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사화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화는 조선 시대에 일어난 정치적 숙청 사건들을 통칭한다. 토지 제도 개혁에 대한 갈등, 왕권 강화 시도, 외척 간의 권력 다툼 등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했으며,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 간의 대립이 주요 특징이다. 대표적인 사화로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있으며, 이 외에도 여러 옥사와 환국, 박해가 일어났다. 사화는 사림 세력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결과적으로는 사림이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화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 외에도, 절대 왕정과 귀족 간의 갈등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도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98년 한국 - 무오사화
    무오사화는 1498년 《성종실록》 편찬 중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인해 발발한 사림파 숙청 사건으로, 훈구파의 고변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 김일손 등은 능지처참되며 연산군 시대 사화의 시작을 알렸다.
  • 1504년 한국 - 갑자사화
    갑자사화는 1504년 연산군이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빌미로 훈구 세력을 숙청하고 왕권 강화를 꾀한 사건으로, 많은 신하들이 처형되거나 부관참시되었으며 조선 사회에 큰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어 중종반정의 원인이 되었다.
  • 1519년 한국 - 기묘사화
    기묘사화는 1519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훈구파의 모함으로 숙청된 정치적 사건으로, 사림파는 위훈 삭제 사건을 계기로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으나, 이후 성리학 연구 심화 및 조광조 재평가에 기여했다.
사화
개요
이름사화 (士禍)
발생 시기15세기 말 ~ 16세기
원인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
주요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배경
훈구 세력의 대두조선 건국 공신들의 후손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부를 축적
사림 세력의 등장성리학을 연구하는 신진 세력으로, 훈구 세력의 부패를 비판하며 정치 개혁을 주장
왕권 약화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고, 훈구 세력의 권력이 더욱 강화
주요 사화
무오사화 (戊午士禍)1498년,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세조 비판 내용이 발단이 되어 발생. 김종직을 비롯한 많은 사림들이 화를 입음.
갑자사화 (甲子士禍)1504년,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사건을 계기로 발생.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이 연루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함.
기묘사화 (己卯士禍)1519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 세력의 급진적인 개혁 정치에 반발한 훈구 세력이 일으킴.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들이 숙청당함.
을사사화 (乙巳士禍)1545년,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위 계승 과정에서 발생. 윤임을 비롯한 대윤 세력과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유배됨.
결과 및 영향
사림 세력의 피해사화를 통해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유배되어 정치적 기반이 약화됨.
훈구 세력의 권력 강화사림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훈구 세력이 더욱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게 됨.
정치 혼란 심화사화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고, 백성들의 삶이 더욱 어려워짐.
사림 세력의 재등장이후 사림 세력은 지속적인 노력 끝에 다시 정계에 진출하여 붕당 정치를 이끌게 됨.
한국사 연표
1498년무오사화 발생
1504년갑자사화 발생
1519년기묘사화 발생
1545년을사사화 발생

2. 배경

성종 때에는 훈구 대신과 사림의 정치적 입장은 달랐어도 서로 간에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오히려 두 세력은 서로 협력하여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기념비적인 편찬사업을 마무리하였다.[1] 여기에는 서거정, 노사신, 최항, 양성지 같은 훈신 중 원성을 듣던 인물이 아니었고, 양 파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 성종의 뛰어난 정치적 역량과도 관계가 깊었다.[1]

세조 때 현직자와 퇴직자에게 모두 주던 과전법을 폐지하고 현직자에게만 주는 직전법으로 개편한 것은 조선시대 토지제도의 한계 때문이었다.[1] 그러나 그것조차 실시할 수 없어 직전법도 폐지되고, 이제는 새로이 관리가 되더라도 국가로부터 아무런 땅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1] 신진관료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외에는 받을 땅이 없어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불건전한 토지 제도를 개혁하자는 주장이 그들 사이에 점차 일어났다.[1] 이 토지 문제를 둘러싼 신·구의 대립은 귀족 간의 분열과 파쟁을 일으킨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1] 토지 문제를 둘러싼 신·구파의 대립은 다른 면에서 볼 때 훈구파사림파의 대립이었다.[1]

비록 음성적인 대립이었더라도 명군(名君) 성종이 있는 동안은 노골화하지 않았으나 폭군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드디어 폭발하게 되었다.[1]

3. 4대 사화

조선 시대에는 네 차례의 큰 사화가 일어났는데, 이를 '''4대 사화'''라고 부른다.

