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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년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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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01년 십자군은 제1차 십자군의 성공 이후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지원을 위해 조직된 일련의 원정들을 지칭한다. 교황 파스칼 2세의 독려와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았던 왕, 영주, 일반 백성들의 열망으로 시작되었으며, 롬바르디아 십자군, 느베르 십자군, 프랑스-바이에른 십자군 등 여러 집단으로 구성되어 각기 다른 경로로 이동했다. 그러나 1101년 십자군은 셀주크 튀르크의 공격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십자군 측의 패배는 킬리지 아르슬란 1세의 세력 강화, 비잔티움과 십자군 간의 갈등 심화, 해상 무역의 중요성 증대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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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분쟁1101년 십자군
일부십자군
날짜1101년 여름
장소아나톨리아반도
결과셀주크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십자군
참가국 1프랑스 왕국
부르고뉴 공국
블루아 백국
느베르 백국
베르망두아 백국
아키텐 공국
신성 로마 제국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
부르군트 자유백국
바이에른 공국
오스트리아 공국
루시용 백국
제노바 공화국
비잔티움 제국
교황령
교전국 2룸 술탄국
다니슈멘드
알레포의 셀주크계 토후국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밀라노의 안셀모 4세
블루아의 에티엔
부르군트의 스테판
부르고뉴의 외드
콩스타블 콘라드
루시용의 지라르 1세
툴루즈의 레몽 4세
지타스
느베르의 기욤 2세
아키텐의 기욤 9세
베르망두아의 위그
바이에른의 벨프
오스트리아의 이다
지휘관 2킬리지 아르슬란
알레포의 리드완
가지 귀뮈슈티긴
피해 규모
사상자 1막대
사상자 2상대적 경미

2. 배경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유럽 전역에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성지에 새롭게 탄생한 십자군 국가예루살렘 왕국에 증원을 보내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101년 십자군은 제1차 십자군과 마찬가지로 일반 순례자들이 기사와 병사들과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참가 희망자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여러 집단을 형성하여 따로따로 성지로 향하게 되었다.[9]

2. 1. 십자군 참여 독려

로마 교황 파스카리스 2세는 제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예루살렘 왕국이 성립되자 새로운 원정군 편성을 계획하였다. 특히 십자군에 참가할 맹세를 했으면서도 출발하지 않은 여러 왕과 영주, 제1차 십자군 도중에 이탈한 영주들에게 협력을 촉구했다.

십자군 도중 고향으로 돌아간 영주들은 이미 비겁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다시 동방으로 원정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안티오키아 공방전 중에 귀국한 블루아 백작 에티엔느 2세(잉글랜드 왕 스티븐의 아버지)에 대해, 그의 아내 아델 드 노르망디(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의 딸)는 남편이 집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9]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은 일반 백성들도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를 막론하고 성지로 가려 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성지를 불신자와 이교도로부터 해방시키려 했고, 주의 이름으로 싸움으로써 그 후에 올 천국에서 영원히 안식하려 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crucesignati"라고 불렸다.[9] 또한, 단순히 빈곤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고 더 나은 삶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렇게 조직된 1101년 십자군은 제1차 십자군과 마찬가지로 일반 순례자들이 기사와 병사들과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참가 희망자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여러 집단을 형성하여 따로따로 성지로 향하게 되었다.

2. 2. 참여자들의 동기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유럽 전역에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성지에 새롭게 탄생한 십자군 국가예루살렘 왕국에 증원을 보내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로마 교황 파스카리스 2세는 새로운 원정군 편성을 계획하고, 특히 십자군에 참가할 맹세를 했으면서도 출발하지 않은 여러 왕과 영주, 제1차 십자군 도중에 이탈한 영주들에게 협력을 촉구했다.[9]

교황뿐만 아니라, 십자군 도중 고향으로 돌아간 영주들은 이미 비겁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다시 동방으로 원정하라는 유형무형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안티오키아 포위전 중에 귀국한 블루아 백작 에티엔느 2세(잉글랜드 왕 스티븐의 아버지)에 대해, 그의 아내 아델 드 노르망디(또는 아델 드 블루아,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의 딸)는 남편이 집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은 일반 백성들도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를 막론하고 성지로 가려 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성지를 불신자와 이교도로부터 해방시키려 했고, 주의 이름으로 싸움으로써 그 후에 올 천국에서 영원히 안식하려 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crucesignati"라고 불렸다. 또한, 단순히 빈곤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고 더 나은 삶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많았다.[9]

3. 롬바르디아 십자군

1100년경의 롬바르디아-토스카나 병사. ''Vita Mathildis''에서 발췌


롬바르디아 십자군은 1101년 십자군의 첫 번째 물결로, 제1차 십자군의 성공에 고무되어 조직되었다. 이들은 주로 밀라노에서 온 훈련받지 않은 농민들로 구성되었으며, 밀라노 대주교 안셀모 4세가 이들을 이끌었다.

