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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근 (15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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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근은 1556년에 태어나 1623년 사망한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1586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사헌부 장령, 홍문관 부교리, 경주 부윤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다 뒤처져 탄핵받았으며, 광해군 치세에는 인목대비 폐비 논의에 참여했다. 인조반정으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어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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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근 (1556년)
인물 정보
이름남근
출생1556년
사망몰년 미상
국적조선
가족 관계
아버지남치신
어머니정부인 안동 권씨
부인증 정부인 남양 홍씨
자녀2남

2. 생애

남근은 남세건(南世健)의 손자이자 남응운(南應雲)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신세량(辛世良)의 딸이다. 그는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 유생으로 있다가 1586년(선조 19) 별시 문과와 9월 1일 문사들에게 실시한 중시(重試)에 연이어 장원으로 합격하였다.[1]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 발발 직후, 사헌부 지평이었던 남근은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했으나, 뒤처졌다는 이유로 5월 체직 및 탄핵을 받았다.[1] 이후 호종 지연으로 인해 대간 직책 수행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1598년(선조 31) 12월 사헌부 장령으로 복귀한 남근은 1599년(선조 32) 1월 용산 창관을 거쳐 다시 사헌부 장령, 2월 13일 종묘령, 다음날 사간원 사간으로 임명되었다. 4월 23일 홍문관 부수찬, 6월 24일 종부시정, 8월 8일 홍문관 부교리, 12월 10일 홍문관 수찬을 역임했다. 1600년(선조 33) 1월 5일 동부승지가 되었고, 2월 승지, 3월 우부승지, 7월 우승지로 승진했다. 그러나 조카 남이공(南以恭)과의 불화로 인해 김신국(金藎國) 등 특정 인물을 요직에 추천하여 비판을 받았다.

1602년(선조 35) 2월 6일 호조참의가 되었다가 2월 15일 승정원우승지로 복귀했고, 윤2월 참찬관, 3월 25일 도승지를 역임하며 경연에 참여했다. 선조가 김제남의 딸을 계비로 맞이하는 가례 때, 도승지임에도 가례도감의 전교관을 맡아 시론(時論)의 비판을 받았다. 8월 1일 가례도감 시상에서 1자급 가자되었다. 1603년(선조 36) 사은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12월 귀국했다. 1604년(선조 37) 9월 3일 한성부 우윤이 되었다.

한성부 우윤 재직 중에도 경연 특진관으로 활동했다. 1606년 8월 관기를 데리고 놀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추고당했다. 1607년(선조 40) 2월 25일 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4월 25일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부임했다. 경주부윤 재직 중 기생 사월(四月)의 술맛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전 판관 안유성(安由省)을 꾸짖었고, 이 때문에 판관이 곤장을 써서 기생이 죽게 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8월 10일 경상도암행어사로부터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강릉부사로 복귀했으나, 경주부윤 시절 백성 14명을 살해한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이때 그를 옹호한 사헌부 지평 김성발, 장령 박사제, 대사헌 기륵, 지평 박증현 등이 스스로 사직을 청하였고, 사간원에서 사헌부의 체직을 청하기도 했다. 1612년(광해군 4) 판결사, 활인서제조를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의금부지사 유공량과 함께 김제남의 집을 드나든 무속인들을 문초했다. 1614년(광해군 6)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예조참의, 예조참판, 승정원가승지(假承旨)를 역임했다. 그해 12월 부묘 도감 도제조 이하 관원들을 시상할 때 1계급 특진되었다. 1616년(광해군 8) 예조참판으로 정헌계(正憲階)에 올랐고, 행 대사간이 되었다. 이후 선왕에게 존호를 올릴 것을 여러 번 건의했으며, 그해 8월 대사헌이 되었다. 그해 11월 해주 사건 추국 때 대신·판의금·추관의 출입시간이 늦어 이를 탄핵하였다.

1617년(광해군 9) 대사헌으로 인목대비 폐비 논의에 참여하고, 김제남과 최기(崔沂)를 공격했다. 1618년(광해군 10) 비변사 당상으로 군병 조발 논의에 참여했다. 1619년(광해군 11) 좌윤, 대사헌을 역임했다. 1620년(광해군 12) 지돈녕부사, 대사헌을 역임했다. 1621년(광해군 13) 승문원 제조, 대사헌을 역임했다. 1622년(광해군 14) 대사헌, 존숭도감 제조를 역임했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 삭탈관작되고 유배되어 사망했다.

