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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어널 로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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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이어널 로빈스는 1898년에 태어나 1984년에 사망한 영국의 경제학자이다. 그는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 교수를 역임했으며, 1932년 저서 《경제학적 과학의 본질과 중요성에 관한 에세이》를 통해 경제학의 정의를 제시하고, 신고전파 경제학 발전에 기여했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로서 집산주의와 공산주의를 비판했으며, 사회주의 계산 논쟁에서 오스트리아 학파를 지지했다. 또한, 영국 고등교육 개혁에 기여하여 '로빈스 보고서'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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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어널 로빈스
기본 정보
로빈스가 LSE의 라이오넬 로빈스 빌딩 개관식에서, 1978년 7월 27일
본명라이오넬 찰스 로빈스
작위로빈스 남작
출생일1898년 11월 22일
출생지미들섹스 주 십슨
사망일1984년 5월 15일 (향년 85세)
사망지런던
학문 분야
학교/전통신고전파 경제학
소속 기관런던 정치경제대학교
모교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지도 교수에드윈 캐넌
영향윌리엄 스탠리 제번스
필립 윅스티드
레온 발라스
빌프레도 파레토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
프리드리히 폰 비저
크누트 빅셀
앨프레드 마셜
영향을 준 인물찰스 굿하트
주요 기여로빈스 보고서
저명한 제자니콜라스 칼도르
아미야 쿠마르 다스굽타
아바 P. 러너
윌리엄 바움올
프랭크 한
기타
경력영국 아카데미 회원
컴패니언 오브 아너 훈장
바스 훈장
대영 제국 훈장 2등급

2. 생애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길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으나 환멸을 느꼈다.[6]

1920년 런던 정치경제학교(LSE)에 입학하여, 해럴드 래스키에게 정치학을 배우다가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에드윈 캐넌과 휴 달턴에게 배웠다.[47] 1923년 LSE 졸업 후 윌리엄 베버리지의 연구 조수로 일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 뉴 칼리지와 LSE에서 강의했다. 1929년 LSE 경제학부장이 되었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전시 공무원으로 근무한 후,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다시 LSE 경제학부장을 역임했다.

경제학 외 분야에서는 1930년 영국 실업 문제 해결 위원회에 참여하여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대립했고, 1941년~1945년 영국 전시 내각 경제 운영을 담당했으며,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 영국 대표로 참석했다. 1961년 파이낸셜 타임스 경영에 참여했고, 1961년~1963년 영국 고등교육 혁신 위원회를 이끌었다.

1982년1984년 두 차례 뇌졸중을 겪고 1984년 5월 15일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라이어널 로빈스는 1898년 11월 22일 런던 서부의 십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롤랜드 리처드 로빈스(1872–1960)는 농부였고, 미들섹스 카운티 의회 의원이자 전국 농민 연합에도 참여했다.[1] 그의 가족은 엄격 침례교 신자였다.[2] 11세 때 어머니 로사 매리언 로빈스가 암으로, 13세 때 여동생 위니프레드가 수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으로 어린 시절 기독교 신자였던 로빈스는 종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리오넬 로빈스 빌딩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1년 후인 1915년 가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입학했다.[4] 그러나 1916년 포병 장교로 참전하여, 1918년 왼쪽 팔에 총상을 입고 귀향했다.[5] 종전 후, 길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동료 운동가들의 비현실성과 길드 사회주의 문헌의 빈틈을 느끼고 환멸을 느꼈다.

1920년 런던 정치경제 대학교(LSE)에 입학하여,[2] 처음에는 해럴드 래스키 밑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에드윈 캐넌과 휴 달턴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23년 경제학 학사(B.Sc.(Econ))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9] 졸업 후 윌리엄 베버리지의 연구 조교 생활을 거쳐,[9] 1924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 뉴 칼리지에서,[10] 1925∼1927년에는 런던 정치경제 대학교에서, 1927∼1929년엔 다시 옥스퍼드 대학교 뉴 칼리지에서 경제학 강의를 했다.[2] 1929년, 런던 정치경제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고, 1961년까지 이 대학을 대표하는 교수 중 한 명이었다.

