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의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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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사의 옥은 1830년대 덴포 시대 에도에서 란가쿠(네덜란드 학문)의 융성과 함께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을 탄압한 사건이다. 와타나베 가잔, 다카노 조에이 등이 중심이 된 란가쿠 학자들은 '만사'로 불리며, 막부의 관학주의와 대립했다. 모리슨 호 사건, 무술몽어 유포 등을 계기로 토리이 요조가 주도하여 가잔, 조에이 등을 체포, 투옥했다. 이 사건으로 가잔은 자결하고 조에이는 탈옥 후 체포되어 사망하는 등, 개국에 대한 기대와 쇄국 정책의 갈등이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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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의 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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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명칭 | 만사의 옥 (蛮社の獄) |
다른 이름 | 반샤노고쿠 (일본어: 蛮社の獄) 만사지옥 (漫射之獄) |
발생 시기 | 1839년 |
발생 장소 | 일본 에도 시대 |
원인 | 모리야마 다카유키의 밀고 |
결과 | 관련자 탄압 및 처벌 |
사건 배경 | |
시대적 상황 | 19세기 초 일본, 쇄국 정책 하에 서양 학문 (난학) 연구 확산 |
주요 인물 | 다카노 초에이 와타나베 가잔 미우라 게이조 오카다 겐고 고세키 산에이 |
사건 경과 | |
발단 | 1837년 모리슨 호 사건 이후, 쇼군의 서양 세력에 대한 강경 대응 |
모리야마 다카유키의 밀고 | 쇼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난학자들의 모임 ("만사")을 밀고 |
탄압 시작 | 1839년, 난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및 투옥 |
주요 인물 처벌 | 다카노 초에이: 자살 (탈옥 후) 와타나베 가잔: 할복 미우라 게이조, 오카다 겐고, 고세키 산에이 등: 투옥 및 처벌 |
사건 영향 | |
난학 연구 위축 | 막부의 탄압으로 인해 난학 연구 활동이 크게 위축됨 |
사회적 비판 의식 억압 | 막부의 권위 강화 및 비판 세력에 대한 탄압 |
막부의 쇠퇴 가속화 | 지식인들의 불만 증가 및 막부의 통치력 약화 |
참고 문헌 |
2. 배경
덴포 시대(1830년대) 에도에서는 란가쿠(蘭學, 네덜란드 학문)가 융성하여 새로운 지식 연구와 교류가 활발해졌다. 와타나베 가잔, 다카노 조에이, 오제키 산에이 등은 이러한 흐름을 이끌었으며, 이들의 모임은 '만사'(蛮社) 등으로 불렸다.
한편, 막부의 교육 정책을 담당하던 하야시 가문 출신의 토리이 요조 등 보수 관료들은 주자학 중심의 기존 질서를 중시하며 란가쿠에 대해 경계심을 가졌다. 특히 하야시 가문 출신이면서 란가쿠에 깊이 관여한 와타나베 가잔은 이들의 반감을 샀다. 이러한 새로운 학문적 흐름과 기존 체제 유지 세력 간의 갈등은 만사의 옥이 발생하는 주요 배경이 되었다.[5]
2. 1. 란가쿠의 융성과 막부의 경계
덴포 시대(1830년대) 에도에서는 란가쿠(蘭學, 네덜란드 학문)가 크게 발달하여 새로운 지식을 연구하고 교류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는 주로 의료 분야에 종사하던 기존의 란포(蘭方) 의사들과는 다른 흐름을 형성했다. 와타나베 가잔은 이러한 흐름의 중심 인물이었고, 다카노 조에이와 오제키 산에이는 가잔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 그룹은 국학자들 사이에서 '만사'(蛮社, 남만 즉 서양 학문을 배우는 동호회) 또는 '만학사중'(蛮学社中)으로 불렸다.훗날 만사의 옥에서 탄압을 주도하게 되는 토리이 요조는 막부의 교육 정책을 대대로 담당해 온 하야시 가문 출신이었다. 당시 막부는 유학, 특히 주자학만을 정통 학문으로 인정하고 다른 학설은 배척하는 정책을 유지했다. 하야시 가문은 이러한 관학(官學) 중심주의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으며, 스스로를 교육계의 정점이자 체제 수호자로 여겼다. 이들에게 란가쿠는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고, 하야시 가문의 문하생이면서도 란가쿠에 심취하여 많은 유학자를 란가쿠로 이끈 와타나베 가잔 역시 부정적인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통설에 대해 역사학자 다나카 히로유키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토리이 요조의 생부인 하야시 슛사이가 유학자나 문인들이 란학자들과 교류하는 것에 대해 관용적이었으며 간섭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하야시 슛사이는 모리슨 호 사건 당시, 막부 평정소에서 다수를 차지했던 외국 선박 격퇴 주장에 반대하고 표류민 수용을 주장하는 등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또한 토리이 요조 역시 단순히 란학을 혐오한 것이 아니라, 타키 야스요시가 란학 서적 출판 중지를 건의했을 때 반대하는 등 란학의 실용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고 지적한다. 다나카는 하야시 가문의 셋째 아들이었던 토리이 요조가 토리이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 출세했기 때문에, 하야시 가문보다는 토리이 가문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더 강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와타나베 가잔의 친구였던 기슈 번의 유학자 엔도 카츠스케는 구황 작물이나 해안 방어 등에 관한 지식 교환을 목적으로 '상치회'(尚歯会)라는 학문 모임을 만들었다. 