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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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차시 성당은 13세기 중반 벨라 4세에 의해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부다페스트의 역사적인 성당이다. 1479년 마차시 1세의 증축 이후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헝가리 왕국의 대관식과 왕실 결혼식 등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었다. 오스만 제국 지배 기간에는 모스크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이후 바로크 양식으로 복원되었고, 19세기 말 슐레크 프리제슈에 의해 고딕 양식으로 복원되었다. 현재는 부다페스트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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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시 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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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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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 부다의 성모 마리아 교회 |
헝가리어 명칭 | 부다바리 너지볼도고소니-템플롬 (Budavári Nagyboldogasszony-templom) |
다른 이름 | 마차시 성당 (Mátyás-templom) |
위치 | 헝가리, 부다페스트 |
종파 | 가톨릭 |
이전 종파 | 해당 없음 |
교구 | 에스테르곰-부다페스트 대교구 |
지위 | 본당 |
기능적 지위 | 운영 중 |
웹사이트 | 마차시 성당 공식 웹사이트 |
세계유산 정보 | |
유산 명칭 | 다뉴브 강 연안, 부다 성 지구 및 안드라시 거리를 포함한 부다페스트 |
등재 연도 | 1987년 |
확장 연도 | 2002년 |
ID | 400 |
기준 | 문화 (ii, iv) |
면적 | 473.3 ha |
건축 | |
건축가 | 알 수 없음 |
건축 양식 | 알 수 없음 |
완공 시기 | 11세기, 15세기 (재건축) |
재료 | 알 수 없음 |
크기 | |
길이 | 알 수 없음 |
너비 | 알 수 없음 |
높이 | 알 수 없음 |
역사 | |
설립 시기 | 11세기 |
설립자 |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
과거 이름 | 알 수 없음 |
추가 정보 | |
담당 사제 | 쉴레이 라슬로 (Süllei László) |
오르간 연주자 | 호크 베르털란 (Hock Bertalan) |
종 | 3개 (존속) |
2. 역사
마차시 성당은 7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부다페스트와 헝가리의 영욕을 함께 한 상징적인 건물이다. 13세기 중반 헝가리의 벨라 4세에 의해 고딕 양식으로 처음 지어졌을 때는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불렸으나, 15세기 말 마차시 1세의 증축 이후 그의 이름을 따 현재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하면서 성당은 암흑기를 맞는다. 1541년 부다가 함락되자 성당은 모스크로 바뀌었고, 내부의 화려한 프레스코화는 회칠로 덮이고 성물들은 약탈당했다.
1686년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신성 동맹군이 부다를 탈환하면서 성당은 극적인 사건을 겪는다. 포격으로 성당 벽이 무너지면서 벽 속에 숨겨져 있던 성모상이 나타났고, 이에 오스만 군의 사기가 꺾여 전투에서 패배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마차시 성당은 '성모 마리아의 기적이 일어난 곳'으로 불리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후 성당은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으나,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슐레크 프리제슈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통해 원래의 고딕 양식을 되찾게 된다. 슐레크는 졸나이제 타일을 사용한 지붕 등 독창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오늘날 마차시 성당은 부다페스트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큰 피해를 입었으나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복구되었으며, 1994년 폭탄 테러로 창문이 파손되기도 했다.
마차시 성당에서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오스트리아의 카를 4세 등 헝가리 국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으며, 프란츠 리스트의 대관식 미사가 초연되기도 했다.
2. 1. 초기 역사 (13세기 ~ 15세기)
13세기 중반, 헝가리의 벨라 4세에 의해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건축되었다. 부다 성내에 건축되었던 초기에는 성모 마리아 성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나, 1479년에 남쪽 탑의 건축을 포함한 증축을 명한 마차시 1세의 이름을 따라 오늘날에는 마차시 성당이라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7][8]헝가리의 벨라 4세는 몽골의 유럽 침공 이후인 1255년에서 1269년 사이에 더 오래되고 작은 교회를 3개의 회랑을 가진 웅장한 바실리카로 대체했다. 건축의 첫 번째 단계(1255–1260) 동안, 빌라르 드 오네쿠르의 지휘 아래에 주요 신사와 보조 신사가 건설되었다. 부다의 주요 교회의 첫 번째 단계의 건축은 리옹 대성당과 가장 가깝다.
