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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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시용은 현재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역사적 지역으로, 페르피냥 인근의 루스키노 요새에서 유래되었다. 로마 제국, 서고트족, 사라센의 지배를 거쳐 카롤루스 왕조에 편입되었고, 이후 히스파니아 변경주로 설정되었다. 9세기 말 루시용 백작령이 성립되었으며, 12세기 초 바르셀로나 백작령에 귀속되었다. 1258년 코르베유 조약으로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루시용에 대한 통치권을 포기했고, 이후 마요르카 왕국에 속했다가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분쟁 끝에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루시용 프로뱅스는 폐지되고 피레네조리앙탈 데파르트망으로 변경되었으며, 카탈루냐 문화를 유지했으나 산업화로 프랑스화가 진행되었다. 현재는 옥시타니 레지옹의 일부이며, 카탈루냐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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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용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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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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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프랑스 |
면적 | 3600km² |
최대 도시 | 페르피냥 |
일반 정보 | |
이름 | 루시용 |
깃발 이미지 | Flag of Catalonia.svg |
문장 이미지 | Arms of Roussillon.svg |
행정 구역 | |
국가 | 프랑스 |
데파르트망 | 피레네-오리앙탈 |
주요 도시 | 페르피냥 |
역사 | |
인구 통계 | |
인구 | 450,000명 |
추가 정보 | |
시간대 | CET (UTC+1) |
여름 시간대 | CEST (UTC+2) |
2. 역사
프랑스와 스페인 왕실의 세력이 커지면서, 두 나라의 국경을 이루던 루시용 지역은 잦은 군사 분쟁 지역이 되었다. 1258년 코르베유 조약으로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루시용에 대한 통치권과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였다.
아라곤 왕국의 하이메 1세는 무어인들에게서 발레아레스 제도를 차지했고, 이 섬들을 루시용과 함께 페르피냥을 수도로 한 마요르카 왕국에 편입시켰다. 1276년 하이메 1세는 이 왕국을 하이메 2세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하이메 2세는 형제인 페로 3세와의 분쟁을 겪었고, 시칠리아 왕위를 두고 페로 3세와 갈등하던 프랑스의 필리프 3세는 이를 이용했다. 필리프 3세는 하이메 2세를 지지하며 군대를 일으켜 아라곤으로 진격했지만, 패배하여 1285년 페르피냥에서 사망했다. 하이메는 형제 페로와 화해했고, 1311년에 페르피냥 대성당을 지은 아들 산초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1324년 산초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후임자 하이메 3세는 몽펠리에 영주권을 필리프 6세에게 넘기는 것을 거부했고, 페로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오히려 페로 4세는 전쟁을 선포하여 1344년에 마요르카와 루시용을 점령했다.
이 지역은 아라곤 연합 왕국에 다시 합쳐져 1462년까지 평화를 누렸다. 후안 2세와 그의 아들 카를로스가 나바라 왕위를 두고 분쟁을 벌이자, 루이 11세가 후안 2세를 지원했다. 루시용은 루이 11세에게 300,000 크라운의 보증금으로 제공되었고, 1493년 샤를 8세가 가톨릭 군주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와의 합의를 위해 포기할 때까지 프랑스군이 차지했다.
이후 프랑스와 트라스타마라 가문 간의 전쟁 동안 루시용 주민들은 양측으로부터 고통을 받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516년에 카스티야와 아라곤 연합 왕국을 차지했고, 두 왕국은 처음으로 카를 5세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트라스타마라 통치 기간 카스티야인들로 인한 반감은 카를로스 1세의 영광 속에서 사라졌다. 1542년 페르피냥이 앙리 2세에 의해 포위당했을 때, 주민들은 카를 5세에게 충성했고, 페르피냥은 "페델리시마" (Fedelissimala, 가장 충성스러운 도시)라는 칭호를 얻었다.
1640년 카탈루냐인들이 스페인 왕실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루이 13세가 카탈루냐를 지원하며 분쟁에 개입했다.[3] 이 반란은 1652년에 펠리페 4세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30년 전쟁을 종결짓는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도 스페인과 프랑스 간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양국은 1659년에 피레네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지었고, 루시용과 세르다냐의 일부가 프랑스에 양도되어[4] 루시용 프로뱅스가 설치되었다.
루이 14세는 새롭게 편입된 영토의 정치적 충성을 확보하고 문화적 정체성을 바꾸기 위해 50년간 노력했다. 그는 정치적 충성 확보에는 성공했지만, 문화적 정체성 변화에는 실패했다. 페르피냥 밖의 루시용은 19세기 산업화를 통해 프랑스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카탈루냐 정체성을 유지했다.