1100년 9월 밀라노를 출발한 이들은 비잔티움 제국 영토에 들어서자 약탈을 일삼았다. 알렉시오스 1세는 이들을 콘스탄티노플 외곽으로 이동시켰으나, 롬바르디아인들은 도시로 들어가 블라헤르네 궁전을 약탈하고 황제의 애완 사자를 죽이는 등 행패를 부렸다. 결국 알렉시오스 1세는 이들을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니코메디아로 보내 지원군을 기다리게 했다.

1101년 5월, 니코메디아에서 롬바르디아군은 블루아의 에티엔, 부르군트 백작 스테판 1세, 부르고뉴 공작 외드 1세,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무관장 콘라트가 이끄는 프랑스, 부르고뉴, 독일 파견군과 합류했다. 또한, 제1차 십자군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툴루즈의 레몽 4세가 합류하여 총사령관이 되었고, 비잔티움의 페체네그 용병 부대도 이들과 함께했다.

이들은 도릴레움을 거쳐 이코니움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롬바르디아인들은 다니슈멘드 왕조에 포로로 잡힌 보에몽 1세를 구출하기 위해 니크사르로 가자고 주장했다. 결국 십자군은 1101년 6월 23일 안키라를 점령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강그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카스타모누를 점령하려다 셀주크 튀르크의 공격을 받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후 롬바르디아 십자군은 보에몽 1세 구출을 위해 동쪽으로 이동했으나, 킬리지 아르슬란 1세가 이끄는 셀주크 튀르크군은 다니슈멘드 왕조, 알레포의 리드완과 연합하여 십자군을 메르지폰에서 맞이했다.

3. 1. 롬바르디아 십자군의 구성과 이동 경로

1100년 9월, 롬바르디아인(약 5만 명)을 중심으로 한 군대가 육로로 밀라노를 출발했다. 대부분 일반 서민 출신 순례자였으며, 밀라노 대주교 안셀모 4세(Anselmo da Bovisio)가 이끌었다. 이들은 동로마 제국 영토에 들어서자 곧바로 약탈을 시작했다.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이들을 인솔하는 군대를 파견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외에 마련된 숙영지로 안내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시내로 침입하여 도시 북서쪽에 있는 블라케르나이 지역에서 약탈을 저질렀다. 이곳에는 동로마 황제의 호화로운 궁전과 대성당이 있었지만, 이 궁전 역시 약탈의 대상이 되었고 황제의 애완용 사자도 죽임을 당했다. 롬바르디아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황제는 그들을 보스포루스 해협 동쪽으로 건너게 하고 증원이 올 때까지 니코메디아에 숙영하게 했다.

1101년 5월, 니코메디아에 머물던 이 군대에 프랑스인, 부르고뉴인, 독일인 기사들로 구성된 소규모이지만 정예 군단이 합류했다. 이들을 이끌었던 사람은 블루아 백작 에티엔느 2세, 부르고뉴 백작 에티엔느 1세, 부르고뉴 공작 우도 1세,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중신 콘라트 등 여러 제후들이었다.

더불어, 제1차 십자군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툴루즈 백작 레이몽 4세(레이몽 드 생 질)도 합류했다. 그는 아스칼론 전투 이후, 십자군에 참여했던 제후들과의 분쟁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고 있었는데, 동로마 황제의 요청으로 이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동로마 황제는 페체네그인 용병 부대도 함께 파견했다.[11][2]

