관한 뒤 수도 베이징으로 돌아오도록 명령했다.[41] 선덕 5년(1430년) 8월에 원정 명령이 다시 내려졌으나[42], 같은 해 11월 외적의 침입으로 송화강에서의 선박 건조가 다시 중지되었다.[43]

선덕 7년(1432년), 조선 군사(軍士)의 미귀환 문제 등이 해결되고[44] 마침내 군선 준비가 완료되자, 이시하는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누르간 원정에 나섰다. 이번 원정은 병력 2,000명, 대형 선박 50척으로 이전 원정보다 거의 두 배 규모였으며[5], 베이징에 머물던 새로운 누르간 부족장을 현지로 데려가 즉위시키는 임무도 맡았다.[3][16]

누르간에 도착했을 때 이시하가 세웠던 첫 영녕사는 현지 주민들에 의해 파괴된 상태였으나, 이시하는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이전과 같이 현지 유력자들을 모아 조공 무역을 진행했다. 선덕 8년(1433년) 3월 1일, 이시하는 영녕사를 다시 짓고 이를 기념하는 두 번째 비석인 『중수영녕사기(重修永寧寺記)』를 세웠다.[45] 현대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두 번째 영녕사는 첫 번째 절터(티르 절벽에서 서쪽으로 약 90m 떨어진 지점)가 아닌, 원나라 시기 영녕사 터 위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다.[8][17] 이 두 번째 비석 역시 현재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르세니예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18][19]

같은 해 8월, 이시하는 불제위(弗提衛)의 불가노(佛家奴) 등 여진족 유력자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귀환했다.[46] 일부 인원은 일정이 늦어져 선덕 9년(1434년) 2월에야 돌아왔다.[47] 이 일곱 번째 원정이 명나라의 마지막 누르간 원정이 되었다. 이후에도 원정 계획은 있었으나 실행되지 않았으며, 선덕 10년(1435년)에는 누르간 도지휘사사(奴兒干都司)도 폐지되었다.

4. 요동 방어 임무와 말년

1430년대에 명나라선덕제가 해상 및 하천 탐험을 중단하면서, 정화와 마찬가지로 이시하의 해상 경력도 마무리되었다. 선덕제 9년(1434년)에는 만주 지역 여진족들이 기근으로 고통받아 딸을 노예로 팔고 요동으로 이주하여 명나라 정부에 구호를 요청하는 상황이 발생했다.[20][21]

요동 지역의 방어를 책임지는 초대 "요동 태감"은 이시하와 같은 여진족 출신인 왕언이었다. 왕언은 30년간 요동 태감으로 재직한 후 1434년 3월 퇴임하여 수도 북경으로 돌아갔다. 후임으로는 완요민이 임명되었으나, 누르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여진족의 공격을 받아 물자를 빼앗기는 실수를 저질러 같은 해 4월 투옥되었다. 이들의 뒤를 이어 누르간 원정을 마친 이시하가 요동 태감으로 임명되었으며, 늦어도 1435년(선덕 10년)부터는 이 직책을 맡아 15년 이상 유지했다.[3][15]

그러나 북방에서 오이라트의 위협이 커지던 정통 14년(1449년), 이시하는 동족인 여진족과 결탁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았다. 비록 죄는 면했지만, 이 사건 이후 사료에서 '이시하(亦失哈)'라는 이름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일부 기록에서는 오이라트 몽골족 수장 에센 타이시의 침략에 대한 그의 방어 수행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1449년에서 1451년 사이에 해임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

경태 연간 이후 사료에 등장하는 '이신(李信)'이라는 인물이 이시하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이신'은 토목의 변으로 혼란했던 명나라 조정에서 이전과 같이 요동 방면의 방비 계획에 참여했다.[48][49] 하지만 이번에는 건주 여진의 지도자 이만주와 내통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아 북경으로 소환되었다.[50] 이 소환 이후 이시하(또는 이신)의 행방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3]

