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남원 전투는 1597년 정유재란 시기, 일본군이 전라도 점령을 목표로 남원성을 공격하면서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군은 칠천량 해전 승리 이후 육군을 투입하여 남원성을 포위 공격했다. 남원성에는 조선군과 명나라 연합군이 주둔했으나, 일본군의 맹공에 성이 함락되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전투로 전라도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고, 이후 일본군은 전주를 함락시킨 뒤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했다. 남원 전투는 조선군, 명나라 군, 남원성 백성을 포함해 1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를 냈으며, 패배의 책임을 물어 명나라 장수 양원과 진우충이 처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남원시의 역사 - 남원군
남원군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지명과 행정구역 변화를 겪은 지역으로, 고대 세력의 영향력 아래 신라시대에 남원이라는 명칭을 얻어 조선시대 남원도호부로 발전했으며, 남원시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남원시의 역사 - 보덕국
보덕국은 668년 고구려 멸망 후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통합하고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익산에 건국한 국가이며, 고구려의 국호를 사용하고 자치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안승의 신라 귀속과 반란 진압으로 멸망했다. - 1597년 일본 - 벽파진 해전
- 1597년 일본 - 어란포 해전
어란포 해전은 1597년 칠천량 해전 이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이며,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이고 명량 해전 승리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 1597년 한국 - 울산성 전투
울산성 전투는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한 전투로, 두 차례의 전투에서 연합군은 일본군에 패배했으며, 이는 정유재란의 전황과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597년 한국 - 벽파진 해전
남원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분쟁 명칭 | 남원 전투 |
전체 전쟁 | 정유재란 |
날짜 | 1597년 음력 8월 13일 ~ 음력 8월 16일 (1597년 9월 23일 ~ 9월 26일) |
장소 | 전라도 남원부 남원성 |
결과 | 일본군의 승리, 남원성 함락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 왕국 |
교전국 2 | 명나라 |
교전국 3 | 도요토미 정권 |
지휘관 | |
조선 지휘관 | 전라병사 이복남 |
조선 지휘관 2 | 광양현감 이춘원 |
조선 지휘관 3 | 구례현감 이원춘 |
조선 지휘관 4 | 조방장 김경로 |
조선 지휘관 5 | 진암현감 마응방 |
조선 지휘관 6 | 전라도방어사 오응정 |
조선 지휘관 7 | 남원부사 임현 |
조선 지휘관 8 | 판관 이덕회 |
조선 지휘관 9 | 접반사 정기원 |
조선 지휘관 10 | 의병장 황대중 |
조선 지휘관 11 | 별장 신호 |
조선 지휘관 12 | 의병장 조경남 |
명나라 지휘관 | 부총병 양원 |
명나라 지휘관 2 | 부총병 양호 |
명나라 지휘관 3 | 중군 이신방 |
명나라 지휘관 4 | 천총 장표 |
명나라 지휘관 5 | 천총 생승선 |
일본 지휘관 | 우키타 히데이에 |
일본 지휘관 2 | 도도 다카토라 |
일본 지휘관 3 | 오타 가즈요시 |
일본 지휘관 4 | 고니시 유키나가 |
일본 지휘관 5 | 소 요시토시 |
일본 지휘관 6 | 와키자카 야스하루 |
일본 지휘관 7 | 다케나카 시게토시 |
일본 지휘관 8 | 가토 요시아키 |
일본 지휘관 9 | 시마즈 요시히로 |
일본 지휘관 10 | 하치스카 이에마사 |
일본 지휘관 11 | 모리 가쓰노부 |
일본 지휘관 12 | 이코마 가즈마사 |
병력 규모 | |
조선군 | 700 ~ 1,000명 |
명나라군 | 3,000명 |
일본군 | 50,000 ~ 68,000명 |
총 병력 (조선 + 명) | 군민 7,000명, 전라병마군 1,000명, 명나라군 3,000명 (총 11,000명) |
일본군 총 병력 | 58,000명 |
사상자 규모 | |
조선 + 명 사상자 | 3,726명 |
조선 + 명 사상자 상세 | 군민 7,000명, 전라병마군 1,000명, 명나라군 3,000명 등이 모두 전사 및 살해됨 |
관련 전투 | |
정유재란 | 기문포 해전 칠천량 해전 고령 전투 황석산성 전투 어란포 해전 직산 전투 벽파진 해전 명량 해전 석주관 전투 제1차 울산성 전투 절이도 해전 제2차 울산성 전투 사천성 전투 왜교성 전투 노량 해전 남해왜성 소탕전 |
2. 배경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 이들은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격파하고, 9월 17일(음력 8월 7일) 구례를 함락하는 등 초기 공세에 성공했다.[4] 일본 육군 1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 4군 시마즈 요시히로, 우키타 히데이에, 3군 구로다 나가마사 등은 구례에서 합류하여 일부는 수군 대장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등과 연락하기 위해 남원 동북과 서남으로 진격했다.
