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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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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는 기원전 108년 로마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군사적 재능을 보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몰락한 가문의 인물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집정관에 도전했으나 실패했고, 기원전 63년에는 무장 봉기를 일으켜 공화정을 전복하려다 실패하여 사망했다. 카틸리나는 로마 문학에서 악당의 대명사로 묘사되었으나, 현대에는 그의 개혁 시도를 재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하며, 문학 작품과 대중문화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재해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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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
라틴어 표기Lucius Sergius Catilina
출생기원전 108년경
사망기원전 62년 1월 초
사망 장소피스토이아 근처, 에트루리아
국적로마
아버지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실루스
어머니벨리에나
직업군인 및 정치가
알려진 이유카틸리나 역모
경력
군 경력레가투스 (기원전 82년)
정치 경력프라이토르 (아프리카 속주) (기원전 68년)
프로프라이토르 (기원전 67년-66년)
전쟁
지휘피스토리아 전투 (기원전 62년)
기타 정보
씨족세르기우스 씨족
신분노빌레스

2. 생애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는 귀족 출신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지녔지만, 성품ingeniumla은 비뚤어져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고, 거짓과 은폐에 능했다. 또한 탐욕스러운 욕망에 불타올랐으며, 화려한 언변을 구사했지만 분별력은 부족했다.[1]

2. 1. 가문 배경 및 초기 생애

카틸리나는 기원전 108년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1] 선대에 집정관을 지낸 집안이었으나 그의 시대에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쇠퇴해가는 가문이었다. 카틸리나(Lucius Sergius Catilina)는 아이네이아스의 트로이 동료인 세르게스투스(Sergestus)를 조상으로 주장하는 세르기우스 가문 출신이었다.

카틸리나는 젊은 시절부터 군사적 재능을 보였다. 동맹시 전쟁(기원전 91년-87년) 당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휘하에서 복무했는데, 폼페이우스와 키케로도 함께 참전했다.[3] 술라의 내전 동안 카틸리나는 기원전 82년 술라파에 가담하여 부관으로 복무했다.[3] 고대 자료에 따르면, 그는 술라의 숙청 과정에서 그의 형제와 두 명의 매제(아내의 형제 한 명과 여동생의 남편 한 명)를 죽여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키케로는 그가 마르쿠스 마리우스 그라티디아누스에게 복수하는 것을 도왔다고 비난했다. 카틸리나는 그라티디아누스의 목을 베어 야니쿨룸에서 아폴로 신전에 있는 술라에게 그의 머리를 들고 도시를 가로질러 갔다고 한다.[4] 어찌 되었든 카틸리나는 술라의 숙청에서 이익을 얻었고, 아마도 실제 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토지를 매입했을 것이며, 술라의 독재가 끝날 무렵 부유한 자가 되었다.

2. 2. 초기 경력

카틸리나는 기원전 108년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선대에 집정관을 지낸 집안이었으나 그의 시대에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쇠퇴해가는 가문이었다. 카틸리나는 군사적 재능을 보여 동맹시 전쟁 당시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밑에서 키케로, 폼페이우스와 함께 참전했다.[3]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시절에 별다른 역할을 하진 않았지만 정치적으로 실각하진 않았고 술라 내전 시기에는 술라의 편에 섰다. 기원전 73년 로마 신전의 여사제와 간통 혐의를 받았으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도움으로 무죄가 되었다.[4]

기원전 68년 법무관이 되었고[5] 그 다음 2년간은 아프리카 속주의 총독으로 있었다. 로마로 돌아와서 기원전 65년 겨울 집정관 직에 출마하려 했으나 속주민 대표단이 그를 권력 남용으로 원로원에 기소하여 재판에 회부되는 바람에 입후보 자격을 상실했다.

2. 3. 집정관 도전과 좌절

기원전 68년 법무관을 지낸 카틸리나는 이후 2년 동안 아프리카 속주의 총독으로 있었다.[5] 기원전 65년 로마로 돌아와 집정관에 출마하려 했으나, 속주민 대표단이 그를 권력 남용 혐의로 원로원에 기소하여 재판에 회부되는 바람에 입후보 자격을 상실했다.[8][27] 수많은 유력자들의 지원으로 무죄가 선고되었으나,[13] 집정관직은 놓치고 말았다.

