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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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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포크라테스는 기원전 460년경 그리스 코스 섬에서 태어난 고대 그리스의 의사이다. 그는 의학을 가르치고 실천하며, 질병이 미신이나 신이 아닌 자연적인 원인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사체액설을 발전시키고, 의학을 종교에서 분리하는 등 의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히포크라테스 전집》에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포함한 다양한 의학 문서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 선서는 오늘날에도 의료 윤리의 기본 원칙으로 존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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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마
로마 "초상" 흉상에 나타난 히포크라테스의 관습적인 이미지 (19세기 판화)
이름히포크라테스
로마자 표기Hippokrates
그리스어 표기Ἱπποκράτης ὁ Κῷος
출생기원전 460년경
출생지코스 섬, 고대 그리스
사망기원전 370년경 (향년 약 90세)
사망지라리사, 고대 그리스
직업의사
활동 시대고대 그리스
의학 정보
피터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히포크라테스 판화, 1638년.
피터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히포크라테스 판화, 1638년. 미국 국립 의학 도서관 소장
업적의학의 과학적 발전
교육 기관아스클레피오스 신전
명언
명언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 기회는 빨리 지나가고, 경험은 종종 오류를 범하며, 판단은 어렵다.

2. 생애

히포크라테스는 기원전 460년경 그리스 코스섬에서 태어났다는 점은 많은 역사가들이 동의하지만,[5][85] 그 외의 전기적 정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5]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는 주로 2세기 그리스 의사인 에페소스의 소라누스가 쓴 최초의 전기에서 비롯된다.[6][87] 후대의 전기로는 10세기 수다(Suda)와 12세기 요한 체체스의 기록이 있다.[1][7][88] 동시대 기록으로는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와 ''파이드로스'',[8][86]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간략하게 언급된다.[9]

소라누스에 따르면, 히포크라테스의 아버지는 의사인 헤라클리데스였고, 어머니는 팍시텔라(다른 자료에서는 파이나레테[90])였다.[10][90]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히포크라테스 1세)에게 의학을 배웠으며, 데모크리토스고르기아스에게서 다른 학문을 공부했다.[10][91] 코스의 아스클레피온(의학 학교이자 신전)에서 훈련받았고, 트라키아 의사인 헤로디쿠스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12][13][91]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에서 히포크라테스를 "코스의 히포크라테스, 아스클레피아데스"라고 묘사했고,[12][13][93] ''파이드로스''에서는 그가 의학에 신체의 본성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언급했다.[14]

히포크라테스에게는 테살루스와 드라코라는 두 아들이 있었고, 사위인 폴리부스와 함께 그의 제자였다.[10][11][91] 후대 의사인 갈레누스(Galen)는 폴리부스가 히포크라테스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보았다.[10][11][91]

히포크라테스가 활동했던 시기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기로,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가 최전성기를 누리던 때였다. 그는 역사가 투키디데스와 동갑이었고, 철학자 소크라테스보다는 약 10살 어렸다.

그는 평생 의학을 가르치고 실천했으며, 테살리아, 트라키아, 마르마라 해 등 그리스 전역을 여행하며 의료 활동을 펼쳤다.[11][92][95]



그는 테살리아라리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1][92] 사망 당시 나이에 대해서는 83세, 85세, 90세 등 다양한 설이 있으며,[11][92] 100세가 훨씬 넘게 살았다는 주장(104세 설[96])도 있다.[11]

3. 히포크라테스 의학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이 미신이나 신들의 벌이 아니라, 환경 요인, 식단, 생활 습관과 같은 자연적인 원인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은 최초의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15][16][17][18][97][98] 그는 "신성한 병"으로 불리던 간질조차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원인을 가지며, 사람들이 무지 때문에 이를 신성시한다고 주장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을 종교철학으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적인 과학 분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철학(이오니아 자연철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의학에서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이나 크로톤의 알크마이온의 이론과 같은 순수한 철학적 설명을 배제하고자 노력했다.[99][100]