5월 말, 이들은 니코메디아를 출발하여 레이몽 드 생 질과 블루아 백작 에티엔느가 제1차 십자군 당시에도 지나갔던 길을 따라 드뤼라에움에 도착했다. 여기서 남쪽에 있는 이코니움으로 향해 더 남동쪽으로 진군하여 시리아의 십자군 국가와 합류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로였지만, 기사들을 수적으로 압도하는 롬바르디아인 순례자들은 아나톨리아 반도 북동부에 있는 닉사르로 향하자고 주장했다. 닉사르에는 멜리테네 전투에서 다니슈멘드 왕조에 패배한 제1차 십자군의 영웅인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1세가 포로로 잡혀 있었고, 그를 구출하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선 룸 셀주크 왕조 영토인 안큐라를 향해 1101년 6월 23일에 이를 점령하여 동로마 제국에 반환한 후,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수많은 수비병이 지키는 갱그라를 공략하고, 더 북쪽의 카스트라 콤네논을 공략하려 했다. 그러나 룸 셀주크 왕조의 지원 부대가 습격해와, 도시 주변에서 식량을 징발하는 십자군 부대를 잇달아 격파했기 때문에, 7월에는 공략전이 완전히 교착상태에 빠져버렸다.

북쪽의 흑해 연안으로 피신할 수도 있었지만, 롬바르디아인들은 여전히 보에몽 구출을 주장했고, 전군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니슈멘드 왕조의 영토에 들어섰다. 그러나 룸 셀주크 왕조의 군주 킬리지 아르슬란 1세는 제1차 십자군과 싸웠을 때 무슬림 측의 패인이 각 세력의 불화였던 점을 고려하여, 이번에는 다니슈멘드 왕조 및 시리아 셀주크 왕조 알레포의 리드완과 연합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8월 초, 십자군은 메르시반 지역의 산지에서 셀주크 왕조 연합군과 격돌했다.[11][2]

3. 2. 비잔티움 제국과의 갈등

제1차 십자군 때처럼, 순례자들과 병사들은 하나의 거대한 군대로 출발하지 않고 서유럽 각지의 여러 지역에서 여러 집단으로 출발했다. 1100년 9월, 롬바르디아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밀라노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대부분 훈련받지 않은 농민들이었고, 밀라노 대주교 안셀모 4세가 이끌었다. 그들이 비잔티움 제국 영토에 도착했을 때, 무분별하게 약탈을 저질렀고,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그들을 콘스탄티노플 외곽의 진영으로 호송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그들은 도시 안으로 들어가 블라케르나이 궁전을 약탈했으며, 심지어 알렉시오스의 애완 사자까지 죽였다. 롬바르디아인들은 곧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니코메디아에 진을 치고 증원군을 기다렸다.

1101년 5월, 니코메디아에 머물던 이 군대에 프랑스인, 부르고뉴인, 독일인 기사들로 구성된 소규모이지만 정예 군단이 합류했다. 이들을 이끌었던 사람은 블루아 백작 에티엔 2세, 부르고뉴 백작 에티엔 1세, 부르고뉴 공작 우도 1세,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중신 콘라트 등 여러 제후들이었다.

더불어, 제1차 십자군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툴루즈 백작 레이몽 4세도 합류했다. 그는 아스칼론 전투 이후, 십자군에 참여했던 제후들과의 분쟁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고 있었는데, 비잔티움 황제의 요청으로 이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비잔티움 황제는 페체네그인 용병 부대도 함께 파견했다.

3. 3. 니코메디아에서의 합류

제1차 십자군처럼, 순례자들과 병사들은 하나의 거대한 군대로 출발하지 않고, 서유럽 각지의 여러 지역에서 여러 집단으로 출발했다. 1100년 9월, 롬바르드인들이 밀라노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대부분 훈련받지 않은 농민들이었고, 밀라노 대주교 안셀무스 4세가 이끌었다. 그들이 비잔티움 제국 영토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무분별하게 약탈을 저질렀고,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그들을 콘스탄티노플 외곽의 진영으로 호송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그들은 도시 안으로 들어가 블라케르나이 궁전을 약탈했으며, 심지어 알렉시오스의 애완 사자까지 죽였다. 롬바르드인들은 곧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니코메디아에 진을 치고 증원군을 기다렸다.

1101년 5월, 니코메디아에서 그들은 블루아의 스테판, 부르고뉴 백작 스테판 1세, 부르고뉴 공작 에우드 1세, 그리고 신성 로마 황제 헨리 4세의 원수 콘라드 지휘 아래, 규모는 더 작지만 더 강력한 프랑스, 부르고뉴, 그리고 독일 병력과 합류했다. 니코메디아에서 그들과 합류한 사람은 제1차 십자군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툴루즈의 레이몽 4세였는데, 그는 이제 황제의 휘하에 있었다. 그는 전체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페체네그 용병으로 구성된 비잔티움 군대가 지타스 장군의 지휘 아래 그들과 함께 파견되었다.