기원전 64년 집정관 선거에 다시 도전했지만, 키케로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에게 패배했다. 당시 카틸리나는 부채의 전액 탕감을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원로원은 그의 급진적인 공약을 두려워하여 방해했다.

카틸리나(오른쪽 아래 인물)를 비난하는 키케로


기원전 63년 선거전에 사용된 선전용 컵. 왼쪽은 소 카토호민관 선거용. 오른쪽은 카틸리나를 추천하는 것. 로마 국립 박물관 소장

3. 카틸리나 모반

기원전 64년, 카틸리나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키케로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에게 패배했다. 카이사르크라수스의 자금 지원을 받았음에도, 뇌물 살포와 키케로의 공격적인 연설로 인해 실패했다.[32] 같은 해 카틸리나는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33]

기원전 63년, 카틸리나는 다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여 채무 탕감을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또다시 낙선했다. 이에 그는 반란을 계획하고, 에트루리아에서 만리우스가 모병을 시작했다. 10월 27일 봉기를 일으킬 예정이었으나,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 결의를 통해 키케로에게 치안 유지를 명령했다.

11월 8일, 키케로는 카틸리나를 탄핵하는 연설을 했고, 카틸리나는 로마를 떠나 만리우스와 합류했다. 원로원은 그들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집정관 히브리다에게 토벌을 명령했다.

12월 3일, 로마 시내에 있던 카틸리나의 공모자들은 키케로에게 체포되었고, 12월 5일 원로원에서 처형되었다.

3. 1. 모반의 배경

기원전 63년, 카틸리나는 다시 집정관 선거에 도전했지만, 부채 전액 탕감을 공약으로 내세웠음에도 3위에 그쳤다.[36] 당선된 집정관 중 한 명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당하면서 카틸리나가 집정관이 될 가능성이 생겼으나, 원로원은 키케로를 내세워 무레나를 변호했고,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아 카틸리나는 또다시 좌절했다.[36]

이러한 거듭된 좌절에 카틸리나는 부채 탕감을 원하는 지지자들을 모아 기원전 63년 10월 28일을 기해 무장 봉기를 일으켜 공화정을 전복할 계획을 세웠다.[36] 카틸리나에게는 방탕한 생활로 원로원에서 쫓겨난 기원전 71년의 집정관 출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전직 법무관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원로원에 불만이 많았던 귀족들과 빚이 많은 자들이 모여들었다.[36]

당시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정보망을 통해 이 음모를 알고 있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카틸리나는 거사를 앞둔 사람답지 않게 태연했기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36] 크라수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음모의 공모자라는 혐의를 받았으나, 카이사르는 당시 카토에게 혐의를 벗어나는 일화는 유명하다.[36] 10월 21일, 키케로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확신하고 원로원에서 '''원로원 최종 권고'''를 얻어냈지만, 카틸리나는 계속해서 증거를 대라고 주장했다.[36]

카틸리나의 채무(실제로 채무가 있었는지 여부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다)[36]는 그의 음모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었다. "상처 입은 자존심과 맹렬한 야망"이 그의 결정에 큰 역할을 했다.[36] 음모에 가담한 상원의원들 중 상당수는 부도덕, 부패로 상원에서 축출되었거나, 경력이 정체된(특히 집정관직에 도달하려는 시도에서) 사람들이었다.[36] 가이우스 만리우스의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은 대부분 술라의 몰수로 재산을 잃은 가난한 농민들과 더 많은 부를 추구하는 파산한 술라의 재향군인들이었다.[36] 키케로는 그의 비난 연설에서 파산한 술라의 재향군인들에게 초점을 맞췄지만, 결국 카틸리나는 "갈 곳이 없는" 몰락한 에트루리아인들의 지지 만을 유지했을 것이다.[36] 전반적으로 이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에게 "단일한 목적을 쉽게 적용할 수는 없다".[36]

3. 2. 모반의 과정

키케로는 정보망을 통해 카틸리나의 음모를 알고 있었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카틸리나는 거사를 앞둔 사람답지 않게 태연한 태도를 보여 원로원 의원들은 반신반의했다.[36]

원로원에서는 연일 음모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고 크라수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음모의 공모자라는 혐의를 받았다. 기원전 63년 10월 21일, 키케로는 원로원에서 '''원로원 최종 권고'''를 얻어냈지만, 카틸리나는 계속해서 증거를 대라고 주장했다.

