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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전국지도자 보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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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S전국지도자 보안국(SD)은 나치 독일의 정보 및 보안 기관으로, 1931년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설립되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SD는 나치 정권의 정적을 감시하고 제거하는 역할을 했으며,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과정에서 파괴 활동을 수행했다. 1939년 국가안전본부(RSHA)에 통합된 후에는 해외 첩보 및 국내 첩보 부서로 나뉘어 활동했으며, 아인자츠그루펜과 협력하여 유대인 학살을 주도했다. SD는 SS 계급을 사용했으며, 정보 수집 및 검열, 여론 감시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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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전국지도자 보안국 - [정부기관]에 관한 문서
개요
SD 소매 휘장
SD 소매 휘장
명칭SS 보안국
독일어 명칭Sicherheitsdienst des Reichsführers-SS (SD)
약칭SD
영어 명칭Security Service
조직 형태정보 기관
존속 기간1931년 3월 ~ 1945년 5월 8일
전신Ic-Dienst (1931년)
관할 지역나치 독일
점령된 유럽
본부 위치프린츠-알브레히트-슈트라세, 베를린
직원 수1944년 2월 기준 약 6,482명
상위 기관[[파일:Flag Schutzstaffel.svg|23px]] 일반 친위대
국가보안본부
지휘부
장관하인리히 힘러 (1931년 ~ 1945년)
국장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1931년 ~ 1942년)
국장 대행하인리히 힘러 (1942년 ~ 1943년)
국장에른스트 칼텐브루너 (1943년 ~ 1945년)

2. 역사

SD는 1931년 8월 전국 친위대 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와 친위대 간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 의해 뮌헨의 나치당 본부 “갈색당사” 내에 설치되었다. 영국의 비밀정보부 “Secret Service”(MI5)를 모델로 하였으며, 초기에는 “IC부”로 불렸다. 1932년 4월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의 결정에 따라 파울 폰 히덴부르크 대통령이 “나치당의 SA와 SS 금지 긴급 명령”을 발표하자, 위장을 위해 “신문·정보부(Presse- und Informationsdienst, PID)”로 개명하였다.[1] 그러나 당시부터 친위대 내부에서는 SD라고 불렸다.[2]

초대 장관은 하인리히 히믈러가 겸임하였으나, 실무는 창설 당시부터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맡았다. 1932년 7월 19일 SD로 개칭됨과 동시에 하이드리히가 공식적으로 SD 장관이 되었다. 친위대 본부(Hauptamt)의 하나로서 “SD 본부”(SD-Hauptamt)가 설치되었다.

SD의 활동은 나치당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고, 일반 SS 대원이 무급으로 당 활동을 한 것에 비해 SD 대원의 활동에는 당에서 급여를 지급했다. 다른 나치당 조직에 비해 고학력자가 많이 모였지만, 학위가 없는 아돌프 아이히만도 채용되었다.

초기에는 독일 공산당이나 돌격대(SA) 내부의 과격파 등 나치당의 “적”에 대한 조사를 주로 하였다. 1933년 1월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SD가 사실상 국가 기관이 되면서 국내외에서 본격적으로 암약하게 된다. 1934년 6월 9일의 법령에 따라 SD는 나치당 내 유일의 정보기관으로 인정받았다.[3]

1934년 6월 에른스트 뢰름 일파의 숙청 사건(긴 칼의 밤 사건), 1938년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국방장관 사임 사건 및 베르너 폰 프리치 육군 최고사령관 해임 사건 등에 SD가 깊이 관여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이나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때에도 SD는 반나치파의 영향력 말살에 힘썼다.

프로이센 주총리 헤르만 괴링이 1933년 프로이센 경찰에 창설한 게슈타포와 역할이 겹쳐 SD와 게슈타포는 자주 대립했다고 한다.[4] 1934년 게슈타포는 히믈러의 지휘하에 놓였고, 1936년부터는 형사경찰(크리포)과 통합되어 하이드리히의 보안경찰에 정리되었지만, 양자의 역할 구별은 애매한 채 대립이 계속되었다. 1937년 7월 1일 하이드리히는 보안경찰 및 SD 장관(Chef der Sicherheitspolizei und des SD, 약칭 CSSD) 명령을 내려 SD와 게슈타포의 활동 범위를 분할했다. SD는 당내 문제, 인종 문제, 문화 문제, 교육 문제, 외국 문제, 행정 문제, 프리메이슨 등을 전담하고, 게슈타포는 마르크스주의, 이민, 국사범을 전담했다. 교회, 세계관 문제, 유대인, 과격파, 흑색전선(나치 좌파의 오토 슈트라서의 분파 조직), 경제 문제, 보도 문제에 대해서는 공동 관할이 되었다. SD를 정보 분석 기관으로 하고, 게슈타포를 실행 기관으로 하는 것이 이 구분 명령의 목적이었다고 한다.[5] 1938년 11월 11일 내무성 포고에 따라 국가 정보 기관이 되었다.[6]

