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각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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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검은 사각형은 카지미르 말레비치가 1915년 제작한 회화 작품으로, 79.5cm x 79.5cm 크기의 캔버스 중앙에 검은색 정사각형을 단순하게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절대주의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말레비치는 이를 통해 회화를 재현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순수한 형태와 색채를 통해 비객관적인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검은 사각형》은 20세기 미술과 추상 미술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미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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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각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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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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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검은 사각형 |
원어 제목 | Чёрный квадрат (체르니 크바드라트) |
영어 제목 | Black Square |
작가 | 카지미르 말레비치 |
제작 연도 | 1915년 |
종류 | 캔버스에 유채 |
크기 | 79.5 x 79.5 cm |
소장 |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
2. 배경
《검은 사각형》은 20세기 초 러시아의 급변하는 사회, 정치, 문화적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1913년 미하일 마추신의 입체미래주의 오페라 《태양의 정복》 무대 디자인을 맡으며 검은 사각형 모티프를 처음 사용했다. 벨리미르 흘레브니코프가 각본을 쓴 이 오페라는 태양을 사로잡고 시간을 파괴하여 '이성을 파괴'하려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러시아 전통이 파괴된 후의 미래를 표현하고자 했다.[49] 말레비치는 오페라 의상 스케치에서 〈미래주의 독재자〉, 〈무덤 파는 사람〉 등 일부 등장인물의 의상에 검은색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을 사용했다.[51]
2. 1.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10대부터 미술을 독학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우크라이나 문화와 러시아 민속 예술, 동방정교회에서 쓰는 이콘의 양식과 모티브를 결합하는 작품을 선보였다.[45] 1900년대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07년 고향 키예프를 떠나 모스크바로 이사 간 말레비치는 그곳에서 나탈리아 곤차로바, 미하일 라리오노프 같은 러시아의 선구적인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교류했다.[43][46][47]말레비치는 화가이자 작곡가였던 미하일 마추신(1861년~1934년)의 입체미래주의 오페라 《태양의 정복》의 무대 디자이너로 발탁되었다. 이 과정에서 말레비치는 무대 장치에 검은 사각형 모티브를 처음으로 사용했다.[48]
미술사학자 프랜시스 스폴딩은 커튼의 사각형이 "태양의 관을 암시한다"고 해석했다.[54] 일각에서는 자연의 수동적 형태에 대하여 인간의 능동적인 창의성이 승리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태양의 원을 대신해 검은 사각형을 등장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말레비치는 검은 사각형이라는 요소의 잠재력을 곧바로 알아보고, 1915년 공연 일정을 계획하던 마추신에게 그 요소를 지켜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여기서 말레비치는 검은 사각형이라는 조형 자체가 "회화에서 엄청난 의의를 지닐 것"이며, "모든 가능성의 배아이며 성장 과정에서 끔찍한 힘을 얻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55]
아방가르드 미술은 1920년대 후반 이오시프 스탈린이 소련을 완전히 장악한 후 쇠퇴했다. 스탈린은 소련 밖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의심했는데, 말레비치는 1927년 초 베를린으로 건너가 약 70점의 그림과 드로잉이 전시될 예정인 ''Grosse Kunstausstellung'' 전시에 참석했을 때 반체제 인사로 의심받아 비밀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18][20]
말레비치는 1930년 며칠 동안 체포되었다. 그의 작품은 스탈린이 선호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연합의 공식 예술로 지정된 후 1935년 그의 이른 죽음 직후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다른 많은 예술 형식도 억압되었다.[18]
20세기 초 러시아 아방가르드로 알려진 예술 운동이 일어났다. 시에서는 마야코프스키, 연극에서는 메이예르홀드 등의 뛰어난 인물들이 잇따라 나타났고, 회화에서는 타틀린이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24] 현대에는 이 운동은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이탈리아 미래주의 등과 함께 역사적 아방가르드 예술로 취급되고 있다.[25] 카지미르 말레비치 역시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화가 중 한 명이다.