2. 2.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 교수 시절

1927년 로빈스는 뉴 칼리지 펠로우로 돌아갔지만,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매주 강의를 계속했다.[2] 1929년 LSE 경제학 교수였던 앨린 애보트 영이 사망하자, 로빈스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햄스테드 가든 서버브로 이사했다.[2] 그는 1930년대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존 힉스, 니컬러스 칼도어 등을 채용하여 경제학과를 발전시켰다.[2]

로빈스는 오스트리아 학파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학과장 취임 후 첫 인사로 하이에크를 LSE로 초빙했다.[2] 힉스, 칼도어, 아바 러너, 티보르 시토프스키 등 젊은 연구자들도 수학적으로 세련된 대륙 유럽의 경제학에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LSE는 로잔 학파 등 대륙 전통을 잇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영국 내 거점이 되었다.

이 시기 로빈스를 포함한 LSE 경제학자들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마셜 학파 경제학자들과 적극적으로 논쟁을 벌였다. 대표적인 논쟁으로는 경기 순환에 관한 하이에크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논쟁, 효용의 개인 간 비교에 관한 로빈스와 아서 세실 피구의 논쟁이 있다.

로빈스는 제번스와 필립 위크스티드를 지지했으며, 발라, 파레토, 뵘바베르크, 하이에크, 빅셀 등 대륙 유럽 경제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2] 당시 영국 경제학계는 알프레드 마셜과 그의 제자들(마셜 학파)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부분 균형 분석을 선호하고 수학적 방법을 중시하지 않아 대륙 경제학자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로빈스는 대륙 경제학에 친화적이었고, 마셜의 영향을 받지 않은 드문 영국 경제학자였다.

1930년 10월 제2차 맥도널드 내각의 경제학 위원회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충돌했다. 케인스가 의장을 맡은 이 위원회는 대공황에 대한 경제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구성되었으며, 휴버트 헨더슨, 조시아 스탬프, 아서 세실 피구 등이 참여했다.[11] 로빈스는 케인스의 제안에 반대하여 소수 의견 보고서 제출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는 보호무역주의에 반대하며 회의에서 퇴장하고, 필립 스노든에게 자신의 입장을 전달했다.[12][13] 이 사건으로 LSE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경제학자들 사이에 수년간 불화가 지속되었다.[13][14]

로빈스는 초기에는 케인스의 1936년 저서 ''일반 이론''에 반대했지만, 이후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활동

1940년 로빈스는 내각 경제부에 배속되어 전시 경제, 식량 공급, 고용 안정, 국민 최저한의 보장 (내셔널 미니멈), 사회 보장 등의 정책을 입안했으며, 경제부 부장에 취임했다.[15][2][16] 동료로는 제임스 미드가 있었고, 재무성 고문으로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있었다. 1941년에는 윈스턴 처칠 전시 내각의 내각 관방 경제 부문 국장이 되어 전시 경제 운영과 전후 계획의 책임자가 되었다.

로빈스는 제임스 미드와 함께 1941년에 의류, 신발, 가정용품 배급을 위한 포인트 시스템을 고안했는데, 이는 성공적인 정책으로 평가받는다.[2][16] 1942년부터 로빈스는 주로 전후 재건 계획에 미드와 함께 참여했다.[15]

존 보이드 오어와 프랭크 리제트 맥두걸이 식량 안보를 국제 연합 의제에 올리는 데 성공하자, 로빈스는 1943년 버지니아주 핫 스프링스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2][17] 그는 또한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영국을 대표했으며, 1946년 영미 차관 협상에 참여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완전히 화해했다.[2]

전후, 로빈스는 케임브리지 경제학자들, 특히 케인스와 로버트슨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술회했다.[18]

2. 4. 고등 교육 개혁과 말년

1961년 영국 고등교육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1963년에 '로빈스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이 보고서는 영국의 고등교육 대중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19][20] 로빈스 보고서는 고등 교육의 실질적인 확대를 옹호했는데, 이는 현재 "로빈스 원칙"이라고 불리는, 적절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의 수요가 고등 교육 발전을 이끌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보고서에는 리처드 레이어드와 클라우스 모저의 연구, 장 플라우드와 A. H. 헐시의 최근 아이디어도 반영되었다. 1968년 대학 교육 확충 정책의 일환으로 새로 설립된 스터링 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20] 그는 대학교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도 옹호했다.

