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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도시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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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도시나리는 1114년에 태어난 헤이안 시대 후기의 시인이다. 그는 정치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후손으로, 1183년 고시라카와 상황에 의해 칙찬 와카집인 센자이 와카슈의 편찬을 명받았다. 그는 겐페이 전쟁 시기에 다이라노 다다노리의 시를 센자이 와카슈에 익명으로 수록하기도 했다. 1176년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1204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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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도시나리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후지와라노 도시나리는 1114년에 태어나 1204년에 사망할 때까지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까지의 격동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호겐의 난(1156년)과 헤이지의 난(1159년)을 겪으면서도 시인이자 조정의 관리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어린 시절,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후손이자 시가 가문인 미코히다리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도바 원의 측근이었던 의붓형 하무로 아키요리에게 의탁하여 성장했다. 덴쇼·초쇼 연간(1131년~1135년)에 장인 후지와라 타메타다가 주최한 "타메타다 가 백수"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시를 짓기 시작했고, 1138년에는 후지와라노 모토토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안겐 2년(1176년) 9월, 62세에 기침병이 악화되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샤쿠아'라는 법명을 사용했다.[17] 겐큐 원년(1204년) 11월 30일,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0]

2. 1. 초기 생애

1114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후손이자, 시가 가문인 후지와라 씨 미코히다리 가문의 藤原俊忠|후지와라노 도시타다일본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당시는 호겐, 헤이지의 난에서 보듯이 격동의 시대였다.[13] 10세에 부친과 사별하고, 도바 원의 측근이었던 의형 葉室顕頼|하무로 아키요리일본어의 후원을 받았다.[13] 아키요리의 양자로서 '아키히로'(顕広)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1167년 53세에 본가로 돌아와 '도시나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6] ('슌제이'는 '도시나리'를 표기하는 데 사용된 한자의 음독이다.)

덴쇼·초쇼 시기(1131년~1135년)부터 본격적으로 영작을 시작, 호엔 4년(1138년) 후지와라노 모토토시에게 사사했다.[13] 호엔 6·7년(1140년, 1141년)에는 자신의 불우함에 대한 비탄, 출가에 대한 망설임 등을 "술회 백수"에 읊었다.[13] 스토쿠 천황의 총애를 받는 한편, 미후쿠몬인의 유모였던 미후쿠몬인 카가[14]와 재혼하여, 큐안 원년(1145년) 이후, 미후쿠몬인의 어급에 의해 승서하게 되었다.[13]

2. 2. 관직 생활

후지와라노 도시나리는 호겐의 난(1156년)과 헤이지의 난(1159년)과 같은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도 조정에서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황태후궁 대부''(皇太后宮大夫) 직위에 올랐으며 종3위(비참의 非参議)를 지냈다.[16]

10세에 아버지를 여읜 후, 도바 원의 측근이었던 의형 후지와라 아키요리의 후원을 받아 국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18년 동안 종5위하에 머물렀다.[16] 덴쇼·초쇼 시기(1131~35년) 장인 후지와라 타메타다가 주최하는 "타메타다 가 백수"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시작했고, 호엔 4년(1138년) 후지와라 모토토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13]

호겐 원년(1156년) 호겐의 난으로 스토쿠 원 가단이 붕괴되었다. 호겐 4년(1159년) 니조 천황내리 가회를 재개했지만, 로쿠조 후지와라 가의 후지와라 키요스케를 중용했다.[15] 닌안 원년(1167년) 슌제이는 염원하던 공경(비참의)이 되었고, 이듬해 미코사류에 복귀했다.[16]

안겐 3년(1177년)에 후지와라 키요스케가 사망하고, 지쇼 2년(1178년) 쿠조 카네자네와 처음 만나[17] 쿠조 가 가단의 스승으로 받아들여졌다. 쥬에이 2년(1183년) 고시라카와 원원선을 받아, 분지 4년(1188년) 일곱 번째 칙찬집 『센자이 와카슈』를 편찬하여[13] 명실상부 가단의 제일인자가 되었다.