히포크라테스는 엠페도클레스의 이론을 발전시킨 4체액설을 체계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이론은 인체의 건강과 질병을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이라는 네 가지 체액의 균형 상태로 설명하며,[101][102][103][111] 이 체액들의 조화가 깨지면 질병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는 당시 피타고라스 학파의 균형 이론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다만, 4체액설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정확하지 않은 해부학생리학 지식에 기반한 것이었다.[16][17][18]

고대 그리스 의학은 크게 크니도스 학파와 코스 학파(히포크라테스 학파)로 나뉘었다. 크니도스 학파는 진단을 중시했으나, 당시 해부학 지식의 한계로 어려움을 겪었다.[19][104] 반면, 히포크라테스가 속한 코스 학파는 진단보다는 환자 관리와 예후(질병의 경과 예측)에 더 큰 중점을 두었다.[20][21][105][106] 코스 학파는 질병의 원인을 주로 체액의 불균형으로 보고, 환자 전체를 돌보는 일반적인 진단과 수동적인 치료법을 통해 임상 실습의 발전을 이끌었다.[107] 이들은 인체의 자연치유력(vis medicatrix naturae|비스 메디카트릭스 나투라이la)을 중시했으며, 치료는 이 자연적인 과정을 돕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27][114] (구체적인 진단 및 치료 방법, '위기' 개념 등은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룬다.)

현대 의학은 특정 질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전문적인 치료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크니도스 학파의 접근 방식과 더 유사하며, 히포크라테스 의학과는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히포크라테스의 수동적인 접근 방식은 후대에 프랑스 의사 후다르(M. S. Houdart)로부터 "죽음에 대한 명상"[22]이라거나 "소극적인 진료"[108][109]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의 접근법은 당시 의학 지식 수준에서 환자의 전반적인 건강을 돌보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수 있다. 그는 "인구의 건강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들이 숨쉬는 공기, 마시는 물, 그리고 그들이 사는 곳을 살펴보라"고 말하며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3][24]

3. 1. 진단과 치료

히포크라테스 학파는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있어 관찰과 기록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의사는 환자의 안색, 맥박, , 고통, 움직임, 배설물 등 다양한 증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규칙적으로 기록해야 했다.[37][92] 심지어 병력을 들을 때 환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맥박을 측정했다는 기록도 있다.[42] 이러한 임상 관찰은 환자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의 병력이나 생활 환경까지 확장되었다.[43] 히포크라테스는 이러한 상세한 관찰과 기록을 통해 질병의 경과를 예측하는 예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 의학 기술로는 치료법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질병의 진행 과정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의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다.[18][37][103][118]

히포크라테스 의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위기(Crisis)’ 또는 ‘분리’였다.[112] 이는 질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환자가 사망하거나, 반대로 신체의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회복되는 결정적인 시점을 의미한다. 위기는 질병 발생 후 특정 ‘결정적인 날(critical days)’에 나타나는 경향이 있으며, 만약 위기가 예상된 날짜에서 벗어나 발생하면 재발이나 악화가 우려되었다. 이러한 위기 개념은 질병의 경과를 예측하는 데 활용되었다.[26][113]

히포크라테스 의학의 치료법은 겸손하고 수동적인 접근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핵심 원리는 "자연 치유력"(vis medicatrix naturae vis medicatrix naturaelat)에 대한 믿음이었다. 즉, 인체는 스스로 4체액설의 균형을 되찾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힘(physis|퓌시스grc)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27][114] 따라서 히포크라테스 치료는 이러한 자연적인 치유 과정을 방해하지 않고 돕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휴식과 고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28][114]

치료는 환자에게 친화적이고 부드러웠으며, 환자를 청결하고 위생적인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예를 들어, 상처에는 깨끗한 이나 와인만을 사용했으며, 상처 부위를 건조하게 유지하는 치료법이 선호되었다. 때로는 진정 효과가 있는 연고향유가 사용되기도 했다.[29][115]

