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우지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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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조 우지마사는 1538년 호조 우지야스의 아들로 태어나 호조 가문의 4대 당주가 된 인물이다. 그는 다케다 신겐의 딸과 결혼하고, 아버지의 은거 후 가문을 상속받아 세력을 확장했다.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등과 대립하며 간토 지역에서 세력을 다졌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대립 끝에 오다와라 정벌에서 패하며 할복했다.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밥에 국 두 번 부은 일화'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 등장하며, NHK 대하드라마에서도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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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조 우지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호조 우지마사 |
| 원어 이름 | 北条 氏政 |
| 로마자 표기 | Hōjō Ujimasa |
| 출생 | 1538년 |
| 사망 | 1590년 8월 10일 |
| 출생지 | 사가미국 |
| 사망지 | 오다와라성, 사가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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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분 | |
| 직위 | 다이묘 |
| 가문 | 후호조씨 |
| 봉사 기간 | 불명 |
| 소속 | 후호조씨 |
| 정치 경력 | |
| 직책 | 후호조씨 당주 |
| 재임 시작 | 1559년 |
| 재임 종료 | 1590년 |
| 이전 | 호조 우지야스 |
| 이후 | 호조 우지나오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호조 우지야스 |
| 어머니 | Zuikei-in |
| 배우자 | 오바이인, 호쇼인 |
| 자녀 | 12명 ( 호조 우지나오 포함) |
| 친척 | 하야카와 부인 (자매), 호조 우지테루 (형제), 호조 우지쿠니 (형제), 호조 우지노리 (형제), 우에스기 가게토라 (형제), 이마가와 요시모토 (외삼촌), 이마가와 우지자네 (사촌 및 처남), 다케다 신겐 (장인), 다케다 가쓰요리 (처남) |
| 군사 경력 | |
| 소속 부대 | 불명 |
| 지휘 | 오다와라성 |
| 주요 전투 | 오다와라성 전투 (1561년) 고노다이 전투 (1564년) 오다와라성 전투 (1569년) 세키야도성 전투 (1574년) 기온성 전투 (1575년) 가즈사 전투 (1577년) 오모스 전투 (1580년) 덴모쿠산 전투 (1582년) 오다와라성 전투 (1590년) |
2. 생애
호조 우지마사는 덴분 7년(1538년) 또는 8년(1539년)에 고호조씨 제3대 당주 호조 우지야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2][4] 형의 요절로 세자가 되어[25][4] 에이로쿠 2년(1559년) 가독을 상속받았으나,[2][6] 초기에는 아버지 우지야스와 공동 통치 체제를 유지했다.[4]
그는 아버지와 함께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등 주변 세력과 경쟁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오다와라 성 전투[4], 제2차 고노다이 전투[2] 등에서 승리하며 세력을 넓혔다. 다케다 신겐과는 혼인 동맹을 맺었으나[1] 스루가 침공으로 파기되었고,[4] 이후 우에스기 겐신과 일시적으로 동맹(엣소 동맹)을 맺기도 했다.[7] 아버지 사후에는 다시 다케다 가문과 동맹을 복원했다.[9][10]
겐신 사후 오타테의 난에서 동생 우에스기 가게토라 지원에 실패하면서[2] 다케다 가쓰요리와 적대 관계가 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었다.[2] 1580년 아들 호조 우지나오에게 가독을 넘겼으나 실권은 유지했다.[34][11] 오다 노부나가 사후 발생한 덴쇼 임오의 난을 거치며 고즈케국 등을 확보하여 호조 씨의 최대 판도를 구축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 과정에서 대립이 심화되었다. 히데요시의 상경 요구 거부,[42] 누마타성 문제, 나구루미 사건 등으로 관계가 악화되었고, 결국 1590년 오다와라 정벌을 초래했다. 22만 대군에 맞서 약 3개월간 농성했으나 항복했고, 히데요시는 전쟁 책임을 물어 우지마사에게 할복을 명했다. 덴쇼 18년(1590년) 7월 11일, 향년 53세로 할복하여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고호조 씨는 멸망했다.[13] 가계는 동생 호조 우지노리가 이어 에도 시대까지 존속했다.
2. 1. 가독 상속
덴분(天文) 7년(1538년), 제3대 당주 호조 우지야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만 구로다 모토키는 『이시카와 다다후사 문서』(石川忠総留書)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덴분 8년(1539년) 출생설을 제시하기도 했다.[22][4] 어릴 적 이름은 마쓰치요마루(松千代丸일본어)로 추정된다.[24] 덴분 18년(1549년)에 구게 아스카이 마사쓰나가 우지야스의 아들들에게 게마리(蹴鞠)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언급된 마쓰치요마루가 우지마사로 여겨진다.[24]본래 차남이었기에 가독 상속 순위에서 밀려 있었으나, 형인 신쿠로 우지치카(新九郎氏親)가 덴분 21년(1552년)경 16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세자(世子)가 되었다. 이후 호조 신쿠로 우지마사(北条新九郎氏政)라 칭했으며, 형이 사망한 지 2년 후인 덴분 23년(1554년) 6월 이전에 원복(元服)을 치른 것으로 보인다.[25][4]
덴분 23년(1554년), 아버지 우지야스가 다케다 신겐,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고소슌 삼국동맹(甲相駿三国同盟)을 맺으면서, 동맹 강화의 일환으로 우지마사는 다케다 신겐의 딸 오바이인(黄梅院)을 정실로 맞이하였다.[1] 부부 사이는 매우 좋았다고 전해진다.
