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의 당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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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원의 당금은 1194년부터 1202년까지 남송 시대에 일어난, 주희와 그의 학문인 정학(주자학)에 대한 탄압 사건이다. 한탁주가 권력을 잡고 주희를 비판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주희는 관직에서 물러나고 그의 학문은 '위학'으로 규정되어 배척되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 권력 투쟁과 학문적 이념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주자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주희는 명예를 회복했지만, 주자학은 중국 사회에서 20세기까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다른 학문들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다.
경원의 당금은 크게 세 시기로 전개되었다.
경원의 당금과 관련된 주요 인물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주희를 중심으로 한 정학(주자학) 관련 인물들, 한탁주와 그 측근들, 그 외 기타 인물들이다.
2. 전개 과정
2. 1. 초기 배경 (11세기 ~ 1194년)
정호, 정이 형제가 활동하던 11세기에도 이미 정학에 대한 비판과 탄압은 존재했다. 당시는 왕안석의 신법을 둘러싼 구법당과 신법당의 대립, 구법당 내부의 분열 등이 정학 탄압의 배경이 되었다.[1] 진회 집권 시기(1144년 ~ 1155년)에도 정학은 '전문지학'으로 탄압받았다.[1]
2. 2. 경원의 당금 (1194년 ~ 1202년)
1194년(소희 5년) 재상 조여우와 외척 한탁주가 공모하여 남송 광종을 퇴위시키고 태자를 영종으로 즉위시켰다. 영종은 즉위한 뒤 주희를 수도 임안으로 불러 시강에 임명했으며, 이어서 조산랑(정7품) 환장각시제가 되었다. 주희는 가끔씩 영종을 위해 강의를 했는데, 한편으론 외척 한탁주가 영종의 측근으로서 세력을 늘려가고 있었다. 주희는 영종에게 측근의 폐해를 경고하며 비밀리에 한탁주를 비판했고, 조여우에게도 한탁주를 실권이 없는 명예직으로 승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여우는 주희의 제안을 무시했고, 결국 이 얘기는 한탁주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2][3] 영종도 주희의 학식은 인정했지만, 정치적 능력에 대해선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주희는 윤10월 시강이 된 지 49일 만에 시강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195년(경원 원년) 2월 조여우도 재상직에서 경질당했다.
주희와 조여우의 파면에 대해 한탁주를 비판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주희의 학문적 입장에 부정적이던 사람들은 주희의 파면을 옹호하기도 했다. 특히 한탁주의 신뢰가 두터워 고관에 이른 경당・하담・유덕수・호굉 등 4인방을 비롯해 이목・심계조・고문호 등이 주희의 탄핵에 앞장섰던 인물들이었다.
1195년 4월, 주희와 조여우의 옹호자로서 한탁주를 통렬히 규탄한 여조검이 유배를 갔다. 6월에는 유덕수가 주희의 학문의 진위를 감안하여 사정을 변별해야 한다고 상주했고, 7월에는 하담이 정학은 공자와 맹자의 도에서 벗어난 것이라 주장하며 악한 자를 관직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상주했다. 11월 조여우가 모반 의혹을 받아 유배되었고, 1196년(경원 2년) 1월 조여우의 전임 재상이었던 유정도 위학의 무리를 조정에 끌어들인 계기가 됐다는 이유로 규탄받았다. 이후에도 주희의 학설이나 관련된 학문을 위학으로 규정하고 과거 등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1196년 12월, 감찰어사 심계조는 주희에게 6개의 큰 죄가 있다며 탄핵했다. 그 내용으로는 ▲어머니께 효를 다하지 않았다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황제에게 불경한 태도를 취했다 ▲효종의 능묘를 정할 때 채원정・조여우와 함께 이론을 제기해 국가에 불충했다 ▲조여우와 함께 간신의 무리를 모아 조정을 우롱하고 모욕했다 ▲제자와 함께 도당을 만들었다 ▲사찰 부지에 학교를 이전하고 공자상과 불상을 모두 훼손시켰다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심계조는 주희에게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구체적인 예를 들었다. 심계조가 주장한 것들의 대부분은 황당무계한 것이었지만,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계속 사퇴하는 등 비판받은 사항도 포함되어 있었기에[6] 주희는 이를 모두 부정하기 힘들었고, 결국 26일 삭탈관직 처분을 받았다.[7]
이후에도 좌승상이 된 경당을 중심으로 탄압이 이루어져 1197년(경원 3년) 2월 위학의 당인을 중앙 관직에서 배제하기로 했고, 12월에는 주희와 조여우 등 59명을 위학역당의 무리로 규정해 역시 관직에서 배제했다. 1198년(경원 4년) 5월 12일 회예(毁譽)를 도치하고 국시를 기울게 하고 인심을 현혹시킨다고 하여 위학을 금지하는 조칙이 발표되었다. 이 조칙은 고문호가 초안을 작성했다고 알려졌는데, 정학과 주희에 비판적이고 반감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훌륭하게 표현한 문장으로 한탁주 역시 여기에 공감했다고 한다. 이 조칙을 계기로 경원 원년 이래 지속된 정학에 대한 탄압은 최고조에 달했다. 69살이 되었던 주희는 1198년 12월 늙었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길 청했고, 1199년(경원 5년) 4월 수리되었다. 이후 주희는 다음 해인 1200년(경원 6년) 3월 향년 71살로 생을 마감했다.