14세기 후반에 고딕 할레 교회로 재건되었다. 건물 전체가 성숙한 고딕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1370년 헝가리의 루이 1세는 남서쪽에 있는 상징적인 마리아 문 건설을 시작했다.[9]
마차시 코르비누스 국왕의 통치 기간에 중세 시대의 번영을 누리며 절정에 달했다. 국왕은 헝가리에서 가장 훌륭한 고딕 건축물 중 하나인 남서쪽 종탑을 건설했다.[14] 마차시의 문장에 따르면 1384년에 붕괴된 남쪽 탑은 1470년에 재건되었다.[5]
마차시는 이 성당에서 두 번의 결혼식을 올렸다. 1463년에는 포데브라디의 캐서린, 1476년에는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했다.[5]
2. 2. 오스만 제국 지배와 그 이후 (16세기 ~ 18세기)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이 오스만 제국에 패배한 후, 헝가리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에 점령되었다. 1541년 오스만 제국이 부다를 점령하면서 마차시 성당은 주요 모스크로 사용되었다.[14] 성당 내부의 화려한 프레스코화는 흰색으로 칠해졌고, 비품들은 약탈당했다.[9]1686년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반터키 신성동맹이 부다를 포위했을 때, 성당의 벽이 파괴되면서 벽 속에 숨겨져 있던 마리아 상이 발견되었다. 이 마리아 상이 기도 중이던 오스만 제국 이슬람교도들 앞에 나타나자 부다 주둔군의 사기가 꺾였고, 결국 오스만 제국의 지배는 종결되었다.[5]
오스만 제국 지배가 끝난 후, 성당은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10]
2. 3. 19세기 복원과 현대 (19세기 ~ 현재)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의 결과로, 1867년에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 황후가 헝가리 국왕과 왕비로 즉위하는 대관식이 거행되었다.[5] 이 때, 프란츠 리스트의 《대관식 미사》가 처음으로 연주되었다.[5]19세기 말, 건축가 슐레크 프리제슈에 의해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5] 슐레크는 13세기 원래 설계도를 바탕으로 복원하면서도, 초기 고딕 건축 요소들을 많이 되살려냈다.[5] 그는 헝가리의 대표적인 도자기 제조사인 졸나이에서 제작한 다이아몬드 모양의 기와 지붕과 괴물석상 물받이 홈통 등 독창적인 요소들을 추가하여, 완공 당시에는 큰 논란을 일으켰다.[5] 하지만 오늘날에는 부다페스트의 가장 개성적인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성당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9] 1944-1945년 연합군의 부다페스트 포위 공격 동안 건물이 심하게 손상되었다. 지하 묘지는 독일군이 야전 주방으로 사용했고,[5] 도시 함락 후, 소련군은 성소를 말의 마구간으로 사용했다.[12][5] 전쟁 피해는 1950년에서 1970년 사이에 헝가리 정부에 의해 복구되었다.
1916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카를 4세와 부르봉-파르마의 지타 황후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5]
1936년, 부다 성 재탈환 250주년을 기념하여, 미켈레 다스테 남작을 기리는 헝가리어 및 이탈리아어 비문이 오른편 앱스 벽에 새겨졌다.
1994년에는 폭탄 테러로 인해 교회 창문 16개가 손상되기도 했다.[5]
3. 건축 양식
13세기 중반, 벨라 4세에 의해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처음에는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불렸으나, 1479년 남쪽 탑을 증축한 마차시 1세의 이름을 따 오늘날까지 마차시 성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541년부터 145년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성당은 암흑기를 겪었다. 오스만 제국은 부다를 점령한 후 성당을 주요 모스크로 사용했으며, 내부의 프레스코화는 하얗게 칠해지고 비품은 약탈당했다.
