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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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합은 후한 말,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군으로, 관도 전투에서 조조에게 투항하여 그의 휘하에서 활약했다. 그는 공손찬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동관 전투, 한중 공방전 등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보였다. 특히 제갈량의 북벌 시기, 가정 전투에서 마속을 격파하는 등 촉한과의 대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31년 제갈량의 4차 북벌 중 목문에서 촉군에게 매복당해 전사했으며, 조조, 조비, 조예에 이르기까지 위나라 군주들에게 칭찬과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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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합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인물 정보 | |
![]() | |
| 이름 | 장합 |
| 로마자 표기 | Zhang He |
| 출생 | 생년 미상 |
| 사망 | 231년 7월 또는 8월 |
| 사망 장소 | 간쑤성 톈수이시 친저우구 |
| 자 | 준예 |
| 시호 | 장후 (壯侯) |
| 작위 | 모후 (鄚侯) |
| 출신지 | 허베이성 마오저우 |
| 자녀 | 장웅 기타 아들 3명 |
| 관직 | |
| 섬긴 세력 | 한복, 원소, 조조, 조비, 조예 |
| 원소 휘하 관직 | 영국중랑장 (寧國中郎將) |
| 조조 휘하 관직 | 탕구장군 (盪寇將軍) (215년 ~ 220년) |
| 조비 휘하 관직 | 좌장군 (左將軍) (220년 ~ 229년) |
| 조예 휘하 관직 | 정서거기장군 (征西車騎將軍) (229년 ~ 231년 7월 또는 8월) |
2. 생애
장합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한복 휘하에서 군사마(軍司馬)로 복무했다.[3] 한복이 몰락한 후에는 원소에게 귀순하여 교위(校尉)에 임명되었고, 공손찬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영국중랑장으로 승진했다.[4]
200년, 관도대전의 오소 공방전에서 장합은 조조군이 강하므로 순우경(淳于瓊)에게 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곽도(郭圖)는 조조의 본진 공격을 주장했고, 원소는 곽도의 의견을 따랐다.[7][8][9] 오소가 조조에게 함락되고 순우경이 패배하자, 장합은 고람(高覽)과 함께 원소를 배신하고 조조에게 투항하여 원소군이 대혼란에 빠져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다.[10] 조조는 장합의 귀순을 기뻐하며 오자서, 미자계, 한신의 고사를 인용하며 그를 칭찬했다.[12]
배송지는 장합의 귀순 시점에 대한 기록이 장합의 열전과 조조 및 원소의 열전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다. 조조와 원소의 열전에는 장합이 오소 함락 전에 조조에게 귀순하여 원소군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장합의 열전에는 곽도의 모함으로 인해 원소 패배 후에 귀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3]
조조 휘하에서 장합은 원상과 원담과의 싸움, 오환과의 전투, 동래군(현재의 옌타이와 웨이하이, 산둥성 일대) 해적 토벌, 적벽 대전 이후 진란과 매성의 반란 진압 등에서 활약했다.[14][15][16][17] 악진과 함께 옹노를 포위하여 격파하기도 했다.[15] 당시 장합은 우금, 장료, 악진, 서황과 함께 명장으로 칭송받았다.
215년 조조가 한중군의 장로를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을 때, 장합은 주령과 함께 저족을 격파하여 본군이 이동할 길을 확보했다. 장로는 조조에게 항복했고, 장합은 하후연과 함께 한중 수비를 맡았다. 이후 장합은 촉의 파군 지역으로 진출했지만, 장비에게 패했다.[22][23]
219년, 황충이 하후연을 전사시키자, 위군은 혼란에 빠졌으나 곽회가 장합을 총대장으로 선별했다.[54] 장합은 전군을 격려하여 동요를 가라앉혔고, 이후 조조는 한중에서 철수했다. 장합은 한중과 장안 사이에 있는 진창(陳倉)에 주둔했다.[27]
228년 가정 전투에서 촉한 제갈량이 이끄는 북벌군의 선봉대장 마속을 산 아래에서 포위한 뒤 식수로를 끊고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고, 촉한군은 철수했다. 그리고 촉한군에게 항복한 천수(天水), 남안(南安), 안정(安定)의 삼군을 평정했다. 이 공로로 식읍이 1,000호 증가하여, 이전과 합쳐 4,300호가 되었다.
