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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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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격구는 말을 타고 나무채로 공을 쳐서 득점하는 경기로, 타구, 격구희, 농장희, 격봉 등으로 불리며, 오늘날의 폴로와 유사하다. 페르시아에서 유래하여 중국, 고구려, 신라를 거쳐 고려 시대에 성행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무과 시험 과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격구는 기마술과 무예를 연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보행격구 형태인 격방과 장치기로도 발전했다. 일본에서도 귀족 사회에서 즐겨 행해졌으나, 근대에 들어 쇠퇴하여 일부 지역에서 민간 놀이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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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구
명칭
한국어격구
한자擊毬
로마자 표기gyeok gu
중국어毬 (dǎ qiú)
일본어打毬 (da kyū)
스포츠 정보
종류구기 스포츠
기원알 수 없음
접촉신체 접촉 없음
인원팀별 대항 (인원수 미상)
혼성가능 (성별 구분 없음)
경기 장소경기장
장비말, 채 (구杖), 공 (毬)
쇠퇴쇠퇴함
올림픽올림픽 종목 아님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격구의 한 장면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격구의 한 장면

2. 여러 명칭

격구는 타구(打毬), 격구희(擊毬戱), 농장희(弄杖戱), 격봉(擊棒)이라고 하며, 흔히 공치기 또는 장치기라고도 한다.

3. 역사

격구는 말을 타고 하는 마상격구와 걷거나 뛰면서 하는 보행격구로 나뉜다. 마상격구는 페르시아에서 유래되었으며, 현대의 폴로 경기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격구는 당나라를 거쳐 고구려, 신라, 발해에 전해졌고, 후삼국 시대를 거쳐 고려조선 초기까지 귀족과 지배층 사이에서 유행했다. 축국, 수박 (무술)과 함께 인기 있는 경기였으며, 무예 연마를 위한 군사 훈련으로도 활용되었다. 조선 시대 후기에는 말 없이 즐기는 보행격구 형태로 변화하여 장치기 등 민간 놀이로도 이어졌다.

중국 명나라 시기 궁중 여관들이 격구를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중국에서 유래된 격구는[1] 한반도를 거쳐 나라 시대 초기에 일본에 전해졌다.[2] 가마쿠라 시대까지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를 유지했지만, 점차 쇠퇴했다(마지막으로 기록된 경기는 986년).[3]

일본에서 격구는 에도 시대도쿠가와 요시무네에 의해 부활하기도 했으나, 메이지 시대에 다시 인기를 잃고 현재는 문화적 자산으로만 남아 있다.

3. 1.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김유신김춘추축국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격구와 유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류득공이 쓴 《발해고(渤海考)》[9]에는 발해의 왕문구 일행이 889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천황이 보는 앞에서 격구를 해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10] 이를 통해 당시 발해에서 격구가 매우 성행하였으며, 일본에 직접 전파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2. 고려시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궁궐에 격구를 할 수 있는 구정(毬庭)을 만들었다는 기록과 고려사(高麗史) 기록으로 볼 때, 후삼국 시대 이전부터 격구가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11] 고려시대에 격구는 크게 성행하여 국가적인 행사로 단오절에 왕이 참관하는 등 대규모 격구대회가 벌어졌다.[11] 고려의 역대 왕들이 좋아하였는데, 특히 의종이 격구를 좋아하고 능숙했다는 기록이 있다.[11]

무신정권 무관들은 수박과 더불어 격구를 통해서 무예를 연마하는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했고, 격렬한 '''마상놀이'''로 행해지기도 했다.[11] 격구 경기를 통해 왕이나 지배층에 눈에 띄어 발탁되는 등 출세의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심지어 경기를 통해 벼슬이 거래되는 등 변질되기도 했다.[11] 또한 격구 행사에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었는데, 비싼 옷과 말 안장(백성 10가구 재산)으로 치장하고 경기장 바닥을 비단으로 덮는 등, 고려 무신정권 시대 지배층의 사치와 부패함을 보여주었다.[11]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우는 1229년에 이웃집 100여 곳을 빼앗고 헐어 격구장을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승려 3만 명이 동시에 입장해 앉아서 밥을 먹으며 격구를 구경할 정도였다고 한다.[11]