만년에 로빈스는 경제 사상사 연구에 몰두했다. 1980년에 그가 했던 LSE 강의는 나중에 출판되었다.[21] 1984년 5월,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3. 주요 업적 및 이론

로빈스는 자유 시장 경제학자이자, 그의 경제학 정의로 유명하다.[40] 1928년 논문 "대표적 기업"(The Representative Firm)에서는 알프레드 마셜의 주요 개념을 비판했다. 1966년 자본 축적에 관한 치칠리 강연(1968년 출판)과 후기 스미스 경제학에 관한 저서 "영국 고전 정치 경제학에서의 경제 정책 이론"은 부정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41]

1932년 저서 『경제학의 본질과 중요성에 관한 에세이(Essay on the Nature and Significance of Economic Science)』[42]에서 제시한 경제학 정의는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된다. 희소성에 기반한 이론 구축은 한계 혁명 이후 신고전파 경제학의 특징이며, 한계주의 입장을 잘 나타낸다.

아서 세실 피구의 후생 경제학 프레임워크를 비판했다.[3]

1930년 10월 제2차 맥도널드 내각 경제학 위원회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제안 초안에 서명을 거부하며 충돌했다.[12] 초기에는 케인스의 1936년 저서 ''일반 이론''에 반대했지만, 이후 정부 개입 필요성을 받아들였다.

로빈스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제목비고
1923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Economics)Economics
1926자본주의의 역학(Dynamics of Capitalism)Economica
1927인구의 최적 이론(The Optimum Theory of Population)London Essays in Economics: In Honour of Edwin Cannan영어
1928대표적 기업(The Representative Firm)EJ
1930정태적 균형의 개념에 대한 특정 모호성에 관하여(On a Certain Ambiguity in the Conception of Stationary Equilibrium)EJ
1932경제학의 본질과 중요성에 관한 에세이(Essay on the Nature and Significance of Economic Science)
1934경제학과 심리학의 관계에 대한 고찰(Remark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Economics and Psychology)Manchester School
1934비용 이론의 일부 측면에 대한 고찰(Remarks on Some Aspects of the Theory of Costs)EJ
1934The Great Depression영어
1936경제 사상사에서 제본스의 위치(The Place of Jevons in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Manchester School
1937Economic Planning and International Order영어
1938효용의 대인간 비교: 논평(Interpersonal Comparisons of Utility: A Comment)EJ
1939The Economic Basis of Class Conflict and Other Essays in Political Economy영어[43]
1939The Economic Causes of War영어
1947평화와 전쟁에서의 경제 문제(The Economic Problem in Peace and War)
1952영국 고전 정치 경제학에서의 경제 정책 이론(The Theory of Economic Policy in English Classical Political Economy)
1958로버트 토렌스와 고전 경제학의 진화(Robert Torrens and the Evolution of Classical Economics)
1963정치와 경제(Politics and Economics)
1966현대 세계의 대학교(The University in the Modern World)
1968경제 사상사에서 경제 발전 이론(The Theory of Economic Development in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1970제이콥 바이너: 찬사(Jacob Viner: A tribute)
1970The Evolution of Modern Economic Theory영어
1971Autobiography of an Economist영어
1976정치 경제, 과거와 현재(Political Economy, Past and Present)
1979인플레이션에 반대하며(Against Inflation)
1980고등 교육 재고(Higher Education Revisited)
1981경제학과 정치 경제학(Economics and Political Economy)AER
1998경제 사상사: 런던 정경대 강연(A History of Economic Thought: The LSE Lectures)


3. 1. 경제학 정의

로빈스는 자유 시장 경제학자이자, 그의 경제학 정의로 유명하다.

로빈스는 그의 저서 《경제학적 과학의 본질과 중요성에 관한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 경제학은 인간의 행동을, 대안적 사용을 갖는 희소한 수단과 목적 간의 관계로 연구하는 과학이다.[26]

1930년대 논쟁 이후, 이 정의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일반적인 합의를 얻었다.[27]

희소성에 주목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이론을 구축하는 것은 한계 혁명 이후의 신고전파 경제학의 특징이며, 이 정의는 한계주의의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로빈스는 캐넌(:en:Edwin Cannan)의 경제학을 물질적인 부(후생)와 관련한 정의나, 베버리지의 소박한 실증주의를 부정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희소하고 대체 가능한 수단을 조합하는 일관된 인간의 행동에 주목했다. 또한 피구와 호트리(:en:Ralph George Hawtrey)가 경제학은 윤리학과 뗄 수 없다고 본 것을 비판하여, 경제학의 영역에서 규범성을 배제하고 연역적 조작을 중시했다.

