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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푸앵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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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몽 푸앵카레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여러 차례 총리와 재무장관을 역임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대통령으로 프랑스를 이끌었다. 그는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총리로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독일의 팽창을 막으려 노력했으며, 1913년부터 1920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에 대응했다. 1922년부터 1924년까지 다시 총리를 역임하며 독일의 배상금 문제에 강경하게 대처했으나, 1924년 총선에서 패배했다. 1926년 다시 총리가 되어 금융 위기를 수습하고 프랑스 경제를 안정시켰으며, 1929년 은퇴 후 1934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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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푸앵카레
기본 정보
공식 초상화, 1913년
이름레이몽 니콜라 랑드리 푸앵카레
출생일1860년 8월 20일
출생지바를레뒤크, 프랑스
사망일1934년 10월 15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정당민주공화동맹
배우자앙리에트 베누치(1904년 8월 17일 결혼)
모교낭트 대학교
파리 대학교
서명
주요 직책
프랑스 대통령임기 시작: 1913년 2월 18일
임기 종료: 1920년 2월 18일
총리: 아리스티드 브리앙, 루이 바르투, 가스통 두메르그, 알렉상드르 리보, 르네 비비아니, 폴 팽르베, 조르주 클레망소, 알렉상드르 밀랑
전임: 아르망 팔리에르
후임: 폴 데샤넬
프랑스 총리임기 시작: 1926년 7월 23일
임기 종료: 1929년 7월 29일
대통령: 가스통 두메르그
전임: 에두아르 에리오
후임: 아리스티드 브리앙
프랑스 총리임기 시작: 1922년 1월 15일
임기 종료: 1924년 6월 8일
대통령: 알렉상드르 밀랑
전임: 아리스티드 브리앙
후임: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마르살
프랑스 총리임기 시작: 1912년 1월 21일
임기 종료: 1913년 1월 21일
대통령: 아르망 팔리에르
전임: 조제프 카요
후임: 아리스티드 브리앙
프랑스 외무장관임기 시작: 1922년 1월 15일
임기 종료: 1924년 6월 8일
총리: 본인
전임: 아리스티드 브리앙
후임: 에드몽 르페브르 뒤 프레
프랑스 외무장관임기 시작: 1912년 1월 14일
임기 종료: 1913년 1월 21일
총리: 본인
전임: 쥐스탱 드 셀브
후임: 샤를 조나르
프랑스 재무장관임기 시작: 1926년 7월 23일
임기 종료: 1928년 11월 11일
총리: 본인
전임: 아나톨 드 몽지
후임: 앙리 셰롱
프랑스 재무장관임기 시작: 1906년 3월 14일
임기 종료: 1906년 10월 25일
총리: 페르디낭 사리앵
전임: 피에르 메를루
후임: 조제프 카요
프랑스 재무장관임기 시작: 1894년 5월 30일
임기 종료: 1895년 1월 26일
총리: 샤를 뒤퓌
전임: 오귀스트 뷔르도
후임: 알렉상드르 리보
프랑스 교육부 장관임기 시작: 1895년 1월 26일
임기 종료: 1895년 11월 1일
총리: 알렉상드르 리보
전임: 조르주 레그
후임: 에밀 콩브
프랑스 교육부 장관임기 시작: 1893년 4월 4일
임기 종료: 1893년 12월 3일
총리: 샤를 뒤퓌
전임: 샤를 뒤퓌
후임: 외젠 스퓔레르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좌석: 34좌
임기 시작: 1909년 3월 18일
임기 종료: 1934년 10월 15일
전임: 에밀 게바르
후임: 자크 방빌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Re-mong Pwaengkare
미국 철학 학회 회원미국 철학 학회 회원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

2. 유년기 및 교육

레몽 니콜라 랑드리 푸앵카레는 1860년 8월 20일 바를르뒤크에서 태어나, 독퇴르 뇌브 로에 위치한 외가쪽 부르주아 저택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외조부모는 뇌이쉬르센에서 목재 거래로 재산을 모았다.