3. 3.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격구가 크게 말을 타고 하는 기마경기인 기마격구와, 궁중이나 넓은 마당에서 하는 보행격구(지상격구)로 나뉘었다. 보행격구에는 격방(타구, 봉희, 포구)과 장치기(장구) 등이 있었으며, 격방은 궁중에서 많이 즐겼고, 점차 일반 백성과 아이들까지 즐기는 놀이가 되었다. 반면 기마격구는 무신들이 많이 즐겼고, 단오에 남성 중심의 놀이로 크게 성행하였다.[1]

3. 4. 근현대

18세기에 이 경기는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지원에 힘입어 다시 나타났다. 이 시점까지 격구는 (말렛을 사용하는) 폴로와 유사한 경기에서 말을 탄 라크로스와 유사한 형태로 발전했다.[3] 이 기간 동안 격구는 군사 훈련의 보조 수단으로 여겨졌다(말 위에서 창을 휘두르는 데 필요한 기술을 연마).[4] 이러한 측면은 격구가 다시 인기를 잃은 메이지 시대에 축소되었으며, 오늘날에는 문화적 자산으로만 남아 있다.[5]

  • 야마가타시의 호레쓰 신사의 타구(야마가타현 무형 민속 문화재)는 분세이 4년(1821년)에 미즈노 타다쿠니 (당시 하마마츠 번주)가 번조 미즈노 타다모토를 모시는 신사를 창건했을 때, 신사 행사로 타구를 봉납한 데서 시작되었다. 타다쿠니의 아들 미즈노 타다키요가 야마가타 번으로 옮겨지고, 호레쓰 신사도 야마가타로 이전되었다.
  • 고치현에서는 에도 시대에 무가의 오락으로 토사의 국기 중 하나로 여겨졌다. 매년 봄에 식전이 있었고, 야나기하라의 제방 위에 있던 남마장에서는, 무가의 젊은이들이 홍백 조로 나뉘어 타구를 하는 "오오와카레"가 개최되었다. 공의 수는 평균 14개, 공채는 "헤라"라고 불렸으며, 소년이 겨루는 "리쿠타큐", 성인 남성이 겨루는 "우마다큐"로 나뉘었지만, 메이지 유신 후에 도입된 야구 등의 서양 스포츠의 보급으로 전전기에 소멸했다.[8]
  •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 스포츠 단체가 정부 외곽 단체 "대일본 체육회"로 조직 개편되었을 때, 일본 골프 협회는 해산하고 "대일본 체육회 타구부회"가 되었다. 전시 체제 하에서 "일부 계층의 놀이"로 간주된 골프에 대한 비판이 강했고, 골프 그 자체의 존속도 위태로운 상황이었지만, 이시이 미츠지로 이사장이 예전에 본 문화 영화 "나라 시대의 타구"를 떠올리고, "골프는 일본 고유의 유희를 부활시킨 것"이라고 강변함으로써, 대일본 체육회의 부회로 존속할 수 있었고, 스포츠로서의 소멸을 면했다는 일화가 있다.

4. 격구의 종류와 경기 방법

격구는 크게 말을 타고 하는 기마격구와 궁중이나 넓은 마당에서 하는 보행격구(지상격구)로 나뉜다. 보행격구에는 격방장구 등이 있었으며, 이 중 격방은 타구, 봉희, 포구 등으로도 불렸다. 장구는 후에 민간놀이인 장치기로 변하게 되었다.[5]

기마격구는 무신들이 많이 즐겼고, 단오에 남성 중심의 놀이로 크게 성행하였다. 보행격구인 격방 등은 궁중에서 많이 즐겼으며, 조선 시대에는 점차 일반 백성과 아이들까지 즐기는 놀이가 되었다.