11월 8일 원로원 회의에서 키케로는 '''카틸리나 탄핵'''을 발표했고 카틸리나는 로마를 떠났다. 그러나 결정적인 물적 증거는 여전히 없었다. 키케로는 증거 확보를 위해 반란에 가담한 갈리아인들을 부추겨 음모 가담자의 서명을 받아오게 하여 증거를 확보했고, 카틸리나를 비롯한 로마에 남아있던 음모자 5명을 체포했다. 12월 5일 원로원 회의에서 체포된 음모자 5명의 처형 문제가 논의되었다. 쟁점은 '''"원로원 최종 권고"'''가 있더라도 과연 재판권과 항소권도 없이 로마 시민을 처형할 수 있는가였다. 카이사르는 재판 없는 처형을 반대했으나, 카토와 키케로의 열변으로 결국 처형이 결정되었다.

3. 3. 카틸리나의 죽음

기원전 62년 1월, 카틸리나는 3,000명의 동지들과 함께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도망치려다 정규군에 포위되었다. 카틸리나 본인을 포함한 3,000명 전원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34]

알시드 세고니(Alcide Segoni)의 ''카틸리나의 시체 발견''(1871). 피티 궁전(Palazzo Pitti)의 현대 미술관(Gallery of Modern Art), 피렌체(Florence) 소장.


기원전 62년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Lucius Scribonius Libo)가 주조한 데나리우스. 앞면의 보누스 에벤투스(Bonus Eventus) 묘사는 카틸리나 반란군의 붕괴를 기념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2년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Lucius Aemilius Paullus (consul 50 BC))가 주조한 데나리우스. 화합의 여신 콘코르디아(Concordia (goddess))를 묘사하고 있다.


11월 말,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남쪽에서 접근해 오면서 카틸리나는 전투를 피했다. 로마에 있던 카틸리나의 공모자들은 키케로에 의해 발각되어 12월 5일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 이 소식이 카틸리나의 진영에 도착하자, 그의 군대 상당수가 흩어져 3천 명이 조금 넘는 병력만 남게 되었다.

카틸리나는 갈리아로 도망치기를 바랐지만, 키살피나 갈리아(Cisalpine Gaul)의 속주 총독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Quintus Caecilius Metellus Celer)가 볼로냐(Bononia) 근처 아펜니노 산맥의 고개를 점령하면서 이탈리아 탈출이 막혔다.

결국 카틸리나는 안토니우스와 대면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고, 그들은 피스토리아(Pistoria), 오늘날의 피스토이아(Pistoia)에서 만났다. 그는 고지에서 내려와 기원전 62년 1월 3일경 안토니우스의 군대에 전투를 걸었다.

전투 당일, 안토니우스는 경험이 풍부한 부관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Marcus Petreius)에게 작전 지휘권을 맡겼다. 페트레이우스는 근위대 코호트를 이끌고 카틸리나의 중앙을 돌파하여 카틸리나의 병사들을 궤멸시켰다. 카틸리나와 그의 충실한 지지자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섬멸당했다. 살루스트는 카틸리나와 그의 부하들이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고 기록했다.

카틸리나는 최대 2만 명의 병력을 모으는 데 성공했으나, 로마에서의 처형 소식이 전해지자 그 수는 줄어들었다. 기원전 62년 1월, 피스토이아(Pistoria)에서 갈리아 지방으로 향하려 했으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케렐(Quintus Caecilius Metellus Celer)이 방해했기에 카틸리나는 뒤에서 압박하는 전 집정관(프로콘술)인 휘브리다(Hybrida)를 맞서 싸웠다. 병사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는 최전선에서 맹렬히 싸웠으며,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자 적진에 돌입하여 전사했다. 그와 함께 싸운 3000명의 병사들도 한 명도 도망치지 않고 전사했다.