에이로쿠(永禄) 2년(1559년) 12월 23일, 아버지 우지야스가 은거하면서 가독(家督)을 물려받아 호조 가문의 제4대 당주가 되었다.[2][6] 이는 당시 영내 각지에서 발생했던 에이로쿠의 기근에 대응하여 새로운 당주 아래에서 부흥을 꾀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되기도 한다.[4] 그러나 우지야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실권을 계속 유지하며 우지마사와의 공동 통치, 즉 양두(兩頭) 체제가 이어졌고, 두 사람은 "어량전(御両殿)", "이옥형(二屋形)" 등으로 불렸다.[4]
2. 2. 우지야스 생전
마쓰치요마루(松千代丸, 우지마사의 아명)는 차남이었기에 본래 가독을 상속받을 수 없었으나, 덴분 21년(1552년)경 형인 우지치카(氏親)가 16세로 요절하면서 세자가 되었다. 이후 덴분 23년(1554년) 6월까지 원복을 치르고 호조 신쿠로 '''우지마사'''(北条 新九郎 氏政)라고 칭하게 되었다.[4] 우지마사는 원복 후, 호조 가문의 관례에 따라 형 우지치카처럼 가명(仮名)인 신쿠로를 사용했다.[5] 그의 첫 출진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20세 무렵에는 이미 아버지 호조 우지야스의 후계자로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에이로쿠 2년(1559년) 12월 23일, 아버지 우지야스가 은거함에 따라 가독을 물려받아 호조 가문의 제4대 당주가 되었다(『相州兵乱記』).[6] 이는 당시 영내 각지에서 발생한 에이로쿠 대기근에 대응하여, 새로운 당주 아래에서 영지 부흥에 힘쓰기 위한 조치로 여겨진다. 가독 상속 이후에도 한동안 우지야스가 후견인으로서 영토 지배를 주도했으며, 이 시기 두 사람은 "어량전"(御両殿), "이옥형"(二屋形) 등으로 불렸다.[4] 가독을 상속받은 우지마사가 처음으로 시행한 주요 정책은 호조 가 소령역장(北条家所領役帳) 작성을 통한 대체 검지(検地, 토지 조사)였다. 백성의 뜻을 존중하여 검지나 덕정을 실시하는 것은 호조 씨의 전통적인 내정 방식이었다.
에이로쿠 3년(1560년), 호조 씨는 이와쓰키성을 함락시키고 무사시국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했다.[2]
에이로쿠 4년(1561년), 우에스기 겐신이 간토와 남부 무쓰의 여러 다이묘들을 규합하여 대규모 병력으로 오다와라성을 포위했다(오다와라 성 전투). 호조 씨는 위기에 몰렸으나, 동맹인 다케다 신겐의 지원을 받으며 아버지 우지야스의 지휘 아래 농성전으로 맞서 우에스기 군을 격퇴했다. 이후 에치고국으로 물러난 겐신이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신겐과 싸워 큰 피해를 입자, 우지마사는 신겐과 호응하여 북관동 방면으로 진출하며 우에스기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서서히 되찾아 나갔다.
에이로쿠 7년(1564년), 제2차 고쿠후다이 합전(国府台合戦)에서는 초반 사토미 요시히로에게 고전했으나, 호조 쓰나나리와 함께 사토미 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가즈사국에 세력을 넓혔고, 가즈사 도키 성주(土気城主) 사카이 다네하루(酒井胤治) 등이 일시적으로 귀순하기도 했다. 같은 해, 무사시국 이와쓰키성 성주 오타 스케마사의 장남 우지스케(氏資)를 포섭하여 스케마사를 무사시 국에서 몰아내고, 무사시 국 대부분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에 겐신은 무사시 하뉴 성(羽生城) 등을 거점으로 삼아 호조 씨에 대항했다.
에이로쿠 9년(1566년), 겐신을 맹주로 따르던 고즈케국의 유라 나리시게(由良成繁)가 우지마사에게 귀순했다. 이어 사노 마사쓰나(佐野昌綱), 호조 다카히로(北条高広) 등도 귀순하면서 고즈케 국에도 세력을 넓히게 되었다. 또한 우지마사의 종형제이자 고가 공방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중신인 야나다 하루스케(簗田晴助)도 일시적으로 우지마사와 화친하면서, 겐신과 동맹 관계였던 히타치국의 사타케 요시시게와의 직접적인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이로써 사타케 씨 및 그와 협력하는 사토미 씨, 사타케 씨의 객장이었던 오타 스케마사 등과 전쟁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에이로쿠 10년(1567년), 사토미 요시타카와 요시히로 부자가 가즈사 국 탈환을 노리고 침공해왔다. 우지마사는 이를 격퇴하기 위해 가즈사 동부의 미후네 산(三舟山)에 진을 쳤으나, 과거 사토미 휘하에 있던 고쿠진(国人)들의 내통과 미사키 수군(三崎水軍)의 합류 지연 등으로 인해 사토미 군에게 패배했다(미후네 산 합전). 이 패배로 호조 씨는 가즈사 국의 지배권을 상당 부분 잃게 되었다.
한편, 스루가국의 이마가와 씨는 에이로쿠 3년(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당주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전사한 이후 영지의 동요가 계속되었고, 다케다 씨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12월, 다케다 신겐이 스루가 침공을 개시하면서 가이-스루가 관계는 파탄났다(스루가 침공). 요시모토의 적자이자 우지마사에게는 종형제이자 매제(우지마사의 누이 하야카와도노의 남편)인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몰락했다. 신겐은 호조 씨에게 이마가와 영지 분할을 제안했으나, 호조 씨는 기존의 슨소 동맹(駿相同盟, 이마가와-호조 동맹)을 우선하여 우지자네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이로써 고소 동맹(甲相同盟, 다케다-호조 동맹)은 파기되었다. 우지마사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삿타 고개(薩埵峠)까지 진출하여 다케다 군에 맞섰고, 일시적으로 신겐의 세력을 몰아내고 스루가 일부를 세력권에 넣었다.