1939년 9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장관으로 하는 국가안전본부(RSHA)가 설립되었고, 보안경찰(게슈타포)과 SD는 모두 이 본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게슈타포는 국가안전본부 제4국(반체제 진압)이 되었고, SD는 해외 첩보와 국내 첩보로 나뉘어 각각 제3국(국내안전국, SD-Inland)과 제6국(해외안전국, Ausland-SD)이 되었다. 제3국은 오토 올렌도르프가, 제6국은 발터 셸렌베르크가 지휘했다.

제3국 SD(국내 첩보)는 독일 사회의 상황을 분석하여 당 지도부에 보고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독일의 전황이 악화되자, 패배주의로 의심받을 수도 있는 보고서까지 제출하게 되었다고 한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국장 오토 올렌도르프는 “SD는 객관적인 사실의 보고를 요구받았기 때문에, 나치에 비판적인 정보를 당 상층부에 전달할 수 있었던, 라이히 내 유일의 ‘비판 조직’이 아니었을까”라고 진술했다.

제6국 SD(해외 첩보)는 제2차 세계 대전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의 국방군 정보부(아프베어)와 적국에 대한 첩보 활동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1944년 2월 빌헬름 카나리스가 히틀러의 신임을 잃고 해임되자 아프베어는 국가안전본부 제6국의 지휘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국장 발터 셸렌베르크는 전쟁 후기에 하인리히 히믈러와 함께 히틀러에게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평화 협상을 시도했다.

2. 1. 기원

하인리히 힘러는 1931년 전직 해군 소위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Ic-Dienst''(정보부)를 조직하도록 지시했다. SS의 가장 오래된 정보기관 중 하나인 이 조직은 단 한 채의 아파트에서 활동하며 힘러에게 직접 보고했다. 1932년 여름, ''Ic-Dienst''는 ''Sicherheitsdienst''(SD, 보안국)로 개명되었다.

1931년 8월, 전국 친위대 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와 친위대 간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뮌헨의 나치당 본부 “갈색당사” 내에 SD의 전신인 “IC부”를 설치했다. 이것은 영국의 비밀정보부 “Secret Service”(MI5)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1932년 4월,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의 결정에 따라 파울 폰 히덴부르크 대통령이 “나치당의 SA와 SS 금지 긴급 명령”을 발표하자, 위장을 위해 “신문·정보부(Presse- und Informationsdienst, PID)”로 개명하였다.[1] 그러나 당시부터 친위대 내부에서는 SD라고 불렸다.[2]

하인리히 힘러가 초대 장관을 겸임하였으나, 실무는 창설 당시부터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맡았다. 1932년 7월 19일, SD로 개칭됨과 동시에 하이드리히가 공식적으로 SD 장관이 되었다.

초기 SD는 독일 공산당이나 돌격대(SA) 내부의 과격파 등 나치당의 “적”에 대한 조사를 주로 담당했다.

2. 2. 발전과 권력 강화

히틀러가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임명된 후, 1933년 2월 28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계기로 국회의사당 방화 칙령이 선포되어 독일 내 모든 시민의 자유가 정지되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SD를 통해 나치 정권의 정적들을 체포하여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1] SD는 정적 제거에 앞장서며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한 도구"로 정의되었다.[2]

SS는 독일 내 영향력을 두고 돌격대(Sturmabteilung)와 경쟁했다. 히믈러는 돌격대를 불신했으며, 에른스트 룀의 돌격대 음모를 파괴하는 데 SD를 활용했다.[3]

1934년 4월 20일, 헤르만 괴링게슈타포의 통제권을 히믈러에게 넘겼고, 하이드리히는 게슈타포 책임자와 SD 수장직을 겸임하게 되었다.[4] 이는 히믈러의 보안 메커니즘 통제를 강화하고 SD의 감시력을 높였으며, 두 기관은 독일의 모든 경찰 기관에 침투했다.[5] 1934년 6월 9일, SD는 유일한 "당 정보 서비스"로 지정되었다.[6]

