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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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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극단의 시대》는 1914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의 격동적인 시대를 다룬 에릭 홉스봄의 역사서이다. 1, 2차 세계 대전, 혁명, 대공황, 냉전, 사회 변화 등 20세기의 주요 사건들을 폭넓게 다루며, 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등 이념들의 부침과 예술, 대중문화의 변화를 분석한다. 홉스봄은 공산주의의 실패, 제국주의의 종말,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며, 미래에 대한 예측과 함께 자신의 역사관을 제시한다. 이 책은 홉스봄의 마르크스주의적 시각과 통계적 분석을 통해 20세기를 깊이 있게 통찰하지만, 비서구 사회에 대한 이해 부족, 자본주의에 대한 과소평가 등의 비판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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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 [서적]에 관한 문서
책 정보
제목극단의 시대: 1914-1991년의 짧은 20세기
원제The Age of Extremes,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
저자에릭 홉스봄
주제역사
장르역사
국가영국, 미국
언어영어
출판사마이클 조셉 (영국), 빈티지 북스 (미국)
출판일1994년
페이지 수640쪽
ISBN0-349-10671-1
OCLC33817813
이전 작품제국의 시대: 1875–1914

2. 제1부. 재앙의 시대 (1914~1945)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인류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폭력과 파괴를 경험했다.[1] 이 시기는 총력전, 세계 혁명, 경제 대공황, 자유주의의 몰락, 공동의 적에 맞선 투쟁, 예술의 변화, 제국의 종말 등 다양한 사건들로 점철되었다.[1]

2. 1. 세계 혁명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칼 마르크스가 예측했던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의 혁명이 아니었다. 홉스봄은 "자본주의는 그 중심지보다 약하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훨씬 더 쉽게 전복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라고 말한다.[6] 홉스봄은 러시아 내에서조차 혁명의 겉으로 보기에 "진보적인" 효과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혁명과 내전 이후 남은 것은 과거에 더욱 굳건히 뿌리내린 러시아였다... 실제로 국가를 지배한 것은 이전보다 평균적으로 교육 수준과 자격이 훨씬 낮은 크고 작은 관료주의의 밑바탕이었다"라고 평가한다.[7]

홉스봄은 국가 사회주의가 처음부터 자신이 지지한다고 주장한 사회주의와 국제주의적 비전을 배신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국가 사회주의는 항상 사회주의적 비전의 민주주의적 요소를 버렸다고 지적한다. 그는 "레닌은... 처음부터 자유주의적 방법은 러시아 혁명 경주에서 달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라고 설명한다.[8] 이러한 반자유주의는 매우 깊었다. 1933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를 굳건히 장악했을 때, "모스크바는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에게 사회민주주의가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주요 위협이 아니라는 제안을 철회하라고 주장했다."[9]

국제 혁명에 대한 지지와 관련하여, 홉스봄은 "실제로 일어난 공산주의 혁명들(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후에 중국)은 스탈린의 조언에 반하여 일어났다. 소련의 견해는 국제적으로나 각 국가 내에서 모두 전후 정치는 포괄적인 반파시스트 동맹의 틀 내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이 이 모든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1943년 코민테른을 해산하고 1944년 미국 공산당을 해산함으로써 이를 증명하려고 노력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분석한다.[10] 그는 또한 "중국 공산당 정권은 두 국가 간의 단절 이후 혁명 운동을 배신했다고 소련을 비판했지만, 제3세계 해방 운동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 기록은 없다"라고 덧붙인다.[11]

반면 홉스봄은 영원한 혁명에 대한 마오이즘적 교리에 우호적이지 않다. 그는 "마오는 투쟁, 갈등, 고강도 긴장이 삶에 필수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변치 않는 영속성과 조화를 고집하는 것이 바로 약점이었던 낡은 중국 사회의 약점으로의 퇴보를 막는다고 근본적으로 확신했다"라고 비판한다.[12] 홉스봄은 이러한 신념을 재앙적인 대약진 운동과 그 이후인 1959~1961년 중국 대기근으로 이어지는 직선으로 연결한다.[13]

홉스봄은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실패한 이유는 "...그 체제를 믿거나 그 체제에 충성심을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심지어 그것을 통치한 사람들조차도 그러했기 때문이다"라고 결론짓는다.[14][15]

