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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라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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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 라머스는 나치 독일에서 국무총리청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판사로 활동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이후 독일 국가 인민당에 입당하여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1932년 나치당에 입당하여 빠르게 승진하여 국무총리청 장관이 되었다. 그는 히틀러 내각에서 국가장관으로 승진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국방부 장관 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권력을 강화했다. 종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감형되어 석방된 후 196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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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라머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라머스 (1938년)
라머스 (1938년)
출생 이름한스 하인리히 라머스
출생1879년 5월 27일
출생지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실레시아 루블리니에츠
사망1962년 1월 4일 (82세)
사망지서독 뒤셀도르프
배우자엘프리데 테펠 (1913년 결혼, 1945년 사망)
자녀3명
소속 정당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과거 독일 국가인민당)
경력
소속 군대독일 제국군, 슈츠슈타펠
복무 기간1914년–1918년, 1933년–1945년
최종 계급육군 하우프트만 (대위), 슈츠슈타펠 오베르그루펜퓌러 (상급집단지도자)
참전제1차 세계 대전
훈장철십자 훈장 1급
정치 경력
직책국가지도자 겸 제국수상의 수상
임기 시작1937년 11월 26일
임기 종료1945년 4월 24일
지도자아돌프 히틀러 (총통)
차관프리드리히 빌헬름 크리칭거 (1942년–1945년)
전임직책 신설
후임직책 폐지
직책 2국무차관 겸 제국 수상부 수상
임기 시작 21933년 1월 30일
임기 종료 21937년 11월 26일
지도자 2아돌프 히틀러 (총통)
전임 2에르빈 플랑크
후임 2자신 (제국 수상 겸 제국 수상부 수상)
직책 3제국 내각 의장 (히틀러 부재 시)
임기 시작 31943년 1월
임기 종료 31945년 4월 24일

2. 초기 생애

라머스는 수의사의 아들로, 폴란드 오폴레주루블리니에츠(현재 루블리니에츠)에서 태어났다. 브로츠와프 대학교(현재 브로츠와프)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904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07년에 사법 시험에 합격했다. 1912년에는 비톰(베우텐)의 ''암츠게리히트''(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1913년 4월 29일, 그리치베 엘프리데 테펠과 결혼하여 1914년과 1918년에 각각 딸을 낳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장교로 독일 제국 육군에 입대했다. 1917년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왼쪽 눈을 잃었고,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2] 전쟁 후 ''하우프트만'' 계급으로 제대한 그는 민족 보수 정당인 독일 국가 인민당(DNVP)에 입당하여 변호사로 활동했다. 1922년 국내부 차관의 직위에 올랐다.[3] 보수주의자였던 라머스는 독일 사회민주당(SPD) 정치인을 혐오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갖고 있었으며, 1928년에 내무 장관 카를 제페링(SPD 당원)에게 질책을 받았다.

3.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상슐레지엔의 루블리니츠(현재 폴란드령 Lubliniec|루블리니에츠영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의사였다. 브레슬라우 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04년에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2]。 1907년에 사법 시험에 합격했고, 1912년에는 보이텐에서 재판관이 되었다. 1913년 4월 29일, 그리치베 엘프리데 테펠과 결혼하여 1914년과 1918년에 각각 딸을 낳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참전하여 1급 철십자 훈장과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지만, 1917년에 부상으로 왼쪽 눈을 잃었다.

전후에는 변호사로 활동하며, 독일 국가 인민당에 들어갔다. 1920년에 내무성에 들어갔고, 1922년에는 빌헬름 쿠노 내각에서 내무 차관이 되었다[3]。 보수주의자였던 라머스는 독일 사회민주당(SPD) 정치인들을 싫어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갖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1928년에 내무 장관 카를 제페링(SPD 당원)에게 질책을 받았다.

