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 (15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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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상용(1561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활약했다. 1582년 진사가 되고, 1590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임진왜란 때에는 권율을 따라 호남·영남 지방을 지원했으며, 광해군 때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나 폐모론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좌참찬, 이조판서, 우의정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신하여 자결했다. 저서로 《선원유고》 등이 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인천 충렬사 등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으며, 김상용의 순절비는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김상용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행동이 단정하며 법도에 맞아 주위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칭찬받았다. 외할아버지 좌의정 정유길이 살던 서울 수진방(현 수송동·청진동)에서 태어났다.[1] 16세에 영의정 권철(도원수 권율의 아버지)의 손녀와 혼인하여 3남 3녀를 두었고, 권씨 사후 사계 김장생의 누이와 혼인하여 1남 4녀를 두었다.[1] 성인이 된 후 스스로 호를 선원(仙源)이라 짓고, 풍계(楓溪)라는 호도 별호로 사용했다.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인천의 충렬사(忠烈祠),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상주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안변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정주의 봉명서원(鳳鳴書院), 정평의 모현사(慕賢祠) 등에 배향되었다. 1758년 영조의 특별명령으로 의정부영의정이 증직 추서되었다.
2. 생애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가 되었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등용되었다. 이후 좌의정 정철(鄭徹), 판서 김찬(金瓚)의 종사관으로 있었으며, 병조좌랑, 응교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처삼촌 도원수 권율을 따라 호남·영남 지방을 왕래했고, 정유재란이 끝난 1598년 승지로 등용되었다. 그해 겨울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되자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정주목사, 상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의 가까운 인척이었으나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다. 광해군 때 한성부판윤, 호조참판, 승정원도승지, 지의금부사, 사헌부대사헌, 지의금부사,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도총관과 지중추부사를 지내는 동안 인목대비가 폐비되자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원주로 낙향했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이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써 임시정(林時定)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부름을 받고 관직에 복귀했다. 서인(西人)의 일원으로 판돈령부사를 거쳐 인조 즉위 후 예조·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1626년 3월 좌참찬에 제수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임명되었고, 1628년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1629년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16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31년 다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1632년 우의정에 임명되자 거듭 사퇴하여 허락받았다. 1635년 우의정을 사퇴하고 영돈령부사로 전임되었다. 1636년 판돈녕부사가 되었고, 그해 8월 고령을 이유로 사퇴를 청했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세자빈과 원손 등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적병이 강화성을 함락시키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했다. 김상용은 문장에 뛰어났고 명신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선원유고》 등이 있다.[2] 그의 묘 옆에는 서손(庶孫) 김수전(金壽全)의 묘가 있다. 김상용의 죽음에 대해, 순절이 아니라 종에게 자기 옷을 입히고 숨어 있다가 담배를 피우던 중 화약에 불이 붙어 폭사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2] 그러나 김상용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실수로 죽은 것이 아니라 순절한 것이라 주장하며, 당시 13세였던 김수전이 순절하는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다고 간청하여 불에 뛰어들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김수전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사후에도 할아버지 묘 옆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묘역 입구의 충효각에는 김상용의 충신정려와, 숙종 때 예조판서 민진후의 건의로 세워진 김수전의 효자정려가 함께 있다.[3][4][1]
김상용은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체(이왕체)를 본뜨고 전서(篆)는 여러 서체를 겸하였다. 시조로는 유고(遺稿)에 《오륜가(五倫歌)》(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9편)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에 여러 편의 시조가 실려 있다.
2. 1. 생애 초반
김상용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며, 행동이 단정하고 법도에 맞아 주위에서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칭찬하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 좌의정 정유길이 살고 있던 서울의 수진방(현 수송동·청진동)에서 태어났다.[1]
16세 때 영의정 권철(도원수 권율의 아버지)의 손녀와 혼인해 3남 3녀를 두었고, 권씨 사후 사계 김장생의 누이를 얻어 1남 4녀를 두었다.[1]
성인이 되자 스스로 호를 지어 선원(仙源)이라 불렀으며, 풍계(楓溪)라는 호도 지어 별호로 썼다.