《경제학적 과학의 본질과 중요성에 관한 에세이》에서 로빈스는 효용의 개인 간 비교를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는데, 이것은 아서 세실 피구의 후생 경제학의 프레임워크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다.

3. 2. 신고전파 경제학 발전 기여

로빈스는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를 중심으로 로잔 학파, 오스트리아 학파 등 대륙 유럽의 신고전파 경제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영국 경제학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31] 그는 학부장 취임 후 첫 인사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LSE로 초빙했고, 존 힉스, 니콜라스 칼도어, 아바 러너, 티보르 시토프스키 등 젊은 연구자들도 대륙 유럽의 경제학에 영향을 받았다.[31]

로빈스는 알프레드 마셜의 기업 이론을 비판하고, 프리드리히 폰 비저의 이론을 발전시킨 대체 비용에 기초한 공급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 필립 위크스티드를 지지했으며, 레옹 발라, 빌프레도 파레토,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크누트 빅셀 등 대륙 유럽 경제학자들의 저작에서 영향을 받았다. 당시 영국 경제학계는 마셜과 그의 학파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륙 경제학자들과 달리 수학적 방법과 일반 균형 이론보다 부분 균형을 중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빈스는 대륙의 전통에 친근감을 느꼈고, 마셜의 영향을 받지 않은 드문 영국 경제학자였다.[31]

로빈스는 사회주의 계산 논쟁에서 오스트리아 학파의 편을 들었다.[30] 그는 경제학의 정의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희소 자원과 목적 사이의 관계로서의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희소성에 주목하여 이론을 구축하는 한계 혁명 이후 신고전파 경제학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3. 3. 후생 경제학 논쟁

아서 세실 피구의 후생 경제학은 개인의 복지 관점에서 경제 시스템과 정책을 평가한다는 획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효용을 복지의 지표로 전적으로 사용했다. 피구는 제러미 벤담 이래의 공리주의 전통에 따라 기수적 효용을 상정했다. 즉, 효용은 실체 있는 개념이며, 단위를 이용하여 측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효용을 개인 간에 비교하거나 합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3]

하지만 로빈스는 효용의 개인 간 비교를 과학적으로 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피구의 후생 경제학에서는 측정된 효용을 개인에 대해 합산하고, 그 효용의 총합의 크기를 사회 상태나 경제 시스템의 평가에 이용하는 것을 상정했지만, 로빈스는 이러한 효용의 개인 간 비교는 과학적이지 않다고 보았으며, 자신의 프레임워크에서는 기수적 효용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3]

이후 이 논쟁은 로빈스의 "승리"로 끝났다. 로빈스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존 힉스, 니컬러스 칼도어 등은 '신후생 경제학'을 확립하면서 순위에만 초점을 맞추는 서수적 효용을 새로운 프레임워크의 기초로 사용했다.[3]

3. 4. 케인스 이론과의 관계

로빈스는 1930년 10월 초 제2차 맥도널드 내각의 경제학 위원회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충돌했다. 이 위원회는 케인스가 의장을 맡은 소규모 실무 그룹으로, 대공황 상황에서 경제 정책을 고려하기 위해 경제 자문 위원회와 별도로 구성되었으며, 위원회 소속의 휴버트 헨더슨과 조시아 스탬프, 그리고 학계를 대표하는 아서 세실 피구와 로빈스로 구성되었다.[11]

로빈스는 관세를 포함한 케인스의 제안 초안에 서명을 거부했고, 소수의견 보고서를 제출할 기회를 원했다. 케인스는 의장으로서 로빈스가 단독 소수 의견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이 요청을 허가하지 않았다.[12] 로빈스는 보호무역주의적 견해를 로터미어 경과 비버브룩 경의 견해와 비교하며 회의에서 퇴장했고, 자신의 비판 내용을 담은 보고서에 반대하는 입장을 필립 스노든에게 전달했으며,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수년간 좋지 않은 감정이 지속되었다.[13][14]