조선과 명나라는 연합군을 편성하여 남원성을 방어하려 했다. 남원성에는 명나라 총병 양원이 이끄는 3,000명의 군대와 전라병사 이복남 등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광양현감 이춘원, 조방장 김경로 등이 지원군으로 왔다. 한편,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과 전라부윤 박경신은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주성에 주둔했다. 명나라 장수 모국기는 성주, 오유충은 충주에 주둔했고, 조선군은 장수 제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지휘 아래 이덕형, 김수 등이 흥복군을 조직해 8도에서 모병하고 명군의 계획에 따라 분파했다. 경상좌수사 성윤문, 방어사 권응수는 경주에 주둔해 조령을 막기로 했다.
2. 1. 조선과 명나라의 방어 태세
總兵|총병|독음=총빙중국어 양원은 남원성에 도착하여 방어 시설을 강화했다. 성벽을 높이고, 성 밖에 총안을 설치하고, 해자를 깊게 파는 등 방어 태세를 갖췄다.[4] 남원성에는 명나라 군 3,000명과 조선군 1,000~3,0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주성에는 명나라 遊擊將|유격장|독음=유격장중국어 진우충이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으나, 남원성에 대한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 2. 일본군의 침공 준비
정유재란 이후, 일본과 명나라 사이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출병을 명령했다. 1597년의 임무로서 "전라도를 모두 징벌하고, 더 나아가 충청도에도 출격해야 할 것"이 명해졌다.[4]정유재란이 시작된 7월,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후 일본군은 우군, 좌군, 수군으로 나뉘어 육로와 해로를 통해 전라도를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다.
3. 전투 과정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을 둘러싸고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명나라는 양원을 총병으로 파견하여 남원성의 방비를 강화했다. 성벽을 증축하고, 총안을 뚫었으며, 대포를 설치하고 해자를 깊게 파는 등 방어 시설을 보강했다.[5]
일본군이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온다는 보고에 성 안의 백성들은 동요하여 도망쳤고, 양원이 이끄는 요동 기병 3,000명만이 성 안에 남았다.[5] 남원성에는 양원 외에도 이신방 등 약 3,000명의 명나라 군사와 이복남 등이 이끄는 약 1,000~3,000명의 조선군이 합세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8월 12일, 일본군은 남원에 도착하여 성을 포위하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요시아키 등 주요 장수들을 중심으로 남원성을 사방으로 포위했다.
방면 | 지휘관 |
---|---|
남면 | 우키타 히데이에, 도도 다카토라, 오타 가즈요시 |
서면 |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와키자카 야스하루, 다케나카 시게토시 |
북면 | 가토 요시아키, 시마즈 요시히로 |
동면 | 하치스카 이에마사, 모리 요시나리, 이코마 가즈마사 |
전투는 일본군의 조총 사격과 조선군의 승자총통 응사로 시작되었다. 일본군이 쏜 조총 탄환은 성을 지키는 조선군에게 종종 명중했다. 명나라 유격 진우충이 전주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남원 수비군의 구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지원하지 않았다.[5]
9월 24일, 일본군은 참호를 짚과 흙으로 채우고 불에 탄 집 안에 몸을 숨겼다. 9월 25일에는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9월 26일 밤, 일본군은 두 시간 동안 남원을 포격했고, 병사들은 성벽을 기어올라 짚을 사용하여 경사로를 만들어 성을 함락시켰다.[5]
3. 1. 성 외곽 전투 (1597년 음력 8월 12일~13일)
1597년 9월 22일, 왜군은 남원 교외에 진영을 설치하고 정찰대를 파견해 남원성의 방어 태세를 확인했다. 9월 23일, 왜군은 성 외곽을 포위하고 소수 병력을 동원해 조총 사격을 가했다. 이에 조명 연합군은 승자총통과 비격진천뢰 등을 발사해 이를 격퇴했다. 양호는 성 주위에 마름쇠를 대량 설치하고 4대문 밖의 석교를 제거하여 왜군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5]일본군은 요새의 방어력을 시험하기 위해 100명의 병사를 먼저 보냈다.
전투는 먼저 사격전으로 시작되어, 일본군은 산병을 성에 접근시켜 조총을 쏘았다. 이에 조선군은 승자총통이라는 원시적인 화기로 응전했으나 명중하지 못했다. 한편, 일본군이 쏜 조총 탄환은 종종 성을 지키는 조선군에게 명중했다.
