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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천 (18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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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경천은 1888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김현충이며 일본 유학 중 김광서로 개명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2·8 독립 선언을 계기로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며 신흥무관학교 교관, 의병대 지휘관 등으로 활동했다. 소련에서 체포되어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 1942년 사망했으며, 사후 건국훈장을 받았다. 김일성과의 관련성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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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천 (188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경천
본명김현충, 김광서 (개명)
출생일1888년 6월 5일
출생지조선 함경남도 북청
사망일1942년 1월 2일
사망지소련
사망 원인고문으로 인한 병사
국적조선 → 대한제국
성별남자
종교유교 (성리학)
배우자미상
자녀부인 1명, 자녀 2남 5녀
부모아버지: 김정우, 어머니: 윤옥연
별명김경천, 김응천
학력
학력일본육군사관학교
직업
직업독립운동가, 군인
소속
소속대한독립청년단
대한혁명단
고려혁명군
관련 활동
관련 활동독립운동
기타
김경천

2. 생애

김경천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어릴 적 이름은 김현충(金顯忠)이었다.[24][25][26] 일본군 복무 시절 김광서(金光瑞)로 개명했고,[45] 신팔균(신동천), 지청천과 함께 '하늘 천(天)' 자를 넣어 지은 김경천(金擎天, 金警天 또는 金敬天), 김응천(金應天) 등의 별명을 사용했다.

아버지 김정우(金鼎禹, 1857~1908)[21]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구한국 육군 엘리트였다. 김경천은 아버지와 형들의 영향을 받아 군인을 꿈꿨고, 한성부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1908년 8월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입학했다.[24] 1909년 12월 1일에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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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3월, 아버지 김정우가 세상을 떠났다.[27] 김경천은 1909년 5월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고(8기), 1911년 5월 27일 일본 육사 기병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여(23기) 도쿄에서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26]

일본 육사 졸업 후, 김경천은 기병 장교로 근무하다 1919년 2·8 독립 선언을 계기로 탈출, 귀국했다. 그해 6월 초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총재 안병찬)에 가입했고,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이후, 많은 학생들이 독립군이 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로 모여들었으나, 일제의 방해와 내부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1919년 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31] 의용군을 모집하고 일본군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싸웠다. 창해청년단 총사령관을 맡아 전투를 이끌며 시베리아에서 명성을 얻었다.[33] 1921년 수청(水淸)의병대 지도자가 되었고,[34] 러시아 혁명 세력과 연합하여 연해주 조선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았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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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김경천은 대한혁명단 사령관,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러시아 지역 독립 운동 소강 상태로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1923년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한 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하거나 국경경비대 장교로 일했다.[36]

1925년 6월, 부인 유정이 딸 셋을 데리고 사라졌다는 보도가 있었고,[37] 이후 가족들은 연해주에서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장남 수범은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다.

1936년 김경천은 소련 당국에 체포되어 3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38] 1937년 연해주 한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2년 반 복역 후, 1939년 석방되었으나 다시 체포되어 8년형을 선고받고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1942년 1월 14일, 김경천은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수용소 근처에 묻혔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39]

2. 1. 가문 및 초기 생애 (1888~1911)

함경남도 북청에서 무관 가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김현충(金顯忠)이고,[24][25][26] 일본군에 근무할 때 김광서(金光瑞)로 개명하여 호적에 올라 있다.[45] 후에 신팔균(신동천), 지청천과 함께 '하늘 천(天)'자를 넣어 지은 김경천(金擎天, 金警天 또는 金敬天), 김응천(金應天)은 별명이다.

