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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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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는 콜롬비아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792년 콜롬비아 쿠쿠타에서 태어났다. 그는 1810년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보야카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활약했으며, 1821년 그란콜롬비아의 부통령을 역임했다. 연방제를 주장하며 시몬 볼리바르와 대립했고,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로 추방되기도 했다. 1832년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정교분리, 노예 무역 폐지, 공교육 확립 등 민정에 힘썼으며, 1840년 담석으로 사망했다. 그는 콜롬비아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평가받으며, 2000 콜롬비아 페소 지폐에 초상이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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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프란시스코 호세 데 파울라 산탄데르 이 오마냐
출생일1792년 4월 2일
출생지빌라델로사리오, 팜플로나 지방,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
사망일1840년 5월 6일
사망지산타페데보고타, 쿤디나마르카,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국적누에바그라나다
정당연방주의
배우자식스타 폰톤
자녀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헤수스 바르톨로메
클레멘티나 산탄데르 이 폰톤
식스타 툴리아 산탄데르 이 폰톤
모교콜레히오 마요르 데 산바르톨로메
산토토마스 대학교
서명
군사 경력
복무 기간1810년-1819년
충성쿤디나마르카 1810년-1812년
누에바그라나다 1812년-1816년
베네수엘라 1816년-1818년
1814년 1818년-1819년
그란콜롬비아 1819년
계급사단장
전투콜롬비아 독립 전쟁
산빅토리노 전투
라그리타 전투
쿠쿠타 계곡 방어 (1813년)
카리요 평원 전투
쿠쿠타 재정복 (1814년)
누에바그라나다 재정복
카치리 전투
카사나레 침공 (1819년)
볼리바르의 누에바그라나다 해방 작전
파야 전투
가메사 전투
바르가스 습지 전투
보야카 전투
베네수엘라 독립 전쟁
소속누에바그라나다군 (1810년-1816년)
누에바그라나다 및 베네수엘라 해방군 (1816년-1819년)
그란콜롬비아군 (1819년)
훈장보야카 십자훈장
해방자 훈장
쿤디나마르카 해방자 메달
정치 경력
직위제1대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대통령
제5대 그란콜롬비아 부통령
대통령 임기 시작1832년 10월 7일
대통령 임기 종료1837년 4월 1일
부통령호세 이그나시오 데 마르케스
대통령 전임자신설 직위
대통령 후임자호세 이그나시오 데 마르케스
부통령 임기 시작1821년 11월 3일
부통령 임기 종료1827년 9월 19일
부통령 대통령시몬 볼리바르
부통령 전임자호세 마리아 델 카스티요
부통령 후임자도밍고 카이세도 (1830년)

2. 생애

1792년 4월 2일, 콜롬비아 쿠쿠타 인근 빌라 델 로사리오에서 카카오 농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크리올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2][3] 보고타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1810년 7월 20일 뉴 그라나다의 독립 선언을 목격하고 독립 운동에 투신, 같은 해 10월 26일 군에 입대하여 소위가 되었다.[1][9]

초기 군 복무 중 뉴 그라나다 내전을 겪으며 연방주의 진영에 가담했고, 1813년 쿠쿠타 전투 이후 시몬 볼리바르를 만나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스페인의 재정복 공세 속에서 야노스 평원으로 후퇴하여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 휘하에서 싸우기도 했으나, 1817년 기아나에서 볼리바르 군대에 다시 합류하여 그의 참모장이자 부관이 되었다.[26] 1819년 볼리바르의 그란다다 해방 작전에서는 선봉대를 이끌며 파야 전투, 바르가스 습지 전투, 결정적으로 보야카 전투에서 활약하여 뉴 그라나다 해방에 크게 기여했다. 이 공로로 볼리바르로부터 '''승리를 조직한 사나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사단장으로 진급했다.[58]

1819년 8월 뉴 그라나다 해방 이후, 볼리바르에 의해 부통령으로 임명되어 행정을 책임졌다. 1821년 대콜롬비아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어 볼리바르가 남부 해방 전쟁을 이끄는 동안 국가 운영을 총괄했다. 이 시기 그는 법치주의헌법 질서를 강조하며 연방제적 경향을 보였으나,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선호하고 헌법의 유연한 적용을 주장한 볼리바르와 점차 이념적 갈등을 겪었다. 특히 1826년 베네수엘라 반란 처리 방식과 볼리바르의 종신 대통령제 도입 시도를 둘러싸고 대립이 격화되어 1827년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1828년 9월 25일, 볼리바르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명확한 증거 부족으로 볼리바르에 의해 사면되고 추방형으로 감형되었다.[73] 이후 약 4년간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호세 데 산마르틴, 라파예트 후작, 제러미 벤담, 알렉산더 폰 훔볼트, 앤드류 잭슨 등 당대의 여러 저명인사들과 교류하고 계몽주의 사상을 접했다.

