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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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 세네카는 로마의 웅변가이자 수사학자로, 안나이아 가문의 첫 번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웅변술의 고도한 사용자였으며, 아들들의 요청에 따라 웅변술 선집을 저술했다. 저서로는 74개의 주제에 대한 수사학적 논의를 담은 『수사론』(Controversiae)과 설득과 토의에서의 웅변술을 다룬 『설득적 연설』(Suasoriae) 등이 있다. 또한 로마사를 다룬 역사서를 저술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그는 코르도바 출신 헬비아와 결혼하여 루키우스 안나에우스 노바투스, 루키우스 안나에우스 세네카 (소 세네카), 안나에우스 멜라 세 아들을 두었다.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죽음 직후인 39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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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세네카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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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대 세네카는 역사적으로 기록된 안나이아 가문의 첫 인물이다.[1] 그는 히스파니아의 코르도바에서 부유한 에퀴테스(기사 계급)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며, 유명한 웅변가 키케로보다 약간 젊은 세대였다. 로마 내전 이후 로마에서 상당 기간 머물며 당대의 저명한 웅변가들과 수사학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24] 그는 법정 웅변가로서 공적인 경력을 쌓고자 했으나,[24] 실제로 공직에 나아갔다는 기록은 없으며, 아들인 소 세네카에 따르면 평생 동안 공직에 관여하지 않는 사적인 신사로 남았다.[6] 대신 그는 뛰어난 웅변술과 수사학 지식을 바탕으로 명성을 얻고 부를 축적한 것으로 여겨진다.[24]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내전 시기에는 그의 고향 코르도바 사람들처럼 폼페이우스 측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있다.[24] 그는 칼리굴라 시대까지의 로마 역사를 저술하기도 했지만,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두 아들의 정치 경력을 지지하면서도[6] 그에 따르는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7] 기사 계급의 신분을 유지하며 공직에 나아가지 않은 막내아들 멜라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대 세네카는 키케로를 이상적인 인물로 존경했지만,[24]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고[24] 당시 유행하던 화려하고 기교적인 웅변술에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강직하고 현실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철학적 원리보다는 실용적인 학문을 통해 사회적 기반과 재산을 쌓는 것을 중시했다.[24] 그는 코르도바 출신의 헬비아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으며, 그중 둘째 아들이 바로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소 세네카이다. 그의 사망 시기는 대략 기원후 39년경으로 추정된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대 세네카는 확실하게 알려진 안나이아 가문의 첫 번째 인물이다.[1] 그는 히스파니아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났으며, 부유한 에퀴테스(기사 계급)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조상이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인지, 아니면 스페인 토착민인지는 명확하지 않다.[24]르네상스 시대에는 그의 이름과 저작이 그의 아들인 철학자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소 세네카)와 혼동되기도 했다.[2] 16세기 초, 라파엘레 다 볼테라는 이들이 서로 다른 인물임을 밝혔다. 라파엘레는 대 세네카의 두 손자 이름이 마르쿠스였고, 할아버지의 이름을 손자에게 물려주는 로마의 관습에 따라 대 세네카의 프레노멘을 마르쿠스로 추정했다.[2] 이 이름은 20세기까지 표준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이러한 명명 관습이 엄격하지 않았다는 점과 필사본에서 그를 루키우스라고 지칭하는 사례가 있어, 현재 많은 학자들은 루키우스라는 이름을 선호한다. 이는 두 세네카의 저작이 혼동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2]
대 세네카는 존경받는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보다 약간 젊은 세대였다. 그는 코르도바에서 성장했으며, 전시 상황으로 인해 '자신의 식민지'의 '성벽 안'에 머물러야 했고,[3] 그곳에서 200명 이상의 학생을 가르친 스승(프라이셉터) 밑에서 처음 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4] 로마 내전 이후 로마가 안전해지자,[5] 그는 로마로 가서 장기간 머물며 여행했다. 그는 당시 젊은이들이 변호나 공공 행정 분야의 경력을 쌓기 위해 훈련받는 과정이었던 수사학 교사들의 강의와 전문 웅변가들의 공개적인 웅변에 부지런히 참석했다.