16세기 일본의 족구


일본의 족구는 도보와 기마 형태로 모두 즐겼지만, 기마격구가 귀족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많아 더 잘 기록되었다. 규칙은 다양하지만, 두 가지 주요 형태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두 가지 모두 여러 개의 공을 골대에 넣으려는 두 팀의 기수(빨간색과 흰색)가 참여한다. 원래 땅에 놓인 고리였던 골대는 현재 벽에 있는 원형 구멍이 더 일반적이다.[5]

가가미류(Kagamiryu) 또는 하치노헤(Hachinohe) 스타일의 격구는 18세기부터 시작되었으며, 각 팀은 4명의 기수로 구성된다. 선수들은 직경 30cm의 자기 팀 색깔 공을 각 팀의 두 개씩, 총 4개의 높이 솟은 골대에 넣기 위해 경주하며, 골대에서 18m~27m 떨어진 거리에서 공을 쏜다. 골 성공 여부는 타악기로 알린다. 흰색 팀은 북, 붉은색 팀은 징을 사용한다. 먼저 모든 공을 골대에 넣는 팀이 승리한다.[5]

야마가타식 또는 황실식 경기에서는 더 짧은 채(1m)를 사용하며, 두 팀 모두 하나의 골대를 향해 슛을 한다. 공의 크기도 더 작아 지름이 불과 몇 센티미터이다. 야마가타식 경기에서는 5개의 공을 사용하고, 황실식 경기에서는 11개의 공을 사용한다. 한쪽 팀이 모든 공을 골대에 성공적으로 넣으면, "아게마리"라고 불리는 마지막 공이 투입된다. 아게마리로 득점하는 팀이 경기에 승리한다.[5] 이러한 경기 방식은 당구와 비교되기도 한다.[6]

4. 1. 경기장

격구 놀이를 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넓고 큰 직사각형의 마당을 구장(毬杖)이라 불렀고, 고려 시대에는 격구 또는 타구가 성행하여 궁정의 광장을 대개 구장이라고 하였다.

마상격구 경기장 크기는 대개 큰 광장 마당에서 정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경국대전 병전(兵典) 시취조의 격구 항목을 보면 출마표(出馬標)와 치구표(置毬標)의 거리는 50걸음, 치구표에서 구문까지는 200걸음, 구문 사이 거리는 5걸음으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조(正祖) 때 만든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의하면 출마표(出馬標)에서 공이 있는 치구표(置毬標)까지 50걸음, 치구표 즉 치구장에서 구문(毬門)까지 200걸음으로서, 전체 길이는 250걸음으로 되어 있고 구문의 길이는 5걸음으로 되어 있다.

4. 2. 선수와 장비

격구의 선수와 장비는 다음과 같다.

  • 인원: 10명 혹은 그 이하
  • : 나무나 마노로 만든 것으로 크기는 보통 달걀 정도이며 빨간 칠을 하거나 비단으로 감싼다. 민간에서는 소나무 웅이나 솔방울을 공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털을 넣어 만들었으며, 가죽 또는 으로 감쌌고, 둘레 약 8로, 형 또는 타원형이었다.[5]
  • 장시: 기마격구에서 사용하는 나무 막대채로 공을 치거나 낚아채는 도구이다. 공을 치는 막대기는 숟가락과 같고 크기는 손바닥만 한데, 물소가죽을 사용하며 두꺼운 대나무를 합한 자루 형태였다. 경국대전 병전(兵典) 시취조의 격구 항목에는 막대에 붙은 숟가락(장시) 길이 27cm, 너비 9cm, 자루 길이 105cm, 공 둘레 39cm로 기록되어 있다.
  • 공이: 시누대(조릿대)를 말의 키만큼 잘라, 굵은 대나무를 갈라 구부려 갈고리 모양으로 만든 것을 앞에 묶고, 가는 끈으로 그물을 쳐 만들었다.