5. 연표

wikitext

연도사건
1395년 (홍무 28년)연왕 주체에게 포로가 됨
1399년 (건문 원년) ~ 1402년 (건문 4년)정난의 변에 참여
1403년 (영락 원년)연왕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
1409년 (영락 7년)누르간 원정 계획 시작
1411년 (영락 9년) ~ 1412년 (영락 10년)제1차 누르간 원정. 같은 해, 누르간 도사 설치
1412년 (영락 10년) ~ 1413년 (영락 11년)제2차 누르간 원정
1414년 (영락 12년) ~ 1424년 (영락 22년)제3·4·5차 누르간 원정 (정확한 시기는 불명)
1425년 (홍희 원년)홍희제 사망 후 선덕제 즉위. 11월, 제6차 누르간 원정 준비 시작 (이시하 및 부하 1050명에게 사초 지급)[35]
1426년 (선덕 원년) ~ 1427년 (선덕 2년)제6차 누르간 원정. 누르간 영녕사 정비 및 조공 무역 수행[36]
1429년 (선덕 4년)대규모 누르간 원정 계획이 수립되었으나[40], 조선(造船) 및 운량(運糧)의 어려움으로 12월에 계획 일시 중지. 이시하는 요동의 물자를 관고에 맡기고 수도 북경으로 귀환 명령을 받음[41]
1432년 (선덕 7년) ~ 1433년 (선덕 8년)제7차 누르간 원정 (병력 2000명, 거선 50척). 파괴된 영녕사를 수리하고 1433년 3월 1일 중수영녕사기(重修永寧寺記) 비석 건립[45]. 같은 해 8월 북경으로 귀환[46]
1435년 (선덕 10년) 경요동 태감으로 임명된 것으로 추정. 같은 해, 누르간 도사 폐지
1449년 (정통 14년)동족인 여진족과 결탁했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죄는 면함. 이후 이시하(亦失哈)라는 이름은 사료에 등장하지 않음
1449년 (정통 14년) ~ 1450년 (경태 원년) 이후이신(李信)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 토목의 변 이후 요동 방면 방비 계획에 참여했으나[48][49], 건주 여진의 이만주와 내통했다는 의혹으로 북경으로 소환됨[50]. 이후 행방 불명