1831년 볼리바르 사망 후 대콜롬비아가 해체되자, 1832년 귀국하여 새롭게 수립된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832년부터 1836년까지 재임하며 정교분리 정책 추진, 노예 무역 폐지, 공교육 제도 확립, 보호 무역을 통한 산업 발전 등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힘썼다. 이는 그가 망명 시절 접한 자유주의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대통령 임기 만료 후에도 뉴 그라나다 대표원 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840년 4월 건강이 악화되어 의회 활동을 중단했고, 같은 해 5월 6일 보고타에서 담석으로 사망했다.[77] 그는 유언장에 "나는 부모인 후안 아구스틴 산탄데르 이 콜메나레스 씨와 마누엘라 데 오마냐 이 로드리게스 여사의 정식 결혼을 통해 쿠쿠타의 빌라 델 로사리오에서 태어났음을 선언합니다. 두 분 모두 이미 돌아가셨고, 그들의 조상 또한 귀족 가문으로 스페인 정부 하에서 명예와 특권을 누린 공적인 지위를 얻었습니다. 이는 저를 탄생조차 부정하려 했던 적들의 거짓말에 맞서기 위함입니다."라는 내용을 남겼다.

개인적으로 산탄데르는 비교적 키가 크고 균형 잡힌 체격이었으며, 진지하고 뛰어난 연설 능력을 가졌다고 묘사된다.[78] 성실한 노동자이자 열렬한 독서가였으며, 사회 계급에 관계없이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즐겼고 예술과 음악을 사랑했다.[79]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지 않았으며, 1836년 식스타 폰톤 피에드라히타와 결혼하여 세 자녀(후안, 클레멘티나, 식스타 툴리아)를 두었다. 결혼 전에도 두 명의 사생아(마누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예수스 바르톨로메)를 두었으며, 유언으로 이들을 적출자로 인정했다.[80][81] 또한 기혼 여성인 니콜라사 데 이바녜스와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1. 초기 생애 (1792년 ~ 1810년)

프란시스코 호세 데 파울라 산탄데르 이 오마냐(Francisco José de Paula Santander y Omañaes)는 1792년 4월 2일, 당시 신그라나다 부왕령 팜플로나 주에 속했던 빌라 델 로사리오[2]에서 태어났다.[3] 이곳은 오늘날 콜롬비아 쿠쿠타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는 11일 후인 4월 13일, 빌라 델 로사리오의 산타 아나 예배당에서 세례를 받았다.[4]

그의 아버지 후안 아구스틴 산탄데르 콜메나레스는 산 파우스티노 데 로스 리오스 지역의 주지사이자 카카오커피 농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크리올로였고, 어머니 안토니아 마누엘라 데 오마냐 로드리게스는 신그라나다 왕국에 정착한 귀족적인 스페인 가문의 후손이었다. 부모는 산탄데르 이전에 두 아이(페드로 호세, 호세파 테레사)를 낳았으나 유아기에 사망했고, 산탄데르가 태어난 지 2년 후 여동생 호세파 돌로레스가 태어났다.[5] 산탄데르 가문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특권을 누렸으며 여러 대농장과 부동산을 소유하여 지역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6]

산탄데르는 빌라 델 로사리오의 사립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고, 읽기를 배운 후 아버지 서재의 책들을 탐독하는 열렬한 독서가가 되었다. 또한 현지 성직자에게 라틴어를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신그라나다 왕국에 공교육을 위한 학교와 훈련된 교사가 부족하다는 현실을 인지했다. 당시에는 사회 계급에 따른 차별로 인해 대다수 인구가 기본적인 교육조차 받기 어려웠고, 교육 내용은 식민 당국의 검열을 받았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어 공교육 시스템 구축에 힘쓰는 계기가 되었다.

1805년, 13세가 된 산탄데르는 더 높은 교육을 받기 위해 부왕령의 수도였던 산타페로 보내졌다. 그는 외삼촌이자 당시 산 바르톨로메 대학교 부총장이었던 니콜라스 마우리시오 데 오마냐 이 로드리게스 신부의 도움으로 이 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니콜라스 마우리시오 데 오마냐. 산탄데르의 외삼촌이자 콜롬비아 독립 선언 서명자 중 한 명이다.


외삼촌 니콜라스 마우리시오 데 오마냐는 산타페의 저명한 인물로, 도시의 계몽된 크리오요들과 교류했다. 그의 가르침은 젊은 산탄데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산탄데르는 훗날 회고록에서 외삼촌으로부터 "이 나라들이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날 필요성, 편의성, 그리고 정의"를 배웠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독립에 대한 열망은 당시 산 바르톨로메 대학교의 많은 교수들도 공유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이후 독립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08년까지 중등 교육을 마친 산탄데르는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산 바르톨로메 대학교에서 받은 교육, 특히 로마법, 스페인법, 인도법에서 배운 법 원리들은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7], 이는 나중에 그가 콜롬비아를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810년 7월 20일, 법학을 공부하던 젊은 산탄데르는 산타페에서 '독립의 함성'으로 알려지게 될 역사적인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 산타페의 크리오요들이 부왕 안토니오 호세 아마르 이 보르본의 통치에 반발하여 봉기하고, 독립 과정이 뉴 그라나다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1810년에 준타를 설립하며 독립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18세의 산탄데르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학업을 중단하고, 같은 해 10월 26일 국가방위군(''Guardias Nacionales'') 보병대대의 소위로 입대하여 깃발수가 되었다.[1][9] 이로써 그의 독립 운동 참여가 시작되었다.