사화발생 연도발생 원인가해자피해자
무오사화1498년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유자광, 연산군김종직, 김일손, 김굉필, 권경우, 권경유, 이목, 허반, 임희재(임사홍 아들), 표연말, 정여창, [홍귀달]
갑자사화1504년폐비 윤씨 사건, 연산군 왕권 강화 계획연산군윤필상, 이극균, 김굉필, 이세좌, 한명회, 귀인 정씨, 엄귀인, 인수대비, 정찬손, 심회, 정안지, 한치형, 이극균, 성준, 조지서, 정성근, 정인인, 이승건, 홍한, 김천령
기묘사화1519년조광조의 개혁 정치 반발남곤, 심정, 홍경주, 중종조광조와 그의 추종자들
을사사화1545년소윤과 대윤의 권력 싸움소윤윤임, 유관, 유인숙, 계림군, 봉성군, 이덕응, 정희, 정욱, 나식



각 사화에 대한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훈구파외척이 신흥 세력인 사림파를 공격했지만, 이후에는 훈구파나 민중도 휩쓸리거나, 사림파끼리의 학벌, 당파 싸움으로 인한 사화도 일어났다.

3. 1. 무오사화 (1498년)

1498년(연산군 4년) 유자광 등이 김일손이 지은 사초를 문제 삼아 왕을 충동하여 김종직과 관련된 김일손, 표연말, 정여창, 최부 등 수십 명의 사림을 사형, 유배 혹은 파직시킨 사건이다.[6] 이 사건으로 김종직 문인으로 구성된 영남 사림이 대부분 몰락했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서로 협력하던 훈구파사림파의 사정은 달라졌다.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폐비 윤씨)가 신하들의 충돌로 죽게 된 것을 알고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름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학덕 있는 훈구 대신들은 대부분 사망하고, 사림 세력은 더욱 커져서 그들의 분방한 언론 활동이 왕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평소 사림의 공격을 받아 수세에 몰려 있던 유자광 등 훈구 대신 잔류 세력은 김일손의 사초를 문제 삼았다. 이들은 왕을 충동하여 김종직과 관련된 김일손 등 수십 명의 사림을 처벌했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김종직의 글을 실록에 포함시켰다.[6] (김종직은 초의제왕의 죽음을 듣고 초나라의 항우가 초기 중국 역사에서 초의제왕을 살해한 것을 애도하는 글을 썼다.)

연산군은 사림파 학자들을 숙청하고 삼사의 권력을 약화시킬 기회를 찾았다. 김일손과 권오복, 권경유는 ''능지처참''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세 명은 참수형을 당했다.[6] 김종직의 시신은 부관참시되었고, 최소 18명 이상이 유배되었다. 연산군은 모든 조정 관리들에게 김일손의 처형을 지켜보도록 명령했으며, 참석하지 않거나 고개를 돌린 자는 보고하여 처벌하도록 명령했다.