이 집단은 5월 말에 제1차 십자군 당시 1097년에 레이몽과 스테판이 지나갔던 길을 따라 도뤼라이움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이코니움으로 계속 진군할 계획이었지만, 다른 모든 부대보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폭도인 롬바르드인들은 안티오크의 보에몽 1세가 다니슈멘드에게 포로로 잡혀 있는 네오카이사레아로 북쪽으로 진군하려고 했다. 1101년 6월 23일 앙키라를 함락시키고 알렉시오스에게 돌려준 후, 십자군은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들은 요새화된 도시 강그라를 잠시 포위했고, 이후 터키가 지배하는 도시 카스타모누(카스타모네)를 점령하기 위해 북쪽으로 계속 진군했다. 그러나 그들은 셀주크 튀르크의 공격을 받았고, 몇 주 동안 괴롭힘을 당했으며, 7월에는 식량 수집대가 파괴되었다.[2]

3. 4. 메르지폰 전투



1100년 9월, 롬바르디아 출신의 대규모 군대가 밀라노를 출발했다. 이들은 대부분 밀라노 대주교 안셀모 4세가 이끄는 훈련받지 않은 농민들이었다. 비잔티움 제국 영토에 도착하자 약탈을 일삼았고,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이들을 콘스탄티노플 외곽의 야영지로 유도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인들은 도시 내부로 진격하여 블라헤르네 궁전을 약탈하고 알렉시오스의 애완 사자까지 죽였다. 이후 롬바르디아인들은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니코메디아에 주둔하며 지원군을 기다렸다.

1101년 5월, 니코메디아에서 블루아의 에티엔, 부르군트 백작 스테판 1세, 부르고뉴 공작 외드 1세,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무관장 콘라트가 이끄는 프랑스, 부르고뉴, 독일 파견군과 합류했다. 툴루즈의 레몽 4세도 합류하여 전체 병력의 지휘권자가 되었으며, 비잔티움의 페체네그 용병 부대도 함께했다.

이 병력은 5월 말 도릴레움 쪽으로 진격하여 이코니움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롬바르디아인들이 다니슈멘드 측에 포로로 잡힌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1세가 있는 니크사르를 향해 북쪽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1101년 6월 23일 안키라를 점령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강그라를 공략하다가 카스타모누 (카스타모네)를 점령하기 위해 북쪽으로 계속 움직였다. 그러나 이들은 셀주크 튀르크의 공격을 받아 몇 주간 시달리다가 7월에 전멸하였다.

이후 롬바르디아인들은 다니슈멘드 영토가 있고 보에몽의 해방을 위하여 동쪽으로 움직였다. 킬리지 아르슬란 1세이 이끄는 셀주크 병력은 다니슈멘드와 알레포의 리드완과 동맹을 맺었다. 8월 초 십자군들은 메르지폰에서 이슬람 연합군과 마주친다.[11]

메르지폰 전투에서 십자군은 부르고뉴 병력, 레몽 및 비잔티움 병력, 독일 병력, 프랑스 병력, 롬바르디아 병력 등 다섯 개로 조직되어 있었다. 튀르크군은 메르지폰의 파플라고니아 산맥 인근에서 십자군 병력을 거의 전멸시켰다. 전장은 튀르크 측에 적합했고 튀르크의 기병대에게 충분한 공간이 있는 탁 트인 곳이었다. 튀르크군은 며칠간 라틴인들을 괴롭혔고, 킬리지 아르슬란 1세가 원하는 곳에 있는지 확인하였고 이들이 소량의 보급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였다.

전투는 수일간 벌어졌다. 첫날에 튀르크군은 십자군 병력의 진군을 막아서고 이들을 포위하였다. 그 다음 날, 콘라트는 독일군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했으나 처절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은 튀르크 병력의 빈틈을 만들어내는 것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병력 본대로 복귀할 수 없었고 인근 요새로 대피해야만 했다.