2. 2. 경제적 암흑으로

호브스봄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대공황 시대를 겪은 우리는 순수 자유 시장의 정설이 당시에는 분명히 신뢰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의 세계적 불황을 다시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다시 한번 그 불황을 이해하거나 해결할 수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19]

그는 "우연히도, 자유 방임 경제에 가장 깊이 헌신한 정권들은 레이건의 미국과 대처의 영국에서처럼 때로는, 특히, 극도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민족주의적이었고 외부 세계를 불신했다. 역사가는 이 두 가지 태도가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20] 그는 소련 사회주의 붕괴 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는 중국 공산당이었으며, 서구 경영대학 강의와 경영 매뉴얼 저자들은(번창하는 장르의 문헌) 기업가적 성공의 비밀을 찾기 위해 공자의 가르침을 탐구했다"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21]

궁극적으로 그는 세계적 관점에서 자본주의가 국가 사회주의만큼이나 실패했다고 본다. "신고전파 경제학을 따라, 무제한적인 국제 무역이 빈곤국들이 부유국에 더 가까워질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은 역사적 경험뿐만 아니라 상식에도 반한다.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성공적인 수출 주도형 제3세계 산업화의 사례 – 홍콩, 싱가포르, 대만, 대한민국 – 는 제3세계 인구의 2% 미만을 차지한다)." (괄호는 원문 그대로)[22]

2. 3. 자유주의의 몰락

홉스봄은 파시즘이 철학적으로 존중받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며, "이성과 합리주의의 부적절성과 본능, 의지의 우월성에 전념하는 운동의 강점은 이론이 아니었다"라고 썼다.[23] 그는 무솔리니는 가정교사인 조반니 젠틸레 없이도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며, 히틀러는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지지 여부를 몰랐거나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23] 홉스봄은 파시즘의 대중적 매력이 기술관료적 업적에 대한 주장에 있다고 보았으며, "'무솔리니가 기차를 제시간에 운행하게 했다'는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옹호하는 속담 같은 주장이 아니었을까?"라고 말했다.[24]

그는 또한 "역사가들이 600만 명이 아니라 500만 명 또는 400만 명을 학살했다고 결론 내린다면 홀로코스트의 공포는 덜할까?"라고 썼다.[25]

2. 4. 1914~1945년의 예술

Modernism영어 미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개별적인 상표를 부여하기 위해 점점 더 필사적인 속임수를 연이어 사용했다. 예를 들어 벽돌이나 흙 더미에 개인의 이름을 추가하는 미니멀 아트, 너무 단명하여 영구적일 수 없도록 함으로써 상품이 되는 것을 막는 퍼포먼스 아트 등 절망의 선언문, 또는 투자를 위해 주로 구매했던 미술과 그 수집가들을 넌센스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들의 연속이었다.[31]

이러한 아방가르드로부터 임박한 죽음의 냄새가 풍겨 나왔다. 미래는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었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들이 주변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31]

2. 5. 제국의 종말

제1차 세계 대전은 국제 협상의 관례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비밀 외교'로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주로 전쟁 중 연합국들 사이에서 체결된 비밀 조약에 대한 반발이었다.[16] 볼셰비키들은 차르의 기록 보관소에서 이러한 민감한 문서들을 발견하고는 즉시 전 세계에 공개했다.[16]

1918년 이후의 실패한 평화협정은 20세기 말 우리가 알게 된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바이러스, 즉 시민 집단을 오로지 민족-국가적 또는 종교적 계보로만 분열시키는 것을 증폭시켰다.[17] 반식민주의 논리의 ''귀류법''은 팔레스타인의 극단적인 유대인 소수 집단이 독일(당시 비시 프랑스 통치하에 있던 다마스쿠스를 경유)과 협상하여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는 데 도움을 요청하려 한 시도였다. 그들은 이것을 시온주의의 최우선 과제로 여겼다. (이 임무에 연루된 한 급진주의자는 결국 이스라엘의 총리가 되었다: 이츠하크 샤미르.)[18]

3. 제2부. 황금기 (1945~1990)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하면서도, 경제 성장과 사회·문화적 변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였다. 특히, 20세기 후반에는 청소년 문화가 사회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버디 홀리, 재니스 조플린, 롤링 스톤스브라이언 존스, 밥 말리,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대중 스타들은 젊음을 대표했지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32]