4. 유산 및 평가

키케로는 네 차례에 걸친 '카틸리나 탄핵'을 책으로 펴냈고, 이 책은 라틴어 교본으로 쓰일 정도로 명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로마 문학에서 카틸리나는 "악당"의 대명사로 자주 사용되었다.[18] 그러나 현대에는 카틸리나를 재평가하려는 시도도 있다.

살루스티우스는 카틸리나를 부패한 시대의 산물이자 처음부터 국가 파괴에 혈안이 된 악당으로 묘사했다.[18] 리비우스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로마 초기 역사의 불확실한 부분을 채우는 데 사용했고,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에서 카틸리나가 지하 세계에서 퓨리스에게 고문받는 모습을 묘사했다.[20] 제정 시대에는 인기 없는 황제를 비난하는 별명으로 카틸리나의 이름이 사용되기도 했다.[18]

그러나 토스카나에서는 중세 시대에 카틸리나가 전투에서 살아남아 지역 영웅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18]

현대에 들어, 1878년 에드워드 스펜서 비즐리는 카틸리나가 "피에 굶주린 눈과 창백한 얼굴을 한 살인, 약탈, 방화의 악마"라는 널리 퍼진 견해에 반박하며 재평가를 시도했다.[18] 비즐리의 옹호는 K. H. 워터스와 로빈 시거와 같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최근까지 이어졌다. 일부 학자들은 카틸리나의 음모를 키케로의 허구로 묘사하며, 카틸리나와 "공모자"들을 키케로 자신의 정치적 발전을 위해 이용했다고 주장한다.[18]

다른 고전학자들은 카틸리나가 카이사르의 전조였거나 상원의 부패와 무능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8] 그러나 대체로 이러한 옹호는 매우 추측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문학적 증거는 압도적으로 키케로의 것이며 카틸리나에게 불리하게 편향되어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18]

대한민국에서는 카틸리나가 급진적인 개혁을 통해 로마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려 했던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다만, 그의 과격한 수단과 방법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카틸리나 사건은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 자주 언급되는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이다. 이는 카틸리나의 개혁 시도가 기득권층의 반발로 좌절된 점을 강조하고, 대한민국 사회의 개혁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 활용된다.

5. 대중문화

벤 존슨(Ben Jonson)은 1611년에 카틸리나를 "사디스트적인 반영웅"으로 묘사한 ''카틸리나의 음모(Catiline His Conspiracy)''를 썼다.[18] 1848년 혁명 이후에 쓰여진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첫 작품 ''카틸리나''는 카틸리나를 부패한 세상과 맞서 싸우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19] 볼테르도 『구원받은 로마, 또는 카틸리나』를 썼는데, 극적인 요소는 줄어들었고, 1748년 초연과 1750년 프리드리히 대왕 앞에서의 재연에서는 키케로를 볼테르 자신이 연기했다.[18]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는 1792년에 잠바티스타 카스티(Giambattista Casti)의 대본을 바탕으로 카틸리나의 음모를 주제로 한 2막짜리 오페라 트라지코미카 ''카틸리나''를 작곡했다.[18]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 기간 중 정치적 함의 때문에 1994년까지 공연되지 않았다. 여기서 진지한 드라마와 정치는 고급 및 저급 코미디와 혼합되었다. 줄거리는 카틸리나와 키케로의 딸 사이의 연애와 역사적 정치 상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스티븐 세일러(Steven Saylor)의 1993년 소설 ''카틸리나의 수수께끼(Catilina's Riddle)''는 기원전 63년 카틸리나와 키케로 사이의 음모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카틸리나는 스티븐 세일러의 단편 소설 "베스타 여사제의 집"에서도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콜린 맥컬로(Colleen McCullough)의 ''로마의 거장들(Masters of Rome)'' 시리즈 중 하나인 소설 ''카이사르의 여인들(Caesar's Women)''에서 카틸리나의 음모와 키케로의 집정관 행위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존 매독스 로버츠(John Maddox Roberts)는 SPQR II: ''카틸리나의 음모''를 집필하였다.

