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야마 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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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야마 조규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 문학 평론가이자 사상가로, 1871년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에서 태어나 1902년 사망했다. 그는 일본주의, 낭만주의, 니체주의, 니치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거치며 메이지 시대 사상사에 영향을 미쳤다. 도쿄 제국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요미우리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잡지 '태양'의 편집 주간을 역임하며 문예 평론을 발표했고, 미학 연구를 위해 해외 유학을 준비했으나 건강 악화로 중단했다. 그는 미문체를 구사하며 문호로 불렸으나, 사상의 깊이가 얕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의 업적을 기려 다카야마 조규상과 같은 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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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야마 조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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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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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사이토 린지로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871년 2월 28일 |
출생지 | 쓰루오카시, 야마가타현, 일본 |
사망일 | 1902년 12월 24일 |
사망지 | 치가사키시, 가나가와현, 일본 |
묘소 | 류게사 |
직업 | 문학 평론가, 소설가, 도쿄 대학 강사 |
국적 | 일본 |
학력 | 문학 박사 |
모교 | 도쿄 제국대학 철학과 |
작품 활동 | |
장르 | 문예 평론, 소설 |
사조 | 일본주의, 낭만주의 |
대표작 | 다키구치 뉴도 (1894년, 소설), 미적 생활을 논함 (1901년, 평론) |
2. 생애
다카야마 조규는 1871년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메이지 유신 이후 경찰에 고용된 쇼나이 번 출신의 하급 무사였다. 조규는 두 살 때 이모의 집안에 입양되었다.[1]
1893년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도이 반스이 등과 함께 공부했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본적을 홋카이도로 옮기기도 했다.[1]
1894년 요미우리 신문 소설 공모전에 《다키구치 입도》가 당선되어 신문에 연재되었다. 이 작품은 《헤이케 이야기》에서 소재를 가져온 역사 소설이었다.[1] 이후 ≪제국문학≫, ≪태양≫ 등에 문예 평론을 발표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1]
1896년 대학 졸업 후 제2고등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1897년 교장 배척 운동으로 사임하고 하쿠분칸에 입사하여 ≪태양≫ 편집 주간이 되었다. 삼국간섭 이후 국수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일본주의"를 고취하는 평론을 많이 썼으며, 모리 오가이와 미학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3]
1900년 문부성으로부터 미학 연구를 위해 유럽 유학을 명받았으나, 객혈로 인해 1901년 유학을 사퇴하고 요양 생활에 들어갔다.[1] 병중에도 ≪문명 비평가로서의 문학자≫를 발표하여 프리드리히 니체 사상을 소개하고, <미적 생활을 논함>을 통해 본능을 긍정하는 미학 이론을 주장했다.[1]
1902년 논문 ≪나라조의 미술≫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폐결핵이 악화되어 12월 24일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시의 병원에서 사망했다.[4] 그의 묘는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의 류게지에 있으며, 묘비에는 "우리는 현대를 초월해야만 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4]
2. 1. 출생과 성장