1871년 프로이센 점령 시기 부모의 저택이 징발되자, 푸앵카레는 자기 개의 이름을 독일 제국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따 비스마르크라고 불렀다. 낭시에서 교육받은 후, 파리 리세 루이르그랑을 거쳐 파리 대학교 법대에서 법학사와 문학사를 취득했다. 이후 수습 변호사를 거쳐 변호사협의회 서기가 되었다.

20세에 프랑스 최연소 변호사가 되었고, 파리 변호사 협회 회의 서기(Secrétaire de la Conférence du Barreau de Paris)로 임명되었다. 화학자 외젠 튀르팽이 쥘 베른의 소설 ''기의 맞서다'' 속 "미친 과학자"가 자신을 모델로 했다며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쥘 베른을 변호하여 승소했다.[5] 26세에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최연소 의원이 되었다.[4]

1880년대 군 복무 중인 푸앵카레

2. 1. 가족 관계

레몽 푸앵카레는 바를르뒤크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 공학자인 니콜라 앙토니 푸앵카레(1825-1911)였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나닌 마리 피카티에(1838-1913)였다.

모계쪽으로 레몽 푸앵카레는 루이 필리프 1세 치세의 하원의원이던 장 랑드리 질롱의 증손자였다.

레몽 푸앵카레는 낭시 대학교 의대 학장이던 에밀 푸앵카레의 조카이자, 훗날 물리학자이자 파리 학술원 부원장이 되는 뤼시앵 푸앵카레의 형이었다. 또한 석학이자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의 친사촌이기도 하다.

3. 정치 경력

푸앵카레는 앙리 뒤 뷔의 비서로 일하면서 법조계 경력을 시작했고, 쥘 드벨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1883년에는 변호사협의회 개막식에서 2년 전 작고한 전 변호사회 회장이자 전 국무회의 의장 쥘 뒤포르를 기리는 추도사를 했다.

1886년 쥘 드벨이 농업장관을 맡고 있을 때 18개월 동안 그의 비서실장을 맡았고, 이후 뫼즈 데파르트망 의회에서 피에레피트 캉통 지역구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87년 뫼즈 하원의원으로 첫 임기를 시작하면서 온건하고 타협적인 공화주의자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푸앵카레는 1895년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1887년 뫼즈 지역구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1890년~1891년, 1892년 예산 위원회에 참여했고, 샤를 뒤퓌 내각에서 교육·미술·종교 장관(1893년 4월~11월) 및 재무 장관(1894년 5월~1895년 1월)을 역임했다. 알렉상드르 리보 내각에서는 공공교육 장관을 역임했으며, 1895년 가을 의회 부의장에 선출, 1896년과 1897년에도 연임했다. 1902년 민주공화연맹을 창당하고, 1906년 페르디낭 사리앙 내각에서 재무 장관을 역임했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프랑스 총리를 역임하며 독일 견제 및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 회복 정책을 추진했고, 제1차 발칸 전쟁 이후 독일과의 관계에서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1913년부터 1920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하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성스러운 연합'' 체제를 구축했다. 휴전이 너무 이르다고 판단, 베르사유 조약에서 라인란트를 연합군 통제하에 둘 것을 주장했다.

1922년부터 1924년까지, 그리고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총리 겸 재무장관을 재임하며 독일 배상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고 프랑스 안정화 정책을 시행했다. 1924년 프랑스 총선에서는 패배했다.

1902년부터 1920년까지 푸앵카레를 중심으로 한 "푸앵카리즘"이라는 정치 운동이 있었다. 1902년에는 조르주 클레망소가 공화국 건립 이상을 잃은 보수적인 젊은 정치인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했고, 1911년 이후에는 독일의 위협에 맞선 "국가 갱신"을 의미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기업과 금융계 이익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했다.[1] 푸앵카레는 조르주 클레망소와 평생 불화를 겪었다.[6]

3. 1. 중도우파 정치인

푸앵카레는 쥘 드벨을 통해 정계에 입문하여, 1886년 쥘 드벨이 농업장관을 맡고 있을 때 18개월 동안 그의 비서실장을 맡았다. 이후 뫼즈 데파르트망 의회에서 피에레피트 캉통 지역구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87년 뫼즈 하원의원으로 첫 임기를 시작할 때부터 온건하고 타협적인 공화주의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녹의를 입은 레몽 푸앵카레.