1686년 오스만 제국이 축출된 후,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성당을 복구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세기 말에 슐레크 프리제슈가 복원 작업을 맡아 원래의 웅장한 모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슐레크는 13세기 설계도를 바탕으로 성당을 복원하면서도, 졸나이제 다이아몬드 모양 기와 지붕과 가고일 물받이 등 자신만의 요소를 추가했다. 이러한 복원 방식은 당시에는 논란을 일으켰지만, 현재는 부다페스트의 개성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19][20]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1960년대에 복원되었다.
3. 1. 고딕 양식
13세기 중반, 벨라 4세에 의해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불렸으나, 1479년 남쪽 탑을 증축한 마차시 1세의 이름을 따 마차시 성당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9]13세기에 세워진 부다의 첫 교구 본당은 14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헝가리의 벨라 4세는 몽골의 유럽 침공 이후인 1255년에서 1269년 사이에 낡고 작은 교회를 3개의 회랑을 가진 웅장한 바실리카로 대체했다. 건축의 첫 단계(1255–1260) 동안, 빌라르 드 오네쿠르의 지휘 아래 주요 신사와 보조 신사가 건설되었다. 이 건축은 리옹 대성당과 가장 가깝다. 장인 그룹은 체코 티슈노프의 시토회 수도원 건축가들로, 몽골의 유럽 침공 이후 헝가리의 벨라 4세의 사촌인 보헤미아의 아그네스의 요청으로 헝가리에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1260년에서 1269년 사이에 두 번째 장인 그룹이 건축을 완료했다. 이들의 작업은 북부 프랑스 종교 건축의 영향을 받았다. 이 그룹의 다른 작품으로는 헝가리 쇼프론의 프란체스코회 케치케 교회와 오스트리아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이 있으며, 부다페스트의 도미니코회 수도원, 마르기트 섬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헝가리의 벨라 4세의 딸인 성 아르파드 가문의 마르가리타가 거처하던 곳이다.
부다 성의 성모 승천 교회는 헝가리에서 가장 초기이자 가장 완벽한 고딕 양식의 교회 건축물로 평가받는다.[5]
14세기 후반에 고딕 할레 교회로 재건되었다. 건물 전체가 성숙한 고딕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1370년 헝가리의 루이 1세는 남서쪽에 마리아 문 건설을 시작했다.[9] 이 문과 가장 유사한 것은 뉘른베르크의 성 로렌스 교회 정문이다. 루이 1세 통치 기간 동안 교회의 바실리카 공간을 완전히 재설계하기 시작했다. 측면 회랑의 아치는 주 회랑의 높이까지 올려졌고, 높은 벽에는 풍부한 석조 격자무늬가 있는 거대한 창문이 설치되어 밝고 통풍이 잘 되는 홀을 만들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 재위 기간 동안 측면 제단이 확장되었고 팔각형 고딕 종결부로 제공되었다.[5] 건설의 마지막 단계에서 프라하 팔러 작업장의 장인들도 참여했다.[5] 1412년과 1433년 사이에는 니콜라스 2세 가라이의 요청으로 북쪽 제단 옆에 귀족 가라이 가문의 매장 예배당을 만들었다.[9][5]
마차시 코르비누스 국왕 통치 기간에 남서쪽 종탑이 건설되었다.[14] 1470년에 재건된 남쪽 탑은 헬멧 부분이 파괴되었지만, 19세기 말에 석재를 완전히 교체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마차시는 또한 교회의 남쪽 성소 근처에 왕실 기도실을 세웠지만, 터키 점령 기간에 완전히 파괴되었다.[5]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지휘 아래, 1874년부터 1896년까지 건축가 슐레크 프리제스의 지휘 하에 대대적인 재건 공사가 진행되었다. 교회는 원래 13세기 계획에 따라 복원되었지만, 많은 초기 고딕 건축 요소가 발견되었다. 슐레크는 다이아몬드 패턴의 지붕 타일과 가고일이 있는 첨탑 등 새로운 모티프를 추가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슐레크는 원래의 건축적 해법을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모든 교회에서 바로크식 연결부를 제거하고 고대 연결부를 복원하려 했지만, 손상된 부분과 표면을 완전히 복원했다. 