족구는 도보와 말을 타고 모두 즐겼지만, 기마 버전이 귀족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있었고 따라서 더 잘 기록되었다. 규칙은 다양하지만, 두 가지 주요 형태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두 가지 모두 여러 개의 공을 골대에 넣으려는 두 팀의 기수(빨간색과 흰색으로 지정)가 참여한다. 원래 땅에 놓인 고리였던 이 골대는 현재 벽에 있는 원형 구멍이 더 일반적이다.[5]

4. 3. 경기 규칙

마상격구(기마격구)는 말을 타고 공채로 공을 쳐서 구문 사이로 구장 밖으로 내보내 득점하여 승부를 가르는 경기로, 현대의 폴로와 유사하다.

보행격구(지상격구)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장구(장치기)는 마상격구처럼 여러 명이 편을 갈라 구문을 설치하고 공을 경기장 밖으로 내보내는 방식으로, 현대의 필드하키와 유사하다. 격방은 구멍에 공을 넣는 놀이로, 현대의 골프게이트볼과 비슷한 방식이다.

족구는 도보와 기마 형태로 모두 즐겼지만, 기마격구가 귀족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많아 더 잘 기록되었다. 규칙은 다양하지만, 두 가지 주요 형태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두 가지 모두 여러 개의 공을 골대에 넣으려는 두 팀의 기수(빨간색과 흰색)가 참여한다. 원래 땅에 놓인 고리였던 골대는 현재 벽에 있는 원형 구멍이 더 일반적이다.[5]

가가미류(Kagamiryu) 또는 하치노헤(Hachinohe) 스타일의 격구는 18세기부터 시작되었으며, 각 팀은 4명의 기수로 구성된다. 선수들은 직경 30cm의 자기 팀 색깔 공을 각 팀의 두 개씩, 총 4개의 높이 솟은 골대에 넣기 위해 경주하며, 골대에서 18m~27m 떨어진 거리에서 공을 쏜다. 골 성공 여부는 타악기로 알린다. 흰색 팀은 북, 붉은색 팀은 징을 사용한다. 먼저 모든 공을 골대에 넣는 팀이 승리한다.[5]

야마가타식 또는 황실식 경기에서는 더 짧은 채(1m로, 하치노헤식 채 길이의 절반 이하)를 사용하며, 두 팀 모두 하나의 골대를 향해 슛을 한다. 공의 크기도 더 작아 지름이 불과 몇 센티미터이다. 야마가타식 경기에서는 5개의 공을 사용하고, 황실식 경기에서는 11개의 공을 사용한다. 한쪽 팀이 모든 공을 골대에 성공적으로 넣으면, "아게마리"라고 불리는 마지막 공이 투입된다. 아게마리로 득점하는 팀이 경기에 승리한다.[5] 이러한 경기 방식은 당구와 비교되기도 한다.[6]

4. 4. 주요 동작 (기마격구)

말을 탄 10명 혹은 수십 명이 좌우로 편을 갈라 장시(杖匙) 나무채를 들고 빨갛게 색을 칠한 나무 공을 장시(杖匙)로 퍼 올려서 일종의 골문인 구문(毬門)에 집어넣어 경기장 밖으로 공을 나가게 하여 득점하는 방식이다.[1]

경기 방식은 처음에 경기자들이 말을 타고 출마표에서 나무채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가 경기 시작을 알리는 노래와 춤이 시작되면, 구장 한복판에 공을 내던지면서, 양편 경기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공을 쳐 구문 밖으로 내보내는데, 공을 구문 밖으로 쳐낸 횟수가 많은 편이 이겼다.[1] 나무채인 장시는 스틱으로 공을 때리기만 하는 폴로와는 달리 공을 양쪽 면으로 모두 괼 수 있는 고뚜레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머리의 바깥면에 공을 괴어서 스틱을 수직으로 쥐기도 하고, 안쪽 면에 공을 괴어서 투석구처럼 빙빙 돌리다가 공을 날리는 등의 다양한 기술을 구사 가능하다.[1]

