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루이스 비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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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안 루이스 비베스는 16세기 스페인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이자 교육 사상가로, 여성 교육과 사회 문제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유대교 개종자 가문 출신으로, 종교 재판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을 떠나 잉글랜드와 브뤼헤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비베스는 교육, 심리학, 사회 사상 등 다방면에서 선구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으며, 특히 교육 사상에서 학생의 건강과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빈곤 구제를 국가의 책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사회 개혁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의 사상은 동시대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심리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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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루이스 비베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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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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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후안 루이스 비베스 |
라틴어 이름 | 요안네스 루도비쿠스 비베스 (Joannes Lodovicus Vives) |
카탈루냐어 이름 | 주안 류이스 비베스 이 마르크 (Joan Lluís Vives i March) |
네덜란드어 이름 | 얀 루도비쿠스 비베스 (Jan Ludovicus Vives) |
출생일 | 1493년 3월 6일 |
출생지 | 발렌시아, 아라곤 연합왕국 |
사망일 | 1540년 5월 6일 |
사망지 | 브뤼헤, 부르고뉴 네덜란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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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배경 | |
분야 | 서양 철학 |
시대 | 르네상스 철학 |
사상 | 르네상스 인문주의 |
주요 관심사 | 심리학 교육학 |
주요 사상 | 정신 연구 |
2. 생애
후안 루이스 비베스는 발렌시아에서 태어나 발렌시아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파리 대학교와 루뱅 대학교에서 학문적 경력을 쌓았으며, 잉글랜드에서 잉글랜드의 메리 1세의 가정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잉글랜드 왕실과의 갈등으로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지만, 석방 후 브뤼헤로 돌아가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 1540년 브뤼헤에서 사망하여 성 도나티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Early life)
후안 루이스 비베스는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쪽 집안은 알함브라 칙령 수십 년 전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콘베르소 가문 출신이었다.[2]그는 스페인에 있는 동안 발렌시아 대학교 (에스투디 제네랄)에 다녔으며, 제롬 아미게투스와 다니엘 시소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비베스는 나중에 학교가 스콜라 철학에 지배되었고, 변증법과 논쟁이 교육 전달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회상했다.