아방가르드가 전통적인 스타일을 부정하고 예술의 본질 자체를 뒤흔드는 운동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듯이, 리얼리즘에서 인상주의로, 야수파와 세잔적인 그림 그리고 입체주의로, 말레비치는 《검은 사각형》을 발표하기까지 그 작풍을 쉴 새 없이 변화시켰다.[26] 최종적으로 그가 도달한 것은 "슈프레마티즘"이었다.
2. 2. 말레비치의 초기 작품 세계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10대부터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우크라이나 문화와 러시아 민속 예술, 동방정교회의 이콘 양식과 모티브를 결합하는 작품을 선보였다.[45] 1900년대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07년 고향 키예프를 떠나 모스크바로 이주한 말레비치는 그곳에서 나탈리아 곤차로바, 미하일 라리오노프 같은 러시아의 선구적인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교류했다.[43][46][47]말레비치는 화가이자 작곡가였던 미하일 마추신(1861년~1934년)의 입체미래주의 오페라 《태양의 정복》의 무대 디자이너로 발탁되었다. 이 과정에서 말레비치는 무대 장치에 검은 사각형 모티브를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48]
2. 3. 오페라 《태양의 정복》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화가이자 작곡가였던 미하일 마추신(1861년~1934년)의 입체미래주의 오페라 《태양의 정복》의 무대 디자이너로 참여하면서 검은 사각형 모티프를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48] 1913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된 이 오페라는 표면적으로는 희극이지만, 당시 혁명 이전 러시아를 지배하던 정교회 교리와 차르의 독재정치를 풍자하고 있다.[48] 각본은 시인 벨리미르 흘레브니코프(1885년~1922년)가 썼으며, 태양을 사로잡고 시간을 파괴하여 '이성을 파괴'하려는 주인공들을 따라가는 전개로 진행된다. 결말부에서는 어둠 속 세계가 펼쳐지는 것으로 끝나는데, 흘레브니코프는 러시아의 전통이 파괴된 후의 미래를 표현하고자 하였다.[49] 이러한 발상은 동시대 모더니즘 미술의 행보와 관련하여 원년 (元年)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레비치의 견해와 일치하였다.[50]말레비치가 남긴 오페라 의상 스케치는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래주의 독재자〉 (Futurist Strongman), 〈무덤 파는 사람〉 (Grave Digger), 〈다소 사악한 감독관〉 (A Some Evil Intender) 같은 일부 등장인물의 의상 스케치는 색상 요소와 더불어 검은색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51] 또 태양의 죽음을 묘사하는 중반부 장면에서 커튼과 배경, 태양 운구자들의 코트와 모자 등, 검은 사각형이란 요소가 여덟 차례에 걸쳐 의상과 무대에 활용된 모습을 보인다.[52][53]
미술사학자 프랜시스 스폴딩은 커튼의 사각형이 "태양의 관을 암시한다"고 해석하였다.[54] 일각에서는 자연의 수동적 형태에 대하여 인간의 능동적인 창의성이 승리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태양의 원을 대신해 검은 사각형을 등장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말레비치는 검은 사각형이라는 요소의 잠재력을 곧바로 알아보고, 1915년 공연 일정을 계획하던 마추신에게 그 요소를 지켜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여기서 말레비치는 검은 사각형이라는 조형 자체가 "회화에서 엄청난 의의를 지닐 것"이며, "모든 가능성의 배아이며 성장 과정에서 끔찍한 힘을 얻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55]
3. 작품
《검은 사각형》은 1915년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페트로그라드) 마르스 광장에서 개최된 〈최후의 미래주의 회화전 0,10〉에서 처음 공개되었다.[59]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콘(성화)을 걸어두는 '거룩한 구석'에 해당하는 벽과 천장이 만나는 구석에 그림을 전시하여, 모더니즘과 동방 정교회 전통 문화의 충돌을 강조했다.[60] 톤 로알드와 요하네스 랑은 《검은 사각형》이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을 향한 아이코닉한 파괴 행위"라는 평가를 남겼다.[60]