2. 2. 군사 경력 (1810년 ~ 18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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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년 7월 20일, 산타페의 크리올들이 부왕 안토니오 호세 아마르 이 보르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준타를 수립하면서 뉴 그라나다에서 독립 과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젊은 학생이었던 산탄데르는 이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 18세의 나이에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1810년 10월 26일 국가방위군(''Guardias Nacionales'') 보병대대의 소위로 입대하여 깃발수가 되었다.[1][9]

1811년, 산탄데르는 카르타헤나 출신 대위 마누엘 델 카스티요 이 라다의 지휘 아래 약 300명의 병력으로 마리키타 주로 파견되는 군사 원정에 참여했다. 이 원정은 성공하여 마리키타 주가 쿤디나마르카 주에 합병되었고, 그의 부대는 1811년 6월 산타페로 돌아왔다.[10] 이후 산탄데르는 산타페의 군사 검열 부대에 배속되었고, 1812년 1월 17일에는 포파얀 주 북부의 왕당파 세력을 물리치고 돌아온 안토니오 바라야 장군의 비서가 되었다.[11]

같은 해, 뉴 그라나다에서는 안토니오 나리뇨가 이끄는 중앙주의자들과 카밀로 토레스가 이끄는 연방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산탄데르는 바라야 장군과 함께 중앙주의 군대에 속해 있었으나, 1812년 4월 바라야 장군과 다른 장교들이 연방주의자들에게 투항하면서 산탄데르도 연방주의 진영에 합류했다. 연방 의회는 그를 1812년 5월 25일 소위로, 6월 1일에는 대위로 승진시켰다.[13]

1812년 12월, 중앙주의자와 연방주의자 간의 긴장은 결국 내전으로 번졌다. 벤타케마다 전투에서 연방주의자들이 승리했지만, 1813년 1월 9일 산비크토리노 전투에서는 나리뇨가 이끄는 중앙주의자들이 효과적인 방어로 연방주의자들에게 큰 패배를 안겼다. 이 전투에서 산탄데르는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으나, 한 달 후 양측의 휴전과 포로 교환으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그는 1813년 2월 10일 연방 수도 툰하에 도착하여 의회로부터 상사 계급으로 승진했다.[14][15]

'''쿠쿠타 원정'''

호세 마리아 에스피노사가 그린 소령 산탄데르의 미니어처.


승진 후 산탄데르는 대령이 된 카스티요 이 라다 휘하의 연합 제5대대에 배속되어 베네수엘라로부터의 왕당파 침공을 막기 위해 쿠쿠타로 파견되었다. 그는 1813년 3월 쿠쿠타 전투 이후 계곡에 도착했는데, 이 전투는 망명 중이던 베네수엘라 대령 시몬 볼리바르가 승리한 전투였으며, 이때 두 사람이 처음 만났다. 산탄데르는 4월 13일 베네수엘라 국경을 넘어 라 그리타 전투에 참여하여 왕당파 좌익을 성공적으로 공격했고, 이 공로로 볼리바르의 공식 보고서에서 칭찬받았다. 그러나 산탄데르와 카스티요 이 라다는 베네수엘라 해방을 위한 볼리바르의 침공 계획에 반대하며 뉴 그라나다 군대를 국경 너머로 보내는 것이 공화국 방어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툰하의 연방 의회는 볼리바르를 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원정을 승인했다.

카스티요 이 라다는 이에 항의하며 사임했고, 제5선 대대의 지휘권은 산탄데르에게 넘어갔다. 산탄데르는 볼리바르의 원정에 동행하지 않고, 볼리바르의 명령에 따라 쿠쿠타에 남아 후방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16][17] (볼리바르가 산탄데르에게 행군을 강요했다는 다니엘 플로렌스 오리어리의 기록도 있으나, 오리어리가 당시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그 정확성에 의문이 제기된다.[18])

1813년 5월 14일 볼리바르가 놀라운 원정을 시작한 후, 21세의 상사 산탄데르는 약 200명의 병력과 제한된 자원으로 쿠쿠타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19] 그는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마라카이보에서 오는 왕당파의 침공을 여러 차례 격퇴했지만(로마 펠라다, 산 파우스티노, 리몬시토, 카파초 전투), 병력과 탄약 부족으로 추격하지는 못했다.[20]

1813년 10월, 바르톨로메 리손이 이끄는 1,300명의 대규모 왕당파 부대가 쿠쿠타 계곡을 침공했다(카리요 평원 전투). 산탄데르는 260명의 병력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파름플로나 방면의 카리요 평원으로 후퇴했다. 10월 18일, 리손의 공격으로 산탄데르의 부대는 참패하여 50명만이 살아남았고, 많은 애국자 포로와 지지자들이 처형당했다.[21] 이 패배 후 산탄데르는 군사 재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툰하 의회는 그레고르 맥그리거를 북부 군대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산탄데르는 그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1814년 초, 이들은 쿠쿠타 계곡을 성공적으로 탈환하여 리손을 베네수엘라로 몰아냈고, 산탄데르는 이 공로로 1814년 5월 31일 대령으로 승진했다.[22]

'''1816년 아푸레 전역'''