4. 나치 경력

라머스는 1932년 3월 1일 나치당(당원 번호 1,010,355)에 입당하여 빠르게 승진했다.[4] 내무부 경찰청장이 되었고, 1933년 1월 30일 나치의 권력 장악 이후에는 국무장관 직함과 함께 국무총리청 장관으로 임명되었다.[5] 빌헬름 프리크 내무부 국가장관의 추천으로 모든 정부 부서의 통신 및 수석 법률 고문이 되었다. 1933년 10월, 한스 프랑크의 독일법 아카데미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11월 26일, 히틀러 내각에서 국가장관으로 승진했으며 국무총리청 장관직을 유지했다.[2]

1939년 8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히틀러는 라머스를 "전시 내각"으로 운영될 6인 국방부 장관 회의 위원으로 임명했다.[2] 이 직책을 통해 국가 안보 및 국내 정책 관련 모든 문서를 히틀러에게 전달하기 전에 검토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 마틴 키친은 국무총리청에 부여된 권력 집중으로 인해 라머스가 "나치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고 설명한다.[7] 대부분의 정부 관료에게 라머스는 히틀러를 대신하여 발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정부 서신에 "Heil Hitler"를 서명한 최초의 관리 중 한 명이었으며, 이는 공무원에게 필수적인 인사가 되었고, 이를 사용하지 않으면 게슈타포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노골적인 반대 표시"로 간주되었다.

1933년 9월 친위대(SS)에 입대했으며(SS 번호 118,401), 1940년 4월 20일 SS-상급집단지도자 계급을 얻었다.[2]

1943년 1월부터 라머스는 히틀러가 불참하는 회의에서 내각 의장을 맡았다. 마르틴 보어만과 함께 히틀러에 대한 접근을 통제했다. 1943년 초, 전쟁으로 정권은 노동력 위기를 겪었다. 히틀러는 전쟁 경제와 국내 전선 통제를 집중하기 위해 국가, 군대, 당 대표로 구성된 3인 위원회 창설에 동의했다. 위원은 라머스(국무총리청 장관), 빌헬름 카이텔(국방군 최고사령부 사령관), 보어만이었다. 히틀러는 이들이 자신의 리더십을 위협하거나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제안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위원회는 각 부처의 뜻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조치를 제안했고, 히틀러는 대부분의 최종 결정을 নিজেই 내렸다. '드라이어아우스쉬스'(3인 위원회)로 알려진 이 위원회는 1943년 1월과 8월 사이에 11번 회의를 열었으나, 요제프 괴벨스, 알베르트 슈페어,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 등 위원회에서 배제된 히틀러 내각 장관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들은 위원회를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무너뜨리기 위해 협력했고, 결국 3인 위원회는 유명무실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라머스는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직책이 무의미해지고 마르틴 보어만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권력과 영향력을 잃었다.[9]

4. 1. 나치당 입당과 권력 장악

라머스는 1932년 3월 1일 나치당(당원 번호 1,010,355)에 입당하여[4] 빠르게 승진했다. 내무부 경찰청장이 되었고, 1933년 1월 30일 나치의 권력 장악 이후에는 국무장관 직함과 함께 국무총리청 장관으로 임명되었다.[5] 빌헬름 프리크 내무부 국가장관의 추천으로 모든 정부 부서의 통신 및 수석 법률 고문이 되었다. 1933년 10월, 한스 프랑크의 독일법 아카데미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11월 26일, 히틀러 내각에서 국가장관으로 승진했으며 국무총리청 장관직을 유지했다.[2]