가잔, 조에이, 산에이가 이 모임의 주요 회원이었기 때문에 후세에는 '만사 = 상치회', '만사의 옥 = 상치회 탄압'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하지만 다나카 히로유키에 따르면, 상치회 회원 중 만사의 옥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가잔과 조에이뿐이었다. 이들의 혐의는 해외 도항 시도, 막부 정책 비판 등이었으며, 모임을 주최한 엔도를 비롯한 다른 회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따라서 만사의 옥을 상치회에 대한 탄압으로 보는 것은 오해라고 주장한다[5]。
2. 2. 대외적 위기와 개국에 대한 기대
덴포 시대(1830~1844)에 들어서면서 일본 사회는 도쿠가와 막부 성립 후 200년 이상 지나며 막번 체제의 모순이 뚜렷해졌다. 한편 서구에서는 산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극동 지역이 중요한 시장이자 자원 공급지로 부상했고, 18세기 말부터 일본 근해에 외국 선박의 출현이 잦아졌다.간세이 5년(1793년) 러시아 사절 아담 락스만이 네무로에 내항한 것을 계기로, 막부의 노중이었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막부는 자신들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서양 국가와의 접촉이 도쿠가와 막부 중심의 지배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으며, 쇄국이야말로 막부의 패권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란가쿠(네덜란드 학문)가 발달하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서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점차 개국에 대한 기대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폐쇄적인 쇄국 정책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분세이 7년(1824년)에는 미토 번의 어민들이 바다에서 서양 포경선과 물물교환을 했다가 300여 명이 조사를 받는 오쓰하마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외국 선박의 출몰이 잦아지면서 해안 방어 문제(해방 문제)도 논의되었으나, 쇄국 체제를 전제로 한 해방 논의는 국가적 차원의 국방 개념과 혼동되면서 오히려 도쿠가와 지배 체제를 흔들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막부는 분세이 8년(1825년) 이국선 타격령을 발표했다. 이는 일본 민중과 서양인의 접촉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강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분세이 11년(1828년)에는 막부 천문방 소속이자 서물봉행이었던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금지된 일본 지도를 지볼트에게 제공한 지볼트 사건이 발생하여 막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회 내부적으로도 불안이 가중되었다. 덴포 3년부터 8년(1832년-1837년)까지 이어진 덴포 대기근으로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농민 봉기(잇키)와 도시 빈민 폭동(우치코와시)이 연이어 발생했다. 특히 덴포 8년(1837년)에 일어난 전직 막부 관리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과 이쿠타 만의 난은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대외적으로는 19세기 초 분쟁 상태였던 북방의 러시아와의 관계는 개선되었지만, 인도와 중국 시장을 장악한 영국이 일본 시장에 눈독을 들이면서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했다. 영국의 오가사와라 제도 점령 계획이나 미국 상선 모리슨호의 내항(1837년) 등은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과 지식인들에게 위기감을 고조시켰고, 이는 만사의 옥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
다만, 영국의 오가사와라 제도 점령 계획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다나카 히로유키는 당시 영국이 청나라와의 관계 악화로 인해 일본인 표류민 송환조차 미국 상선 모리슨호에 맡겨야 할 정도였으며, 오가사와라 제도는 청나라와의 유사시 영국 상인의 피난처나 해군 기지 정도로 고려되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후 영국이 홍콩을 확보하면서 오가사와라 제도 점령 계획은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당시 막부 역시 이 계획에 거의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모리슨호 사건을 계기로 쇄국 정책의 철폐를 강하게 주장했던 인물로는 다카노 조에이, 와타나베 가잔 등이 있다. 특히 와타나베 가잔은 서양 문물을 긍정적으로 소개하여 "란가쿠에 있어서 대 시주(大施主, 큰 후원자)"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이들의 활동은 당시 경직된 쇄국 체제 하에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이었으나, 결국 막부의 탄압을 받게 된다.