The youngest scholars are accustomed never to keep silent. They are always vehemently asserting whatever comes into their minds, lest they should seem to give up the dispute. Nor does one disputation, or even two a day suffice, as for instance at dinner. They wrangle at breakfast; they wrangle after breakfast; they wrangle before supper and they wrangle after supper. At home they dispute, out of doors they dispute. They wrangle over their food, in the bath, in the sweating room, in the church, in the town, in the country, in public, in private. At all times they are wrangling.|가장 어린 학자들조차 결코 침묵을 지키지 않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들은 논쟁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항상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격렬하게 주장한다. 하루에 한 번, 심지어 두 번의 논쟁도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어 저녁 식사 때처럼. 그들은 아침 식사 때 싸우고, 아침 식사 후 싸우고, 저녁 식사 전에 싸우고, 저녁 식사 후에 싸운다. 집에서 그들은 논쟁하고, 밖에서도 논쟁한다. 그들은 음식 위에서, 목욕탕에서, 땀을 흘리는 방에서, 교회에서, 도시에서, 시골에서, 공공 장소에서, 사적인 자리에서 논쟁한다. 그들은 항상 논쟁한다.영어[3]
1473년에 태어난 그의 어머니 블랑키나는 1491년 마라노이자 유대교 숭배자라는 이단으로 종교 재판의 조사를 받았다.[4] 그녀는 아홉 살 때, 개종 이후 그녀의 어머니가 가족이 욤 키푸르를 계속 기념하도록 주장했다고 인정했다.[4] 그녀는 니케아 신조를 암송할 수 있고 기꺼이 할 의향이 있음을 보여주자 무죄 방면되었다. 그녀는 비베스가 15세였던 1508년에 흑사병으로 사망했고,[5] 1509년에 그는 스페인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1524년경, 비베스의 아버지, 할머니, 증조부와 그의 더 넓은 가족의 여러 구성원이 그의 삼촌이 집 안에 비밀 회당을 운영하다가 발각된 후 숨겨진 유대교 혐의로 종교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6] [7]
몇 년 후 (약 1528년), 비베스의 누이들에게 지참금을 제공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지역 당국은 그의 어머니의 이단 조사 사건을 다시 꺼냈다. 그녀의 욤 키푸르 증언을 바탕으로,[4] 블랑키나 비베스의 시신은 다시 발굴되어 사후 처형으로 화형되었다. 비록 그의 로마 가톨릭교에 대한 믿음이 매우 진실하고 진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베스는 당시 토마스 모어의 첼시 집에 살고 있었고 심한 우울증 상태에 빠졌다.[7]
2. 2. 학문적 경력 (Academic career)

비베스는 1509년부터 1512년까지 파리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519년에는 루뱅 대학교에서 인문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친구 에라스뮈스의 권유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De Civitate Dei)에 대한 정교한 주석을 준비했고, 이는 1522년 잉글랜드의 헨리 8세에게 헌정되어 출판되었다.[8]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잉글랜드로 초청받아 잉글랜드의 메리 1세 공주의 가정교사로 활동했으며, 공주를 위해 ''De ratione studii puerilis epistolae duae''(1523)와 젊은 여성의 기독교 교육에 관한 ''여성 기독교 교육론(De Institutione Feminae Christianae)''을 썼다. 비베스는 ''여성 기독교 교육론(De Institutione Feminae Christianae)''을 아라곤의 캐서린 여왕에게 헌정했다.[8]
잉글랜드에 머무는 동안 그는 에라스뮈스와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던 옥스퍼드 대학교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 거주했다. 비베스는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철학을 강의했다. 1528년, 그는 자신의 후원자를 지지하고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의 결혼 무효 선언에 반대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자, 왕의 총애를 잃었고 6주 동안 가택 연금되었다.
2. 3. 후기 생애 (Later life)
석방된 후, 그는 브뤼헤로 돌아가 남은 생애를 윤리 및 철학 저술에 헌신했는데, 주로 일부 학파 내에서의 무비판적인 스콜라 철학 권위와 다른 학파 내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 권위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논문은 ''De Causis Corruptarum Artium''이며, 이는 베이컨의 ''노붐 오르가눔''과 동급으로 평가받는다.[9]그의 가장 중요한 교육학 저서로는 ''Introductio ad sapientiam''(1524), 더 합리적인 교육 프로그램과 학습의 긴급한 중요성을 강조한 ''De disciplinis'', ''De prima philosophia'' 그리고 일련의 훌륭한 대화로 구성된 라틴어 교과서인 ''Exercitatio linguae latinae''가 있다. 