3. 2. 갑자사화 (1504년)

1504년 연산군사림파를 정계에서 몰아낸 후, 훈구 대신들마저 제거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연산군을 옹호하던 척신(戚臣)들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폐비사사(廢妃賜死) 사건에 윤필상(尹弼商) 등 훈신들이 관여했음을 폭로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훈신들과 아직 남아 있던 사림들까지 모두 몰아냈으며, 특히 가족과 제자들까지 처벌하였다.[1]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자신의 친어머니가 정현왕후가 아니라 폐비 윤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발생했다. 폐비 윤씨1482년 성종의 후궁을 독살하고 성종의 얼굴을 할퀴었다는 죄로 사사(사약을 받음)되었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토한 피로 얼룩진 옷 한 조각을 받았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성종의 후궁 두 명을 죽이고, 윤씨의 죽음을 지지했던 관리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이 사건은 훈구파와 사림파 잔당을 가리지 않고 덮쳤으며, 심지어 첫 번째 사화의 주동자들까지 포함되었다. 최소 36명의 관리가 사약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죽은 관리 8명의 시신은 훼손되었다. 실제 사망자 수는 36명보다 훨씬 많았는데, 희생자들의 가족과 친척들 또한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여자들은 노예가 되었다. 총 239명의 관리가 처형, 유배 또는 파면되었다.[4]

3. 3. 기묘사화 (1519년)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일어난 사화이다.

연산군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 훈구 대신들은 군대를 동원해 연산군을 추방하고 그의 이복동생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것이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이다.

백성과 사림의 여망 속에 왕이 된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고 도학(道學)을 숭상하여 무너진 유교정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특히 1515년(중종 10년)에 젊고 깨끗한 조광조(趙光祖)가 중용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젊고 기개 있는 사림이 현량과(賢良科)라는 추천제도에 의해서 대거 등용되었다. 이때 등용된 사림은 기호사림으로도 불린다. 이들의 가문은 조선 초기에 큰 벼슬을 지낸 훈신의 후예들이 적지 않았으나, 체질적으로는 전형적인 성리학자로 변신해 있었다.

조광조 일파는 삼사(三司)의 언관직에 포진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公論)이라고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즉 연산군의 학정에 대한 경험에서 무엇보다도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어 경연을 강화하고 언론활동을 활성화했으며, 내수사 장리의 폐지, 소격서(昭格署)의 폐지, 그리고 향촌 사회에서 향약(鄕約)의 실시와 《삼강행실》, 《이륜행실(二倫行實)》, 《주자가례》, 《소학》의 보급, 균전제 실시를 통한 토지집중의 완화, 방납 폐단의 시정 등을 주요정책으로 내세웠다.

사림의 정책들은 지방 중소지주층의 이익을 크게 반영하고, 농민의 부담을 완화시켜 줄 수 있는 것이었으나,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들에게는 불리한 것이었다. 특히 조광조 일파는 공신에 책봉된 100명 가운데 4분의 3은 부당하게 공신이 되었으므로 그들의 공신 칭호와 토지 및 노비를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공신들의 원한을 샀다. 또 공신들은 의정부와 6조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삼사(三司)에 포진한 사림의 견제가 공신들에게는 불만의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언관(言官)의 권한이 너무 큰 것은 나라를 어지럽게 할 뿐 아니라, 《경국대전》의 권력체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행동으로 비판하였다.

중종은 처음에 사림을 신임했으나, 나중에는 지나치게 군주를 압박하는 데 실증을 느꼈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1519년(중종 14년) 남곤(南袞)·심정(沈貞) 등 훈구 대신들은 조광조 일파에게 반역죄의 누명을 씌워 무참하게 죽이거나 유배보냈다. 이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이 사건으로 사림의 개혁정치는 4년 만에 끝나고, 그들이 추진했던 정책도 대부분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때 화를 입은 조광조·김정(金淨)·김식(金湜)·김구(金銶)·기준(奇遵) 등은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높은 추앙을 받아 16세기 후반에 사림 시대를 여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조광조


기묘사화는 사림파가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숙청 당시 중요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사화 중 하나이다.