1895년, 푸앵카레는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큰 성공을 거뒀다. 파리언론조합의 변호사로서 언론 문제를, 작가 쥘 베른의 변호사로서 문학 문제를, 당대 가장 거대했던 제조업, 금융업 기업들을 의뢰인으로 두며 회사 문제를 담당했다.

푸앵카레는 1887년 뫼즈 지역구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경제학자로서 의회에서 큰 명성을 얻었으며, 1890년~1891년과 1892년 예산 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는 샤를 뒤퓌(Charles Dupuy)의 첫 번째 내각(1893년 4월~11월)에서 교육·미술·종교 장관을, 두 번째와 세 번째 내각(1894년 5월~1895년 1월)에서는 재무 장관을 역임했다. 알렉상드르 리보(Alexandre Ribot) 내각에서는 공공교육 장관이 되었다. 그는 그 뒤를 이은 급진당 내각에서 제외되었지만, 새로운 내각이 제안한 상속세 개정안은 그가 전년에 제시한 제안을 기반으로 했다. 그는 1895년 가을 의회 부의장이 되었고, 급진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96년과 1897년에도 그 자리를 유지했다.

"기회주의(Opportunism)"의 추종자였던 레옹 갬베타(Léon Gambetta)의 다른 추종자들과 함께, 푸앵카레는 1902년 프랑스 제3공화국 하에서 가장 중요한 중도우파 정당이 된 민주공화연맹을 창당했다. 1906년, 그는 단명했던 페르디낭 사리앙(Ferdinand Sarrien) 내각에서 다시 재무 장관으로 복귀했다. 푸앵카레는 정치 경력 동안 변호사로서의 활동을 유지했으며, 문학 및 정치적 주제에 관한 여러 권의 에세이를 출판했다.

"푸앵카리즘(Poincarism)"은 1902년부터 1920년까지의 정치 운동이었다. 1902년, 이 용어는 조르주 클레망소가 공화국의 창립자들의 이상주의를 잃은 보수적인 젊은 세대의 정치인들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했다. 1911년 이후, 이 용어는 독일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국가 갱신"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푸앵카리즘"은 그가 기업과 금융계의 이익을 지지한 것을 가리킨다.[1] 푸앵카레는 조르주 클레망소와의 평생에 걸친 불화로 유명했는데, 클레망소와 푸앵카레는 서로를 매우 혐오했으며, 프랑스 정치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불화 중 하나를 벌였다.[6]

3. 2. 총리 시절 (1912-1913)

푸앵카레는 1912년 1월 프랑스 총리가 되어 독일의 "세계 패권" 야망을 저지하고, 프랑스의 동맹국인 러시아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7] 1908년-1909년 보스니아 위기 당시 독일의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전쟁을 위협했으나,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하지 않아 프랑스-러시아 동맹이 크게 흔들렸다. 1911년 제2차 모로코 사건에서는 독일이 전쟁을 위협했을 때 러시아가 프랑스를 지원하지 않았다.[7] 보스니아 위기 당시 프랑스의 러시아 지원 부족은 프랑스-러시아 관계의 최저점이었고, 니콜라스 2세는 동맹국으로부터 지원이 부족한 것에 불만을 표출했다.[7] 당시 니콜라스 2세는 동맹 파기를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대안 부재로 실행하지 못했다.[8]

1911년 제2차 모로코 사건에서 러시아가 프랑스를 지원하지 않은 것은 보스니아 위기 당시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불만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위기는 러시아의 굴욕으로 끝났다. 푸앵카레는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균열이 독일에게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독일은 러시아가 동맹을 준수하지 않을 수 있다고 여겨 프랑스에 대한 전쟁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9] 1912년 8월, 푸앵카레는 외교 관계 강화를 위해 러시아를 방문하여 니콜라스 2세를 만났다.[10] 푸앵카레는 이러한 ''화해''가 독일의 전쟁 도발을 막고 제2차 모로코 사건의 재발을 방지할 것이라 믿었다.[10] 친프랑스 성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제국은 프랑스 제3공화국의 지도자들을 대체로 경멸했지만, 푸앵카레는 예외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를 약속을 지키는 강력한 지도자로 평가했다.[11]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사조노프는 니콜라스 2세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푸앵카레와의 만남 후 "러시아는 확고하고 충실한 친구를 얻었으며, 그는 평균 이상의 정치적 자질과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물이다."라고 작성했다.[12]