1937년, 집무 중인 라머스


1939년 8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히틀러는 라머스를 "전시 내각"으로 운영될 6인 국방부 장관 회의 위원으로 임명했다.[2] 그는 이 직책을 통해 국가 안보 및 국내 정책 관련 모든 문서를 히틀러에게 전달하기 전에 검토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 마틴 키친은 국무총리청에 부여된 권력 집중으로 인해 라머스가 "나치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고 설명한다.[7] 대부분의 정부 관료에게 라머스는 히틀러를 대신하여 발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정부 서신에 "Heil Hitler"를 서명한 최초의 관리 중 한 명이었으며, 이는 공무원에게 필수적인 인사가 되었고, 이를 사용하지 않으면 게슈타포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노골적인 반대 표시"로 간주되었다. 1933년 9월 라머스는 친위대(SS)에 입대했으며(SS 번호 118,401), 1940년 4월 20일 SS-상급집단지도자 계급을 얻었다.[2]

1943년 1월부터 라머스는 히틀러가 불참하는 회의에서 내각 의장을 맡았다. 그는 마르틴 보어만과 함께 히틀러에 대한 접근을 통제했다. 1943년 초, 전쟁으로 정권은 노동력 위기를 겪었다. 히틀러는 전쟁 경제와 국내 전선 통제를 집중하기 위해 국가, 군대, 당 대표로 구성된 3인 위원회 창설에 동의했다. 위원은 라머스(국무총리청 장관), 빌헬름 카이텔(국방군 최고사령부 사령관), 보어만이었다. 히틀러는 이들이 자신의 리더십을 위협하거나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제안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위원회는 각 부처의 뜻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조치를 제안했고, 히틀러는 대부분의 최종 결정을 নিজেই 내렸다. '드라이어아우스쉬스'(3인 위원회)로 알려진 이 위원회는 1943년 1월과 8월 사이에 11번 회의를 열었으나, 요제프 괴벨스, 알베르트 슈페어,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 등 위원회에서 배제된 히틀러 내각 장관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들은 위원회를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무너뜨리기 위해 협력했고, 결국 3인 위원회는 유명무실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라머스는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직책이 무의미해지고 마르틴 보어만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권력과 영향력을 잃었다.

4. 2. 히틀러 내각과 국방장관회의

라머스는 1932년 3월 1일 나치당에 입당하여(당원 번호 1,010,355) 빠르게 승진하였다.[4] 그는 내무부 경찰청장이 되었고, 1933년 1월 30일 나치의 권력 장악 이후에는 국무장관 직함과 함께 국무총리청 장관으로 임명되었다.[5] 내무부 국가장관 빌헬름 프리크의 추천으로 그는 모든 정부 부서의 통신 및 수석 법률 고문이 되었다. 1933년 10월, 그는 한스 프랑크의 독일법 아카데미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11월 26일, 그는 히틀러 내각에서 국가장관으로 승진했으며 국무총리청 장관직을 유지했다.[2]

1939년 8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에 라머스는 히틀러에 의해 "전시 내각"으로 운영될 6인 국방부 장관 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2] 그 직책에서 그는 국가 안보 및 국내 정책과 관련된 모든 관련 문서를 히틀러에게 직접 전달되기 전에도 검토할 수 있었다. 역사가 마틴 키친은 국무총리청에 부여된 권력의 집중, 즉 그 수장이 된 라머스가 "나치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 되게 했다"고 설명한다.[7] 대부분의 정부 관료의 관점에서 라머스는 제국 내 최고의 권위자인 히틀러를 대신하여 발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4. 3. 친위대 경력

라머스는 1932년 3월 1일 나치당에 입당하여(당원 번호 1,010,355) 빠르게 승진하였다.[4] 1933년 9월에는 친위대(SS)에 입대했으며(SS 번호 118,401), 1940년 4월 20일에는 SS-상급집단지도자 계급을 얻었다.[2]