1816년, 스페인의 재정복 공세가 거세지자 산탄데르는 마누엘 드 세르비에스, 라파엘 우르다네타 등과 함께 동부의 광활한 야노스(Llanos) 평원으로 후퇴했다. 당시 야노스에는 여러 애국군 부대가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7월 16일 아라우카(Arauca) 마을에서 회의가 열렸고, 페르난도 세라노(Fernando Serrano)가 대통령으로, 산탄데르가 통합군의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산탄데르는 약 2개월간 사령관직을 수행하며 애국군을 이끌고 베네수엘라의 아푸레(Apure) 야노스로 후퇴했다. 1816년 9월, 계급은 낮았지만 카리스마를 지닌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 중령이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했고, 산탄데르는 이를 받아들여 그의 휘하에서 제3기병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파에스는 군대를 재편성하고 공세로 전환했다.

1816년 10월 8일, 엘 야구알 전투(Battle of El Yagual)에서 산탄데르와 그의 사단은 용감하게 싸워 맹렬한 기병 돌격으로 스페인 기병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이 전투는 파에스의 아푸레 군대에 큰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몇 주 후 세르비에스 장군이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로써 산탄데르는 아푸레 군대 내 최고위 네오그라나다 장교가 되었고, 1816년 남은 기간 동안 파에스 휘하에서 싸웠다.

1817년, 산탄데르는 기아나 지역에서 스페인군과 싸우고 있던 시몬 볼리바르 장군의 군대에 합류하여 그의 참모장이자 부관이 되었다. 1818년 중부 전역(Center Campaign of 1818)에서의 활약으로 볼리바르는 1818년 7월 16일 그에게 해방자 훈장(Order of the Liberator)을 수여했고, 한 달 뒤인 8월 12일에는 준장(Brigadier General)으로 승진시켰다.[26]

'''1819년 볼리바르의 그란다다 해방 작전'''

1818년 말, 베네수엘라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볼리바르는 뉴 그라나다 침공이라는 새로운 군사 작전을 계획했다. 이 작전을 위해 볼리바르는 산탄데르를 '그란다다 해방군 선봉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카사나레 주 동부 평원에서 군대를 모집하고 조직하는 임무를 맡겼다.[28][29][30] 산탄데르는 1818년 11월 29일 카사나레 주에 도착했다.[31]

당시 카사나레 주는 자원이 부족하고 애국군 지휘관들 사이의 내분으로 혼란스러웠다.[32][33][34] 산탄데르는 특유의 리더십으로 권위를 확립하고 군대 조직에 착수했다.[35] 그는 포레를 임시 수도로 하는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볼리바르를 총사령관으로 인정했다.[36][37] 또한 엄격한 규율을 확립하고 보급 체계를 구축했으며, 호아킨 파리스, 안토니오 오반도 등 유능한 장교들과 함께 '카사도레스 콘스탄테스 대대'와 '그란다다 제1선 대대' 등 약 1,200명의 병력을 성공적으로 조직했다.[38]

스페인군은 산탄데르의 활동을 감지하고 1819년 3월 말, 호세 마리아 바레이로 중령이 이끄는 1,800명의 군대로 카사나레를 침공했다.[39] 산탄데르는 야노스 깊숙이 후퇴하며 적의 보급선을 늘리고 지치게 하는 회피 전술을 사용했다.[40] 이 전략은 성공적이었고, 보급 부족과 애국군의 기습 공격, 그리고 다가오는 우기에 지친 바레이로는 결국 안데스 산맥 너머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산탄데르는 철수하는 왕당파를 공격하여 사기를 더욱 떨어뜨렸고, 라 살리나의 수비대를 격파하며 주의 방어에 성공했다.[41][42][43][44]

안데스 산맥에 도달하기 위해 동쪽 야노스(평원)를 건너는 산탄데르와 볼리바르.


1819년 5월 말, 산탄데르는 볼리바르에게 작전 준비 완료를 보고했고,[45] 볼리바르는 5월 27일 아푸레 지역 만테카에서 군대를 이끌고 출발했다. 6월 12일, 볼리바르의 군대는 타메에서 산탄데르의 군대와 합류했다.[46] 약 2,500명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그란다다와 베네수엘라 해방군'으로 명명되었으며, 볼리바르가 총사령관, 산탄데르가 선봉대 사령관을 맡았다.[47][48] 산탄데르의 제안에 따라 군대는 가장 어렵지만 경계가 허술한 파라모 데 피스바를 통과하는 경로로 안데스 산맥을 넘기로 결정했다.

우기 속에서 진행된 안데스 횡단은 극도로 힘든 여정이었다. 선봉대를 이끈 산탄데르의 부대는 6월 27일 파야에서 왕당파 수비대를 격파했다. 작전의 어려움으로 볼리바르가 잠시 중단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산탄데르와 장교들의 결연한 의지로 작전은 계속되었다.[49][50] 7월 1일부터 6일까지 군대는 혹독한 추위와 폭풍우 속에서 파라모 데 피스바를 넘었고, 많은 인명과 물자 손실을 입었다.[51][52] 7월 5일, 산탄데르의 선봉대는 툰하 주의 소차 마을에 도착했고, 이후 가메사 등지에서 왕당파 군대와 충돌했다. 7월 11일 가메사 전투에서 산탄데르는 목에 가벼운 부상을 입었고, 그의 부대 지휘관 아레돈도 대령이 전사했다.[53]

호세 마리아 에스피노사가 1824년경에 그린 보야카 전투에서 볼리바르와 산탄데르를 묘사한 그림.