따라서 지그문드의 측면 성역은 철거되었고 원래의 더 단순한 폐쇄가 복원되었다. 헝가리의 러요시 1세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마리아 문이 다시 열렸고, 마차시 코르비누스 종탑이 개조되었다. 건축가는 단서가 없는 곳마다 자신의 디자인의 새로운 요소를 도입했다. 그는 마리아 문 앞에 현관을 세웠고, 파괴된 가라이 예배당 대신 새로운 성 스테판 예배당을 만들었으며, 북쪽 본당을 따라 있는 바로크 양식의 측면 예배당을 네오 고딕 양식으로 개조했다. 오래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남쪽 탑을 장식했고, 북쪽 탑에는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꼭대기가 장착되었고, 두 탑 사이에 박공이 설치되었다. 그는 북쪽에서 주 앱스까지 열리는 두 개의 성물실과 왕실 오라토리를 건설했다. 1780년에 지어진 지하 묘소도 자유로운 네오 고딕 양식으로 개조되었다.[5]
버르탈란 세켈리와 카로이 로츠는 슐레크와 함께 내부 장식 및 가구를 감독했다.[9]
남서쪽 성모 마리아 문은 15세기 초의 몇 안 되는 오리지널 중세 유물 중 하나이다.[9][5]
3. 2. 바로크 양식
1686년 오스만 제국 축출 이후, 모스크로 변했던 성당은 바로크 양식으로 복구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그 다음에는 예수회가 성당을 소유하며 복원을 진행했다.[10] 1690년 헝가리 팔라티누스였던 에스테르하지 팔 1세 공작이 새로운 바로크 양식의 주 제단을 건설했고, 1696년 정문 앞에 로비가 건설되었다. 같은 해, 마차시 종탑에는 바로크 양식의 양파 돔이 설치되었다.[10] [5] 1707년 로레토 예배당이 건설되었고, 1719년 종탑이 추가되었으며, 측면 예배당과 새로운 성물실도 세워졌다.그러나 이러한 바로크 양식의 변형은 중세의 많은 요소를 훼손시켰고, 마차시 종탑의 몇몇 창문만이 원래 교회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었다. 1773년 예수회 해산 이후에는 부다 시의회가 교회를 소유하게 되었다.[5]
3. 3. 슐레크 프리제슈의 추가 요소
슐레크 프리제슈는 19세기 말 마차시 성당 복원 과정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요소들을 추가했다. 대표적인 것이 헝가리의 유명 도자기 제조사인 조르나이제(製) 다이아몬드 모양의 기와 지붕이다. 이 화려한 기와는 성당 외관에 독특한 아름다움을 더했다.또한, 슐레크는 괴물 형상의 물받이 홈통을 첨탑에 설치하여 성당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부여했다.[19][20] 이러한 요소들은 원래의 고딕 건축 양식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슐레크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추가 요소들은 복원 작업 완료 당시에는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4. 내부 구조
마차시 성당은 13세기 중반 러요시 4세에 의해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처음에는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불렸으나, 1479년 남쪽 탑을 증축한 머자시 1세의 이름을 따 현재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700년 역사를 지닌 이 성당은 부다의 풍요로움과 헝가리인의 의지처, 그리고 때로는 비극적인 역사를 상징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를 포함한 역대 헝가리 국왕의 대관식과 머자시 1세의 두 번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1541년부터 145년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성당은 암흑기를 겪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을 무너뜨린 오스만 제국은 성당의 보물을 약탈했고, 1541년 부다 점령 후 성당을 주요 모스크로 만들었다. 화려한 프레스코화는 하얗게 칠해지고, 내부 비품은 약탈당했다.