말레비치는 이 작품을 제작하고 "일주일 내내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다"고 쓸 정도로 흥분했다.[58] 그는 이 그림을 자신의 작품과 미술사의 이정표라고 선언했다. 당시 말레비치는 "훌륭하면서도 대담한 메시아적인 인물"이란 평가와 "홍보물 돌리기에 미쳐 있는 사람"이란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57]
말레비치는 1915년 원본 외에도 1924년, 1929년, 1920년대 후반 또는 1930년대 초에 걸쳐 세 개의 다른 유화 사본을 제작했으며,[15] 이 이미지의 수많은 석판화를 만들고, 자신의 서명을 장식하는 데 사용했으며, 학생들에게 준 옷깃에 적용했다.[2][16]
3. 1. 제작 방식
1915년 말레비치는 79.5cm x 79.5cm 크기의 리넨 캔버스 중앙에 두꺼운 검은색 유성 페인트를 칠해 검은색 정사각형 모양을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검은 사각형》의 초판이다. 캔버스의 테두리와 가장자리는 흰색과 회색 페인트로 칠했다.[56]
그림 뒷면에는 "1913"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는데, 이는 말레비치가 《태양의 정복》에서 검은 사각형 요소를 처음으로 사용한 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45] 말레비치는 이 그림을 "절대주의 핵심 요소. 사각형. 1913년."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영국 테이트 모던의 작품 소개에 따르면, 추상 미술의 태동기에 말레비치가 시대를 앞서가기 위해 더 이른 시기를 제시했을 가능성도 있다.[50]
1915년 원본 그림은 엑스레이 분석 결과, 캔버스 내에서 여러 가지 윤곽선과 형태가 발견되었고, 중앙부에 난 균열의 밑층에는 붉은색 페인트가 칠해진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검은 사각형》이 원래 다른 그림이나 스케치 위에 새로 그려진 작품임을 보여준다. 기존의 작품은 절대주의 구성 회화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초기에 제작한 작품이었으나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61][62]
3. 2. 작품의 특징
1915년 말레비치는 79.5cm x 79.5cm 크기의 리넨 캔버스 중앙에 두꺼운 검은색 유성 페인트를 칠해 《검은 사각형》의 초판을 제작했다. 테두리와 가장자리 역시 흰색과 회색 페인트로 칠했다.[56]
그림 뒷면에는 "1913"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는데, 이는 《태양의 정복》에서 검은 사각형 모티프가 처음 등장한 해를 가리킨다.[45] 말레비치는 이 그림을 "절대주의 핵심 요소. 사각형. 1913년."이라고 언급했다. 다만 영국 테이트 모던의 작품 소개에 따르면 추상 미술의 태동기에 말레비치가 시대를 앞서가기 위해 더 이른 시기를 제시했을 가능성도 있다.[50]
《검은 사각형》은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페트로그라드) 마르스 광장에서 개최된 1915년 〈최후의 미래주의 회화전 0,10〉에서 처음 공개되었다.[59] 특이하게도 벽과 천장이 만나는 구석에 그림을 걸어두었는데, 이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거룩한 구석'이라 하여 이콘(성화)을 걸어두는 자리로, 모더니즘과 동방 정교회 전통 문화의 충돌을 강조한 것이다.[60]
1915년 원본 그림은 엑스레이 분석 결과, 캔버스 내에서 여러 윤곽선과 형태, 그리고 중앙부에 난 균열의 밑층에서 붉은색 페인트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는 《검은 사각형》이 다른 그림이나 스케치 위에 덧그려졌음을 보여준다. 기존 작품은 절대주의 구성 회화를 구상하는 초기 단계에서 제작되었으나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61][62]
3. 3. 여러 버전의 《검은 사각형》
말레비치는 1915년 원본 이후 15년간 세 차례에 걸쳐 《검은 사각형》의 사본을 제작했다.[63] 각 사본은 제작 시기와 소장처가 다르다.