주희가 사망하자 한탁주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주희에 대한 탄압을 지지한 사람들 중에는 한탁주에 동조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주희와 학문상 대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한탁주는 학문과는 연이 없는 무관 출신으로, 정학과 주희의 학문을 탄압했던 것도 주희와 조여우가 자신을 가볍게 여긴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따라서 주희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자 한탁주는 더 이상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장효백이 훗날 정치 보복의 명분이 될 수 있다는 충고를 하기도 하는 등 자신이 정치적으로 공격당할 것을 우려했다. 때마침 1199년 2월 호굉이 파면당하자 이후 경당·하담·유덕수도 모두 사망하거나 파면되었고, 한탁주는 금나라를 정벌하는 것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했다. 1202년(가태 2년) 무렵부터는 당금이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했고, 처분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주희와 관계가 깊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복직을 인정받았다.
2. 3. 당금 이후 (1202년 ~ )
한탁주|한탁주중국어가 암살되고 사미원이 집권했는데, 사미원은 사대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고자 정학을 존숭하는 정책을 펼쳤다.[8] 1227년(보경 3년) 주희는 태사로 추증되고 신국공 작위를 받아 명예가 회복되었다.[8] 1241년(순우 원년) 1월 남송 이종은 공자묘에서 왕안석을 배제하고 주희를 종사하라는 칙서를 내렸다.[8] 이후 정학에서 발전한 주자학은 국가 공인 학설이 되었고, 과거시험에서 주자학 이외의 학설은 배제되었다. 그 후 중국 사회는 20세기 초까지 주자학에 기초한 사상 통제가 이루어졌고, 주희나 그 학통으로부터 비판받은 학자・학설, 주자학에 이의를 제기한 학자·학설은 공식 석상에서 배제되었다.[9]
3. 주요 인물
정학(주자학) 관련 인물 한탁주와 그 측근 기타 인물
3. 1. 주희와 정학(주자학) 관련 인물
주희는 정학(주자학)을 집대성했으며, 경원의 당금의 중심인물이었다.[1] 정호와 정이 형제는 정학의 창시자였다.[1] 장재는 정호, 정이 형제의 맹우로, 진회 시기 '전문지학'으로 함께 탄압받았다.[1] 조여우는 주희의 정치적 동지로, 함께 탄압받았다.[6] 여조검은 주희와 조여우를 옹호하다 유배되었다.[6] 채원정은 주희의 제자로, 효종 능묘 문제로 함께 탄핵되었다.[6]
3. 2. 한탁주와 그 측근
한탁주는 경원 연간에 당금을 주도한 외척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주희와 정학을 탄압했다.[1] 경당, 하담, 유덕수, 호굉은 '4인방'으로 불리며 주희 탄핵에 앞장섰다.[1] 심계조는 주희에게 6가지 죄목을 들어 탄핵했고,[6] 고문호는 '위학 금지' 조칙의 초안을 작성했으며,[1] 이목 역시 주희 탄핵에 가담했다.[1]
3. 3. 기타
왕안석은 신법을 추진하여 구법당과 대립하였다.[1] 소식, 소철 형제는 소학(蘇學)의 중심인물이었으나, 구법당 내부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진회는 남송 초기 재상으로, 소흥 14년(1144년)부터 그가 죽은 소흥 25년(1155년)까지 정호, 정이 형제의 맹우였던 장재의 학설과 정학을 '전문지학'으로 탄압하였다.
왕회는 주희를 조정에 복귀시켰으나, 주희가 왕회의 친척인 당중우를 탄핵하면서 갈등이 발생하였다.[4] 이 사건으로 정병이 주희를 비판하고, 이는 정학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경원의 당금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5] 유정은 조여우 이전 재상이었는데, '위학의 당'을 조정에 끌어들였다는 이유로 규탄받았다.[6] 장효백은 한탁주에게 당금의 정치적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사미원은 한탁주 사후 집권하여 정학 존숭 정책을 추진하였다. 남송 영종은 주희를 시강에 임명했으나, 그의 정치적 능력에 의문을 품고 파면하였다.[2][3] 남송 광종은 조여우와 한탁주에 의해 퇴위당했다. 남송 이종은 주희를 공자묘에 종사하도록 명하였다.[8] 남송 효종의 능묘 문제로 주희가 탄핵되기도 하였다.[7]
4. 평가 및 영향
경원의 당금은 정호, 정이 형제가 살아있을 때부터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는 구법당으로서 처분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1] 왕안석 사후 구법당 정권에서도 소식, 소철 형제의 학설과 대립하며 구법당 내분이 이어졌다. 남송 시대 진회 집권기(소흥 14년(1144년)~소흥 25년(1155년))에는 정학과 장재의 학설이 "전문지학"으로 탄압받았다.