그는 법정 웅변가로서 공적인 경력을 쌓으려 했으나,[24] 실제로 공직에 나아갔다는 증거는 없다. 아들 소 세네카의 증언(데 비타 파트리스)에 따르면, 그는 평생 동안 사적인 신사로 남아 있었다. 대신 그는 뛰어난 웅변술 실력을 바탕으로 수사학을 가르치거나 법정 변론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것으로 보인다.[24] 그는 칼리굴라 시대까지의 로마 역사를 저술했지만, 이 저작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로마 내전 동안, 코르도바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 역시 폼페이우스 측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있다.[24] 그는 키케로를 이상적인 인물로 삼았으며,[24]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24] 또한 당시 웅변술의 화려한 경향에 대해서도 실망감을 나타냈다. 대 세네카는 강직하고 현실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철학적 원리보다는 실용적인 학문을 통해 사회적 기반과 재산을 쌓는 것을 중시했다.[24] 오늘날 그의 연구는 이탈리아 본토보다는 스페인 정신사에 미친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이루어진다.[24]
그는 코르도바 출신의 헬비아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 루키우스 안나에우스 노바투스: 아버지의 친구이자 수사학자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갈리오의 양자가 되어, 후에 루키우스 율리우스 안나에우스 갈리오라고 불렸다. 그는 신약성경 『사도행전』 18장 12-17절에 "아카이아 총독 갈리오"로 등장한다.[22]
- 루키우스 안나에우스 세네카 (소 세네카)
- 안나에우스 멜라: 시인 루카누스의 아버지이다.
대 세네카는 장남 노바투스와 차남 소 세네카의 정치 경력을 지지했으며,[6] 수사학 연구를 존경할 만하다고 여겼지만, 동시에 그러한 경력에 내재된 위험성('바로 추구하는 목표 자체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들'[7])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반면, 기사 계급 신분을 유지하며 공직에 나아가지 않은 막내아들 멜라에 대해서도 만족감을 표했다.
소 세네카가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추방된 것은 대 세네카 사후의 일이며,[25] 그의 저작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사건이 티베리우스 황제 사망(37년) 직후의 일이므로, 대 세네카는 대략 39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 2. 로마에서의 활동
내전의 혼란이 끝나고 로마가 안정을 되찾자,[5] 대 세네카는 로마에서 장기간 체류하며 여행했다. 그는 당시 젊은이들이 공직이나 법률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위해 훈련받던 방식대로, 유명한 웅변가들과 수사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공개적인 웅변 발표회에도 열심히 참석했다.[24] 이를 통해 그는 법정 웅변가로서 공적인 경력을 쌓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24]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로마 내전 시기에는, 그의 고향인 코르도바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화정을 지지했던 폼페이우스 편에 섰을 가능성이 있다.[24] 이는 키케로를 이상적인 인물로 삼았던[24] 그의 성향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대 세네카가 실제로 공적인 경력을 추구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며, 아들인 소 세네카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평생 동안 공직에 나아가지 않고 사적인 신사로 남았다.[6] 그는 그리스 철학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24] 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웅변술에도 비판적이었다. 강직하고 현실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그는 철학적 원리보다는 실용적인 학문을 통해 사회적 기반과 재산을 쌓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24]
2. 3. 가족 관계
히스파니아의 코르도바 출신인 헬비아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24]다음은 대 세네카의 자녀들이다.
이름 | 비고 |
---|---|
루키우스 안나에우스 노바투스 | 대 세네카의 친구이자 수사학자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갈리오의 양자가 되어, 후에 루키우스 율리우스 안나에우스 갈리오(루키우스 율리우스 갈리오)라고 불렸다. 그는 신약성경 『사도행전』 18장 12-17절에 "아카야 총독 갈리오"로 등장한다.[22] |
루키우스 안나에우스 세네카 |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소 세네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안나에우스 멜라 | 시인 루카누스의 아버지이다.[24] 대 세네카는 기사 계급의 유산을 이어받은 멜라를 지지했다.[7] |
대 세네카는 장남과 차남의 정치 경력을 지지했으나,[6] 동시에 정치 경력에 내재된 위험성('바로 추구하는 목표 자체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들'[7])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소 세네카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추방된 것은 대 세네카가 사망한 이후의 일이다.[25] 대 세네카의 저작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시기가 티베리우스 황제 사망 직후임을 고려할 때, 그는 기원후 39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 4. 사망
소 세네카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추방된 것은 대 세네카가 사망한 이후의 일이었다.[25] 대 세네카의 저작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사건이 티베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직후의 일이므로, 그의 사망 시기는 대략 기원후 39년경으로 추정된다.3. 사상과 관점
대 세네카는 키케로를 이상적인 웅변가로 여겼다[24]. 그는 그리스 철학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24], 당시 웅변술이 지나치게 화려해지는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대 세네카는 강직하고 현실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전형적인 로마인이었으며, 추상적인 철학 원리보다는 실용적인 학문을 통해 사회적 기반과 재산을 마련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24].