이후 우지마사는 가케가와성에서 농성하던 우지자네를 구출하기 위해 다케다 측에서 이반한 미카와국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화의를 맺고 우지자네를 보호했다. 또한 자신의 차남 호조 우지나오를 우지자네의 양자(猶子)로 삼아 스루가 영유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신겐에 대항하기 위해 숙적이었던 우에스기 겐신과도 동맹을 맺었는데(엣소 동맹), 동생 사부로(훗날의 우에스기 가게토라)를 겐신의 양자(사실상의 인질)로 보내고 고즈케 국의 일부 지배권을 할양하는 조건이었다. 이 시기 신겐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애처 오바이인과 이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이것이 사료 오독에 근거한 오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7][8][26][27][28][29] 오바이인이 에이로쿠 12년(1569년) 6월에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혼설 대신 애처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비극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에이로쿠 12년(1569년) 9월, 신겐이 우스이 고개(碓氷峠)와 고보토케 고개(小仏峠)를 통해 오다와라 성을 다시 공격해왔다. 우지마사는 아버지 우지야스와 함께 농성하여 다케다 군을 격퇴했다. 이후 가이국으로 퇴각하는 다케다 군을 추격하여 미마세 고개 전투가 벌어졌다. 우지마사는 본대를 이끌고 동생 호조 우지테루, 호조 우지쿠니 등이 포진한 쓰쿠이령(津久井領) 미마세 고개(三増峠) 남쪽 하기노(荻野)까지 진군했다. 다케다 군은 보급 부대(小荷駄)를 버리면서까지 신속하게 퇴각을 서둘렀다. 우지마사의 본대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미마세 고개의 우지테루, 우지쿠니 부대가 먼저 공격을 시작하면서 협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쓰쿠이 성(津久井城)의 나이토 씨(内藤氏) 휘하 예비 병력(津久井衆)도 다케다 측의 방해로 출진하지 못했다. 다케다 군 역시 호조 쓰나나리가 지휘하는 철포대의 공격으로 후방 부대의 아사리 노부타네나 우라노 시게히데(浦野重秀) 등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었으나, 결과적으로 호조 군은 패배했고 신겐의 가이 퇴각을 막지 못했다.[30]
그 뒤에도 신겐은 이즈국과 스루가 방면으로 계속 진출했고, 호조 군은 이에 맞섰으나 간바라 성(蒲原城), 후카자와 성(深沢城) 등 스루가 지역의 여러 성들이 함락되었다. 후견 역할을 하던 아버지 우지야스도 병으로 인해 전선에서 물러났다. 겐키 원년(1570년)에는 스루가 국 내 호조 측의 지배 지역은 고코쿠지 성(興国寺城)과 스루가 동남부 일부만 남게 되었고, 사실상 스루가 국은 신겐에 의해 병합되었다.
겐키 2년(1571년) 10월, 아버지 호조 우지야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로써 우지마사는 명실상부한 호조 가문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나, 아버지의 후견 없이 홀로 가문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12월, 우지마사는 신겐과의 동맹을 부활시키고(고소 동맹), 동시에 겐신과의 엣소 동맹을 파기했다. 엣소 동맹은 조건 조정 부족 등으로[9][31] 결과적으로 대 다케다 대책으로서 충분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불만이 있었고,[10][32] 원래 양 가문의 전략관에 차이가 있었던 데다가, 겐신도 엣추국 평정에 힘을 쏟게 된 것도 동맹 파기의 원인이었다.
2. 3. 우에스기, 다케다와의 전투

겐키 2년(1571년) 10월 아버지 호조 우지야스가 병사하자, 우지마사는 12월에 다케다 신겐과의 동맹을 부활시키고(고소 동맹), 동시에 우에스기 겐신과의 에치고-사가미 동맹을 파기했다.[9][10]
고소 동맹 부활 후, 우지마사와 겐신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덴쇼 2년(1574년)에 겐신이 고즈케 국으로 진출하자 우지마사도 출진하여 도네 강에서 대치했지만, 겐신의 관심은 이미 엣추 국으로 향하고 있어 결전에는 이르지 못했다. 같은 해 윤 11월, 우지마사는 아버지 우지야스가 '나라 하나에 맞먹는 성'一国に等しい城일본어이라고까지 칭했던 야나다 하루스케의 세키주쿠 성을 함락시켰다.[2] 이듬해인 덴쇼 3년(1575년)에는 오야마 히데쓰나의 시모쓰케 국 기온 성을 함락시켰다.[2] 또한 시모우사 국의 유키 하루토모가 항복하는 등[2] 우지마사의 세력은 확대되어 갔고, 간토 지방에서 우에스기파 세력을 거의 몰아냈다. 덴쇼 5년(1577년)에는 가즈사 국을 침공하여 숙적 사토미 요시히로와 화목했다(보소 잇카).[2] 이 싸움은 우지마사의 적자 호조 우지나오의 첫 출진이기도 했다.[2]
덴쇼 6년(1578년) 겐신이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겐신의 조카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우지마사의 동생이자 겐신의 양자였던 우에스기 가게토라 사이에 오타테의 난이 벌어졌다. 당시 우지마사는 시모쓰케 국에서 사타케 씨 및 우쓰노미야 씨와 대치 중이었기에, 5월에 가게토라를 지원하기 위해 동생 호조 우지테루와 호조 우지쿠니 등을 에치고 국으로 파견했다. 8월 하순에는 우지마사 본인도 가게토라 지원을 위해 고즈케 국의 마에바시 성까지 출진했으나, 곧 오다와라 성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동맹자이자 매제인 다케다 가쓰요리에게도 원군을 요청했다. 가쓰요리는 가게토라 지원을 위해 북부 시나노 국으로 출병했으나, 가게카쓰가 북부 시나노의 우에스기 영지와 고즈케 국 누마타 성 할양을 조건으로 제시하자 가쓰요리와 화목했다(고에쓰 동맹). 이로 인해 가게토라와 가게카쓰 간의 조정과 화목이 성립될 뻔했으나, 같은 해 8월 가쓰요리가 철수하던 중 화목은 깨졌다. 우지테루와 우지쿠니는 가을에 본격적으로 에치고 진입을 시도했으나, 사카도 성의 완강한 저항과 겨울철 폭설로 인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덴쇼 7년(1579년), 가게카쓰가 난을 제압하면서 가게토라는 자결했다.
가게토라의 패배와 죽음으로 우지마사는 고소 동맹을 파기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어 스루가 국의 다케다 영지를 양쪽에서 공격했다.[2] 덴쇼 8년(1580년), 가쓰요리를 공격하여 오모스 전투가 벌어졌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2] 고즈케 국에서는 가쓰요리의 공세가 계속되었고, 고즈케와 시모쓰케 국의 고쿠슈(国衆)들이 다케다 측으로 돌아서면서 호조 씨는 열세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같은 해 3월 10일, 이시야마 혼간지를 항복시키며 기세를 올리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신종(臣従)을 요청했다.[33] 그리고 8월 19일, 아들 우지나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나,[34][11] 이는 진중(陣中)에서 이루어진 이례적인 일로, 아버지 우지야스를 따라 호조 가문의 정치 및 군사 실권을 계속 장악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다만 최근 연구에서는 내정 및 군사 일부 권한은 일찍 우지나오에게 이양하고, 우지마사는 외교와 군사의 주요 부분을 담당했다는 분석도 있다.