그의 관력은 다음과 같다.[16]

날짜 (구력)사건
보안 4년(1123년) 7월 9일아버지 토시타다 사망
다이지 2년(1127년) 1월 19일종5위하 서임, 미마사카 임관[26]
덴쇼 2년(1132년) 윤 4월 4일가가노카미로 전임
호엔 3년(1137년) 12월 16일토오토우미노카미로 전임
에이지 2년(1142년) 1월 23일토오토우미노카미 중임
큐안 원년(1145년) 11월 23일종5위상 승서, 토오토우미노카미 여전
큐안 원년(1145년) 12월 30일미카와노카미로 전임
큐안 5년(1149년) 4월 9일탄고노카미로 전임
큐안 6년(1150년) 1월 6일정5위하 승서, 탄고노카미 여전
큐안 7년(1151년) 1월 6일종4위하 승서, 탄고노카미 여전
닌페이 2년(1152년) 12월 30일사쿄곤노다이부로 전임
큐주 2년(1155년) 10월 23일종4위상 승서, 사쿄곤노다이부 여전
호겐 2년(1157년) 10월 22일정4위하 승서, 사쿄곤노다이부 여전
오호 원년(1161년) 9월 19일사쿄노다이부로 전임
에이만 2년(1166년) 1월 12일사쿄노다이부 사임
닌안 원년(1166년) 8월 27일종3위 승서
닌안 2년(1167년) 1월 28일정3위 승서
닌안 2년(1167년) 12월 24일휘를 토시나리로 고침
닌안 3년(1168년) 12월 12일우쿄노다이부 임관
가료쿠 2년(1170년) 7월 26일고고타이궁다이부 (고시라카와 상황의 황후 후지와라노 겐시) 겸임
가료쿠 3년(1171년) 1월 18일비젠곤노카미 겸임
쇼안 2년(1172년) 2월 10일황후 겐시가 황태후가 되어, 고고타이궁다이부에서 고타이궁다이부로 이동
쇼안 5년(1175년) 12월 8일우쿄노다이부 사임
안겐 2년(1176년) 9월 28일출가. 법명: 석아
겐큐 원년(1204년) 11월 30일사망 (향년 91세)


2. 3. 출가

안겐 2년(1176년) 9월, 기침병이 악화되어 출가한다[17]。62세에 불교의 서약을 하고, 법명으로 ''샤쿠아가쿠''(釈阿覚) 또는 ''샤쿠아''(釈阿)를 사용했다.

2. 4. 사망

겐큐 원년(1204년) 가을 기온사 백수를 읊었고, 같은 해 11월 10일 "카스가사 가합"을 마지막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그해 11월 30일, 91세로 생을 마감했다.[20]

3. 가계

藤原 俊成|후지와라노 도시나리일본어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27]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현손이며, 후지와라 씨 북가 나가이에류(미코사 가)에 속한다.


  • 아버지: 후지와라노 도시타다
  • 어머니: 후지와라노 아쓰이에의 딸
  • 양아버지: 후지와라노 아키요리
  • 아내: 비후쿠몬인 가가 - 후지와라노 지카타다의 딸
  • 아들: 후지와라노 나리에 (1155-1220)
  • 아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 (1162-1241)
  • 딸: 하치조인 산조 (1148-?) - 후지와라노 모리요리의 아내, 도시나리 쿄 뇨의 어머니
  • 딸: 다카마쓰인 신다이나곤 (기오 고젠) (1150-?) - 후지와라노 이에미치의 아내
  • 딸: 조사이몬인 고조 (1151-?)
  • 딸: 하치조인 곤추나곤 (엔주 고젠) (1153-?) - 민부대보 미나모토 요리후사의 아내[28]
  • 딸: 하치조인 아사쓰 (1154-?) - 후지와라노 무네이에의 아내
  • 딸: 겐슌몬인 주나곤 (겐노고젠, 구조니) (1157-?)
  • 딸: 전 사이인 다이나곤 (류주 고젠) (1159-?)
  • 딸: 쇼묘몬인 주나곤 (아이주 고젠) (1164-?)
  • 아내: 후지와라노 타메타다의 딸
  • 아들: 카이운
  • 딸: 고시라카와인 쿄고쿠쓰보네 - 후지와라노 나리치카의 아내
  • 아내: 로쿠조인 선지 - 후지와라노 아키요시의 딸
  • 딸: 하치조인 보몬쓰보네 - 후지와라노 나리치카의 아내
  • 아내: 후지와라노 타다코의 집안의 한 사람
  • 아들: 가쿠벤 (1132경-1199?)[29]
  • 아내: 후지와라노 타다코의 집안의 뇨보
  • 딸: 전 사이인 뇨베츠토
  • 아내: 코카몬인 비젠나이시 (코노에인 비젠나이시) - 기코 곤노카미 미나모토 스에요시의 여동생
  • 딸: 니조인 효에노카미 - 사마노카미 미나모토 타카야스의 아내
  • 생모 불명:
  • 아들: 조카이
  • 딸: 니조도노 아오뇨보
  • 양자녀:
  • 양녀: 겐슌몬인 사쿄노다이후 - 젠치 법사(도시나리의 형제)의 딸 (조카)
  • 양자: 후지와라노 사다나가 (자쿠렌) (?-1202) - 슌카이(도시나리의 형제)의 아들 (조카)
  • 양자: 타다카타 - 후지와라노 나가모토(도시나리의 사촌의 아들)의 아들
  • 양녀: 후지와라노 도시나리 뇨 (1171-?) - 후지와라노 모리요리와 도시나리의 딸, 하치조인 산조의 딸 (손녀), 미나모토 미치토모의 아내