4. 미술사적 의의
《검은 사각형》은 현대 미술과 추상 미술 발전에 있어 중요한 작품으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17]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이 그림이 색과 형태를 강조하는 절대주의 운동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메시스 (모방) 및 표현 예술로부터 회화를 "해방"하려는 자신의 욕망을 '절대주의'라는 단어에 담았다.[7]
이 그림에는 '대상'이 그려져 있지 않다. 중앙의 정방형은 단순히 캔버스의 틀이 접힌 것이다. 말레비치는 자신을 '무대상'을 수법으로 하는 화가로 규정했지만, 이는 20세기의 큰 흐름 중 하나인 추상이라고 할 수 있다.[27]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한다는 '리얼리즘'을 다시 생각하고, 수법 그 자체를 드러내는 예술 의식 아래에서, 말레비치는 '대상'을 그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즉, 무언가를 재현할 때 요구되는 '약속'을[28] 포기했다. 쉬프레마티즘(혹은 『검은 사각형』)은 엄밀히 말하면, 어떤 '대상'을 추상하고 있는 것조차 아니다.[29] 대신에 회화의 본질로 여겨진 것은 바로 '색채'였으며, 그는 그것을 단순히 '대상'의 채색이 아닌 색채의 에너지로서 자립시키려 했다.
Супремусru에서 유래한 절대주의 운동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사이에서 많은 지지자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소련 정부의 이념을 더 잘 반영하고 20세기 후반 미술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구성주의에 가려졌다. 오늘날 절대주의는 거의 전적으로 말레비치와 그의 제자 엘 리시츠키와 연관되어 있다.[18]
말레비치는 '사막'에 도달한 후, 붉은 사각형이나 흰색 사각형을 제작하고, 잠시 회화에서 벗어나 건축 등의 디자인에 관여하게 된다.[33]
4. 1. 절대주의 운동
말레비치는 《검은 사각형》을 통해 색상과 형태를 강조하는 절대주의 운동을 창시했다. '절대주의'라는 명칭은 러시아어로 '우수한', '완벽한'을 뜻하는 '수프리무스' (Супремус)에서 유래했다. 이는 미메시스 (모방)와 재현예술로부터 회화를 '해방'시키려는 말레비치 본인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다.[65]말레비치는 "존재의 진정한 움직임은 0으로부터, 0에서 시작된다"며, "형태의 영점에서 나 자신을 변화시켜 무에서 창조로, 다시 말해 초현실주의로, 신사실주의 회화로, 비객관적 창조로 나아갔다"고 밝혔다.[66] 《검은 사각형》은 "해방된 무(無)의 백색 공허" 속에서 비객관성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67]
절대주의 운동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운동계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으나, 러시아 구성주의 운동에 가려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구성주의 선언은 소비에트 정부 초창기의 이데올로기를 더욱 잘 반영한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20세기 후반 미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반면 절대주의 운동은 오늘날 말레비치와 그의 제자 엘 리시츠키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미술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68]
4. 2. 스탈린 집권기의 탄압과 재발견
1920년대 말 스탈린 집권기에 들어서면서 아방가르드 미술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스탈린 정권은 소련 밖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의심했고, 카지미르 말레비치 역시 1927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비밀 경찰로부터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혔다.[69][70]말레비치는 소련의 진보적인 예술가들이 탄압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독일로 이주를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치 정권 역시 '퇴폐예술'이라 하여 아리아인의 이상적인 생활방식에 부합하지 않는 미술을 탄압하고 있었다. 역사학자 토니 우드 (Tony Wood)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치가 추구하던 예술이, 그토록 증오하던 공산주의자들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고 지적한다.[70]