2. 4. 세력 확대
1560년, 호조 씨는 이와쓰키성을 함락시키며 무사시국 대부분을 장악했다.[2] 우지마사는 고노다이 전투(1564년)와 오다와라성 전투(1569년) 등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574년에는 시모사국의 세키야도성을 공격하여 성주 야나다 하루스케의 항복을 받아냈고,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이었던 유키 하루토미를 복속시켰다. 1575년에는 시모쓰케국의 기온성을 공격하여 오야마 히데츠나를 항복시켰다. 1577년, 우지마사는 가즈사국을 침공하여 오랜 숙적이었던 사토미 요시히로와 화의를 맺었다. 이 전투는 그의 후계자 호조 우지나오의 첫 출진이었다.1580년, 다케다 가쓰요리가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지원하고 우에스기 가게토라(우지마사의 동생이자 가게카쓰의 경쟁자)가 자결하자, 우지마사는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새롭게 동맹을 맺었다. 그는 가쓰요리를 양쪽에서 압박하기 위해 스루가국의 다케다 영지를 침공하여 오모스 전투를 벌였다.
덴쇼 10년(1582년) 2월,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 오다 노부타다를 총대장으로 하고 다키가와 가즈마스를 군감으로 하는 오다 군이 고슈 정벌에 나섰다. 우지마사는 처음에는 정보 부족으로 동생 호조 우지쿠니에게 고즈케국 방면의 정보 수집을 명했으나, 곧 오다 군의 침공을 확인하고 이에 호응하여 스루가 국의 다케다 영지를 공격했다. 3월 11일, 다케다 가쓰요리가 덴모쿠 산 전투에서 자결하면서 다케다 가문은 멸망했다. 우지마사는 다케다 가문을 신속히 멸망시킨 노부나가의 강력한 군사력을 인지하고 오다 가문과의 우호 관계 유지를 희망했다.[35] 그는 노부나가에게 축하 사절과 선물을 보내고,[35] 꿩 5백 마리를 바치기도 했으며,[36] 동생 우지쿠니가 다키가와 가즈마스에게 출사하기도 했다.[36] 노부나가는 다키가와 가즈마스를 고즈케국 마에바시성에 보내 간토 간레이로서 간토 통치를 시도했지만, 호조 씨가 바라던 간토 일괄 통치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우지마사는 오다 가문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가즈마스의 중개로 시모쓰케국 기온 성을 옛 성주 오야마 히데츠나에게 돌려주는 등 오다 가문의 간토 지배에 협력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일,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게 된 우지마사는 처음에는 다키가와 가즈마스에게 협력 의사를 밝혔으나, 양측의 불신은 깊어졌다.[38] 결국 우지마사는 오다 가문의 공백을 틈타 고즈케국 탈환을 결정하고, 우지나오와 우지쿠니에게 5만 6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도록 명했다. 호조 군은 간나가와 전투에서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다키가와 군을 격파하고 가즈마스를 패주시켰다. 이후 호조 군은 우스이 고개를 넘어 시나노국까지 진출하여 사나다 마사유키, 기소 요시마사, 스와 요리타다 등을 복속시키고 시나노 동부와 중부 지역을 장악했다.
한편, 가이국과 시나노국으로 진출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호조 씨 사이에 덴쇼 임오의 난이라 불리는 영토 분쟁이 발생했다. 가이 와카미코(若神子)에서 우지나오와 이에야스가 대치했으나(若神子の戦い), 시나노에서 사나다 마사유키가 이반하고 가이 국에서도 호조 군이 도쿠가와 군에게 패하는 등 전황이 불리해졌다. 결국 우지나오가 이에야스의 딸 도쿠히메와 혼인하는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 합의로 가이국과 시나노국은 도쿠가와 령, 고즈케국은 호조 령으로 정해졌으나, 호조 씨는 시나노의 사쿠(佐久) ・ 고아가타(小県) 두 군과 가이 군나이(郡内) 지방을 포기해야 하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 문제는 이후 누마타성 영유권 문제와 나구루미 사건으로 이어지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갈등 원인이 된다.
덴쇼 11년(1583년), 고가 공방 아시카가 요시우지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우지마사는 관도보임(官途補任)을 통해 권위를 확보하며 간토 지역의 신분 질서 정점에 서게 되었다. 또한 무사시국의 에도 지역과 이와쓰키(岩付) 령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고, 도네강, 히타치 강(常陸川) 수계를 장악하여 유통과 교통망을 통제함으로써 간토 내 반(反)호조 세력들을 압박했다.
덴쇼 13년(1585년), 사타케 요시시게, 우쓰노미야 구니쓰나 등이 나스 스케하루, 미부 요시오 등을 공격하자, 우지마사는 나스 씨 등과 연합하여 시모쓰케국 침공을 본격화했고, 시모쓰케 남부를 지배하에 두었다. 또한 히타치국 남부의 에도자키 성(江戸崎城)의 도키 씨(土岐氏)와 우시쿠 성(牛久城)의 오카미 씨(岡見氏)를 지원하며 히타치 남부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이로써 호조 씨의 영지는 사가미, 이즈, 무사시, 시모우사, 가즈사, 고즈케 전역과 히타치, 시모쓰케, 스루가 일부에 걸쳐 약 240만 석에 달하는 최대 판도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호조 씨 멸망 후 해당 지역에서 실시한 검지(検地)와 다이묘 지교다카(大名知行高)에 기반한 추정치이다.
2. 5.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대립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하고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 통일 사업을 계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대립이 시작되었다.덴쇼 16년(1588년), 히데요시는 우지마사와 그의 아들 호조 우지나오에게 교토의 주라쿠다이에서 열리는 천황 행차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으나, 우지마사는 이를 거부했다. 교토에서는 호조 토벌에 대한 소문이 돌았고, 호조 씨도 임전 태세를 갖추려 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청문을 보내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 이에야스는 호조 부자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았으며, 호조 씨의 영지를 탐내지 않는다.
- 이달 안에 형제들을 (히데요시에게) 보낼 것이다.