동시에 푸앵카레는 독일의 비공식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을 희생시켜 확장주의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7] 역사, 경제, 종교적 이유로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중동 레반트 지역에 큰 관심을 가졌다. 프랑스는 수 세기 동안 마론파 기독교인의 수호자였으며, 1860년 지역 무슬림과 드루즈파가 마론파 기독교인을 학살했을 때 오스만 당국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전쟁을 불사하기도 했다. 20세기 초, 프랑스 내에는 오스만 시리아(현재의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요르단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 장악을 프랑스의 임무로 간주하는 영향력 있는 레반트 로비가 존재했다. 푸앵카레는 중동에서 프랑스의 확장주의를 주장하는 주요 단체인 ''Comité de l'Orient''의 핵심 구성원이었다.[8]

프랑스의 중동 야망 추구를 위한 독일과의 ''화해'' 시도는 제1차 발칸 전쟁의 결과로 강화되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훈련을 받은 불가리아가 독일 군사 고문단의 훈련을 받은 술탄의 군대를 빠르게 격파했다.[7] 불가리아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신속한 승리는 독일의 명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프랑스의 자신감을 고양시켜 푸앵카레가 베를린에 강경하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7]

푸앵카레는 프랑스가 강력한 이익을 주장하면서도 외교 관계 개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단호함"이 최선의 정책이라고 믿었다.[7] 1870년-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패전 이후, 프랑스 엘리트들은 프랑스가 독일을 단독으로 격파할 수 없으며, 다른 강대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13] 군사적 우위 외에도, 독일은 프랑스의 4천만 명(식민지 제외) 대비 7천만 명의 인구 우위와 프랑스 경제의 세 배에 달하는 경제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푸앵카레는 프랑스를 종속적 파트너로 전락시켜 강대국 지위를 종식시킬 프랑스-독일 동맹 제안을 거부했다.[14] 반면, 삼국 협상 당사국들은 거의 동등한 강대국이었기에 현재의 ''전쟁 전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14]

푸앵카레의 외교 정책은 본질적으로 방어적이었다. 그는 독일의 ''벨트폴리티크''(세계 정치)에 따라 독일이 세계 지배를 추구하는 상황에서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유지하고자 했다.[14] 그의 모든 외교 정책은 ''si vis pacem, para bellum''(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로마 격언에 기반했다. 그는 프랑스와 러시아를 강화하여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억제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그의 외교 정책이 지속적으로 반독일적이었던 것은 아니다.[14] 그는 카이요의 생각을 거부했지만, 특정 문제에 대해서는 프랑스-독일 관계 개선에 열려 있었다.[14]

재정 보수주의자였던 푸앵카레는 군비 경쟁 심화에 따른 재정적 영향에 깊이 우려했다. 로렌 출신인 그가 ''레방샤르''(레반시스트)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15] 그의 가족 집은 전쟁 중 3년 동안 징발되었다.[16] 그는 연설에서 "독일의 위협"을 경고했고, 베를린과의 화해 정책은 강한 자만을 존중하는 빌헬름 2세에게 프랑스의 약점으로 인식될 것이라고 믿었다.[14] 캐나다 역사학자 홀거 허위그와 리처드 해밀턴은 푸앵카레를 "공화주의 중도 우파의 전형으로, 반교권적이지만 반종교적이지 않고, 민족주의자이지만 호전적이지 않으며, 재산권, 자유 시장, 작은 정부를 옹호했다. 이념가가 아닌 그는 진정한 프랑스인이라면 누구와도 협력할 의향이 있는 실용적인 정치인이었지만, 사회주의 좌파, 가톨릭 우파, 그리고 독일로부터 프랑스를 방어하는 데는 단호했다."라고 묘사했다.[14]

