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김시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시민은 1554년 충청도에서 태어난 조선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로 활약하며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전투 중 전사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한 후 군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임진왜란 발발 후 진주판관으로 진주를 지키며, 사천, 고성 등지에서 왜군을 격퇴했다. 1592년 진주성 전투에서 4천 명의 군사로 2만 명의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전투 중 사망했다. 사후 선무공신에 봉해지고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용맹함은 일본군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일본 가부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김시민 - 김시민대교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비대칭 사장교인 김시민대교는 독특한 외관과 다양한 상징 조형물, 야간 경관 조명을 갖추고 있으나, 설계 오류로 인한 보강 공사 및 안전성 논란이 있다.
  • 조선의 진주목사 - 최립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최립은 1561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뛰어난 문장과 외교적 역량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 작성에 기여했으며, 당대 문인들과 교류하며 이름을 떨쳤으나 당쟁 속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고 사후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 조선의 진주목사 - 오정방
    오정방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무과 장원 급제 후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포도대장과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그의 고택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선무공신 - 이억기
    이억기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서 이순신, 원균과 함께 연합 함대를 구성하여 공을 세웠으나 정유재란 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였으며, 사후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그의 공을 기려 대한민국 해군의 잠수함 중 한 척이 그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 선무공신 - 이순신 (1553년)
    이순신(1553년)은 1553년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며, 임진왜란 때 수군으로 활약하며 선무공신에 책록되었고, 옥포 해전, 한산도 해전 등에서 공을 세운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김시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김시민 장군상
김시민 장군상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 공원)
이름김시민
한자 이름金時敏
면오(勉吾)
시호충무(忠武)
작호충무공(忠武公)
출생지조선 충청도 목천현 백전촌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사망지조선 경상도 진주목 진주성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시)
출생일1554년 9월 23일 (음력 8월 27일)
사망일음력 1592년 12월 26일 (양력 1593년 1월 28일)
정치
임금조선 선조
영의정최흥원
직책진주목사
임기1592년 7월 26일 ~ 1592년 11월 21일
군사 경력
국가조선
충성조선
복무조선군
복무 기간1578년 ~ 1592년
최종 계급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부대경상우도 육군
지휘경상우도 육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니탕개의 난
임진왜란
진주 대첩
사천•고성•창원 공방전
진해 전투
거창 사랑암 전투
서훈
서훈 내역선무공신 2등 추록
상락군 추봉
영의정 추증
상락부원군 추봉
가문
본관구 안동 김씨
관직
주요 근무부평 부사
훈련원 판관
진주 판관
진주 목사
경상우병사
사당
사당경남 진주시 충민사(忠愍祠)
경남 진주시 창렬사(彰烈祠)
충북 괴산군 충민사(忠愍祠)

2. 생애

1578년(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다.[2] 1583년 여진족 니탕개가 회령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다.[2]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하였다.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목사직을 대리하였다.[2] 진주로 돌아와 백성을 안심시키고 피난 갔던 백성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벽을 보수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왜군은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진격하였다. 이에 곤양군수 이광악,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이달, 곽재우 등과 합세하여 적을 요격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고성과 창원을 수복하였다.

이후 의병장 김면의 요청으로 구원병 1천 명을 이끌고 거창 사랑암에서 금산에서 남서진하는 왜군을 격파하여 승리하였다. 이 공으로 1592년 진주목사로 승진하였다.[2]

진주목사 취임 후에는 화약의 원료인 염초 5백여 근을 만들고 총통 70여 자루를 제작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시켜 성 방어 체계를 강화하였다.[3] 음력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조정에 보내 통정대부로 임명되었다.[3]

진주성 김시민 장군 동상


일본 장군 우키타 히데이에와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전라도로 가는 길을 확보하고 곽재우 의병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했다. 이에 맞서 김시민은 3,800명의 군사와 조총 170여 정을 확보하고, 대포, 화살, 돌, 도끼, 박격포 등을 사용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7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으며, 이 전투를 진주대첩이라 부른다.[1] 그러나 김시민은 전투 중 머리에 조총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2. 1. 유년 시절 및 성장 과정

김시민은 1554년 충청도에서 김충갑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고려 시대 장군 김방경의 12대손이다.[1] 어릴 때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하고, 남다른 기개를 보였다.[1]

8세 때(1561년)에는 마을 냇가에 나타난 큰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로 쏘아 없앴다는 일화가 있고, 9살에는 백전천에 살면서 가축을 습격하는 교룡(미즈치, 어린 용)을 퇴치했다는 전설도 있다.[1]

