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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타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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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라타 제국은 17세기 중반 시바지 보살레에 의해 건국되어 1818년 영국 동인도 회사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재했던 국가이다. 마라타 연맹으로도 불리며,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마라타 제국'을, 영국인 역사학자들은 '마라타 연맹'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했다. 시바지는 독립적인 마라타 국가를 건설하고 무굴 제국에 대항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며, 그의 후계자들은 영토를 넓혀 인도 아대륙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다. 18세기에는 페슈와가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어 제국을 이끌었으며, 아슈타 프라단이라는 8명의 대신으로 구성된 의회를 통해 통치했다. 그러나 영국과의 잦은 전쟁과 내분으로 인해 쇠퇴하여, 결국 1818년 제3차 영국-마라타 전쟁에서 패배하며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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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타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1758년 아프간-마라타 전쟁 중 마라타 연맹과 점령지 (노란색)
기본 정보
일반 명칭마라타
긴 명칭마라타 연맹, 마라타 제국
건국1674년 6월 6일
멸망1818년 마라타 연맹 해체
이전 국가무굴 제국, 비자푸르 술탄국
후임 국가영국령 인도
현재 국가인도
표어"हर हर महादेव" (하라 하라 마하데브)
표어 (영어)"Praises to Mahādēv (Shiva)" (시바에게 찬양을)
수도 (왕실)라이가드 (1674년–1708년, 법적)
진지 (1691년–1698년, 사실상)
사타라 (1708년–1818년)
수도 (페슈와)푸네 (1728년–1818년)
공식 언어마라티어 (법정 언어, 문학)
산스크리트어 (종교)
종교국교: 힌두교
기타: 남아시아의 다른 종교
정치 체제절대 군주제 (1674년–1731년)
제한된 군주제 수장를 가진 연합 귀족 정치 (1731년–1818년)
입법부아슈타 프라단
통치자
군주 칭호차트라파티
초대 군주시바지 1세 (1674년–1680년)
마지막 군주프라탑 싱 (1808년–1818년)
총리 칭호페슈와
초대 총리모로판트 핑글 (1674년–1683년)
마지막 총리바지 라오 2세 (1803년–1818년)
명목상 총리나나 사헤브 (1858년–1859년)
역사적 사건
데칸 전쟁1680년–1707년
바하두르 샤 1세에 의해 샤후 1세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1707년 8월 3일
발라지 비슈와나트를 세습 페슈와로 임명1713년 11월 16일
보팔 조약1738년 1월 7일
제3차 앵글로-마라타 전쟁1817년 11월 5일 – 1819년 4월 9일
통계
면적 (1760년)2,500,000 제곱킬로미터
기타 정보
통화루피, 파이사, 모후르, 시브라이, 혼

2. 이름

마라타 제국은 보통 마라타 연맹이라고도 불린다. 역사학자 바바라 라무삭은 '마라타 제국'이라는 이름은 주로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사용하며, '마라타 연맹'은 주로 영국인 역사학자들이 사용한다고 말한다.[107] 다만 그녀는 두 단어가 모두 부정확하다고 말하는데, '제국'은 지나치게 중앙집권화된 체제를 의미하고 '연맹'은 느슨하게 묶여 있는 주권국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둘 다 마라타 제국의 정치 체제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현재 '마라타'라는 단어는 특정한 전사 및 연맹 계급을 뜻하지만, 과거에는 모든 마라티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였다.[108]

3. 역사

마라타인들은 서부 데칸 고원에서 살아가는 민족들이었다. 17세기 중반 무굴 제국아우랑제브가 즉위하여 인도를 엄격한 이슬람법 지배체제 아래에 두고 비이슬람교도들을 법으로 혹독하게 다스리자, 힌두교도들이 다수인 마라타족은 무굴 제국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마라타인들은 '힌다비 스와라자야', 즉 힌두인들에 의하여 지배되는 인도를 주장하며 세를 불려나갔다. 이후 귀족 출신 시바지가 마라타의 지도자로 떠올랐고, 라이가드를 수도로 하여 마라타 제국을 세웠다. 1674년에는 차트라파티, 즉 황제로도 즉위하였다.

당시 마라타 제국은 인도 대륙의 4.1%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곧 빠르게 확장하여 시바지가 죽을 즈음에는 300여 개의 요새, 40,000여 명의 기병, 50,000여 명의 보병들을 거느린 상당한 크기의 왕국이 되었다. 이때 무굴 제국은 라지푸트족들과도 분쟁이 있었는데 이와 함께 마라타의 반기로 남북 양면의 협공을 받게 된다. 다만 아우랑제브의 치세 전반기는 주로 북쪽 지역에 관심을 두었기에, 남쪽 데칸 지역의 업무는 총독을 두어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마하라슈트라 지역의 마라타인들이 시바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게 되고 점차 독립적인 성향을 띠게 되며 데칸의 정치적 상황은 갈수록 복잡하게 되었다.

황제 아우랑제브는 처음에 마라타인들의 세력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바지가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가자 군대를 보내 제압하려 했지만, 도리어 패배하고 마라타 세력은 오히려 이전보다 강성해졌다. 시바지는 1663년 푸나 지역 근처를 점령했고 1664년 무굴 제국의 중요한 항구도시 수라트를 차지하며 점차 힘을 키워나갔다.