3. 3. 대통령 시절 (1913-1920)

푸앵카레는 1913년 아르망 팔리에르의 뒤를 이어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870년대 파트리스 막마옹 이후 대통령직을 권력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시도한 제3공화국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성을 주장했고 외교 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15] 1914년 1월 20일, 그는 파리에 있는 독일 대사관을 방문한 최초의 프랑스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의 목표에 대한 독일의 이해를 증진시키려는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싶다는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는 제스처였다.[15]

1914년 초, 푸앵카레는 좌파 정치인 조제프 카이유가 이탈리아 정부를 중개자로 하여 바티칸과 비밀 회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편지를 공개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는 프랑스의 반교권주의 여론을 분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카이유는 대통령이 르 피가로의 편집장 가스통 칼메트에게 카이유가 첫 번째 아내에게 불성실했고, 친독 외교 정책과 관련된 의심스러운 재정 거래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서를 공개하지 말라고 압력을 가한 후 문서를 공개하지 않았다. 남편이 전처와 결혼한 상태에서 자신에게 쓴 연애 편지를 칼메트가 공개할지도 모른다는 데 화가 난 두 번째 카이유 부인이 1914년 3월 16일 칼메트의 사무실에 가서 그를 총으로 쏴 죽였기 때문에 문제는 해결된 채로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카이유 사건으로 알려진 이 스캔들은 1914년 상반기 프랑스의 주요 뉴스였고, 푸앵카레는 이제부터는 이 방법이 카이유에게 잘 먹히고 있으므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앙리에트 푸앵카레 부인을 보낼지도 모른다고 농담했다.[16]

'''르 쁘띠 주르날'''이 푸앵카레의 당선을 발표하다 (1913).

3. 3. 1.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6월 28일, 푸앵카레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국민에게 조의를 표했다.[16] 그러나 7월 위기는 암살 자체가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가 세르비아와의 전쟁 구실로 암살 사건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발생했다.[16]

1913년 푸앵카레는 1914년 7월 차르 니콜라이 2세를 만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프랑스-러시아 정상회담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최후통첩을 제시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푸앵카레가 귀국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되었다.[16] 푸앵카레는 총리 르네 비비아니와 함께 러시아를 방문하여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강화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상회담 당시 비엔나가 암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시작할 수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확실한 증거는 거의 없었다. 프랑스 정부는 사법장관 겸 대행 총리인 장-바티스트 비앵브뉘-마르탱이 담당했는데, 그의 결단력 부족은 파리에 있는 콰이 도르세이 최고위급 인사인 필립 베르테로를 좌절시켰다.[16] 푸앵카레가 파리와 소통하려는 시도는 독일인들에 의해 차단되었다.[16]

푸앵카레는 1914년 7월 30일 파리에 돌아와서야 위기를 알게 되었고, 즉시 상황이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16] 푸앵카레의 승인 하에 비비아니는 니콜라이에게 독일이 군대를 동원할 구실을 제공할 수 있는 조치를 즉시 취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16] 또한 프랑스군에게 독일과의 국경에서 6마일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6]

7월 31일, 파리 주재 독일 대사인 빌헬름 폰 쇤 백작은 비비아니에게 러시아의 동원이 계속된다면 독일은 12시간 이내에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경고를 담은 최후통첩을 제시했다.[17] 최후통첩은 또한 프랑스가 러시아와의 동맹을 즉각 파기하고, 독일군이 프랑스로 무방해 통과하도록 허용하며, 베르됭과 툴 요새를 독일군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17] 프랑스 정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대사인 모리스 팔레올로그에게 러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지시하는 한편, 프랑스의 동원을 명령하라는 조제프 조프르 장군의 요청을 거절했다.[17]