3. 발단
덴포 9년(1838년) 10월 15일, 막부에서 모리슨 호 문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던 중, 상치회 모임에서 막부 관리 하가 이치사부로가 평정소의 답변서 내용을 몰래 참석자들에게 공유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실제 막부의 결정과 달리, 모리슨 호 재내항 시 격퇴해야 한다는 평정소의 강경론만을 담고 있어 정보의 오류가 있었다.
이 잘못된 정보로 인해 모임에 참석했던 와타나베 가잔, 다카노 조에이, 마쓰모토 도키조 등은 막부가 강경한 배척 방침을 확정했으며 모리슨 호가 다시 올 것이라고 오해했다. 이에 다카노 조에이는 막부의 외교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무술몽어(戊戌夢物語)』를 익명으로 집필하여 유포했고, 이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마쓰모토 도키조 역시 비슷한 취지의 의견서를 막부에 제출했다.
와타나베 가잔도 『신기론(慎機論)』을 집필하여 로주(老中) 오타 스케모토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글의 논지가 명확하지 않고 미완성 상태여서 스스로 제출을 포기했다. 하지만 이 원고는 훗날 만사의 옥 당시 가택 수색에서 발견되어 가잔을 처벌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특이하게도 『무술몽어』와 『신기론』에서는 '모리슨'을 배 이름이 아닌 사람 이름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마쓰모토 도키조의 상서와는 다른 점이다. 조에이와 가잔이 의도적으로 모리슨을 강력한 인물처럼 묘사하여 막부를 압박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같은 시기, 토리이 요조와 에가와 히데타쓰가 에도 만 순시 명령을 받았는데, 와타나베 가잔은 친구인 유학자 아즈마 간사이의 집에서 해외 정세에 대해 강연하고 있었다. 이때 토리이 요조의 동생인 하야시 시키부가 보인 냉담한 반응은 이후 만사의 옥으로 이어질 갈등의 전조를 보여준다.
3. 1. 모리슨 호 사건
만사의 옥의 발단 중 하나가 된 모리슨 호 사건은 덴포 8년(1837년)에 일어났다. 당시 일본 뱃사람이 풍랑으로 표류하다 외국 선박에 구조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 사건의 계기가 된 일본인 표류민 7명도 그러한 경우였다. 이들은 외국 배에 구조되어 마카오로 보내졌고, 현지에 거주하던 미국 상인 Charles W. King|찰스 W. 킹eng은 이들을 일본에 송환하는 것을 계기로 통상을 요구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사용된 배가 미국 상선 모리슨 호였다.덴포 8년(1837년) 6월 28일(음력), 모리슨 호는 우라가에 접근했지만, 막부는 이국선 타격령에 따라 해안 포격을 가했다. 모리슨 호는 평화적 목적을 나타내기 위해 무장을 해제한 상태였기에 반격하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6] 이후 사쓰마로 이동하여 상륙, 성대(城代) 가로(家老)인 시마즈 히사카제와 교섭을 시도했으나, "표류민은 네덜란드인을 통해 송환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땔감과 식량을 공급받고 배로 돌아간 뒤 위협 사격을 받자 결국 포기하고 마카오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일본 측 포대의 성능이 조악하고 연안 경비 체제가 허술하다는 문제점도 드러냈다.