아버지 김정우(金鼎禹, 1857~1908)[21]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구한국 육군의 엘리트 인사였다. 김정우는 만학의 나이에 큰 아들 성은과 함께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공업학교를, 김성은(金成殷, ? ~ 1906[22])은 일본육사를 졸업했다.[23] 귀국 후 이들은 고급 장교가 되었다. 김경천은 군인인 아버지 및 형들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군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한성부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1908년 8월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에 입학한다.[24] 아버지와 형은 공업을 배우라고 권했지만, ‘나폴레옹’ 책을 탐독하던 그는 결국 군인의 길을 선택한다. 유년학교를 마친 후 1909년 12월 1일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25][26]

1908년 3월, 일본 유학을 떠나기 앞서 아버지 김정우가 작고하였다.[27] 같은 해 7월 말, 김경천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자신의 재산(전답, 가옥, 산판(山坂))을 나열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문권(文券)을 다 가지고 가니, 내외국인은 사기 당하지 말라는 광고를 두 차례 냈다. 당시 재산 목록으로 보아 부친 사후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던 것으로 보인다.[28]

1910년 초, 아버지의 별실(別室) 화순(和順)집이 부친 소유 동대문 등지의 채전(菜田)을 전군부대신(前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에게 위탁하여 상당 금액을 받고 매각하자, 김정우의 며느리(李召史)가 윤웅렬에게 진정서를 냈다는 기사가 황성신문에 실렸다. 이를 통해 부친의 유산을 두고 집안에 다툼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29] 김정우는 군부대신 윤웅렬의 부관을 지냈다고 한다.[30]

1909년 5월, 김경천은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를 8기로 졸업하였다. 이어 1911년 5월 27일 일본 육사 기병과를 최우등으로 졸업(제23기)하고 도쿄에서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26]

1909년, 김경천은 일본 유학을 일주일 앞두고 유계준(柳桂俊)의 딸 유정(柳貞, 1892년 - 1971년, 유정화(ユ・ジョンファ)라는 통칭으로 불림)과 결혼했다. 그는 아내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것을 권유하고, 홀로 유학을 떠났다.

2. 2. 일본군 탈출 및 만주 망명 (1911~1919)

1911년 5월 27일 김경천은 일본 육사 기병과를 최우등으로 졸업(제23기)하고 도쿄에서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26] 일본육사를 졸업하면 바로 소위로 임관하는 것이 통례였으나 그는 소위 임관을 처음에 거부하여 말썽이 되었다. 결국 경성부로 소환되어 조선총독 테라우치 마다사케와 면담하였다. 테라우치에게 임관 권고를 받은 김경천은 아버지와 형의 죽음으로 가정 생계도 꾸려나가야 했고, '독립전쟁을 벌이려면 육사 졸업한 것 갖고는 안 된다. 일본군 장교 생활을 하여 일본 군사기밀을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그 권고를 받아들였다.

이후 기병 장교로 근무하였는데, 수 년간 기회를 엿보다가 1919년 2·8 독립 선언을 계기로 탈출을 결심하고 귀국했다. 그해 6월 초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총재 안병찬)에 가입해 활동했고,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발발하자 김경천은 육사 3년 후배 이청천과 함께 만주 삼원포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회영, 이상룡이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세운 신흥무관학교로 갔다. 일본육사 출신 김경천, 이청천이 교관으로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3.1 운동 이후 독립군이 되려던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삼원포로 갔다. 이에 크게 당황한 일제는 온갖 수단을 강구하여 김경천 매장 공작을 펼쳤고, 중국인과의 외부적 문제, 한국인끼리의 내부적 문제로 인해, 신흥무관학교를 주도하던 그는 신흥무관학교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

1919년 말 김경천은 만주 삼원포를 떠나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31]

2. 3. 러시아 지역 항일 무장 투쟁 (1919~1923)

1919년 연말 경 김경천은 만주 삼원포를 떠나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31] 그는 이곳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싸웠으며,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의 단장 김규면(金圭冕, 1880-1969)[32]에 이어 총사령관을 맡아 전투를 거듭하면서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33] 1921년에는 수청(水淸)의병대의 지도자가 되었고,[34] 러시아의 혁명 세력과 연합하면서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 나경석(羅景錫, 1890∼1959)은 1922년 1월 동아일보에 연재한 "노령견문기(露領見聞記)" 5회와 6회에 당시 그의 활동을 보도하고 있다.[35]

