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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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셀 프티오는 1897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의사이자 정치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 등에게 탈출을 돕겠다고 속여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당했다. 그는 정신 질환으로 여러 번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군 복무 중에도 정신 붕괴 증세를 보였으며, 의사 면허 취득 후에는 시장으로 재직하며 횡령 혐의를 받기도 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유진 박사"라는 가명으로 가짜 탈출 네트워크를 운영하며 피해자들을 살해하고 금품을 갈취했으며, 1944년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끝에 26건의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의 범죄는 영화와 코믹스 등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마르셀 프티오는 1897년 1월 17일 프랑스 오세르, 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 비행 문제를 보였고 정신 질환 진단을 받았다. 여러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1915년 7월 파리의 특별 학교에서 교육을 마쳤다.[3]
1940년 프랑스 공방전 이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많은 프랑스 시민들이 독일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마르셀 프티오는 징집 대상자들에게 허위 장애 진단서를 발급해주거나 귀환한 노동자들을 치료하는 등 의사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1942년 7월, 그는 마약 과다 처방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2400FRF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2. 초기 생애 및 경력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6년 1월 프랑스 육군에 입대하였고,[3] 아신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가스 공격을 받았다. 전쟁 중 겪은 일들로 인해 정신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군수품 절도 등으로 잠시 수감되기도 했다. 여러 정신 질환 진단을 받은 끝에 장애 연금을 받고 제대했다.[3] 이후 그는 범죄 혐의를 받을 때마다 이 진단 기록을 이용하곤 했다.
전쟁 후, 프티오는 참전 용사를 위한 특별 교육 과정을 통해 빠르게 의학 교육을 마치고 1921년 12월 의학 학위를 받았다. 이후 빌뇌브쉬르욘으로 이주하여 개업의로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이미 중독성 마약을 사용했으며, 마약 공급, 불법 낙태 시술, 절도 등 의심스러운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1][4]
1926년에는 프티오와 불륜 관계였던 루이즈 들라보(Louise Delavaux)가 실종되었는데, 이는 프티오의 첫 살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같은 해 프티오는 빌뇌브쉬르욘 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재임 중 횡령 등의 문제로 1931년 시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듬해 프티오는 세니레의 부유한 지주 딸인 조르제트 라블레(Georgette Lablais)와 결혼했고,[5] 1928년 아들 게르하르트(Gerhardt)가 태어났다.[4] 시장직에서 물러난 후 잠시 욘 데파르트망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나, 1932년 전기 절도 혐의로 기소되어 의원직을 잃었다. 이 무렵 그는 파리로 이주했다.
파리에서 프티오는 카마르탱 거리 66번지에 병원을 열고 가짜 자격증 등을 사용하여 환자들을 끌어모으며 명성을 쌓았다.[4] 그러나 이곳에서도 불법 낙태 시술과 과도한 마약성 치료제 처방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1936년에는 사망 진단서를 작성할 권한이 있는 ''médecin d'état civil''(국가 공무 의사)로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도벽으로 잠시 수용되었다가 다음 해 풀려났다. 그는 이후에도 탈세를 계속했다.
2. 1. 정신 질환
마르셀 프티오는 십 대 시절부터 정신 질환 증세를 보였다. 오세르에서 우체통을 털어 공공 재산 손괴 및 절도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정신 감정 결과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혐의가 기각되었다. 이후에도 프티오의 청소년기 비행과 범죄 행위에 대한 주장이 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 사후에 과장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1914년 3월 26일, 한 정신과 의사는 프티오의 정신 질환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3]
1916년 1월, 프티오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프랑스 육군에 자원하여 입대했다.[3] 아신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가스 공격을 받은 후, 그의 정신 상태는 더욱 불안정해졌고 정신 붕괴의 징후를 보였다. 여러 요양소를 전전하던 중 군수품과 개인 물품을 훔친 혐의로 체포되어 오를레앙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플뢰리레조브레의 정신 병원에서는 다양한 정신 질환 진단을 받았으나, 1918년 6월 다시 전선으로 복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류탄으로 자신의 발을 다쳤다는 의심을 받으며 전출되었고, 결국 새로운 진단을 받아 장애 연금을 받고 제대했다.[3]
전쟁 후 파리 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한 프티오는 의사가 된 이후에도 자신의 정신 질환 진단 기록을 이용했다. 고향 근처 빌뇌브쉬르욘에서 개업의로 일하며 시장으로 당선되기도 했지만, 애인 실종, 환자들의 의문사, 마약 밀매, 불법 낙태 등 여러 범죄 혐의를 받았다. 이때마다 프티오는 군 복무 시절의 정신 장애 진단서를 제출하며 처벌을 피하려 했다. 예를 들어, 환자에게 헤로인을 불법 처방한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도 정신 장애를 이유로 무죄를 주장했다.