히포크라테스는 효과가 불확실하거나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는 특수 치료나 강력한 약물 사용을 꺼렸다.[29][30][115][117] 일반적인 진단에는 일반적인 치료법을 적용했으며, 단식이나 꿀과 식초를 섞어 마시는 것 등이 처방되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아플 때 먹는 것은 병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특히 이 나는 환자에게는 단식을 통해 열을 '굶겨서' 병을 약화시키려 했다.[31][34][35] 이는 "감기에는 먹고, 열에는 굶겨라"는 생각의 기원이 되었을 수 있다.[36]

그러나 이러한 수동적인 접근 방식이 모든 경우에 적용된 것은 아니다. 골절과 같이 비교적 간단한 질병 치료에는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골절된 뼈를 맞추기 위해 견인을 통해 골격계를 늘리고 손상 부위의 압력을 완화했으며, 이를 위해 히포크라테스 침상과 같은 특수 장비가 사용되었다.[32] 또한, 필요한 경우 관두개나 메스와 같은 외과 도구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38][119]

히포크라테스 학파는 엄격한 전문성, 규율, 그리고 실천을 강조했다.[39][120] 히포크라테스의 저술에서는 의사가 항상 단정하고 정직하며, 침착하고 이해심 많으며 진지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의사는 진료의 모든 측면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으며, 고대 수술실의 조명, 인력 배치, 기구 준비, 환자의 자세, 붕대와 부목 사용법 등에 대한 상세한 규칙을 따랐다.[40][121] 심지어 손톱의 길이까지 청결하게 관리하도록 요구되었다.[41][122] 이러한 엄격한 기준과 임상 관찰 및 기록에 대한 강조는 히포크라테스를 "'''임상'''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103][124]

3. 2. 위기 (Crisis)

히포크라테스 의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위기(Crisis)’였다.[112] 이는 질병의 진행 과정에서 질병이 승리하여 환자가 죽음에 이르거나, 또는 그 반대로 자연치유를 통해 환자가 회복되는 결정적인 시점을 의미한다. 위기 이후에는 재발이 발생할 수 있으며, 그 후 또 다른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위기는 질병에 걸린 후 특정한 ‘결정적인 날(critical days)’에 발생하는 경향이 있었다. 만약 위기가 결정적인 날과 거리가 먼 날에 발생하면 재발이나 상태 악화가 예상될 수 있었다. 갈레노스는 이러한 생각이 히포크라테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믿었지만,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26][113]

4. 히포크라테스 문서집

히포크라테스 문서집(Corpus Hippocraticum|코르푸스 히포크라티쿰la)은 고대 그리스의 의학 저술 약 70편을 모아 놓은 것으로, 알렉산드리아 시대(기원전 3세기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60][136] 이 문서들은 주로 이오니아 방언으로 쓰여졌다.[60]

문서집의 이름은 히포크라테스를 따르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모든 문서를 저술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61][137] 다양한 주제, 서술 방식, 작성 시기의 차이로 미루어 볼 때,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저자(최대 19명으로 추정)가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31][116] 저자 중에는 히포크라테스 학파(코스 학파)의 의사들뿐만 아니라, 크니도스 학파나 다른 학파의 저술도 포함된 것으로 여겨진다.[138] 아마도 히포크라테스의 높은 명성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사서들이 관련 의학 문헌들을 '히포크라테스'의 이름 아래 분류했거나,[12][40][62] 그의 제자나 추종자들이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다.[63] 히포크라테스 본인이 직접 쓴 것으로 여겨지는 저술로는 고대 이오니아 산문으로 된 《공기, 물, 장소에 관하여》, 《신성병에 관하여》 등이 대표적이다.