시바지는 상바지, 라자람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이복형제였다. 1681년, 상바지는 시바지 1세의 죽음 후 왕위를 계승하고 팽창 정책을 계속했다. 상바지는 포르투갈마이소르의 치카 데바 라야를 물리쳤다. 아우랑제브는 상바지의 아들 악바르와 마라타의 동맹을 무효화하기 위해,[109] 1681년 50만 대군을 이끌고 남진하여 비자푸르 술탄국 등을 정복하며 제국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후 상바지는 8년 동안이나 아우랑제브의 무굴 군대와 맞서 싸웠는데, 탁월한 용병술로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1689년 초, 상바지는 군사 회의를 열어 무굴 군대를 어떻게 부술 지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하였다. 허나 무굴 제국의 군대가 이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고 회의장을 급습, 몇 명의 호위군만 데리고 있던 상바지를 생포하였다. 결국 1689년 2월 1일에 상바지와 그의 조언자인 카비 칼라시가 생포되었으며, 반역죄로 1689년 3월 21일에 무굴 제국에 의하여 처형당했다.[65]

상바지가 죽은 이후, 그의 이복형제였던 라자람이 왕위를 승계하였다. 허나 그가 왕위에 오른 직후에도 무굴 제국은 여세를 몰아 수도인 라이가드를 맹공하였고, 라자람은 결국 피난을 가야만 하였다. 이후 마라타 군대는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였고, 빼앗긴 요새들을 무굴 제국 군대의 손아귀에서 다시 탈환하였다. 1697년에는 아우랑제브 황제에게 화친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황제의 강경자세 때문에 거절당했다. 라자람은 1700년에 신하가드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사후에 그의 아내였던 타라바이가 아들인 시바지 2세의 이름을 빌어 대신 통치하였다. 타라바이는 남편의 적대 정책을 이어 받았으며, 나중에는 나르마다 강을 건너 무굴 제국의 영토로 진입하기도 하였다.

1707년에 아우랑제브 황제가 서거한 이후, 상바지의 아들이었던 샤후가 새롭게 무굴의 황위에 오른 바하두르 샤 1세로부터 풀려나는 데에 성공했다. 다만 샤후가 고향으로 돌아가 무굴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의 모친은 여전히 잡아두었다. 샤후는 풀려난 직후 고국으로 귀환하여 황위를 요구하였고, 타라바이와 시바지 2세에게 도전하였다. 이후 내전이 발발하였는데, 이 내전에서 샤후는 명신인 발라지 비슈와나트를 재상격 관직이었던 '페슈와'에 임명하였다. 발라지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무굴 제국에게서 샤후가 유일한 마라타 제국의 황제라는 인정을 받아내었고, 나중에는 무굴 제국에 포로로 잡혀있었던 샤후의 어머니 예수바이도 돌아오게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후 샤후는 타라바이와 그 아들을 물리치고 유일한 왕으로 옹립되었다. 그의 치세기에 라그호지 봉슬레 장군이 국경을 동쪽으로 크게 확장하였으며 현재의 벵골 지역까지 이르렀다. 또한 나중에는 힘을 키워 국경을 구자라트 지방까지 넓히기도 하였다.

1760년 마라타 연합의 구성 왕국/주


마하다지 쉰데는 북인도에서 마라타의 지배를 회복했다


대제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마다브라오 페슈와는 가장 강력한 귀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했다.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가 사망한 후, 여러 수장들과 자기르다르들이 유아 페슈와 마다브라오 2세의 사실상 통치자이자 섭정이 되었다. 중인도의 괄리오르 지역 통치자인 마하다지 쉰데의 지휘 아래 마라타들은 자트족과 로힐라 아프간인들을 물리치고 델리를 점령했으며, 델리는 그 후 30년 동안 마라타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의 군대는 현재의 하리아나 주를 정복했다. 쉰데는 제3차 파니파트 전투의 참패 이후 마라타의 권력을 부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말와 사르다르들, 붕델칸드의 지주들, 그에게 조공을 바치기를 거부한 라자스탄의 라즈푸트 왕국들과 같은 봉건 영주들의 권력이 커진 후, 그는 그의 군대를 보내 보팔, 다티야, 찬데리, 나르와르, 살바이, 고하드와 같은 주들을 정복했다. 그러나 그는 자이푸르 라자에 대한 원정을 시도했지만 1787년 결정적이지 못한 랄소트 전투 후 철수했다. 가젠드라가드 전투는 툴코지라오 홀카르(말하르라오 홀카르의 양자)의 지휘 아래 마라타군과 티푸 술탄 사이에 1786년 3월부터 1787년 3월까지 벌어졌으며, 이 전투에서 티푸 술탄은 마라타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마라타 영토의 경계는 퉁가바드라 강까지 확장되었다. 강력한 요새 괄리오르는 당시 고하드의 자트 통치자인 챗타르 싱의 손에 있었다. 1783년 마하다지는 괄리오르 요새를 포위 공격하여 정복했다. 그는 괄리오르의 행정을 칸데라오 하리 발레라오에게 위임했다. 괄리오르 정복을 기념한 후, 마하다지 쉰데는 다시 델리에 주목했다.

1785년 마라타-시크 조약은 작은 시스-수틀레지 주들을 마라타 연합의 쉰디아 왕조의 자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35] 마하다지 쉰데는 1784년 무굴 제국의 섭정인 ''바킬-이-무틀락''으로 임명되었다.[36] 1806년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 이후,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는 시크 족 부족들에게 수틀레지 강 동쪽의 독립을 보장하는 조약을 작성했는데, 이는 그들이 그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영국군 장군 제라드 레이크에게 충성하는 대가였다.[37][38]

마하다지 쉰데는 히사르 주지사로부터 라니아, 파테하바드 및 시르사를 정복했다. 그러자 하리아나는 마라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는 하리아나를 네 지역으로 나누었다.

지역관할 구역
델리무굴 황제 샤 알람 2세, 그의 가족 및 델리 주변 지역
파니팟카르날, 소네파트, 쿠루크셰트라, 암발라
히사르히사르, 시르사, 파테하바드, 로탁 일부
아히르왈구르가온, 레와리, 나르나울, 마헨드라가르 및 메와트



다울라트 라오 쉰디아는 1803년 12월 30일 수르지-안잔가온 조약에 따라 영국 동인도 회사에 하리아나를 할양하여 인도의 회사 통치로 이어졌다.