4. 저작
대 세네카는 초기 저술 활동으로 아들들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뛰어난 기억력을[24] 바탕으로 다양한 학파의 언설을 모으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웅변가들이 이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기록했다.
주요 저작으로는 10권으로 이루어진 『논쟁 문제』(Controversiaela)가 있다. 이는 가상 법정 변론집으로, 74개의 주제를 다루며 각 주제에 대한 수사학자들의 다양한 시각과 의견 대립, 그리고 논점을 유리하게 이끄는 기법(colores|콜로레스la) 등을 담고 있다. 각 권의 서문에는 등장인물들의 인품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책은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4~5세기에 만들어진 요약본을 통해 일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설득적 연설』(Suasoriaela)은 『논쟁 문제』의 보충으로 저술되었으며, 세 아들을 위한 웅변술 지침서이기도 했다[24]. 다양한 사안에 대해 찬반 양론을 논하며 설득과 토의에서의 웅변술 실천 방법을 다루었다. 이 두 저작은 당시 웅변술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또한 대 세네카는 로마사를 다룬 역사서도 저술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 책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로마 내전 시작부터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의 시기를 다루었으며, 사후 아들 소 세네카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역사서의 내용은 소 세네카가 쓴 『De vita patris|아버지의 생애에 관하여la』를 통해 일부 알려졌으나, 이 책 역시 소실되었다[26].
중세 시대에는 대 세네카의 수사학 저작들이 그의 아들인 소 세네카의 것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르네상스 시대 라파엘 마페이와 리프시우스의 연구를 통해 대 세네카의 저작임이 밝혀졌다.
4. 1. 웅변술 선집 (The declamatory anthology)
노년의 세네카는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시대 로마의 웅변 학교와 강당(auditoriala)에 다녔던 경험을 바탕으로, 아들들의 요청에 따라 『웅변가와 수사학자들의 격언, 분할, 색채』라는 제목의 웅변술 선집을 저술했다. 이 책은 그의 뛰어난 기억력에 의존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24] 당시 웅변술은 교훈적 역할과 공연 장르로서 로마 엘리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대 플리니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마에케나스, 심지어 황제 아우구스투스 같은 인물들도 공개 웅변회에 참석했다.[8] 세네카는 시인 오비디우스를 뛰어난 웅변가로 언급했으며, 마르티알리스, 유베날리스, 타키투스의 작품에서도 웅변술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9]이 작품은 세네카 자신의 웅변 모음집이나 다른 이들의 연설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당대 로마의 유명 수사학자들의 웅변 예술에서 발췌한 내용과 분석을 담은 선집이다. 웅변술 이론서라기보다는, 세네카가 인용한 유명 웅변가들의 인물평, 작품에 대한 비판적 논평, 그리고 기억나는 일화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네카는 이 책에서 다루는 웅변술이 키케로 시대와는 다른, 자신의 생애 동안 등장한 '새로운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이 새로운 웅변술은 '콘트로베르시아이'(controversiaela)라고 알려진, 다소 기이하고 상상적인 소송 사건들에 집중하는 특징을 보였다.
이 선집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허구의 소송 사건을 다루는 10권의 책인 『논쟁 문제』(Controversiaela)이고, 둘째는 허구의 설득 연설을 다루는 최소 한 권 이상의 책인 『설득적 연설』(Suasoriaela)이다. 『논쟁 문제』는 74개의 가상 법정 변론 주제를 다루며, 각 주제에 대한 여러 수사학자의 의견('센텐티아이', Sententiaela), 논점 정리('디비시오네스', Divisionesla), 그리고 사실을 유리하게 해석하는 기법('콜로레스', Coloresla)을 간략히 소개한다. 『설득적 연설』은 『논쟁 문제』의 보충으로, 다양한 사안에 대해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논하며 설득과 토의에서의 웅변술 실천 방법을 다룬다.