그의 철학 저서에는 ''De anima et vita''(1538), ''De veritate fidei Christianae'', 그리고 도시 빈곤 문제에 대한 최초의 논문으로서 빈곤 구제 및 감소를 위한 국가 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을 제시한 ''De Subventione Pauperum Sive de Humanis Necessitatibus''(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에 관하여)(1526)가 있다. 비베스는 문헌 비평을 통해[9] 아리스테아스 서한의 저자가, 즉 구약 성경의 코이네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의 제작을 묘사한 저자가 당대의 민족 그리스인이 아니라, 자신이 묘사한 사건이 일어난 지 오래 후에 살았던 유대인 작가였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1540년 브뤼헤에서 4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9] 성 도나티안 대성당에 묻혔다.[9]
3. 사상
비베스는 영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영혼의 본질보다는 그 기능에 주목했다. 그는 영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해하고, 기억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믿었다.[2] 그는 영혼을 설명하면서 마음을 언급했는데, 영혼의 정의보다는 영혼의 조각들을 맞춰나감으로써 영혼의 작용에 대한 더 나은 개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혼을 예술에 비유하며 "우리가 그림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그림 자체가 무엇이라고 선언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라고 했다.[1]
비베스는 결정론을 거부하고 인간의 마음과 영혼이 "윤리적 및 사회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 그는 또한 우리가 매일 느끼는 감정이 영혼의 선악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4]
비베스는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아 감정이 신체의 담즙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5] 그는 "인간이 가진 다양한 색깔의 담즙이 서로 다른 유형의 감정을 반영한다"는 데 동의했으며,[6] "특정 감정은 인체의 담즙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담즙은 마찬가지로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7] 그는 특정 기질에 맞는 음식을 섭취하라는 갈레노스의 권고를 따랐고,[8]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유익하다고 주장했다.[4] 그는 동물정신론을 강조하여 데카르트에게 영향을 주었으며,[7] "정신력은 신체적 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다.[9] 비베스는 감정을 "뜨거움, 차가움, 습함, 건조함, 그리고 이 4가지의 다양한 조합"으로 나누었으며, 감정에 따른 문제는 신체에 적절한 온도를 적용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6]
비베스는 기억을 "과거와 관련된 반면, 지각은 현재와 관련된다"고 정의했다.[11] 그는 "기억은 외부적으로 또는 내부적으로 지각하여 유지되는 것"이라 하며,[12] 사건과 연결된 상상을 통해 정보 검색이 쉬워진다고 보았다.[13] 그는 무의식 속 기억, 즉 "특정 양의 주의를 기울일 때 가장 접근하기 쉬운" 정보가 있다고 말했다.[13] 비베스는 강렬한 감정적 경험이 기억을 쉽게 만들고, 상상이 기억 유지에 중요하며, 연습으로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8] 그는 "쓸모없는 인용구라도 매일 암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14] 어린 시절 기억에 대해, 아이들은 걱정거리가 적어 빨리 배운다고 믿었다. 비베스는 영혼이 기억을 처리하며, 어릴 적 열병 때 체리를 먹은 기억이 어른이 되어 다시 체리를 먹었을 때 "마치 어린 시절처럼 아픈 느낌"을 주는 것처럼, 기억은 무의식적으로 오래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15] 그는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 날마다 기억력이 감퇴한다"고 믿었다.[16]
비베스는 "지능"을 "감독자"라는 의미로 사용하며, 다양한 자극으로부터 주의를 이끄는 기능이라고 보았다.[12] 지능은 인지적 구조이며, 경험에 대한 기억은 지능의 순서에 고정된다.[13] 지능은 사용될 때만 중요하며, 기억 유지에 중요하고, 더 나은 학습 경험을 만든다.
1525년 브뤼헤 시의 요청으로 빈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그는 저서 《De Subventione Pauperum Sive de Humanis Necessitatibus》(빈곤 구제에 관하여)에서 국가가 빈곤층에게 재정적 지원과 기술 훈련을 제공해야 하지만, "게으를 권리"는 없다고 주장했다.[12] 그의 제안은 1530년대 잉글랜드, 독일 제국, 스페인 왕국의 사회 구제 법안에 영향을 미쳤다.[12]