231년, 제갈량이 이끄는 촉한의 군대가 기산에서 철수할 때, 사마의는 장합에게 추격을 명령하였다. 장합은 반대했으나 사마의는 듣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출격한 장합은 촉군의 복병에게 공격을 받아 교전 중 오른쪽 무릎(《위략》에서는 오른쪽 장딴지)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39] 당시 위나라의 황제 조예는 역전의 노장인 장합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여 '''장후'''(壯侯)라는 시호를 내렸다.[40]
2. 1. 초기 생애와 관도대전
황건적의 난 발발 후, 한복 휘하에서 군사마로 복무했다.[3]한복이 몰락한 후, 원소에게 귀순하여 교위에 임명되었다. 공손찬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영국중랑장으로 승진했다.[4]
200년, 관도대전의 오소 공방전에서 장합은 조조(曹操)군이 강하므로 오소를 지키는 순우경(淳于瓊)에게 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곽도(郭圖)는 조조의 본진 공격을 주장했다. 장합은 조조군의 본진을 쉽게 함락할 수 없다고 반박했으나, 원소는 경기병만 오소로 보내고 대군으로 조조군 본진을 공격하게 했다.[7][8][9] 하지만 오소는 조조에게 함락되었고, 순우경은 패배했다. 장합은 고람(高覽)과 함께 원소를 배신하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이로 인해 원소군은 대혼란에 빠져 붕괴되었다.[10]
조조는 장합의 귀순을 기뻐하며, 오자서와 미자계, 한신의 고사를 인용하며 그를 칭찬했다.[12]
배송지는 장합의 귀순 시점에 대한 기록이 장합의 열전과 조조 및 원소의 열전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다. 조조와 원소의 열전에는 장합이 오소 함락 전에 조조에게 귀순하여 원소군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장합의 열전에는 곽도의 모함으로 인해 원소 패배 후에 귀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3]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조조는 장합의 항복을 매우 기뻐하며, 오자서의 고사를 언급하며 장합의 선택을 칭찬했다. 조조는 장합을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했다.[53]그 후 장합은 조조 휘하의 장군으로서 고람과 함께 원상과 원담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207년 오환과의 전투에서는 장료와 함께 선봉을 맡아 평적장군(平狄將軍)으로 승진했다.[14]
206년, 장합은 동래군(현재의 옌타이와 웨이하이, 산둥성 일대)에서 관승(管承)이 이끄는 해적 세력 토벌에 참여했다.[15]
209년, 적벽 대전 이후, 진란(陳蘭)과 매성(梅成)이 육현(현재의 루안, 안후이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장합은 장료의 부관으로 참전하여 반란을 진압했다.[16][17]
204년에는 업 공략과 발해군의 원담 공격에 종군했고, 악진과 함께 옹노를 포위하여 격파했다.
207년, 오환과의 유성 전투(백랑산 전투)에서는 장료와 함께 선봉을 맡아 평적 장군으로 승진했다. 별동대로 동래군의 관승을 토벌하기도 했다.
208년, 조조의 형주 정벌에 참여한 장합은 조엄의 통솔을 받았다. ("조엄전")
209년, 장합은 장료의 지휘 하에 진란, 매성 토벌에 참여했다.
