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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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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 해금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이 금본위제로 복귀하려다 실패한 과정을 설명한다. 1914년 전쟁 발발 후 금 수출을 금지했던 일본은, 1920년대 초 금본위제 복귀를 시도했지만, 국내 재정 정책과 간토 대지진 등의 영향으로 연기되었다. 1929년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금 해금을 단행했으나,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 경제가 혼란에 빠지고 대량의 금이 유출되면서, 1931년 금 수출이 재금지되었다. 이로 인해 엔화 가치가 폭락하고, 군부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등 일본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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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해금
금 해제 (金解禁)
금 해제금 수출입과 금지금의 자유화 조치
배경
주요 배경IMF의 권고 및 국제 수지 개선 필요성 증대
간략 설명1971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가 금의 수출입과 금지금의 보유를 자유화한 조치
주요 내용
금 수출입 자유화대한민국 거주자나 비거주자 모두 자유롭게 금을 수출입 가능
금지금 보유 자유화개인 및 법인의 금지금 보유량 제한 폐지
금 거래 자유화금지금의 매매, 교환, 증여 등의 거래 자유화
경과 및 영향
1960년대국제수지 악화로 금 수입 제한
1970년대 초국제 통화 제도 변화와 IMF의 권고
1971년 3월 1일금 해제 단행
이후 변화금 거래 활성화 및 한국거래소 금 시장 개설
금 관련 투자 상품 다양화
귀금속 산업 발전
같이 보기

2. 제1차 세계 대전과 금본위제

바이마르 공화국 (1919년 - ) 11월        10월      미국 (48개 주)   9월 7월           대일본 제국   9월           1월그레이트 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 왕국     4월     4월     



1917년 미국이 금 태환을 중단하고 금 수출을 금지하자, 대일본 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이 뒤따라 금 수출을 금지했다.[1] 전쟁이 끝난 후, 1922년 제노바 회의에서는 각국이 조속히 금본위제로 복귀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가 있었다.[1]

2. 1. 일본의 금 수출 금지

1917년(다이쇼 시대 6년) 9월 10일 미국은 금과의 태환을 일시 중단하고 금 수출을 금지했다. 이틀 뒤인 9월 12일 일본 정부도 「금화폐 또는 금지금 수출 단속에 관한 건」(다이쇼 6년 대장성령 제28호)을 공포하여 금 수출 허가제를 도입했다.[1] 그러나 실제로는 허가가 나오지 않아 사실상 수출 금지 조치가 되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금의 국외 유출이 우려되면서 취해진 임시 조치였으며, 전쟁이 끝나면 즉시 해제될 성격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직후 금 수출을 재개했다. 또한, 1922년 (다이쇼 시대 11년) 제노바 회의에서도 선진국들이 조속히 금본위제로 복귀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가 있었다.[1]

그러나 당시 일본의 입헌정우회 정권 (하라 내각 · 다카하시 내각)은 국내에 대한 적극적인 재정 정책과 북양 군벌의 베이징 정부 지원을 위해 대량의 차관이 필요하다는 관측 때문에 금 해제를 연기했다. 이 기간 동안 무역 수지는 대폭 적자가 되었고, 환율은 당시 평가로 여겨졌던 100엔 = 49.875달러 (1달러 = 2.005엔)를 크게 밑돌았다.[1] 이 때문에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 대신, 후에 내각총리대신 겸임)는 국외에 있는 일본 정부 소유의 금을 매각하여 이를 되돌리려 했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었다.[1]

다카하시를 대신하여 대장 대신이 된 이치키 오토히코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는 금 해제를 검토했다. 그러나 제국 의회에서 입헌정우회는 금 해제를 시기상조로, 이에 맞서는 헌정회는 국제 협조를 중시하여 조기 해제를 주장하며 대립했다. 또한, 1923년 (다이쇼 시대 12년) 9월 1일에 발생한 간토 대지진과 그에 따른 금융 조치의 필요성으로 인해 금 해제는 연기되었다.[1] 지진은 대폭적인 엔화 약세와 과도한 수입을 초래하여 경제 혼란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6년 (다이쇼 시대 15년) 1월에 성립된 헌정회 · 제1차 와카쓰키 내각의 대장 대신 가타오카 나오온은 금 해제를 단행하겠다고 공약하고, 그 장애가 되는 지진 어음 처리를 하려 했다. 그러나 이 대응의 미숙함이 1927년 (쇼와 시대 2년)의 금융 공황을 초래했고, 정권은 다시 정우회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으로 넘어가 적극 재정 노선이 부활했다. 환율은 등락을 반복했다.[1]

3. 금 해금 연기와 정치적 갈등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 경제는 극심한 디플레이션에 시달렸다.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과 이노우에 준노스케 대장대신은 금본위제 복귀(금 해금)를 통해 경제 안정을 꾀했지만, 세계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다.