문서집에는 의학 교과서, 강의록, 연구 노트, 임상 기록, 철학적 에세이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이 특정 순서 없이 포함되어 있다.[61][64][137][140] 이 글들은 의학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쓰였으며, 때로는 서로 상반되는 관점을 보이거나 모순되는 내용이 발견되기도 한다.[65]

히포크라테스 문서집에 포함된 주요 저술들은 다음과 같다.[31][116]


  • 히포크라테스 선서』(Ἱπποκράτειος ὄρκος, Oath of Hippocrates)
  • 『격언』(Ἀφορισμοί, Aphorisms)
  • 『법』(Νόμος, The Law)
  • 『유행병』(Ἐπιδημιῶν, Of the Epidemics)
  • 『예후론』(Προγνωστικόν, The Book of Prognostics)
  • 『공기, 물, 장소에 관하여』(Περὶ ἀέρων, ὑδάτων, τόπων, On Airs, Waters, Places)
  • 『신성병에 관하여』(Περὶ ἱερῆς νούσου, On the Sacred Disease)
  • 궤양에 관하여』(Περὶ ἐλκῶν, On Ulcers)
  • 치질에 관하여』(Περὶ αἰμορροΐδων, On Hemorrhoids)
  • 『고대 의술에 관하여』(Περὶ ἀρχαίας ἰητρικῆς, On Ancient Medicine)
  •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Περὶ φύσεως ἀνθρώπου, The Nature of Man)


다만, 모든 저술이 히포크라테스 시대의 순수한 과학적 저술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예후론』, 『급성병의 양생법』, 그리고 『유행병』 1권과 3권 정도만이 미신이나 철학적 사변에서 벗어난 과학적 논문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139]

4. 1. 히포크라테스 선서

십자가 모양으로 기록된 히포크라테스 선서. 12세기 비잔티움 시대 사본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히포크라테스 문서집(Corpus Hippocraticum|코르푸스 히포크라티쿰la)에 포함된 여러 문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의사의 윤리적 의무를 다루는 중요한 문서이다.[61][64] 전통적으로 히포크라테스 본인이 작성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그가 사망한 이후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61][6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서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의료 윤리의 초석으로 간주되어 왔다.[93][141][142]

오늘날에는 선서의 원문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 정신은 현대의 의료 윤리 규정과 법률의 기초가 되어 좋은 의료 행위와 도덕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66] 많은 의과대학 졸업생들이 의료 현장에 나서기 전에 현대적으로 개정된 형태의 선서나 유사한 내용의 서약을 낭독하며, 이는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여전히 의료계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준다.[12][67][68][93][141][142]

=== 선서 내용 (전통적 번역) ===

''나는 의학의 신 아폴로아에스큘러피어스, 그리고 건강과 모든 치유, 그리고 모든 신과 여신들의 이름에 걸고 나의 능력과 판단으로 다음을 맹세하노라.''

''나는 이 선서와 계약을 지킬 것이니, 나에게 이 의술을 가르쳐준 자를 나의 부모님으로 생각하겠으며, 나의 모든 것을 그와 나누겠으며, 필요하다면 그의 일을 덜어주겠노라. 그의 자손을 나의 형제처럼 여기겠으며 그들이 원한다면 조건이나 보수 없이 그들에게 이 기술을 가르치겠노라. 교훈이나 강의 다른 모든 교육방법을 써서라도.''

''나는 이 지식을 나 자신의 아들들에게, 그리고 나의 은사들에게, 그리고 의학의 법에 따라 규약과 맹세로 맺어진 제자들에게 전하겠노라. 그러나 그 외의 누구에게도 이 지식을 전하지는 않겠노라.''

''나는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내가 환자의 이익이라 간주하는 섭생의 법칙을 지킬 것이며, 심신에 해를 주는 어떤 한 것들도 멀리하겠노라.''

''나는 요청받는다 하더라도 극약을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며 그와 같은 조언을 하지 않을 것이며, 비슷한 의미로 낙태를 조장하는 페사리(pessary영어)를 여성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청렴과 숭고함으로 나는 나의 인생을 살 것이며 나의 의술을 펼치겠노라.''