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였으며, 김경천은 사령관을 맡았다. 그해 10월 고려혁명군(총재 이중집(李仲執))이 조직되었고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이후 정세 변화로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노령(露領) 무장 독립 운동의 선도격이던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1923년 상해에서 상해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때 군사담당 위원으로 내정되었다. 김경천은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1923년 이후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당시 시베리아는 혼란 상태였다. 10월 혁명프랑스영국의 개입으로 시베리아에 있던 체코 군단이 백군을 지원했고, 그 구원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시베리아 출병을 감행했다. 하지만 대전 종전과 함께 체코 군단은 전투를 중지했고,[13] 백군은 열세에 몰리면서 일본을 제외한 연합국은 철군을 결정했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시베리아에는 고려인이 많았지만, 러시아 국적을 가진 이민자뿐 아니라 항일을 위해 운동을 펼치는 망명자도 다수 있었다. 그 지도자급 인물인 이동휘(李東輝)가 상해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였으며, 레닌의 민족 자결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경천이 시베리아로 이동한 시점에는 레닌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방침이 결정되었고, 만주(간도), 시베리아의 항일 조선인 집단은 적군을 지원하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하는 일본군은 간도와 연해주 항일 집단이 왕래하며 무장 투쟁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마침 경천이 연락을 취했던 시기에 간도에서 발생한 현금 강도 살인 사건[14]을 계기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대한 대규모 수색을 시작했다.

경천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왔지만, 수색을 피해 교외 산중으로 피신하여 수찬 타우데미 마을에서 파르티잔 부대를 결성하고, 한창걸(韓昌傑)[15] 부대, 사비츠키 부대와 함께 중국인 마적 부대(고산 그룹)와 교전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경천은 이 마적 토벌로 명성을 얻어 '''김장군(金將軍)'''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무렵 수찬에서는 300명 정도의 올가 지역 파르티잔 연합 부대가 조직되었는데, 경천은 이를 지휘하여 1921년 봄경 아누치노에서 콜차크 군의 잔당인 카펠리 부대와의 전투에 참여했다.

수찬은 당시 치안이 매우 불안했고, 경천은 민생을 정재관(鄭在寬)[16]에게 맡기고 군정을 실시했다고 전해진다.

경천이 지휘한 수찬 파르티잔 부대는 규율이 매우 높아 다른 파르티잔들과 달랐다. 적군 지도자도 “(수찬의) 조선인 부대는 규율, 대의에 대한 전심과 숭배의 모범을 보였다. …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규율 불복종, 명령 불이행, 더구나 음주와 같은 사례는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극찬했다.[17]

이전부터 우스리스크 근교에 기반을 둔 조선인 무장 단체인 혈성단이 있었는데, 이것이 중심이 되어 파르티잔이 결집하여 1921년 초에는 수찬 고려 의병단이 결성되었다. 경천은 사령관으로 초청되어 상당수의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경천은 광서(光瑞)라는 이름으로 일본 측 수색 자료에도 등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1922년 중반에는 약 600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1921년부터 1922년에 걸쳐 경천은 주로 이만 근처를 무대로 적군에 협력하여 백군과 전투를 벌였다. 1922년 여름에는 연해주 혁명 군사 위원회가 경천을 포셰트 군구 파르티잔 연합 부대장으로 임명했다고도 한다.

시베리아에서 당시 경천의 활약은 조선반도에서 발행되던 민족계 신문인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에서 활발하게 보도되었고,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는 1면에 걸쳐 경천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 경천은 “1922년 1월 2일 이만 전투에서는 사령관의 항복으로 지휘관을 잃은 소비에트 적군의 지휘까지 맡아, 총알이 쏟아지는 가운데 백마를 타고 지휘를 계속하여 마침내 이만 점령에 성공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20년대 조선반도 신문에서 가장 많이 보도된 독립운동가는 경천이었고, 인터뷰 기사까지 실린 것은 그가 유일하다.