중종은 성종 시대로 돌아가 연산군의 과오를 제거하려 했지만, 그를 왕위에 앉힌 쿠데타 주도 세력의 강력한 존재로 인해 왕권이 제한적이었다. 중종은 쿠데타의 세 주역들이 노환과 자연사로 사망한 지 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고 훈구파의 권력을 억제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사림파의 젊고 정력적인 지도자인 조광조에게서 해답을 찾았고, 조광조는 곧 중종의 가장 신뢰받는 신하가 되었다. 그는 중종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아 중종은 조광조의 단독 반대에 따라 계획된 전쟁을 포기하기도 했다. 중종의 지원을 받아 조광조는 정치에 입문한 지 불과 4년 만에 이례적인 승진을 거쳐 사간원(司諫院)의 수장이 되었고, 지방에서 뜻을 같이하는 젊은 사림 학자들을 대거 중종의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그의 지도 아래 사림파는 향약이라는 지방 자치 제도를 확립하고, 토지를 더 공평하게 분배하고 부유한 자들의 토지 소유량을 제한하는 토지 개혁을 추진했으며, 언문(諺文) 번역을 통해 대중에게 유교적 신념을 널리 보급하고 노비의 수를 줄이는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7] 조광조는 노비를 포함하여 재능 있는 사람은 신분과 상관없이 관직에 임명해야 한다고 믿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8] 이 시기에는 사간원의 엄격한 단속으로 인해 어떤 관리도 뇌물을 받거나 백성 또는 지방을 착취하는 것을 감히 하지 못했다. 그는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아, 그가 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 "우리 어른이 오신다"라고 말했다고 유명한 한국 철학자 이이는 기록했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파의 격렬한 적대감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조광조는 또한 1506년의 쿠데타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많은 사람들을 탄핵함으로써 많은 정치적 적을 만들었다. 특히 조광조가 1506년 쿠데타에 실제로 기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특권(세금 면제 및 막대한 봉급 포함)을 취소하자 훈구파는 조광조를 몰락시킬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1519년 초, 일부 훈구파 관리들이 사림파 관료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었으나 제때 발각되었다.

조광조의 타협을 모르는 성격과 자신의 급진적인 정책을 지지해 달라는 정종에 대한 잦은 간언은 왕을 짜증나게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박씨 경빈과 홍씨 희빈(훈구파 수장 홍경주의 딸)은 조광조에 대한 충성심에 의문을 제기하고, 민심이 조광조에게 쏠리고 있다는 주장을 하여 정종과 조광조를 이간질하려 했다. 홍경주, 남곤, 심정 등 훈구파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이들은 정종에게 백성들이 실은 조광조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며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심지어 조광조가 불충한 마음이 없더라도, 그를 지지하는 자들이 그렇게 하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남곤은 조광조를 모함하기 위해 뽕나무 잎에 꿀이나 설탕물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새기도록 했다.[9]한자 '주(走)'와 '초(肖)'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는데, 이는 조광조의 성씨이다. 홍빈 또는 박빈은 이 잎을 정종에게 보여주며, 이는 조광조가 훈구파를 제거한 후 스스로 왕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하늘의 경고라고 주장했다.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조광조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정종이 조광조와 충분히 멀어졌다고 확신한 홍경주는 몰래 궁궐에 들어가 정종에게 조정이 조광조의 지지자들로 가득 차서 감히 그에게 공개적으로 반대할 사람이 없다고 경고했다. 조광조가 1506년 쿠데타에 거짓으로 공을 세운 자들의 특권을 박탈하라고 청하자 정종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정종은 홍경주에게 밀서를 보내 조광조가 다음에는 쿠데타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을 배신할까 두렵다고 밝혔다.[10] 정종은 훈구파 지도자들에게 조광조를 죽인 뒤 자신에게 알리라고 지시했다. 1519년 11월 15일, 훈구파 지도자들은 밤에 몰래 궁궐에 들어가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국왕에게 조광조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인즉, 그와 지지자들이 파벌을 형성하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반대파를 배제하며 지지자들을 등용함으로써 국왕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것이다.[11] 감찰 조광조, 형조판서 김정, 그리고 다른 6명이 즉시 체포되었고, 재판이나 조사도 없이 사형될 위기에 처했다.[12] 이 모든 사건은 국왕의 승인을 받은 쿠데타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즉시 처형될 수도 있었지만, 사림을 체포했던 병조판서 이장곤이 대신들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고 간청했다. 다음 날 조광조의 운명을 논의하기 위한 국무회의가 열렸다. 대부분의 관료들은 조광조의 체포와 중종의 처형 의지에 충격을 받았다.[13] 그들은 조광조가 젊은 혈기로 나라를 개혁하려다 극단적인 면을 보였을지언정, 사사로운 목적을 가졌을 리는 없다고 간청했다. 조광조와 자주 충돌했고, 남곤에게 지지를 요청받기도 했던 영의정 정광필은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다. "폐위된 왕(연산군)의 치세 동안 끔찍한 재앙을 자주 목격했지만, 어찌 현명한 임금을 만난 후에도 이런 일을 다시 보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영의정, 좌의정 및 육조는 증거도 없이 조광조 등을 그러한 죄목으로 처벌하는 것은 왕의 명성에 오점을 남기는 것이라고 공동으로 간청했다.[15] 18명의 젊은 관료들은 왕에게 조광조와 함께 투옥시켜 달라고 요청했다.[16] 심지어 하룻밤 사이에 형조판서가 되어 조광조를 심문했던 홍숙조차 왕에게 조광조의 충성에 "깊이 감동받았다"고 보고했다.[17]

