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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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곽도는 후한 말, 삼국 시대의 인물로, 영천군 출신이다. 원소 휘하에서 참모로 활동하며, 기주 자사 한복을 설득하여 원소에게 기주를 넘기는 데 기여했다. 헌제를 맞이할 것을 원소에게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관도대전에서는 저수의 세력을 참언하여 분열을 야기했다. 원소 사후에는 원담을 지지하며 원상과의 내분을 일으켰고, 결국 남피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무능한 모사로 묘사되며, 원씨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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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곽도 |
한자 표기 | 郭圖 |
자 | 공칙 (公則, Gongze) |
출생지 | 허창 (許昌, Xuchang), 허난성 |
사망 년도 | 205년 |
사망 장소 | 난피현 (南皮縣, Nanpi County), 허베이성 |
직업 | 관료, 모사 |
2. 생애
영천군 출신 곽도는 후한 말 원소 휘하의 모사였다. 그는 원소 진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관도 대전 등 주요 전투에서 계책을 제시했다. 원소 사후에는 후계 다툼에서 원담을 지지했다.
사건 | 곽도의 역할 및 주장 | 결과 |
---|---|---|
191년 기주 획득 | 신평, 순심 등과 함께 한복을 설득. | 한복이 기주를 원소에게 양도. |
195년 헌제 옹립 논쟁 | 원소에게 헌제 옹립 반대. | 원소가 헌제 옹립을 포기하고,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여 정치적 정당성 확보. |
200년 관도 대전 | 백마 전투에서 순우경, 안량과 함께 유연 공격. 오소 전투에서 조조군 본진 급습 주장. | 백마 전투에서 안량, 문추 전사. 오소 전투에서 원소군 대패, 장합이 조조에게 투항. |
202년 원소 사후 | 신평과 함께 원담 지지. | 원소 가문의 내분 발생. |
203년 원담과 원상의 대립 | 원담에게 원상 선제공격, 조조와 일시적 동맹 제안. | 원담이 원상에게 패배하고 평원으로 후퇴. |
205년 남피 전투 |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패배. | 원담과 함께 조조군에게 죽임.[9] |
청주 출신 원담의 부하 왕수는 '''"흉신(凶臣)을 베고 원상과 화해하십시오"'''라고 원담을 설득했는데, 여기서 "흉신"은 곽도와 신평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2. 1. 초기 생애와 원소와의 만남
영천군 출신으로, 현재의 쉬창시, 허난성 주변 지역이다. 한복의 부하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기주의 자사였다. 음수 휘하에서 계리(計吏)를 지냈고, 장중, 종요, 순욱, 장례(張禮), 두우(杜祐), 순유와 함께 조정에 천거되었다.[8] 이후 신평과 함께 원소에게 임용되었다. 같은 군 출신인 곽가는 원소를 떠날 때 신평과 곽도에게 원소의 결점을 이야기했다고 한다.초평 2년(191년), 곽도는 장도, 순심, 고간, 신평과 함께 한복을 설득하여 기주를 원소에게 넘겼다.
2. 2. 헌제 옹립 논쟁
195년, 곽도는 헌제에게 사자로 파견되었다. 기주로 돌아오자마자 원소에게 헌제를 맞이할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헌제전(獻帝傳)》과 《후한서(後漢書)》 원소(袁紹)전에 따르면 이는 저수의 계책이며 곽도는 오히려 순우경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8]저수는 원소에게 황제를 옹립하여 꼭두각시로 삼고 다른 군벌들을 통제할 것을 조언했다. 원소가 동의하고 황제 구출을 위해 군대를 파견하려 하자, 곽도는 반대하며 헌제가 원소를 통제할 것이라 주장했다. 원소는 이에 설득당해 황제를 구출하지 않았다. 그 결과, 조조가 헌제를 자신의 수도 쉬창으로 데려가 황제의 이름으로 조서를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원소를 비난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2. 3. 관도대전에서의 역할
200년 2월, 관도 대전이 시작되자 곽도는 순우경, 안량과 함께 백마에 주둔한 유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조조군의 순유의 계략에 의해 안량, 문추 두 장수를 잃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저수가 병을 핑계로 황하를 건너려 하자 원소는 이를 원망하여 저수의 병력을 곽도에게 편입시켰다.[8]같은 해 10월, 원소는 순우경에게 명하여 오소에서 군량을 지키게 했지만, 조조는 허유로부터 이 정보를 입수하고 오소를 급습했다. 장합은 "조조의 군세는 강하니 반드시 순우경을 격파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끝입니다. 급히 구원해야 합니다"라고 진언했지만, 곽도는 반대하며 "조조군의 본진을 공격하면 조조는 물러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하지 않아도 해결됩니다"라고 주장했다. 장합은 "조조군의 본진은 견고하여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라고 반론했다. 결국 원소는 양쪽 의견을 어중간하게 채택하여, 기병으로 오소를 구원하게 하고, 장합과 고람에게 중장 보병을 이끌고 조홍이 지키는 본진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오소에 대한 구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순우경 등은 조조군에게 격파당했으며, 오소의 군량 창고도 파괴되었다.[9]
『삼국지』 위서 장합전에 따르면, 이때 곽도가 책임 추궁을 두려워하여 장합에 대해 참언을 했기 때문에, 장합은 어쩔 수 없이 조조에게 항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지』 위서 무제기나 원소전에 따르면, 장합 등이 순우경의 패배를 듣고 항복했기 때문에 원소군은 궤멸되었다고 한다. 배송지가 장합전의 주석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장합전과 다른 전에서는 시계열에 모순이 발생한다. 『삼국지』 위서 순유전에서는 장합 등의 항복을 의심하는 조홍에게 순유는 "장합은 자신의 계략이 채택되지 않은 것을 분개하여 항복한 것입니다. 어째서 의심하는 것입니까"라고 말했다.