당시 장합은 우금, 장료, 악진, 서황과 함께 명장으로 칭송받았으며, 조조의 정벌에 교대로 참여하여 선봉과 전군을 맡았다. ("우금전")
2. 3. 한중 공방전과 촉한과의 대결
215년 조조가 한중군의 장로를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을 때, 장합은 주령과 함께 저족을 격파하여 본군이 이동할 길을 확보했다. 장로는 조조에게 항복했고, 장합은 하후연과 함께 한중 수비를 맡았다. 장합은 하후연에게 촉 정벌을 건의했지만 조홍의 반대로 군령장을 쓴 후에야 3만 군을 이끌고 촉의 파군 지역으로 진출했다. 파동(巴東), 파서(巴西) 두 군을 항복시키고 주민들을 한중으로 이주시켰지만, 촉에서 출전한 장비에게 패했다. 장합은 고지대를 선점했으나, 산 아래에 진을 치고 보급로를 끊은 장비에게 패해 전군을 잃고 곽회와 함께 몇몇 부하만 데리고 한중으로 돌아갔다. 출전 전 썼던 군령장으로 처형될 위기에 놓였으나, 조조가 직접 사면령을 내려 처벌을 면했다.[22][23]219년, 황충이 하후연을 전사시키자, 위군은 혼란에 빠졌다. 이때 하후연의 막료였던 곽회가 “장합 장군은 국가의 명장으로, 유비도 두려워하고 있다. 이 사태는 장합 장군 없이는 타개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장합을 총대장으로 선별했다.[54] 장합은 전군을 격려하여 동요를 가라앉혔고, 모든 장수는 장합의 명령에 따랐다. 이후 조조가 직접 한중에 도착해 유비군과 대치했지만, 큰 충돌은 없었고 조조는 한중에서 철수했다. 장합은 한중과 장안 사이에 있는 진창(陳倉)에 주둔했다.[27]
228년 가정 전투에서 촉한의 제갈량이 이끄는 북벌군의 선봉대장 마속이 산에 포진하고 요새를 세우지 않자, 장합은 마속을 산 아래에서 포위한 뒤 식수로를 끊고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고, 촉한군은 철수했다. 그리고 촉한군에게 항복한 천수(天水), 남안(南安), 안정(安定)의 삼군을 평정했다. 이 공로로 식읍이 1,000호 증가하여, 이전과 합쳐 4,300호가 되었다.
2. 4. 제갈량과의 대결과 최후
231년, 제갈량이 이끄는 촉한의 군대가 기산에서 철수할 때, 사마의는 장합에게 추격을 명령하였다. 《위략》에 따르면, 장합은 “군법에도 적을 포위할 때에는 항상 한쪽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궁지에 빠져 퇴각하는 군대를 추격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으나 사마의는 듣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출격한 장합은 촉군의 복병에게 공격을 받았다. 교전 중 오른쪽 무릎(《위략》에서는 오른쪽 장딴지)에 화살을 맞아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39] 당시 위나라의 황제 조예는 역전의 노장인 장합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여 '''장후'''(壯侯)라는 시호를 내렸다.[40]조예 시기에 장합은 형주에 배치되어 사마의와 함께 손권의 부장 유아를 격파하는 등 동오와의 전투에서 공적을 세웠다. 228년, 촉한의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하자 (북벌), 장합은 특진의 지위를 받고 대촉 전선에 다시 투입되었다.
가정 전투에서 마속을 패주시키고 반란을 일으킨 남안, 천수, 안정 지역을 조진과 함께 평정했다. 그 공로로 장합은 식읍 1,000호를 더 받아 이전과 합쳐 4,300호가 되었다. 장합은 관중의 여러 군을 지휘하여 다시 형주로 돌아가 사마의의 오나라 정벌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장합이 도착했을 때는 겨울이라 수위가 낮아 대형 선박을 운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장합은 되돌아가 방성에 주둔했다.
조진의 예측대로 진창 전투가 시작되자, 장합은 명제로부터 역마를 지급받고 수도로 돌아왔다. 명제는 직접 낙룡구까지 나가 장합을 연회로 대접하고, 남북 군병 3만 명과 호위를 위한 근위병을 나누어 주었다. 장합은 밤낮으로 남정까지 진군했고, 제갈량이 물러간 후 수도로 소환되어 정서 거기장군[45]에 임명되었다.
231년의 4차 북벌에서 제갈량이 지휘하는 촉군이 다시 기산으로 진출하자, 장합은 조서를 받아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략양에 도착했다. 제갈량은 기산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돌려보냈다. 장합은 이를 추격하여 목문에 이르렀고, 제갈량 군과 교전 중 화살을 오른쪽 무릎에 맞아 전사했다.[46][47] 《삼국지》 왕평전에 따르면, 이전에 장합은 왕평이 지키는 진지를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고 한다.[48][49] (기산 전투).