1788년 마하다지의 군대는 마라타에 저항한 무굴 귀족인 이스마일 베그를 물리쳤다. 이스마일 베그의 동맹인 로힐라 지도자 굴람 카디르는 무굴 왕조의 수도 델리를 장악하고 왕 샤 알람 2세를 폐위시켜 눈을 멀게 하고 꼭두각시를 델리 왕좌에 앉혔다. 마하다지는 개입하여 그를 죽이고 10월 2일 델리를 장악하여 샤 알람 2세를 왕위에 복귀시키고 그의 보호자가 되었다. 가장 강력한 두 라즈푸트 국가인 자이푸르조드푸르는 여전히 마라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마하다지는 그의 장군 베누아 드 부아뉴를 보내 파탄 전투에서 자이푸르와 조드푸르의 군대를 분쇄했다. 마라타의 또 다른 업적은 하이데라바드 니잠의 군대에 대한 승리였다. 이러한 승리 중 마지막은 1795년 카르다 전투에서 일어났는데, 주요 마라타 세력들이 니잠의 군대와 함께 싸웠다.[39]

페슈와는 1674년 시바지가 차트라파티(황제)가 된 후 공적이 많은 장군 모로판트 트림바크 핑갈레에게 내린 칭호이다. 샤후는 발라지 비슈와나트를 1713년에 페슈와로 임명하여, 이때부터 페슈와는 황제 다음가는 최고위직이 되었다. 발라지 비슈와나트 사후, 샤후는 그의 아들 바지라오 1세를 페슈와로 임명하였다. 바지라오 1세는 팔케드 전투, 델리 전투, 보팔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마라타 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뭄바이 북쪽 50km 부근의 바사이에서 포르투갈 지배자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기도 하였다.[70][71][72]

바지라오 1세 사후, 그의 아들 발라즈 바지라오가 페슈와가 되었다. 그는 본슬레 가문의 라구지 본슬레와 함께 남부와 동부로 세력을 확장, 티루치라팔리 전투에서 카르나타카 나와브를 제압하고, 벵골을 침공하여 오디샤를 점령, 합병하고 벵골을 봉신국으로 만들었다. 1752년, 마라타는 두라니 왕조에 위협받는 무굴과 델리를 보호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1750년대 후반, 마라타는 두라니 지배하의 펀자브, 카슈미르를 공격, 점령하여 인도 아대륙 절반가량을 지배했다. 1758년 아톡 전투, 페샤와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페샤와르를 점령했다. 1759년, 붉은 요새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1759년, 사다시브라우 바우는 두라니 왕조가 북인도로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항군을 편성, 1760년 8월 델리를 되찾았다. 1760년, 하이데라바드 군대를 격파하며 마라타 제국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1761년 제3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마라타는 두라니에게 패배했다. 이후 마라타 제국은 4번째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 재위기에 중흥했다. 그는 마라타를 통합하고 남부로 중심을 옮겨 마이소르, 하이데라바드를 쳐 국경을 안정시키려 했다. 북부 국경에도 장군들을 보내 1770년대 초 마라타 권위를 확립했다. 그러나 1772년 마다브라오 1세가 27세로 별세하며 마라타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775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라구나트라오를 지지하여 푸네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했고, 이는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은 1782년 전쟁 전 상태로 복귀하며 끝났다.[44] 1799년, 야슈완트라오 홀카르는 홀카르 왕으로 즉위하여 푸나 전투에서 페슈와 바지라오 2세를 패배시키고 마라타 정부를 장악했다.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1803~1805년) 이전에 페슈와 바지라오 2세도 영국과 조약을 체결했다. 1803년 델리 전투에서의 패배는 마라타의 델리에 대한 영향력 상실로 이어졌다.[44] 제3차 영국-마라타 전쟁(1817~1818년)으로 마라타는 독립을 상실하고 영국은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페슈와는 비투르로 추방되었고, 콜하푸르와 사타라를 제외한 마라타 중심지는 영국의 직접 통치하에 들어갔다. 괄리오르, 인도르, 나그푸르 등은 토후국이 되어 영국의 최고 권력하에 내부 주권을 유지했다.[44]

3. 1. 건국

시바지
시바지 시대의 금화


마라타는 중세에 부흥한 신흥 카스트로, 바흐마니 왕조와 그 후 분열된 데칸 술탄 왕조 아래에서 용병으로 활약했다. 마라타 호족은 향주, 즉 행정관으로 각 왕조에 인정받았고, 그 영토는 봉토로 주어졌다.

17세기 초, 무굴 제국이 아흐마드나가르 왕국(데칸 술탄 왕조 중 하나)의 영토에 침입하는 와중에, 1627년 시바지푸네의 향주 샤하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1633년 6월 무굴 제국은 다울라타바드를 함락했지만, 샤하지는 소년 왕 무르타자 니잠 샤 3세를 옹립하여 저항했다. 그러나 1636년 2월 샤하지는 무굴 제국 군대에 패배하고 무르타자 니잠 샤 3세를 넘겨주었다.

그 후, 샤하지는 비자푸르 왕국으로 망명하여, 푸네와 그 근교 마하라슈트라에 영토를 받고, 수도 비자푸르의 궁정에 출사하게 되었다.[57] 시바지는 유년 시절 어머니 지자 바이에게 양육되었다.