1931년 만주 사변 발발과 영국의 금본위제 이탈은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은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의 주도로 금 수출을 다시 금지하고(금 해금 중단), 일본은행권의 금 태환을 중단하며 금본위제에서 이탈했다.

이 과정에서 미쓰이 은행 등 대형 은행들은 달러 매수를 통해 막대한 환차익을 얻었고, 이는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혈맹단 사건과 같은 극우 단체의 테러는 이러한 사회적 불만을 배경으로 발생했다.

3. 1. 간토 대지진과 경제 혼란

1931년(쇼와 6년), 장기간의 저금리와 거래처 파산으로 중소 은행들이 경영 위기에 빠졌다. 대형 은행들은 잉여 자금을 투자하기 위해 "환율 통제 매도"를 이용하여 달러를 확보하고 외채 등에 투자했다. 같은 해 5월, 오스트리아의 크레디트안슈탈트 은행 파산으로 유럽 금융 시장이 혼란에 빠지자, 일본 대형 은행들은 달러 매수와 해외 송금에 나섰다. 이는 엔화 약세를 초래할 가능성이 컸고, 대형 은행과 투기 세력은 환차익을 노린 투기 목적의 달러 매수를 시작했다. 이는 '''달러 매수 사건'''(''''달러 매수 문제''')으로 불리며 큰 문제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만주 사변이 발발하고, 영국마저 금 수출을 금지하며 금본위제에서 이탈하자, 일본 대형 은행과 투기 세력은 달러 매수에 더욱 집중했다. 9월 말까지 10일 동안 2억 4,700만 엔의 달러가 매수되었고, 금 해금 이후 정화 유출은 6억 5,000만 엔에 달했다.[7] 이로 인해 일본 국내 정화가 급감하고 심각한 디플레이션이 나타났다. 여론은 대형 은행이 사리사욕을 위해 달러를 매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노우에 준노스케는 달러 매수에 대응하기 위해 공정 할인율 인상, 달러 매수 전면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한 달 만에 5억 엔 이상의 금이 매점되는 결과를 막지 못했다. 그는 미쓰이 은행을 중심으로 한 대형 은행의 달러 매수를 "매국적 행위"라고 비난했다.[9]

이에 대해 미쓰이 은행의 이케다 세이빈은 런던에 보유한 금의 인출 보류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였다고 반론했다. 언론은 미쓰이 은행의 분식 회계 의혹을 제기하며 공격했지만, 근거는 모호했다. 그럼에도 국민, 우익, 무산 정당들의 반감은 높아졌고, 은행 습격 사건 등이 발생했다.

1931년 12월, 아다치 켄조 내무 대신의 각의 보이콧으로 제2차 와카쓰키 내각이 붕괴하고, 이누카이 쓰요시를 수반으로 하는 이누카이 내각이 발족했다. 다카하시 코레키요가 대장 대신으로 취임하여 금 수출 금지 조치를 시행, 일본은행권의 금화 태환이 중단되면서 일본의 금본위제는 막을 내렸다.[13]

금 수출 재금지로 인해 달러 환율은 폭락했고, 외채 이자 지불 부담이 증가했다. 대책으로 전력 연맹이라는 카르텔이 결성되었다. 달러를 매점한 대형 은행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지만, 이는 재벌에 대한 비난과 군부의 대외 진출 노선 지지로 이어지는 요인이 되었다. 혈맹단 사건은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긴급 칙령에 의한 재금지까지 유출된 금은 600톤에 달한다고 한다. 관동 대지진을 겪은 기간보다 금 해금부터 재금지까지의 기간 동안 일본은행의 정화 준비액 하락이 더 심각했다.[15]

4. 금 해금 요구와 국제적 압력

1928년 프랑스가 금 해금을 실시하자 주요 국가 중 일본만 금 해금을 시행하지 않아 국내외에서 비판을 받았다. 금융계와 무역 관계 업계에서는 환율 시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금 해금을 요구했고, 1928년 10월 22일 도쿄오사카 양 어음교환소와 도쿄 상공 회의소에서는 "금 해금 즉시 단행 결의"를 정부에 전달했다.[3] 1930년에 설립될 국제결제은행 출자국 및 국제 연맹 재정위원회 구성국 요건에도 금 해금 실시가 포함되어, 당시 "5대국"으로 불린 일본의 위신과도 관련된 사태가 되었다.