3일 차는 약간의 또는 어느 진지한 전투도 벌어지지 않으며 다소 조용하였으나, 4일 차에, 십자군들은 자신들이 빠진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격렬한 노력을 벌였다. 십자군은 튀르크 병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이 공격은 마지막 날에 실패하고 마는데 킬리지 아르슬란이 알레포의 리드완 그리고 다른 다니슈멘드의 군주들과 합류한 것이었다.

선봉에 있던 롬바르디아 측은 패퇴했고, 페체네그인들은 달아났으며, 프랑스와 독일 병력들은 또한 물러서야만 했다. 레몽이 바위에 깔렸다가 에티엔과 콘라트에 의해 구해졌다. 전투는 다음날까지 계속되다가, 십자군 주둔지가 함락되었고 기사들은 여성, 아이들, 성직자들이 살해당하거나 노예로 팔리게 내버려두고 달아났다. 말이 없던 롬바르디아인들의 대부분은 튀르크인들에게 얼마 못 가 발견되어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레몽, 블루아의 에티엔, 부르군트의 스테판 등은 시노프가 있는 북쪽으로 도망간 뒤에,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12]

4. 느베르 십자군

느베르의 기욤 2세가 이끄는 별개의 병력이 롬바르디아 파견군이 니코메디아를 떠난 직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그는 바리에서 아드리아해를 건너 비잔티움 제국으로 넘어왔는데, 이는 십자군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13] 그는 재빨리 다른 십자군과 합류하려 했으나, 느베르 병력과 롬바르디아 측이 여러 번 서로 가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기욤은 잠시 이코니움 (코냐)을 포위했으나 점령하지는 못하였고, 얼마 후 헤라클레이아 키비스트라에서 킬리지 아르슬란에게 기습을 당했다. 킬리지 아르슬란은 메르지폰에서 롬바르디아 병력을 패배시킨 직후였기에 가능한 한 빨리 이 새로운 군대를 전멸시키고 싶어했다. 헤라클레이아에서 느베르에서 온 병력 대부분은 백작 본인과 소수 인원을 제외하고 전멸당하였다.[13][4]

5. 프랑스-바이에른 십자군

아키텐의 기욤 9세, 베르망두아의 위그(제1차 십자군 참가 맹세를 이행하지 않았던 자 중 한 명), 바이에른 공작 벨프 1세 등이 이끈 세 번째 병력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으며,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3세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이다가 이들과 동행했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중에 비잔티움 영토를 약탈했고, 이들을 막으러 보내진 페체네그 용병들과 충돌 직전까지 갔다가 기욤과 벨프가 개입하여 중재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아키텐-바이에른 병력은 둘로 나뉘어, 한쪽은 배를 타고 야파로 직행하였는데[14] 그 중 일부는 연대기 작가 아우라의 에케하르트였다. 육로로 갔던 나머지 병력은 9월에 헤라클레이아에 도달했지만, 킬리지 아르슬란에게 급습을 당하여 학살당하였다. 기욤과 벨프는 탈출했으나, 위그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생존자들은 마침내 타르수스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위그는 10월 18일에 사망하였다.[15] 이다는 이 급습 중에 행방불명되었고 아마 전사했을 것이지만, 후대의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포로로 잡혔다가 1140년대 십자군의 최대 적수였던 장기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하나, 이는 연대상의 문제로 불가능하다.[16]

6. 1101년 십자군의 결과 및 영향

1101년 십자군의 패배는 킬리지 아르슬란 1세가 룸 셀주크 왕조의 수도를 코냐로 정하고 세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무슬림들에게는 십자군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3] 십자군과 비잔티움 제국은 서로에게 패배의 책임을 돌렸고, 아나톨리아를 통과하는 안전한 육로를 확보하지 못했다.[3]

제노바 함대의 도움으로 타르토사를 점령한 십자군은 이후 좀 더 순례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생존자들은 1101년 말 안티오키아에, 1102년 부활절에는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많은 이들이 서약을 이행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보두앵 1세를 도와 파티마 왕조에 맞서 싸웠다.[3]

성지로 가는 유일한 안전한 길은 해로가 되었고, 이는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3]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하는 안전한 육로가 없다는 점은 안티오키아 공국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하여, 갈릴리 후작 탕크레드는 동로마 제국의 개입 없이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3]

이후 제2차 십자군제3차 십자군아나톨리아를 통과할 때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3]

6. 1. 십자군 측 피해

1101년 십자군의 패배로 많은 십자군 병사들이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잡혔다. 메르시반 전투, 헤라클레아 전투 등에서 롬바르디아군, 프랑스군, 독일군, 아키텐-바이에른 연합군 등이 큰 피해를 입었다. 생존자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예루살렘 왕국에 남아 파티마 왕조와의 전투를 계속했다.