참조

[1] 서적 Jurchen script Dictionary Relics Press
[2] 서적 The eunuchs in the Ming dynasty https://books.google[...] SUNY Press 2012-03-02
[3] 서적 Dictionary of Ming Biography, 1368–1644. Volume I (A-L)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4] 서적 Perpetual Happiness: The Ming Emperor Yongl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5] 서적 The Eunuchs in the Ming Dynasty https://books.google[...] SUNY Press
[6] 서적 The eunuchs in the Ming dynasty https://books.google[...] SUNY Press 2012-03-02
[7] 서적 Perpetual Happiness: The Ming Emperor Yon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8] 웹사이트 Важнейшие результаты исследований Лаборатории позднесредневековой археологии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 http://www.ihaefe.or[...] 2007-12-22
[9] 서적 The eunuchs in the Ming dynasty https://books.google[...] SUNY Press 2012-03-02
[10] 웹사이트 Telin Stele http://www.vostlit.i[...]
[11] 간행물 "Тырские стелы и храм «Юн Нин» в свете китайско-чжурчжэньских отношений XIV-XV вв." http://www.ethnonet.[...] Etno-zhurnal 200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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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적 The Russians on the Amur https://archive.org/[...]
[14] 웹사이트 Ульчи http://www.raipon.or[...] 2012-04-01
[15] 서적 The eunuchs in the Ming dynasty https://books.google[...] SUNY Press 2012-03-02
[16] 문서 Tsai (1996) describes the person being retired as "the commissioner in chief Kang Wang"; one has to assume that it was a Chinese title, and Chinese name, bestowed to a local (probably, Nivkh people|Nivkh]]) chief.
[17] 서적 The eunuchs in the Ming dynasty https://books.google[...] SUNY Press 2012-03-02
[18] 웹사이트 Archaeological sites of Yuan and Ming epochs in Transbaikalia and the Amur basin http://cat.inist.fr/[...] 2012-06-09
[19] 웹사이트 Объекты туризма —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Тырские храмы http://www.adm.khv.r[...] 2009-09-03
[20] 뉴스 宣德九年,女真地區災荒,女真人被迫賣兒鬻女,四處流亡,逃向遼東的女真難民,希望得到官府的賑濟。 https://www.itsfun.c[...] 2020-03-12
[21] 뉴스 亦失哈八下东洋 http://hlj.ifeng.com[...] 2014-07-08
[22] 서적 女真文辞典 文物出版社
[23] 문서 奕賡の『清語人名訳漢』によると満州語で「松鴨」を意味するという。
[24] 문서 僅かに巻304列伝192に一部言及されるのみである(『明史』巻304列伝192宦官伝1,「其他宦者若跛児干・'''亦失哈'''・喜寧・韋力転・牛玉之属、率凶狡。……亦失哈鎮遼東。敵犯広寧、亦失哈禁官軍勿出撃。百戸施帯児降敵、為脱脱不花通於亦失哈。正統十四年冬、帯児逃帰、巡按御史劉孜並劾亦失哈及他不法事。景帝命誅帯児、而置亦失哈不問」)
[25] 문서 『明太宗実録』永楽七年閏四月七日(己酉)「設奴児干都指揮使司。初頭目忽剌冬奴等来朝、已立衛。至是、復奏其地衝要、宜立元帥府。故置都司、以東寧衛指揮康旺為都指揮同知、千戸王肇舟等為都指揮僉事、統属其衆。歳貢海青等物、仍設狗站遞送」
[26] 문서 同年には[[丘福]]率いるモンゴル遠征軍も組織されており、モンゴリアとマンチュリアへの遠征は連動するものであったと考えられている。なお、丘福の遠征軍はモンゴル軍に大敗してしまったため、これを切っ掛けとして永楽帝によるモンゴリア親征が始まる。
[27] 문서 『勅修奴児干永寧寺記』「永楽九年春特遣内官'''亦失哈'''等率官軍一千餘人・巨船二十五艘復至其国、開設奴児干都司……依土立興衛所、收集旧部人民、使之自相統属」
[28] 문서 『明太宗実録』永楽十年八月十四日(丙寅)「奴児干・乞里迷・伏里其・兀剌・嚢哈児・古魯・失都哈・兀失奚等処女直野人頭目准土奴・塔失等百七十八人来朝、貢方物。置只児蛮・兀剌・順民・嚢哈児・古魯・満涇・哈児蛮・塔亭・也孫倫・可木・弗思木十一衛、命准土奴等為指揮千百戸賜誥印冠帯襲衣及鈔幣、有差」
[29] 문서 『明太宗実録』永楽十年十月十五日(丁卯)「置遼東境外満涇等四十五站。勅其提領那可孟常等曰、朝廷設奴児干都司并各衛、凡使命往来所経之地。旧有站赤者、復設。各站頭目悉恭命毋怠」
[30] 문서 『勅修奴児干永寧寺記』「十年冬、天子復命内官'''亦失哈'''等載至其国。自海西抵奴児干及海外苦夷諸民、賜男婦以衣服器用、給以穀米、宴以酒食、皆踴躍歓忻、無一人梗化不率者。上復以金銀等物為択地而建寺、柔化斯民……」
[31] 문서 『朝鮮実録』太宗十四年二月庚戌「永吉道都安撫使李従茂報、自鏡城二十五日程、羅毛羅住兀良哈指揮阿老管下千戸毛下也進言曰、女直都事也羅介率中原数多軍人、於前年正月、云屯隠出来、自正月至四月造大船及汲水小船、各二百三十艘、載軍人泛自松渇江、歴愁下江、向愁濱江、将築巨陽城・慶源・薰春城、実之以吾都里・兀良哈。上曰、此人等毎以如此事来告。上国之兵雖来、豈以船過鉄嶺乎。此必虚語也。抑或中原辺将造船於此地耳」
[32] 문서 『勅修奴児干永寧寺記』「十一年秋、卜奴児干西有站満径、站之左山高而秀麗、先是已建観音堂於其上、今造寺塑仏、形勢優雅、粲然可観……」
[33] 문서 中村2008,52頁
[34] 문서 『重修永寧寺記』「……洪武間、遣使至其国而未通。永楽中、上命内官'''亦失哈'''等□、鋭駕大航、五至其国、撫諭慰安、設奴児干都司」
[35] 문서 『明宣宗実録』洪熙元年十一月二十日(乙卯)「勅遼東都司、賜隨内官'''亦失哈'''等往奴児干官軍一千五十人鈔有差」
[36] 서적 重修永寧寺記
[37] 서적 明宣宗実録 1427-08-05
[38] 서적 明宣宗実録 1427-08-21
[39] 서적 明宣宗実録 1427-08-23
[40] 서적 明宣宗実録 1427-09-20
[41] 서적 明宣宗実録 1429-12-20
[42] 서적 明宣宗実録 1430-08-02
[43] 서적 明宣宗実録 1430-11-13
[44] 서적 明宣宗実録 1432-05-09
[45] 서적 重修永寧寺記
[46] 서적 明宣宗実録 1433-08-14
[47] 서적 明宣宗実録 1434-02-24
[48] 서적 明英宗実録 1450-02-18
[49] 서적 明英宗実録 1450-04-20
[50] 서적 明英宗実録 145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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