초기에 로빈스는 케인스의 1936년 저서 ''일반 이론''에 반대했다. 그의 1934년 대공황에 관한 논문은 그의 그러한 생각의 시기를 보여주는 분석이다. 하지만 이후 그는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받아들였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 의한 『일반 이론』이 공표됨과 동시에, 로빈스는 케인스의 이론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하게 된다. 1934년에는 ''The Great Depression'' (『대공황』)을 저술하여 케인스와는 전혀 다른 대공황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다. 로빈스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영향을 받아, 신용 과잉으로 경기가 과열되고 있으므로 공공 투자의 확대가 아닌 긴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로빈스는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

로빈스는 LSE를 반 케인스파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지만, 이는 성공하지 못했다. 힉스, 칼도어, 러너와 같은 한때 로빈스의 영향을 받은 젊은 경제학자들이 이번에는 케인스의 편에 서서 케인스 이론의 보급을 이끄는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케인스 이론의 영향력이 높아짐에 따라 로빈스도 태도를 완화하여, 점차 케인스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4. 사상 및 정치적 입장

로빈스는 자유 시장 경제학자였다.[30] 그는 사회주의 계산 논쟁에서 오스트리아 학파의 편을 들었다.

로빈스는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경제학의 본질과 중요성"(1932)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경제 체계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고립되어 있으며, 공산당 집행위원회가 로빈슨 크루소와 유사한 위치에서 경제 문제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생산 수단의 공적 소유에서는 개인의 적극성이나 저항이 배제되고[31], 집행위원회의 결정은 소비자나 생산자가 아닌 집행위원회 자체의 평가에 따라 이루어져 필연적으로 자의적이 된다고 주장했다.[31] 그는 시장가격 체계가 없으므로 생산 조직은 최고 수뇌부의 평가에 의존한다고 보았다.[31]

로빈스는 "경제 계획과 국제 질서"(1935)에서 국제 공산주의 계획은 시장 없이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이익과 민주주의에 큰 위험을 초래한다고 비판했다.[48]

로빈스는 『계급 투쟁의 경제적 기초와 정치경제학 논집』(1939)에서 제이콥 바이너 등의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의 이론이 틀렸음을 확신한다고 했다.[49]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전쟁을 자본가의 음모 탓으로 돌리지만,[49] 주요 긴장은 무절제한 금융 재정이나 기업가의 책략과는 반대로 발생하며, 소심한 재정도 기업과는 다른 정치인에 의해 권력 투쟁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49]

로빈스는 국제 관계론에서 "대서양 양쪽에서 자유 사회가 어떤 항구적인 연합을 맺는 것이 공산주의자의 광신이 불타 없어지고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잦아들 때까지 세계 평화의 유일한 실제적 보증이다"라고 주장했다.[49] 또한 경제 민족주의는 외교적 마찰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3]

4. 1. 자유 시장 옹호

로빈스는 자유 시장 경제학자였다.[30] 그는 사회주의 계산 논쟁에서 오스트리아 학파의 편을 들었다.

로빈스는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경제학의 본질과 중요성"(1932)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경제 체계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고립되어 있으며, 공산당 집행위원회가 로빈슨 크루소와 유사한 위치에서 경제 문제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생산 수단의 공적 소유에서는 개인의 적극성이나 저항이 배제되고[31], 집행위원회의 결정은 소비자나 생산자가 아닌 집행위원회 자체의 평가에 따라 이루어져 필연적으로 자의적이 된다고 주장했다.[31] 그는 시장가격 체계가 없으므로 생산 조직은 최고 수뇌부의 평가에 의존한다고 보았다.[31]

로빈스는 교환 경제에서는 개인의 결정이 간접적인 영향을 넘어선 합의를 가지며, 화폐 사용을 통해 희소성의 관계에 있는 복합체(임금, 이윤, 가격, 자본화 비율, 생산 조직)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전체를 파악하기 위한 일반 법칙을 만들기 위해서는 추상적 사고가 필요하며, 경제 분석은 교환 경제에서 가장 유익하다고 주장했다.[31] 반면 고립된 공산주의 경제에서는 공산주의의 존재 이유 때문에 경제 분석이 불필요하며 배제된다고 보았다.[31]

또한, 마르크스엥겔스 등의 유물사관을 비판하며, 유물사관에서 주장하는 역사적 사건이 물질주의적 변화로 귀결된다는 것은 경제학의 범위를 벗어난 사회학적 명제라고 주장했다.[31]