하지만 이미 이 시기 만주, 시베리아의 독립 무장 단체는 분열되었고, 1921년 6월 흑하 사변에서는 동지끼리 싸웠으며, 레닌에게 의지하려 했던 이동휘는 영향력을 상실했다. 더욱이 1922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가 함락되고, 일본은 북사할린을 제외한 시베리아 전역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백군 잔당이나 박해를 두려워한 러시아인들은 망명을 희망하며 시베리아를 탈출했고, 완충국으로서 잠정적으로 시베리아에 수립되었던 극동 공화국도 역할을 마치고, 소비에트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했다. 1922년 말로 러시아 내전이 종결된 셈이며, 조선인 항일 파르티잔도 역할을 마쳤다. 소비에트 정권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독립운동 단체의 무장 활동을 그냥 둘 수 없게 되었다.

경천은 무장 독립 투쟁의 계속을 바라며 1923년 1월 3일부터 상해에서 열린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국민 대표 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주도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임시 정부는 분열 붕괴되었고, 시베리아의 고려 공산당(이르쿠츠크 파)를 중심으로 한 세력만 남아 “조선 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조직이 되었다. 그 국무위원에는 이청천이 있었고, 경천도 이를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2. 4. 소련 체류 및 강제 이주 (1923~1939)

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되었으며, 김경천은 사령관을 맡았다. 그해 10월 고려혁명군(총재 이중집(李仲執))이 조직되었고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이후 정세 변화로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노령(露領) 무장 독립 운동의 선도격이던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1923년 상해에서 상해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때 군사담당 위원으로 내정되었다. 김경천은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1923년 이후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36]

1925년 6월에 부인 유정(柳貞, 1892-1971)이 딸 셋을 데리고 사라져 종로서에서 수색중이라고 시대일보가 보도하였으므로 이때 연해주로 가서 가족들이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37] 장남 수범은 이듬해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다.

1936년 소련 당국의 한인 인텔리 피검정책과 관련하여 체포되었고, 9월 29일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체포 원인으로는 2가지 추측이 있다. 첫째, 연해주 한인 지도자는 이르쿠르츠파, 상해파 둘로 나뉘었는데 당시 상해파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되는 과정 중 상해파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았을 수 있다. 김경천은 파당을 좋아하지 않아 어느 파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둘째, 그는 소련식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민족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이는 2012년 12월 6일자 KBS 역사스페셜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시베리아의 전설이 되다' 에서도 밝혀진다.[38])

1937년 연해주 거주 전체 한인에게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이주 정책이 시작된다. 김경천은 이 당시 2년 반을 복역한다.

1939년 2월 석방되어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독일인 농장 잡부로 일했으나 4월 5일 재차 체포되어 카라간다 정치범수용소에서 복역했다. 6월 25일 모스크바로 이송되었고 간첩죄가 적용되어 강제노동수감소 8년형을 언도 받았고, 러시아 북부철도수용소로 이송되어 매일 철도건설 공사장에 동원되었다.

2. 5. 체포, 강제 노동, 그리고 죽음 (1939~1942)

1936년 소련 당국의 한인 인텔리 피검 정책과 관련하여 체포되었고, 9월 29일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38] 그의 체포 원인으로는 두 가지 추측이 있는데, 연해주 한인 지도자가 이르쿠르츠파와 상해파로 나뉜 상황에서 상해파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았거나, 소련식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지 않아 체포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경천은 민족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38]

1937년 연해주 거주 전체 한인에게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이주 정책이 시작되었고, 김경천은 이 당시 2년 반을 복역했다.