1871년 2월 28일 야마가타현 지금의 쓰루오카시에서 하급 무사 사이토 지카노부(斎藤親信)의 6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1] 아버지 사이토 지카노부의 원래 성씨는 다카야마(高山)였는데, 사이토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조규가 두 살 때 아들이 없는 백부 집에 양자로 들어가게 되어 다카야마 린지로(高山林次郎)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1]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났으며, 1886년 열여섯 살 때에는 ≪가인지기우≫의 한문체 문체를 본뜬 작품 ≪춘일방초지몽(春日芳草之夢)≫을 창작했다. 작품 내용은 그 무렵 정치 소설의 주요한 주제였던 남녀 동권론(男女同権論)을 다루었다.[1]
제2고등중학교에 진학 후, 고향 친구들과 ≪야마가타 현 공동회 잡지(共同会雑誌)≫라는 동인지를 만들어 여러 소품을 발표했다. 이 무렵 <잔다르크전>, <페스탈로치전> 같은 위인전을 지어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때 조규(樗牛)라는 호를 필명으로 썼다. 이 ‘저(樗)’와 ‘우(牛)’란 글자는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편에 나오는 혜자(惠子)와 장자의 일화에서 따왔다고 한다.[1] 이후 여러 서구 문학 작품의 영역본을 중역하기도 하고 문학 취향의 학우들과 문학회를 조직해 ≪문학회 잡지(文学会雑誌)≫를 발간, <문학 및 인생>과 같은 다양한 에세이를 발표하기도 했다.[1]
2. 2. 학창 시절과 문단 활동
1886년 16세 때 ≪가인지기우≫의 한문체 문체를 본뜬 작품 ≪춘일방초지몽(春日芳草之夢)≫을 창작하는데, 작품 내용은 그 무렵 정치 소설의 주요한 주제였던 남녀 동권론(男女同権論)을 다룬다.[1]제2고등중학교 진학 후, 고향 친구들과 ≪야마가타 현 공동회 잡지(共同会雑誌)≫라는 동인지를 만들어 여러 소품을 발표한다.[1] 이 무렵 <잔다르크전>, <페스탈로치전> 같은 위인전을 지어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때 조규(樗牛)라는 호를 필명으로 쓴다.[1] ‘저(樗)’와 ‘우(牛)’란 글자는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편에 나오는 혜자(惠子)와 장자의 일화에서 따왔다고 한다.[1] 이후 여러 서구 문학 작품의 영역본을 중역하기도 하고 문학 취향의 학우들과 문학회를 조직해 ≪문학회 잡지(文学会雑誌)≫를 발간, <문학 및 인생>과 같은 다양한 에세이를 발표하기도 한다.[1] 쓰보우치 쇼요와 인연을 맺으면서 ≪문학회 잡지≫에 <염세론>, <희곡에서의 비극의 쾌감을 논함> 같은 염세주의적 낭만주의 문장을 발표하는데 이 <염세론>은 일본에서 최초로 일반인에게 쇼펜하우어를 소개한 글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1]
1893년 수석으로 제2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1] 1895년에는 우에다 빈, 아네자키 조후 등과 함께 문학회를 만들어 1월부터 ≪제국문학≫이란 잡지를 발간하는데, 조규는 이 잡지와 함께 당시 일본 최초의 근대 종합잡지 ≪태양≫에 지카마쓰 몬자에몬에 관한 글을 비롯해 문학, 예술, 미학 관련 문장을 다수 발표한다.[1]
2. 3. 교육 활동과 결혼
1897년 연말, 다카야마 조규는 법학박사 스기 교지(杉亨二)의 차녀 사토(さと)와 결혼하였다. 이후 사립 철학관(현 도요 대학)에서 미학 및 미술사를 강의하는 등 안정적인 생활을 하였다.[1]2. 4. 유럽 유학과 좌절, 그리고 투병
1897년 4월 하쿠분칸에 입사하여 ≪태양≫의 편집 주간으로 취임, 주로 시평(時評)이나 문학예술 및 교육 분야에서 건필을 휘둘렀다. 이 무렵 이노우에 데쓰지로 및 기무라 다카타로 등과 대일본협회를 설립, 극단적인 복고주의와 종교 배척의 기관지 ≪일본주의≫를 간행한다. 이와 함께 ≪태양≫에도 <현금(現今) 일본 문예계에서의 비평가의 본무(本務)>, <메이지의 소설>, <일본주의를 찬함(이후 ‘일본주의’로 개제)> 등을 발표하면서 일본주의를 고취하고 국민 문학 창출에 주력한다. 또 쓰보우치 쇼요와는 역사극 관련 논쟁을 전개하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당시 일본 사회에 일기 시작한 사회주의 운동을 경계하기 위해 파괴적인 사회 소설, 사회주의 소설을 비판한 <이른바 사회 소설을 논함>을 발표한다. 다음 해에는 <소설 혁신의 시기-비 국민적 소설을 난함(이후 ‘비 국민적 소설을 난함’으로 개제)>과 같은 글에서 <메이지의 소설>에서 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쇼요류의 사실주의 소설을 비판한다.[1]화려한 비평 활동을 하는 한편, 1897년 연말에는 법학박사 스기 교지의 차녀 사토(さと)와 결혼하고 사립 철학관(현 도요대학)에서 미학 및 미술사를 강의하는 등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한다. 1900년 5월 문부성은 조규의 유럽 유학을 내정했고 귀국 후에는 교토대학에 교수로 취임하기로 예정되었으나,[4] 8월 갑자기 피를 토하면서 입원했고 좀처럼 회복하지 못해 다음 해인 1901년 3월 마침내 유학을 사퇴한다.[1]