2. 2. 정치 경력
1926년, 프티오는 프랑스 사회당의 공천을 받아 빌뇌브쉬르욘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상대 후보의 정치 토론을 방해할 목적으로 사람을 고용하는 등 비정상적인 선거 운동을 벌였고, 결국 시장에 당선되었다.[5] 시장 재임 기간 동안 그는 공금을 횡령하는 등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4][5]
프티오의 절도 행각과 의심스러운 재정 거래에 대한 민원이 빗발치자, 욘 데파르트망의 도지사는 조사를 진행했다. 결국 그는 1931년 8월 공금 횡령 혐의로 시장직에서 해임되었고 사임했다.[1][4] 그러나 여전히 지역 사회에 지지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에게 동정적인 마을 의회 의원들도 동반 사퇴했다. 시장직에서 물러난 지 5주 후인 1931년 10월 18일, 프티오는 욘 데파르트망 의원으로 선출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5]
하지만 1932년, 마을에서 전기를 훔친 혐의로 기소되면서 의원직마저 잃게 되었다.[4] 이 시기를 전후하여 프티오는 파리로 이주하였고, 이후 정치 활동을 재개하지 않았다.
3. 제2차 세계 대전 중 범죄 행각
프티오는 자신이 독일 점령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의학적 증거 없이 독일인을 살해하는 비밀 무기 개발, 파리 전역 부비 트랩 설치, 연합군 사령관과의 회담 등을 내세웠으나,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전 미국 정보국장 존 F. 그롬바흐 대령은 프티오가 카틴 숲 학살, 페네뮌데의 독일 미사일 개발 등 민감한 정보를 제공한 정보원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6][7]
그러나 프티오가 점령 기간 동안 가장 활발히 벌인 활동은 실제로는 연쇄 살인 범죄였다. 그는 "유진 박사"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독일군이나 비시 정부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를 탈출하려는 사람들에게 접근했다. 주로 부유한 유대인, 레지스탕스 대원, 심지어 일반 범죄자들까지 그의 표적이 되었다. 프티오는 1인당 을 받고 아르헨티나 등 남아메리카로 안전하게 탈출시켜 주겠다고 속였다. 그는 피해자들을 파리 르 쉬외르 가 21번지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 뒤, 예방 접종을 핑계로 청산염과 같은 독극물을 주사하여 살해하고 금품을 빼앗았다. 시신은 초기에는 센 강에 버렸으나 나중에는 생석회를 이용하거나 소각하여 증거를 인멸했다.[3] 이러한 범행에는 공범들이 가담하여 피해자들을 유인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프티오의 "탈출 경로"는 결국 게슈타포의 의심을 사게 되었고, 게슈타포는 정보원을 보내 내사를 시도했으나 프티오에게 발각되어 실패하기도 했다. 프티오 본인은 총 63명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1944년 3월 11일, 프티오의 범죄는 이웃 주민의 신고로 발각되었다. 그의 집 굴뚝에서 악취와 함께 검은 연기가 계속 피어오르자, 화재를 의심한 이웃이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과 소방관은 지하실 난로와 집 안 곳곳에서 불에 타거나 생석회에 처리된 다수의 사람 유해를 발견했다.[3] 현장에 돌아온 프티오는 "레지스탕스가 처형한 나치 부역자들의 시신을 처리한 것"이라고 둘러대고 경찰 조사를 약속한 뒤 종적을 감췄다. 경찰은 자택 수색을 통해 살인을 위해 개조된 공간과 피해자들의 유품 등을 추가로 발견했고, 프티오는 즉시 지명 수배되었다. 이 사건은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프랑스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8]
3. 1. 가짜 탈출 네트워크
독일 점령기 동안 프티오가 가장 큰 이익을 얻은 활동은 가짜 탈출 경로 운영이었다. 그는 "유진 박사"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독일군이나 비시 정부로부터 도피하려는 사람들에게 안전한 탈출 수단을 제공하는 척했다. 프티오는 1인당 을 받고 포르투갈을 경유하여 아르헨티나나 다른 남아메리카 지역으로의 탈출을 주선한다고 주장했다. 라울 푸리에, 에드몽 핀타르, 르네-구스타브 네종데 등 세 명의 공범은 유대인, 레지스탕스 투사, 일반 범죄자 등 다양한 피해자들을 "유진 박사"에게 안내했다.