세네카는 이 책에서 여러 유명 웅변가들을 소개한다. 절친한 친구였던 포르키우스 라트로는 열정적이고 격렬한 스타일로 유명했으며,[10][11] 세네카는 그를 위엄과 매력을 겸비한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라트로의 유일한 경쟁자로는 유니우스 갈리오를 꼽았다.[12] 또한 세네카는 당대 최고의 웅변가 네 명을 '프리뭄 테트라데움'(primum tetradeumla)으로 묶어 언급했는데, 여기에는 라트로, 갈리오와 함께 알부키우스 실루스, 아렐리우스 푸스쿠스가 포함된다. 세네카는 아렐리우스 푸스쿠스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스타일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나,[13][14] 그의 학파가 파비아누스[15]나 오비디우스[16] 같은 제자들을 배출하며 명성을 얻었음을 인정했다. 알부키우스 실루스 역시 영향력 있는 웅변가로, 퀸틸리아누스가 인용한 교과서의 저자였다.[17]
세네카의 웅변 선집은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4~5세기에 만들어진 요약본 덕분에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은 소위 '은시대' 문학의 수사학적 기초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오비디우스, 젊은 세네카, 루카누스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이 시기 웅변술의 영향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오랫동안 이 책은 아들인 소 세네카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르네상스 시대 라파엘로 마페이와 유스투스 리프시우스의 연구를 통해 대 세네카의 저작임이 밝혀졌다.
4. 1. 1. 논쟁 문제 (Controversiae)
노년의 세네카가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시대 로마의 웅변 학교와 강당(auditoriala)에 다녔던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웅변가와 수사학자들의 격언, 분할, 색채』의 주요 부분이다. 라틴어 원제는 Controversiaela이다. 이 작품은 아들들의 요청으로 쓰였으며, 세네카 자신의 뛰어난 기억력에 의존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24]원래 총 1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허구의 소송 사건, 즉 가상의 법정 변론을 다루고 있다. 이는 세네카 자신의 웅변 작품 모음집이나 다른 웅변가들의 연설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당대 로마의 유명 수사학자들의 웅변 예술에서 발췌한 내용과 분석을 담은 선집(anthology)이다. 웅변술에 관한 이론적인 논문도 아니며, 세네카는 자신이 인용한 웅변가들의 인물평, 작품에 대한 비판적 논평, 그리고 기억나는 일화 등을 중심으로 내용을 구성했다.
세네카는 이 작품에서 다루는 웅변술이 자신의 생애 동안 등장한 '새로운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이 새로운 웅변술은 키케로 시대와는 다른 스타일을 가졌으며, '콘트로베르시아이'(controversiaela)라고 알려진 다소 기이한 상상의 소송 사건들에 집중하는 특징을 보였다.
『논쟁 문제』는 총 74가지 사법 주제에 대한 수사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각 주제에 대해 여러 수사학자들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제시한 의견이나 사고 방식('센텐티아이', Sententiaela)[19]을 소개한다. 또한, 해당 주제에 관한 의견 대립을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하고 논증의 개요를 제시하는 '디비시오네스'(Divisionesla)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콜로레스'(Coloresla)라 불리는 기법을 설명하는데, 이는 가상의 피고인의 행동을 변명하거나 비난하기 위해 사실을 유리하게 왜곡하거나, 불법 행위에 대한 추궁을 정상 참작 사유로 이끌어 가는 일종의 기만적인 해석 방식을 의미한다.
각 권은 서문으로 시작하며, 여기서는 등장하는 유명 변론가들의 인품을 개별적으로 또는 쌍으로 생생하게 묘사한다.[18] 열 번째 서문에서는 이전에 다루지 않았던 변론가들을 종합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현재 『논쟁 문제』는 1, 2, 7, 9, 10권 등 다섯 권만이 완전하거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누락된 책들의 내용은 4~5세기경 학교 교재용으로 만들어진 요약본을 통해 일부 파악할 수 있다. 이 고대 요약본은 중세 시대 후기에 유럽 문학, 예를 들어 14세기 일화 및 단편 소설 모음집인 『로마의 기행』 등에 이야기의 소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요약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현재 알려진 서문은 7개뿐이다.
이 작품은 소위 '은시대' 문학의 수사학적 기초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오비디우스, 젊은 세네카, 루카누스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이 시기 웅변술의 영향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오랫동안 『논쟁 문제』는 그의 아들인 소 세네카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라파엘로 마페이와 유스투스 리프시우스의 연구를 통해 대 세네카의 저작임이 밝혀졌다.