홉스봄은 청소년 문화를 통해 20세기 후반 사회 질서의 변화를 분석했다. 그는 이 시기 청소년 문화가 이전과는 다른 세 가지 특징을 지녔다고 보았다.[33] 첫째, '젊음'이 성인기의 준비 단계가 아닌, 완전한 인간 발달의 최종 단계로 여겨졌다. 둘째, '선진 시장 경제'에서 청소년 문화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여, 부모가 자녀에게 배우는 것이 더 많아지는 세대 역할의 역전이 일어났다. 셋째, 놀라운 국제주의였다. 록 음악 가사에 쓰인 영어는 번역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서구 청소년 문화는 문화적 국수주의에 반대했다.

홉스봄은 20세기 후반의 문화 혁명이 사회보다 개인의 승리, 즉 과거에 인간을 사회적 구조로 엮었던 실들이 끊어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34] 이는 마거릿 대처의 '사회는 없고 개인만 있다'는 주장과 비슷하게 묘사된다.[27][35]

한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칼 마르크스가 예측했던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이 아니었다. 홉스봄은 "자본주의는 그 중심부보다 약하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훨씬 더 쉽게 전복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말했다.[6] 그는 국가 사회주의가 처음부터 자신이 지지한다고 주장한 사회주의와 국제주의적 비전을 배신했으며, 특히 사회주의적 비전의 민주주의적 요소를 버렸다고 비판했다.[8] 홉스봄은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실패한 이유는 결국 "...그 체제를 믿거나 그 체제에 충성심을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심지어 그것을 통치한 사람들조차도 그러했기 때문이다"라고 결론 내린다.[14][15]

3. 1. 문화 혁명

버디 홀리, 재니스 조플린, 롤링 스톤스브라이언 존스, 밥 말리, 지미 헨드릭스 등 여러 대중 스타들이 젊음을 대표하였으나,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32] 조플린과 헨드릭스는 약물과 관련하여 사망했고, 존스의 죽음은 불의의 사고로 인한 사망으로 판정되었으나 논란이 있었다. 홀리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말리는 암으로 사망했다.

홉스봄은 20세기 후반 사회 질서의 변화를 청소년 문화를 통해 분석한다. 홉스봄에 따르면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청소년 문화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참신함을 지녔다.[33]

  • 첫째, '젊음'은 성인기의 준비 단계가 아닌, 완전한 인간 발달의 최종 단계로 여겨졌다.
  • 둘째, '선진 시장 경제'에서 청소년 문화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배우는 것이 더 많아지는 세대 역할의 역전이 일어났다.
  • 셋째, 놀라운 국제주의였다. 록 가사의 영어는 번역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서구 청소년 문화는 문화적 쇼비니즘(국수주의)의 반대였다.


홉스봄은 20세기 후반의 문화 혁명이 사회보다 개인의 승리, 즉 과거에 인간을 사회적 구조로 엮었던 실들이 끊어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34] 이는 마거릿 대처의 '사회는 없고 개인만 있다'는 주장과 비슷하게 묘사된다.[27][35]

3. 2. "실제 사회주의"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칼 마르크스가 예측했던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이 아니었다. 홉스봄은 "자본주의는 그 중심부보다 약하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훨씬 더 쉽게 전복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말했다.[6] 러시아 내에서조차 혁명의 겉으로 보기에 "진보적인" 효과에 의문을 제기한다. "혁명과 내전 이후 남은 것은 과거에 더욱 굳건히 뿌리내린 러시아였다... 실제로 국가를 지배한 것은 이전보다 평균적으로 교육 수준과 자격이 훨씬 낮은 크고 작은 관료주의의 밑바탕이었다."[7]

홉스봄의 책의 중심 논제는 국가 사회주의가 처음부터 자신이 지지한다고 주장한 사회주의와 국제주의적 비전을 배신했다는 것이다. 특히 국가 사회주의는 항상 사회주의적 비전의 민주주의적 요소를 버렸다. "레닌은... 처음부터 자유주의적 방법은 러시아 혁명 경주에서 달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8] 이러한 반자유주의는 매우 깊었다. 1933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를 굳건히 장악했을 때, "모스크바는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에게 사회민주주의가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주요 위협이 아니라는 제안을 철회하라고 주장했다."[9]