비베스는 심리학과 의학을 통합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동물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2] 청결과 절제가 건강에 중요하며, 신체 청결이 정신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6] 또한 정신 질환자 치료에 있어 약물과 함께 친절한 치료가 필요하다고 보았다.[9]
3. 1. 교육 사상
최근의 일부 페미니즘 및 젠더 연구 학자들은 비베스가 고전 수사학을 수정하여 일종의 "반(半)페미니즘"을 표현했다고 비난했다.[13][14] 16세기 스페인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수많은 "여성을 위한, 여성에 반대하는 논문" 중에서, 일부 현대 학자들은 비베스가 "중도적인 길을 걸었다"고 주장하며, 여성혐오적이지도, 여성중심주의적이지도, 여성 숭배적이지도, 여성 혐오적이지도 않다고 주장한다.[15]동시에 그의 저술은 전통적인 젠더 역할에 대한 그의 신념을 표현했다. 예를 들어, 그는 여성이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그 다음 이브가 창조되었으며, 아담은 유혹당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유혹을 받아 잘못된 길로 인도되었다. 그러므로 여자는 약하고 판단력이 불확실하며 쉽게 속기 쉬운 존재이므로 (인류의 첫 번째 부모인 이브가 악마에게 그런 사소한 구실로 속임을 당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르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여자가 어떤 그릇된 의견에 스스로를 납득시키면, 교사로서 청취자들에게 그것을 전달하고, 제자들이 기꺼이 스승을 따르기 때문에 쉽게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오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16]
1523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De institutione feminae christianae''는 스페인 아라곤의 캐서린(영국 헨리 8세의 왕비)을 위해 그녀의 딸 메리에게 교육시키기 위해 의뢰되었다. 이 책의 목적은 메리에게 그녀가 따라야 할 적절한 역할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여왕의 역할을 금지했는데, 메리 공주와 그녀의 여동생 엘리자베스는 나중에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미혼 여성은 공공장소에 거의 나타나서는 안 된다... 여자가 지배하는 남자를 누가 존경할 수 있겠는가?"[17] 이 책은 또한 기독교 여성의 더 긴 목록의 속성을 제공한다. 비베스에 따르면 그녀는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남편에게 충실하고 헌신적이며 순종해야 한다. 그녀는 공공장소에서 얼굴을 가리고 검소하게 옷을 입어야 한다. 그녀는 남편의 허락 없이 다른 성인 남성을 집 안에 절대 들여서는 안 된다. 아내의 순종과 부부의 정절이 그녀의 명예를 결정하는 반면, 사회의 눈에 비친 남편의 명예와 존경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학대받거나 지배당하거나 통제당하지 않고, 아내가 자신의 결혼 서약에 충실하도록 보장하는 능력을 통해 그의 가정을 이끌어가는 능력에서 비롯되었다.[18]
비베스의 남편을 위한 저서인 ''De los deberes del marido''는 기혼 여성을 위한 그의 조언서 길이의 절반에도 못 미치며, 기독교 남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좋은 기독교 아내를 선택하고 통치하는 데 중점을 둔다.[17]
비베스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감독자"라는 단어로 번역될 수 있는 방식으로 "지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비베스에 따르면 지능은 다양한 종류의 자극으로부터 주의를 이끄는 기능을 포함한다. 비베스에 따르면 지능은 매우 인지적 구조이다. 우리가 배울 때, 경험에 대한 기억은 실제 지능의 순서에 고정된다. 비베스의 지능에 대한 인식은 그것이 사용될 때만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적인 재능을 갖는 것은 그 사람이 적극적으로 그것을 사용할 때만 의미가 있다. 지능을 사용하는 것은 기억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며, 이는 일반적으로 더 나은 학습 경험을 만든다. 비베스는 학생의 건강, 교사의 성격, 교실 환경 및 학생들이 읽어야 하는 저자의 유형이 모두 학생의 학습 방식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시사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학교의 적절한 환경을 아동의 감각 경험의 첫 번째 생태학적 요소로 특별히 강조했다."라고 하였다. 그는 학습과 지식 습득을 인간이 음식을 소화하는 방식에 비유했다. 정신에 지식을 먹이는 것은 몸에 음식을 먹이는 것과 같으며 인간에게 필수적이다.