독일 국방군 지도부의 압력과 괴링, 요제프 괴벨스, 게슈타포, SD의 공모 하에 히틀러는 룀의 돌격대가 심각한 위협을 제기한다고 믿게 되었다.[7] SD는 돌격대의 쿠데타가 임박했다는 허위 정보를 제공했고,[8] 돌격대의 행동이 당에 해를 끼치고 있다는 보고서가 SD와 게슈타포에 들어왔다.[9] 1934년 6월 30일, SS와 게슈타포는 조직적인 대규모 체포를 실시, 최대 200명이 사망한 긴 칼의 밤 사건이 발생했다.[10] 이 사건으로 SS는 독일 내 안보 지휘 경쟁에서 승리하고 나치 계층 구조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SS와 SD는 총통에게만 책임을 지게 되었다. 돌격대와 그 지도부의 잔혹한 진압은 히틀러 정권에 대한 반대가 치명적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11]

2. 3.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1937년 가을,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지지를 얻어 오스트리아 합병을 결정했다. 무솔리니는 본래 나치의 오스트리아 장악을 우려했지만,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설득하여 오스트리아에 대한 정치적 음모를 승인하게 만들었다. 이는 뢰름 사건 3주 후 오스트리아 SS 부대가 쿠데타를 시도한 것에 대해 무솔리니가 큰 우려를 표명했기 때문에 큰 성과였다. 당시 쿠데타는 SS를 곤경에 빠뜨리고 히틀러를 격분시켰으며, 1934년 7월 25일 오스트리아 총리 엥겔베르트 돌푸스 암살로 이어졌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를 대독일 제국에 편입하기 위해 SD와 게슈타포는 하이드리히가 작성한 명단을 사용하여 즉시 사람들을 체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2] 하이드리히의 SD와 오스트리아 SS 대원들은 1937년 내내 베를린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폰 슈슈니크 정부를 괴롭혔다.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한 파괴 활동을 위한 위장 단체였던 SD의 한 부서는 역설적으로 "독일-오스트리아 평화"를 홍보했다.[3]

안슐루스와 1938년 3월 12일 나치의 오스트리아 진주 후, 하이드리히는 그의 SD만이 두 독일어권 국가 간의 평화로운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여 시위를 조직하고,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테러 공격을 지시하고, 선전 자료를 배포하고, 반대파를 위협하도록 부추겼으며, SS와 SD 인원들에게 반나치 인사들을 체포하게 했다. 이들 대부분은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4] 치안경찰과 하이드리히의 SD가 안슐루스 초기 단계에서 조율된 노력은 오스트리아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저항을 효과적으로 제거했다.[5] 합병이 공식화되자 오스트리아 경찰은 즉시 하이드리히의 SD, SS, 게슈타포에 복속되었다.[6] SD, 게슈타포, SS의 책략은 오스트리아를 히틀러의 손아귀에 완전히 넣는 데 도움이 되었고, 1938년 3월 13일 그는 눈물을 흘리며 오스트리아와의 합병 법안에 서명했다.[7]

2. 4. "녹색 작전"과 주데텐란트

오스트리아 병합과 동시에, SD는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서 파괴 활동에 개입했다. 300만 명의 독일계 주민이 거주하고 체코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는 불만이 존재하는 주데텐란트에 초점을 맞춘 히틀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SD를 "녹색 작전"에 투입했다. 이 작전은 체코의 억압으로부터 주데텐 독일인을 해방시키는 임무로 위장되었지만, 실제로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지도에서 없애겠다"고 의도한 대로 국가를 침략하고 파괴하기 위한 비상 계획이었다.[1]

"녹색 작전"은 이전의 오스트리아에서의 SD 활동과 유사했지만, 오스트리아와 달리 체코는 자체 비밀 경찰을 운용하고 있었고, 하이드리히는 이에 맞서 싸워야 했다.[2] 작전이 시작되자, 하이드리히의 SD 스파이들은 은밀하게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SD 요원들이 배우자와 자녀를 위장 계획에 이용하기까지 했다. 이 작전은 정부 건물, 경찰서, 우체국, 공공 시설, 물류 경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행장과 같은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초점을 맞춰, 무수한 카메라와 사진 장비를 사용하여 모든 상상 가능한 유형의 정보 데이터를 다루었다.[3]

히틀러는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을 위해 경쟁하도록 조종하고 체코 정부가 이 운동을 억압하도록 하는 것을 포함하여 주데텐란트를 획득하기 위한 정교한 계획을 세웠다. 하이드리히의 지시에 따라, SD 요원 알프레드 나우요크스는 슬로바키아인과 체코인의 반응을 유발하도록 고안된 파괴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재활성화되었지만, 이 임무는 결국 실패했다.[4] 1938년 6월, SD 본부의 지시에 따르면 히틀러는 유터보크에서 장군들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5] 프랑스, 영국, 체코의 강력한 반응을 재촉하기 위해, 히틀러는 체코가 주데텐 독일인을 학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위험에 처한 민족 독일인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주데텐란트의 무조건적이고 신속한 할양을 요구했다.[6] 이 무렵, 독일 참모총장의 일부 구성원에 의한 초기 음모가 등장했는데, 여기에는 히틀러 제거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7]