1914년 7월 31일 독일의 최후통첩은 프랑스에게 굴욕적인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독립 국가로서의 실질적인 종말을 맞이하거나, 독일과 전쟁을 하는 것 두 가지 선택지를 남겼다.[17] 대다수 프랑스 국민에게 쇤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굴욕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18] 독일이 최후통첩 거부 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자, 푸앵카레는 국회에 출석하여 프랑스가 이제 전쟁 중임을 선포하고, "아무것도 신성한 연합을 깨뜨릴 수 없다"는 ''성스러운 연합''이라는 교리를 형성했다.[19]

푸앵카레는 1917년 조르주 클레망소가 총리로 취임한 후 점점 좌측으로 밀려났다. 그는 휴전이 너무 일찍 이루어졌고 프랑스군이 독일 깊숙이 진입했어야 했다고 믿었다.[20]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협상하는 동안 그는 프랑스가 라인란트를 독일로부터 빼앗아 연합군의 군사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1][22]

페르디낭 포슈는 푸앵카레에게 헌법에 명시된 권한을 발동하여 클레망소가 프랑스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로 조약 협상을 인수할 것을 촉구했다.[23]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프랑스 내각이 클레망소가 얻은 조건을 승인했을 때, 푸앵카레는 사임을 고려했지만, 다시 한번 자제했다.[24]

3. 4. 대통령 퇴임 이후

뮤즈주 발루르뒤크 출신으로, 리세 루이 르 그랑을 거쳐 파리대학교 법학부에서 수학했다. 변호사를 거쳐 1887년부터 1903년까지 하원의원을, 1903년부터는 상원의원을 지냈다. 1909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12년 처음으로 총리가 되었고, 영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연방)과의 군사적 제휴를 추진했다. 1913년 대통령에 취임하여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신성 동맹" 체제를 수립, 프랑스를 승전국으로 이끌었다.

1922년 다시 총리가 되어 재무장관을 겸임하며 재정 위기 수습에 힘썼고, 프랑 가격 안정책으로 독립 상각 금고를 설립했다. 독일 배상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독일에 대한 강경 정책을 펼쳤으나, 1924년 프랑스 총선에서 패배하여 독일과의 화해 정책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9년 정계를 은퇴하고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1934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3. 4. 1. 총리 재임 (1922-1924)

1920년 푸앵카레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고, 2년 후 그는 총리로서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다시 한번 강력한 반독 정책으로 주목받았다.[25]

1922년 독일의 배상금 지불 거부에 좌절한 푸앵카레는 군사 행동에는 반대하면서도 독일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경제 제재를 희망했다. 같은 해 4월, 푸앵카레는 라팔로 조약에 크게 놀랐는데, 이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수립된 국제 질서에 대한 독일-소련의 도전의 시작이었다. 그는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가 프랑스의 견해를 공유하지 않고, 오히려 라팔로 조약을 소비에트 러시아를 국제 시스템에 편입시킬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을 우려했다.[26] 1922년 5월까지 푸앵카레는 라팔로 조약이 영국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베르사유 체제를 약화시키려는 독일의 의도를 영국이 깨닫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프랑스는 혼자 행동해야만 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27] 푸앵카레의 우려를 더욱 증폭시킨 것은 1922년 4월부터 시작된 전 세계적인 선전 캠페인으로, 프랑스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퍼뜨려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배상금 청구권을 약화시키려는 것이었다.[28]

푸앵카레, 폴 팽르베(Paul Painlevé),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 (1925)


1920년대 독일-소련의 선전에서는 1914년 7월 위기를 "푸앵카레의 전쟁"(Poincaré-la-guerre)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푸앵카레가 1912년 니콜라스 2세 황제와 독일 분할 계획을 비밀리에 논의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주장이었다. 프랑스 공산당 신문인 ''L'Humanité''는 1914년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두 사람으로 푸앵카레와 니콜라스 2세를 지목하는 1면 기사를 실었다. "푸앵카레의 전쟁" 선전은 1920년대 매우 효과적이었다.