4. 1. 2. 설득적 연설 (Suasoriae)
『설득적 연설』(''Suasoriae'')은 대 세네카가 저술한 『웅변가와 수사학자들의 격언, 분할, 색채』의 일부로, 『논쟁 문제』(''Controversiae'')의 보충 자료로 쓰였다. 이는 세네카의 세 아들을 위한 웅변술 지침서이기도 했다[24]. 이 책에서는 다양한 사안에 대해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논하며, 설득과 토의에서의 웅변술 실천 방법을 다룬다. 『설득적 연설』은 당시 로마의 웅변술 교육과 수사학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시대 웅변술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4. 2. 역사서 (History)
대 세네카는 로마사를 다룬 역사서도 저술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이 역사서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로마 내전 시작부터 저자 본인이 사망하기 직전까지의 시기를 다루었으며, 그의 사후 아들인 소 세네카에 의해 출판되었다.[26] 이 저작의 내용은 소 세네카가 쓴 ''De vita patris|아버지의 생애에 관하여lat''를 통해 일부 엿볼 수 있었으나, 이 책 역시 현재는 소실되었다.[26]대 세네카 역사서의 구체적인 내용 일부는 후대 저자들의 인용을 통해 확인된다. 락탄티우스는 그의 저서 ''Institutiones Divinae|신성 강요론lat'' 7.15.14에서 대 세네카의 역사서 ''Historiaelat''의 서문으로 추정되는 긴 단편을 인용했다.[20] 이 단편은 로마의 역사를 인간의 일곱 시대로 비유하며 비관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특히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며 사실상 군주제로 회귀한 것을 노년기의 '두 번째 유아기'에 빗대어 비판적으로 묘사했다. 또한, 수에토니우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죽음에 관한 대 세네카의 기록을 인용한 바 있다.[21]
2017년, 파피루스 학자 발레리아 피아노는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굴된 파피루스 두루마리 ''P.Herc'' 1067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서기 79년 베수비오 산 폭발로 탄화된 이 파피루스에는 저자로 'L. 안나이우스 세네카'라는 이름의 흔적이 남아 있어, 피아노는 이것이 대 세네카의 저작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파피루스 내용 중 판독 가능한 부분이 로마 제국 초기 역사 및 정치와 관련되어 있어, 이것이 바로 소실된 역사서 ''Historiaelat''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 이름 뒤에 남은 책 제목의 흔적은 역사서의 원래 제목으로 추정되는 ''... ab initio b[ell]orum [civilium]|내전 초기부터lat''보다는 그의 웅변집 제목과 더 유사하다는 분석도 있다. 안타깝게도 이 파피루스는 심하게 손상되어 연속적인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20]
5. 평가 및 영향
대 세네카의 저작, 특히 노년에 아들들의 요청으로 저술한 『웅변가와 수사학자들의 격언, 분할, 색채』는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시대 로마 수사학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8] 이 책은 허구의 소송 사건을 다룬 10권의 『Controversiae』(논쟁 문제)와 허구의 설득 연설을 다룬 최소 1권의 『Suasoriae』(설득적 연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네카 본인의 기억에 의존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순히 웅변 작품을 모아 놓거나 다른 이의 연설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당대 로마의 유명 수사학자들의 웅변술에서 발췌한 내용과 분석, 그리고 일화들을 담은 선집의 성격을 띤다.
세네카의 이 선집은 소위 '은시대' 문학의 수사학적 특징과 그 기반에 대한 폭넓은 비판적 연구를 제공한다. 오비디우스의 작품, 젊은 세네카의 격언적 논설과 희곡, 그리고 후대 루카누스의 서사시 등에서 나타나는 수사학적 경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Controversiae』는 74개의 가상 법정 변론 주제를 다루며, 각 주제에 대해 여러 수사학자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관점의 의견, 핵심 쟁점을 요약하는 질문(divisio|디비시오la), 그리고 불리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논리 구성 방법(colores|콜로레스la) 등을 상세히 설명한다. 각 권의 서문에서는 등장하는 수사학자들의 인물됨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의 일부는 소실되었으나, 4-5세기경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요약본 덕분에 상당 부분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현재 I, II, VII, IX, X권은 원문과 요약본이 모두 전해지며, 나머지 권은 요약본만 남아있다. 서문 역시 7개만이 알려져 있다.
『Suasoriae』는 『Controversiae』를 보완하는 성격으로, 특정 사안에 대해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논하는 설득과 토의의 웅변술 실례를 보여준다. 이는 세네카가 세 아들에게 웅변술을 가르치기 위한 지침서이기도 했다.[24] 이 두 저작은 당시 로마 웅변술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사료로 여겨진다.