결국 히틀러와 체코슬로바키아, 영국, 프랑스 정부 간의 외교적 대결이 벌어졌는데, 이들 국가의 오스트리아 합병에 대한 미온적인 반응이 어느 정도 이 위기를 촉발시켰다. 주데텐란트 위기는 1938년 9월 29일 네빌 체임벌린과 히틀러가 뮌헨 협정에 서명하면서 종식되었고, 주데텐란트는 사실상 나치 독일에 할양되었다.[8] SD의 국제 문제 개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고, 이 기관은 해외 작전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히틀러가 그에게 상의하지 않고 SD 보고서를 기반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 라이히 외무부의 수장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그들의 간섭에 대해 불평하기까지 했다.[9] 역사가 리처드 브라이트먼에 따르면, SS 지도부와 리벤트로프의 외무부 사이에는 "관할권 분쟁"을 넘어 적대감이 있었다.[10]

2. 5. 폴란드 침공

SD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활동 외에도, 폴란드에 대한 '반응적' 전쟁을 유발하기 위한 국제적인 음모에 가담했다. 히틀러의 폴란드 공격 명분을 만들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히믈러 작전'으로 명명된 임무에서 SD는 글라이비츠(Gleiwitz)의 독일 라디오 방송국에서 '무고한 독일인들'에 대한 폴란드의 공격을 조작했다. SD는 사형 선고를 받은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데려와 폴란드 군복을 입혔다.[1] 이 작전을 지휘한 인물은 알프레드 나우요크스(Alfred Naujocks)였는데, 그는 나중에 전범 재판에서 폴란드어를 구사하는 독일인을 데려가 '포위당한' 독일 라디오 방송국에서 폴란드어로 메시지를 방송하여 독일과 폴란드 간의 전면전이 시작될 때가 되었다는 내용을 전했다고 진술했다. 이 공격에 대한 증거를 조작하기 위해, SD 요원들은 허구의 폴란드 병사들(치사량의 주사로 살해한 후 외관상 총을 맞은 것처럼 보이게 함)을 ‘공격받은’ 라디오 방송국 주변에 배치하고 언론인들을 현장으로 데려갈 계획이었다.[2] 1939년 9월 1일, 이러한 조작 사건 직후 히틀러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독일 군인들이 새벽 5시 45분부터 ‘반격’을 시작했다고 선언하며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했다.[3]

2. 6. 국가안전본부

1939년 9월 27일, 보안경찰(SiPo)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국가안전본부(RSHA)의 일부가 되었다.[7] 이로써 SD는 RSHA 내에서 두 개의 주요 부서로 나뉘게 되었다.

  • SD-Inland (국내안전국): 오토 올렌도르프가 이끄는 제3국(Amt III)이 되었다. 독일 내부의 정보 및 안보를 담당했다.[8][9]
  • SD-Ausland (해외안전국): 발터 셸렌베르크가 이끄는 제6국(Amt VI)이 되었다. 독일 외부의 정보 활동을 담당했다.[10]


이러한 변화는 SD의 역할과 조직 구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전까지 SD는 나치당의 정보 기관으로서 주로 당 내부의 적과 반대 세력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RSHA에 통합되면서 SD는 국가 정보 기관으로서의 역할이 강화되었고, 활동 범위도 독일 국내외로 확장되었다.
SD-Inland (국내안전국)SD-Inland는 독일 사회의 여론과 동향을 분석하고, 나치 정권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독일의 전황이 악화되자, SD-Inland는 패배주의를 경계하면서도 객관적인 사실을 보고하도록 요구받았다.[11]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오토 올렌도르프는 SD가 나치에 비판적인 정보까지도 전달할 수 있었던 유일한 "비판 조직"이었다고 진술했다.

SD-Inland는 다음과 같은 부서로 구성되었다.

부서담당 업무
A부서법률 및 법적 구조
B부서인종 및 민족 문제
C부서문화 및 종교 문제
D부서산업 및 상업
E부서상류 사회


SD-Ausland (해외안전국)SD-Ausland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 이끄는 국방군 정보부(아프베어)와 첩보 활동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다. 1944년 2월, 카나리스가 해임되면서 아프베어는 국가안전본부 제6국의 지휘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SD-Ausland가 해외 첩보 활동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발터 셸렌베르크는 전쟁 후기에 하인리히 히믈러와 함께 아돌프 히틀러에게 알리지 않고 독단적인 평화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SD-Ausland는 다음과 같은 부서로 구성되었다.