그의 아들은 백인일수의 정식 편집자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이다. 슌제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테이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궁정 정치에서도 아버지보다 더 성공적이었다.[10] 후지와라노 테이카는 일본 역사상 최고의 시인 4인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슌제의 손녀인 후지와라노 도시나리노 무스메(; 흔히 "슌제의 딸"이라고 불림)는 슌제가 직접 키우고 가르쳤으며, 후지와라노 테이카(슌제가 죽은 후 그녀에게 조언을 구했음)와 같은 시풍으로 시인으로서 성공했다.[10]

4. 와카(和歌)

후지와라노 도시나리(슌제)는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걸쳐 활동한 와카 시인이다. 신고킨 와카슈 시대를 이끈 대표적인 가인 중 한 명으로, 유겐(幽玄)을 중시하는 독특한 시풍을 확립했다.

슌제는 만요슈와 같은 옛 시풍을 따르면서도 당나라 시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시풍은 격조 높고 깊이 있는 여정미를 특징으로 하며, 혼카도리나 혼세츠도리(이야기도리) 등의 기법을 확립하여 후대 일본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시라카와 천황의 명을 받아 일곱 번째 칙찬 와카집인 센자이 와카슈를 편찬했다.[13] 이 과정에서 겐페이 전쟁 중 다이라노 다다노리가 찾아와 자신의 시를 실어달라고 부탁한 일화가 헤이케 이야기에 전해진다. 슌제는 다다노리의 시를 "익명"으로 처리하여 센자이 와카슈에 수록했다.[3][4]

4. 1. 대표적인 와카

世の中よ 道こそなけれ 思ひ入る 山の奥にも 鹿ぞ鳴くなる|요나카요 미치코소나케레 오모이이루 야마노오쿠니모 시카조나쿠나루일본어

: 세상에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산에 들어가니 사슴이 울고 있네.[8]

: 저녁이 되자, 들판에 가을 바람이 몸에 스며들고, 메추라기는 후카쿠사 마을 깊은 곳에서 우는구나.[8]

위의 와카는 후지와라노 도시나리(슌제)가 자신의 시풍인 유겐을 잘 보여주는 예시로 꼽은 것이다. 슌제는 시가 "어떻게든 매력과 신비로움과 깊이를 모두 만들어내야 한다. 좋은 시라면, 그것은 단어와 구성과는 별개의 분위기를 가지면서도 그들을 동반할 것이다"라고 썼다.[7]

미나모토노 도시요리의 아들 도시이에는 슌제에게 어떤 와카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고, 슌제는 '저녁이 되니'로 시작하는 와카를 꼽았다. 도시이에는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와카를 언급했지만, 슌제는 자신의 와카가 더 뛰어나다고 답했다. 슌제는 만년에 자신의 와카에 대해 특별히 칭찬할 만한 것은 아니며, 《이세 이야기》의 구절을 바탕으로 읊은 것이 스토쿠 천황의 눈에 띄어 기억된 것뿐이라고 말했다.