로빈스는 "경제 계획과 국제 질서"(1935)에서 국제 공산주의 계획은 시장 없이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이익과 민주주의에 큰 위험을 초래한다고 비판했다.[48]

로빈스는 『계급 투쟁의 경제적 기초와 정치경제학 논집』(1939)에서 제이콥 바이너 등의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의 이론이 틀렸음을 확신한다고 했다.[49]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전쟁을 자본가의 음모 탓으로 돌리지만,[49] 주요 긴장은 무절제한 금융 재정이나 기업가의 책략과는 반대로 발생하며, 소심한 재정도 기업과는 다른 정치인에 의해 권력 투쟁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49]

로빈스는 국제 관계론에서 "대서양 양쪽에서 자유 사회가 어떤 항구적인 연합을 맺는 것이 공산주의자의 광신이 불타 없어지고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잦아들 때까지 세계 평화의 유일한 실제적 보증이다"라고 주장했다.[49]

4. 2. 국제 관계

로빈스는 학계 밖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1940년에는 내각 경제부에 배속되어 전시 경제, 식량 공급, 고용 안정, 국민 최저한의 보장 (내셔널 미니멈), 사회 보장 등의 정책을 입안했다.[1] 1941년에는 윈스턴 처칠 전시 내각의 내각 관방 경제 부문 국장이 되어 전시 경제 운영과 전후 계획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기간 중 1943년 핫 스프링스 회의, 1944년 브레튼 우즈 회의에 영국 대표로 참가하여 전후 국제 경제 질서 확립에 관여했으며, 1945년에는 미영 금융 협정 협상에 참여했다.

로빈스는 수에즈 위기가 1776년 이후 영국 외교사상 최대의 실수였으며, 이로 인해 영국은 일류 강대국으로서의 지위와 지도력을 잃었다고 언급했다.[2]

또한 경제 민족주의는 외교적 마찰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3]

5. 비판 및 논쟁

로빈스는 당시 영국 경제학계의 주류였던 마셜 학파와 여러 차례 논쟁을 벌였다. 특히 케인스와는 대공황에 대한 경제 정책, 케인스의 일반 이론 등에 대해 의견 충돌을 겪었다.[11]

케인스의 『일반 이론』이 공표되자, 로빈스는 케인스의 이론을 비판하며 1934년에 ''The Great Depression''(『대공황』)을 저술하여 케인스와는 전혀 다른 대공황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다. 그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영향을 받아, 신용 과잉으로 경기가 과열되고 있으므로 공공 투자의 확대가 아닌 긴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 그러나 이후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1]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를 반 케인스파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지만, 힉스, 칼도어, 러너와 같이 한때 로빈스의 영향을 받은 젊은 경제학자들이 케인스 편에 서면서 실패했다. 케인스 이론의 영향력이 높아짐에 따라 로빈스도 점차 케인스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5. 1. 마셜 학파와의 논쟁

로빈스는 당시 영국 경제학계의 주류였던 마셜 학파와 여러 차례 논쟁을 벌였다. 대표적인 논쟁들은 다음과 같다.

  • 케인스와의 논쟁: 1930년 10월, 제2차 맥도널드 내각의 경제학 위원회에서 로빈스는 대공황에 대한 경제 정책을 논의하면서 케인스와 충돌했다.[11] 케인스의 관세 제안에 반대하며 소수의견 보고서 제출을 요구했으나, 의장이었던 케인스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12] 이 사건으로 인해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경제학자들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13][14]

  • 케인스의 일반 이론에 대한 반대: 로빈스는 케인스의 1936년 저서 ''일반 이론''에 প্রথমে 반대했다. 그러나 이후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입장을 선회했다.

  • 하이에크와 케인스의 경기 순환 논쟁: 로빈스는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이에크를 LSE로 초빙하여, 하이에크와 케인스 사이의 경기 순환 논쟁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 피구와의 효용의 개인 간 비교 논쟁: 로빈스는 『경제학의 본질과 의의』에서 효용의 개인 간 비교가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비판하며, 피구의 후생 경제학 체계를 비판했다.[11] 피구는 벤담 이래의 공리주의 전통에 따라 효용을 측정 가능하고 개인 간 비교 및 합산이 가능한 기수적 효용으로 보았다. 반면 로빈스는 이러한 기수적 효용 개념을 부정하고, 개인 간 효용 비교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로빈스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후 힉스, 칼도어, 새뮤얼슨 등은 순위에만 초점을 맞추는 서수적 효용을 바탕으로 "신후생 경제학"을 확립했다.