또한, 8세 때 길에서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던 중 천안군수의 행차를 막아서며 "일개 군의 하찮은 관리가 함부로 진중을 통과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꾸짖자, 군수는 김시민을 칭찬하며 길을 비켜 갔다고 한다.[1]

2. 2. 관직 진출과 군 개혁 노력

1578년(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었다.[1] 그러나 당시 조선군의 무기가 녹슬고 군기가 문란하여 전쟁 시 제대로 활동할 수 없다고 판단, 국방 최고 책임자인 병조 판서에게 군 개혁을 건의했지만 태평성대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1] 김시민은 여러 번 건의했지만 거절당하자, 결국 병조 판서 앞에서 군모를 벗어 발로 밟고 사직했다.[1]

1583년 니탕개가 여진의 반란을 일으켜 회령에서 조선 정부에 대항하자, 정언신 장군 휘하의 부사령관으로 참전하여 여진족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1]

2. 3. 임진왜란 발발과 진주성 방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진주목사 이경이 병으로 사망하면서, 김시민은 초유사 김성일의 명으로 진주목사 직을 대리하게 되었다.[2] 김시민은 진주로 돌아와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피난 갔던 백성들을 돌아오게 했으며, 성벽을 보수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군사 체계를 갖추었다.

왜군은 사천에 집결한 후 진주로 진격해 왔다. 이에 김시민은 곤양군수 이광악,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이달, 곽재우 등과 힘을 합쳐 적을 요격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고성과 창원을 수복하였다. 이후 김시민은 의병장 김면의 요청으로 구원병 1천 명을 이끌고 거창 사랑암에서 금산에서 남서쪽으로 진격하는 왜군을 격파하여 승리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1592년 진주목사로 승진하였다.[2]

진주목사로 취임한 후 김시민은 화약의 원료인 염초 5백여 근을 만들고, 총통 70여 자루를 제작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시켜 성을 지키는 방어 체계를 강화하였다. 음력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조정에 보내 통정대부로 임명되었다.[3]

2. 3. 1. 진주대첩 이전의 전투

1578년(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다.[2] 1583년 여진족 니탕개가 회령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다.[2]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고, 부임한 지 1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2] 진주로 돌아와 성민을 안심시키고,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채를 보수하고, 한편으로 군사 훈련으로 군사 체계를 갖추었다.

왜군은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진격하였다. 이에 곤양군수 이광악과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이달, 곽재우 등과 합세하고, 적을 중간에서 요격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고성과 창원을 수복하였다.

이어 의병장 김면의 요청을 받아, 구원병 1천을 이끌고 가서, 거창의 사랑암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군을 맞아 승전하였으며, 이 공으로 1592년 진주목사로 관직을 승진 제수받았다.[2]

김시민은 취임 후 염초(焰硝) 5백여 근을 만들고 총통(銃筒) 70여 병(柄)을 만들고, 따로 부대를 배정하여 숙달시키는 한편,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3]

음력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통정대부로 임명하였다.[3] 그 뒤 금산에서 적을 격파하여 사기가 충천하였다.

2. 4. 진주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후, 진주성의 관리가 된 김시민은 사천, 고성군, 진해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금산에서도 일본군을 격파하는 등 연승을 거두었다.

일본 장군 우키타 히데이에와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전라도로 가는 길을 확보하고 곽재우의 의병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했다.

이에 맞서 김시민은 백성들을 성 안으로 모으고 여자들에게 남장을 시켜 군사의 수를 많아 보이게 하는 전략을 썼다. 3,800명의 군사와 170정의 조총을 확보한 김시민은 대포, 화살, 돌, 도끼, 박격포 등을 사용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7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으며, 이 전투를 진주대첩이라 부른다.[1]

2. 4. 1. 전투 중 순국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했을 때, 김시민은 백성들을 성 안으로 불러 모으고 여자들에게 남장을 시켜 군사의 수를 많아 보이게 하는 전략을 썼다. 4,000명의 군대를 조직하여 7일간 격렬한 전투 끝에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는 조선군의 큰 승리였다.[1]

그러나 전투가 끝난 후 전장을 둘러보던 김시민은 숨어있던 일본군의 총에 왼쪽 이마를 맞고 쓰러져 38세(만 37~3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1]

우키타 히데이에와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이끄는 2만 명의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 공격했을 때, 3,800명의 조선군은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퇴했지만, 김시민은 전투 중 머리에 조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이후 김시민은 선무공신 2등과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1604년에는 상락군(上洛君)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사후