1939년 2월 석방되어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독일인 농장 잡부로 일했으나 4월 5일 재차 체포되어 카라간다 정치범수용소에서 복역했다. 6월 25일 모스크바로 이송되었고 간첩죄가 적용되어 강제노동수감소 8년형을 선고받았고, 러시아 북부철도수용소로 이송되어 매일 철도건설 공사장에 동원되었다.

1942년 1월 14일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고, 시신은 수용소 근처에 묻혔다고 하나 정확한 장소는 아무도 모른다.[39]

3. 사후

김경천은 주요 활동 무대가 시베리아였기 때문에, 독립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잊혀졌다. 이승만 정권부터 시작된 한국의 극단적인 반공주의로 인해, 시베리아에 남았다는 것은 곧 공산주의자가 된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1974년, 이명영이 서울에서 발행한 『김일성(金日成) 열전』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김일성 전설이 "육사(陸士)에 유학했던 인물"이라는 점을 들어, 전설의 모델로서 처음으로 김경천을 거론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소련과 외교 관계가 없었고, 반공적인 가치 판단 때문에 시베리아 잔류는 고려되지 않았으며, 1920년대 후반 이후의 행적은 불명으로 여겨졌다.

1982년에는 북한에서 소련으로 망명한 허진(許真, 호 진)이 임은(林隱)이라는 필명으로 쓴 『북한왕조성립비사-김일성정전-(北朝鮮王朝成立秘史ー金日成正伝ー)』(일본어)가 도쿄에서 출판되었다. 여기서 소련에 있던 고려인들의 저술과 증언을 통해 김경천이 소련에 남아 대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당시 소련은 고려인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숙청에 관한 정보는 정확성이 부족했다. 또한 한국에서 광범위한 관심을 받지도 못했다.

1990년 한국과 소련의 국교 회복 이후,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가 일어나고, 한국과 중앙아시아 고려인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인 독립운동가들이 한국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8년, 한국 정부는 김경천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 시상식을 계기로 생존해 있던 김경천의 막내딸 김지희(金智熙, 1928년 - )와 막내아들 김기범(金基範, 1932년 - )이 한국을 방문하여, 그의 자세한 행적이 알려지게 되었다.

3. 1. 복권과 서훈

1936년 김경천이 3년형을 언도받은 사건은 1956년 재심되어 무죄 선고를 받았다.[19] 1939년 체포되어 8년형을 받은 사건은 1959년 모스크바 군사재판소에서 재심하여 무죄를 선언하고 다음 날인 17일에 사후 복권되었다.[19]

1993년 카자흐스탄에서는 '정치적 탄압에 의한 희생자의 명예회복' 관련 법률에 의해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19]

1998년 한국 정부는 김경천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19][40]

2003년 보훈처는 2003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경천을 선정하였다.[41]

2015년 구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후손 일부가 한국으로 특별 귀화하였다.[42] 같은 해 외증손녀 김올가의 요청으로 우당 장학회와 서울시는 종로구 사직동 그의 옛 집터에 표지석을 세웠다.[43]

2016년 전쟁기념관은 1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로 독립운동가 김경천(金擎天)을 선정하였다.[44]

3. 2. 김일성과의 관계 논란

김일성(金日成)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은 없지만, 육군사관학교 54기 졸업생인 김정렬(金貞烈)은 "아버지(육사 26기 졸업생인 김준원(金埈元))로부터 김광서가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이라고 들었다"고 말했다.[8]

김일성(김성주)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너무 어리다"며 의문을 가졌다는 여러 증언이 있다.[9]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했던 경력, 백마를 타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 김장군이라고 불렸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김일성 장군 전설의 모델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추측되고 있다.

몇몇 자료들은 북한 지도자 김일성이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신분을 도용했다고 믿고 있다.[4] 1974년, 이명영은 《김일성 신화》라는 책을 출판하여 원래의 김일성 장군은 일본군 사관학교 졸업생이었다고 주장했다.