1686년, 얀 3세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합스부르크 제국 연합군의 부다 포위 당시, 성당 벽이 파괴되면서 벽 안에 숨겨져 있던 마리아상이 나타났다. 이 기적적인 사건으로 오스만 제국군의 사기가 꺾여 부다는 함락되었고, 성당은 "성모 마리아의 기적이 있었던 장소"로 불리게 되었다.
1686년 오스만 제국 축출 이후 바로크 양식으로 복구하려 했으나, 대부분 불충분했다. 19세기 말 건축가 슐레크 프리제시(Frigyes Schulek)가 복원 작업을 맡아 원래의 13세기 설계대로 복원하고, 초기 고딕 양식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슐레크는 졸나이제 다이아몬드 모양 기와 지붕과 가고일 물받이를 얹은 첨탑 등 새로운 요소를 추가하여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오늘날 부다페스트의 가장 개성적인 관광 명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9][20]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큰 손상을 입었으나, 1960년대에 복원되었다.
4. 1. 박물관
마차시 성당에는 교회 미술관이 있으며, 중세 지하 묘지에서 시작하여 성 이스트반 예배당으로 이어진다. 미술관에는 다수의 성유물과 중세 석조 조각품, 그리고 헝가리 왕관과 대관 보석의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5. 헝가리 역사와의 연관성
마차시 성당은 헝가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1015년 성 이슈트반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는 전승이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5] 현재 건물은 13세기 후반 몽골의 침입으로 파괴된 후 재건된 것이다.[6] 처음에는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성모 교회"로 불렸으나, 19세기부터 마차시 왕의 이름을 따서 마차시 성당으로 불리게 되었다.[7][8]
헝가리의 벨라 4세는 몽골의 유럽 침공 이후 교회를 웅장한 바실리카로 재건축했다. 건축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는데, 첫 번째 단계는 빌라르 드 오네쿠르의 지휘 아래 리옹 대성당과 유사한 양식으로 지어졌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북부 프랑스 종교 건축의 영향을 받았다.
14세기 후반, 헝가리의 루이 1세는 교회를 고딕 양식으로 재건하고, 상징적인 마리아 문을 건설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 재위 기간에는 측면 제단이 확장되고 팔각형 고딕 종결부로 마감되었다.
마차시 코르비누스 왕 통치 시기에 마차시 성당은 중세 시대의 번영을 누렸다. 마차시는 남서쪽 종탑을 건설하고 왕실 기도실을 세웠다.
터키 점령 기간 동안 성당은 주요 모스크로 사용되었고, 많은 부분이 파괴되거나 변형되었다. 1686년 부다 탈환 이후 예수회가 성당을 관리하며 헝가리인의 성모 숭배와 성스러운 왕들에 대한 경배를 통해 헝가리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1713년에는 성당 앞에 삼위일체 기둥이 세워졌다.[15]
제2차 세계 대전 중 큰 피해를 입었으나, 1950년부터 1970년 사이에 헝가리 정부에 의해 복구되었다.[5][13] 1994년에는 폭탄 테러로 창문이 손상되기도 했다.[5]
1999년, 교회는 가톨릭 교회에 교구 재산으로 이양되었고, 2005년부터 2015년까지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
마차시 성당은 단순한 종교 건물을 넘어 헝가리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벌어진 장소였다.