3. 2. 사회 사상
중세 시대에는 빈곤 구제가 주로 교회의 책임이었으며, 개인은 자선 행위를 통해 이를 수행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이러한 노력은 불충분해졌다. 1525년, 네덜란드의 도시 브뤼헤는 비베스에게 빈곤 구제 문제 해결 방안을 제안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에세이 《De Subventione Pauperum Sive de Humanis Necessitatibus》(빈곤 구제에 관하여)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비베스는 빈곤층에게 일정 수준의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고, 기술이 없는 빈곤층에게 기술 훈련을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라고 주장했지만, "게으를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다.[12]브뤼헤시는 1557년까지 비베스의 제안을 실행하지 않았지만, 그의 제안은 비판적인 다른 사상가와 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30년대 빈곤 구제에 대한 잉글랜드, 독일 제국, 스페인 왕국에서 제정된 사회 구제 법안에 영향을 미쳤다.[12]
3. 3. 심리학
비베스는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영혼 자체가 무엇인지보다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영혼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영혼이 어떠한지에 관심을 가졌다"라고 말했다.[1] 노레나에 따르면, 비베스는 영혼이 "이해하고, 기억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2] 비베스는 영혼을 예술에 비유하며 "우리가 그림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그림 자체가 무엇이라고 선언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라고 설명했다.[1] 그는 결정론을 거부하고, 인간의 마음과 영혼이 "윤리적 및 사회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 또한 매일 느끼는 감정이 영혼의 선악에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4]비베스는 감정이 신체의 담즙과 관련된다는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다.[5] 그는 "인간이 가진 다양한 색깔의 담즙이 서로 다른 유형의 감정을 반영한다"는 데 동의했다.[6] 나아가 "특정 감정은 인체의 담즙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담즙은 마찬가지로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7] 비베스는 특정 기질에 맞는 음식을 섭취하라는 갈레노스의 권고를 따랐으며,[8]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유익하다고 주장했다.[4] 그는 동물정신론을 강조하여 데카르트에게 영향을 주었다.[7] 또한 "정신력은 신체적 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으며,[9] 감정을 "뜨거움, 차가움, 습함, 건조함, 그리고 이 4가지의 다양한 조합"으로 나누었다.[10] 감정에 따른 문제는 신체에 적절한 온도를 적용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6]
비베스는 기억을 "과거와 관련된 반면, 지각은 현재와 관련된다"고 정의했다.[11] 그는 "기억은 외부적으로 또는 내부적으로 지각하여 유지되는 것"이라 하며,[12] 사건과 연결된 상상을 통해 정보 검색이 쉬워진다고 보았다.[13] 그는 무의식 속 기억, 즉 "특정 양의 주의를 기울일 때 가장 접근하기 쉬운" 정보가 있다고 말했다.[13] 비베스는 강렬한 감정적 경험이 기억을 쉽게 만들고, 상상이 기억 유지에 중요하며, 연습으로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8] 그는 "쓸모없는 인용구라도 매일 암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14] 어린 시절 기억에 대해, 아이들은 걱정거리가 적어 빨리 배운다고 믿었다. 비베스는 영혼이 기억을 처리하며, 어릴 적 열병 때 체리를 먹은 기억이 어른이 되어 다시 체리를 먹었을 때 "마치 어린 시절처럼 아픈 느낌"을 주는 것처럼, 기억은 무의식적으로 오래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15] 그는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 날마다 기억력이 감퇴한다"고 믿었다.[16]
비베스는 "지능"을 "감독자"라는 의미로 사용하며, 다양한 자극으로부터 주의를 이끄는 기능이라고 보았다.[12] 지능은 인지적 구조이며, 경험에 대한 기억은 지능의 순서에 고정된다.[13] 지능은 사용될 때만 중요하며, 기억 유지에 중요하고, 더 나은 학습 경험을 만든다. 비베스는 학생의 건강, 교사의 성격, 교실 환경, 읽어야 할 저자 유형이 학습에 중요하다고 처음으로 제안했다.[9] 그는 "학교의 적절한 환경을 아동의 감각 경험의 첫 번째 생태학적 요소로 특별히 강조했다."[17] 그는 학습과 지식 습득을 음식 소화에 비유하며, 정신에 지식을 먹이는 것은 몸에 음식을 먹이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18]
3. 4. 의학
비베스는 심리학과 의학을 통합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아이디어는 새로운 것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의학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바라보는 방식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다른 공헌의 길을 열었습니다."[1] 그는 사람에게 시행하기 전에 동물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비베스가 실제 의학적 절차를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제안은 당시 최초의 제안 중 하나였습니다."[2] 비베스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기를 희망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일종의 사회 개혁이 비베스의 의학에 대한 아이디어로 인해 크게 이루어졌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3] 클레멘츠는 비베스의 공헌을 "독창적"이라고 묘사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업적과 아이디어 측면에서 그를 과소평가되었다고 분류할 것이다.[4] 비베스는 또한 인체 건강에 대한 중요한 초기 관찰을 했다. 그는 "청결과 절제라는 개인적인 습관이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촉구했다.[5] 그는 신체의 청결이 신체와 정신의 복지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6]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을 조롱하고, 흥분시키고, 자극하는 것이 그들의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 언급했다.[7] 비베스는 "정신 질환자를 오락의 형태로 사용하는 것은 그가 만난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 중 하나"라고 말했다.[8] 그의 믿음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약물을 제공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절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9]3. 5. 감정과 기억