4. 1. 금 해금 준비 과정

1928년 프랑스가 금 해금을 실시하면서 주요 국가 중 일본만 금 해금을 하지 않아 국내외에서 비판을 받았다. 금융계와 무역 업계는 환율 안정을 위해 금 해금을 요구했고, 도쿄오사카 어음교환소와 도쿄 상공 회의소는 "금 해금 즉시 단행 결의"를 정부에 전달했다.[3] 국제결제은행 출자국 및 국제 연맹 재정위원회 구성국 요건에도 금 해금이 포함되어 일본의 위신과도 관련된 문제가 되었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대장 대신 미도 타다조는 금 해금이 불가피하다고 판단, 재무관 쓰시마 주이치를 구미에 파견해 금 해금 대비 '''크레딧''' 설정을 의뢰했다.[3] 계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항목내용
총액미국 2500만달러, 영국 500만파운드
계약 당사자
계약 기간금 해금 칙령 공포 (1929년 11월 21일 이노우에 준노스케 교부)일부터 1년



금 해금 시 평가 가치 기준이 문제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전 일본은 금 2푼(0.75g)을 1엔(1달러 = 2.005엔)으로 했으나, 금 수출 금지 후 10년 이상 지나 경제 상황이 변해 실제 환율은 1928년 100엔 = 44달러(1달러 = 2.300엔) 정도였다. 금 해금 시 금지 전 평가(구 평가, 1달러 = 2.005엔)를 유지할지, 통화 가치를 낮출지(평가 절하)가 논쟁이 되었다.

제노바 회의에서도 평가 문제가 제기되었다. 구 평가 금 해금은 수출 부진, 수입품 유입, 디플레이션을 야기할 수 있어 회의 결의에 평가 재검토가 포함되었다. 미해금 상태에서 회의 후 금 해금을 한 국가들은 대부분 평가 절하를 했다. 철강업 등 중공업계는 디플레이션과 수입 가격 하락을 우려해 금 해금에 반대했다.

이시바시 단잔은 다카하시 가메키치에게 구스타프 카셀의 구매력 평가설로 설득되어 금 해금에는 찬성했지만, 평가 절하 후 금 해금을 해야 한다는 "'''신 평가 해금론'''"을 『동양경제신보』에서 주장했다. 오바마 도시노리・야마자키 야스즈미 등이 이에 동조했다.[5] 대장성 쓰시마 재무관도 평가 절하 금 해금이 타당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1929년 7월 2일,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장쭤린 폭살 사건으로 금 해금을 못하고 붕괴되었다.

5. 이노우에 준노스케의 금 해금 단행

1929년 하마구치 오사치를 수반으로 하는 입헌민정당하마구치 내각이 성립되면서, 일본은행 총재와 대장 대신을 역임한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대장 대신에 임명되었다.[1] 입헌민정당은 "금 해금 단행"과 "방만한 재정 정리"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이노우에는 "구 평가에 의한 금 해금 실시"를 주장하며 그 준비를 위해 긴축 재정을 실시했다.[1]

이노우에는 츠시마 토이치를 미국과 영국에 파견하여 1억 엔 상당의 차관 제공을 약속받았다.(Credit영어, 11월 19일 요코하마 정금 은행)[1] 또한, 일본은행에는 공정 금리 인상을, 요코하마 정금 은행에는 엔화 환율 개입과 외화 축적을 지시하여, 보유 외화가 3억 달러로 증가하고 환율이 48달러까지 회복되었다.[1]

하마구치 내각은 1929년 11월 21일에 다음 해인 1930년 1월 11일을 기해 구 평가에 의한 금 해금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대장성 성령).[1] 그러나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로 불리는 뉴욕 증권 시장의 주가 대폭락으로 세계 대공황의 조짐이 보였지만, 이노우에는 이를 통상적인 경제 범위 내의 사건으로 간주하고 금 해금을 예정대로 단행했다.[1]

5. 1. 긴축 재정과 산업 구조 개혁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은 긴축 재정을 실시하여 재정 지출을 억제하고, 환율을 회복시킬 것을 표명했다.[1] 이노우에 준노스케는 금 해금과 재정 재건과 함께 산업 구조 개혁을 중요하게 생각했다.[1] 메이지 시대 이래 정부(관료·군부)와 정상·재벌의 유착 관계 위에 발전을 이룬 일본 산업의 국제 경쟁력은 약하다고 판단했다.[1]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후 불황의 장기화는 일본 경제의 좋지 않은 체질에 있다고 생각하여, 금 해금에 의한 디플레이션과 재정 긴축으로 일시적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더라도 문제 기업의 정리와 경영 합리화에 의한 국제 경쟁력 향상을 목표로 했다.[1]