이 패전으로 심배의 아들 두 명이 조조군에게 사로잡혔다. 맹대, 장기, 곽도, 신평은 심배의 세력이 너무 강대하고, 아들의 상황으로 보아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심배는 실각했고, 원소는 맹대를 감군으로 삼아 업을 지키게 했다. 후에 심배는 봉기의 변호로 복권되었다.
2. 4. 원소 사후의 내분과 최후
202년, 원소가 사망하자 곽도는 신평과 함께 장남 원담을 후계자로 추대했다. 그러나 곽도, 신평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심배와 봉기는 삼남 원상을 지지하여, 원씨 가문 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10] 203년, 곽도와 신평은 원담에게 원상을 선제공격하도록 부추겼으나, 원상의 반격으로 평원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곽도는 원담에게 조조와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했고, 원담은 이를 받아들였다.[9]조조와 원상이 싸우는 동안, 원담과 곽도는 기주를 공격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205년 초, 남피 전투에서 조조군에게 패하여 곽도는 원담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9]
3. 삼국지연의에서의 곽도
《삼국지연의》에서는 무능한 모사로 묘사되며, 원씨 멸망의 주범으로 다루어진다.
관도 대전 전초전에서 문추가 관우에게 당했을 때, 심배와 함께 유비를 처형할 것을 간언했지만, 유비는 적당한 변명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유비가 형주(荊州)의 유표에게 가겠다고 했을 때에는 그를 붙잡을 것을 원소에게 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유비가 돌아오지 않아 원소가 유비를 토벌하려 하자, 손책과 동맹을 맺어 조조를 치도록 진언하였고, 이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그 후의 관도대전이나 원씨 가문의 내분에 대해서는 사실(史實)과 거의 같다. 다만, 남피 전투에서는 악진의 화살에 맞아 성의 해자로 굴러떨어져 죽는 것으로 나와 있다.
4. 평가
심배가 충의를 다해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것과 관도 전투에서의 곽도의 소행이 악했던 탓에, 일반적으로 원씨 내분에서도 곽도가 악인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원소의 명확한 후계자 지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심배 등은 원소 생전의 총애를 이유로 원상을 밀었고, 『후한서』 원소전에서는 원소의 유언까지 위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같은 기록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원담을 후계자로 지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의 대응에서 곽도는 심배를 미워하여 원씨 형제의 대립을 부추겼고, 원담에게 원상에 대한 선제 공격을 사주하는 등 여전히 문제적인 행동이 많았다.
『후한서』 원소전에서는 노골적으로 곽도를 지목하여 기록하고 있다. 형주의 유표가 원씨 내분 당시 왕찬에게 화해의 편지를 쓰게 했는데, 그 편지에는 "변고는 신평·곽도에 의해 일어났고, 재앙은 동포들에게 미쳤다고 들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또한 심배도 원담에게 편지를 써서, "어째서 흉악한 신하 곽도 따위에게 엉뚱한 짓을 하게 하고, 왜곡된 말로 아첨하게 하며, 친교를 혼란시키는가"라고 적었다.
참조
[1]
서적
九州春秋
[2]
서적
後漢書
[3]
서적
三国志
[4]
서적
三国志
[5]
문서
[6]
서적
漢晋春秋
[6]
서적
魏略
[7]
서적
英雄記
[8]
서적
후한서(後漢書)
[9]
서적
삼국지
[1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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