국제 혁명에 대한 지지에 관해서는, "실제로 일어난 공산주의 혁명들(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후에 중국)은 스탈린의 조언에 반하여 일어났다. 소련의 견해는 국제적으로나 각 국가 내에서 모두 전후 정치는 포괄적인 반파시스트 동맹의 틀 내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이 이 모든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1943년 코민테른을 해산하고 1944년 미국 공산당을 해산함으로써 이를 증명하려고 노력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10] "중국 공산당 정권은 두 국가 간의 단절 이후 혁명 운동을 배신했다고 소련을 비판했지만, 제3세계 해방 운동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 기록은 없다."[11]

반면 그는 영원한 혁명에 대한 마오이즘적 교리에 우호적이지 않다. "마오는 투쟁, 갈등, 고강도 긴장이 삶에 필수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변치 않는 영속성과 조화를 고집하는 것이 바로 약점이었던 낡은 중국 사회의 약점으로의 퇴보를 막는다고 근본적으로 확신했다."[12] 홉스봄은 이러한 신념을 재앙적인 대약진 운동과 그 이후인 1959~1961년 중국 대기근으로 이어지는 직선으로 연결한다.[13]

홉스봄은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실패한 이유는 결국 "...그 체제를 믿거나 그 체제에 충성심을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심지어 그것을 통치한 사람들조차도 그러했기 때문이다"라고 결론 내린다.[14][15]

4. 제3부. 산사태 (1990~)

The Age of Extremes영어의 제3부에서는 1990년대 이후의 시대를 다룬다. 이 시기에는 소련의 붕괴와 사회주의권의 몰락, 그리고 세계화의 진전으로 인해 새로운 변화와 도전 과제들이 나타났다.

4. 1. 아방가르드의 죽음: 1950년 이후의 예술

홉스봄은 전후 모더니즘 미술 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미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개별적인 상표를 부여하기 위해 점점 더 필사적인 속임수들을 연이어 사용했던 것, 즉 절망의 선언문들… 또는 투자를 위해 주로 구매되었던 미술과 그 수집가들을 넌센스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들, 예를 들어 벽돌이나 흙 더미에 개인의 이름을 추가하는 것('미니멀 아트')이나 너무 단명하여 영구적일 수 없도록 함으로써 상품이 되는 것을 막는 것('퍼포먼스 아트')의 연속이었다.[31]

:"이러한 아방가르드들로부터 임박한 죽음의 냄새가 풍겨 나왔다. 미래는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었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들이 주변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31]

5. 홉스봄의 예측과 한계

홉스봄은 미래 예측이 어렵다고 인정하면서도, "성장이 아닌 사회적 분배가 새로운 천년기의 정치를 지배할 것이다"라고 예측했다.[5] 그는 3천년기가 격렬한 정치적 변화를 겪을 것이며, 과거와 현재를 단순히 연장하는 방식으로는 인류가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고 보았다.[3][4]

홉스봄은 대공황 직전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 미국의 경제 상황을 낙관적으로 평가한 것을 미래 예측의 실패 사례로 언급했다.[2] 그는 지난 30~40년간 예측가들의 기록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정부와 경제 연구소들은 여전히 예측을 신뢰하거나 신뢰하는 척한다고 비판했다.[1]

하지만, 홉스봄의 이러한 예측은 자본주의의 적응력과 복원력을 과소평가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5. 1. 공산주의의 실패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칼 마르크스가 예측했던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의 혁명이 아니었다. 홉스봄은 "자본주의는 그 중심지보다 약하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훨씬 더 쉽게 전복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라고 말했다.[6] 홉스봄은 혁명 이후 러시아는 "과거에 더욱 굳건히 뿌리내린 러시아"가 되었고, "실제로 국가를 지배한 것은 이전보다 평균적으로 교육 수준과 자격이 훨씬 낮은 크고 작은 관료주의의 밑바탕이었다"라고 평가했다.[7]

홉스봄은 국가 사회주의가 처음부터 사회주의와 국제주의적 비전을 배신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국가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적 비전의 민주주의적 요소를 버렸다. 그는 "레닌은... 처음부터 자유주의적 방법은 러시아 혁명 경주에서 달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라고 말했다.[8] 1933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를 장악했을 때, "모스크바는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에게 사회민주주의가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주요 위협이 아니라는 제안을 철회하라고 주장했다."[9]