3. 2. 본격적인 전투 준비 (1597년 음력 8월 14일)
1597년 음력 8월 14일부터 왜군은 공성기구를 제작하고 참호를 메꾸는 등 본격적인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5] 일본군의 총공세가 임박해지자 명나라 총병 양원은 전주성의 진우충에게 두 차례나 구원을 요청했으나, 진우충은 전주성 방어를 핑계로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5] 결국 양원은 외부 지원 없이 왜군에 포위되었다.3. 3. 일본군의 총공세와 남원성 함락 (1597년 음력 8월 16일)
1597년 음력 8월 16일, 일본군은 남원성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했다. 일본군은 남원성 동남쪽에 높은 누각을 설치하고 그 위에서 조총 사격을 가하여 조명 연합군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동시에, 성 밖의 해자를 메우고 긴 사다리를 이용하여 성벽을 넘는 공격을 시도했다.[5]조명 연합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일본군은 명나라군이 지키던 서문과 남문을 돌파하여 성 안으로 진입했다. 이어서 동문을 점령하고 북문을 지키던 조선군을 포위했다. 결국 북문을 지키던 전라병사 이복남과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등은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하며 자결했다.[2] 명나라군 역시 동문을 지키던 중군 이신방, 남문의 천총 장표, 서문의 천총 모승선 등이 전사했다.[2]
명나라 총병 양원은 겨우 50기의 부하만 데리고 탈출했고,[2] 접반사 정기원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이 전투로 조명 연합군 4,000명과 남원성의 군민 7,000명이 전사하거나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2]
일본군은 요새의 방어력을 시험하기 위해 100명의 병사를 먼저 보냈고, 9월 24일에는 참호를 짚과 흙으로 채운 뒤 불에 탄 집 안에 몸을 숨겼다. 9월 25일, 일본군은 수비대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9월 26일 밤, 일본군은 두 시간 동안 남원을 포격했고, 그동안 병사들은 성벽을 기어올라 신선한 짚을 사용하여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경사로를 만들었다. 젖은 벼 이삭을 태울 수 없었던 수비대는 일본군의 맹공에 속수무책이었고 결국 요새는 함락되었다.
양원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100명의 병사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여 전주에 도착했지만, 그곳은 이미 버려진 상태였다. 전주의 방어를 맡았던 명나라 장수 진유원은 양원이 보낸 구원 요청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남원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도주했다. 양원은 한성으로 이동하여 다음 주에 도착했다.
3. 4. 전주성 함락 (1597년 음력 8월 19일)
남원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전주성으로 진격했다. 전주성을 지키던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과 전주부윤 박경신은 일본군과 싸웠지만, 결국 전주성은 함락되었다.양원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100명의 병사와 함께 탈출하여 전주에 도착했지만, 그곳은 이미 버려진 상태였다. 전주성 방어를 맡았던 명나라 장수 진유원은 양원이 보낸 구원 요청을 무시했고, 남원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도주했다.[1] 양원은 한성으로 이동하여 다음 주에 도착했다.
남원성을 공략한 일본군 좌군과 수군, 황석산성을 공략한 우군은 함께 전주로 진격했다. 진충이 지휘하는 명나라·조선군은 두려워하여 도망쳤고, 이 방면에서의 방위 체제는 붕괴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전주를 점령했다.
이후 일본군은 전라도·충청도를 소탕하며 노예 사냥과 코 베기를 자행했다. 소탕을 완료한 후, 일본군은 축성을 위해 조선 남안 지역으로 귀환했다.
한편, 명나라 군에서는 양원과 진충이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2]
4. 결과 및 영향
남원성 전투의 패배로 전라도 지역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고, 이는 조선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했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보급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하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이 전투는 군, 관, 민이 함께 싸우다 희생한 전투로, 이후 만인의총이 건립되어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남원 전투에서 조선군이 참패하면서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빼앗겨 조선 측의 식량 문제가 심각해졌고, 반면 일본군의 식량 문제는 해결되었다.
양원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한성으로 이동했고, 명나라 군에서는 후에 양원이 죄를 물어 처형되었다.
4. 1. 인명 피해
조선군, 명나라 군, 그리고 남원성 백성들을 포함하여 1만 명이 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2][3][5] 일본군의 피해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나라 군에서는 이신방, 장표, 모승선 등의 부장이 전사했고, 조선군에서는 이복남(전라병사), 임현(남원부사), 김경로(조방장), 정기원(접반사), 신호(별장), 이원춘(구례현감), 마응방(진안현감), 오응정(방어사), 이덕휘(판관), 황대중(의병지휘관) 등 여러 장수가 모두 전사했다.[2] 명·조선 연합군은 5,000명이 전사했다.[2]
5. 역사적 평가 및 의미
남원 전투는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와 비견될 만큼 군, 관, 민이 함께 싸우다 희생한 전투이다. 조선은 전투 후 이곳에서 전사한 장수들을 기리는 충렬사에 배향하고, 시체들을 모아 만인의총을 조성하였다.[1] 만인의총은 여러 차례 이장 끝에 1981년 4월 1일 사적 제272호로 재지정되었다.[1] 또한, 전투 이후에도 석주관에서 항전을 이어가다 전사한 이들을 기려 구례에는 석주관칠의사묘가 세워졌다.[1]
남원 전투에서 조선군이 참패하면서 전라도 지역은 일본군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다.[2]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상실하며 조선은 식량 문제에 직면했고, 반대로 일본군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2] 이로 인해 수많은 남부 백성들이 유린당하고 짓밟히는 고통을 겪었다.[2]
참조
[1]
웹사이트
A critique of Samuel Hawley's the Imjin War: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 Part 2: The second invasion | Great Ming Military
https://greatmingmil[...]
2019-08-16
[2]
서적
朝鮮の役
[3]
서적
朝鮮の役
[4]
문서
二月二十一日付朱印状『浅野家文書』等
[5]
서적
懲毖録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