대 세네카의 저작은 후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Controversiae』의 내용은 중세 시대에 널리 읽힌 일화 및 단편 소설 모음집인 『로마의 기행』(Gesta Romanorum|게스타 로마노룸la)에 인용되기도 했다.
또한 대 세네카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 시작부터 자신의 죽음 직전까지의 시기를 다룬 로마사 역사서를 저술했으나,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아들 소 세네카가 저술한 아버지의 전기 『De vita patris|데 비타 파트리스la』 (이 책 역시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바르톨트 게오르크 니부어가 일부 발견)를 통해 그 내용을 일부 짐작할 수 있다.[26]
중세 시대에는 대 세네카의 수사학 관련 저작들이 그의 아들인 철학자 소 세네카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 라파엘로 마페이와 유스투스 리프시우스의 연구를 통해 본래 저자가 대 세네카임이 밝혀졌다.
6. 현대의 연구
2017년, 파피루스 학자 발레리아 피아노는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그을린 파피루스 두루마리 ''P.Herc'' 1067에 대한 상세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두루마리는 서기 79년 베수비오 산의 폭발로 헤르쿨라네움에 묻혔다가 1782년에 처음 발굴되었고, 19세기 초에 부분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피아노는 자신의 연구(''Cronache Ercolanesi'', 47, pp. 163–250)에서, 두루마리 마지막의 'subscriptio'(서명 부분)에 남아있는 글자 흔적을 근거로 이 텍스트의 저자가 'L. 안나이우스 세네카', 즉 대 세네카라고 주장했다. 또한, 해독 가능한 내용을 분석한 결과, 로마 제국 초기의 역사적, 정치적 주제를 다루고 있어 이것이 대 세네카의 유실된 역사서 ''Historiae''의 일부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았다.[20] 더 나아가 피아노는 저자 이름 뒤에 나오는 책 제목의 흔적이, 알려진 ''Historiae''의 제목('... ab initio b[ell]orum [civilium]')보다는 대 세네카의 다른 저작인 웅변집과 더 유사할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펼치는 과정에서 단단히 말린 여러 겹이 서로 달라붙어 고르지 않게 손상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연속적인 문장으로 내용을 파악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다.[20]
참조
[1]
서적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2]
서적
The Elder Seneca
https://archive.org/[...]
Brill
[3]
문서
Controversiae 1 pr 11
[4]
문서
Controversiae 1. pr. 2
[5]
문서
Controversiae 1 pr. 11
[6]
문서
Controversiae 2 pr. 3–4
[7]
문서
Latin: in quibus ipsa quae sperantur timenda sunt
[8]
harvp
[9]
harvp
[10]
문서
Controversiae 1 pr. 22, 24
[11]
문서
Controversiae 3 pr. 7; 2.2.8
[12]
문서
Controversiae i pr. 13
[13]
문서
Oxford Latin Dictionary sv. explicatio 4
[14]
문서
Controversiae 2 pr 1
[15]
문서
Controversiae 2 pr. 1
[16]
문서
Controversiae 2.8
[17]
문서
Quintilian 2.15.36; 3.3.4; 3.6.62. (Seneca's pen-portrait of Albucius is lost, but Suetonius' de Rhetoribus 30 describes him vividly as a greater success as a declaimer than as an orator.)
[18]
문서
Controversiae 1 pr. 24; 4 pr. 1; Fairweather 29–30
[19]
문서
Oxford Latin Dictionary s.v. sententia 1, cf. 3 'an opinion expressed in the senate in response to an interrogatio'/
[20]
논문
See M. Russo's review of Maria Chiara Scappaticcio, Seneca the Elder and his rediscovered 'Historiae ab initio bellorum civilium'. new perspectives on early-imperial Roman historiography
https://bmcr.brynmaw[...]
BMCR
2021-01-23
[21]
서적
See M. Winterbottom, Loeb edition, Seneca the Elder Vol. 2, pp. 614–17, for the text and English translation of both these fragments.
[22]
서적
帝国と賢者 古代2
中央公論新社
[23]
서적
道徳論集
東海大学出版会
[24]
서적
セネカ (Century Books―人と思想)
清水書院
[25]
문서
41; Seneca, ad Helviam, ii. 4
[26]
서적
Historicorum Romanorum fragme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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