성장한 시바지는 많은 동료를 모아 1645년 이후부터 왕국에 공공연히 반항하기 시작하여, 1659년까지 콘칸 지방 일대를 거의 평정했다.[58] 같은 해, 비자푸르 왕국은 대군을 파병했지만, 11월에 토벌군의 주장 아프잘 칸을 비롯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59]

1657년 이후, 시바지는 무굴 제국에 주목하여, 황위 계승 전쟁을 이용하여 그 영토를 습격했다. 1658년 아우랑제브가 즉위한 후에도 습격을 계속하여, 제국이 파견한 샤이스타 칸을 모두 물리치고, 제국의 중요 도시 수라트를 약탈했다( 수라트 전투).[60]

1664년, 아우랑제브는 암베르 왕국의 군주 자이 싱을 시바지 토벌에 보냈다. 자이 싱은 마라타 측의 성채를 잇달아 빼앗고, 1665년 6월 시바지는 제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푸린다 조약).[59]

1666년 5월, 시바지는 아들 상바지와 함께 아우랑제브를 아그라에서 만났지만, 의견이 맞지 않아 유폐되었다.[61] 하지만 그들은 성병의 방심한 틈을 타 탈출하여 본거지 라이가드로 귀환했다.[61]

그 후, 양국의 관계는 대체로 평화로웠지만, 아우랑제브가 힌두교 탄압을 강화했기 때문에, 시바지는 푸린다 조약을 사실상 파기했다. 1670년 1월 이후, 시바지는 제국 영토를 습격하여, 10월에 수라트를 다시 약탈하고, 그 영토를 점차 회복해 나갔다.[61][62]

1674년 6월 시바지는 라이가드 요새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많은 브라만을 모아 '''마라타 왕국''' 건립을 선포했다.[61] 데칸 지방은 14세기 초 델리 술탄 왕조의 지배를 받은 후, 바흐마니 왕조와 데칸 술탄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힌두 왕조가 건립된 것은 3세기 만이었다.

1678년 시바지는 동생 비잔코지가 건국한 탄자브르 마라타 왕국으로 군대를 진격하여, 비잔코지와 싸워 그 영토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63]

3. 2. 시바지의 후계자들

시바지에게는 상바지와 라자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달랐으며 이복형제였다. 1681년, 상바지는 아버지 시바지 1세의 죽음 후 왕위를 계승하고 그의 팽창주의 정책을 계속했다. 상바지는 앞서 포르투갈마이소르의 치카 데바 라야를 물리쳤다. 그의 반란을 일으킨 아들 악바르와 마라타의 동맹을 무효화하기 위해,[109]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는 1681년 남쪽으로 향했다. 그는 그의 전체 황실 궁정, 행정부, 그리고 약 5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무굴 제국을 확장하여 비자푸르와 골콘다 술탄국과 같은 영토를 얻었다. 그 후 8년 동안 상바지는 마라타들을 이끌고 무굴 제국에 맞서 성공적으로 싸웠다.[62][64]

시바지의 아들이자 두 번째 마라타 통치자인 상바지의 초상화.


상바지


1689년 초, 상바지는 무굴군에 대한 공격을 고려하기 위해 상가메슈와르에서 지휘관들을 위한 전략 회의를 소집했다. 정교하게 계획된 작전에서 가노지와 아우랑제브의 지휘관 무카랍 칸은 상바지가 몇몇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상가메슈와르를 공격했다. 상바지는 1689년 2월 1일 무굴군에게 매복 공격을 받아 체포되었다. 그와 그의 고문인 카비 칼라쉬는 황실 군대에 의해 바하두르가드로 끌려가, 1689년 3월 21일 무굴 제국에 의해 처형되었다.[65] 아우랑제브는 상바지를 마라타 군대의 부르한푸르 공격으로 고발했다.

상바지가 죽자 그의 이복형제 라자람이 왕위에 올랐다. 라이가드에 대한 무굴군의 포위 공격은 계속되었고, 그는 안전을 위해 비샬가드로, 그리고 긴지로 도망쳐야 했다. 거기서 마라타들은 무굴 영토를 습격했고, 산타지 고르파데, 다나지 자다브, 파르슈람 판트 프라티니디, 샹카라지 나라얀 사체브, 멜기리 판딧과 같은 마라타 지휘관들이 많은 요새들을 탈환했다. 1697년, 라자람은 휴전을 제안했지만 아우랑제브는 이를 거부했다. 라자람은 1700년 시나가드에서 사망했다. 그의 미망인인 타라바이는 그의 아들 라마라자(시바지 2세)의 이름으로 통치를 시작했다.[65]

1707년 아우랑제브가 죽자, 상바지의 아들(시바지의 손자)인 샤후는 새로운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1세에 의해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샤후가 석방 조건을 준수하도록 하기 위해 무굴 제국의 인질로 잡혀 있었다. 석방된 후 샤후는 즉시 마라타 왕위를 주장하고 그의 이모 타라바이와 그녀의 아들에게 도전했다. 끊임없는 무굴-마라타 전쟁은 삼각 관계가 되었다. 이로 인해 1707년 사타라와 콜하푸르에 각각 샤후와 타라바이에 의해 두 개의 경쟁 정부가 수립되었다. 샤후는 발라지 비슈와나트를 그의 페슈와로 임명했다. 페슈와는 샤후를 시바지의 정당한 후계자이자 마라타의 차트라파티로 무굴 제국의 인정을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발라지는 또한 1719년 무굴 제국의 감금에서 샤후의 어머니인 예수바이를 석방시켰다.

샤후의 통치 기간 동안 라그호지 봉슬레는 동쪽으로 왕국을 확장했다. 칸데라오 다바데와 그의 아들 트리암바크라오는 서쪽으로 구자라트까지 왕국을 확장했다. 페슈와 바지라오와 그의 세 명의 수장인 파와르(다르), 홀카르(인도르), 신디아(그왈리어)는 북쪽으로 왕국을 확장했다.