명제와 진군은 역전의 명장인 장합의 전사를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신비전」이 인용한 《위략》). '''장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시 4년 (243년) 가을 7월, 조방(제왕)은 조칙을 내려 조조의 묘정에 공신 20명을 제사 지냈는데, 그 중에는 장합도 포함되어 있다 (「제왕기」).
3. 평가
장합은 임기응변에 능숙하고, 진영 통솔에 뛰어났으며, 상황과 지형을 고려한 계략을 잘 세워 제갈량을 비롯한 촉나라 장병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고 한다.[42] 또한 무관임에도 유학을 존중하여, 고향 출신의 유학자 비담을 추천하여 조예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42]
유비가 경계한 위나라 장수는 관우를 격파한 악진과 직접 대치했던 장합이었으며, 유비 사후에도 촉나라 장병들은 모두 장합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진수는 조조 재임 시절 가장 공적이 컸던 장수로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을 꼽았으며, 장합은 그 중 네 번째였다. 진수는 장합이 변화에 능숙하여 칭찬받았다고 평가하면서도, 장료나 서황처럼 그 명성을 뒷받침할 상세한 기록이 없는 것은 기록 누락 때문일 것이라고 언급했다.
남송의 호삼성은 장합이 아군이었던 사마의에게서도 두려움을 받은 명장이었다고 평가했으며, 진순신과 와타나베 요시히로도 같은 평가를 내렸다.
4.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비고 |
|---|---|---|
| 장남 | 장웅 |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아 모후(鄚侯)가 됨. |
| 차남 | 불명 | |
| 삼남 | 불명 | |
| 사남 | 불명 | |
| 오남 | 불명 | 관내후(關內侯) 작위를 받음. |
장합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 조예가 아버지 장합이 위나라에 공헌한 것을 기려 제후로 봉했다.[1]
5. 기타
장합은 변화의 법칙을 잘 이해하고, 진영 통솔에 능숙했으며, 상황과 지형을 고려하여 계략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제갈량을 포함한 촉나라 장수들은 모두 장합을 두려워했다. 또한 유학자를 존중하여 큰일이 있을 때마다 자기 고향 사람인 비담(卑湛)을 추천하기도 했다.
5. 1. 정서거기장군(征西車騎將軍)에 대한 논란
장합이 임명된 정서거기장군이라는 관위는 《삼국지》 장합전(張郃傳)에서만 등장하는 것으로, 정동거기장군(征東車騎將軍)이나 정남거기장군(征南車騎將軍) 등의 예는 찾아볼 수 없다. 그 때문에 이 기술에 대해서는 '표기가 틀렸다', '정서의 명을 잇는 거기장군(車騎將軍)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등의 지적이 있다. 즉, 진서(晋書) 선제기(宣帝紀)에서는 장합을 거기장군(車騎將軍)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5. 2. 대중문화 속 장합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삼국무쌍''과 ''무쌍 오로치''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하며, 전략 게임 시리즈인 ''삼국지''의 모든 작품에도 등장한다.[43]수집용 카드 게임 ''매직 더 개더링''의 ''포털 삼국지'' 세트에는 "위 장합(張郃), 위 장군(Wei General)"이라는 이름의 카드가 있다.[43]
토탈 워: 삼국에서는 고유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도 전투 때 등장하여 정사(正史)와 마찬가지로 조조에게 투항한다. 한중 공방전에서는 장비의 계략에 고전하지만 뇌동을 쳐 물리치기도 한다. 가정에서는 사마의의 지휘 아래 왕평, 마속을 격파했다. 제갈량의 제4차 북벌에서는 목문도에서 촉군 복병의 일제 사격에 쓰러진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삼국지』에서는 자(字)가 "'''준의'''"로 되어 있다. 또한 요시카와의 기억 착오로 3번이나 전사한다 (여남에서 관우에게, 장판에서 조운에게, 목문도에서 촉군에게 죽는다).
드라마 『삼국 Three Kingdoms』에서는 검각도에서 강유의 궁병에게 사살된다.