새롭게 임명된 사간 유은은 더욱 강력하게 항의했다. "만약 조광조에게 죄가 있다면, 공개적이고 공정한 방식으로 처벌해야 합니다... 대신 전하께서는 심야에 두 사람의 은밀한 말에 따라 그러한 처벌을 내리려 하십니다... 왕의 권위로 몇몇 선비들을 처벌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인데, 어찌 비밀리에 밀서를 보내 그렇게 하려 하십니까?... 죄가 있다면 분명하고 공정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겉으로는 신하들을 신뢰하고 친하게 대하면서, 속으로는 그들을 제거할 생각을 하시는 듯합니다."[18] 한편, 150명의 성균관 유생들은 조광조의 체포에 항의하기 위해 궁궐로 몰려가 간청하는 외침으로 가득 채웠고,[19] 이후 240명의 유생들이 조광조의 무죄를 주장하고 함께 투옥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20] 조광조에 대한 이러한 쏟아지는 지지는 중종의 의심과 분노를 더욱 키웠을 것이다. 이후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안당 그리고 심지어 병조판서 이장곤까지 조광조 처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21]

조광조는 일련의 사건 전개에 완전히 당황했다. 사림파는 불과 나흘 전, 중종이 훈구 대신 70명에 대한 특권을 철폐하라는 상소를 받아들이면서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중종이 사악한 훈구 대신들에게 속았다고 여전히 믿었고, 신문에서 중종을 만나 그의 충성을 설득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 사건이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번질 것을 두려워하며, 한 번만이라도 임금과 대면할 수 있다면 만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중종에게 간청하는 글을 올렸다.[22] 그러나 그는 다시는 중종을 만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관대한 처분을 요구하는 상소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종은 사형을 유배형으로 감형했고,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중종은 조광조를 위해 간청했던 많은 대신들을 해임하고,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 사형을 집행했다. 조광조는 사약을 마시기 전, 자신의 충성을 맹세하는 절명시를 쓰고, 네 번 절을 올린 후 죽음을 맞이했다.[23] 이후,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사람들은 그것이 죄 없는 선비를 죽인 하늘의 벌이라고 믿었다.