5. 1. 대관식
13세기 중반, 벨러 4세에 의해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마차시 성당은 역대 헝가리 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된 장소이다.1270년 벨러 4세에 의해 재건된 후 곧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의 장이 되었다. 1279년에는 교황 대리 펄뢰프 페르메이와 에스테르곰 대주교 로도메르의 주도로 국가 공의회가 열렸으며, 당시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가 이들을 초청했다.[5]
1301년 이후 왕위 쟁탈전의 여파로, 체코 왕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우스 3세[5]와 바이에른 왕 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가 이곳에서 헝가리 왕으로 추대되었고, 1309년 또 다른 국가 공의회에서 교황 사절 추기경 젠틸레 포르티노 다 몬테피오레와 에스테르곰 대주교 토마시가 새로운 왕관을 가지고 앙주 왕 헝가리의 카로이 1세에게 대관식을 거행했다.[5]
마차시 코르비누스가 왕위에 올랐을 때인 1458년, 헝가리 왕관은 헝가리에 없었다. 그래서 마차시는 프라하에서의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왕관 없는 대관식" 형태로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그의 통치를 시작했다.
마차시 성당은 마차시 1세의 두 번의 결혼식(1463년 포데브라디의 캐서린, 1476년 나폴리의 베아트리체)[5]이 거행된 장소이기도 하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의 절정으로 추기경-에스테르곰 대주교 야노시 시모르는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 황후에게 헝가리 왕관을 씌워 헝가리 국왕으로 대관식을 거행했다.[5] 이 때 프란츠 리스트의 ''대관식 미사''가 처음으로 연주되었다.[5]
1916년 12월 30일, 오스트리아의 카를 4세와 그의 아내 부르봉-파르마의 지타는 추기경-에스테르곰 대주교 야노시 체르노흐에 의해 헝가리 왕관을 쓰고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5. 2. 왕실 행사
마차시는 이 성당에서 두 번 결혼식을 올렸다. 1463년에는 포데브라디의 캐서린, 1476년에는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했다.[5] 남쪽 문은 '신부의 문'이라고 불리며, 이 결혼을 기억하게 한다.[5]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를 포함하여 거의 역대 헝가리 국왕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의 절정으로 추기경-에스테르곰 대주교 야노시 시모르는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 황후에게 헝가리 왕관을 씌워 헝가리 국왕으로 대관식을 거행했다.[5] 이 기념식에서는 프란츠 리스트의 ''대관식 미사''가 처음으로 연주되었다.[5]
1916년 12월 30일, 오스트리아의 카를 4세와 그의 아내 부르봉-파르마의 지타는 추기경-에스테르곰 대주교 야노시 체르노흐에 의해 헝가리 왕관을 쓰고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5. 3. 종교적 중요성
13세기에 이 자리에 세워진 부다의 첫 번째 교구 본당은 14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성당의 보물은 브라티슬라바로 옮겨졌다.[5] 1541년 오스만 제국이 부다를 점령하면서 마차시 성당은 주요 모스크가 되었고, 내부의 프레스코화는 흰색으로 칠해지고 비품은 약탈당했다. 벽면은 이슬람 고유의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되었다.1686년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반터키 신성동맹에 의한 부다 포위전 중, 성당 벽이 파괴되면서 벽 속에 숨겨져 있던 마리아 상이 발견되었다. 기도 중이던 오스만 제국 이슬람교도들 앞에 마리아 상이 나타나자 부다 주둔군의 사기가 붕괴되었고, 이 날 부다는 함락되어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종결되었다.[5] 이로 인해 마차시 성당은 "성모 마리아의 기적이 있었던 장소"라고 불리게 되었다.
1686년, 헝가리의 라디슬라우스 2세의 마지막 공격 전, 그가 기증한 서약 조각상 앞에서 그려진 벽이 큰 폭발로 무너졌고, 오랫동안 잊혀졌던 헝가리인의 성모 조각상이 주요 모스크(현재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기도하는 튀르크인 앞에서 나타났다. 승리의 성모 조각상은 감사 행렬에서 부다의 거리를 행진했다.[5] 이 사건을 기억하며, 성당은 여전히 이 성상의 예배 장소이다.
6.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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