2. 2.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등용되었다. 그 뒤 좌의정 정철(鄭徹), 판서 김찬(金瓚)의 종사관으로 있었다. 병조좌랑, 응교 등을 역임하고,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처삼촌 도원수 권율을 따라 호남·영남 지방을 왕래했으며, 정유재란이 종결되면서 1598년 승지로 등용되고, 그해 겨울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되자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외보로 정주목사, 상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의 가까운 인척이었음에도 순전히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다. 광해군 때 한성부판윤·호조참판·승정원도승지·지의금부사·사헌부대사헌·지의금부사·형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도총관과 지중추부사를 지내는 동안 인목대비가 폐비되자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원주로 낙향했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이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치중하여 임시정(林時定)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부름을 받고 관직에 나갔다. 이후 김상용은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 판돈령부사를 거쳐 인조 즉위후 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626년 3월 좌참찬에 제수되고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1628년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1629년 예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16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노령으로 치사(致仕)하고 관직을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31년 다시 치사를 청하였으나 불허되었고,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1632년 우의정에 임명되자 거듭 사퇴하여 허락받았다. 1635년 우의정을 사퇴하고 영돈령부사로 전임되었다.
1636년 판돈녕부사가 되어 그해 8월 노령을 이유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2. 3. 병자호란과 사망
병자호란 때 세자빈과 원손 등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로 건너갔으나, 적병이 강화성을 함락시키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김상용은 문장에 뛰어났으며 명신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선원유고》 등이 있다.[2]
그의 묘 옆에는 서손(庶孫) 김수전(金壽全)의 묘가 있다. 김상용의 죽음에 대해, 그가 순절한 것이 아니라 종에게 자기 옷을 입히고 숨어 있다가 담배를 피우던 중 화약에 불이 붙어 폭사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2] 그러나 김상용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실수로 죽은 것이 아니라 순절한 것이라 주장하며, 당시 13세였던 김수전이 순절하는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다고 간청하여 불에 뛰어들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김수전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사후에도 할아버지 묘 옆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묘역 입구의 충효각에는 김상용의 충신정려와, 숙종 때 예조판서 민진후의 건의로 세워진 김수전의 효자정려가 함께 있다.[3][4][1]
김상용은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체(이왕체)를 본뜨고 전서(篆)는 여러 서체를 겸하였다. 시조로는 유고(遺稿)에 《오륜가(五倫歌)》(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9편)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에 여러 편의 시조가 실려 있다.
3. 사후
《김상용선생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6번지에 있다. 부인 안동 권씨와의 합장묘인데, 묘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우로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묘역 입구 약 5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비문은 아우인 김상헌이 짓고 유시정이 글을 써서 인조 25년(1647년)에 세운 것이다. 1987년 2월 12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99호로 지정되었다.
4. 저서 및 작품
4. 1. 저서
4. 2. 작품