''나는 (결석 제거) 수술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일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에게 맡길 것이다. 내가 어떠한 집에 들어가더라도 나는 병자의 이익을 위해 그들에게 갈 것이며 어떠한 해악이나 부패한 행위를 멀리할 것이며, 남성 혹은 여성, 자유민 혹은 노예를 불문하고 유혹을 멀리할 것이다. 나의 전문적인 업무와 관련된 것이든 혹은 관련이 없는 것이든 나는 일생동안 알게 된 사실 중 결코 밖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비밀로 지킬 것이다.''

''나는 그와 같은 모든 것을 비밀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결코 누설하지 않겠노라. 내가 이 맹세를 깨트리지 않고 지낸다면, 그 어떤 때라도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으며, 즐거이 의술을 펼칠 것이요, 인생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내가 이 맹세의 길을 벗어나거나 어긴다면, 그 반대가 나의 몫이 될 것이다.''

=== 1948년 제네바 선언 ===

제네바 선언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정신을 이어받아 현대적으로 개정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1948년 세계의사회(WMA)에서 채택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의료직에 입문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약한다.
  • 나는 인류에 봉사하는데 내 일생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
  • 나는 마땅히 나의 스승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 나는 양심과 위엄을 가지고 의료직을 수행한다.
  • 나는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하여 고려할 것이다.
  • 나는 알게 된 환자의 비밀을 환자가 사망한 이후에라도 누설하지 않는다.
  • 나는 나의 능력이 허락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의료직의 명예와 위엄 있는 전통을 지킨다. 동료는 나의 형제며, 자매다.
  • 나는 환자를 위해 내 의무를 다하는데 있어 나이, 질병 / 장애, 교리, 인종, 성별, 국적, 정당, 종족, 성적 성향, 사회적 지위 등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다.
  • 나는 위협을 받더라도 인간의 생명을 그 시작에서부터 최대한 존중하며, 인류를 위한 법칙에 반하여 나의 의학지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 나는 이 모든 약속을 나의 명예를 걸고 자유의지로서 엄숙히 서약한다.

5. 의학에 대한 직접적 공헌

아이젠멩거 증후군 환자의 손가락 곤봉증; 히포크라테스에 의해 처음 기술되었으며, 곤봉증은 "히포크라테스 손가락"으로도 알려져 있다.


히포크라테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많은 질병과 의학적 상태를 최초로 기술한 사람들이다.[44][125] 그는 만성 폐질환, 폐암, 청색성 심장 질환 등의 중요한 진단 징후인 손가락의 곤봉증을 최초로 기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때문에 곤봉증이 있는 손가락을 "히포크라테스 손가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45][125] 또한 히포크라테스는 『예후론』에서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나타나는 특징적인 안색 변화인 히포크라테스 안면을 최초로 기술했다. 이 묘사는 훗날 셰익스피어가 희곡 『헨리 5세』에서 폴스타프의 죽음을 묘사하는 데 인용하기도 했다.[46][47][126][127]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을 급성, 만성, 풍토병, 유행병으로 분류하기 시작했으며, 질병의 경과를 설명하기 위해 "악화, 재발, 소실, 위기, 발작, 최고점, 회복기"와 같은 용어를 사용했다.[37][48][118][128]

농흉, 즉 흉강 내부에 고름이 차는 상태에 대한 그의 상세한 설명 역시 중요한 공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농흉의 증상, 신체 검사 소견, 수술적 치료법 및 예후에 대해 기록했으며, 이러한 가르침은 현대의 폐 질환 및 외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49][129] 히포크라테스는 기록상 최초의 흉부 외과 의사로 여겨지며, 납 파이프를 사용하여 흉벽의 농양을 배출하는 등 그의 발견과 기술 중 일부는 현대 의학에서도 여전히 그 원리가 유효하다.[49][129]

히포크라테스 학파는 인간 직장의 질병과 그 치료법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했다. 예를 들어, 치질의 원인을 담즙과 점액의 과다로 설명했지만, 소작술이나 절제술과 같은 비교적 발전된 치료법을 사용했다.[50][51][130][131] 히포크라테스 의학 문헌에는 치질을 결찰(실 등으로 묶는 것)하고 뜨거운 쇠로 지지는 방법이 선호되었으며, 다양한 연고를 바르는 방법도 제시되었다.[52][53][132][133] 이러한 치료법 중 일부(소작, 결찰, 절제)는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50][130]

