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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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능주군은 신라 시대 이래 여러 행정 구역의 변화를 겪었으며, 특히 고려 시대에는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능주목으로 승격되었으며, 인조 대왕의 모후인 인헌왕후 구씨의 관향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화순군에 통합되어 현재의 화순군이 되었다. 현재 능주면, 도곡면, 춘양면, 한천면, 이양면, 도암면, 청풍면 등의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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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주군 | |
|---|---|
| 지도 | |
| 기본 정보 | |
| 국가 | 대한민국 |
| 위치 | 전라남도 동북부 |
| 면적 | 383.82km² |
| 설치 | 1895년 6월 23일 |
| 폐지 | 1914년 3월 1일 |
| 정치 | |
| 도 | 전라남도 |
| 군청 소재지 | 능주면 |
| 하위 행정 구역 | |
| 면 | 능주면 도곡면 이서면 동복면 남면 대지면 북면 화순면 서면 일도면 이동면 |
| 역사 | |
| 시대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
| 1895년 6월 23일 | 23부제 시행으로 나주부 능주군으로 설치 |
| 1896년 8월 4일 | 13도제 시행으로 전라남도 능주군으로 개편 |
| 1914년 3월 1일 | 부군면 통폐합으로 화순군으로 통합, 능주면으로 격하 |
2. 역사
신라 하대(下代)에 후백제의 영역이 되었다.[1]
1895년 23부제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나주부 관할 능주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13도제로 환원되면서 전라남도에 3등군으로 속했다.[1] 1908년 화순군이 능주군에 합병되었다.[1] 1914년 능주군과 동복군이 통합되어 지금의 화순군이 되었다.[1]
2. 1. 선사 시대 ~ 통일 신라
조선대학교 최미노 교수에 의해 한천면 모산리 도산마을 옆 구릉 능주-화순간 도로확장 공사장에서 뗀석기(타제석기)가 수습되었다.[1] 단군조선 시대인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는 많은 양의 고인돌 유적과 도암면의 천태리 유적이 확인되었다.[1] 천태리 유적에서는 청동기나 토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다수의 석기가 출토되었다.[1]열국시대 초기에는 마한에 속했다.[1] 서기 9년에 마한이 백제에 흡수되어 패망하자 영산강 유역 중심의 전남지역은 마한에 잔류해 침미다례를 형성했다.[1] 이후 근초고왕대에 침미다례가 백제에 복속되었다.[1]
무령왕 대에 침미다례는 백제에 완전히 흡수되어 능주에 남방(南方)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이 설치되었다.[1] 이릉부리군 산하에는 잉리아현(仍利阿縣)과 파부리군(波夫里郡)이 있었다.[1] 도암면 용강리에서는 널무덤(토광묘) 4기가 발견되었고 토기와 낫 등이 출토되었다.[1]
660년 신라가 백제를 정복하자 당나라가 백제 고토를 가로채 웅진 도독부를 설치했다.[1] 신라는 이를 무시하고 발라주(發羅州)를 설치하여 이릉부리군도 이에 속했다.[1] 671년 신라는 당나라를 축출하고 백제 고토를 수복했다.[1]
685년 발라주가 무진주로 변경되어 이에 속했다.[1] 757년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지자 이릉부리군은 능성군(綾城郡)으로 개명하고 잉리아현은 여미현(汝湄縣), 파부리현은 부리현(富里縣)으로 개명하여 능성군의 관할에 들어갔다.[1] 신라 시대의 유적으로는 쌍봉사의 철감선사탑(국보 57호)과 탑비(보물 170호)가 전해진다.[1]
2. 2. 고려 시대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산하 현들의 명칭이 각각 여미에서 화순(和順)으로, 부리에서 복성(福城)으로 개명되었다. 복성현은 보성군으로 편입되었다.[1]1018년(고려 현종 9년) 능성군이 현으로 강등되어 나주목 관할이 되었다.[1]
1143년(고려 인종 21년) 현령(縣領)이 설치되고 철야현(나주시 봉황면)을 속현으로 편입시켰다.[1]
1310년(고려 충선왕 2년) 왜구의 침입으로 장흥부가 철야현으로 이전하였다.[1]
1380년(고려 우왕 6년) 왜구가 능성까지 침입해 주민들이 성을 쌓고 항전했다.[1]
2. 3. 조선 시대
1415년(조선 태종 15년) 철야현이 남평현으로 편입되었다.[1]1516년(태종 16년) 화순과 합병하여 순성현(順城縣)이 되었다가 2년 후 재분할되었다.[1]
1435년(세종 17년)에 화순과의 재합병이 논의되었다.[1]
1519년 조광조가 유배되었다가 한 달 뒤 사사되었다.[1]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홍헌과 최경희가 800명의 병력을 시작으로 의병을 일으켰고, 이를 주축으로 전라우의군(全羅右義軍)이 결집되었다. 전라우의군은 경상도 지역으로 진출하여 제1차 진주성 전투 및 성주, 개녕 수복전 등 영남 일대에서 크게 활약했다. 전남우의군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대부분 전사하여 소멸했다.[1]
1597년(선조 40년) 화순현이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폐현되어 능성에 속했다가 1611년(광해군 3년) 복구되었다.[1]
1632년(인조 10년) 인조대왕의 모후인 인헌왕후 구씨의 관향이라 하여 능주목(陵州牧)으로 승격되었다. 능주목은 1759년에 8면[1], 1789년에는 10면 159리[2], 1864년에는 12개면[3], 통폐합 이전인 1914년에는 화순 지역까지 17면 323리로 변동되었다.