- 만약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출사를 거부한다면, (이에야스의 딸이자 우지나오의 부인인) 도쿠히메를 이혼시키겠다.
결국 그해 8월, 우지마사의 동생인 호조 우지노리가 대표로 교토에 상경하면서 호조와 도요토미의 관계는 잠시 안정되었다. 무슈 문서에 따르면, 이 무렵 우지마사는 실질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42]
덴쇼 17년(1589년) 2월, 호조 가문의 평정중(評定衆)인 이타베오카 에세쓰사이가 교토로 가서 누마타 영지 문제 해결을 히데요시에게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누마타 영지의 3분의 2를 호조 측에 돌려주는 누마타 재정(沼田裁定)을 실시했고, 6월에는 우지마사가 12월에 상경하겠다는 약속 문서를 받았다. 누마타 영지는 7월에 호조 측에 인도되었다. 그러나 우지마사는 다시 말을 바꾸어 1590년 봄이나 여름에 상경하겠다고 했고, 히데요시가 이를 거부하면서 양측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0월, 호조 우지쿠니의 가신 이노마타 구니노리가 사나다 마사유키 측의 나구루미성을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 우에스기 가게카쓰 등을 교토로 불러들여 여러 다이묘들에게 1590년 봄 호조 토벌을 위한 출진 준비를 지시했다. 또한 쓰다 모리쓰키와 도미타 잇파쿠를 상사(上使)로 보내 나구루미 성 사건의 책임자 처벌과 즉각적인 상경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우지나오는 교토로 가면 우지마사가 억류되거나 영지를 빼앗길(国替え, 개역)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상경할 수 없다고 답했다. 또한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게 신종했을 때는 아사히히메와의 혼인, 오만도코로(히데요시의 어머니)를 인질로 보내는 등의 후한 대우를 받았던 점을 언급하며, 나구루미 성 사건 처리에서 호조 씨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고 지적하고, 억류나 영지 몰수 없이 안심하고 상경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나구루미 성 탈취 사건에 대해서는 우지마사나 우지나오의 명령이 아니었으며, 사나다 측 성주가 자발적으로 호조 측에 투항한 것이고 이미 성은 사나다 측에 돌려주었다고 변명했다.
이 사건이 실제로 이노마타의 단독 행동이었다면 우지마사 부자의 감독 소홀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호조 가문 내부에서는 온건파인 동생 우지노리, 중간파인 아들 우지나오, 그리고 주전파인 우지마사, 우지테루, 우지쿠니 형제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남아있는 여러 서신들을 보면, 누마타 성을 얻은 뒤 우지마사는 상경 시기를 늦추기는 했지만 상경 자체에는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우지마사와 우지나오가 거듭 "나구루미 성을 빼앗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 점을 고려하면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우지마사가 상경을 늦춘 이유에 대해, 히데요시에게 복속할 경우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숙적인 우에스기 가게카쓰보다 아래 서열이 되는 것에 굴욕감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43] 『스루가 토산』(駿河土産)이라는 문헌에는 호조 측이 동맹 관계인 도쿠가와보다 자신들의 격이 높다고 생각했던 듯한 구절이 있다.[44] 또한, 호조 씨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던 우에스기 가게카쓰나 사타케 요시시게, 북부 간토의 여러 호족들이 일찍부터 히데요시와 가까웠기 때문에 히데요시 역시 호조에 대해 비협조적이고 냉담했다는 지적도 있다.[43]
계속해서 상경을 미루는 우지마사의 태도에 분노한 히데요시는 이를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종속 거부로 간주하고, 1589년 12월 23일 여러 다이묘들에게 정식으로 호조 우지마사 토벌의 출진 명령을 내렸다. 이보다 앞서 스루가와 이즈 국경이 봉쇄된 것을 알게 된 우지마사와 우지나오는 12월 17일, 영지 내 가신들과 고쿠츄(国衆)들에게 1590년 1월 15일까지 오다와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려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1590년 3월부터 각 방면에서 침공해 오는 도요토미 군을 맞아 오다와라 정벌이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우스이 고개를 넘어온 사나다 마사유키 등에게 승리하고, 스루가-이즈 국경 방면에서도 도요토미 군을 상대로 위력 정찰을 벌이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히데요시가 누마쓰(沼津)에 도착한 후 벌어진 첫 전투에서 야마나카성이 함락되었다. 4월부터 약 3개월간 오다와라성에서 농성했지만, 영지 내의 시모다성, 마쓰이다성, 다마나와성, 이와쓰키성, 하치카타성, 하치오지성, 쓰쿠이성 등 여러 성들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22만 명에 달하는 도요토미 대군 앞에 결국 호조 씨는 항복했다.


이때 호조 가신단 사이에서 항전파와 항복파 간에 한 달 이상 결론 없이 이어진 논의가 '오다와라 효조(小田原評定)'라는, 끝없이 이어지는 무의미한 회의를 뜻하는 일본어 관용어의 유래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본래는 호조 가문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던 평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히데요시는 항복 조건을 깨고 우지마사에게 할복을 명했으며, 우지나오 등은 고야 산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7월 5일, 우지나오는 자신의 목숨을 대신하여 성 안의 모든 장병들의 구명을 청하며 항복했다. 우지나오의 장인인 이에야스도 우지마사의 구명을 청했지만, 히데요시는 호조 씨 토벌의 책임을 물어 우지마사, 우지테루 및 숙로(宿老)인 마쓰다 노리히데, 다이도지 마사시게에게 할복을 명했다. 이이 나오마사의 정보에 따르면 한때 우지마사가 구명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으나, 결국 7월 11일 우지마사와 우지테루는 할복했다. 《간세이 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 등에 따르면, 시의(侍医)이자 교토 무라사키노 다이토쿠지 주지 닛신 화상(日新和尚)의 형인 다무라 초덴(안세이)의 저택에서 할복했다고 한다. 향년 53세였다. 시즈오카현 후지시의 겐류지(源立寺)에 그의 목 무덤(首塚)이 있으며, 묘소는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와 하코네정 소운지(早雲寺)에 있다.[13]
우지마사의 사세(辞世)는 다음과 같다.