부서담당 업무
A부서조직 및 행정
B부서서방 첩보
C부서소련일본 첩보
D부서미국권 첩보
E부서동유럽 첩보
F부서기술 문제


3. 주요 임무 및 구조

SD는 1931년 8월 전국 친위대 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와 친위대 간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 의해 뮌헨의 나치당 본부 “갈색당사” 내에 설치되었다. 영국의 비밀정보부 “Secret Service”(일명 MI5)를 모델로 하였으며, 초기에는 “IC부”라고 명명되었다. 1932년 4월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의 결정에 따라 파울 폰 히덴부르크 대통령이 “나치당의 SA와 SS의 금지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고,[1] 이때 위장을 위해 “신문·정보부(Presse- und Informationsdienst, PID)”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당시부터 친위대 내부에서는 SD라고 불렸다.[2]

초대 장관은 하인리히 히믈러가 겸임하였으나, 실무는 창설 당시부터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장악하고 있었고, 1932년 7월 19일 SD로 개칭됨과 동시에 하이드리히가 공식적으로 SD 장관이 되었다. 친위대 본부(Hauptamt)의 하나로서 “SD 본부”(SD-Hauptamt)가 설치되었다.

SD의 활동은 나치당에서도 중시되었고, 일반 SS 대원이 무급의 당 활동이었던 것에 비해 SD 대원의 활동에는 당에서 급여가 지급되었다. 또 다른 나치당 조직에 비해 고학력자가 많이 모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학위가 없는 아돌프 아이히만도 채용되었다.

초기 SD는 공산당이나 돌격대(SA) 내부의 과격파 등 나치당의 “적”에 대한 조사를 주로 하였고, 정당 활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933년 1월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SD가 사실상 국가 기관이 되면서 국내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1934년 6월 9일의 법령에 따라 SD는 나치당 내 유일의 정보기관으로 인정받았다.[3]

1934년 6월 에른스트 뢰름 일파의 숙청 사건(긴 칼의 밤 사건), 1938년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국방장관 사임 사건 및 베르너 폰 프리치 육군 최고사령관 해임 사건 등에 SD가 깊이 관여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이나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때에도 SD는 반나치파의 영향력 제거에 힘썼다.

프로이센 주총리 헤르만 괴링이 1933년 프로이센 경찰에 창설한 게슈타포와 역할이 겹쳐 SD와 게슈타포는 자주 대립했다고 한다.[4] 1934년 게슈타포는 히믈러의 지휘하에 놓였고, 1936년부터는 형사경찰(크리포)과 통합되어 하이드리히의 보안경찰에 정리되었지만, 양자의 역할 구별은 애매한 채 대립이 계속되었다.

1939년 국가안전본부(RSHA) 설립 후, SD는 해외 첩보와 국내 첩보로 나뉘어 각각 제3국(국내안전국, SD-Inland)과 제6국(해외안전국, Ausland-SD)이 되었다.

3. 1. 임무

SD는 나치 지도부의 실제 또는 잠재적 적을 탐지하고, 내부 또는 외부의 반대 세력을 중화하는 임무를 맡았다.[7] 이를 위해 SD는 점령 지역을 포함한 라인강 연방 전역에 걸쳐 요원과 정보원 조직을 구축했다.[8] 이 조직은 수백 명의 상근 요원과 수천 명의 정보원으로 구성되었다.[9]

SD는 주로 정보 수집 기관이었던 반면, 게슈타포와 범죄경찰(Kripo)은 정치경찰 시스템의 집행 기관이었다. SD와 게슈타포는 각 부서에서 이중직을 맡은 SS 구성원을 통해 통합되었지만, 관할권 중복과 작전상의 갈등이 있었다.[10]

SD는 나치 정책에 대한 외국 여론과 비판을 추적하고, 필요에 따라 검열했으며, SS 주간지 ''Das Schwarze Korps''에 적대적인 정치 만화를 게재했다.[11] 또한 독일 국민 전체의 사기를 감시하고, "독일 민족의 정치적 건강"을 감독하며 "질병과 병균"의 징후가 나타나면 "적절한 모든 수단으로 제거"하는 임무를 맡았다. 여론 조사, 언론 보도 및 정보 보고서를 포함한 정기 보고서는 독일 내부의 정보 및 보안을 담당하는 오토 올렌도르프 내무 SD 국장과 라인하르트 횔른(Reinhard Höhn)에 의해 검토되었다. 수집된 정보는 ''Meldungen aus dem Reich''(라인강 연방의 보고서)라는 비밀 내부 정치 보고서를 통해 나치당 상층부에 배포되어, 히틀러 정권이 독일 국민의 전반적인 사기와 태도를 평가하고 나치 선전을 조작할 수 있도록 했다.