4. 가족

구 분내용
아버지김정우(金鼎禹, 1857~1908)[21][27]
어머니윤옥연(尹玉蓮, ?)
배우자류정화(호적명 柳貞, 1892~1971, 柳桂俊의 딸)[45]
자녀智利(1915~1982, 일본 千葉縣 千葉郡 출생) : 김경천 자녀 사진[40]
智慧(1917~1936, 일본 千葉縣 千葉郡 출생)
智蘭(1919~1995, 서울 사직동 166번지 출생, 러시아명은 니나)
김수범(1926~1995, 블라디보스토크 출생)
김지희(1928~?, 수청 다우지미 출생, 카자흐스탄 카라간다 거주)
김기범(1932~?, 하바롭스크 출생, 러시아 노브고로드시 거주)[40]
여동생김옥진(金玉振, 1908~?)[45]


5. 평가

김경천의 행적은 주요 활동 무대가 시베리아였기 때문에, 독립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그 이유로는 이승만 정권부터 시작된 한국의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들 수 있다. 시베리아에 남았다는 것은 곧 공산주의자가 된 것과 같은 의미였다.

1974년, 이명영(李命英)이 서울에서 발행한 『김일성(金日成) 열전』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김일성 전설이 "육사(陸士)에 유학했던 인물"이라는 것이었기에, 전설의 모델로서 처음으로 김경천을 거론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소련과 외교 관계가 없었고, 또한 반공적인 가치 판단 때문에 시베리아 잔류는 고려되지 않았으며, 1920년대 후반 이후의 행적은 불명으로 여겨졌다.

1982년, 북한에서 소련으로 망명한 허진(許真, 호 진)이 임은(林隱)이라는 필명으로 쓴 『북한왕조성립비사-김일성정전-(北朝鮮王朝成立秘史ー金日成正伝ー)』(일본어)가 도쿄에서 출판되었다. 여기서 소련에 있던 고려인들의 저술과 증언을 통해 김경천이 소련에 남아 대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당시 소련은 고려인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숙청에 관한 정보는 정확성이 부족했다. 또한 한국에서 광범위한 관심을 받지도 못했다.

상황이 바뀐 것은 1990년 한국과 소련의 국교 회복 이후이다. 그 이듬해인 91년 겨울에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가 일어나고, 한국과 중앙아시아 고려인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인 독립운동가들이 한국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8년, 한국 정부는 김경천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 시상식을 계기로 생존해 있던 김경천의 막내딸 김지희(金智熙, 1928년 - )와 막내아들 김기범(金基範, 1932년 - )이 한국을 방문하여, 그의 자세한 행적이 알려지게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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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シベリア出兵 革命と干渉 1917–1922 (Siberia Expedition: Revolution and Intervention)
[4] 웹사이트 III러시아편-2. 노령지역 무장투쟁가 김규면 http://news.khan.co.[...]
[5] 문서 陸軍中央幼年学校本科第八期卒業生徒人名表(明治四十二年五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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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웹사이트 https://www.sankei.c[...]
[9] 서적 朝鮮戦争 金日成とマッカーサーの陰謀
[10] 웹사이트 陸軍士官学校・騎兵 23期卒業:朝鮮學生 金顯忠 https://dl.ndl.go.jp[...] 【官報. 1911年05月31日】 1911-05-31
[11] 웹사이트 https://dl.ndl.go.jp[...] 官報 1920-01-17
[12] 문서 大正九年一月二十三日高警第一五三五号 秘 国外情報 不逞鮮人ノ行動(浦潮派遣員報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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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문서 密第一〇二号其七〇五 軍事第六〇号 秘 大正九年二月二日 高警第二八三二号(鮮銀被害事件犯人逮捕ニ関スル件)
[15] 문서
[16] 문서
[17] 서적 シベリア出兵 革命と干渉 1917-1922
[18] 웹사이트 Ⅲ러시아편-2. 노령지역 무장투쟁가 김규면 http://news.kha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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