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디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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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디우스는 기원전 7세기에 활동한 스키타이의 왕으로, 라틴어 Madyes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는 서아시아로 진출하여 메디아를 28년 동안 지배했으며, 킴메르족과 트레리족을 격파하며 스키타이의 세력을 확장했다.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 공주 세루아-에티라트와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시리아 쇠퇴 후 키아크사레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 스키타이인들은 레반트 지역으로 진출했으나, 이후 메디아에 의해 서아시아에서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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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디우스 | |
|---|---|
| 기본 정보 | |
| 직위 | 스키타이의 왕 |
| 통치 기간 | 기원전 658/9년경 - 625년 |
| 아버지 | 바르타투아 |
| 어머니 | 셰루아-에티라트 (?) |
| 사망일 | 기원전 625년 |
| 종교 | 스키타이 종교 고대 메소포타미아 종교 (?) |
| 후임 | 알 수 없음 |
| 출신 민족 | 스키타이인 |
| 모어 | 스키타이어 |
| 다른 언어 | 메디아어 |
| 왕조 | 바르타투아 왕조 |
| 이름 | |
| 영어 | Madius |
| 메디아 통치 | |
| 전임자 | 프라오르테스 |
| 직책 | 메디아의 왕 |
| 임기 | 기원전 653~625 또는 633?~625 |
| 후임자 | 키악사레스 |
2. 명칭
마디우스(Madyes)라는 이름은 라틴어화된 형태이며, 고대 그리스어 Μαδυης|Maduēsgrc에서 유래했다.[1] 이는 고대 이란어파 이름이다.
이란학자들은 처음에 마디우스 이름의 원래 형태가 스키타이어 `*Madava`이며, '꿀'을 의미하는 스키타이어 단어 `*madu-`에서 파생되었다고 보았다.[2]
그러나 이란어의 /d/ 소리는 원시 스키타이어에서 /δ/로, 이후 스키타이어에서는 /l/로 변화하는 음운 규칙이 있다. 이 때문에 원시 이란어 단어 `*madu-`는 스키타이어에서 `*malu-`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학자 미하일 부하린은 `Madyes`가 `*madu-`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그는 그리스 작가들이 페르시아 자료를 통해 이 이름을 접했을 가능성에 주목하며, 그리스어 이름 Μαδυης|Maduēsgrc가 '메디아인'을 의미하는 서이란어군 형태인 `*Mādava-`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3. 역사적 배경

기원전 8세기와 7세기에 유라시아 스텝의 유목민들이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스키타이인들이 서남아시아로 진출했다. 이 이동은 스키타이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또 다른 이란계 유목 민족인 마사게타이 또는 이세도네스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초기 스키타이인들은 아락세스강을 건너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후 스키타이인들은 카스피해 스텝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킴메르인들을 몰아냈다.
스키타이의 압력으로 킴메르인들은 흑해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아나톨리아에 도달했다. 스키타이인들은 차례로 카스피해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확장하여 북캅카스 스텝에 도착했으며, 그곳에서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지역으로 확장하여 정착했다. 그리고 기원전 6세기 초까지 동트란스캅카스를 서아시아 작전의 중심지로 삼았다. 이러한 서아시아에서의 존재는 스텝 스키타이 왕국의 확장이었다. 이 기간 동안 스키타이 왕들의 본부는 캅카스 북쪽 스텝에 위치했으며, 서아시아 문명과의 접촉은 스키타이 문화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4. 생애와 통치