국제 혁명에 대한 지지에 관해서, 홉스봄은 "실제로 일어난 공산주의 혁명들(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후에 중국)은 스탈린의 조언에 반하여 일어났다. 소련의 견해는 국제적으로나 각 국가 내에서 모두 전후 정치는 포괄적인 반파시스트 동맹의 틀 내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이 이 모든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1943년 코민테른을 해산하고 1944년 미국 공산당을 해산함으로써 이를 증명하려고 노력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서술했다.[10] 또한 "중국 공산당 정권은 두 국가 간의 단절 이후 혁명 운동을 배신했다고 소련을 비판했지만, 제3세계 해방 운동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 기록은 없다"라고 덧붙였다.[11]

홉스봄은 마오이즘의 영원한 혁명 교리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는 "마오는 투쟁, 갈등, 고강도 긴장이 삶에 필수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변치 않는 영속성과 조화를 고집하는 것이 바로 약점이었던 낡은 중국 사회의 약점으로의 퇴보를 막는다고 근본적으로 확신했다"라고 말했다.[12] 홉스봄은 이러한 신념이 재앙적인 대약진 운동과 1959~1961년 중국 대기근으로 이어졌다고 본다.[13]

홉스봄은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실패한 이유는 "그 체제를 믿거나 그 체제에 충성심을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심지어 그것을 통치한 사람들조차도 그러했기 때문이다"라고 결론 내린다.[14][15]

5. 2. 제국주의의 종말과 민족주의의 문제점

홉스봄은 19세기 말 제국 질서의 종말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제국을 대체한 민족 국가들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은 국제 협상의 관례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비밀 외교'로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주로 전쟁 중 연합국들 사이에서 체결된 비밀 조약에 대한 반발이었다.[16] 볼셰비키들은 차르의 기록 보관소에서 이러한 민감한 문서들을 발견하고는 즉시 전 세계에 공개했다.[16]

1918년 이후의 실패한 평화협정은 20세기 말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바이러스, 즉 시민 집단을 민족-국가적 또는 종교적 계보로만 분열시키는 것을 증폭시켰다.[17] 반식민주의 논리의 귀류법은 팔레스타인의 극단적인 유대인 소수 집단이 독일(당시 비시 프랑스 통치하에 있던 다마스쿠스를 경유)과 협상하여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는 데 도움을 요청하려 한 시도였다. 그들은 이것을 시온주의의 최우선 과제로 여겼다. (이 임무에 연루된 한 급진주의자는 결국 이스라엘의 총리가 된 이츠하크 샤미르이다.)[18]

5. 3.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실패

홉스봄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대공황 시대를 겪은 우리는 순수 자유 시장의 정설이 당시에는 분명히 신뢰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의 세계적 불황을 다시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다시 한번 그 불황을 이해하거나 해결할 수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19]

그는 "우연히도, 자유 방임 경제에 가장 깊이 헌신한 정권들은 레이건의 미국과 대처의 영국에서처럼 때로는, 특히, 극도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민족주의적이었고 외부 세계를 불신했다. 역사가는 이 두 가지 태도가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20] 그는 소련 사회주의 붕괴 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는 중국 공산당이었으며, 서구 경영대학 강의와 경영 매뉴얼 저자들은(번창하는 장르의 문헌) 기업가적 성공의 비밀을 찾기 위해 공자의 가르침을 탐구했다"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21]

궁극적으로 그는 세계적 관점에서 자본주의가 국가 사회주의만큼이나 실패했다고 본다. 그는 "신고전파 경제학을 따라, 무제한적인 국제 무역이 빈곤국들이 부유국에 더 가까워질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은 역사적 경험뿐만 아니라 상식에도 반한다.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성공적인 수출 주도형 제3세계 산업화의 사례 – 홍콩, 싱가포르, 대만, 한국 – 는 제3세계 인구의 2% 미만을 차지한다)."라고 하였다. (괄호는 원문 그대로)[22]

5. 4. 파시즘에 대한 비판

홉스봄은 파시즘이 철학적으로 존중받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며, "이성과 합리주의의 부적절성과 본능과 의지의 우월성에 전념하는 운동의 강점은 이론이 아니었다"라고 썼다.[23] 그는 베니토 무솔리니조반니 젠틸레의 도움 없이도, 아돌프 히틀러는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지지에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23] 대신 파시즘의 대중적 매력은 "무솔리니가 기차를 제시간에 운행하게 했다"라는 주장과 같은 기술관료적 업적에 있다고 본다.[24]