1641년(인조 19년) 나주에 전라우영이 설치되자 능주목사가 우영의 토포사를 겸했다.[1]
2. 4. 일제 강점기 ~ 현대
1895년 23부제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나주부 관할 능주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13도제로 환원되면서 전라남도에 3등군으로 속했다.[1]1908년 화순군이 능주군에 합병되었다.[1]
1914년 능주군과 동복군이 통합되어 지금의 '''화순군'''이 되었다.[1]
3. 구 능주지역 읍면의 연혁
화순군 능주 지역은 조선 시대 능주목에 속했으며, 여러 차례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현재의 읍면들이 되었다. 각 읍면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 '''춘양면''': 1914년 단양면과 부춘면이 합병되어 춘양면이 되었다. 6.25 전쟁으로 청사가 소실되었으나, 이후 한옥으로 재건축되었고, 1981년에 신축 및 증축되었다.[4]
- '''한천면''': 함양 박씨 일족이 정착하면서 '한천'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1908년 금오면과 운룡면이 한천면으로 통합되었고, 여순사건과 6.25 전쟁으로 면사무소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1963년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현재에 이른다.[4]
- '''이양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하는 지명으로, 1932년 도림면과 송석면이 합병되어 이양면이 되었다. 6.25 전쟁으로 청사가 불타 1956년 오류리에 면사무소를 신축 이전했다.[4]
- '''도암면''': 1914년 도장면과 호암면이 통합되어 도암면이 되었다. 6.25 전쟁으로 면사무소가 불타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후 현재 위치에 청사를 신축 및 증축하였다.[4]
3. 1. [[능주면]]
- 1908년 능주군 17면 중 주내면(州內面)과 회덕면(懷德面)으로 나뉘어 있었다.[4]
- 1910년 주내면과 회덕면 사무소가 개청했다.[4]
- 1913년 능주군이 화순군으로 개명하면서 주내면의 군청이 화순면으로 이전했다.[4]
-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폐합으로 주내면이 '''능주면'''으로 개명하고 회덕면을 합병했다.[4]
- 해방 후인 1948년 면 청사를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4]
- 1950년 7월 6.25 전쟁으로 면청사가 소실되어 면화 수집 창고가 일시 면청사로 사용되었다.[4]
- 이후 면 청사가 현재의 건물로 신축되었다. 현재 법정 12개리, 행정 17개리가 있다.[4]
3. 2. [[도곡면]]
1864년 고종 즉위년에 망해면(望海面)과 북면(北面)이 있었고, 1896년 고종 33년에는 오도면(吾道面)과 화남면(花南面), 대곡면(大谷面)으로 나뉘어 있었다. 1910년에 3면 사무소가 개청했다.[4]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폐합으로 위 3면과 남평군 저포면 일부를 통폐합해 도곡면을 설치했다.[4]
1950년 6.25 전쟁으로 면사무소가 소실되어 누에창고가 임시청사로 사용되었다.[4]
1956년 현재의 위치에 청사를 신축 이전했다. 1980년과 1990년 두 차례 면사무소를 신축, 증축했다.[4]
1983년 주도리(周道里)를 화순읍으로 편입했다.[4] 이후 12개 법정리, 25개 행정리, 32개 마을을 관할하게 되었다.[4]
3. 3. [[춘양면]]
1744년 능주목 10개 면 중 하나인 남일면(南一面)이었다.[4] 1864년 석정면(石亭面)과 개천면(開天面)으로 분할되었다가,[4] 1895년 전후에 각각 단양면(丹陽面)과 부춘면(富春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4] 1910년에 면사무소가 설치되었고,[4] 1914년 양면이 합병되어 춘양면이 되었다.[4]1930년경 현재 위치에 한옥 면사무소를 새로 지었다.[4] 1950년 6.25 전쟁으로 청사가 불타 숙직실을 임시 청사로 사용하다가,[4] 2년 후 한옥으로 다시 지었다.[4] 1981년에 기존 청사를 철거하고 새로 지었으며, 1988년에 증축했다.[4] 같은 해 화림1리를 1리와 3리로 분할했다.[4] 현재 법정리 14개, 행정리 26개, 자연마을 35개 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4]
3. 4. [[한천면]]