대제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마다브라오 페슈와는 가장 강력한 귀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했다.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가 사망한 후, 여러 수장들과 자기르다르들이 유아 페슈와 마다브라오 2세의 사실상 통치자이자 섭정이 되었다. 중인도의 괄리오르 지역 통치자인 마하다지 쉰데의 지휘 아래 마라타들은 자트족과 로힐라 아프간인들을 물리치고 델리를 점령했으며, 델리는 그 후 30년 동안 마라타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의 군대는 현재의 하리아나 주를 정복했다. 쉰데는 세 번째 파니팟 전투의 참패 이후 마라타의 권력을 부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말와 사르다르들, 붕델칸드의 지주들, 그에게 조공을 바치기를 거부한 라자스탄의 라즈푸트 왕국들과 같은 봉건 영주들의 권력이 커진 후, 그는 그의 군대를 보내 보팔, 다티야, 찬데리, 나르와르, 살바이, 고하드와 같은 주들을 정복했다. 그러나 그는 자이푸르 라자에 대한 원정을 시도했지만 1787년 결정적이지 못한 랄소트 전투 후 철수했다. 가젠드라가드 전투는 툴코지라오 홀카르(말하르라오 홀카르의 양자)의 지휘 아래 마라타군과 티푸 술탄 사이에 1786년 3월부터 1787년 3월까지 벌어졌으며, 이 전투에서 티푸 술탄은 마라타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마라타 영토의 경계는 퉁가바드라 강까지 확장되었다. 강력한 요새 괄리오르는 당시 고하드의 자트 통치자인 챗타르 싱의 손에 있었다. 1783년 마하다지는 괄리오르 요새를 포위 공격하여 정복했다. 그는 괄리오르의 행정을 칸데라오 하리 발레라오에게 위임했다. 괄리오르 정복을 기념한 후, 마하다지 쉰데는 다시 델리에 주목했다.

1785년 마라타-시크 조약은 작은 시스-수틀레지 주들을 마라타 연합의 쉰디아 왕조의 자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35] 마하다지 쉰데는 1784년 무굴 제국의 섭정인 ''바킬-이-무틀락''으로 임명되었다.[36] 1806년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 이후,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는 시크 족 부족들에게 수틀레지 강 동쪽의 독립을 보장하는 조약을 작성했는데, 이는 그들이 그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영국군 장군 제라드 레이크에게 충성하는 대가였다.[37][38]

마하다지 쉰데는 히사르 주지사로부터 라니아, 파테하바드 및 시르사를 정복했다. 그러자 하리아나는 마라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는 하리아나를 네 지역으로 나누었다.

지역관할 구역
델리무굴 황제 샤 알람 2세, 그의 가족 및 델리 주변 지역
파니팟카르날, 소네파트, 쿠르크셰트라, 암발라
히사르히사르, 시르사, 파테하바드, 로탁 일부
아히르왈구르가온, 레와리, 나르나울, 마헨드라가르 및 메와트



다울라트 라오 쉰디아는 1803년 12월 30일 수르지-안잔가온 조약에 따라 영국 동인도 회사에 하리아나를 할양하여 인도의 회사 통치로 이어졌다.

1788년 마하다지의 군대는 마라타에 저항한 무굴 귀족인 이스마일 베그를 물리쳤다. 이스마일 베그의 동맹인 로힐라 지도자 굴람 카디르는 무굴 왕조의 수도 델리를 장악하고 왕 샤 알람 2세를 폐위시켜 눈을 멀게 하고 꼭두각시를 델리 왕좌에 앉혔다. 마하다지는 개입하여 그를 죽이고 10월 2일 델리를 장악하여 샤 알람 2세를 왕위에 복귀시키고 그의 보호자가 되었다. 가장 강력한 두 라즈푸트 국가인 자이푸르조드푸르는 여전히 마라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마하다지는 그의 장군 베누아 드 부아뉴를 보내 파탄 전투에서 자이푸르와 조드푸르의 군대를 분쇄했다. 마라타의 또 다른 업적은 하이데라바드 니잠의 군대에 대한 승리였다. 이러한 승리 중 마지막은 1795년 카르다 전투에서 일어났는데, 주요 마라타 세력들이 니잠의 군대와 함께 싸웠다.[39]

3. 3. 페슈와의 시대

پیشوا|페슈와fa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어 "پیشوا(pēshwā 페슈워, '지도자, 통솔자')"에서 유래하였다. 1674년 시바지가 차트라파티(황제)가 된 후 공적이 많은 장군 모로판트 트림바크 핑갈레에게 이 칭호를 내린 것이 페슈와직의 시초이다. 원래는 세습이 가능한 비세습직이었으나, 바트 가문의 발라지 비슈와나트 이후 바트 가문이 세습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이들의 권한이 워낙 강력해져 제국의 사실상 지배자가 되었으며, 1772년까지 군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다. 이들의 통치기에 마라타 제국은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통치하였다.[26][27][28][29][30][31][32][33][34]

샤후 보살레 1세는 그의 즉위에 공로가 컸던 발라지 비슈와나트에게 1713년에 페슈와직을 내렸다. 이때부터 페슈와는 황제 다음가는 최고위직이 되었다. 발라지 비슈와나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1714년에 서부 해안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던 해적 칸호지 앙그레와 로나발라 조약을 맺어 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칸호지 앙그리아는 나중에 샤후 1세를 황제로 인정하기도 하였다. 1719년에는 무굴 제국의 수도인 델리로 진군하여 황제를 쫓아내고 꼭두각시를 세워 자신들의 마음대로 하기도 하였다. 무굴 제국은 이때부터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마라타 제국의 봉신국 비슷하게 전락하게 된다.[66][67][68]

1720년 4월 발라지 비슈와나트가 죽은 후, 샤후 1세는 그의 뒤를 이어 바지라오 1세를 새로운 페슈와로 세웠다. 바지라오 1세는 마라타 제국의 영토를 현대 인도의 3%에서 30%로 늘리는 등 엄청난 군사적 공로를 세웠다. 그는 1740년 4월에 죽을 때까지 41번이 넘는 전투를 치렀으며,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1728년 2월 28일 팔케드 전투에서 아사프 자흐 1세를 꺾고 하이데라바드니잠을 무릎꿇렸다. 1737년 델리 전투에서 델리 인근을 약탈하였는데, 무굴 제국의 봉신들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으나 보팔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마라타 제국은 무굴 제국에게 막대한 양의 조공을 요구하고, 말와 지역을 할양받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바지라오 1세 시대에는 뭄바이 북쪽 50km 부근의 바사이에서 포르투갈 지배자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했는데, 이는 바지라오 1세의 형이 직접 이끌었으며 주요 군사적 업적 중 하나이다.[70][71][72]