김정 등 3명도 1520년에 처형되었고, 수십 명의 사림 학자들이 유배되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중앙 정부를 떠나 지방으로 물러났다. 1521년에는 안당의 아들이 남곤과 심정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안당을 포함한 12명이 처형되었다. 총 225명의 관료가 이 숙청의 영향을 받았다. 조광조의 몰락과 함께 그의 개혁안 대부분이 폐지되었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의 개혁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를 잃었거나, 그가 미래에 너무 강력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개혁적인 의지를 갑자기 포기했다. 중종과 조광조는 개혁이라는 목표를 공유했지만, 중종은 왕권 강화에 더 큰 관심을 둔 반면, 조광조는 왕이 공자맹자의 가르침에 따라 다스려지고 제약받아야 한다는 신유학 이념에 더 관심을 가졌다.

1519년의 기묘사화는 후대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신유학 사회를 실현할 기회를 놓친 것으로 널리 여겨졌는데, 이는 조선 정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왕족의 외척과 친족들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이후 희생자들은 기묘 사림 또는 "기묘 현인"으로 불리며 유교 순교자로 숭배받았고, 주동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악의 상징이 되었다. 음모를 조작한 주요 주동자 중 한 명인 남곤은 만년에 숙청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며 자신의 모든 저서를 불태울 것을 유언했다. 그는 유명한 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 한 편 외에는 그의 저작이 남아 있지 않다.

3. 4. 을사사화 (1545년)

인종이 1544년에 사망하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13대 왕이 되자,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그녀의 동생 윤원형이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다. 많은 사림 세력은 인종이 문정왕후에게 독살되었다고 믿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다. 소윤은 인종 재위 기간 동안 대윤에게 박해받지 않았지만, 인종은 대윤 세력의 탄핵을 받은 윤원형과 윤원로를 그들의 직위에서 해임했다. 이후 복권된 윤원형은 인종 사후 명종 대신 다른 왕자를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윤임과 그의 지지자들을 고발했다. 이 계략은 처음에는 실패하여 그를 유배 보냈지만, 윤임의 반역에 대한 지속적인 고발과 소문은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이어져 왕자, 윤임, 그리고 사림 학자를 포함한 그의 지지자 9명이 처형되었다. 이 첫 번째 숙청 이후 윤원형은 다음 5년 동안 자신의 정적과 사림 학자들을 계속 숙청하여 총 사망자 수가 100명을 넘어섰고, 이언적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유배되었다.

1545년을사사화는 다른 사화들과 달리, 경쟁하는 왕족들의 외척들 간의 권력 투쟁의 결과였다. 김안로가 몰락한 후, 세자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과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이 권력 공백을 메웠다. 윤임의 세력은 '대윤'으로, 윤씨 형제의 세력은 '소윤'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대사화 중 명종 시대에 일어난 1545년의 '''을사사화'''는 명종의 외척윤원형(문정왕후 윤씨의 동생) 등이 반대 세력을 숙청한 사건이다.

4. 기타 사화

1545년 을사사화 이후에도 여러 파벌 간의 정치 투쟁으로 인해 유사한 숙청이 많이 일어났다. 하지만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훈구파 세력이 사림 학자들을 박해한 것을 특별히 지칭하는 "사화"라는 용어는 이후의 사건에는 잘 쓰이지 않았다. 대신 '옥사'(반역 사건), '무옥'(무고한 반역 사건), '환국'(정권 교체), '박해'(특히 19세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숙청에서 희생된 세력은 자신들의 결백과 경쟁 세력의 잘못을 나타내기 위해 사건을 "사화"라고 칭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사건을 일으킨 측인 훈구파외척 측에서는 "난"으로 규정했지만, 피해자 측인 사림 세력 측에서는 "무고한 사람이 입은 재앙"이라고 주장하며 "사림의 화"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선조 시대부터 사림파가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면서, 사화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훈구파외척이 신흥 세력인 사림파에 대해 가한 것이었지만, 훈구파나 민중 등도 휩쓸리거나, 이후에는 사림파끼리의 학벌, 당파 싸움에 의한 사화도 일어났다.