4. 4. 권력 강화와 T4 작전 관여



1932년 3월 1일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당원 번호 1,010,355)하여 곧바로 당 간부가 되었다. 9월 24일 프로이센에서 개최된 당 집회에 요제프 괴벨스와 함께 참석하여 당 간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4] 나치당의 권력 장악 이후 1933년 총리 관방 장관 · 국무 장관 직책이 주어졌고,[5] 동시에 내무 장관 빌헬름 프리크의 추천으로 전 정부 기관의 수석 법률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히틀러 내각의 무임소 대신에 취임했고, 1939년 11월 30일 국방 각료 회의 멤버가 되었다.[2] 동시에 T4 작전에도 관여했다.[6] 라머스는 이러한 입장에 근거하여 전 정부 기관으로부터 연락과 자문을 받는 동시에, 모든 정치 문서를 히틀러에게 전달되기 전에 검열할 수 있었으며 정권 내에서 영향력을 가졌다. 관료들에게 그는 히틀러를 대신하여 독일의 권위를 대표하는 존재로 비춰졌고, 역사가 마르틴 키친은 이러한 점을 들어 라머스를 "나치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7]

1933년 9월 29일 친위대(SS) 친위대 명예 지도자가 되었고, 친위대 상급대령 계급이 주어졌다. 이후 1935년 4월 20일 친위대 소장, 1938년 1월 30일 친위대 중장, 1940년 4월 20일 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다.[2]

4. 5. 2차 세계대전 중 역할

라머스는 1932년 3월 1일 나치당(당원 번호 1,010,355)에 입당하여 빠르게 승진했다.[4] 그는 내무부 경찰청장이 되었고, 1933년 1월 30일 나치의 권력 장악 이후에는 국무장관 직함과 함께 국무총리청 장관으로 임명되었다.[5] 내무부 국가장관 빌헬름 프리크의 추천으로 그는 모든 정부 부서의 통신 및 수석 법률 고문이 되었다. 1937년 11월 26일, 그는 히틀러 내각에서 무임소 대신으로 승진했으며 국무총리청 장관직을 유지했다.

1939년 8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에 라머스는 히틀러에 의해 "전시 내각"으로 운영될 6인 국방부 장관 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2] 그 직책에서 그는 국가 안보 및 국내 정책과 관련된 모든 관련 문서를 히틀러에게 직접 전달되기 전에 검토할 수 있었다. 역사가 마틴 키친은 국무총리청에 부여된 권력의 집중, 즉 그 수장이 된 라머스가 "나치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 되게 했다"고 설명한다.[7] 대부분의 정부 관료의 관점에서 라머스는 제국 내 최고의 권위자인 히틀러를 대신하여 발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라머스는 또한 정부 서신에 "Heil Hitler"를 서명한 최초의 관리 중 한 명이었다. 1933년 9월 친위대(SS 번호 118,401)에 입대했으며, 1940년 4월 20일 SS-상급집단지도자 계급을 얻었다.

1943년 1월부터 라머스는 히틀러가 회의에 불참할 때 내각 의장을 맡았다. 그는 마르틴 보어만과 함께 히틀러에 대한 접근을 점점 더 통제했다. 1943년 초, 전쟁은 정권을 위한 노동 위기를 낳았다. 히틀러는 전쟁 경제와 국내 전선의 통제를 집중하기 위해 국가, 군대 및 당의 대표로 구성된 3인 위원회 창설에 동의했다. 위원회 위원은 라머스(국무총리청 장관), 야전원수 빌헬름 카이텔(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사령관), 그리고 당을 통제한 보어만이었다. 이 위원회는 다양한 부처의 뜻에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조치를 제안하고, 히틀러는 대부분의 최종 결정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다. 곧 '드라이어아우스쉬스'(3인 위원회)로 알려진 이 위원회는 1943년 1월과 8월 사이에 11번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이는 깊이 뿌리내린 영향력을 행사하고 위원회에서 배제된 히틀러 내각 장관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요제프 괴벨스, 알베르트 슈페어,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는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고 위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함께 일했다. 그 결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3인 위원회는 무의미해졌다.