제2차 라믈라 전투에서 블루아의 에티엔과 뤼지냥의 위그 6세가 전사했고, 쿠르트네의 조슬랭은 살아남아 훗날 에데사 백작이 되었다.

다음은 주요 인물들의 피해 상황을 정리한 표이다.

인물소속피해 상황
블루아의 에티엔프랑스군제2차 라믈라 전투에서 전사
뤼지냥의 위그 6세프랑스군제2차 라믈라 전투에서 전사
쿠르트네의 조슬랭프랑스군생존, 1118년 에데사 백작
아키텐의 윌리엄 9세아키텐-바이에른 연합군생존
베르망두아의 위그아키텐-바이에른 연합군헤라클레아에서 치명상, 타르수스에서 사망
바이에른 공작 벨프 1세아키텐-바이에른 연합군생존
오스트리아의 이다아키텐-바이에른 연합군헤라클레아에서 실종 (사망 추정)
뉘베르 백작 기욤 2세뉘베르 군대헤라클레아에서 거의 모든 병력 궤멸, 자신은 생존[4]


6. 2. 룸 셀주크 왕조의 강화

킬리지 아르슬란 1세가 이끄는 룸 셀주크 왕조는 1101년 십자군을 격파하여 아나톨리아 중부 지배권을 회복하고 코냐를 수도로 삼았다.[3] 이는 이슬람 세계에 십자군이 무적이 아님을 보여준 사건이었다.[3] 룸 셀주크 왕조의 부활로 아나톨리아를 통과하는 육로의 안전 확보가 불가능해지면서 십자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제2차 십자군제3차 십자군도 아나톨리아 횡단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3]

성지로 가는 유일한 안전한 길은 해로가 되었고, 이는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3]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하는 안전한 육로가 없다는 점은 안티오키아 공국에도 이점이었는데, 갈릴리 후작 탕크레드는 동로마 제국의 개입 없이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3]

6. 3. 이후 십자군에 미친 영향

1101년 십자군의 패배는 여러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킬리지 아르슬란 1세는 룸 셀주크 왕조의 수도를 코냐로 정하고 세력을 강화했으며,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3]

십자군과 비잔티움 제국은 서로에게 패배의 책임을 돌리며 아나톨리아를 통과하는 안전한 육로 확보에 실패했다. 이는 성지로 가는 유일한 안전한 경로가 해로가 되게 하였고, 이탈리아 해양 도시 국가들에게 큰 이익을 안겨주었다.[3]

안전한 육로 부재는 안티오키아 공국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갈릴리 후작 탕크레드는 비잔티움 제국의 간섭 없이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3]

제2차 십자군제3차 십자군도 아나톨리아를 통과할 때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3]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I. The First Hundred Years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9
[2]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2: The Kingdom of Jerusalem and the Frankish East, 1100-1187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2: The Kingdom of Jerusalem and the Frankish East, 1100-1187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2: The Kingdom of Jerusalem and the Frankish East, 1100-1187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서적 The Crusades: An Encyclopedia ABC-CLIO, Inc.
[6]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2: The Kingdom of Jerusalem and the Frankish East, 1100-1187 Cambridge University Press
[7]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2: The Kingdom of Jerusalem and the Frankish East, 1100-1187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서적 The First Crusade and the Idea of Crusading
[9] 웹사이트 The Crusade of 1101 http://crusades.bois[...]
[10]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I. The First Hundred Years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9
[11]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2: The Kingdom of Jerusalem and the Frankish East, 1100-1187 Cambridge University Press
[12]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2: The Kingdom of Jerusalem and the Frankish East, 1100-1187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2: The Kingdom of Jerusalem and the Frankish East, 1100-1187 Cambridge University Press
[14] 서적 The Crusades: An Encyclopedia ABC-CLIO, Inc.
[15]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2: The Kingdom of Jerusalem and the Frankish East, 1100-1187 Cambridge University Press
[16]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2: The Kingdom of Jerusalem and the Frankish East, 1100-1187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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