또한 홉스봄은 "역사가들이 600만 명이 아니라 500만 명 또는 400만 명을 학살했다고 결론 내린다면 홀로코스트의 공포는 덜할까?"라고 질문하며, 파시즘이 초래한 비극을 강조한다.[25]

6. 홉스봄의 통계 활용

홉스봄은 통계를 활용하여 특정 시대의 사회 전반을 보여주는 광범위한 그림을 그린다. 당시(저술 당시) 미국을 언급하면서 "1991년 미국 흑인 가정의 58%는 여성 가장이었고, 모든 아동의 70%는 미혼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라고 지적한다.[26] 또한 "1991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비율의 수감자 수를 기록한 미국(인구 10만 명당 426명의 수감자) 중 15%가 정신 질환자였다고 합니다."라고 덧붙인다.[27]

홉스봄은 국가 사회주의가 일반적인 복지를 증진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제시한다. "1969년 오스트리아인, 핀란드인, 폴란드인의 평균 수명은 모두 70.1세였지만, 1989년 폴란드인의 기대 수명은 오스트리아인과 핀란드인보다 약 4년 짧았습니다."[28] 그는 또한 "1959~61년의 대중국 기근은 아마도 20세기 최악의 기근일 것입니다. 중국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59년 중국 인구는 6억 7,207만 명이었고, 앞선 7년간의 자연 증가율(연간 최소 20퍼밀)을 고려하면 1961년 중국 인구는 6억 9,900만 명이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실제 인구는 6억 5,859만 명이었는데, 이는 예상보다 4,000만 명이나 적은 수치입니다."라고 지적한다.[29]

마찬가지로, "사회적 방치의 상징인 브라질은 1939년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스리랑카의 거의 2.5배였고, 80년대 말에는 6배가 넘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까지 기본 식량을 보조하고 무상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던 스리랑카에서는 1969년 신생아의 평균 수명이 브라질보다 몇 년 더 길었고, 영아 사망률은 브라질의 절반 수준이었으며, 1989년에는 3분의 1 수준이었습니다. 1989년 브라질의 문맹률은 이 아시아 섬나라의 두 배에 달했습니다."라고 설명한다.[30]

7. 홉스봄의 예술관

홉스봄은 전후 모더니즘 미술 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미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개별적인 상표를 부여하기 위해 점점 더 필사적인 속임수들을 연이어 사용했던 것, 즉 절망의 선언문들... 또는 투자를 위해 주로 구매되었던 미술과 그 수집가들을 넌센스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들, 예를 들어 벽돌이나 흙 더미에 개인의 이름을 추가하는 것('미니멀 아트')이나 너무 단명하여 영구적일 수 없도록 함으로써 상품이 되는 것을 막는 것('퍼포먼스 아트')의 연속이었다.[31]

:"이러한 아방가르드들로부터 임박한 죽음의 냄새가 풍겨 나왔다. 미래는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었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들이 주변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31]

8. 홉스봄의 대중문화론

홉스봄은 다른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논평한다. 그는 "버디 홀리, 재니스 조플린, 롤링 스톤스브라이언 존스, 밥 말리, 지미 헨드릭스 그리고 다른 여러 대중적인 스타들이 조기 사망을 위한 삶의 방식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한 죽음을 상징적으로 만든 것은 그들이 대표했던 젊음이 정의상 영속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라고 썼다.[32] 이 중 조플린과 헨드릭스의 죽음은 약물과 관련이 있었고, 존스의 죽음은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홀리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말리는 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20세기 후반 사회 질서의 변화를 보는 렌즈로 청소년 문화를 사용한다.

새로운 청소년 문화의 참신함은 세 가지였다.

첫째, '젊음'은 성인기의 준비 단계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완전한 인간 발달의 최종 단계로 여겨졌다.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젊음이 최고인 인간 활동이며, 이제 다른 어떤 활동보다 더 많은 인간의 야망을 정의했고, 30세 이후에는 삶이 분명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청소년 문화의 두 번째 참신함은 '선진 시장 경제'에서 지배적이었거나 지배적으로 되었다.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부모가 알지 못하는 것과 자녀들이 아는 것이 더 명확해졌다. 세대의 역할이 역전되었다. 청바지는 자신의 어른들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학생들이 개척했고, 많은 흰머리 아래에서 나타났다.