로버트 해리스의 2006년 책 ''임페리움''은 키케로(Cicero)의 편지를 바탕으로 하며, 키케로의 발전하는 경력과 카틸리나와의 상호 작용 증가에 대한 많은 언급을 포함한다. 속편 ''루스트럼''(미국에서는 ''Conspirata''로 출판)은 카틸리나의 음모를 둘러싼 5년을 다룬다. 헨리 윌리엄 허버트(Henry William Herbert)의 ''키케로, 카토, 카틸리나의 시대 또는 로마의 반역자: 공화국의 진실된 이야기''는 원래 1853년에 2권으로 출판되었다. 테일러 콜드웰(Taylor Caldwell)이 1965년에 출판한 ''철의 기둥(A Pillar of Iron)''은 특히 카틸리나와 그의 음모와 관련하여 키케로의 삶을 이야기한다. 폴 앤더슨의 책 ''카틸리나의 노예(A Slave Of Catiline)''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돕고 방해하는 노예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콧 사비츠가 집필한 음모에 관한 소설 ''공화국의 몰락(The Fall of the Republic)''이 2020년 9월에 출판되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미완성 소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업''은 카이사르와 크라수스가 재정적 이익을 위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카틸리나의 음모에 대한 허구적인 이야기를 제공한다. 아담 드라이버(Adam Driver)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2024년 공상과학 서사 영화 메갈로폴리스에서 등장하는 인물인 카이사르 카틸리나를 연기하는데, 이는 상상 속의 현대 미래 미국을 배경으로 한 카틸리나 음모의 허구적인 해석이다. 드라이버는 프랭클린 키케로 시장 역을 맡은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Giancarlo Esposito)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 영화에서 드라이버의 캐릭터는 에스포지토의 캐릭터와 정치적 지배권을 놓고 경쟁하고 싸운다. 영화는 또한 카이사르 카틸리나와 키케로 시장의 딸 줄리아 키케로(나탈리 이마뉴엘(Nathalie Emmanuel) 분) 사이의 연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21]

참조

[1] 웹사이트 Sergius https://romanrepubli[...]
[2] 백과사전 Sergius 39 https://elexikon.ch/[...] Butcher
[3] 서적 https://archive.org/[...]
[4] 서적
[5] 서적
[6] 학술지 Catiline's wife 1987
[7] 서적 Sall. Cat.
[8] 서적 Sall. Cat.
[9] 서적 Dictator: the evolution of the Roman dictatorship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Cic. Att.
[15] 서적 Plut. Cic.
[16] 서적 Sall. Cat.
[17] 서적 Sall. Cat.
[18] 학술지 Notes on the "First Catilinarian Conspiracy" https://www.jstor.or[...] 1969
[19] 서적 Cic. Cael.
[20] 서적 Aen.
[21] 웹사이트 MEGALOPOLIS https://www.festival[...] 2024-05-05
[22] 서적 アスコニウス『キケロ古註』90C
[23] 서적 アスコニウス『キケロ古註』91C
[24] 서적 サッルスティウス『カティリナ戦記』15
[25] 서적 ウァレリウス・マクシムス『有名言行録』9.1.9
[26] 서적 キケロ『カエリウス弁護』10
[27] 서적 アスコニウス『キケロ古註』85C
[28] 서적 サッルスティウス『カティリナ戦記』18-19
[29] 서적 皇帝伝 カエサル
[30] 서적 アスコニウス『キケロ古註』89C
[31] 서적 キケロ『臓卜師の回答について』
[32] 서적 キケロ『義務について』
[33] 서적 カッシウス・ディオ『ローマ史』
[34] 서적 ウァレリウス・マクシムス『有名言行録』
[35] 서적 ウァレリウス・マクシムス『有名言行録』
[36] 문서 카이사르와 카토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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