프랑스 혁명 기간 앙시앵 레짐 체제의 루시용 프로뱅스는 폐지되고, 피레네조리앙탈 데파르트망이 신설되었다.[3] 이 데파르트망은 옛 루시용 행정 구역과 거의 일치하나, 페누예드 코마르카가 추가되었다.[4] 피레네조리앙탈이라는 명칭은 프랑스 내 공식 명칭이다. 루시용이라는 옛 명칭은 랑그도크루시용 레지옹에 남아 있다.
2. 1. 고대와 중세 초기
루시용이라는 지명은 현재의 페르피냥 인근에 있었던 소규모 요새 루스키노(Ruscino, Rosceliona, Castel Rossello)에서 유래했으며, 그곳은 갈리아 족장들이 한니발의 회의 요청으로 만났던 장소였다.[3] 이 지역은 기원전 121년부터 서기 462년까지 로마의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의 일부였으며, 이후 셉티마니아의 일부로서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쿠스 2세에게 양도되었다.[3] 그의 후계자인 아말라릭은 531년에 클로비스에게 패하여 히스파니아로 밀려났다.[3]719년, 사라센들이 피레네산맥을 넘어 셉티마니아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유지했다. 759년에 단신왕 피핀이 나르본 정복을 마친 후 루시용을 점령했고, 760년에 카롤루스 왕조가 차지했다.[3] 778년 히스파니아 침략 때, 샤를마뉴는 히스파니아 변경주를 완충 지대로 세웠고, 이곳의 거주민들은 산맥 등지에 정착했다.[3] 그는 무어인들이 지배하는 히스파니아에서 온 서고트족 난민들에게 이곳의 영토 일부를 부여해주었고 몇몇 수도원들을 세웠다.[3] 792년 사라센들은 다시 프랑스를 침입했지만, 카탈루냐로 영향력을 확장한 아키텐 왕국의 왕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의 섭정이던 툴루즈의 백작 기욤이 이들을 격퇴시켰다.[3]
2. 2. 루시용 백작령과 아라곤 연합 왕국
9세기 말, 수녜르 2세가 루시용의 첫 세습 백작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시간이 흘러 속주가 된 곳의 동쪽 부분에서만 확장되었다. 세르다냐(프랑스어:세르다뉴) 등의 서부 지역은 900년 초대 백작인 미로가 통치했고, 그의 손자 중 하나인 베르나트(Bernat)는 중부 지역 또는 베잘루의 첫 세습 백작이 되었다. 루시용 백작들은 수 세기간 분쟁을 겪던 주변의 대 귀족들에게 맞서 친척이던 엠푸리에스 백작들과 동맹을 맺었다. 루시용 백작 지라르 1세는 툴루즈의 레몽 4세를 따라 제1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고, 1099년에 십자군이 들이닥쳤을 때 예루살렘에 발을 들여 놓은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12세기 초 바르셀로나 백작들의 위신이 커져가기 시작하면서, 루시용 백작들은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 외에는 선택이 없었다.1111년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는 베잘루를 상속받아, 1117년 세르다냐에 합쳤다. 루시용의 마지막 백작인 지라르 2세는 그의 배다른 형제들의 도전을 받았다. 그의 형제들이 자신의 영토를 상속받지 못하기 위해, 지라르 2세는 유언으로 그의 영토를 아라곤의 왕 알폰소 2세에게 남겼고, 알폰소 2세는 1172년에 루시용을 차지하였다. 아라곤의 지배하에서 경제적, 인구적 성장이 지속되었고, 페르피냥의 항구 중 하나인 콜리우르(카탈루냐어:코틀리우레/Cotlliure)는 지중해 무역의 핵심 장소가 되었다.