1937년 7월 1일, 하이드리히는 SD와 게슈타포의 활동 범위를 분할하는 명령을 내렸다. SD는 당내 문제, 인종 문제, 문화 문제, 교육 문제, 외국 문제, 행정 문제, 프리메이슨 등을 전담하고, 게슈타포는 마르크스주의, 이민, 국사범을 전담했다. 교회, 세계관 문제, 유대인, 과격파, 흑색전선, 경제 문제, 보도 문제에 대해서는 공동 관할이 되었다.[5] 이는 SD를 정보 분석 기관으로, 게슈타포를 실행 기관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1939년 국가안전본부(RSHA) 설립 후, SD는 해외 첩보와 국내 첩보로 나뉘어 각각 제3국(국내안전국, SD-Inland)과 제6국(해외안전국, Ausland-SD)이 되었다. 제3국 SD는 독일 사회 상황을 분석하여 당 지도부에 보고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에는 패배주의로 의심받을 수 있는 보고서까지 제출했다. 제6국 SD는 제2차 세계 대전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의 국방군 정보부(아프베어)와 첩보 활동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으나, 1944년 아프베어가 국가안전본부 제6국에 통합되면서 SD가 승리했다.

3. 2. 구조

1939년 9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장관으로 하는 국가안전본부(RSHA)가 설립되면서, 보안경찰(게슈타포와 형사경찰(크리포))과 SD는 모두 이 본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게슈타포는 국가안전본부 제4국(반체제 진압)이 되었고, SD는 해외 첩보와 국내 첩보로 나뉘어 각각 제3국(국내안전국, SD-Inland)과 제6국(해외안전국, Ausland-SD)이 되었다. 제3국은 오토 오렌돌프가, 제6국은 발터 셸렌베르크가 지휘했다.

제3국 SD(국내 첩보)는 독일 사회의 상황을 솔직하게 분석하여 당 지도부에 보고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독일의 전황이 악화되자, 패배주의로 의심받을 수도 있는 보고서까지 제출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6국 SD(해외 첩보)는 제2차 세계 대전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의 국방군 정보부(아프베어)와 적국에 대한 첩보 활동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1944년 2월 카나리스가 해임되자 아프베어는 국가안전본부 제6국의 지휘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1937년 7월 1일 하이드리히의 보안경찰 및 SD 장관(Chef der Sicherheitspolizei und des SD, 약칭 CSSD) 명령에 따라 SD와 게슈타포의 활동 범위가 분할되었다. SD는 당내 문제, 인종 문제, 문화 문제, 교육 문제, 외국 문제, 행정 문제, 프리메이슨 등을 전담하고, 게슈타포는 마르크스주의, 이민, 국사범을 전담으로 했다. 교회, 세계관 문제, 유대인, 과격파, 흑색전선(나치 좌파의 오토 슈트라서 분파 조직), 경제 문제, 보도 문제는 공동 관할이었다. 이 구분 명령의 목적은 SD를 정보 분석 기관으로, 게슈타포를 실행 기관으로 하는 것이었다.[5]

SD와 SiPo는 점령 지역의 치안 부대 장교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SD-SiPo가 이끄는 대대는 일반적으로 SS 및 경찰 지도자의 지휘를 받았으며, 베를린에 있는 RSHA에 직접 보고했다. SD는 또한 모든 수용소에 상주하며 필요에 따라 ''아인자츠그룹''과 같은 특수 작전 부대에 인원을 공급했다.[7]

SD-SiPo는 점령된 동유럽 전역에 독일인들이 설립한 나치 게토의 질서와 안전 유지를 위해 ''질서경찰''과 함께 주요 기관이었다.[8]

4. 아인자츠그루펜과의 관계

SD는 안전경찰 및 SD 아인자츠그룹(Einsatzgruppen der Sicherheitspolizei und des SD), 즉 아인자츠그룹(Einsatzgruppen)의 상위 기관이었으며, 이는 연합군이 나중에 이 조직을 전쟁범죄로 기소한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 아인자츠그룹은 홀로코스트에 깊이 관여한 기동 살인 부대로, 나치 점령 지역에서 최종 해결안(대량학살 계획)을 실행했다.[1] SD는 독일 국방군(Wehrmacht)과 협력하여 유대인, 공산주의자, 빨치산 등을 박해했으며,[2] 폴란드 침공부터 동부 전역에 걸쳐 정권 반대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3] 아인자츠그룹 대원들은 SD, 게슈타포, 크리포, 오르포, 무장 친위대(Waffen-SS)에서 차출되었다.[4]