4. 1. 배경
마디우스는 스키타이의 왕 바르타투아의 아들이며, 할아버지는 바르타투아의 전임자였던 이슈파카이아로 추정된다. 이슈파카이아는 당시 서아시아의 강대국이었던 신 아시리아 제국과 적대 관계였고, 아시리아 왕 에사르하돈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후 왕위를 계승한 바르타투아는 아버지와 달리 아시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했다.
마디우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 바르타투아가 에사르하돈의 딸이자 그의 후계자인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쉬-슘-우킨의 누이인 아시리아 공주 세루아-에티라트와의 결혼을 요청했던 기록이 있다. 바르타투아와 마디우스 시대에 스키타이와 아시리아가 긴밀한 동맹 관계를 유지했던 점을 고려하면, 아시리아 측이 유목민족 지도자와 왕족의 결혼이라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세루아-에티라트가 마디우스의 어머니일 것으로 추정된다.[3][4]
바르타투아가 세루아-에티라트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아시리아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아시리아 법에 따라 그의 영토는 아시리아 왕이 하사한 봉토로 간주되었고, 이는 서아시아에서의 스키타이 세력이 명목상 신 아시리아 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키타이의 힘은 아시리아와의 협력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이후 스키타이는 아시리아의 동맹국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우라르투의 왕 루사 2세 역시 서쪽 국경 방어를 위해 스키타이 군대를 고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스키타이 왕가와 아시리아 지배층 사이의 결혼 동맹, 그리고 스키타이가 만나이 및 우라르투와 지리적으로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은 스키타이가 아시리아 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는 배경이 되었다. 바르타투아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마디우스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4. 2. 메디아 정복
아시리아가 기원전 650년대에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에사르하돈의 아들인 샤마시-슘-우킨이 바빌론의 왕으로 즉위한 후, 기원전 652년에 형 아슈르바니팔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메디아인들은 이 반란을 지지했다.
이에 마디우스는 메디아를 침략했고, 아슈르바니팔이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도왔다. 메디아의 왕 프라오르테스는 이 과정에서 아시리아군 또는 마디우스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마디우스는 아시리아를 대신하여 28년 동안 메디아에 스키타이의 지배를 강요했다. 이는 고대 그리스 작가들이 '아시아에 대한 스키타이의 지배'라고 부른 시대의 시작이었다.

마디우스는 곧 스키타이의 지배력을 우라르투까지 확장했다. 메디아, 마나이, 우라르투는 스키타이의 종주권 아래에서 왕국 형태를 유지했다.
4. 3. 킴메르족과 트레리족 격파

기원전 7세기, 대규모 킴메르족은 아나톨리아에서 활동하며 스키타이의 동맹국인 신아시리아 제국에 위협을 가했다. 당시 아시리아는 기원전 669년부터 마디우스의 삼촌인 아슈르바니팔이 통치하고 있었다. 기원전 657년경 아시리아 기록은 킴메르족이 시리아에 있는 아시리아 서부 영토를 위협하거나 정복했을 가능성을 언급하며, 이들의 공격은 아슈르바니팔로 하여금 제국 북서쪽 국경의 안보를 우려하게 만들었다. 같은 시기 아시리아 점술 기록에서는 킴메르족의 왕 투그다미를 šar-kiššati|샤르 키샤티akk("우주의 왕")라는 칭호로 불렀는데, 이는 본래 아시리아 왕에게만 사용되던 칭호였다. 이는 투그다미가 아시리아에 맞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고대 서아시아 세계에서 아슈르바니팔과 동등한 수준의 강력한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아시리아 왕의 권위가 킴메르족에게 넘어간 이 상황은 기원전 650년대와 64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기원전 644년, 투그다미가 이끄는 킴메르족은 리디아 왕국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수도 사르디스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리디아의 왕 기게스가 전사했다. 사르디스를 약탈한 킴메르족은 아나톨리아 서해안의 그리스 도시 국가인 이오니아와 아이올리스까지 침략했다. 이후 기원전 640년경, 킴메르족은 아시리아 북서쪽 국경의 킬리키아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투그다미는 내부 반란에 직면한 후 아시리아와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고 종주권을 인정하며 조공을 보냈으나, 곧 맹세를 깨고 다시 아시리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투그다미는 기원전 640년 병으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 산다크샤트루가 뒤를 이었다.
기원전 637년, 트라키아인의 일파인 트레리족이 트라키아 보스포루스를 건너 아나톨리아를 침략했다. 이들은 산다크샤트루의 킴메르족 및 리키아인들과 동맹을 맺고, 기게스의 아들인 아르디스가 다스리던 리디아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리디아군은 패배했고 수도 사르디스는 요새를 제외하고 다시 점령당했으며, 아르디스 왕도 이때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르디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사디아테스 역시 기원전 635년경 킴메르족의 또 다른 공격으로 사망했을 수 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기원전 635년 직후, 마디우스가 이끄는 스키타이 군대가 아시리아의 승인과 리디아와의 동맹 하에 아나톨리아에 진입했다. 스키타이군은 먼저 트레리족을 소아시아에서 몰아낸 뒤, 킴메르족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승리를 통해 스키타이는 중앙 아나톨리아까지 지배력을 확장했다. 킴메르족의 최종적인 패배는 마디우스의 스키타이군과 리디아의 왕 알리아테스(사디아테스의 아들이자 아르디스의 손자)의 연합 작전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스트라본은 마디우스가 트레리족과 킴메르족을 소아시아에서 몰아냈다고 기록했으며, 헤로도토스와 폴리에누스는 알리아테스가 킴메르족을 최종적으로 격파했다고 주장했다.
폴리에누스는 알리아테스가 킴메르족을 격퇴하기 위해 "전쟁 개(war dogs)"를 사용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늑대나 개처럼 싸우는 젊은 스키타이 전사들(인도유럽조어의 *kóryos|코르요스ine 통과 의례와 관련된)을 그리스식으로 표현한 것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마디우스의 통치 아래 스키타이의 세력은 서아시아에서 절정에 달했다. 스키타이가 지배하는 영토는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의 크즐으르마크강에서 동쪽으로는 카스피해와 메디아 동쪽 국경까지, 북쪽으로는 자캅카스에서 남쪽으로는 신아시리아 제국의 북쪽 국경까지 확장되었다.
4. 4. 메디아의 반란과 죽음