2. 3. 마요르카 왕국과 프랑스의 개입
아라곤 왕국의 하이메 1세는 이슬람교도로부터 발레아레스 제도를 되찾아 이 섬들을 루시용과 합쳐 마요르카 왕국을 세우고 페르피냥을 수도로 정했다.[3] 1276년, 하이메 1세는 이 왕국을 자신의 아들인 자우메 2세에게 물려주었다.[3] 이후 자우메 2세는 형인 페드로 3세와 왕국 분할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이 내분은 시칠리아 왕위를 두고 페드로 3세와 다투던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에게 이용되었다.[3]필리프 3세는 자우메 2세를 지원하며 아라곤으로 군대를 보냈으나, 역병 등으로 인해 퇴각해야 했고 1285년 페르피냥에서 사망했다.[3] 자우메 2세는 싸움을 계속할 자금이 부족해지자 형인 페드로 3세와 화해했고, 1311년 그의 아들 산스 1세에게 마요르카 왕국을 물려주었다.[3] 산스 1세는 죽기 직전 페르피냥 대성당을 건설했다.[3] 1324년, 산스 1세의 아들 자우메 3세가 왕위에 올랐다.[3] 그는 몽펠리에 영주이기도 하여 필리프 6세에게 신종 서약을 했지만 거절당했고,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4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3] 그러나 페드로 4세는 이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1344년에 마요르카와 루시용을 점령했다.[3]
이후 루시용은 다시 아라곤 왕국에 통합되어 1462년까지 평화를 누렸다.[3] 1462년, 후안 2세와 그의 아들 카를로스가 나바라 왕국 왕위를 두고 다투면서 (나바라 내전) 프랑스 왕 루이 11세가 후안 2세를 지원했다.[3] 후안 2세는 루이 11세에게 30만 크라운의 자금을 빌리는 대가로 루시용을 담보로 제공했고, 프랑스군은 1493년까지 루시용을 점령했다.[3]
2. 4. 프랑스-스페인 분쟁과 프랑스령 편입
15세기 후반, 아라곤 왕국과 프랑스 왕국 간의 분쟁이 격화되면서 루시용 지역은 전쟁터가 되었다. 16세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면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통합되었지만, 카탈루냐인들은 이에 반감을 가졌다.1542년, 페르피냥 포위전에서 주민들은 스페인 왕 카를 5세에게 충성하여 "가장 충성스러운 도시"(Fedelissimala)라는 칭호를 얻었다.[3]
1640년 카탈루냐 반란(수확자 전쟁)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카탈루냐를 지원하며 개입했다.[3]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루시용은 프랑스에 양도되었고,[4] 루시용 프로뱅스가 설치되었다.
2. 5.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혁명 기간 앙시앵 레짐 체제의 루시용 프로뱅스는 폐지되고, 피레네조리앙탈 데파르트망이 신설되었다.[3] 이 데파르트망은 옛 루시용 행정 구역과 거의 일치하나, 페누예드 코마르카가 추가되었다.[4] 피레네조리앙탈이라는 명칭은 프랑스 내 공식 명칭이다. 루시용이라는 옛 명칭은 랑그도크루시용 레지옹에 남아 있다.3. 문화
(빈 문서)
4. 정치
현재 루시용은 프랑스 피레네조리앙탈 데파르망의 일부로서, 프랑스의 행정 구역 체계에 속한다. 프랑스 혁명 기간 앙시앵 레짐 체제의 루시용 프로뱅스는 사라지고 신설된 피레네조리앙탈 데파르망이 대신하였다. 피레네조리앙탈이라는 명칭은 프랑스 내 공칭명이다. 루시용이라는 옛 명칭은 랑그도크루시용의 레지옹에 남아 있다.[4]
과거 루시용은 루시용 백작령, 마요르카 왕국 등 독립적인 정치 체제를 갖추었던 역사가 있다. 760년 카롤루스 왕조가 차지했고, 778년 히스파니아 침략 때 샤를마뉴는 완충 지대로서 히스파니아 변경주를 세웠다. 893년 수녜르 2세는 루시용의 첫 세습 백작이 되었다. 1172년에는 아라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코르베유 조약으로 프랑스의 왕 루이 9세는 루시용에 대한 통치권과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였다. 아라곤 연합왕국의 하이메 1세는 무어인들에게서 발레아레스 제도를 차지했고 이 섬들을 루시용과 함께 페르피냥을 수도로 한 새롭게 세운 마요르카 왕국에 편입시켰다. 1344년에 마요르카와 루시용은 다시 아라곤 연합 왕국에 합쳐졌다.
1462년에는 나바라 왕위를 두고 분쟁이 일어나 루이 11세가 지원을 하면서 프랑스군이 차지하기도 했지만, 1493년에 가톨릭 군주들과의 합의를 위해 포기하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5세 통치 시기에는 프랑스의 도팽 앙리 2세에 맞서 충성을 하기도 했다. 1640년 카탈루냐인들이 스페인 왕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루이 13세가 카탈루냐의 편을 들며 분쟁에 끼어들었다.[3] 1659년에 피레네 조약을 체결하면서 루시용과 세르다냐의 일부가 프랑스에 양도되었고,[4] 루시용 프로뱅스가 생겨났다.
참조
[1]
사전
Roussillon
https://web.archive.[...]
Oxford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Roussillon
2019-06-23
[3]
서적
스페인 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3-05-14
[4]
서적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을류문화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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