4. 2. 센자이 와카슈(千載和歌集) 편찬

쥬에이 2년(1183년) 고시라카와 상황준세이에게 와카(和歌) 시의 일곱 번째 칙찬집인 ''센자이 와카슈''(千載和歌集) 편찬을 명했다.[13] 당시 준세이는 낮은 관직에 있었지만[2] 고시라카와 상황은 그를 신뢰했다. 칙찬 시집은 궁정 시단의 중요한 행사였고, 시인들은 시 한 편이 시집에 실릴 기회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했다.[3][4]

겐페이 전쟁 중 준세이가 ''센자이 와카슈''를 편찬하고 있을 때 다이라노 다다노리가 준세이의 저택에 찾아와 자신의 시를 시집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헤이케 이야기''에 전해진다. 준세이는 결국 다다노리의 시를 시집에 넣었지만, "익명"으로 출처를 밝혔다.[3][4]

분지 4년(1188년) 준세이는 고시라카와 원의 명을 받아 일곱 번째 칙찬집인 『센자이 와카슈』를 완성하여 바쳤고,[13] 명실상부 가단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

4. 3. 시풍(詩風)

슌제(후지와라노 도시나리)는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많은 친척들이 모두 문학에 능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시를 쓰고 짓기 시작했다. 그는 만요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오래된 시풍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고, 심지어 자신의 첫 번째 시 해설서인 ''만요슈 시대고(Man'yōshū Jidaikō)''[5]를 쓰기도 했지만, 최근에 수입되어 번역된 당나라 중국 시의 영향도 받았다.

문학 비평의 관점에서 그는 특히 ''겐지 이야기''를 초기에 지지했으며, 30대와 40대 이후에는 다양한 시회와 시합에서 자신의 선호하는 시풍인 유겐(낭만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둔 10가지 정통 시 스타일 중 하나로, 향수와 후회의 특징적인 어조를 지님)을 보여주는 시를 선호하는 비평[6]과 심사로 유명했다. 그의 스타일은 때때로 "오래된 어조, 새로운 표현"으로 요약되었다. 그는 시가 "어떻게든 매력과 신비로움과 깊이를 모두 만들어내야 한다. 좋은 시라면, 그것은 단어와 구성과는 별개의 분위기를 가지면서도 그들을 동반할 것이다"라고 썼다.[7]

그의 스타일은 절제되고, 의도적으로 섬세하며, 감성적이었다. 시인 신케이(1406–1475)는 그의 시 창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아주 늦은 밤, 그는 불이 켜져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희미한 등불 앞에서 침대 곁에 앉아 있었고, 어깨에는 낡은 궁정 예복을 걸치고, 귀에는 낡은 궁정 모자를 덮어쓴 채, 팔걸이에 기대어 나무 화로를 껴안고 온기를 느끼면서 작은 소리로 혼잣말로 시를 읊조렸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잠든 깊은 밤까지, 그는 구부정하게 앉아 조용히 울었다.''"[9]

가풍은 "높고 깨끗함을 먼저 하고, 고운 모습도 있다"[21], "상냥하고 고운데 마음도 깊고 애절한 점도 있었다"[22]라고 평가받았듯이 격조 높고 깊이 있는 여정미를 특징으로 하며, 옛 노래와 이야기의 정경·심정을 노래에 비추어 깊이 있는 정취를 표현하는 혼카도리나 혼세츠도리(이야기도리) 등의 기법을 확립했다. 가합의 판사 속에서 사용한 "유겐", "염"은, 가도에서 노가쿠·다도를 비롯한 일본의 예능에 영향을 주어, 중세를 대표하는 미적 이념이 되었다.[23] 또한 문하에서는 아들 테이카를 비롯하여, 자쿠렌·슌제이쿄 뇨·후지와라 이에타카, 고토바 원·쿠조 요시쓰네·시키시 내친왕 등 우수한 가인이 배출되었고, 지도자로서도 신고킨 가풍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미나모토노 토시요리의 아들 토시이에가 "영(詠) 중 어떤 노래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도시나리에게 묻자, 도시나리는 '저녁이 되니 들판의 가을바람 몸에 스며들어 메추라기 울음 우는구나, 후카쿠사의 마을'을 꼽았다. 토시이에가 "세상의 사람들은 '그 모습에 꽃의 자태를 앞세워 몇 겹을 넘어 왔는가, 봉우리의 흰 구름'을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이라고 말하자, 도시나리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정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모릅니다. 나는 '저녁이 되니' 쪽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토시이에는 이 이야기를 제자인 가모노 조메이에게 들려준 후 "'저녁이 되니'의 노래는 '몸에 스며들어'라는 세 번째 구절이 매우 아쉽다. 풍경과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고, 다만 은연중에 몸에 스며들었으리라 생각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은은하고 우아한데"라고 몰래 비판했다. (가모노 조메이 '무명초' "토시나리 자찬가")