몸 상태가 좋지 않던 1901년 1월, <문명 비평가로서의 문학자>를 ≪태양≫에 발표, 이전의 쇼펜하우어에 이어 프리드리히 니체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개인주의와 문학자의 사회적 역할을 더욱 강력하게 요청한다. 그해 6월 발표한 <아네자키 조후에게 보내는 글>은 그가 표방했던 낭만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개인주의적 입장을 총괄적으로 정리한 글이다. 그해 8월 문단을 떠들썩하게 만든 <미적 생활을 논함>을 발표한다. 과격한 니체 사상에 기반해 성욕과 같은 본능의 만족이 바로 미적인 삶이고 생활이란 주장은 일본 사회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문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1]
건강이 점차 악화되어 대학 강의를 그만두는데, 그와 동시에 조규는 종교 세계에 심취한다. 그중 하나가 니치렌으로, 이는 단순한 종교적 귀의가 아니라 그가 일생을 통해 주장했던 것처럼 니치렌은 기독교의 예수나 불교의 부처처럼 체제 비판적이고 혁신적인 ‘개인’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는 니체의 ‘초인(超人)’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1]
2. 5. 니치렌 연구와 죽음
점차 더 악화되는 건강 때문에 결국 대학 강의까지 그만두는데, 그와 동시에 조규는 종교 세계에 심취한다. 그중 하나가 니치렌으로 이는 단순한 종교적 귀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일생을 통해 주장했던 것처럼 니치렌은 기독교의 예수나 불교의 부처처럼 체제 비판적이고 혁신적인 ‘개인’으로 이들 성인을 이해한 것이다. 이는 당연히 니체의 ‘초인(超人)’ 사상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1]1902년 2월 <나라조의 미술>이란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후에도 새로운 문체를 구상하거나 역사적으로 낮게 평가받고 있는 다이라노 기요모리를 개인주의 입장에서 옹호하는 파격적인 글쓰기를 계속한다. 그러던 중 폐결핵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요양 중이던 가나가와현 히라즈카의 한 병원에서 12월 24일 사망한다. 묘비에 ‘우리는 현대를 초월해야만 한다(吾人は須らく現代を超越せざるべからず)’라고 적었다.[4]
폐 질환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진 바닷바람을 쐬기 위해, 조규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도쿄에서 아타미, 시미즈, 오이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마쿠라의 해변 휴양지로 옮겨 다녔다. 회복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자, 그는 13세기 불교 지도자 니치렌의 가르침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계속해서 글을 썼지만, 특히 니치렌주의에 대한 종교 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 상태는 악화되었고, 1902년 12월 24일 인근 지가사키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 해 동안 가마쿠라의 하세데라(가마쿠라시) 경내에 있는 집에서 살았으며, 그의 장례 의식은 이 절에서 치러졌다.
그의 묘는 시미즈에 있는 시즈오카현의 사찰인 류게지에 있다. 묘비의 비문은 그의 저서 중 하나에서 따온 것이다: "분명히 우리는 현재를 초월해야 한다."
3. 사상
다카야마 조규는 일본과 중국의 고전에 조예가 깊고, 유럽과 미국의 사상에도 통달했으며, 미려한 문체를 구사하여 문호로 불렸다.
그는 일본주의, 낭만주의, 니체주의, 니치렌주의 등 주장의 변천이 격렬했으며, 급격한 근대화로 변화한 메이지 시대 사상사의 흐름을 체현했다고도 할 수 있다.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키타무라 토코쿠, 이시카와 타쿠보쿠 등과 비교하여 사상의 깊이가 얕다는 지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병약했기 때문에 니체의 초인이나 니치렌과 같은 강자를 동경했다. 한편으로는 민중을 약자로 단정하고,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약자의 사상으로 부정적이었다.[5]
3. 1. 일본주의
청일 전쟁과 삼국 간섭 이후 일본을 휩쓴 초국가주의의 물결 속에서, 다카야마 조규는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썼다. 그는 천황과 백성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애국적인 기사를 썼다. 또한 월트 휘트먼의 저작에서 묘사된 개인주의 개념을 칭찬했다.[5] 그는 범아시아주의를 옹호하며 서구 문명의 일반적인 흐름은 인종 민족주의이며, 서구 국가와의 어떠한 동맹도 결국 경쟁으로 이어질 것이며, 인종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카야마 조규는 이후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다카야마 조규가 설파한 일본주의의 우승열패론은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영향을 줄 정도로 컸다.[5] 그는 일본주의, 낭만주의, 니체주의, 니치렌주의 등 주장의 변천이 격렬했으며, 급격한 근대화로 변전한 메이지 시대 사상사의 걸음을 체현했다고도 할 수 있다.