이듬해인 덴포 9년(1838년) 6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모리슨 호의 내항 경위가 막부에 보고되었다. 막부는 이때서야 모리슨 호가 표류민 송환과 통상 요구를 위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만, 영국 배로 잘못 알려졌다). 로주 미즈노 타다쿠니는 이 보고를 바탕으로 막부 각료들에게 대응 방안을 자문했다. 7월에서 8월에 걸쳐 제출된 각료들의 주요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 간조 봉행(勘定奉行) 및 간조카타(勘定方): 통상은 불가하나, 표류민은 네덜란드 배를 통해 송환한다.
- 오메쓰케(大目付) 및 메쓰케(目付): 표류민은 네덜란드 배로 송환하되, 통상 요구와 연계된다면 거부한다. 모리슨 호 재내항 시 타격한다.
- 하야시 대학두(토리이 요조의 부친): 표류민은 네덜란드 배로 송환한다. 영국 배(모리슨 호로 오인)가 표류민을 데려올 경우 함부로 타격해서는 안 되며, 관련 대응책을 검토해야 한다.
미즈노는 간조 봉행, 오메쓰케, 메쓰케의 의견을 하야시 대학두에게 보냈으나, 하야시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이후 미즈노는 이 의견들을 효정소에 내려보내 평의를 거치게 했다. 10월, 효정소(지샤 봉행, 마치 봉행, 공사방(公事方)간조 봉행)는 "표류민 수용 불가, 모리슨 호 재내항 시 재타격"이라는 가장 강경한 의견을 내놓았다. 미즈노는 재차 자문했으나 효정소 외 다른 기관들은 기존의 온건책을 고수했다. 결국 12월, 미즈노는 나가사키 봉행에게 표류민은 네덜란드 배를 통해 송환한다는 방침을 전달했다. 이는 강경론을 배제하고 표류민 송환만 인정하는 소극적인 결정이었다.
막부 내 논의가 진행되던 덴포 9년(1838년) 10월 15일, 와타나베 가잔과 다카노 조에이 등이 참여하던 상치회 모임에서 효정소의 강경론(실제로는 채택되지 않음)만이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막부가 강경한 배척 방침을 정했으며, 모리슨 호가 다시 올 것이라고 오해하게 되었다. 이에 조에이는 막부의 외교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무술몽어(戊戌夢物語)』를 익명으로 저술하여 유포했고, 가잔 역시 『신기론(慎機論)』을 집필했다. 이 저작들은 이후 만사의 옥에서 탄압의 빌미가 되었다.
3. 2. 『무술몽어(戊戌夢物語)』와 『신기론(慎機論)』
덴포 9년(1838년) 10월 15일, 상치회 모임에서 막부 관리 하가 이치사부로가 모리슨 호 재방문 가능성에 대한 평정소의 답변서 내용을 몰래 공유했다. 이 내용은 모리슨 호를 격퇴해야 한다는 가장 강경한 의견이었는데, 실제 막부의 결정(표류민만 네덜란드 배로 송환하고 재방문 가능성은 무시)과는 달랐다. 이 때문에 모임에 참석했던 와타나베 가잔, 다카노 조에이, 마쓰모토 도키조 등은 막부가 강경한 배척 방침을 정했으며, 모리슨 호가 실제로 다시 올 것이라고 오해하게 되었다.이 소식을 들은 지 6일 만에, 다카노 조에이는 막부의 방침에 완곡하게 반대하는 『무술몽어(戊戌夢物語)』를 익명으로 집필했다. 막부의 대외 정책을 직접 비판하는 것의 위험성을 고려하여, 책의 전반부에서는 막부 정책을 긍정하는 듯 서술했지만, 후반부에서는 쇄국을 고수하며 외국의 교역 요구를 거절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보복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사본 형태로 퍼져나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몽어』의 내용에 반박하는 『몽몽어』, 『몽어평』 같은 글들이 등장하며 막부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마쓰모토 도키조 역시 조에이와 비슷한 취지의 의견서를 막부에 제출했다.