1652년 함양 박씨 일족이 이주해 집을 짓고 한천당(寒泉堂)이라 이름 지은 뒤 한천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4] 영조 시대에는 능주목 동면의 일부 30개 마을 중 20개 마을이 한천면에 속했으며, 그 중 한천리(寒泉里)가 있었다.[4] 순조 시대에는 금오면(金鰲面) 하금전리(下金田里)로 기록되었고, 한천면, 동면 등으로도 불렸다.[4]1864년에는 금오면(金鰲面)과 운룡면(雲龍面)으로 기록되었고,[4] 1896년에는 영내(嶺內), 영외(嶺外) 2개 면이 각각 13개 마을씩 관할했다.[4] 1908년 두 면을 한천면으로 통폐합했고, 1910년 한계리의 박귀휴 면장 사랑채에 면사무소를 설치했다.[4]
1934년 한옥 청사를 신축했으나, 1949년 여순사건으로 면사무소가 불타 한천국민학교 교실 중 하나를 빌려 이전했다.[4] 6.25 전쟁으로 한천국민학교가 소실되어 이전했고, 1955년 이양면의 한옥 한 채를 이전해와 면사무소로 사용했다.[4]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11개 법정리, 20개 행정리, 27개 마을을 관할하게 되었다.[4] 1966년 반곡리를 중심으로 5개리에 영외출장소가 설치되었고,[4] 1987년과 1988년에 현재 위치에 면사무소를 신축 및 증축했다.[4] 1990년 영외출장소가 반곡리에서 동가리로 이전되었다.[4]
3. 5. [[이양면]]
1531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양원(李陽院)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4] 이양면의 중심 마을인 오얏골(李陽)에서 면 이름이 유래했으나, 한자가 자두(李)에서 배(梨)로 바뀌었다.[4]영조와 정조 시대에는 능주목의 상동변면(上東邊面)과 하동변면(下東邊面)으로 나뉘어 있었다.[4] 1854년 고종 즉위년 전후에는 인물면(人物面)과 쌍봉면(雙峯面)으로 기록되었고,[4] 1895년 행정 개편 당시에는 도림면(道林面)과 송석면(松石面)으로 이름이 바뀌어 26개 마을을 관할했다.[4] 1910년에는 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4]
1914년에는 각 면의 관할리가 9개와 8개로 통폐합되었다.[4] 1932년에는 두 면을 합쳐 17개 마을을 관할하는 이양면(梨陽面)이 되었고, 옛 도림면 사무소 자리에 면사무소를 설치했다.[4]
6.25 전쟁으로 청사가 불타 누에 창고를 임시 청사로 사용했다.[4] 1956년에는 오류리에 면사무소를 새로 지어 이전했다.[4] 1966년에는 묵곡리에 4개 리를 관할하는 묵곡출장소가 설치되었다.[4] 1979년에는 면사무소를 신축하여 이전했다.[4] 1998년에는 묵곡출장소가 폐지되었다.[4] 현재 17개 법정리, 30개 행정리, 60개 자연 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4]
3. 6. [[도암면]]
1660년 능주목 서이면(西二面), 숙종 연간에 안의면(安義面)으로 기록되었다.[4] 1756년경 서이상면(西二上面)과 서이하면(西二下面), 또는 능주목 10개 면 중 이상면(二上面)과 이하면(二下面)으로 기록되었으며, 1765년경 일시적으로 천태면(天台面)으로 합병되었다가 다시 분할되었다. 각각 16개와 12개 마을을 관할했다.[4] 1864년경 능주목 12개 면 중 천태면(天台面)과 호암면(虎巖面)으로 기록되었다.[4]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장면(道莊面), 호암면(虎巖面)으로 기록되었고, 1910년에 면사무소가 개청했다.[4]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개편으로 두 면과 남평군 다소면의 일부를 통폐합하여 현재의 도암면이 되었다.[4] 1950년 6.25 전쟁으로 면사무소가 불타 지월리에서 원천리로 이전했다.[4] 1966년 5개 리를 관할하는 용강출장소가 설치되었다.[4] 1983년과 1999년에 면사무소를 현재 자리에 신축 및 증축했다. 현재 15개 법정리, 15개 행정리, 34개 마을이다.[4]3. 7. [[청풍면]]
조선 후기 서변면(西邊面) 또는 서면(西面)으로 기록되었으며, 관할리는 10개였다.[4] 1840년 이후 세청면(世淸面)이 나타난다.[4] 1895년 이후 세청면과 신풍면으로 나뉘었으며, 각각 10개리와 9개리를 관할했다.[4]1914년 두 면을 합병해 11개 마을을 관할하는 청풍면이 되었다.[4] 1950년 11월 공비의 침입으로 면사무소가 불타 면사무소 뒷편의 가건물에서 공무를 수행했다.[4] 1961년과 1988년에 면사무소를 같은 위치에 신축했다.[4] 1996년에 백운1.2를 통합했다.[4] 현재 11개 법정리, 16개 행정리, 31개 마을이다.[4]
참조
[1]
서적
여지도서
[2]
서적
호구총수
[3]
서적
대동지지
[4]
간행물
1983.1.10 대통령령 제110호 27호 행정구역 변경건
198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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