1604년(선조 37년) 선무공신 2등에 봉해지고, 상락군(上洛君)에 추봉되었다. 선조 40년에 사액을 받았으며, 1702년(숙종 35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상락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1]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민사가 없어지고, 진주성 내의 창열사에 함께 배향되었다.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1619년(광해군 11년) 음력 7월에 진주성에 세워졌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진주전상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라고도 하며, 시도유형문화재 제2호인 촉석정충단비와 나란히 서 있다. 1987년 당시 전투에서 숨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비의 뒷편에 계사순의단을 건립했다.[1]

경상남도 진주시에 조성된 혁신도시 소재 동명인 충무공동은 김시민 장군의 시호에서 비롯되었다.

4. 성격 및 평가

김시민은 어린 시절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하고, 남다른 기개를 보였다. 8세 때 천안군수의 행차에도 "일개 군의 하찮은 관리가 함부로 진중을 통과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꾸짖었다는 일화는 그의 담대함을 보여준다. 또한, 9세 때 백전촌의 교룡을 퇴치했다는 전설은 그의 용맹함을 보여주는 예시이다.[3]

1578년 무과에 급제한 후, 김시민은 조선군의 군기가 문란하고 무기가 녹슬어 있는 것을 보고 병조에 군대 개혁을 건의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기에 군기를 강화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이에 분개하여 사직할 정도로 다혈질적인 성격을 보였다.

임진왜란 발발 후, 진주성 전투에서 뛰어난 지휘력과 용맹함으로 왜군을 격퇴하였으나, 전투 중 총상을 입고 39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진주성 전투는 진주대첩이라 불리며 높이 평가받고 있다.

5. 일본에서의 인식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이 이끈 조선 관군은 일본군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전투에서 일본의 정예 병력이 패배하면서, 김시민은 조선군의 맹장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1] 일본군은 김시민을 모쿠소(モクソ) 또는 모쿠소 판관(木曾判官)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김시민의 직책인 목사(牧使)를 일본식 발음으로 읽고 비슷한 소리의 일본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1]

조선군 맹장 "모쿠소"에 대한 소식은 히데요시에게도 알려져, 이듬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을 반드시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 원인이 되었다.[1] 김시민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지만, 일본군은 진주목사가 교체되었다는 사실과 김시민의 사망 사실을 몰랐다. (나중에 징비록이 일본에서 발간되면서 알게 되었다)[1] 전투 중 살해당한 진주목사 서예원의 목은 모쿠소 판관의 것으로 알려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다.[1]

임진왜란이 끝난 후, "모쿠소"는 조선군의 맹장이자 충신이면서도 원한을 품고 일본을 전복하려는 원귀로 가부키의 소재가 되었다.[1] 이후 텐지쿠 도쿠베라는 별도의 가부키 캐릭터와 섞이면서, 원래 김시민과는 상관없는 가상 캐릭터가 되었다.[1] 진주성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하고 과감한 싸움은 적이었던 일본군에게도 높이 평가받았다.[1] 그 인상이 강렬하여, 에도 시대에는 김시민을 소재로 한 인물이 기소 판관(木曽判官, 모쿠소 호간)으로 가부키에 등장하기도 하였다.[1]

6. 가족 관계

관계이름
고조부김수형(金壽亨)
증조부김언묵(金彦默)
조부김석(金錫)
아버지김충갑(金忠甲)
어머니정경부인 창평 이씨(昌平李氏)
김시회(金時晦)
장인서팽수(徐彭壽)
부여 서씨(扶餘徐氏)
양자김치(金緻) (김시회의 아들)
며느리목씨(睦氏) (목첨의 딸)
손자안풍군(安豐君) 김득신(金得臣)
숙부김제갑(金悌甲)
사촌김시헌(金時獻)
숙부김인갑(金仁甲)
사촌김시양(金時讓)


7. 관련 작품


진주성 전투에서의 용맹하고 과감한 싸움은 후에 적이었던 일본군에게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그 인상이 강렬하여, 에도 시대에는 김시민을 소재로 한 인물이 기소 판관(木曽判官, 모쿠소 호간, 목사(牧使, 모쿠사) → 모쿠소로 변음됨)으로서 가부키의 등장인물로도 등장한다.

참조

[1] 웹사이트 Jinjuseong Fortress (진주성) https://english.visi[...] 2022-02-16
[2] 웹인용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김시민 http://people.aks.ac[...]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12-06
[3] 웹인용 선조실록 31권, 25년, 1592년 10월 6일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1592-10-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