도시나리는 만년(85세 경)에, '저녁이 되니'의 노래에 대해 "특별히 칭찬할 만한 노래는 아닙니다. 다만 '이세 이야기'에서 후카쿠사의 마을 여자가 '메추라기가 되어'라고 말한 것을 바탕으로 처음 노래로 읊었는데, 스토쿠 천황의 혜안에 들어 기억해주신 것뿐입니다"라고 말했다. ( '지친 화상 자가합')

정가는 타메이에를 타이르며, "그처럼 의복이나 침구를 끌어모으고, 불을 밝게 켜고, 술이나 음식・과일 등을 먹어치우는 모습으로는 좋은 시가 나올 리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 경(俊成)께서 시를 지으셨던 모습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시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심야에, 가늘고 희미한 등불을 향해, 그을린 직의를 휙 걸치고 낡은 에보시를 귀까지 끌어올리고, 와키자, 즉 팔걸이에 기대어 키리히바치, 桐火桶를 안고 소리 죽여 영송하시며, 밤이 깊어 사람들이 잠잠해질수록 조금씩 고개를 숙이고 밤마다 우셨다고 한다. 정말 사려 깊게 몰두하시는 모습은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그 정취에 마음이 움직여 눈물이 나는 것을 참기 어렵다"라고 말했다.(신케이 『사사메고토, ささめごと』)

5. 일화

미나모토노 도시요리의 아들 도시이에가 도시나리에게 "어떤 노래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도시나리는 '저녁이 되니 들판의 가을바람 몸에 스며들어 메추라기 울음 우는구나, 후카쿠사의 마을'을 꼽았다. 도시이에가 "세상의 사람들은 '그 모습에 꽃의 자태를 앞세워 몇 겹을 넘어 왔는가, 봉우리의 흰 구름'을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이라고 말하자, 도시나리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정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모릅니다. 나는 '저녁이 되니' 쪽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도시이에는 이 이야기를 제자인 가모노 조메이에게 들려준 후 "'저녁이 되니'의 노래는 '몸에 스며들어'라는 세 번째 구절이 매우 아쉽다. 풍경과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고, 다만 은연중에 몸에 스며들었으리라 생각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은은하고 우아한데"라고 몰래 비판했다. (가모노 조메이 '무명초' "도시나리 자찬가")[3]

도시나리는 만년에(85세 경) '저녁이 되니'라는 노래에 대해 "'이세 이야기'에서 후카쿠사의 마을 여자가 '메추라기가 되어'라고 말한 것을 바탕으로 처음 노래로 읊었는데, 스토쿠 천황의 혜안에 들어 기억해주신 것뿐입니다. 특별히 칭찬할 만한 노래는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 '지친 화상 자가합')

정가는 타메이에에게 "좋은 시는 의복, 침구, 밝은 불, 술, 음식, 과일 등을 갖춘 환경에서 나오지 않는다. 돌아가신 아버지 도시나리 경께서는 심야에 희미한 등불 아래 그을린 직의를 걸치고 낡은 에보시를 쓴 채 와키자에 기대어 키리히바치를 안고 소리 죽여 시를 읊으셨다. 밤이 깊어질수록 고개를 숙이고 밤마다 우셨다고 한다. 그 몰두하시는 모습은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난다"라고 말했다.( 신케이 『사사메고토, ささめごと』)

5. 1. 다이라노 다다노리와의 만남

다이라노 다다노리는 무예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준세이에게 가르침을 받아 시인으로서도 재능을 보였다. 1183년 7월, 헤이케 일족이 수도를 떠난 후, 다다노리는 종자 6명과 함께 수도로 돌아와 준세이의 저택을 방문했다. "패잔병이 돌아왔다"며 동요하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준세이와 만난 다다노리는 "(겐페이 전쟁)으로 인해 고시라카와 원의 와카집 편찬 명령이 중단된 것은 유감입니다. 전란이 끝나면 다시 '칙선 와카집을 만들라'는 명이 내려올 것입니다. 만약 이 두루마리 안에 적합한 노래가 있다면, 칙선 와카집에 저의 노래를 한 수라도 넣어주신다면 저 세상에서도 기쁠 것이며, 먼 저 세상에서 (준세이 님을) 지켜드릴 것입니다."라며 훌륭한 노래 백여 수가 담긴 두루마리를 준세이에게 맡기고 떠났다.[24]