3. 2. 낭만주의
청일 전쟁과 삼국 간섭 이후 일본을 휩쓴 초국가주의의 물결 속에서, 다카야마 조규는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썼다. 그는 천황과 백성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애국적인 기사를 썼으며, 월트 휘트먼의 저작에서 묘사된 개인주의 개념을 칭찬했다.[5] 그는 또한 범아시아주의를 옹호하며 서구 문명의 일반적인 흐름은 인종 민족주의이며, 서구 국가와의 어떠한 동맹도 결국 경쟁으로 이어질 것이며, 인종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카야마 조규는 이후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5]1898년 와세다 대학 강사로 재직하면서, 다카야마 조규는 역사화의 가치는 이상화된 아름다움, 즉 역사 시대의 미학을 드러내는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899년에 《근세미학》을 출판하여 모리 오가이의 《미학 개요》와 다소 상반되는 이론을 제시했다.[5]
다카야마 조규는 일본주의, 낭만주의, 니체주의, 니치렌주의 등 주장의 변천이 격렬했으며, 급격한 근대화로 변전한 메이지 시대 사상사의 걸음을 체현했다고도 할 수 있다. 조규가 설파한 일본주의의 우승열패론의 영향은 컸고,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조규식 표현이 많이 나타났다.[5]
3. 3. 니체주의
요양하는 동안 프리드리히 니체를 칭찬하는 기사와 미학에 관한 기사를 썼다. 다카야마 조규는 자신이 병약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인 사상을 동경했다.[5]3. 4. 니치렌주의
조규는 폐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도쿄에서 아타미, 시미즈, 오이소, 가마쿠라 등지의 해변 휴양지로 옮겨 다녔다. 회복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13세기 불교 지도자 니치렌의 가르침에 관심을 돌렸고, 니치렌주의에 대한 종교 철학에 관한 글을 썼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1902년 12월 24일 지가사키의 병원에서 사망했다.[5] 그는 생애 마지막 해 동안 가마쿠라의 하세데라 경내에 있는 집에서 살았으며, 장례 의식은 이 절에서 치러졌다.4. 평가
조규는 일본 및 중국의 고전에 정통했고, 유럽과 미국의 사상에도 밝았으며, 문장을 잘 써서 문호로 불렸다. 그의 사상은 일본주의, 낭만주의, 니체주의, 니치렌주의 등 다양하게 변화했는데, 이는 급격한 근대화로 변화하던 메이지 시대 사상의 흐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조규가 주장한 일본주의의 우승열패론은 큰 영향을 끼쳐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많이 반영되었다.[5]
그러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키타무라 토코쿠, 이시카와 타쿠보쿠 등에 비해 사상의 깊이가 얕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병약했기 때문에 니체의 초인이나 니치렌 같은 강한 사람을 동경했다. 반면, 민중을 약자로 단정하고 사회주의를 약자의 사상이라며 부정적으로 보았다.