1941년 7월 31일, 헤르만 괴링은 SD 책임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독일 점령지 내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안 실행을 위한 전 정부적 협력을 지시했다.[5] SD 본부 각서에는 SD가 군사 작전에 동행하여 치안 유지를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SD는 군대가 이동하는 즉시 뒤따라가서, 라인강 지역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삶의 안전을 책임질 것이다. 라인강 지역에서는 안전 조치가 게슈타포의 책임이며 SD가 협력한다. 점령 지역에서는 고위 SD 사령관의 지휘 아래 조치가 이루어질 것이며, 게슈타포 공무원들은 개별 아인자츠슈타베(Einsatzstäbe)에 배치될 것이다. 특별 배치를 위해 페어푸궁스트루페(Verfügungstruppe) 또는 토텐코프(Totenkopf) 부대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6]

이에 따라 아인자츠그룹을 포함한 SD 부대는 독일군과 함께 오스트리아, 수데텐란트, 보헤미아, 모라바,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 등지로 진출했다.[7] 이들의 임무는 군 지도부와의 협력을 포함했기에, 점령 지역 내 반대 세력 억압은 공동 사업이었다.[8] 정책 실행 방식에 대한 의견 불일치도 있었지만,[9] 1941년 6월까지 SS와 SD 특별 임무 부대는 점령 지역에서 군 복무 연령의 유대인 남성을 체계적으로 사살했고, 곧이어 노인, 여성, 어린이까지 학살 대상을 확대했다.[10]

1942년 1월 20일, 하이드리히는 반제 회의를 주재하여 최종 해결 계획 실행을 논의했다.[11] 헬름노, 마이다네크,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 수용소는 하이드리히가 주도한 계획의 결과였다. 하이드리히는 1942년 암살될 때까지 안전경찰(SiPo)과 SD(RSHA를 통해)의 수장이었고, 이후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1943년 1월 30일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임명되어 종전까지 그 직을 맡았다. SD는 전후 범죄 조직으로 선포되었고, 구성원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쟁 범죄자로 기소되었다. SD와 SS는 국가 내부의 적을 식별, 제거하고 점령 지역 주민들을 복종,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SD와 SiPo는 점령 지역 치안 부대 장교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SD-SiPo 대대는 SS 및 경찰 지도자 지휘 하에 베를린 RSHA에 직접 보고했다. SD는 수용소에 상주하며 ''아인자츠그루펜'' 등 특수 작전 부대에 인력을 제공했고, 실제로 ''아인자츠그룹'' 구성원 전원은 제복에 SD 소매 다이아몬드를 착용했다.

SD-SiPo는 ''질서경찰''과 함께 점령된 동유럽 나치 게토의 질서 유지를 담당했다. 1939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 당일, 점령된 포즈난(포젠)의 SD 및 SiPo 사령관 에른스트 담조크에 의해 흐미엘노 근처에 최초의 절멸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담조크는 학살 센터 직원을 직접 선발했고, 헤르베르트 랑에 지휘 하 수용소 운영을 감독했다. 약 15개월 동안 15만 명이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5. 조직도

1936-1937년1938-1939년


6. 제복 및 계급

SD는 SS 계급을 사용했다. 제복 착용 시 회색 무장친위대 제복을 입고, 어깨 견장에는 육군과 질서경찰 계급 휘장을, 왼쪽 옷깃에는 SS 계급 휘장을 달았다. 오른쪽 옷깃에는

룬 없이 검은색이었다. SD의 병과색은 녹색이었다. SD 소매 마름모(SD ''Raute'') 휘장은 왼쪽 아래 소매에 착용되었다.[1]



SS 계급 휘장과 소매 아랫부분에 SD 마름모가 있는 M43 야전 튜닉


치안경찰[4]계급 휘장[4]안전국[4]
국가범죄수사국장
SS-오베르퓨러
정부 및 범죄수사국장
SS-슈탄다르텐퓨러
상급정부 및 범죄수사관
SS-오베르슈투름반퓨러
정부 및 범죄수사관
SS-슈투름반퓨러
범죄수사국장
범죄수사관
이 계급에서 3년 이상 근무
범죄수사위원
SS-하우프트슈투름퓨러
범죄수사관SS-오베르슈투름퓨러
범죄상급서기관
SS-운터슈투름퓨러
범죄서기관SS-하우프트샤르퓨러
범죄상급보조관
SS-오베르샤르퓨러
범죄보조관
SS-샤르퓨러