바지라오 1세 사후, 그의 아들 발라즈 바지라오가 페슈와가 되었다. 그는 수많은 군사 원정을 벌이고 사람들을 학살하며 국력을 신장하였다. 본슬레 가문의 라구지 본슬레는 1741년 티루치라팔리 전투에서 카르나타카 나와브를 제압하고, 1741 ~ 1751년간 벵골 나와브 영토를 6차례 침공하여 오디샤를 점령, 합병하고 벵골을 봉신국으로 만들었다. 마라타 제국은 벵골을 무자비하게 통치하며 풍요로웠던 벵골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네덜란드 기록에 따르면 최소 40만 명의 벵골인들이 학살당했으며, 이로 인해 벵골에서는 마라타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나바브들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다.

발라즈 바지라오는 농업을 장려하고 국가 안정화를 추진하여 내치를 다졌다. 1752년, 마라타는 아프샤르 왕조의 후신 두라니 왕조에 위협받는 무굴과 델리를 보호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1757년 초, 두라니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북인도를 침공, 델리를 점령하고 웃드나바브를 델리 통치자로 남겨두고 물러갔다. 마라타는 두라니와 적대 관계였으므로 웃드의 나바브를 공격해 물리치고 델리 및 근교를 점령했다. 1750년대 후반, 마라타는 두라니 지배하의 펀자브, 카슈미르를 공격, 점령하여 인도 아대륙 절반가량을 지배하며 데칸 지역 기반 왕조로 떠올랐다. 1758년 아톡 전투, 페샤와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페샤와르를 점령했다. 1759년, 붉은 요새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1759년, 사다시브라우 바우는 두라니 왕조가 북인도로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항군을 편성, 1760년 8월 델리를 되찾았다. 델리는 이미 잿더미였으나, 마라타 군대는 보급품을 위해 델리를 약탈했다. 사다시브라우 바우는 무굴 황제를 비스와스라오로 대체하려 했다. 1760년, 하이데라바드 군대를 격파하며 마라타 제국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1761년 제3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마라타는 두라니에게 패배했다. 아와드 나바브 슈자 웃다울라가 두라니를 지원하고 마라타 보급을 방해한 것이 패배 원인 중 하나였다. 힌두교 국가들에게 혹독했던 마라타는 지원을 받지 못했고, 이슬람 세력은 두라니를 중심으로 뭉쳤다. 마라타는 수틀레지 강 이북 펀자브 종주권을 넘기고 북인도 확장을 중지했다. 두라니도 국력 소모로 마라타와의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델리를 떠났다. 이후 마라타는 전투에 돕지 않은 민족들에게 세금을 물렸다.

제3차 파니파트 전투 이후, 마라타 제국은 4번째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 재위기에 중흥했다. 그는 마라타를 통합하고 남부로 중심을 옮겨 마이소르, 하이데라바드를 쳐 국경을 안정시키려 했다. 북부 국경에도 장군들을 보내 1770년대 초 마라타 권위를 확립했다. 그러나 1772년 마다브라오 1세가 27세로 별세하며 마라타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3. 4. 연맹기

1775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라구나트라오를 지지하여 푸네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했고, 이는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은 1782년 전쟁 전 상태로 복귀하며 끝났다.[44]

1799년, 야슈완트라오 홀카르는 홀카르 왕으로 즉위하여 푸나 전투에서 페슈와 바지라오 2세를 패배시키고 마라타 정부를 장악했다. 그는 영국과 조약을 맺고 쉰디아와 페슈와와의 분쟁을 해결하려 했으나, 1802년 영국은 바로다에 개입하여 왕위 계승자를 지원하고 새로운 마하라자와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의 최고 권력을 인정하게 했다.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1803~1805년) 이전에 페슈와 바지라오 2세도 비슷한 조약에 서명했다. 1803년 델리 전투에서의 패배는 마라타의 델리에 대한 영향력 상실로 이어졌다.[44]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은 영국 라지 형성에 마지막으로 심각한 저항을 가한 마라타의 군사적 전성기를 보여주었다.

아사예 전투(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


제3차 영국-마라타 전쟁(1817~1818년)으로 마라타는 독립을 상실하고 영국은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페슈와는 비투르로 추방되었고, 콜하푸르와 사타라를 제외한 마라타 중심지는 영국의 직접 통치하에 들어갔다. 괄리오르, 인도르, 나그푸르 등은 토후국이 되어 영국의 최고 권력하에 내부 주권을 유지했다.[44]

영국 동인도 회사와 바세인 조약에 서명하는 페슈와 바지라오 2세


제3차 영국-마라타 전쟁에서 마라타 영주들은 개별적으로 싸워 항복했다. 1818년은 인도 역사의 분수령으로, "인도의 영국 지배가 인도의 영국 지배가 되었다".[44]

영국은 수틀레지 강 이남의 현재 인도 대부분을 장악하고, 나삭 다이아몬드를 약탈하는 등 마라타 제국으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44]

1749년 12월 15일, 마라타 왕 샤후가 사망하고, 바라지 바지 라오가 재상(최고장관)으로서 왕국의 전권을 장악했다.[74] 1750년에는 왕국의 행정부를 사타라에서 푸네로 옮기고, 통치 기구의 공식적인 수장으로 군림하며 사실상 국가 원수가 되었다.[74]