  • 연산군 시대, 1506년의 '''병인사화''': 연산군의 배덕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공신과 민중을 연산군 자신이 대량 숙청하고 대량 처형한 사건.
  • 영조 시대, 1762년의 '''임오화변''' ('''임오의 옥'''): 나경언의 사형 및 사도세자의 사망 사건.

4. 1. 옥사

1521년 신사무옥조광조 지지자들이 남곤심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처형된 사건으로, 중종 대의 3차 사화의 일부로 간주되기도 한다.[1]

1589년 기축옥사서인동인을 숙청한 사건으로, 조선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기록된다. 이 사건으로 1,000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2]

1613년 계축옥사광해군 즉위 후, 대북 세력이 소북 세력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이복 동생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고 고발한 사건이다. 이는 훗날 인조반정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3]

1721년1722년에 걸쳐 일어난 신임옥사는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 세력 지도자들이 경종을 대신하여 영조의 섭정을 옹호하다 불충하다는 혐의로 처형된 사건이다. 1722년에는 소론남인 세력이 노론경종을 살해하려 했다고 고발하여 8명이 추가로 처형되었다.[4]

1755년 을해옥사는 영조 즉위 후, 신임옥사에 대한 반발로 소론 세력이 권력에서 몰락하고, 소론 당원 5명이 반역 혐의로 처형된 사건이다.[5]

이후 숙청들은 '옥사'(반역 사건), '무옥'(무고한 반역 사건), '환국'(정권 교체), '박해'(특히 19세기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박해)와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4. 2. 환국

환국은 숙종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숙청 사건으로, 정부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남인서인 간의 평화로운 경쟁 시대가 끝나고 이전의 숙청이 재발했음을 나타낸다.

사건명발생년도내용비고
경신환국1680년남인 세력 지도자 두 명이 서인 세력에 의해 숙종을 폐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음.
기사환국1689년서인은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실각함. 송시열 등은 처형됨.
갑술환국1694년남인이 폐위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서인을 숙청하려다 실패함. 남인은 이 숙청으로 정치적으로 회복할 수 없게 됨.서인은 이미 노론소론으로 분열됨.
신축환국1721년노론 세력이 신임옥사의 여파로 권력을 잃음.
을사환국1725년영조가 왕위에 오르고 노론 세력이 권력을 되찾음.
정미환국1727년영조는 강경파를 노론소론 양쪽의 온건파로 교체함.


4. 3. 박해

조선 시대에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이러한 박해는 '사옥'이라고도 불렸다.

사건명연도내용
신해사옥1791년조선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천주교 박해이다. 노론벽파가 박해를 주도했고, 시파는 반대했다. 천주교 신자 2명이 처형되었지만, 정조가 시파의 정책을 채택하면서 박해는 제한되었다.
신유사옥1801년정조가 사망한 후, 정순왕후와 보수적인 벽파는 정조의 개혁을 뒤집고, 자유주의적인 시파와 남인을 숙청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정약용을 포함한 일부 지도자들은 천주교 신자이거나 천주교 신자인 친척이 있었다. 300명이 처형되었고, 정약용은 유배되었다.
기해사옥1839년시파가 집권하는 동안에는 박해가 없었지만, 벽파가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천주교 신자 119명을 처형하는 등 박해가 재개되었다.
병오사옥1846년(내용 없음)
경신사옥1860년(내용 없음)
병인사옥1866년(내용 없음)