5. 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조부 | 김생해(金生海) | 1512년 | 1558년 | |
조모 | 이연환(李連環) | 1510년 | ? | [5] |
부친 | 김극효(金克孝) | 1542년 | 1618년 | |
외조부 | 정유길(鄭惟吉) | 1515년 | 1588년 | |
외조모 | 원대은개(元大隱介) | 1514년 | ? | |
모친 | 정말정(鄭末貞) | 1542년 | ? | [6] |
남동생 | 김상관(金尙寬) | 1566년 | 1621년 | |
남동생 | 김상건(金尙蹇) | 1567년 | ? | |
남동생 | 김상헌(金尙憲) | 1570년 | 1652년 | 큰아버지 김대효(金大孝)의 양자로 출계 |
남동생 | 김상복(金尙宓) | 1573년 | 1652년 | |
정부인 | 안동 권씨 | ? | ? | 권개(權愷)[7]의 딸 |
장남 | 김광경(金光烱) | 1577년 | ? | |
며느리 | 전주 이씨 | ? | ? | 이헌심(李獻諶)의 딸 |
손자 | 김수창(金壽昌) | 1599년 | 1680년 | [8] |
차남 | 김광환(金光煥) | 1579년 | 1642년 | |
며느리 | 숙부인 이계선(李桂仙) | 1579년 | ? | 이철(李鐵)의 딸 |
손자 | 김수홍(金壽弘) | 1601년 | 1681년 | |
장녀 | 김정순(金正順) | 1582년 | ? | |
사위 | 의령 남씨 남호학(南好學) | 1585년 | ? | |
외손자 | 남노성(南老星) | 1603년 | 1667년 | |
외손녀 | 남영일(南榮一) | 1607년 | ? | |
외손녀 | 남정일(南貞一) | 1617년 | ? | |
외손녀 | 남종일(南終一) | 1624년 | ? | |
3남 | 김광현(金光炫) | 1584년 | 1647년 | |
며느리 | 청송 심씨 | ? | ? | 심률(沈慄)의 딸 |
손녀 | 김진영(金震英) | 1601년 | ? | |
손녀 | 김혜영(金惠英) | 1604년 | ? | |
손자 | 김수인(金壽仁) | 1608년 | 1660년 | [9] |
손녀 | 김해영(金解英) | 1611년 | ? | |
손녀 | 김일영(金一英) | 1615년 | ? | [10] |
손녀 | 김이영(金二英) | 1620년 | ? | |
손자 | 김수민(金壽民) | 1623년 | 1652년 | |
손자 | 김수빈(金壽賓) | 1626년 | 1676년 | [11] |
차녀 | 영가부부인 김이순(永嘉府夫人 金二順) | 1587년 | 1654년 | |
사위 | 신풍부원군 장유(新豊府院君 張維) | 1587년 | 1638년 | |
외손자 | 장선징(張善澂) | 1614년 | 1678년 | |
외손녀 | 덕수 장씨 | ? | ? | |
외손녀 | 인선왕후(仁宣王后) | 1619년 | 1674년 | |
3녀 | 김계순(金季順) | 1590년 | ? | |
사위 | 여주 이씨 이이성(李以省) | 1591년 | ? | |
외손녀 | 이진일(李眞一) | 1616년 | ? | |
외손녀 | 이소일(李昭一) | 1628년 | ? | |
외손녀 | 이응(李應) | 1631년 | ? | |
양외손자 | 이만징(李萬徵) | 1628년 | ? | |
측실 | 김종생(金終生) | 1583년 | ? | 김계휘(金繼輝)의 서차녀 |
서장남 | 동원군(東原君) 김광소(金光熽) | 1597년 | ? | [12] |
서손녀 | 김계영(金桂英) | 1617년 | ? | |
서손녀 | 김완(金婉) | 1622년 | ? | |
서손녀 | 김만(金晚) | 1628년 | ? | |
서손녀 | 김계만(金季晚) | 1633년 | ? | |
서손자 | 김수장(金壽長) | 1642년 | ? | |
서장녀 | 김영순(金英順) | 1602년 | ? | 청주 한씨 한인급(韓仁及)의 첩 |
서차녀 | 김애순(金愛順) | 1605년 | ? | |
사위 | 전의 이씨 이응인(李應寅) | ? | ? | |
서외손녀 | 이예일(李禮一) | 1621년 | ? | |
서외손자 | 이지장(李枝長) | 1623년 | ? | |
서외손녀 | 이민일(李敏一) | 1625년 | ? | |
서외손녀 | 이수일(李守一) | 1628년 | ? | |
서외손녀 | 이준일(李俊一) | 1632년 | ? | |
서외손자 | 이지원(李枝遠) | 1636년 | ? | |
서3녀 | 김임순(金壬順) | 1612년 | ? | 이석망(李碩望)의 첩 |
서4녀 | 김오순(金午順) | 1618년 | ? | |
사위 | 창녕 성씨 성후룡(成後龍) | ? | ? | |
서외손자 | 성완(成琬) | 1639년 | ? | |
서외손자 | 성경(成璟) | 1641년 | ? |
좌의정 청음 김상헌(金尙憲), 장단부사 김상관(金尙寬), 경주부윤 청백리 김상복(金尙宓)의 형이며,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외조부이다. 광해군의 비 문성군부인의 이종 사촌으로, 광해군(光海君)과 가까운 외척이었지만 인조반정 후 김상용과 후손들은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6. 관련 문화재
- 김상용 순절비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5호
참조
[1]
링크
k gib
http://kgib.co.kr/ne[...]
[2]
실록
인조실록 15년 10월 28일 5번째기사
[3]
실록
숙종실록 30년 3월 15일 3번째기사
[4]
링크
풍수지리
http://poongsoojiri.[...]
[5]
인물
성종의 11남 경명군의 장녀
[6]
인물
정종(定宗)의 14남 정석군(貞石君)의 고손녀
[7]
인물
권철의 차남이자 권율의 형
[8]
인물
이명 김공명(金孔明)
[9]
인물
장렬왕후의 오빠 조윤석의 장인
[10]
인물
강석기의 아들이자 민회빈 강씨의 오빠 강문명(姜文明)의 부인
[11]
인물
이건명(조선)의 장인
[12]
인물
이명 김광추(金光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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