1819년 7월 25일, 바르가스 습지 전투에서 산탄데르는 좌익의 선봉대를 이끌고 피카초 언덕을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세 번의 격퇴에도 불구하고, 영국 군단의 지원을 받아 감행한 절망적인 총검 돌격으로 마침내 언덕을 점령했고, 이는 후안 호세 론돈 대령의 기병 돌격과 함께 애국군의 힘겨운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54][55]

마르틴 토바르 이 토바르(1890)가 그린 산탄데르(빨간색 옷을 입고 말 위에 앉아 있음)가 보야카 다리를 건너 총검 돌격을 이끄는 모습.


바르가스 습지 전투 후, 애국군은 기만 작전을 통해 왕당파의 배후에 있는 중요 도시 툰하를 점령했다. 이는 작전 성공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56] 1819년 8월 7일, 볼리바르는 바레이로 군대가 보고타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보야카 다리에서 그들을 요격하도록 명령했다.[57] 보야카 전투에서 산탄데르가 이끄는 선봉대는 다리 근처 '카사 데 테하'에서 왕당파 선봉대와 교전을 시작했다. 산탄데르는 즉시 호아킨 파리스 중령에게 왕당파를 다리 쪽으로 공격하도록 명령하고, 안토니오 베하르 대령에게는 강을 건너 후방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동시에 호세 안토니오 안소아테기 장군이 이끄는 후방 부대가 왕당파 주력 부대를 공격하여 혼란에 빠뜨렸다. 결정적인 순간, 산탄데르는 직접 부대를 이끌고 다리를 건너 총검 돌격을 감행하여 왕당파 선봉대를 격파했고, 오후 4시 30분경 전투는 애국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59][60]

1819년 8월 10일, 산탄데르와 애국군은 승리하여 보고타에 입성했다. 이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8월 11일 현대의 소장에 해당하는 사단장 계급으로 진급했다.[58] 9월 18일 보고타에서 열린 승리 기념식에서 그는 다른 장군들과 함께 찬사를 받았으며, 작전에 참여한 모든 이들과 함께 '보야카 십자가'(현대의 보야카 훈장)를 수여받았다.[61]

2. 3. 대 콜롬비아 부통령 시기 (1819년 ~ 1828년)

1819년 8월 7일 보야카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에 승리하여 콜롬비아 해방에 기여한 후, 산탄데르는 8월 10일 시몬 볼리바르에 의해 산타페 주의 군사 총독 겸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9월 11일에는 광범위한 행정 권한을 가진 누에바그라나다 부통령이 되었다.[62] 이는 볼리바르가 베네수엘라와 누에바그라나다의 통합을 제안하기 위해 안고스투라 의회로 떠난 직후였다.

부통령으로서 산탄데르는 1819년 10월 10일, 보야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스페인 장교 38명(사령관 호세 마리아 바레이로 포함)의 처형을 명령했다.[63] 이 결정은 당시 수도 방어가 취약하다는 점, '죽음의 전쟁' 선포에 따른 조치라는 점, 그리고 1816년 스페인에 의한 애국자 처형에 대한 보복이라는 점 등을 근거로 정당화하려 했으나,[64] 볼리바르가 포로 교환을 시도하던 중이어서 큰 논란을 낳았고 그의 정치 경력에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72][65]

1819년 12월 17일, 안고스투라 의회는 누에바그라나다와 베네수엘라를 통합하여 콜롬비아 공화국(역사적으로 대콜롬비아로 불림)을 수립하는 기본법을 승인했다.[66] 이에 따라 누에바그라나다는 쿤디나마르카 주가 되었고, 산탄데르는 쿤디나마르카의 부통령으로 임명되었다.[67] 이후 1821년 11월 3일, 그는 정식으로 대콜롬비아의 부통령에 취임하였다. 볼리바르가 페루볼리비아 등 남미 다른 지역의 해방 전쟁에 집중하는 동안, 산탄데르는 수도 보고타에서 실질적인 국가 행정을 책임졌다. 그는 심각한 재정난 속에서도 군대에 대한 자금 지원[69] 등 국가 운영에 힘썼으며, 볼리바르는 그의 행정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여러 차례 사임을 만류하기도 했다.[70][71]

산티아고 마르티네스 델가도(Santiago Martinez Delgado) 화가의 산탄데르 장군 수채화


초기에는 볼리바르의 가까운 동맹이었으나, 점차 정치적, 이념적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산탄데르는 법치주의헌법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연방제적 국가 운영을 선호한 반면, 볼리바르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바탕으로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우선시하며 헌법의 유연한 적용을 주장했다.