일단 피해자들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오면, 프티오는 아르헨티나 당국이 입국자에게 질병 예방을 위한 예방 접종을 요구한다고 속이고, 이 핑계로 청산염을 주사하여 살해했다. 이후 그는 피해자들의 모든 귀중품을 빼앗고 시신을 처리했다. 초기에는 시신을 센 강에 유기했으나, 나중에는 생석회에 담그거나 소각하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1941년, 프티오는 개선문 근처 21 Rue le Sueur에 있는 집을 구입했는데, 이는 앙리 라퐁이 아프베어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게슈타포의 새로운 조직원을 모집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온 시기와 일치한다.[3]
게슈타포는 이 탈출 경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처음에는 레지스탕스 활동의 일부로 의심했다. 게슈타포 요원 로베르 요드쿰은 수감자 이반 드레퓌스를 이용해 이 가짜 네트워크에 접근하려 했으나 드레퓌스는 실종되었다. 이후 다른 정보원이 성공적으로 침투하여 게슈타포는 푸리에, 핀타르, 네종데를 체포했다. 그들은 고문을 통해 "유진 박사"가 마르셀 프티오임을 자백했다. 네종데는 석방되었지만, 다른 두 명은 유대인 탈출을 도왔다는 명목으로 8개월간 수감되었다가 1944년 1월에 풀려났다. 그들은 고문 중에도 다른 레지스탕스 조직원을 밀고하지 않았는데, 실제로는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프티오는 게슈타포가 보낸 스파이를 제거하며 수사망을 피하기도 했다.
프티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박해를 두려워하는 부유한 유대인이나 대독 활동가, 심지어 암흑가의 갱 단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범행을 지속했다. 그는 자신의 자백에 따르면 총 63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 가짜 탈출 네트워크는 1944년 3월 11일, 프티오 자택의 굴뚝에서 악취와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는 이웃의 신고로 발각되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과 소방대는 지하실에서 불에 탄 다량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때 용무를 마치고 돌아온 프티오는 경찰에게 "레지스탕스가 처형한 대독 협력자의 시체 소각을 도운 것"이라고 변명했고, 경찰은 이에 납득하여 며칠 뒤 경찰서에서 다시 사정을 설명하겠다고 말한 채 그대로 실종되었다. 경찰의 자택 수색을 통해 살인을 위해 교묘하게 설계된 방과 생석회 구덩이, 희생자들의 여행 가방과 사유물 등이 발견되면서 그의 범죄 행각 전모가 드러났다. 저택에서의 연쇄 살인 참상을 확인하고 프티오를 지명 수배했지만,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3. 2. 살인 수법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프티오는 박해를 피해 국외 탈출을 원하는 사람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주로 부유한 유대인에게 접근하여, 1인당 25000FRF를 받고 안전한 남미 등으로의 탈출을 주선해주겠다고 약속하며 파리 뤼쉘 거리 21번지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유인했다.
프티오의 집은 교묘하게 설계된 살인 시설이었다. 진료실 안쪽에는 삼각형 모양의 작은 밀실이 있었는데, 이 방의 벽은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방음 처리가 되어 있었다. 방 안의 한쪽 벽에는 문과 호출 벨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아무 곳으로도 통하지 않는 가짜였고, 진찰실 쪽 벽에는 쇠사슬과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반대편 벽에는 작은 엿보기 구멍이 설치되어 있어, 프티오는 이 구멍을 통해 방 안의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다.
프티오는 피해자들을 이 밀실로 유인한 뒤 문을 잠그고 독가스를 주입하여 살해했다. 그는 엿보기 구멍을 통해 피해자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그의 가학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살해 후에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시신을 지하실의 석탄 난로에서 소각하거나, 집 뒤뜰에 파놓은 구덩이에 생석회와 함께 묻었다.[3] 그의 집에서는 최소 10명분의 유해가 발견되었으며, 희생자들의 여행 가방, 옷가지 등 유품도 다수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부유한 유대인뿐만 아니라, 나치에 저항하던 지식인이나 파리 암흑가에서 활동하던 갱 등 다양했다. 이러한 범행은 점령 당국인 게슈타포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게슈타포는 스파이를 보내 프티오를 내사하려 했으나, 프티오는 이를 눈치채고 스파이를 살해하는 등 추적을 교묘하게 피해 가며 범행을 계속했다. 프티오 본인은 총 63명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4. 체포 및 재판
1944년 파리 해방 이후, 프랑스 국내군(FFI) 대위로 위장 활동하던 프티오는 신원이 발각되어 1944년 10월 31일 체포되었다.[1][2] 라 상테 감옥에 수감된 그는 재판 과정에서 살해한 이들이 나치 협력자였다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으나[1][2],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결국 1946년 5월 18일, 26건의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며[1], 같은 해 5월 25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1][2]
4. 1. 도주와 위장
1944년 3월 11일, 자택에서 다량의 시체가 발견된 후 경찰이 출동하자 프티오는 "레지스탕스가 처형한 나치 독일 협력자의 시체 소각을 도운 것"이라고 변명하고는 현장에서 사라졌다. 경찰은 즉시 그를 지명 수배했지만,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프티오는 이후 7개월 동안 친구들 집에 숨어 지내며, 자신이 독일인과 밀고자를 살해했기 때문에 게슈타포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환자였던 조르주 레두테(Georges Redoutéfra)와 함께 지내면서 수염을 기르고 다양한 가명을 사용하며 신분을 위장했다.