기원전 62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 아시리아 제국은 아슈르바니팔 왕이 기원전 631년에 사망한 후 약화되기 시작했다. 제국 내부의 불안정과 더불어, 기원전 626년에는 나보폴라사르가 이끄는 바빌론이 아시리아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 해인 기원전 625년, 프라오르테스의 아들이자 메디아의 왕위를 계승한 키아크사레스는 스키타이 지배자들을 연회에 초대했다. 키아크사레스는 그들을 술에 취하게 한 뒤, 마디우스를 포함한 스키타이 지도자들을 모두 살해함으로써 메디아에 대한 스키타이의 지배를 끝냈다.
4. 5. 여파

마디우스 이후 스키타이 왕들과의 관계나 그의 후계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암살된 직후인 기원전 623년에서 616년 사이, 스키타이인들은 과거 아시리아 동맹국의 붕괴로 생긴 권력 공백을 이용하여 레반트 지역을 점령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남부를 거쳐 이집트 국경까지 진출하였다.
스키타이인들의 진군은 나일 삼각주의 늪지대에서 멈추었으며, 당시 파라오였던 프삼티크 1세가 직접 그들을 만나 선물을 주며 돌려보냈다. 스키타이인들은 대부분 별다른 문제 없이 물러났지만, 아스칼론을 통과하던 중 일부 낙오병들이 도시의 아스타르테 신전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신전은 아스타르테 여신에게 바쳐진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여겨졌는데, 신성 모독을 저지른 이들과 그 후손들은 여신으로부터 "여성 질환"에 걸리는 저주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저주로 인해 그들은 스키타이 언어로 "사나이답지 못한"이라는 뜻의 에나레(Anarya)라 불리는 성전환 예언자 계급이 되었다고 한다.
바빌로니아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615년경 스키타이인들은 아시리아와의 전쟁에서 키악사레스가 이끄는 메디아의 동맹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원전 600년대에 결국 메디아에 의해 서아시아 지역에서 밀려나 폰토스-카스피해 스텝으로 후퇴하였다.
5. 유산
그리스-로마 작가들은 마디우스를 그의 선임자 및 후임자와 동일 인물로 묘사하였다. 이들은 마디우스가 스키타이족을 중앙 아시아에서 이끌고 킴메르족을 그들의 고향에서 몰아냈으며, 메디아인과 전설적인 이집트 왕 세소스티스를 격파하여 수년 동안 아시아를 지배한 후 스키티아로 돌아갔다고 주장했다. 후대의 그리스-로마 작가들은 이 스키타이 왕을 이단튀르소스 또는 타나우시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이단튀르소스는 후대의 역사적 스키타이 왕 이단튀르수스와는 다른 전설적인 인물이며, 그리스-로마인들은 단지 그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참조
[1]
웹사이트
Madyes
https://www.perseus.[...]
Harry Thurston Peck, Harpers Dictionary of Classical Antiquities (1898)
[2]
서적
"*madu- “intoxicating drink” (in Madýēs)"
2018
[3]
서적
"In approximately 672 BCE the Scythian king Partatua (Protothýēs of Hdt., 1.103) asked for the hand of the daughter of the Assyrian king Esarhaddon, promising to conclude a treaty of alliance with Assyria. It is probable that this marriage took place and the alliance also came into being (SAA IV, no. 20; Ivantchik, 1993, pp. 93-94; 205-9)."
2018
[4]
서적
"С одной стороны, Мадий, вероятно, полуассириец, даже будучи «этническим» полускифом (его предшественник и, вероятно, отец, ‒ царь скифов Прототий, женой которого была дочь ассирийского царя Ассархаддона)"
2011
[5]
서적
A Scythian army, acting in conformity with Assyrian policy, entered Pontis to crush the last of the Cimmerians.
https://archive.org/[...]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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