이러한 논쟁들을 통해 로빈스와 LSE는 자신들의 주장을 확립하고 영국 경제학계에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 영향은 미국시카고 학파 등 영어권 국가들에도 미쳤다.

5. 2. 케인스 이론 비판과 수용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일반 이론』이 공표되자, 로빈스는 케인스의 이론을 비판하였다. 1934년에는 ''The Great Depression''(『대공황』)을 저술하여 케인스와는 전혀 다른 대공황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다. 로빈스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영향을 받아, 신용 과잉으로 경기가 과열되고 있으므로 공공 투자의 확대가 아닌 긴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 이후 로빈스는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1]

로빈스는 LSE를 반 케인스파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힉스, 칼도어, 러너와 같이 한때 로빈스의 영향을 받은 젊은 경제학자들이 케인스 편에 서서 케인스 이론의 보급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케인스 이론의 영향력이 높아짐에 따라 로빈스도 태도를 완화하여, 점차 케인스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6. 한국과의 관계 및 영향

라이어널 로빈스의 사상은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정부 주도의 경제 개발 정책과 함께 시장 경제 원리가 점차 도입되는 과정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로빈스가 강조했던 경제적 자유와 효율성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6. 1. 한국의 경제 발전과의 관련성

라이어널 로빈스의 사상은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시장 경제 원칙과 자유 무역을 강조하는 정책들과 연결될 수 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가 급속한 성장을 이루면서 정부 주도의 경제 개발 정책과 함께 시장 경제 원리가 점차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로빈스가 강조했던 경제적 자유와 효율성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7. 저서


  • "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Economics), 1923, "Economics"
  • "자본주의의 역학"(Dynamics of Capitalism), 1926, ''Economica''
  • 인구의 최적 이론(The Optimum Theory of Population)|인구의 최적 이론영어, 1927, Gregory와 Dalton 편집, ''London Essays in Economics''.
  • "대표적 기업"(The Representative Firm), 1928, ''EJ''
  • "정태적 균형의 개념에 있어서의 어떤 모호성에 관하여"(On a Certain Ambiguity in the Conception of Stationary Equilibrium), 1930, ''EJ''
  • ''경제학의 본질과 중요성에 관한 에세이(Essay on the Nature and Significance of Economic Science)''[42], 1932.
  • * 나카야마 이치로 감수, 츠지 로쿠베에 역, 『경제학의 본질과 의미』 동양경제신보사, 1957년.
  • * 고미네 아츠시・오오츠키 타다시 역 『경제학의 본질과 의미 근대 사회 사상 컬렉션』 교토대학 학술출판회, 2016년.
  • "경제학과 심리학의 관계에 대한 고찰"(Remark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Economics and Psychology), 1934, ''Manchester School''
  • "비용 이론의 몇 가지 측면에 대한 고찰"(Remarks on Some Aspects of the Theory of Costs), 1934, ''EJ''
  •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대공황영어, 1934.
  • 경제 계획과 국제 질서(Economic Planning and International Order)|경제 계획과 국제 질서영어, 1937
  • "경제사상사에서 제본스의 위치"(The Place of Jevons in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1936, ''Manchester School''
  • "효용의 대인 비교: 주석"(Interpersonal Comparisons of Utility: A Comment), 1938, ''EJ''
  • 전쟁의 경제적 원인(The Economic Causes of War)|전쟁의 경제적 원인영어, 1939.
  • 계급 투쟁의 경제적 기초와 정치 경제학 논집(The Economic Basis of Class Conflict and Other Essays in Political Economy)|계급 투쟁의 경제적 기초와 정치 경제학 논집영어, 1939[43]
  • ''평화와 전쟁에서의 경제 문제''(The Economic Problem in Peace and War), 1947.
  • ''영국 고전 정치 경제학에서의 경제 정책 이론''(The Theory of Economic Policy in English Classical Political Economy), 1952.
  • * 『고전 경제학의 경제 정책 이론』 이치카와 야스지로 역, 동양경제신보사, 1964년
  • ''로버트 토렌스와 고전 경제학의 진화''(Robert Torrens and the Evolution of Classical Economics), 1958.
  • ''정치와 경제''(Politics and Economics), 1963.
  • ''현대 세계의 대학''(The University in the Modern World), 1966.
  • ''경제 사상사에서 경제 발전 이론''(The Theory of Economic Development in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1968.
  • * 『경제 발전의 학설』 이데구치 카즈오・이토 마사노리 공역, 동양경제신보사, 1971년.
  • ''제이콥 바이너: 헌사''(Jacob Viner: A tribute), 1970.
  • ''현대 경제 이론의 진화''(The Evolution of Modern Economic Theory), 1970.
  • 어느 경제학자의 자서전(Autobiography of an Economist)|어느 경제학자의 자서전영어, 1971.
  • * 일본어 번역, 『어느 경제학자의 자서전』 다나카 히데오 감수, 미네르바 서방, 2009년.
  • ''정치 경제, 과거와 현재''(Political Economy, Past and Present), 1976.
  • ''인플레이션에 반대하여''(Against Inflation), 1979.
  • ''고등 교육 재고''(Higher Education Revisited), 1980.
  • "경제학과 정치 경제"(Economics and Political Economy), 1981, ''AER''.
  • ''경제 사상사: 런던 정경대 강연''(A History of Economic Thought: The LSE Lectures), 워렌 J. 새뮤얼스 및 스티븐 G. 메데마 편집, 1998.