주희는 청렴하고 강직하여 당시 정치, 특히 지도층을 비판하고 황제의 임관 요청을 자주 사퇴했다. 조정에서는 주희의 이상주의적 학풍을 비판하면서도 명성이 높아 계속 초빙해야 하는 모순에 처했다.[2][3] 순희 8년(1181년) 재상 왕회가 주희를 제거 양절동로 상평차염공사에 임명했으나, 주희가 왕회의 친척 당중우를 탄핵하면서 왕회와 이부상서 정병을 격노하게 했다.[4][5] 이 사건은 정병의 주희 비판에서 정학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되어 경원당금의 배경이 되었다.
경원 4년(1198년) 5월 12일, "훼손과 칭찬을 뒤바꾸고 국시를 기울게 하며 뭇사람의 마음을 미혹했다"는 이유로 위학 금지 조칙이 내려졌다. 고문호가 초안을 작성한 이 조칙은 정학과 주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아 한탁주의 공감을 얻었고, 정학 탄압은 최고조에 달했다.
4. 1. 정치적 측면
소희 5년(1194년), 조여우와 한탁주 등이 광종을 퇴위시키고 영종을 즉위시키는 과정에서 주희는 임안에 들어가 영종의 스승이 되었으나, 한탁주를 비판하고, 영종 또한 주희의 정치적 능력에 회의를 품게 되면서 49일 만에 물러났다.[2][3] 이후 한탁주는 주희와 그의 학문을 비판하는 세력들을 옹호하며 정치적 탄압을 가했다.경원 원년(1195년), 주희와 조여우의 파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한탁주의 신임을 받는 경당, 하담, 유덕수, 호굉 등은 주희와 그의 학문을 비판하며 한탁주를 옹호했다.[6] 이들은 주희의 학설을 "위학"으로 규정하고, 과거 시험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경원 2년(1196년) 12월, 심계조는 주희를 불효, 불경, 불충 등 6가지 죄목으로 탄핵했고,[7] 주희는 관직에서 물러나는 처분을 받았다. 이후에도 탄압은 계속되어, 경원 3년(1197년)에는 위학 관련 인물들을 중앙 관직에서 배제하고, 59명을 "위학역당"으로 규정하여 관직에서 쫓아냈다. 경원 4년(1198년)에는 위학을 금지하는 조칙이 내려져 탄압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주희 사후 한탁주는 당금에 대한 반감을 우려하여 태도를 바꾸었고, 가태 2년(1202년)에는 당금이 완화되어 처분받은 자들 대부분이 복직되었다. 이후 사미원은 정학을 존중하는 정책을 폈고, 보경 3년(1227년) 주희는 명예를 회복했다. 순우 원년(1241년) 이종은 공자묘에 주희를 모시도록 명했고,[8] 이후 주자학은 국가 공인 학설이 되었다.[9]
4. 2. 사회적 측면
주자학이 국가 공인 학설로 자리 잡으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주자학적 가치관이 확산되었다.[9] 이는 사회 질서 유지에는 기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획일적인 사고방식을 강요하고, 사회적 다양성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과론적으로, 그 후의 중국 사회에서는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주자학에 기초한 국가에 의한 사상 통제가 이루어졌고, 주희와 그의 학통에 비판받았던 학자·학설, 그리고 주자학에 이의를 제기한 학자나 학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배제되었다.[9]4. 3. 사상적 측면
경원의 당금은 주자학 내부의 논쟁뿐만 아니라, 주자학과 다른 학문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9] 주자학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다른 학문들은 쇠퇴하거나 억압받는 경향을 보였다.[9]주희 사후, 그의 학통을 비판하는 학자나 학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배제되었다. 이는 주자학이 국가 공인 학설이 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9] 과거 시험에서도 주자학 이외의 학설은 배제되었으며, 이는 20세기 초까지 중국 사회에서 주자학에 기초한 국가의 사상 통제가 이루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9]
4. 4. 한국사와의 비교
경원의 당금은 조선 시대에 발생한 사화(士禍)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두 사건 모두 정치적, 사상적 이유로 특정 학파나 인물들이 탄압받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1]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다른 사상이나 학문은 억압받거나 소외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경원의 당금에서 정학이 탄압받은 것과 유사하게 볼 수 있다.[9]참조
[1]
문서
新法党と旧法党の対立の背景には法令そのものだけではなく、王安石の学説やそれを背景とした教育改革に対する反対論もあった。
[2]
서적
両朝綱目備要
1189-12
[3]
서적
宋史全文
1189-02
[4]
서적
宋史
[5]
문서
弾劾の背景として「[[陳亮]]と唐仲友の争いで前者の肩をもった」「唐仲友が蘇学の信奉者であった」などの諸説があるが真相は不明である。詳細は衣川、2006年 pp.282-286参照のこと。
[6]
문서
“病気”は表向きの口実で、実際には現実の宰相たちの政治に対して痛烈に批判を行ってきた朱熹の理想主義的言動に原因があり、反対派にも承知の事実であった。
[7]
문서
この処分によって朱熹は秘閣修撰という官職を取り上げられ、提挙南京鴻慶宮という祠官の地位を罷免された。
[8]
서적
宋史
1241-01
[9]
서적
衣川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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