이러한 갈등은 1826년 베네수엘라에서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가 일으킨 분리주의 반란 때 더욱 심화되었다. 산탄데르는 반란 세력을 처벌하고 헌법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페루에서 돌아온 볼리바르는 파에스를 사면하고 오히려 베네수엘라 최고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산탄데르는 이를 중앙 정부의 권위와 법치주의가 대통령 개인에 의해 훼손된 사례로 받아들였고,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산탄데르는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또한 산탄데르는 볼리바르가 1821년 헌법이 개정을 허용한 시기(10년 후) 이전에 헌법 개정을 시도하고, 특히 볼리비아를 위해 자신이 입안했던 종신 대통령제와 후계자 지명권을 포함한 헌법을 대콜롬비아에 도입하려 한 것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이것이 국가를 사실상 군주제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28년 4월, 오카냐에서 열린 헌법 회의에서 산탄데르 지지자들은 볼리바르의 중앙집권적 개혁 시도를 저지했다. 회의가 성과 없이 끝나자, 볼리바르는 8월 27일 스스로 독재자를 선언하고 부통령직을 폐지했다. 산탄데르는 해임되어 미국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는 사실상 좌천이었다. 산탄데르와 그의 지지자들은 볼리바르의 이러한 조치가 자유주의공화주의 원칙을 배신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1828년 9월 25일, 볼리바르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배후로 산탄데르가 지목되어 신속한 군사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가 직접 음모에 가담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부족했고, 오히려 암살 자체에는 반대했다는 정황 등이 고려되어 볼리바르에 의해 사면되고 프랑스로의 추방형으로 감형되었다.[73] 사건의 정확한 진상과 산탄데르의 연루 정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으며,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산탄데르의 대 콜롬비아 부통령 시기는 막을 내렸다.

2. 4. 망명과 귀국 (1828년 ~ 1832년)

1828년 9월 25일에 발생한 시몬 볼리바르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어 프랑스로 추방되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1828년 11월 15일, 산탄데르는 보고타를 떠나 카르타헤나 데 인디아스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배를 타고 망명길에 오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12월, 카르타헤나 외곽에 도착했을 때 마리아노 몬티야 장군의 지시로 도시 진입이 금지되었고, 대신 산 페르난도 데 보카치카 요새에 수감되었다. 이는 장관회의의 망명 결정에도 불구하고 몬티야와 우르다네타에 의해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구금이었다. 산탄데르는 12월 4일부터 19일까지 열악한 환경의 요새에 갇혀 지냈으며, 이미 좋지 않았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볼리바르와 몬티야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자신의 처지를 호소했다.

12월 19일, 그는 산 호세 데 보카치카 성으로 이감되었으나 건강은 계속 나빠졌고, 몬티야의 명령으로 종이와 잉크 사용이 제한되고 편지 검열까지 당했다. 그의 친구들이 볼리바르에게 편지로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장군이 개입하여 볼리바르와 격렬한 논쟁을 벌인 끝에 산탄데르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1829년 6월 16일, 산탄데르는 '쿤디나마르카' 호 프리깃함을 타고 베네수엘라의 푸에르토 카베요로 이송되었다. 8월 19일 푸에르토 카베요에 도착한 그는 파에스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아 8월 27일 여객선 '마리아' 호를 타고 출항, 약 48일 만인 10월 15일 독일함부르크 항에 도착하며 본격적인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유럽 체류 기간 동안 산탄데르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박물관, 공장, 도서관 등을 방문하고 유럽의 저명인사들과 교류했다. 함부르크에서는 현지 신문에 그의 초상화가 실리기도 했다. 이후 벨기에브뤼셀로 거처를 옮겨 '아르헨티나 해방자' 호세 데 산마르틴 장군을 만나 남미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탄데르는 산마르틴을 "훌륭한 군인이자 매우 활기차고 영리하지만, 군주제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1830년 2월 17일에는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여 호아킨 아코스타 장군의 도움으로 프랑스 사회에 소개되었다. 파리에서는 라파예트 후작을 만나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며 깊은 인상을 받았고, 라파예트는 볼리바르와 산탄데르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에서 평소 깊이 존경하던 철학자이자 공리주의자인 제러미 벤담을 만났다. 벤담은 산탄데르를 자택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여러 책을 선물했으며, 이는 산탄데르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그는 이듬해에도 벤담을 다시 방문했다. 영국을 떠난 후에는 네덜란드를 거쳐 다시 독일로 가 함부르크의 친구들을 방문하고 프로이센으로 여행하여 1830년 7월 16일 수도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에서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만나 오찬을 함께하며 콜롬비아와 볼리바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드레스덴, 뮌헨 등 다른 독일 도시들도 여행했다.

1830년 9월에는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베로나를 거쳐 10월 6일 베네치아에 도착했고, 10월 13일 피렌체에 도착해서는 레오폴드 2세, 토스카나 대공과 마리아 안토니아 나폴리 시칠리아 공주를 접견했다. 그들은 산탄데르의 삶과 콜롬비아, 그의 귀국 의사 등에 관심을 보였다. 피렌체에서는 카밀로 보르게세 공작의 안내로 여러 박물관과 미술 아카데미를 방문하기도 했다. 12월 6일에는 로마로 가서 바티칸과 여러 유적을 방문했다.

1831년 2월 23일,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온 산탄데르는 그곳에서 1830년 12월 17일 시몬 볼리바르가 산타 마르타 근처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독립을 위한 손실이다"라고 적었다. 그의 하인이 볼리바르의 죽음을 기뻐하자 산탄데르는 "미국에서는 비참한 자들만이 볼리바르의 죽음을 기뻐할 것이다"라며 꾸짖었다.