바라지 바지 라오의 재임 기간 동안 마라타 군대는 북쪽으로는 라자스탄 지방, 남쪽으로는 카르나타카 지방, 동쪽으로는 벵골 지방까지 진격하여 그 영토는 사방으로 넓어져 최대가 되었고, 북쪽은 델리에서 남쪽은 툰가바드라 강까지의 광대한 판도를 가지고 있었다.[74]

제3차 파니파트 전투


1757년 1월 아마드 샤 두라니가 델리를 일시 점령하자, 발라지 바지 라오는 라그나트 라오를 델리로 보냈으나, 1758년 3월, 라그나트 라오는 펀자브라호르로 진군하여 1758년 5월, 페샤와르 전투에서 두라니 왕조 세력을 격파하고 펀자브 일대를 점령하였다.[78]

그러나 1759년 10월, 아마드 샤 두라니가 라호르에서 마라타 세력을 몰아내고, 1760년 1월 델리 근교에서 닷타지 라오 신디아를 격파한 후 델리로 입성했다.[78] 1761년 1월 14일, 제3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마라타 군은 아프간 군에 대패했다.[79]

1795년 10월 말에 재상 마다브라오가 갑자기 자결하고,[90] 1796년 12월 4일에 라그나트라오의 아들 바지라오 2세가 왕국의 재상이 되었으나,[92] 그의 통치는 명목상이었고, 난나 파드나비스가 실질적인 통치를 담당했다. 1800년 4월에 난나 파드나비스가 죽자, 바지라오 2세와 마라타 제후들 간의 관계가 현저히 악화되었다. 1802년 10월 25일, 야슈완트라오 홀카르는 푸네에서 재상과 신디아 가문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푸네를 점령했다(푸네 전투).[94] 바지라오 2세는 봄베이를 근거지로 하는 영국 쪽으로 도망쳐 같은 해 12월 31일에 군사 보호 조약 바세인 조약을 체결했다.[92]

마라타 왕국(마라타 연합)의 영토(1805년)


1803년 8월, 마라타 제후인 신디아 가문, 홀카르 가문, 보운슬리 가문과 영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여 제2차 마라타 전쟁이 시작되었다.[91] 하지만 같은 해 12월에 보운슬리 가문과 신디아 가문이 영토를 할양하는 형태로 강화를 맺었고, 홀카르 가문도 계속 싸웠지만 1805년 12월에 강화를 맺었다.

1814년, 마라타 왕국은 바도다라의 가이크워드 가문과 분쟁을 일으켰다. 1816년 9월에 바지라오 2세는 신디아 가문의 다울라트 라오 신디아와 홀카르 가문의 말하르 라오 홀카르 2세에게 영국에 공동으로 맞서 싸울 것을 제안했다.[97]

이 움직임은 곧 영국에 의해 감지되었고, 1817년 6월 13일에 바지라오 2세에게 새로운 조약인 푸네 조약을 강요했다.[97]

같은 해 11월 5일에 푸네 근교 카드키의 영국 주재관 저택을 바푸 고칼레 장군에게 공격하게 했다(카드키 전투). 여기서 제3차 마라타 전쟁이 시작되었다.[97]

같은 해 1월, 바지라오 2세는 코레가온에서 영국에 패배한 후(코레가온 전투), 세력이 감소했고, 2월에는 바푸 고칼레가 전사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3일에 바지라오 2세도 영국에 항복했고, 제3차 마라타 전쟁은 종결되었다.[92][97]

4. 행정

마라타 전쟁


마라타 연합은 전성기에 인도 아대륙의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최전성기에는 북쪽의 펀자브에서 남쪽의 하이데라바드, 서쪽의 쿠치에서 동쪽의 아우드까지 확장되었으며, 북쪽으로는 아우드 및 라자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마라타인들은 여러 지역을 정복하는 것 외에도, '차우트(Chauth)'라 알려진 일정량의 정기적인 세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한 많은 속국들을 유지했다.

마라타 연합은 하이더 알리와 티푸 술탄이 이끄는 마이소르 술탄국, 아우드 나와브, 하이데라바드 니잠, 벵골 나와브, 탈푸르 왕조의 신드 나와브, 아르콧 나와브뿐만 아니라 남인도의 폴리갈 왕국들을 정복했다. 그들은 델리, 아우드, 벵골, 비하르, 오디샤, 라자스탄의 통치자들에게서 차우트를 징수하며 인도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1752년, 아우드의 나와브 사프다르중은 아프가니스탄 로힐라족을 물리치도록 마라타인들에게 요청했다. 마라타 군대는 푸네에서 출발하여 아프가니스탄 로힐라족을 물리치고 오늘날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바렐리 지역과 모라다바드 지역 전체인 로힐칸드를 점령했다. 같은 해, 마라타인들은 와지르 사프다르중을 통해 무굴 황제와 협정을 맺었고, 무굴인들은 아제르와 아그라의 수바다르 직책 외에 도압의 차우트를 마라타인들에게 주었다. 1758년, 마라타인들은 북서부 정복을 시작하여 아프가니스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들은 아마드 샤 아브달리의 아프가니스탄군을 물리쳤다.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약 2만 5천~3만 명이었고, 아마드 샤 두라니의 아들 티무르 샤가 이끌었다.

연합 시대 동안, 마하다지 신데는 파니파트 3차 전투 이후 상실된 북인도의 대부분 지역에 대한 마라타의 지배를 부활시켰다. 델리우타르프라데시주의 대부분은 마라타 연합의 신디아의 종주권하에 있었지만, 1803~1805년의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 이후 마라타인들은 이 지역들을 영국 동인도 회사에 빼앗겼다.