이노우에는 쇼와 4년(1929년)도 당초 예산의 5%를 삭감하고, 쇼와 5년(1930년)도 예산도 긴축형 예산으로 편성했다.[1] 또한, 공무원 급여의 1할 삭감을 제창했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1]

5. 2. 금 해금 발표와 세계 대공황

1929년 7월, 하마구치 오사치를 수반으로 하는 입헌민정당하마구치 내각이 성립되었다. 새 내각의 대장 대신에는 전 일본은행 총재이자 전 대장 대신이었던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임명되었다. 이노우에는 "구 평가에 의한 금 해금 실시"를 주장하며, 긴축 재정을 실시하여 재정 지출을 억제하고 환율을 회복시킬 것을 표명했다.

하마구치이노우에는 금 해금과 재정 재건 외에도 산업 구조 개혁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메이지 시대 이래 정부(관료·군부)와 정상·재벌의 유착 관계 위에 발전해 온 일본 산업의 국제 경쟁력은 약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금 해금에 의한 디플레이션과 재정 긴축으로 일시적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더라도, 문제 기업의 정리와 경영 합리화를 통해 국제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금본위제가 갖는 통화 가치와 환율 안정 기능 및 국제 수지의 균형 기능이 발휘되어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노우에는 쇼와 4년도 당초 예산의 5%를 삭감하고, 쇼와 5년도 예산도 긴축형 예산으로 편성했다. 또한 공무원 급여의 1할 삭감을 제창했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미국과 영국의 은행으로부터 1억 엔 상당의 크레딧 약속을 받아냈고(11월 19일 요코하마 정금 은행), 일본은행에는 공정 금리 인상을, 요코하마 정금 은행에는 엔화 환율 개입과 외화 집적을 지시했다. 그 결과 보유 외화가 3억 달러로 증가했고, 환율이 48달러까지 회복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하마구치 내각은 11월 21일, 1930년 1월 11일을 기해 구 평가에 의한 금 해금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대장성 성령). 이노우에는 금 해금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5가지로 제시했다.

# 재계의 안정

# 국민 경제의 근본적인 재건

# 일본 경제의 세계 경제로의 정상 궤도 복귀

# 금본위제의 옹호

# 일본의 경제력 충실 발전

또한 금 해금에 따른 경기 침체의 악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민에게 소비 절약과 국산품 애용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 시장(월 스트리트)의 주가 대폭락('''검은 목요일''')이 발생하여 미국 경제는 대혼란에 빠졌다. 이것이 세계 대공황의 계기가 되었지만, 초기 일본 국내에서는 그 영향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이시바시 단잔 등 경제 평론가와 미쓰비시 재벌의 가쿠무 카마키치 등은 구 평가에서의 금 해금에 강하게 반대했다. 반면, 미쓰이 재벌의 이케다 세이빈을 중심으로 한 금융계는 금 해금을 지지했다. 이노우에는 공업국에서 10년에 한 번 꼴로 공황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번 공황을 통상적인 경제 범위 내의 사건으로 생각하여 방침을 변경하지 않았다.

결국 1930년 1월 11일, 예정대로 "금 2푼 = 1엔 = 0.49875USD" (1달러 = 2.005JPY)의 구 평가에 의한 금 해금이 실시되었다.

6. 세계 대공황과 일본 경제의 혼란

1930년(쇼와 5년)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공황이 일본 국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때마침 하마구치 내각은 금 해금에 걸맞은 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디플레이션 정책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 해금으로부터 반년 만에 일본의 국내 도매물가는 7% 하락했다. 또한 대미 환율은 11.1%의 엔고가 발생했고, 미국의 국내 도매물가는 2.3% 하락했다. 그 결과 일본의 국내 시장은 축소되었고, 수출 산업은 엔고로 인해 국제 경쟁력을 잃어 불황에 빠지면서 일본 경제는 이중의 타격을 입게 되었다.

하마구치와 이노우에는 미국이 공황에 빠져도 세계 경제의 중심인 영국 런던시티가 안정되어 있다면 공황은 곧 수습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듬해 쇼와 6년도 예산에서는 더욱 대폭적인 세출 삭감을 통해 총액 14.5억까지 세출을 삭감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정우회와 산업계, 일반 국민들로부터는 금 수출 재개 또는 평가 절하, 나아가 경기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하마구치 내각의 노선은 금융계의 지지를 받았고, 원로 사이온지 킨모치 역시 정우회가 다나카 기이치 내각 시대에 행한 대 중국 강경 노선이 초래한 국제 관계의 악화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당분간은 입헌민정당 내각을 계속 유지하여 대외 신용 회복에 힘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묵인했다.