도시 사회에서 새로운 청소년 문화의 세 번째 특징은 놀라운 국제주의였다. 록 가사의 영어는 종종 번역되지도 않았다. 서구 청소년 문화의 중심지는 문화적 쇼비니즘의 반대였다. 그들은 카리브해,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1980년대부터 점점 더 아프리카에서 수입된 스타일을 환영했다.[33]

홉스봄은 "20세기 후반의 문화 혁명은 따라서 사회보다 개인의 승리, 또는 과거에 인간을 사회적 구조로 엮었던 실들이 끊어진 것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쓰고 있으며,[34] 이것을 마거릿 대처의 주장인 '사회는 없고 개인만 있다'와 비슷하게 묘사한다.[27][35]

9. 비판과 평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런던 북 리뷰''에서 이 책을 "불안하고 강력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홉스봄이 서술한 사건에 직접 참여한 경험이 책의 매력을 더했고, 역사와 기억이 상당히 겹친다고 썼다. 사이드는 홉스봄이 서구의 정치적, 경제적 동향에서 결론을 도출하는 능력을 칭찬했지만, 비서구 사회의 역사 연구에서 관련 논쟁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사이드는 정치화된 종교가 독점적으로 이슬람 현상이라는 홉스봄의 주장을 비판했다. 또한 홉스봄이 제시한 대규모이고 비인격적인 개요와는 달리, 목격자와 활동가들의 경험으로 구성된 책에서 "내부의 시각"이 부족하다는 점을 개탄했다.[36]

M.E. 샤프는 이 책이 역사와 기억 모두로 쓰여졌다고 언급했다. 샤프는 또한 홉스봄과 같은 역사가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완전히 길을 잃었을 것이라고 썼다.[37]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포린 어페어즈''에서 "그것은 엄청난 통찰력과 함께 엄청난 맹목성을 결합한 작품"이라고 썼다. 그는 홉스봄의 박식함과 책의 폭넓음을 칭찬했지만 자본주의의 강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후쿠야마는 마찬가지로 홉스봄이 중앙 집중식 정부를 선호하는 것을 깎아내렸다. 마지막으로 후쿠야마는 이 책이 자본주의 아시아에 할애한 분량이 짧다는 점도 비판했다.[38]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글을 쓴 토니 주트는 역사 저술에 대한 홉스봄의 영향력을 강조했지만 그의 마르크스주의적 신념을 비판했다.[39]

로렌스 프리드먼은 이 책이 20세기에 대한 기록의 기준을 설정했고 "강력한 분석"과 "광범위한 범위"에 대해 칭찬했다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먼은 홉스봄이 자본주의를 다루기 힘들고 본질적으로 극단적인 세력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냉전 이후 세계에서 무정부 상태가 승리할 것이라는 홉스봄의 우려를 공유하지 않았다. 프리드먼의 비평에 대한 답변에서 홉스봄은 프리드먼이 자신의 이념적 신념을 역사적 판단으로 여기고 세계의 미래에 대한 그의 비관론을 옹호했다고 비판했다.[40]

참조

[1]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2]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3]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4]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5]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6]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7]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8]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9]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10]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11]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12]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13]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14]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15] 웹사이트 The Age of Extremes http://dannyreviews.[...] 1994
[16]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17]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18]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19]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20]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21]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22]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23]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24]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25]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26]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27]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28]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29]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30]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31]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32]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33]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34] 서적 The Age of Extremes Time Warner Books 2002
[35] 위키인용 Margaret Thatcher
[36] 뉴스 Contra Mundum https://www.lrb.co.u[...] 1995-03-09
[37] 저널 Reviewed work: The Age of Extremes: A History of the World, 1914–1991, Eric Hobsbawm
[38] 저널 The Age of Extremes: A History of the World, 1914–1991 https://www.foreigna[...] 2009-01-28
[39] 저널 Downhill All the Way https://www.nybooks.[...] 1995-05-25
[40] 웹사이트 The Age of Extremes: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 | Reviews in History https://reviews.hist[...]
[41] 저널 Never Sorry https://newrepublic.[...] 2019-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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