1922년 봄과 여름 내내 영국은 푸앵카레의 영국과의 동맹 제안을 계속 거부했다.[27][29] 푸앵카레의 독일 배상금 문제에 대한 영국과의 타협 시도는 1922년에 실패했다.[30] 같은 해 12월까지 푸앵카레는 영국, 미국, 독일의 적대감에 직면했고, 프랑스 강철 생산을 위한 석탄과 황폐화된 산업 지역의 재건을 위한 자금이 고갈되는 것을 목격했다.[31]

푸앵카레는 1923년 1월 11일 스스로 배상금을 징수하기 위해 루르 지방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역사가 샐리 마크스(Sally Marks)에 따르면, 이는 "수익성이 있었고, 1922년에 시작되어 루르 점령에 대한 독일의 반응으로 인해 급증한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이나 프랑스의 재정 관행과 배상금 감소로 인한 1924년 프랑화 붕괴를 야기하지 않았다."[32] 루르-라인란트 점령 비용을 제외한 수익은 거의 에 달했다.[33] 루르 위기 동안 푸앵카레는 소련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34][35] 푸앵카레는 프랑화 붕괴와 그에 따른 과세 때문에 외교적 고립보다는 "1924년 프랑스 총선에서 패배했다."[36]

''타임'' 표지, 1924년 3월 24일


하인즈 H. 홀(Hines H. Hall)은 푸앵카레가 보복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영국과의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불 협상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가 1923년 루르 계곡 점령을 명령했을 때 그의 목표는 온건했다. 그는 라인란트 분리주의를 부활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의 주요 목표는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독일의 준수를 얻는 것이었다. 푸앵카레의 비타협적인 방법과 권위적인 성격은 그의 외교의 실패로 이어졌다.[37]

3. 4. 2. 총리 재임 (1926-1929)

1926년 금융 위기로 푸앵카레는 다시 권력을 잡았고, 1929년 은퇴할 때까지 총리 겸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총리로서 그는 프랑스 안정화 정책을 여러 차례 시행했는데, 이는 소급 적용되어 푸앵카레 안정화 법으로 알려져 있다.[38][39] 금본위제로 복귀 이후 그의 총리로서의 인기는 상당히 높아져, 그의 당은 1928년 4월 총선에서 승리했다.[40]

4. 은퇴와 죽음

Raymond Poincaré프랑스어는 건강 악화로 1929년 7월 총리직에서 사퇴했으며, 다시 총리직을 맡는 것을 거부했다.[40] 1934년 10월 15일 파리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평가

레몽 푸앵카레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재정적 압박 해소를 위한 재계의 로비와 대독 복수 여론에 힘입어 영국, 러시아 제국(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연방)과의 군사적 제휴를 추진했다.[1]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신성 동맹"이라 불리는 전국 일치 체제를 구축하여 프랑스를 승전국으로 이끌었다.[1] 총리 겸 재무장관으로서 재정 위기 수습에 힘썼으며, 프랑 가격 안정책으로 독립 상각 금고를 설립했다.[1] 그러나 독일 배상 문제에 있어서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여 국제적인 긴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5. 1. 부정적 평가

레몽 푸앵카레는 총리 및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독일과의 관계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여 여러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게 가혹한 배상 책임을 부과하고 루르 점령을 하는 등의 정책은 국제적인 긴장을 고조시키고, 훗날 나치의 부상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1]

  • 대독 강경 정책: 푸앵카레는 독일 배상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독일에 전쟁 책임 전부를 지우는 엄벌주의를 고수했다.[1] 1924년 다우에스 계획 채택 때에도 끝까지 반대했지만, 영국, 이탈리아, 미국의 압력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했다.[1]
  • 루르 점령: 1922년, 푸앵카레는 독일의 배상금 지불 불이행을 이유로 프랑스군을 동원해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이는 국제적인 고립을 초래하고, 프랑스 국내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
  • 국제적 고립 및 국내 정치 실패: 루르 점령과 강경한 대독 정책은 국제적인 고립을 초래했고, 1924년 총선에서 푸앵카레가 속한 민주 동맹의 패배로 이어졌다.[1]
  •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 제공: 푸앵카레의 가혹한 대독 정책은 독일 국민들의 반감을 샀고, 이는 나치의 부상과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