6. 1. 금 유출과 엔화 가치 하락

금 해금 직후 투기 세력의 매수 심리에 따른 엔화 매수 달러 매도가 이루어졌고, 해금 후 공황의 심화에 따라 무역 결제 자금 확보를 위한 수요가 더해졌다. 더욱이 금으로의 태환과 정화의 해외 이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불과 반년 만에 2.3억 상당의 금과 정화가 국외로 유출되었고, 원래 일본 국외에 보유하고 있던 것까지 합하면 2.85억 상당의 금과 정화가 손실되었다.

이에 대해 이노우에는 1930년 7월 31일 요코하마 정금 은행에 대해, 필요한 경우 정화의 현송을 인정하는 것을 조건으로, 고객의 청구에 따라 무제한으로 달러를 팔아 환율 유지를 꾀하는 "환율 통제 매도"를 명령했다.

하지만 일본 국내에서는 금 해금 직후부터 은 가격 폭락이 시작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생사 가격의 폭락, 같은 해 10월에는 쌀값의 폭락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기업의 도산·합리화가 급증하여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했고, 중소기업농촌은 궁핍해졌다.

6. 2. 통수권 침해 문제와 하마구치 총리 저격 사건

金解禁일본어 직후부터 은 가격이 폭락했고, 같은 해 6월에는 생사 가격이 폭락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쌀값이 폭락했다. 이 때문에 기업의 도산·합리화가 급증하여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했고, 중소기업농촌은 궁핍해졌다. 게다가 긴축 재정 문제와도 관련이 깊었던 런던 해군 군축 조약 체결을 둘러싼 통수권 침해 문제도 얽혀 군부에서도 반감을 사, 마침내 같은 해 11월 14일에 하마구치 총리가 저격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1]

7. 달러 매수 사건과 금 해금의 좌절

1930년, 미국의 대공황이 일본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의 디플레이션 정책과 맞물려 일본 경제는 이중고를 겪었다. 금 해금 직후부터 투기 세력의 달러 매수와 무역 결제 자금 확보 수요가 겹쳐, 불과 반년 만에 2.3억의 금과 정화가 국외로 유출되었다.[3]

이노우에 준노스케는 1930년 7월 31일, 요코하마 정금 은행에 달러를 무제한으로 팔아 환율 유지를 꾀하는 "환율 통제 매도"를 명령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은 가격, 생사 가격, 쌀값 폭락이 이어지면서 기업 도산과 대량 실업자 발생으로 중소기업농촌이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런던 해군 군축 조약 체결을 둘러싼 통수권 침해 문제로 군부의 반감을 샀고, 1930년 11월 14일에는 하마구치 총리가 저격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7. 1. 만주 사변과 영국의 금본위제 이탈

1931년 9월 만주 사변이 발생하고, 영국이 금 수출을 금지하면서 일본 경제는 큰 영향을 받았다. 대형 은행과 투기 세력은 달러 매수에 집중했고, 이로 인해 금 유출이 가속화되었다.[3] 달러 매수 사건은 여론의 비판을 받았으며, 이에 이노우에 준노스케는 공정 할인율을 인상하고 달러 매수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4]

7. 2. 금 수출 재금지와 금본위제 붕괴

이누카이 내각이 성립되고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대장 대신으로 취임하면서 1931년 12월 금 수출 재금지 조치가 단행되었다.[1] 긴급 칙령에 의해 일본은행권의 금 태환이 중단되면서 일본의 금본위제는 종말을 맞이했다.[1]

금 수출 재금지 이후 엔화 가치는 폭락했다.[1] 이로 인해 외채 이자 부담이 증가하고 전력 연맹이 결성되는 등의 영향이 나타났다.[1]

8. 금 해금과 재금지의 영향

(금 해금과 재금지 과정에서 대형 은행(특히 미쓰이)과 재벌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된 배경은 요약에 이미 잘 설명되어 있으므로, 별도의 내용을 추가하지 않습니다.)

참조

[1] 간행물 昭和4年[[大蔵省|大蔵]][[省令]]第27号
[2] 간행물 昭和6年大蔵省令第36号
[3] 문서
[4] 서적 金融小国ニッポンの悲劇 角川書店 1995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웹사이트 金貨幣又ハ金地金輸出、販売取締ニ関スル件大蔵省令(昭和6年12月13日大蔵省令第36号) https://dl.ndl.go.jp[...]
[11] 웹사이트 銀行券ノ金貨兌換ニ関スル件(昭和6年12月17日勅令第291号) https://www.digital.[...]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서적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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