1831년 4월, 산탄데르는 스위스를 거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6월에는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벤담과 재회하고 스코틀랜드에든버러아일랜드를 방문한 후 세 번째로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에서는 토마스 시프리아노 데 모스케라를 만났고, 그의 주선으로 9월 16일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립 1세를 접견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이후 신그라나다(콜롬비아)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1831년 11월 10일 뉴욕에 도착한 뒤 필라델피아로 이동했다. 미국에서는 나폴레옹의 형인 조세프 보나파르트와 친구가 되었고, 수도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앤드류 잭슨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한편, 콜롬비아에서는 볼리바르 사후 그의 지지자였던 라파엘 우르다네타 장군이 정권을 잡았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산탄데르 지지 세력이 확대되면서 우르다네타 정권은 붕괴되었고, 우르다네타는 유럽으로 추방되었다. 이러한 정세 변화 속에서 1832년, 산탄데르는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다.

3.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대통령 (1832년 ~ 1837년)

1832년 망명에서 돌아온 산탄데르는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72] 시몬 볼리바르 사후 그란콜롬비아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공화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 망명 기간 동안 그는 계몽주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대통령으로서 그의 정책 결정에 반영되었다. 그는 예술과 음악 애호가였으며, 특히 벨기에 혁명의 도화선이 된 오페라 "La Muette de Portici|라 뮈에트 드 포르티시fra"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다.[74]

대통령 재임 기간(1832년 ~ 1837년) 동안 산탄데르는 국가 발전을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정교분리 원칙을 추구했으며, 노예 무역을 폐지하고 공교육 제도를 확립하는 데 힘썼다. 또한, 과거 부통령 시절 자유 무역을 지지했던 것과 달리, 대통령으로서는 보호 무역 정책을 통해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산업화된 국가들과의 경제적 유대 관계 속에서 국가 발전을 도모하려는 시도였다. 1837년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

3. 1. 말년 (1837년 ~ 1840년)

1837년 대통령 임기가 끝난 후에도 산탄데르는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 남아 공화국 의회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의회 회의에 참석했지만, 1840년 4월 중병에 걸려 병상에 눕게 된 후로는 참석을 중단했다. 4월 27일부터 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과정이 일기로 기록되었다. 결국 1840년 5월 6일 오후 6시 30분경, 산탄데르는 보고타에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사망했다.[77] 사인은 담석이었다.

오랜 고통 끝에 보고타에서 사망한 산탄데르. 그는 유언에서 "조국을 사랑했던 만큼 신을 사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했다.

4. 사생활

산탄데르는 당대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키가 컸고 "균형 잡힌 체격"을 가졌다고 묘사되지만, 후년에는 체격이 더 커졌다. 그는 진지한 어조와 뛰어난 연설 능력을 지녔으며, 강한 쿠쿠테뇨(Cucuteño) 억양을 사용했다.[78] 성격적으로는 성실한 노동자이자 열렬한 독서가였고, 초기에는 진지했으나 정치에 깊이 관여하면서 점차 유쾌하고 지식인다운 면모를 보였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겨 사회 계급이나 경제적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와든 어울렸으며, 파티와 무도회에 자주 참석하고 대중 음악과 예술을 열렬히 좋아했다.[79]

산탄데르가 많은 공문서와 편지를 남겨 공적인 삶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사생활은 상당 부분 베일에 싸여 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개인적인 편지 다수가 소각되었고, 오랜 연인이었던 니콜라사 이바녜스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녀가 유럽으로 이주할 때 가져가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산탄데르의 아버지는 그가 산타페에서 공부하던 1808년에 사망했고, 어머니는 1819년 누에바 그라나다 원정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성인이 된 여동생

산탄데르의 여동생인 마리아 호세파 데 브리세뇨
마리아 호세파가 유일했는데,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마리아 호세파는 1820년 7월 19일 베네수엘라 출신의 호세 마리아 브리세뇨 멘데스 대령과 결혼했다. 그는 독립 전쟁 중 부상을 입었으며, 1819년 누에바 그라나다 원정에 참여했던 페드로 브리세뇨 대령의 형제였다. 산탄데르는 매형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망명길에 오를 때도 매형이 동행했다.

젊은 시절 대부분을 군 복무에 바친 산탄데르는 동시대 많은 이들과 달리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그는 총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두 명은 혼외 관계에서, 세 명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 혼외 자녀:
  • 마누엘 산탄데르: 산탄데르가 19세 때 국가경비대 소위로 온다에 주둔하던 시절 현지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80]
  •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예수스 바르톨로메 산탄데르 피에드라히타: 1833년 8월 23일 파스 피에드라히타 사엔츠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혼외 자녀였지만 산탄데르는 유언에서 그를 적출자로 인정했으며, 애칭 "파치토"로 부르며 애정을 보였다. "파치토"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콜롬비아 군대에서 복무하여 장군 계급에 올랐고, 1916년 사망했다.[81]


산탄데르는 1836년 2월 15일 소아차의 산 베르나르디노 교구에서 식스타 폰톤 피에드라히타와 결혼했다. 식스타와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두 사람의 관계가 로맨틱하지 않았고 때로는 차가웠으며, 당시 콜롬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식스타의 아버지를 고려하여 산탄데르가 편의상 결혼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결혼 후 태어난 세 자녀는 다음과 같다.