4. 1. 긍정적 평가
조규는 일본과 중국의 고전에 조예가 깊었고, 유럽과 미국의 사상에도 통달했다. 미문체를 잘 구사하여 문호로 불렸다.[5]일본주의, 낭만주의, 니체주의, 니치렌주의 등 주장의 변천이 격렬했으며, 급격한 근대화로 변화한 메이지 시대 사상사의 발자취를 체현했다고도 할 수 있다. 조규가 설파한 일본주의의 우승열패론은 영향력이 커서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조규식 표현이 많이 나타났다.[5]
4. 2. 비판적 평가
일본과 중국의 고전에 조예가 깊고, 유럽과 미국의 사상에도 통달했으며, 미문체를 잘 구사하여 문호로 불렸다.일본주의, 낭만주의, 니체주의, 니치렌주의 등 주장의 변천이 격렬했으며, 급격한 근대화로 변전한 메이지 시대 사상사의 걸음을 체현했다고도 할 수 있다. 조규가 설파한 일본주의의 우승열패론의 영향은 컸고,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조규식 표현이 많이 나타났다.[5]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키타무라 토코쿠, 이시카와 타쿠보쿠 등과 비교하여 사상의 깊이가 얕다는 지적이 있다. 자신이 병약했기 때문에 니체의 초인이나 니치렌과 같은 강자를 동경했다. 그 한편으로, 민중을 약자로 단정하고,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약자의 사상으로 부정적이었다.
5. 조규상
국화창작협회는 조규가 일본 미술에 조예가 깊은 점을 평가하여, 협회전의 증상에 조규상을 제정했다.[6] 1958년에는 조규의 출신지인 쓰루오카시 교육위원회가 그의 위업을 기리고 지방 문화 향상을 위해 다카야마 조규상을 제정, 지방 문화 발전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상을 수여하고 있다.[7]
6. 저서
제목 | 출판사 | 비고 |
---|---|---|
신편 윤리 교과서 | 킨코도 | 이노우에 테츠지로 공저, 1897년 |
세계 문명사 | 하쿠분칸 | 제국 백과 전서, 1898년 |
논리학 | 하쿠분칸 | 제국 백과 전서, 1898년 |
근세 미학 | 제국 백과 전서, 1899년 | |
세계 역사담 제1편 석가 || 하쿠분칸 || 1899년 | ||
시대 관견 | 하쿠분칸 | 1899년 |
관공전 | 도분칸 | 1900년 |
문예 평론 | 하쿠분칸 | 1901년 |
조규 전집 (전 5권) | 하쿠분칸 | 사이토 신사쿠, 아네자키 마사하루 공편, 1904년 ~ 1907년 |
제1권 미학 및 미술사 | 조규 전집 (전 5권) 내용 | |
제2권 문예 평론 | ||
제3권 사론 및 사전 | ||
제4권 시세 및 사색 | ||
제5권 상화 및 소식 | ||
조규 전집 (주석 개정, 전 7권) | 하쿠분칸 | 아네자키 마사하루, 사사카와 타네로 편, 1925년 |
제1권 미학 및 미술사 | 조규 전집 (주석 개정, 전 7권) 내용 | |
제2권 문예 평론 | ||
제3권 사론 및 사전 | ||
제4권 시론 및 사색 | ||
제5권 세계 문명사 및 근세 미학 | ||
제6권 상화 및 감격 | ||
제7권 일기 및 소식 | ||
다키구치 입도 | 이와나미 문고 | 1938년, 복간 1992년 |
다키구치 입도 | 신초 문고 | 1956년 |
다키구치 입도 | 카도카와 문고 | 시오타 료헤이 교주, 1958년 |
7. 관련 인물
- 친동생: 사이토 야노히토 - 평론가
- 아내: 사토코 - 통계학자 스기 코지의 차녀
- 조카: 사이토 모토무 - 화가
- 아나자키 마사하루 - 『제국 문학』을 함께 창간
참조
[1]
NDLDC
滝口入道の作者は高山樗牛
https://dl.ndl.go.jp[...]
読売新聞
1894-04-17
[2]
웹사이트
東京ゲーテ記念館
https://goethe.jp/Q_[...]
2022-06-15
[3]
간행물
鴎外樗牛対立期
http://id.nii.ac.jp/[...]
大阪樟蔭女子大学
1979-10
[4]
서적
作家の臨終・墓碑事典
東京堂出版
[5]
서적
明治精神史
講談社
[6]
뉴스
受賞者を発表
中外商業新報
1926-03-12
[7]
웹사이트
奨励賞に3人選ばれる 鶴岡 高山樗牛賞4年ぶり該当なし
https://www.shonai-n[...]
荘内日報社
2023-07-29
[8]
뉴스
戒名はなく墓碑も俗名
東京日日新聞
1927-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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