또한, 히포크라테스 의학 문헌에는 직장경의 초기 형태라 할 수 있는 기구를 사용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내시경 검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로 간주된다.[51][54][55][131][134][135]

히포크라테스는 당뇨병과 같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식단 조절과 운동과 같은 생활 습관 개선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이는 현대의 생활 습관 의학 개념과 유사하다. 히포크라테스 의학은 환자에 대한 세심한 임상 관찰과 기록을 중요시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질병의 경과를 예측하는 예후 판단을 강조했다.[18][37][43]

6. 유산

이탈리아 아나니에 남아있는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가 그려진 벽화. 12세기.


히포크라테스는 전통적으로 "의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의학 실천에 혁신을 가져온 인물로 평가받는다.[70][138] 그는 모든 병이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는 원칙 아래 과학적인 의학을 창시했으며, 이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에 따르면, 히포크라테스는 생전부터 "위대한 히포크라테스"로 알려져 있었다.[76][148] 그의 명성은 플라톤 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히포크라테스 의학 집성》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논문집은 그의 이름을 따고 있지만, 대부분은 다른 의사나 철학자들의 저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원전 5세기부터 서기 2세기에 걸친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포함한다. 히포크라테스 본인이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글들은 고대 이오니아 산문의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대표적으로 《공기·물·흙에 관해서》, 《성스러운 병》 등이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높은 존경을 받았으나, 그의 사후 의학 발전은 한동안 침체되었다.[71] 그의 가르침이 너무 완벽하다고 여겨져 오랫동안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고,[12][28] 심지어 필딩 개리슨(Fielding H. Garrison)에 따르면 임상 병력 기록과 같은 관행이 사라지는 등 후퇴하는 모습도 보였다.[72][145] 히포크라테스 이후 중요한 의학자로는 갈레노스(서기 129년-200년)가 있으며, 그는 히포크라테스 의학을 계승하며 일부 발전을 이루었지만 퇴보시킨 측면도 있다.[73][74][146]

중세에는 이슬람 세계가 히포크라테스의 방법을 채택하고 새로운 의료 기술을 개발했다.[75][147] 유럽 르네상스 이후 히포크라테스의 방법은 서유럽에서 부활했으며, 19세기에 더욱 확장되었다. 토마스 시든햄(Thomas Sydenham), 윌리엄 헤버던(William Heberden), 장 마르탱 샤르코(Jean-Martin Charcot), 윌리엄 오슬러(William Osler) 등 많은 의사들이 그의 엄격한 임상 기법을 계승했다. 프랑스 의사 앙리 위샤르(Henri Huchard)는 이러한 부활이 "내과의 역사 전체"를 구성한다고 평가했다.[77][149]

히포크라테스의 성품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존엄한 시골 의사" 또는 "엄격하고 냉엄한"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12][93] 그는 지혜롭고 뛰어난 지능을 가졌으며 매우 실용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랜시스 애덤스(Francis Adams)는 그를 "엄격하게 경험과 상식의 의사"라고 묘사했다.[19][104] 주름진 얼굴과 긴 수염을 가진 그의 흉상은 현명한 노의사 이미지를 강화하지만, 이는 당시 신들의 초상화 스타일을 따른 것일 수도 있다.[71][144]

히포크라테스와 그가 구현한 신념은 의학적 이상으로 간주된다. 의학사 권위자 필딩 개리슨(Fielding Garrison)은 그가 "유연하고 비판적이며 균형 잡힌 사고방식, 즉 오류의 원천을 항상 찾는 태도, 즉 과학 정신의 본질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평가했다.[77][149] 그의 모습은 "항상 이상적인 의사의 모습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죽음 이후로도 의학계에 계속 영감을 주고 있다.[78][150]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그의 윤리적 이상을 담고 있으며, 현대 의학 윤리의 기초가 되었다.