5. 결과 및 영향

이 네 차례의 사화로 사림 세력은 큰 타격을 입고 시골로 쫓겨났지만, 그곳에서 서원을 세워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예를 들어, 이황은 4차 사화 이후 정계를 떠나 명종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서경덕, 조식, 성수침 등 다른 유명한 학자들 역시 조광조의 죽음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조식은 명종에게 글을 보내 임명을 거절하며, "전하의 치세 아래, 국사는 이미 잘못되었고, 국가의 기반은 이미 붕괴되었습니다. 하늘의 뜻은 이미 떠났고, 백성의 지지도 떠났습니다... 대비는 사려 깊으시지만 궁궐 깊숙한 곳의 과부일 뿐이며, 전하는 젊으시고 돌아가신 왕의 외로운 상속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수천 건의 천재지변과 억만 백성의 마음을 다루겠습니까?"라고 비판했다.[24] (조선 시대에는 천재지변이 임금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사림은 서원향약 제도를 통해 지방에서 계속 성장했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 세력은 중앙 정부를 장악했고, 그 이후로 조선 정치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건을 일으킨 훈구파외척 측에서는 "난"으로 규정했지만, 피해자인 사림 세력 측에서는 "무고한 사람이 입은 재앙"이라는 의미로 "사림의 화"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사림파가 정치적 우위를 차지한 선조 시대부터 사화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초기에는 훈구파외척이 신흥 세력인 사림파를 탄압한 것이었지만, 이후에는 훈구파나 민중도 휩쓸리거나, 사림파끼리의 학벌, 당파 싸움에 의한 사화도 일어났다.

사대사화 외에도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있었다.


  • 연산군 시대, 1506년의 '''병인사화''': 연산군의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를 비판한 공신과 민중을 연산군이 대량 숙청하고 처형한 사건.
  • 경종 시대, 1721년 - 1722년의 '''신임사화''' ('''신축·임인 옥''' :ko:신임사화): 경종 암살 혐의로 소론노론을 숙청한 사건.
  • 영조 시대, 1762년의 '''임오화변''' ('''임오의 옥''' :ko:임오옥): 나경언의 사형 및 사도세자의 사망 사건.

6. 현대적 재해석

사화에 대한 설명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전통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며, 이는 주로 사림파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1] 조선왕조실록과 우리가 이러한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많은 부분은 사림이 최종 승리자로 부상하기 전부터 사림 학자들에 의해 주로 기록되었다.[1] 일부 역사학자들은 사화를 절대 왕정을 확립하려는 조선 국왕과, 필요하다면 국왕의 실수를 지적하여 그를 자애로운 유교 철인 군주가 되도록 이끌어야 진정한 충성이라고 주장하는 귀족들 간의 갈등의 결과로 재해석하려 시도했다.[1] 사림 학자들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과 같은 삼사의 주요 직책을 차지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로 인해 국왕 및 고위 대신들과 갈등을 빚었다.[1] 이러한 관점에서 사림과 훈구파 간의 구분은 대체로 인위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귀족 내부의 분열은 철학적 차이보다는 가문의 연계에 따라 주로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1]

참조

[1] 논문
[2] 논문
[3] 논문
[4] 논문
[5] 논문
[6] 웹사이트 윤필상 등이 사초 사건 관련자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등의 죄목을 논하여 서계하다 Yoon Pil-sang and others discuss the crimes of Kim Il-son, Kwon Oh-bok, Kwon Gyeong-yu, etc. https://sillok.histo[...] 2023-05-28
[7] 웹사이트 Seonbi Image Demanded by 21st Century https://web.archive.[...] 2011-07-19
[8] 간행물 Annals of Joseon Dynasty http://sillok.histor[...] 1520-10
[9] 간행물 Annals 1568-09-21
[10] 간행물 Annals 1520-04-13
[11] 간행물 Annals 1519-11-15
[12] 간행물 Annals 1544-12-21
[13] 간행물 Annals 1519-11-16
[14] 간행물 Annals 1535-01-16
[15] 간행물 Annals 1519-11-16
[16] 간행물 Annals 1519-11-16
[17] 간행물 Annals 1519-11-16
[18] 간행물 Annals 1519-11-18
[19] 간행물 Annals 1519-11-16
[20] 간행물 Annals 1519-11-17
[21] 웹사이트 Reformer Jo Kwang-jo http://www.ohmynews.[...]
[22] 간행물 Annals 1915-11-16
[23] 간행물 Annals 1519-12-16
[24] 간행물 Annals 1555-11-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