5. 역대 군주

마라타 다르바르 (법정)


페슈와는 현대 총리와 같은 명목상의 직책이었다. 쉬바지는 마라타 제국의 행정 업무를 효율적으로 위임하기 위해 페슈와 직책을 만들었다. 1749년 이전 페슈와는 8~9년 동안 재직했으며 마라타 군대를 통제했다. 1749년부터 1818년 멸망할 때까지 마라타 제국의 사실상 세습 행정관이 되었다.[84]

페슈와의 통치하에 여러 주요 장군과 외교관들의 지원으로 마라타 제국은 절정에 달하여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지배했다. 마라타 제국이 1818년 영국 동인도 회사에 의해 영국 제국에 공식적으로 병합되어 멸망한 것도 페슈와 시대였다.

쉬바지에 의해 설립된 아슈타프라단(8인 의회)은 마라타 왕국을 통치한 8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의회였다. 장관 직책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따왔으며, ''페슈와'' 또는 ''판트프라단''은 총리로서 제국의 일반 행정을 담당했다. 사제인 ''판디트라오''와 사법부인 ''냐야디샤''를 제외한 다른 ''프라단''들은 상근 군 지휘관직을 맡았고, 그들의 부관들이 민정 업무를 수행했다. 후기 마라타 연합 시대에 이러한 부관들과 그들의 직원들은 페슈와 관료 조직의 핵심을 구성했다.

초기 페슈와는 다음과 같다.

이름재임 기간
트림바크 핑갈레1674년 ~ 1683년
모레슈와르 핑갈레1683년 ~ 1689년
닐칸드 바와데카르1689년 ~ 1708년
바히로지 핑갈레1708년 ~ 1711년



이하는 모두 바트 가문의 페슈와들이다. 푸네는 바트 가문의 세력권에서 페슈와의 본거지로 기능하며 제2의 수도 기능을 하였으며, 본격적으로 페슈와가 황제를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바지라오 1세 시대부터는 한동안 마라타의 수도 기능을 하였다. 바지라오 1세는 1732년 푸네에 재상궁 샤니와르 와다를 짓고 사실상 마라타의 통치자로서 군림하기도 하였다.

바트 가문의 페슈와는 다음과 같다.

이름재임 기간
발라지 비슈와나트1711년 ~ 1720년
바지라오 1세1720년 ~ 1740년
발라지 바지라오1740년 ~ 1761년
마다브라오 1세1761년 ~ 1772년
나라얀라오1772년 ~ 1773년
라구나트라오1773년 ~ 1774년
마다브라오 2세1774년 ~ 1795년
바지라오 2세1796년 ~ 1818년


5. 1. 차트라파티


  • 샤지 (1630–1680)
  • 상바지 (1657–1689)
  • 라자람 1세 (1670–1700)

사타라:

  • 샤후 1세 (재위 1708년 ~ 1749년) (별칭 샤지 2세, 상바지의 아들)
  • 라마라자 2세 (재위 1749년 ~ 1777년) (명목상, 라자람과 타라바이 왕비의 손자)
  • 샤후 2세 (재위 1777년 ~ 1808년)
  • 프라탑 싱 (재위 1808년 ~ 1839년) – 동인도 회사와 조약을 체결하여 왕국의 일부 주권을 회사에 양도함[21]

콜하푸르:

  • 타라바이 (1675–1761) (라자람의 아내) 아들 샤지 2세의 이름으로 통치
  • 샤지 2세 (1700–1714)
  • 상바지 2세 (1714–1760) – 이복형제 샤지 2세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음
  • 샤지 3세 (1760–1812) (칸윌카르 가문에서 입양)

5. 2. 페슈와



페슈와는 현대 총리와 같은 명목상의 직책이었다. 쉬바지는 마라타 제국의 성장 과정에서 행정 업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위임하기 위해 페슈와 직책을 만들었다. 1749년 이전 페슈와는 8~9년 동안 재직했으며 마라타 군대를 통제했다. 그들은 1749년부터 1818년 멸망할 때까지 마라타 제국의 사실상 세습 행정관이 되었다.[84]

페슈와의 통치하에 그리고 여러 주요 장군과 외교관들의 지원으로 마라타 제국은 절정에 달하여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지배했다. 마라타 제국이 1818년 영국 동인도 회사에 의해 영국 제국에 공식적으로 병합되어 멸망한 것도 페슈와 시대였다.

쉬바지에 의해 설립된 아슈타프라단(8인 의회)은 마라타 왕국을 통치한 8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의회였다. 장관 직책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따왔으며, ''페슈와'' 또는 ''판트프라단''은 총리로서 제국의 일반 행정을 담당했다.

사제인 ''판디트라오''와 사법부인 ''냐야디샤''를 제외한 다른 ''프라단''들은 상근 군 지휘관직을 맡았고, 그들의 부관들이 그들의 대신 민정 업무를 수행했다. 후기 마라타 연합 시대에 이러한 부관들과 그들의 직원들은 페슈와 관료 조직의 핵심을 구성했다.

초기 페슈와는 다음과 같다.

이름재임 기간
트림바크 핑갈레1674년 ~ 1683년
모레슈와르 핑갈레1683년 ~ 1689년
닐칸드 바와데카르1689년 ~ 1708년
바히로지 핑갈레1708년 ~ 1711년



이하는 모두 바트 가문의 페슈와들이다. 푸네는 바트 가문의 세력권에서 페슈와의 본거지로 기능하며 제2의 수도 기능을 하였으며, 본격적으로 페슈와가 황제를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바지라오 1세 시대부터는 한동안 마라타의 수도 기능을 하였다. 바지라오 1세는 1732년 푸네에 재상궁 샤니와르 와다를 짓고 사실상 마라타의 통치자로서 군림하기도 하였다.

바트 가문의 페슈와는 다음과 같다.

이름재임 기간
발라지 비슈와나트1711년 ~ 1720년
바지라오 1세1720년 ~ 1740년
발라지 바지라오1740년 ~ 1761년
마다브라오 1세1761년 ~ 1772년
나라얀라오1772년 ~ 1773년
라구나트라오1773년 ~ 1774년
마다브라오 2세1774년 ~ 1795년
바지라오 2세1796년 ~ 18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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