- 雨雲の おほえる月も 胸の霧も はらいにけりな 秋の夕風|비구름 속에 울부짖는 저 달도 이 가슴의 안개도 걷어내주는 듯한 이 가을 저녁의 바람일본어
- 我身今 消ゆとやいかに おもふへき 空よりきたり 空に帰れば|이내 몸 이제 사라지려 하느니 기억할지라 공(空)으로부터 와서 공으로 간다는 걸일본어
이로써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고호조 씨는 멸망하였다.
다만 이에야스의 사위였던 우지나오는 목숨을 건졌고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이듬해인 덴쇼 19년(1591년) 8월에는 히데요시로부터 1만 석의 영지를 받아 다이묘로서 가문을 부활시킬 움직임도 있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사망하였다. 고호조 씨의 가계는 우지노리가 이었고, 우지나오의 영지 일부도 계승하여 에도 시대에 우지노리의 아들 호조 우지모리가 가와치 사야마 번의 번주가 되어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하였다.
2. 6. 오다와라 정벌과 최후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하고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 통일 사업을 계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대립이 불가피해졌다.덴쇼 16년(1588년), 히데요시로부터 우지마사와 아들 호조 우지나오 부자가 주라쿠다이 행차에 참석하라는 요구가 있었으나, 우지마사는 이를 거부하였다. 교토에서는 호조 토벌 소문이 돌았고, 호조 씨도 임전 태세를 갖추려 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설득으로 동생 호조 우지노리가 대신 상경하면서 양측 관계는 일시적으로 안정되었다. 이 무렵 우지마사는 실질적인 은퇴를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42]
덴쇼 17년(1589년) 2월, 효조슈(評定衆)인 이타베쓰카 고셋사이가 상경하여 누마타 문제 해결을 히데요시에게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누마타 영지의 3분의 2를 호조 측에 돌려주는 재정을 내렸고, 우지마사는 그해 12월에 상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우지마사는 다시 말을 바꾸어 덴쇼 18년(1590년) 봄이나 여름에 상경하겠다고 했고, 히데요시가 이를 거부하면서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0월, 우지마사의 동생 우지쿠니의 가신 이노마타 구니노리가 사나다 측의 나구루미성을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히데요시는 이를 빌미로 이에야스 등을 상경시켜 호조 씨 토벌 준비를 서둘렀고, 사신 쓰다 모리쓰키와 도미타 잇파쿠를 보내 나구루미 성 사건의 주모자 처벌과 즉각적인 상경을 요구했다.
우지나오는 우지마사가 교토로 가면 억류되거나 영지를 빼앗길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상경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과거 이에야스가 신종했을 때 아사히히메와 혼인하고 오만도코로를 인질로 보낸 후 후대받았던 것과 비교하며 안전 보장을 요구했다. 또한 나구루미 성 탈취는 명령 없이 성주가 자진 투항한 것이며 이미 성을 반환했다고 변명했다. 이 사건이 이노마타의 독단이었다면 우지마사 부자의 감독 소홀 책임이 있으며, 호조 가문 내 온건파(우지노리), 중간파(우지나오), 주전파(우지마사, 우지테루, 우지쿠니)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지마사가 상경에 적극적이었다는 서신들과 "나구루미 성을 탈취할 이유가 없다"는 진술들을 고려하면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우지마사가 상경을 미룬 이유로는, 히데요시뿐 아니라 동맹이었던 이에야스나 숙적 우에스기 가게카쓰보다 아래 서열이 되는 것에 굴욕감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43] 호조 측은 자신들이 도쿠가와보다 격이 높다고 인식했을 가능성도 있다.[44] 또한 히데요시와 일찍부터 가까웠던 우에스기 가게카쓰나 사타케 요시시게 등 간토 북부 세력의 존재도 히데요시가 호조에 대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43]
결국 상경을 계속 미루는 우지마사의 태도에 분노한 히데요시는 이를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종속 거부로 간주하고, 덴쇼 17년 12월 23일 여러 다이묘들에게 정식으로 호조 우지마사 토벌 명령을 내렸다. 이미 스루가-이즈 국경이 봉쇄된 것을 안 우지마사와 우지나오는 12월 17일, 영내 가신들에게 오다와라성으로 1월 15일까지 집결할 것을 명하고 요격 태세를 갖추었다.
덴쇼 18년(1590년) 3월, 오다와라 정벌이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우스이 고개를 넘어온 사나다 마사유키 군대에게 승리하고 스루가-이즈 국경에서 위력 정찰을 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히데요시가 누마쓰에 도착한 후 첫 전투에서 야마나카성이 함락되었다. 4월부터 약 3개월간 오다와라성에서 농성했지만, 영내의 시모다성, 마쓰이다성, 다마나와성, 이와쓰키성, 하치가타성, 하치오지성, 쓰쿠이성 등 주요 거점들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22만 명에 달하는 도요토미 대군 앞에 결국 호조 씨는 항복했다.
항복 결정 과정에서 호조 가신단 내 항전파와 항복파 사이에 벌어진, 결론 없이 시간만 끄는 지리멸렬한 논의가 이후 '오다와라 효조'(小田原評定)라는, 무의미하고 장황한 회의를 비꼬는 관용어의 어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효조'는 정기적인 회의를 뜻하는 말이었다.)
히데요시는 화목 조건을 깨고, 우지마사에게 할복을 명하고 우지나오 등은 고야 산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7월 5일, 우지나오는 자신의 목숨을 대신하여 성안 병사들의 구명을 청하며 항복했다. 우지나오의 장인인 이에야스도 우지마사의 구명을 청했지만, 히데요시는 이번 전쟁의 책임자로 우지마사와 동생 우지테루, 숙로 마쓰다 노리히데, 다이도지 마사시게에게 할복을 명했다. 7월 11일 우지마사와 우지테루는 시의(侍医) 다무라 초덴(안세이)의 저택에서 할복했다. 향년 53세였다. 목은 시즈오카현 후지시의 겐리쓰지에 묻혔으며, 묘소는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 내[13]와 하코네정에 존재한다.
우지마사의 사세(辞世)는 다음과 같다.
- 雨雲の おほえる月も 胸の霧も はらいにけりな 秋の夕風jpn
- 我身今 消ゆとやいかに おもふへき 空よりきたり 空に帰ればjpn
이로써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고호조 씨는 멸망하였다.