계급상응하는 경찰 계급어깨 장식깃 장식
SD 최고 지도자
(SD-Oberstgruppenführer)
경찰 총감
(Generaloberst der Polizei)
SD 상급 지도자
(SD-Obergruppenführer)
SD 지도자
(SD-Gruppenführer)
경찰 중장
(General der Polizei)
SD 여단 지도자
(SD-Brigadeführer)
경찰 소장
(Generalmajor der Polizei)
SD 상급 지도자
(SD-Oberführer)
경찰 대령
(Oberst der Polizei)
SD 연대 지도자
(SD-Standartenführer)
SD 상급 대대 지도자
(SD-Obersturmbannführer[7])
경찰 중령
(Oberstleutnant der Polizei)
SD 대대 지도자
(SD-Sturmbannführer)
경찰 소령
(Major der Polizei)
SD 고급 중대 지도자
(SD-Hauptsturmführer)
경찰 대위
(Hauptmann der Polizei)
SD 상급 중대 지도자
(SD-Obersturmführer)
경찰 중위
(Oberleutnant der Polizei)
SD 하급 중대 지도자
(SD-Untersturmführer)
경찰 소위
(Leutnant der Polizei)
SD 특무 분대 지도자
(SD-Sturmscharführer)
주임
(Meister)
SD 고급 분대 지도자
(SD-Hauptscharführer)
고급 순경
(Hauptwachtmeister)
SD 상급 분대 지도자
(SD-Oberscharführer)
지역 상급 순경
(Revier-oberwachtmeister)
SD 분대 지도자
(SD-Scharführer)
상급 순경
(Oberwachtmeister)
SD 하급 분대 지도자
(SD-Unterscharführer)
순경
(Wachtmeister)
SD 반 지도자
(SD-Rottenführer)
순경장
(Rottwachtmeister)
SD 보조원
(SD-Sturmmann)
순경
(Unterwachtmeister)
SD 직원
(SD-Mann)
후보생
(Anwärter)


7. 침투

Piercing the Reich영어에 따르면, 1944년 미국을 위해 일하던 러시아 출신의 한 인물이 SD에 잠입했다.[1] 이 요원의 부모는 러시아 혁명을 피해 망명했고, 그는 베를린에서 자란 뒤 파리로 이주했다. 그는 OSS 제7 육군 부대의 알베르 졸리스에 의해 스카우트되었으며, 작전명은 루퍼트(RUPPERT)였다.[1]

군부의 핵심 인물들이 히틀러 암살을 기도했던 초기 음모에 대해 SD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사실상 알 수 없다. 영국 역사학자 존 휠러-베넷은 "게슈타포 기록 보관소의 대량 파괴를 고려할 때 이러한 정보가 밝혀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당국이 심각한 '패배주의'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누군가가 노골적인 반역을 저질렀다는 것을 의심했는지는 의문이다."라고 언급했다.[2]

8. 인원 구성

SD 구성원은 대부분 비교적 젊었지만, 장교들은 일반적으로 나이가 더 많았다. SD 구성원의 평균 연령은 평균 나치당원보다 약 2살 더 많았다.[1] 일반적인 나치 혁명과 마찬가지로, SS와 SD의 회원 자격은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에게 더욱 매력적이었다.[2] 대부분의 SD 구성원은 개신교 신자였고, 군 복무 경험이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상당한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교육받은 엘리트"를 대표했으며, 그중 약 14%가 박사 학위를 소지했다.[3] 하이드리히는 SD를 SS 내의 정신적 엘리트 지도자이자 "NSDAP의 최고 중의 최고"로 여겼다.[4]

역사가 조지 C. 브라우더에 따르면, "SD 요원들은 병리적이거나 정신적으로 취약한 집단을 대표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나치 광신자는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면에서 그들은 독특한 임무들의 조합에 의해 결합된 특별한 남성들의 혼합체였다."[5] 게슈타포 구성원과 함께 SD 인원들은 "공포와 불안감이 뒤섞인 시선으로 여겨졌으며", 사람들은 그들과 가능한 한 적게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6] 나치 독일의 보안 기구에 속하는 것은 분명 이점이 있었지만, 직업과 관련된 사회적 불이익도 수반되었다. 역사가들의 전후 SD에 대한 묘사를 보면, SD 회원 자격은 독일 국민뿐만 아니라 "나치당 내부"에서도 "은밀한 비밀 결사", "사악한 존재", "공포의 전달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7]

참조

[1] 서적 ヒトラー全記録 柏書房
[2] 서적 図解第三帝国 新紀元社
[3] 서적 ゲシュタポ・狂気の歴史 講談社学術文庫
[4] 문서 게슈타포와 SD의 대립 이유에 대한 추측
[5] 서적 武装SS全史1 学研
[6] 서적 武装SS興亡史 ヒトラーのエリート護衛部隊の実像1939-45
[7] 문서 계급 이하 견장에 대한 설명
[8] 서적 The Gestapo and German Society https://books.google[...] 2009-06-02
[9] 서적 The SS: 1923–1945
[10] 서적 Anatomy of the SS State
[11] 서적 Nazi Conspiracy and Aggression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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