비베스는 영혼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영혼 자체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보다 영혼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영혼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영혼이 어떠한지에 관심을 가졌다."[1] 노레나는 비베스가 영혼이 특정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영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해하고, 기억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믿었다.[2] 비베스는 영혼에 대한 설명을 통해 마음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는 영혼이 무엇인지 단순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영혼의 조각들을 맞춰나감으로써 영혼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더 나은 개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혼을 예술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그림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그림 자체가 무엇이라고 선언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1] 비베스는 결정론적 인간 행동관을 거부하고, 대신 인간의 마음과 영혼이 "윤리적 및 사회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3] 그는 또한 우리가 매일 느끼는 감정이 우리 영혼이 선을 얻고 있는지 악을 얻고 있는지에 영향을 미친다고 제안했다.[4]비베스의 또 다른 심리학적 기여는 그의 감정에 대한 생각과 관련이 있다. 그의 생각은 감정이 신체의 담즙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의 이념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5] 그는 "인간이 가진 다양한 색깔의 담즙이 서로 다른 유형의 감정을 반영한다"는 믿음에 대해 그 둘과 의견을 같이 했다.[6] 더 나아가, 비베스는 "특정 감정은 인체의 담즙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담즙은 마찬가지로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7] 노레나에 따르면, 비베스는 특정 기질에 맞는 특정 유형의 음식을 섭취하라는 갈레노스의 권고를 따랐다.[8] 비베스는 또한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감정조차도 거의 모든 감정이 많은 면에서 실제로 유익하다고 주장했다.[4] 그는 긍정적인 감정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도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표현했다. 클레멘츠에 따르면, 그의 동물정신론 즉, 동물 정신에 대한 강조는 데카르트에게 영향을 미쳤다.[7] 비베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사람이 자신의 도덕을 얼마나 강하게 믿느냐가 자신에 대한 느낌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즉, "정신력은 신체적 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9] 비베스에 따르면 감정은 "뜨거움, 차가움, 습함, 건조함, 그리고 이 4가지의 다양한 조합"으로 나눌 수 있다.[10] 감정에 따른 성격 장애는 신체에 적절한 온도를 적용하면 해결될 수 있었다.[6]
비베스는 기억을 강조했다. 그는 기억을 "…과거와 관련된 반면, 지각은 현재와 관련된다"[11]고 정의했다. "기억은 외부적으로 또는 내부적으로 지각하여 유지되는 것이다."[12] 특히 인간이 내부적으로 무언가를 상상하고 그것을 사건과 연결하여 기억을 생성하는 방식에 중점을 두었다. 비베스에 따르면 이것은 기억의 정보 검색을 더 쉽게 만든다.[13] 그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기억, 즉 무의식에 대해서도 언급했다.[13] 그는 "특정 양의 주의를 기울일 때 기억에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정보가 있다고 말했다. 머레이에 따르면, 비베스는 인간이 검색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현대적 개념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13] 비베스는 기억이 강렬한 감정적 경험과 연결될수록 기억하기 더 쉽다는 것을 관찰했다. 기억 유지 측면에서 상상은 특히 아이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8] 그는 또한 연습을 통해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이론을 믿었다. 그는 "쓸모없는 인용구라도 매일 무언가를 암기해야 한다"[14]고 조언했다. 비베스는 심지어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그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마음에 있는 걱정거리가 적기 때문에 빨리 배운다고 믿었다. 비베스는 또한 기억의 회상은 영혼이 기억을 처리하는 개념에 의해 일어난다고 믿었다. 비베스 자신도 어렸을 때 열이 있을 때 체리를 먹었던 회상 경험이 있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체리를 먹었을 때 그는 "마치 어린 시절처럼 아픈 느낌"을 받았다.[15] 그는 이것을 주목할 만하다고 여겼으며, 기억은 무의식적으로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또한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 날마다 기억력이 감퇴한다"[16]고 믿었다.