결국 1930년 말레비치는 체포되어 수일 동안 감금되었고, 1935년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 동시기 스탈린 정권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소련의 대표 미술양식으로 지정하고 다른 양식들은 탄압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말레비치의 작품 역시 금지 대상에 올랐다.[71] 《검은 사각형》은 수십 년 동안 수장고에 방치되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공개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영향으로 1915년 원본 그림은 상당히 변질된 상태로 남아 있다.[72] 미국의 미술 평론가 피터 쉴달은 "그림의 외관은 끔찍한 상태로, 부서지고 긁히고 변색되어 있다. 깨져버린 유리창을 지난 88년 동안 수리해 온 듯한 모습"이라 지적하면서, 말레비치와 그의 작품이 스탈린 치하에서 어떤 수난을 겪고 묻혀 왔는지를 해설하고 있다.[43]
5. 해석
《검은 사각형》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말레비치는 '무대상'을 표현하는 화가로, 20세기 추상 미술의 흐름 속에서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대신 예술 기법 자체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회화의 본질을 '색채'로 보았고, 이를 대상의 채색이 아닌 색채 자체의 에너지로서 독립시키려 했다.[27][28][29] 그는 '어떤 색도 아닌 색'을 통해 색채를 약속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본래의 생성 상태에 있는 세계를 파악하는 '감각'을 그리고자 했다.[30][31]
이후 말레비치는 붉은 사각형, 흰색 위의 흰색을 제작하고, 잠시 회화에서 벗어나 건축 등의 디자인 분야에 참여했다.[33]
오이시 마사히코는 《검은 사각형》이 그리드(2차원에서의 사각형)뿐만 아니라 깊이와 "심층 의식"의 레벨에서도 고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4] 이 작품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캔버스에 그려졌으며, 중앙 부분에는 커다란 "균열"이 있고, 흰색 부분은 '검은 사각형' 완성 후 덧칠된 것으로 보인다. 1990년 X선 조사 결과, '검은 사각형' 아래에는 다채로운 물감이 칠해져 있었다.
5. 1. 무(無)의 세계
말레비치는 《검은 사각형》을 통해 '대상'이 없는 '무대상'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20세기 추상 미술의 관점에서,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리얼리즘' 대신, 예술 기법 자체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다.[27] 즉, 무언가를 재현할 때 필요한 '약속'[28]을 버리고, '대상'을 그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쉬프레마티즘(혹은 《검은 사각형》)은 어떤 '대상'을 추상하는 것조차 아니다.[29]말레비치는 회화의 본질을 '색채'로 보았고, 이를 단순히 '대상'을 칠하는 것이 아닌, 색채 자체의 에너지로서 독립시키려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Новый живописный реализм есть именно живописный, так как в нём нет реализма гор, неба, воды…
До сих пор был реализм вещей, но не живописных, красочных единиц, строящихся так, чтобы не зависеть ни от формы, ни от цвета, ни от положения друг от друга.|새로운 회화의 리얼리즘은 바로 회화의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산의 리얼리즘도, 하늘의 리얼리즘도, 물의 리얼리즘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물의 리얼리즘은 있었다. 그러나 회화의, 색채의 여러 단위의 리얼리즘은 없었다. 그러한 단위는 형태에도, 색채에도, 상호 위치 관계에도 좌우되지 않도록 구성되어 있다.ru (이고전 토시하루 번역)
《검은 사각형》은 흰색 바탕 위에 그려졌지만, 말레비치는 이를 대립이 아닌 하나의 색, 즉 '무색'으로 보았다.[30] 그는 이 '어떤 색도 아닌 색'을 통해 색채를 약속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는 세계가 약속이나 시스템에 의해 세분화되고, 다양한 범주를 통해 굴절된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을 부정하고, 본래의 생성 상태에 있는 세계를 파악하는 '감각'(오슈시체니에)을 그리는 것이다.[31]
Предметность сама по себе супрематисту бессмысленна — представление сознания ничтожно.
Чувство — решающее… и таким образом искусство приходит к беспредметному выражению — к супрематизму.
Оно вступает в «пустыню», где ничто не признаётся, кроме чувства.|대상적인 것은 그 자체로 쉬프레마티스트에게는 무의미하다—의식의 표상은 무가치한 것이다.
감각이란 결정적인 것이며…… 그러므로 예술은 무대상 표현에, 쉬프레마티즘에 이르는 것이다.