다만 이에야스의 사위였던 우지나오는 목숨을 건지고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이듬해 덴쇼 19년(1591년) 8월에는 히데요시로부터 1만 석의 영지를 받아 다이묘로서 가문을 부활시킬 움직임도 있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사망하였다. 고호조 씨의 명맥은 우지마사의 동생 호조 우지노리가 이었고, 우지노리의 아들 호조 우지모리는 에도 시대에 가와치 사야마 번의 번주가 되어 메이지 유신까지 가문을 존속시켰다.
3. 평가 및 일화
호조 우지마사는 가족을 아끼는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유능했던 동생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정실 부인인 고바이인(黄梅院)과는 애처가로서 관계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다케다 씨의 스루가국 침공을 계기로 이혼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이는 사료 오독에서 비롯된 이야기이며 실제로는 부인이 끝까지 우지마사와 함께 살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7][8]
고호조씨 멸망 당시의 실권자였지만, 아버지 호조 우지야스 시대 이상으로 세력을 확장시킨 치세, 형제들과의 협력, 훌륭한 가신들의 보좌, 전투에서의 공적 등을 볼 때 결코 무능한 무장은 아니었다는 평가가 있다.[14]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철저히 항전하다 결국 멸망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과거에는 우지마사가 시대의 흐름과 히데요시와의 압도적인 국력 차이를 파악하지 못한 무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주류였다. 그러나 간토 지역 무사들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래 중앙 정권으로부터 자립하려는 전통적인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견해, 혹은 히데요시가 처음부터 호조 씨를 섬멸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견해도 제기된다. 한편, 구로타 모토키(黒田基樹)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조소카베 씨, 시마즈 씨 등 다른 유력 다이묘들도 히데요시와 무력 대결을 벌였던 점을 지적하며, 항전이 당주의 자질이나 지역적 특성보다는 당시 유력 다이묘들의 보편적인 경향이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다른 다이묘들과 달리 호조 씨는 본거지가 공격받는 최종 단계까지 항전했기 때문에 멸망을 피하기 어려웠다고 분석한다.
문화적으로는 고미즈노오 천황의 칙찬으로 전해지는 《집외 삼십육가선》(集外三十六歌仙)에 그가 지은 와카(和歌) 한 수가 선정되기도 했다.[15]
> 守れ猶君にひかれてすみよしの まつのちとせもよろづよのはる
> ''32. 기송축 북조씨정(寄松祝 北条氏政)''
이 외에도 '밥에 국을 두 번 부어 먹은 이야기'나 '보리 이야기' 등 우지마사에 대한 부정적인 일화들이 전해지지만, 이는 가문 멸망이라는 결과론적 시각에서 후대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3. 1. 긍정적 평가
후세에 성립된 《호조키》(北条記) 등에서는 우지마사를 어리석은 인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는 고호조 가문 멸망 당시의 당주였다는 결과론에 따른 부정적 평가라는 지적이 있다.[45] 현대에는 결과만을 가지고 우지마사를 암우(暗愚)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견해도 제시된다.[45] 또한 오다 노부나가가 간토로 세력을 확대했을 때 우지마사가 보인 대응을 고려하면, '정세 파악에 소홀했던 우물 안 개구리'라는 평가 역시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는 반론도 있다.[46]개인적으로는 가족애가 깊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유능했던 동생들과 평소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애처가로도 알려졌다. 정실 부인 고바이인(黄梅院)과의 이혼설은 1970년대 사료 오독에서 비롯된 창작일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로는 고바이인이 마지막까지 우지마사와 함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7][8]
호조 씨 멸망 당시의 실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호조 우지야스 시대 이상으로 세력을 확장시킨 치세를 이끌었다. 형제들과의 협력, 뛰어난 가신들의 보좌, 그리고 전투에서의 무공 등을 고려할 때 결코 무능한 무장은 아니었다는 평가가 있다.[14]
고미즈노오 천황의 칙찬으로 전해지는 《집외 삼십육가선》(集外三十六歌仙)에 우지마사가 지은 와카(和歌) 한 수가 선정되어 있기도 하다.[15]
3. 2. 부정적 평가
후세에 편찬된 《호조키》(北条記)에서는 우지마사를 "4세의 우지마사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노신인 마쓰다 뉴도(松田入道)의 못된 계략에 현혹되어 국정을 어지럽혔지만, 아직 아버지 우지야스 군(君)의 무덕이 있어, 그럭저럭 무사했다"라고 평가한다. 이 사료에서 호조 5대 당주 중 유일하게 '기미'(君)라는 존칭이 붙지 않은 인물이 우지마사이다. 이러한 후대의 평가나 아래에 서술될 '밥에 국 두 번 부은 이야기' 같은 일화는, 고호조씨가 멸망할 당시 실질적인 지배자가 우지마사였다는 점에서 '집안을 몰락시킨 당주'라는 결과론적인 부정적 평가가 내려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45] 히데요시에게 신종(臣従)을 거부하고 결국 멸망했기 때문에 "정세 파악에 소홀했다", "우물 안 개구리", "자신을 과신했다" 등의 평가가 후대에 굳어졌다.[45] 그러나 현대에는 "결과론을 근거로 우지마사를 어리석은 인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평가도 나온다.[45] "정세 파악에 소홀했던 우물 안 개구리"라는 평가에 대해서도, 오다 노부나가가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키고 간토까지 세력을 확장했을 때 우지마사 등이 보인 대응을 고려하면 적절하지 않다는 반론이 있다.[46]개인적으로는 가족애가 깊은 인물이었다고 전해지며, 유능한 동생들과 사이가 좋았고 애처가로도 알려져 있다. 정실 부인인 오바이인(黄梅院)과의 이혼설은 다케다씨의 스루가국 침공을 계기로 이혼했다는 내용이지만, 이는 1970년대 사료 오독으로 인해 창작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으며, 다른 동시대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실제로는 오바이인이 마지막까지 우지마사와 함께 살았다는 설도 있다.[26][7][8] 호조 가문 멸망 당시 실권자였지만, 아버지 우지야스 시대 이상으로 세력을 확장한 치세, 형제들과의 협력, 뛰어난 신하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전투에서도 공을 세운 점 등을 보면 결코 무능한 무장은 아니었다.[47][14]