1944년 10월, 국민돌격대에게 훈시를 하는 히믈러(오른쪽)에 동석한 라머스(가운데)와 하인츠 구데리안(왼쪽)


시간이 지남에 따라 라머스는 전쟁으로 인한 그의 직책의 점점 더 무의미해짐과 마르틴 보어만이 히틀러와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권력과 영향력을 잃었다.[9] 1945년 4월, 라머스는 나치 정권의 마지막 날에 헤르만 괴링과 관련된 혼란과 관련하여 SS 부대에 체포되었다. 4월 23일, 소련군이 베를린 포위를 좁혀오자 괴링은 공군 대장 카를 콜러와 라머스와 상의했다. 모두 괴링이 히틀러의 지정된 후계자이며, 히틀러가 무능해질 경우 부통령으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괴링은 히틀러가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베를린에 남아있으면서 스스로 통치 능력을 상실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에 따라 괴링은 전보를 베르히테스가덴, 바이에른에서 보내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고립되었으므로 괴링이 독일의 지도부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괴링은 그날 밤 22:00(4월 23일)를 기한으로 정해 히틀러가 무능해진 것으로 간주하려 했다. 이 전보는 보어만이 가로채 히틀러에게 괴링이 반역자이며 이 전보는 사임을 요구하거나 전복하려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히틀러는 격분하여 SS 부대에 괴링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곧이어 히틀러는 괴링을 모든 직위에서 해임하고 괴링, 그의 참모 및 라머스를 가택 연금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5. 권력 상실과 몰락

1945년 4월, 라머스는 나치 정권의 마지막 날에 헤르만 괴링과 관련된 혼란과 관련하여 SS 부대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4월 23일, 소련군이 베를린 포위를 좁혀오자 괴링은 공군 대장 카를 콜러와 라머스와 상의했다. 이들은 모두 괴링이 히틀러의 지정된 후계자이며, 히틀러가 무능해질 경우 부통령으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괴링은 히틀러가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베를린에 남아있으면서 스스로 통치 능력을 상실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에 따라 괴링은 전보를 베르히테스가덴에서 보내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고립되었으므로 괴링이 독일의 지도부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괴링은 그날 밤 22:00(4월 23일)를 기한으로 정해 히틀러가 무능해진 것으로 간주하려 했다. 이 전보는 보어만이 가로채 히틀러에게 괴링이 반역자이며 이 전보는 사임을 요구하거나 전복하려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히틀러는 격분하여 SS 부대에 괴링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곧이어 히틀러는 괴링을 모든 직위에서 해임하고 괴링, 그의 참모 및 라머스를 가택 연금에 처하도록 명령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4월 24일, 라머스는 괴링의 '반역'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것은 보어만의 음모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히틀러는 총살에 반대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그는 5월에 미국 육군에 의해 석방되었지만, 오버잘츠베르크에 있던 아내 엘프리데는 이 구속 중에 자살했으며, 이틀 후에는 딸 일제도 자살했다.[10]

6. 전후

1945년 4월, 라머스는 나치 정권의 마지막 날에 헤르만 괴링과 관련된 혼란 속에서 SS 부대에 체포되었다. 4월 23일, 소련군이 베를린 포위를 좁혀오자 괴링은 공군 대장 카를 콜러와 라머스와 상의했다. 모두 괴링이 히틀러의 지정된 후계자이며, 히틀러가 무능해질 경우 부통령으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괴링은 히틀러가 베를린에 남아있으면서 스스로 통치 능력을 상실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에 따라 괴링은 전보를 베르히테스가덴에서 보내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고립되었으므로 괴링이 독일의 지도부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괴링은 그날 밤 22:00(4월 23일)를 기한으로 정해 히틀러가 무능해진 것으로 간주하려 했다. 이 전보는 보어만이 가로채 히틀러에게 괴링이 반역자이며 이 전보는 사임을 요구하거나 전복하려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히틀러는 격분하여 SS 부대에 괴링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곧이어 히틀러는 괴링을 모든 직위에서 해임하고 괴링, 그의 참모 및 라머스를 가택 연금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라머스는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지만[1], 그동안 그의 아내 엘프리데(결혼 전 성씨 테펠)와 딸 일제는 1945년 5월 초 히틀러의 산장인 오버잘츠베르크 근처에서 자살했다.[1]