예술은 감각 외에 아무것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막'에 조우한다.ru [32]
'사막'에 도달한 말레비치는 이후 《붉은 사각형》, 《흰색 위의 흰색》 등을 제작하고, 잠시 회화에서 벗어나 건축 등의 디자인 분야에 참여했다.[33]
5. 2. 이콘화와의 관계
《검은 사각형》은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페트로그라드) 마르스 광장에서 개최된 1915년 〈최후의 미래주의 회화전 0,10〉에서 처음 공개되었다.[59] 특이하게도 그냥 벽이 아닌 벽과 천장이 만나는 구석에 그림을 걸어두었는데, 이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거룩한 구석'이라 하여 이콘(성화)을 걸어두는 자리에 해당되며, 동시대 모더니즘과 동방 정교 전통 문화가 충돌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60] 톤 로알드(Tone Roald)와 요하네스 랑(Johannes Lang)은 이 점을 의식하여 《검은 사각형》이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을 향한 아이코닉한 파괴 행위"라는 평가를 남겼다.[60]
페트로그라드의 도비친에서 열린 "0, 10 전시회"에서 본 작품이 설치된 곳은 특별했다. 《검은 사각형》이 걸린 곳은 집집마다 이콘이 놓이는 "성스러운 구석"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두 벽이 만나는 구석의 천장 근처"이며, 러시아에서는 명백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35] 말레비치 자신도 종종 자가 성상을 전제로 하면서 《검은 사각형》을 이콘에 비유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뛰어넘으려 했다. 종종 "역원근법"과 같은 이론으로 설명되듯이, 말레비치에게 이콘화는 단순한 우상이나 이미지가 아니라, 바로 "무대상 회화"였다.[36]
5. 3. 그리드와 심층 의식
오이시 마사히코는 《검은 사각형》이 그리드(2차원에서의 사각형)뿐만 아니라 깊이와 "심층 의식"의 레벨에서도 고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4]이 작품은 단순한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이다. 중앙 부분에는 커다란 "균열"이 있으며, 이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흰색 부분은 '검은 사각형'이 완성된 후에 덧칠한 것으로 생각된다. 1990년 X선 등을 이용한 조사에서, 이 그림에 "심층"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검은 사각형' 아래에는 다채로운 물감이 칠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 영향
《검은 사각형》은 현대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회화뿐만 아니라 사진, 설치 미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37][38]
6. 1. 현대 미술에 미친 영향
2007년 러시아의 미술관에서 '검은 사각형'을 모티브로 한 작품 특별전이 개최되었다. 참가한 예술가는 100명이 넘었고 작품 수는 350점에 달했다. 회화뿐만 아니라 사진이나 설치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말레비치의 작품은 변주되고 있다.[37]일본에서는 기타조노 가쓰에가 '검은 사각형'에서 영감을 얻은 시를 창작했다. 이 시는 시각적인 '구체시'의 예로 포르투갈어로 번역되었다.
6. 2. 문학 작품에의 영향
일본의 키타조노 카츠에는 '검은 사각형'에서 영감을 얻어 시를 창작했다. 이 시는 시각적인 '구체시'의 예로 포르투갈어로 번역되었다.[38]참조
[1]
웹사이트
Kazimir Malevich B. 1878, Near Kiev, Russia (Now Kyiv, Ukraine); D. 1935, Leningrad
https://www.guggenhe[...]
2024-05-30
[2]
서적
Jakovljevic (2004), p. 19
[3]
서적
Blanshard (1949). p. 4
[4]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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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にも[[エルミタージュ美術館]]や[[ロシア美術館]]もふくめ現在ロシアには4枚の『黒の正方形』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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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大石雅彦]]はこの展覧会の奇異な名称は「絵画の零度を越えた十人の芸術家たち」のことだという説を紹介している。大石(2008)p.379
[24]
서적
[[ロマン主義]]が詩と音楽、[[リアリズム]]が散文と絵画を主導的な共通原理(ドミナント)にしていると考える場合、ロシア・アヴァンギャルドのそれは絵画と詩だといえる。桑野(1996)p.105-10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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絵画の場合は遠近法がこの約束事({{lang|ru|условность}})の代表である。大石(2008)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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訳文は桑野(1996)p.110 に拠った。桑野による下線強調は再現してい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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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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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石(2008)p.382-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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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マレーヴィチはこの展覧会で40枚の作品を展示し、その構成も彼が決定している。大石(2008)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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