2. 1. 초기 활동

남근은 참판 남세건(南世健)의 손자이자 공조참판을 지낸 남응운(南應雲)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신세량(辛世良)의 딸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 유생으로 있다가 1586년(선조 19) 별시 문과와 9월 1일 문사들에게 실시한 중시(重試)에 연이어 장원으로 합격하였다.[1]

2. 2. 임진왜란과 그 이후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 발발 직후, 사헌부 지평이었던 남근은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했으나, 뒤처졌다는 이유로 5월 체직 및 탄핵을 받았다.[1] 10월 23일에는 삭직 청구까지 받았으나, 12월 4일 사간원의 요청으로 취소되었다. 이후에도 호종 지연으로 인해 대간 직책 수행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1598년(선조 31) 12월, 사헌부 장령으로 복귀한 남근은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을 탄핵했다. 1599년(선조 32) 1월 용산 창관을 거쳐 다시 사헌부 장령, 2월 13일 종묘령, 다음날 사간원 사간으로 임명되었다. 4월 23일 홍문관 부수찬, 6월 24일 종부시정, 8월 8일 홍문관 부교리, 12월 10일 홍문관 수찬을 역임했다. 1600년(선조 33) 1월 5일 동부승지가 되었고, 2월 승지, 3월 우부승지, 7월 우승지로 승진했다. 그러나 조카 남이공(南以恭)과의 불화로 인해 김신국(金藎國) 등 특정 인물을 요직에 추천하여 비판을 받았다.

1602년(선조 35) 2월 6일 호조참의가 되었다가 2월 15일 승정원우승지로 복귀했고, 윤2월 참찬관, 3월 25일 도승지를 역임하며 경연에 참여했다. 선조가 김제남의 딸을 계비로 맞이하는 가례 때, 도승지임에도 가례도감의 전교관을 맡아 시론(時論)의 비판을 받았다. 8월 1일 가례도감 시상에서 1자급 가자되었다. 1603년(선조 36) 사은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12월 귀국했다. 1604년(선조 37) 9월 3일 한성부 우윤이 되었다.

한성부 우윤 재직 중에도 경연 특진관으로 활동했다. 1606년 8월 관기를 데리고 놀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추고당했다. 1607년(선조 40) 2월 25일 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4월 25일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부임했다.

2. 3. 경주 부윤 시절과 파직

경주부윤으로 재직 중 기생 사월(四月)의 술맛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전 판관 안유성(安由省)을 꾸짖었고, 이 때문에 판관이 곤장을 써서 기생이 죽게 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8월 10일 경상도암행어사로부터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2. 4. 광해군 치세와 인조반정

1610년(광해군 2) 강릉부사로 복귀했으나, 경주부윤 시절 백성 14명을 살해한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이때 그를 옹호한 사헌부 지평 김성발, 장령 박사제, 대사헌 기륵, 지평 박증현 등이 스스로 사직을 청하였고, 사간원에서 사헌부의 체직을 청하기도 했다.

1612년(광해군 4) 판결사, 활인서제조를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의금부지사 유공량과 함께 김제남의 집을 드나든 무속인들을 문초했다. 1614년(광해군 6)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예조참의, 예조참판, 승정원가승지(假承旨)를 역임했다. 그해 12월 부묘 도감 도제조 이하 관원들을 시상할 때 1계급 특진되었다. 1616년(광해군 8) 예조참판으로 정헌계(正憲階)에 올랐고, 행 대사간이 되었다. 이후 선왕에게 존호를 올릴 것을 여러 번 건의했으며, 그해 8월 대사헌이 되었다. 그해 11월 해주 사건 추국 때 대신·판의금·추관의 출입시간이 늦어 이를 탄핵하였다.

1617년(광해군 9) 대사헌으로 인목대비 폐비 논의에 참여하고, 김제남과 최기(崔沂)를 공격했다. 1618년(광해군 10) 비변사 당상으로 군병 조발 논의에 참여했다. 1619년(광해군 11) 좌윤, 대사헌을 역임했다. 1620년(광해군 12) 지돈녕부사, 대사헌을 역임했다. 1621년(광해군 13) 승문원 제조, 대사헌을 역임했다. 1622년(광해군 14) 대사헌, 존숭도감 제조를 역임했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 삭탈관작되고 유배되어 사망했다.

3. 기타

조선 초기에 정랑을 지낸 동명이인 남근(南瑾)은 남곤의 종조부이자 임사홍의 외종조부였다. 그는 또한 한자 이름도 같은 동명이인의 먼 방조에 해당되었다.

양반이 노비 첩에게서 낳은 자식들에게는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단, 1617년(광해군 9년) 9월 23일 대사헌 재직 중, '신의 동성(同姓) 얼삼촌(孽三寸)이 이달 15일에 죽어서 성복하기 전입니다.'라고 광해군에게 보고하였다. 이는 할아버지의 여자 노비에게서 나온 얼자 얼삼촌(孽三寸)의 상사 때에도 상복을 입었다는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2]

참조

[1] 실록 문사들에게 중시를 보여 이장영 등을 뽑고, 선비들을 시험보여 남근 등을 뽑다 선조수정실록 1586-09-01
[2] 일기 남근이 집안 상사로 조정 행사에 정성을 다하지 못한 점으로 사직을 청하다 광해군일기 161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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