참조

[1]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2] ODNB Robbins, Lionel Charles, Baron Robbins
[3] ODNB Robbins, Caroline (1903–1999)
[4]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5]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6]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7]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8]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9] 서적 Hugh Dalton Macmillan 1985-01-01
[10]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11]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12]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13] 서적 John Maynard Keynes: The economist as saviour, 1920-1937 https://books.google[...] Papermac 1994-01-01
[14] 서적 Hugh Dalton Macmillan 1985-01-01
[15] 서적 The Wartime Diaries of Lionel Robbins and James Meade, 1943–45 https://books.google[...] Springer 1990-01-01
[16]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1-01
[17]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1-01
[18] 서적 The Economic Problem in Peace and War – Some Reflections on Objectives and Mechanisms Read Books 2007-01-01
[19] 서적 The Crisis of the Meritocracy: Britain's Transition to Mass Education Since the Second World War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0-01-01
[20] 서적 How We Got Here: The '70s https://archive.org/[...] Basic Books 2000-01-01
[21] 서적 A History of Economic Thought: The LSE Lectures https://archive.org/[...]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01-01
[22]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23]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24] 서적 John Maynard Keynes https://books.google[...] Macmillan 1983-01-01
[25]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26] 서적 An Essay on the nature and significance of Economic Science
[27]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28]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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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31]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32] London Gazette 1944-06-08
[33] 웹사이트 APS Member History https://search.amphi[...] 2023-01-18
[34] London Gazette 1959-06-16
[35] 웹사이트 Lionel Charles Robbins https://www.amacad.o[...] 2023-01-18
[36] 간행물 London Gazette 1968-01-01
[37] 웹사이트 Heriot-Watt University Edinburgh: Honorary Graduates http://www1.hw.ac.uk[...] 2016-04-11
[38] 웹사이트 LSE: A Landmark Library https://digital.libr[...] 2020-12-07
[39] 웹사이트 NTU: Paramedic Science https://www.ntu.ac.u[...] 2020-12-07
[40] 서적 Lionel Robb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9-30
[41] 논문 Robbins on the History of Development Theory 1972-04
[42] 서적 An Essay on the Nature and Significance of Economic Science https://archive.org/[...] Macmillan and Co., Limited
[43] 논문 Review of The Economic Basis of Class Conflict and Other Essays in Political Economy. https://www.jstor.or[...] 1942
[44] 서적 Lionel Robbins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45] 뉴스 Lord Robbins, economist, dies; active in the arts and education https://www.nytimes.[...] 2020-01-30
[46] 웹사이트 LSE: Lionel Robbins by Richard Robbins https://blogs.lse.ac[...] 2020-12-07
[47] 서적 やさしい経済学 日本経済新聞社 2001
[48] 문서 "経済計画と国際秩序」(1935)第三部「完全な国際計画」
[49] 문서 The Economic Causes of War https://mises.org/re[...]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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