비베스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감독자"라는 단어로 번역될 수 있는 방식으로 "지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비베스에 따르면 지능은 다양한 종류의 자극으로부터 주의를 이끄는 기능을 포함한다.[12] 비베스에 따르면 지능은 매우 인지적 구조이다. 우리가 배울 때, 경험에 대한 기억은 실제 지능의 순서에 고정된다.[13] 비베스의 지능에 대한 인식은 그것이 사용될 때만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적인 재능을 갖는 것은 그 사람이 적극적으로 그것을 사용할 때만 의미가 있다. 지능을 사용하는 것은 기억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며, 이는 일반적으로 더 나은 학습 경험을 만든다. 비베스는 학생의 건강, 교사의 성격, 교실 환경 및 학생들이 읽어야 하는 저자의 유형이 모두 학생의 학습 방식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시사한 사람 중 하나였다.[9] "비베스는 학교의 적절한 환경을 아동의 감각 경험의 첫 번째 생태학적 요소로 특별히 강조했다."[17] 그는 학습과 지식 습득을 인간이 음식을 소화하는 방식에 비유했다.[9] 정신에 지식을 먹이는 것은 몸에 음식을 먹이는 것과 같으며 인간에게 필수적이다.[18]
4. 저작 (Major works)
5. 현대적 의의 (Contemporary relevance)
비베스는 포괄적인 교육 이론을 상상하고 묘사했다. 그는 미셸 드 몽테뉴[10]와 존 헨리 뉴먼의 에세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의 저서는 또한 그의 절친한 친구들인 토머스 모어와 에라스뮈스의 존경을 받았으며, 에라스뮈스는 비베스가 "에라스뮈스의 이름을 능가할 것"이라고 썼다.[11]
비베스는 정신을 직접 분석한 최초의 학자로 여겨진다. 그는 사람들과 광범위한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그들이 나타내는 감정 표현과 그들이 사용한 특정 단어, 그리고 논의하는 문제 간의 관계를 기록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비베스의 저작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신과 역사가 그레고리 질부르그는 비베스를 정신분석학의 대부로 여겼다. (''A History of Medical Psychology'', 1941) 그리고 포스터 왓슨(1915)은 그를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로 칭했다.
비베스는 군주들을 가르쳤다. 그가 생각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아동 교육에 대한 아이디어는 장 자크 루소보다 훨씬 앞섰으며, 몽테뉴의 에세이를 통해 루소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비베스가 16세기에 아무리 영향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현재 전문적인 학문 분야 외에는 최소한의 관심만을 끌고 있다. 비베스의 가치는 두 개의 벨기에 고등 교육 기관(KATHO 및 카톨리케 호흐스홀 브뤼허-오스텐더)이 2013년 9월부터 협력/합병을 시작하면서 'Vives'라는 이름을 선택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또한 브뤼헤가 수도인 서플란데런주와 비베스의 지역적 연관성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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