1944년 파리 해방 기간 동안, 프티오는 "앙리 발레리(Henri Valérifra)"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봉기에 참여했고 프랑스 국내군(FFI)에 합류했다. 그는 FFI에서 방첩 및 포로 심문을 담당하는 대위 계급까지 올랐다.
파리 해방 후, 신문 ''레지스탕스''가 프티오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자, 프티오는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해당 기사 내용이 거짓이라는 반박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의 필적을 통해 경찰은 "앙리 발레리 대위"가 프티오이며, 그가 아직 파리에 있다는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앙리 발레리 대위"는 프티오 수색 작전에 동원된 인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결국 1944년 10월 31일, 프티오는 파리 메트로 역에서 그를 알아본 사람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그의 소지품에서는 권총 1정, , 그리고 50개의 위조 신분증 세트가 발견되었다.
4. 2. 재판 과정과 최후
라 상테 감옥에 수감된 프티오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이 죽인 사람들은 프랑스의 적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1944년 2월 21번지 르 쉬에르가(Rue le Sueur)에서 발견된 시체 더미는 자신의 레지스탕스 "네트워크" 구성원들에게 살해된 나치 협력자들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 프티오는 주요 레지스탕스 단체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그가 언급한 일부 단체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가 주장한 어떤 활동에 대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검찰은 결국 그를 최소 27건의 살인 혐의로 기소했고, 그가 범죄를 통해 얻은 이득은 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프티오의 재판은 1946년 3월 19일 팔레 드 쥐스티스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는 총 135건의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유명 변호사 르네 플로리오가 변호를 맡아 검사와 피해자 유족 측 변호인단과 맞섰다. 재판 과정에서 프티오는 검사들을 조롱하고, 피해자들이 협력자 또는 이중 간첩이었다고 주장하거나, 일부는 새로운 이름으로 남미에서 잘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발견된 27명의 시신 중 19명을 살해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이들은 독일인과 협력자들이었으며, 자신이 총 63명의 "적"을 살해한 활동의 일부였다고 강변했다. 공판 중에는 웅변으로 자신의 범행을 정당화하려 하거나 때로는 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변호인 플로리오는 프티오를 레지스탕스 영웅으로 묘사하려 했으나, 판사와 배심원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1946년 5월 18일, 프티오는 26건의 살인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1946년 5월 25일, 단두대의 해방 장치 문제로 며칠 연기된 끝에, 프티오는 라 상테 감옥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시신은 이브리 묘지에 묻혔다.
5.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마르셀 프티오의 범죄 행각은 여러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 코믹스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루어졌으며, 로베르타 케이건의 도서 시리즈 ''아우슈비츠 쌍둥이''(The Auschwitz Twins)에서도 중요한 등장인물로 나온다.
5. 1. 영화
프티오의 범죄 행각, 특히 1941년부터 1944년 사이 유대인을 살해하고 사기적인 탈출 네트워크를 운영한 그의 삶은 1990년 프랑스 영화 ''닥터 페티오''에서 다루어졌다. 이 영화에서 배우 미셸 세로 (Michel Serrault)가 프티오 역을 연기했다.5. 2. 코믹스
스테파니 필립스가 글을 쓰고 딘 코츠가 그림을 그린 ''파리의 학살자''(The Butcher of Paris)는 2019년에 출간된 5개의 이슈로 구성된 코믹스 미니시리즈이다. 이 작품은 프티오에 대한 수사, 체포, 그리고 최종 유죄 판결 과정을 극화하여 다루었다.참조
[1]
서적
100Most Infamous Criminals
Metrobooks
[2]
웹사이트
Dr. Marcel Petiot
http://www.crimelibr[...]
[3]
서적
Death in the City of Light
https://archive.org/[...]
Crown
[4]
뉴스
Crime Library: Serial Killers: Dr. Marcel Petiot
http://www.trutv.com[...]
2013-06-11
[5]
서적
Death in the City of Light
Crown
[6]
서적
The Pond: Running Agents for State, War, and the CIA
https://www.cia.gov/[...]
2011-11-10
[7]
뉴스
'The Pond': US Spy Agency that Operated Before CIA Revealed in Classified Documents Disclosure
http://www.huffingto[...]
Huffingtonpost.com
2010-07-29
[8]
서적
Death in the city of light : the serial killer of Nazi-occupied Paris
https://archive.org/[...]
Crown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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