참조

[1] 서적 Raymond Poincaré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APS Member History https://search.amphi[...] 2023-10-04
[3] 웹사이트 Raymond Poincare https://www.amacad.o[...] 2023-02-09
[4] 간행물 Raymond Poincaré, le président de la Grande Guerre 2017-01-01 # 추정 날짜, 월-년 형식으로만 제공됨
[5] 문서 A letter which Verne later sent to his brother Paul seems to suggest that, though acquitted due to Poincaré's spirited defence, Verne did intend to defame Turpin.
[6] 논문 Review of ''Raymond Poincaré'' by J. F. V. Keiger 1999-04-01 # 추정 날짜, 년-월 형식으로만 제공됨
[7] 논문 Pomp, Circumstance, and Realpolitik: The Evolution of the Triple Entente of Russia, Great Britain, and France 1999-01-01 # 추정 날짜, 년-월 형식으로만 제공됨
[8] 논문 Pomp, Circumstance, and Realpolitik: The Evolution of the Triple Entente of Russia, Great Britain, and France 1999-01-01 # 추정 날짜, 년-월 형식으로만 제공됨
[9] 논문 Pomp, Circumstance, and Realpolitik: The Evolution of the Triple Entente of Russia, Great Britain, and France 1999-01-01 # 추정 날짜, 년-월 형식으로만 제공됨
[10] 논문 Pomp, Circumstance, and Realpolitik: The Evolution of the Triple Entente of Russia, Great Britain, and France 1999-01-01 # 추정 날짜, 년-월 형식으로만 제공됨
[11] 논문 Pomp, Circumstance, and Realpolitik: The Evolution of the Triple Entente of Russia, Great Britain, and France 1999-01-01 # 추정 날짜, 년-월 형식으로만 제공됨
[12] 논문 Pomp, Circumstance, and Realpolitik: The Evolution of the Triple Entente of Russia, Great Britain, and France 1999-01-01 # 추정 날짜, 년-월 형식으로만 제공됨
[13] 서적 France and the Great War, 1914-191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4] 서적 Decisions for War, 1914-1917 Cambridge University Press
[15] 웹사이트 Tout savoir sur Pronote Poincaré http://centenaire.or[...] 2022-05-14
[16] 간행물 Raymond Poincaré, le président de la Grande Guerre 2017-01-01 # 추정 날짜, 월-년 형식으로만 제공됨
[17] 서적 France and the Great War, 1914–191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8] 서적 France and the Great War, 1914-191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 서적 France and the Great War, 1914-1918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 서적 Peacemakers. The Paris Conference of 1919 and Its Attempt to End War John Murray
[21] 서적
[22] 서적 It's Happening Again John Gifford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The Carthaginian Peace, or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Mr. Keynes Oxford University Press
[26] 서적 Raymond Poincaré Cambridge University Press
[27] 서적 Raymond Poincaré Cambridge University Press
[28] 서적 Raymond Poincaré Cambridge University Press
[29] 서적 The Foreign Office and Foreign Policy, 1919-1926 https://books.google[...] Sussex Academic Press
[30] 서적 Raymond Poincaré Cambridge University Press
[31] 서적 World in Trance Hamish Hamilton
[32] 서적 1918 and After. The Postwar Era Routledge
[33] 서적
[34] 논문 Episodes from the Early Cold War: Franco-Soviet Relations, 1917-1927 2000-11-01 # 추정 날짜, 년-월 형식으로만 제공됨
[35] 논문 Episodes from the Early Cold War: Franco-Soviet Relations, 1917-1927 2000-11-01 # 추정 날짜, 년-월 형식으로만 제공됨
[36] 서적 Marks
[37] 논문 Poincare and Interwar Foreign Policy: 'L'Oublie de la Diplomatie' in Anglo-French Relations, 1922-1924 1982
[38] 논문 The Bank of France and the Gold Dependency: Observations on the Bank's Weekly Balance Sheets and Reserves, 1898-1940 http://sites.krieger[...] 2018
[39] 논문 A Monetary Interpretation of the Poincaré Stabilization of 1926 1989
[40] 웹사이트 Raymond Poincaré https://www.history.[...] 201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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