이듬해 다다노리는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전사했다. 두루마리에는 칙선 와카집에 어울리는 훌륭한 노래가 많았지만, 다다노리는 칙찬을 받은 인물이었기에[24], 준세이는 그의 노래를 "영인부지"로 하여 단 한 수만 《센자이 와카슈》에 실었다. 그 덕분인지, 이미 70세에 가까웠던 준세이는 그 후로도 20년 정도 더 살았다. (《헤이케 이야기》 권7 "다다노리 도성 탈출")[3][4]

6. 관련 작품

히시카와 모로노부가 그린, 슌제가 뻐꾸기에 관한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모습


슌제는 자신의 시 해설서인 ''만요슈 시대고''(Man'yōshū Jidaikō)''를 쓰기도 했지만,[5] 당나라 중국 시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는 유겐을 보여주는 시를 선호하는 비평[6]과 심사로 유명했다. 그의 스타일은 "오래된 어조, 새로운 표현"으로 요약되기도 한다. 그는 시가 "어떻게든 매력과 신비로움과 깊이를 모두 만들어내야 한다. 좋은 시라면, 그것은 단어와 구성과는 별개의 분위기를 가지면서도 그들을 동반할 것이다"라고 썼다.[7]

:저녁이 되자,
들판을 따라 가을 바람이
마음을 차갑게 스쳐 지나가네;
그리고 메추라기들은 애처로운 울음을 터뜨리네
후카쿠사 마을의 깊은 풀 속에서.[8]

그의 스타일은 절제되고, 의도적으로 섬세하며, 감성적이었다. 시인 신케이(1406–1475)는 그의 시 창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아주 늦은 밤, 그는 불이 켜져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희미한 등불 앞에서 침대 곁에 앉아 있었고, 어깨에는 낡은 궁정 예복을 걸치고, 귀에는 낡은 궁정 모자를 덮어쓴 채, 팔걸이에 기대어 나무 화로를 껴안고 온기를 느끼면서 작은 소리로 혼잣말로 시를 읊조렸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잠든 깊은 밤까지, 그는 구부정하게 앉아 조용히 울었다.'"[9]

; 텔레비전 드라마

  • 신·헤이케 이야기 (1972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미야구치 세이지)
  • 풀이 타오르다 (1979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무라카미 후유키)

참조

[1] 서적 Seeds in the Heart Columbia University Press
[2] 서적 An Introduction to Japanese Court Poetry Stan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Tales of the Heike https://archive.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Pleasures of Japanese Literature https://archive.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5] 간행물 How to Establish a Poetic School in Early Medieval Japan: Fujiwara no Shunzei's Man'yōshū Jidaikō https://muse.jhu.edu[...] 2019
[6] JSTOR The Rise of Art Criticism in Japan
[7] 서적 An Introduction to Japanese Court Poetry Stanford University Press
[8] 서적 An Introduction to Japanese Court Poetry Stanford University Press
[9] 서적 An Introduction to Japanese Court Poetry Stanford University Press
[10] 서적 Japanese Court Poetry Stanford University Press
[11] 웹사이트 蒲郡市ホームページ https://www.city.gam[...]
[12] 문서 特別展『藤原俊成の古典』に寄せて 蒲郡市博物館
[13] 서적 谷山茂著作集二 藤原俊成人と作品 角川書店
[14] 문서
[15] 서적 藤原俊成の研究 笠間書店
[16] 문서 『公卿補任』
[17] 서적 『玉葉』/谷山茂『谷山茂著作集二 藤原俊成人と作品』 角川書店
[18] 서적 藤原俊成全歌集 笠間書店
[19] 문서 『勅撰作者部類』による。諸説ある。
[20] 서적 百人一首で読み解く平安時代 角川学芸出版
[21] 문서 『歌仙落書』
[22] 문서 『後鳥羽院御口伝』
[23] 서적 和歌文学の基礎知識(角川選書) 角川学芸出版
[24] 문서
[25] 서적 後京極殿御自歌合・慈鎮和尚自歌合全注釈 勉誠出版
[26] 서적
[27] 문서 明月記研究提要 八木書店
[28] 문서
[2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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