히데요시에게 철저히 항전한 점에 대해서는, 우지마사가 무능하여 시대의 흐름이나 히데요시와의 압도적인 국력 차이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그의 자질 문제로 보는 평가가 주류였다.[48] 한편, 간토 지역(도고쿠, 東国) 무사들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래 중앙 정권으로부터 자립하려는 경향이 강했으며, 이러한 '도고쿠 무사 사회의 전통성'을 항전의 근거로 보는 견해도 있다.[49] 또한, 히데요시가 처음부터 호조 가문을 섬멸할 의도였다는 견해도 있다.[50] 구로타 모토키(黒田基樹)는 '도고쿠 무사 사회의 전통성'이나 '우지마사의 어리석음'을 항전의 근거로 삼는 견해에 반론한다. 그는 도쿠가와, 조소카베, 시마즈 등 유력 다이묘 대부분이 히데요시와 무력 대결을 벌였으며, 일찍 항복한 우에스기 가게카쓰나 모리 데루모토 등도 이전 오다 정권과의 격렬한 항쟁을 통해 중앙 정권의 강력함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항복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항전은 '당주의 자질'이나 '지방의 전통성' 문제가 아니라 당시 유력 다이묘들에게 보편적인 사고방식이었다고 주장한다.[50] 다만, 시마즈나 조소카베는 본거지가 공격받기 전에 항복했지만, 호조 가문은 본거지까지 공격당하는 최종 단계까지 항전했기 때문에 당시 관습상 멸망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지적하기도 한다.[50]
고미즈노오 천황의 칙찬(勅撰)으로 전해지는 《집외삼십육가선》(集外三十六歌仙) 32번째에 우지마사가 지은 와카 한 수가 채록되어 있다.[51][52][15]
>守れ猶君にひかれてすみよしの まつのちとせもよろづよのはる
>(32. 기송축 북조씨정 北条氏政)
호조 우지마사에 관한 일화는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이 많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우지마사가 반드시 무능한 당주는 아니었으므로 이러한 일화에는 후대의 창작도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밥에 국을 부어먹은 이야기'''
: 우지마사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이다. 식사 때 우지마사가 밥에 국을 부었는데 양이 부족하여 한 번 더 부었다. 이를 본 아버지 우지야스가 "매일 식사를 하면서도 밥에 부을 국의 양조차 가늠하지 못하다니, 호조 가문도 내 대에서 끝나는가"라고 한탄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국의 양도 제대로 재지 못하는 자가 영지나 가신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우지마사가 결국 가문의 멸망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일화는 유명해졌고 그의 평가를 낮추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으며, 비슷한 내용이 모리씨의 모리 모토나리와 모리 데루모토 부자 사이의 일화로도 전해진다.[53][16] 우지마사를 어리석다고 평가하는 것은 18세기 중반의 『관동 8개 주 고전록』(권 17) 정도가 오래된 기록이다.[4]
'''보리에 대한 이야기'''
: 17세기 전반의 《고요군칸》(甲陽軍鑑) (권 11)에 나오는 일화이다. 우지마사가 농민들이 보리 타작하는 것을 보고 "저기 갓 타작한 보리로 점심을 먹자"고 말했다고 한다. 타작한 보리는 바로 먹을 수 없고 건조, 탈곡, 정백 등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케다 신겐이 수확한 보리를 먹기까지 필요한 과정을 모르는 우지마사를 깔보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우지마사를 낮게 평가하는 토대를 마련했을 가능성이 있다.[4]
3. 3. 기타 일화
호조 우지마사에 관한 일화는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담은 것이 많으며, 후대에 창작된 이야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밥에 국을 부어먹은 이야기'''
우지마사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식사 때 밥에 국을 두 번 부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처음 국을 부었으나 양이 부족하여 한 번 더 부었는데, 이를 본 아버지 우지야스가 "매일 식사를 하면서도 밥에 부을 국의 양조차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다니, 호조 가문도 내 대에서 끝나는 것인가"라고 한탄했다는 것이다.[53][16] 이는 국물의 양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영지나 가신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겠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지마사가 결과적으로 가문의 멸망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일화는 널리 퍼졌고, 그에 대한 평가를 낮추는 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비슷한 내용이 모리 씨의 모토나리와 테루모토 사이의 일화로도 전해진다.[53][16] 우지마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기록은 18세기 중반의 『관동 8개 주 고전록』 등 비교적 후대의 문헌에서 나타난다.[4]
'''보리에 대한 이야기'''
17세기 전반의 문헌인 『고요군칸』(甲陽軍鑑일본어)에는 우지마사가 농민들이 보리를 수확하는 것을 보고 "저 갓 수확한 보리로 점심을 먹자"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4] 실제로는 수확한 보리를 먹기까지 건조, 탈곡, 정백 등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다케다 신겐은 보리를 먹기까지의 과정을 모르는 우지마사의 무지함을 비웃었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 역시 우지마사를 낮게 평가하는 근거로 작용했을 수 있으나, 사실임을 증명할 근거는 부족하며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있다.[4]
4. 대중문화
군기
- 『호조기』
- 미우라 조신 『호조 오대기』
노가쿠
- 호조 (태합 노, 시테: 초연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연기했다고 여겨짐[17][18])
소설
- 이마무라 쇼고 『국밥 전투』(『전국 무장전 동일본 편』 수록, 2023년, PHP 연구소)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 『다케다 신겐』 (NHK 대하드라마, 1988년, 연기: 아오야마 유이치)
- 『후린화산』 (NHK 대하드라마, 2007년, 연기: 사오토메 타이치)
- 『텐치진』 (NHK 대하드라마, 2009년, 연기: 이부키 고로)
- 『군사 칸베에』 (NHK 대하드라마, 2014년, 연기: 이부키 고로)
- 『사나다마루』 (NHK 대하드라마, 2016년, 연기: 다카시마 마사노부)
- * 다카시마는 『사나다마루』 출연 다음 해인 2017년 이후 「오다와라 호조 5대 축제」 퍼레이드에서도 우지마사로 분장하고 있다.[19][20][21]
- 『어떻게 할까 이에야스』 (NHK 대하드라마, 2023년, 연기: 스루가 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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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條五代祭りで勇壮戦国絵巻 一族役に合田さん、高嶋さ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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