전쟁이 끝난 후, 라머스는 연합국 심문관들에게 제3제국 권력 구조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가 그의 지휘 아래 있던 귀족 장교들을 완전히 배척했다고 확신했지만, 진실은 달랐다. 라머스는 나치 핵심 인물과 고위급 국방군 장교들이 호화로운 선물, 퇴직금, 몰수된 부동산 및 막대한 현금 포상을 받았다고 연합국에 보고했다. 이러한 혜택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하인츠 구데리안, 파울 루트비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빌헬름 리터 폰 리프,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있었다.

6. 1. 체포와 재판

1946년 4월, 라머스는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국제 군사 재판에 변호인 증인으로 출석했다. 1949년 4월부터 후속 뉘른베르크 재판 중 하나인 장관 재판의 피고인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미국 고등 판무관 존 J. 맥클로이에 의해 형이 10년으로 감형되었고,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조기 석방되었다.[1] 석방 날짜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1]

패전 후 1946년 4월 8일부터 9일에 걸쳐 뉘른베르크 재판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 후 전쟁 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죄로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 중 하나인 대신 재판에 회부되어 1949년 4월 11일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1951년 1월 31일, 주독일 고등 판무관 존 J. 맥클로이의 지시에 따라 10년으로 감형된 후 사면되어 12월 16일에 석방되었다.[11]

1962년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하여, 아내와 자녀의 묘가 있는 베르히테스가덴에 매장되었다.

6. 2. 전후 증언

전쟁이 끝난 후, 라머스는 연합국 심문관들에게 제3제국 권력 구조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전후 신화는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가 그의 지휘 아래 있던 귀족 장교들을 완전히 배척했다고 확신하게 만들었지만, 진실은 다소 달랐다. 라머스는 나치 핵심 인물과 고위급 국방군 장교들이 호화로운 선물, 퇴직금, 몰수된 부동산 및 막대한 현금 포상을 받았다고 연합국에 보고했다. 이러한 혜택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하인츠 구데리안, 파울 루트비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빌헬름 리터 폰 리프,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있었다.

패전 후 1946년 4월 8일부터 9일에 걸쳐 뉘른베르크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 후 전쟁 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죄로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의 하나인 "대신 재판"에 회부되어 1949년 4월 11일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1951년 1월 31일 주 독일 고등 판무관 존 J. 맥클로이의 지시에 따라 10년으로 감형된 후, 추가로 사면되어 12월 16일 석방되었다.[11]

6. 3. 죽음

1946년 4월, 라머스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변호인 증인으로 출석했다. 1949년 4월부터 후속 뉘른베르크 재판 중 하나인 장관 재판의 피고인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미국 고등 판무관 존 J. 맥클로이에 의해 10년으로 감형되었고,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조기 석방되었다.[1]

1962년 1월 4일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했으며, 아내와 딸과 함께 베르히테스가덴에 묻혔다.[1]

참조

[1] 웹사이트 Hans Heinrich Lammers http://www.nndb.com/[...]
[2] 논문 Die Rentenschuld des Bürgerlichen Gesetzbuchs
[3] 서적 Who's Who in Nazi Germany Routledge 1995
[4] 웹사이트 Lammers, Hans Heinrich (1879-1962) http://www.zukunft-b[...]
[5] 서적 German political profiles Terramare Publications 1938
[6] 서적 Hitlers Geheimpolitik Verlag Peter Lang 2008
[7] 서적 Nazi Germany at War Longman 1995
[8] 간행물 Erlass RK 7669 E
[9] 서적 Nazi Germany: A New History Continuum 1995
[10] 웹사이트 NNDB http://www.nndb.com/[...]
[11] 서적 Who's Who In Nazi Germany Routledge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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