  • 혼인 자녀:
  • 후안: 1836년 12월 20일 출생했으나 몇 분 만에 사망하여 당시 막 개장한 보고타 중앙묘지에 매장되었다.
  • 클레멘티나: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 식스타 툴리아: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82]


결혼 생활 외에도 산탄데르는 기혼 여성인 니콜라사 데 이바녜스와 거의 20년 동안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남아있는 몇몇 편지에 따르면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했으며, 1828년 산탄데르가 망명했을 때도 관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5. 평가와 유산

시몬 볼리바르와 대립했기에 일반적인 평가는 다소 낮을 수 있지만, 산탄데르가 추진한 정책들은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높이 평가받는 측면이 많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는 제러미 벤담공리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당시 기준으로도 선진적인 교육 개혁을 실시했다.

산탄데르 사후인 1863년 제정된 리오 네그로 헌법에는 교회 권리 제한, 최대한의 개인 자유 보장, 언론 및 출판의 자유 등이 명시되었는데, 이는 산탄데르가 추구했던 가치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 헌법을 극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콜롬비아는 종종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로 불리는데, 산탄데르는 법치주의 확립을 통해 그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그는 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 “무기가 너희에게 독립을 가져다주었다면, 법이 너희에게 자유를 줄 것이다.”
  • “시민이 존경해야 할 것은 공직자들이 아니라, 법뿐이다.”
  • “우리는 어떤 것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된다. 오직 법의 노예만이 되어야 한다.”
  • “나를 공격하려는 손이 들린다면, 불명예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을 든 자에게 있다.”
  • “나는 재산과 생명까지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존심은 절대로 잃지 않겠다.”
  • “언젠가 이치와 정의가 나의 정당함을 증명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희망이 지금 권력자에게 아부하여 얻는 지위나 존경보다 더 가치가 있다.”


오늘날 2000 콜롬비아 페소 지폐에는 그의 초상이 사용되고 있다.

6.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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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1차 득표율1차 득표수2차 득표율2차 득표수결과당락
1825년 선거그란콜롬비아의 대통령1대무소속1.64%10표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3위낙선
1825년 선거그란콜롬비아의 부통령5대무소속46.57%285표71.43%70표1위
콜롬비아 부통령
당선
1832년 선거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의 대통령4대무소속75.38%49표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1위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대통령
당선
1833년 선거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의 대통령4대무소속80.13%1,012표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1위 당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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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서 Some historians have speculated that Santander was not born in Villa del Rosario but rather in the Hacienda of his father Juan Agustin, which was located near San Faustino de los Rios, where his father was governor and was later taken to be baptized in Villa del Rosario.
[3] 서적 La época de Francisco de Paula Santander Academia Colombiana de Historia
[4] 서적 Santander Crítica Colombia
[5] 서적 Santander Crítica Colom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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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Santander Crítica Colombia
[8] 서적 Santander su Iconografia Litografia Arco
[9] 서적 Santander Planeta Colombiana
[10]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11]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12] 서적 Un Nuevo Reino Universidad Externado de Colombia
[13]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14]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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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18]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19]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20]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21]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22]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23] 학술지 La Batalla de Cachirí (1816). Representaciones históricas y monumentales sobre la derrota militar de Custodio García Rovira https://dialnet.unir[...] 2017-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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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서적 Santander Crítica Colombia 1989
[26]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27] 서적 La Campaña Libertadora de 1819 Ediitorial Andes
[28]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29] 서적 1819: campaña de la Nueva Granada Universidad Externado de Colombia
[30] 서적 La Campaña Libertadora de 1819 Ediitorial Andes
[31] 서적 Apuntamientos para las memorias sobre Colombia i la Nueva Granada Imprenta de Lleras 1837
[32] 서적 La Campaña Libertadora de 1819 Ediitorial Andes
[33]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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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적 1819: campaña de la Nueva Granada Universidad Externado de Colombia
[38] 서적 Liberators: Latin America's Struggle For Independence, 1810–1830 John Mur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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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서적 La Campaña Libertadora de 1819 Ediitorial An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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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웹사이트 No es con tres ni cuatro mil hombres que se conquista el Casanare Hace 200 años: la defensa de la Provincia de Casanare por Francisco de Paula Santander https://museonaciona[...] 2024-04-04
[45] 서적 1819: campaña de la Nueva Granada Universidad Externado de Colombia
[46]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47] 서적 La Campaña Libertadora de 1819 Editorial Andes
[48] 서적 1819: campaña de la Nueva Granada Universidad Externado de Colom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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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서적 Liberators: Latin America's Struggle For Independence, 1810–1830 John Murray
[51] 서적 El General Simón Bolívar en la Campaña de la Nueva Granada de 1819 Imprenta del C. B. E.
[52]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53] 서적 Santander Editorial Plan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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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서적 Gobernantes Colombianos Interprint Editors Ltd.; Italgr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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