  • 할흉(割胸) : 공을 격구채로 뜬 후 격구채를 말의 가슴에 곧게 대는 동작[1]

  • 방미(防尾) : 격구채를 말꼬리와 나란히 하는 동작.[1]

  • 수양수(垂揚手) : 원심력 등을 이용해 (쥐불놀이하듯) 격구채를 위아래로 돌리고 흔드는 동작.[1]

  • 호접무(胡蝶舞) : 공을 공중에 던져올린 후 격구채로 받는 기술. 그 후 공을 미는 동작.[1]

  • 횡방(横防) : 후미에 있는 공을 몸을 뒤집어 격구채로 공을 낙아 치는 기술 및 동작.[1]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격구에 능한 사람으로써 태조실록에 기록되어있는 이성계의 격구술 움직임들이 보이는데, 격구가 기마궁술의 단련에 있어서 매우 효율적였다는 점에서 이성계의 궁술이나 격구 실력은 비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1]

태조가 공을 운행할 때에, ..., 공이 문득 돌에 부딪혀 놀라 거꾸로 달아나 말의 네 발 뒤로 나왔다. 태조는 즉시 위를 쳐다보며 누워 몸을 돌려서 말꼬리에 부딪쳐 공을 치니...[1]

공이 왼쪽으로 빠지자, 태조는 오른쪽 등자에서 발을 빼고 몸을 뒤집어 쳐서 이를 맞히고 다시 쳐서 문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때 사람이 이를 횡방(横防)이라 하였다.[1]

5. 기마무예와의 관계

격구, 특히 기마격구는 단순한 놀이 이상으로 무과 시험의 실기 과목이 될 만큼 무예적 속성이 많은 경기였으며, 격구 경기를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기마술은 물론 월도를 비롯한 다양한 마상용 무기를 사용할 정도의 무예 실력이 필요했다.

격구 경기에서 사용하는 장시는 서양의 폴로에서 사용하는 망치 모양이 아니라, 속이 뻥 뚫린 숟가락 모양을 하고 있어 거기에 공을 퍼 담아 다양하게 공을 움직였기에 마상무예의 다양한 기술들을 연마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Japan; its land, people and culture University of Tokyo Press
[2] 웹사이트 Dakyu (Ancient Japanese polo) http://www.kunaicho.[...] The Imperial Household Agency 2019-03-20
[3] 서적 Sport in Asian Society: Past and Present Routledge
[4] 서적 The Samurai Swordsman: Master of War Tuttle publishing
[5] 서적 Japanese Sports: A History University of Hawaii Press
[6] 서적 Sport As Symbol: Images of the Athlete in Art, Literature and Song McFarland
[7] 서적 虎尾達哉『古代日本の官僚 天皇に仕えた怠惰な面々』 中公新書
[8] 서적 『武市佐市郎集第五巻 風俗事物編』 高知市民図書館
[9] 문서 발해고(渤海考)
[10] 서적 발해고 홍익출판사
[11] 기록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 12년 9월 21일)
[12] 뉴스 전 조선 얼레공대회 기사 내용 동아일보
[13] 뉴스 충남 아산시의 '성웅 이순신축제 조선 시대 무과 시험은 어땠을까 -제47회 아산 성웅 이순신 축제 중 무과시험 재현 및 마상무예 시범 소식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4-22
[14] 뉴스 OhmyNews 세종도 밤을 새워 놀게 한 조선시대 공놀이 [푸른깨비의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⑧] 격구와 격방에 대해 아시나요? http://www.ohmynews.[...] OhmyNews 2007-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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