6. 1. 한국에서의 히포크라테스

와타나베 가잔(渡辺崋山) 필 『히포크라테스상』(중요미술품, 규슈국립박물관 소장)


우다가와 요안(宇田川榕菴)의 네덜란드어 찬사가 들어간 이시카와 다이나미(石川大浪) 필 ‘蘭人依卜加刺得斯之象’(이토 케이스케 구장,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히포크라테스는 서양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영향력은 동아시아에도 미쳤다. 특히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 후기 네덜란드 의학(난학)이 발전하면서 히포크라테스를 서양 의학의 시조로 숭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는 당시 한의사들이 본초학의 시조로 신농을 숭배했던 것에 대응하는 성격도 있었다.[151]

당시 일본의 네덜란드 의학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의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와타나베 가잔(渡辺崋山)이나 우다가와 요안(宇田川榕菴) 등이 그린 초상화가 대표적이다.[152] 이러한 초상화가 다수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상당한 수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151] 심지어 교토시 니조도리에 위치한 약조신사(薬祖神祠)에서는 일본의 오오모토누시노카미(大己貴神)·스쿠나비코나노카미(少彦名神), 중국의 신농과 함께 히포크라테스를 약조신(薬祖神)으로 모시고 있다.[153]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담긴 의료 윤리는 시대를 넘어 현대 의학에서도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며, 한국 의료계에서도 그 정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7. 일화

히포크라테스의 생애에 얽힌 여러 일화는 대부분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으며, 심지어 이븐 시나(아비센나)나 소크라테스에 관한 이야기와 유사한 점도 있어 아마도 전설을 기원으로 하는 지어낸 이야기로 간주된다.[154][155][156] 하지만 히포크라테스가 생전부터 지녔던 명성 때문에 병을 기적적인 힘으로 치료했다는 일화가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히포크라테스는 “아테네역병” 때 마을 소독을 위해 큰 횃불을 피워 아테네 시민들을 구했다거나[154], 마케도니아페르디카스 2세연애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55] 하지만 두 이야기 모두 사료의 뒷받침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156]

그 외에도, 히포크라테스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궁정에 초청되었을 때, “페르시아 왕의 은혜를 입는 것도, 그리스인의 적임에도 불구하고 야만인을 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157]”라고 말하며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158] 고대 자료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인 것 같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역사적 사실성에 의문을 갖는 의견도 있다.[159]

또한, 원자론으로 알려진 압데라의 데모크리토스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웃거나, 동물 사체가 집 주위에 흩어져 있는 등 시민들로부터 조금 미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지만, 시민들의 부탁으로 데모크리토스를 진찰한 히포크라테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총명함과 그의 행동이 그의 철학에 따른 것임을 알고,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진단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데모크리토스는 “웃는 철학자”라고 불리게 되었다.[160][161][162]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그리스 철학자 전집』에도, 히포크라테스와 데모크리토스가 친분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묘사가 있다(히포크라테스가 어린 딸을 데리고 산책하던 중, 데모크리토스는 처음 만났을 때 딸에게 “오늘은, 따님”이라고 인사했지만, 다음 날에는 “오늘은, 사모님”이라고 인사했다. 데모크리토스는 딸이 그날 밤 처녀성을 잃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는 내용이다[163]).

히포크라테스의 일화는 그의 업적을 칭찬하는 것만은 아니다. 히포크라테스가 어떤 그리스 신전에 방화하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에페소스의 소라누스는 이 신전이 크니도스 학파의 신전이었다고 말하지만[6], 12세기 비잔티움의 역사가 요한네스 체체스의 저서에서는 히포크라테스가 의술 지식을 독점하기 위해 코스 섬의 신전에 방화했다고 되어 있다. 일설에는, 히포크라테스가 의술을 신들의 행위로부터 분리한 것에 반발한 보수파가 화재를 히포크라테스의 방화로 단정 짓고, 의심을 받은 히포크라테스는 코스 섬을 떠나, 순회 의사로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여행을 떠났다는 것이다.[16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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