참조
[1]
서적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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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14]
서적
Sanguozhi
[15]
서적
Sanguozhi
[16]
서적
Sanguozhi
[17]
서적
Sanguozhi
[18]
서적
Sanguozhi
[19]
서적
Sanguozhi
[20]
서적
Sanguozhi
[21]
서적
Sanguozhi
[22]
서적
Sanguozhi
[23]
서적
Sanguozhi
[24]
서적
Sanguozhi
[25]
서적
Weilüe annotation in Sanguozhi
[26]
서적
Sanguozhi
[27]
서적
Sanguozhi
[28]
서적
Sanguozhi
[29]
서적
Sanguozhi
[30]
서적
Sanguozhi
[31]
서적
Sanguozhi
[32]
서적
Sanguozhi
[33]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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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35]
서적
Sanguozhi
[36]
서적
Sanguozhi vol. 17
[37]
서적
Sanguozhi vol. 17
[38]
서적
Sanguozhi vol. 17
[39]
서적
Weilü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7
[40]
서적
Sanguozhi vol. 17
[41]
서적
Sanguozhi vol. 17
[42]
서적
Sanguozhi vol. 17
[43]
웹사이트
Zhang He, Wei General - Portal Three Kingdoms, Magic: the Gathering
http://store.tcgplay[...]
[44]
서적
魏志「杜襲伝」
[45]
서적
魏志「張郃伝」より。この官名は他に見えず、征東車騎将軍や征南車騎将軍なども例を見ない。そのためこの記述については、「誤植である」「征西の命を帯びた車騎将軍という意味である」などの指摘がある。なお『[[晋書]]』宣帝紀では張郃は車騎将軍と記述されている。
[46]
서적
『魏略』によると、司馬懿が張郃に追撃するように命じたが、張郃は「軍法にも敵を囲む際には必ず一方を開けよとある。撤退する軍を追撃してはならない」と反発した。しかし司馬懿は聞き容れず、止むを得ず出撃した張郃は、蜀軍の伏兵の攻撃に遇い、敵の射撃を受ける中で矢が髀に当たって死去したという。
[47]
서적
『太平御覧』巻291に引く『漢表伝』によれば、蜀軍は樹木の木肌を削って「張郃此の樹下に死せん」と大書し、その両側に強弩数千を伏せておいた。追撃軍がこの樹を見つけて不審に思い、張郃自ら上記の文章を読んだ途端、弩兵が一斉射撃し張郃を射殺したという。ただし、この内容は『史記』孫臏伝で、[[孫臏]]が[[龐涓]]を誘殺した際と全く同じものであり、物語を引き立たせるために過去の故事を引き写した可能性が高い。参照、渡邊義浩『諸葛亮像の変遷』p15(『大東文化大学漢学会誌』37,1998年)[http://www.ic.daito.ac.jp/~y-wata/prof/gyou/ronbun/g_r_12.pdf]。
[48]
서적
諸葛亮伝が注引く『漢晋春秋』によると曹真に代わって、魏軍の総司令官となっていた司馬懿が戦おうとせず、張郃は、大軍を率いているのにこれでは民の失望を買うと攻撃を進言したが司馬懿によって却下された。司馬懿は諸将から蜀軍を虎のように恐れていると笑われたことを病み、司馬懿はついに諸葛亮の軍を、張郃が[[王平]]の軍を攻撃したが、これを撃退され、司馬懿は大破されて甲首三千を失い陣を保持するために軍を引いた。
[49]
서적
南宋の[[胡三省]]によれば、司馬懿は張郃が自分より活躍することを恐れて妨害した。
[50]
서적
三国志(四)
講談社
1989-04-11
[51]
서적
三国志(五)
講談社
1989-04-11
[52]
서적
三国志(八)
講談社
1989-05-15
[53]
서적
장합과 고람이 순우경의 패배를 듣고 원소를 배반한 것은 《삼국지》의 무제기와 원소전에 따른 것이고, 이것은 장합전에 따른 것이다.
[54]
서적
(《위략》(魏略)에 따르면, 유비는 장합을 두려워하고, 하후연을 얕보았다고 한다. 하후연 전사 소식을 듣고 “대장은 쓰러졌다, 그렇다고 하여 다음의 수가 나오지 않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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