한편, 와타나베 가잔도 『신기론(慎機論)』을 집필했다. 가잔은 평소 자신의 의견을 막부에 전달하고자 했고, 친구인 유학자 우미노 요스케를 통해 로주 오타 스케모토에게 전달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신기론』은 해안 방비(해방)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방비의 미흡함을 걱정하는 등 논지가 일관되지 않았고, 모리슨 호에 대한 명확한 입장 없이 막부 고위 관료에 대한 격렬한 비판으로 마무리되는 미완성 상태의 글이었다. 이는 내심 개국을 바라면서도 공식적으로는 해방론자 입장을 취해야 했던 가잔의 복잡한 처지 때문이었다. 다하라 번의 중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조에이처럼 익명으로 글을 발표할 수도, 막부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가잔 스스로도 만족스럽지 못해 제출을 포기하고 초고 상태로 두었으나, 약 반년 후 만사의 옥 당시 가택 수색 과정에서 이 원고가 발견되어 결국 그를 단죄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고 말았다.
흥미롭게도 『무술몽어』와 『신기론』 모두 '모리슨'을 배 이름이 아닌 사람 이름으로 기록했는데, 이는 마쓰모토 도키조가 '상서'에서 사실대로 배 이름으로 적은 것과 대조된다. 조에이와 가잔이 의도적으로 모리슨을 강력한 해군 제독처럼 묘사하여 막부에 위협감을 주고, 이를 통해 외국의 교역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압박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3. 사정서 삼부작
1839년 3월 중순, 에도 만 순시를 마치고 에도로 돌아온 에가와 히데타츠는 막부에 제출할 복명서를 준비하며 와타나베 가잔에게 서양 사정에 대한 의견서를 요청했다. 이는 10년 가까이 난학(蘭學) 지식을 쌓고 국방에 대한 견해를 다듬어 온 가잔에게 막부 중추에 자신의 의견을 전달할 좋은 기회였다.가잔은 며칠 만에 『초고 서양 사정서』(初稿西洋事情書일본어)를 완성했으나, 막부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 때문에 에가와에게 보내지 않았다. 이 『초고 서양 사정서』는 2개월 후 만사의 옥에서 『신기론』(慎機論일본어)과 함께 가잔을 단죄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후 가잔은 『재고 서양 사정서』(再稿西洋事情書일본어)와 『제국 건지 초도』(外国地嶼取調書일본어)를 작성하여 3월 22일에 에가와에게 보냈다. 에가와는 지도는 채택했지만, 보고서는 막부 비판이 지나치다는 이유로 반려하고 수정을 지시했다. 가잔은 에가와의 요구에 맞춰 내용을 수정하여 4월 23일에 『외국 사정서』(外国事情書일본어)를 다시 보냈다. 『재고 서양 사정서』가 막부의 쇄국 정책과 안일함을 강하게 비판하는 데 집중했다면, 『외국 사정서』는 그보다 3배 가까운 분량으로 해외 정세 정보와 구체적인 해안 방어 방안을 담았다. 최신 자료를 활용한 이 보고서는 가잔의 난학 연구를 집대성한 것으로, 당시 최고 수준의 논문으로 평가받는다. 가잔은 이 보고서 집필 사실을 다카노 조에이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만사의 옥에 대한 주요 정보원인 조에이의 『만사 조액 소기』(蛮社遭厄小記일본어)에는 이 보고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러나 수정 작업으로 인해 제출이 늦어져, 가잔이 『외국 사정서』를 보낸 4월 23일에는 에가와가 이미 막부에 복명서를 제출한 뒤였다. 공교롭게도 에가와가 복명서를 제출한 4월 19일은 토리이 요조가 부하에게 가잔에 대한 내사를 명령한 날이기도 했다. 토리이는 가잔이 막부의 측량 업무에 난학 지식을 이용해 관여하는 것 자체에 의심과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에가와가 보고서에 가잔이 작성한 지도를 첨부하자 더욱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만사의 옥은 개명파(開明派)를 탄압하고, 에가와를 통해 가잔의 『외국 사정서』가 막부에 제출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토리이의 입장에서는 이를 서양의 문화적 침략으로부터 일본을 지키는 행동으로 여겼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연구자 다나카 히로유키는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그는 에가와가 가잔에게 요구한 것은 서양의 위협을 강조하며 일본의 해안 방어 강화를 촉구하는 내용의 개요서였으나, 가잔은 이를 기회로 삼아 에가와에게 쇄국 및 해안 방어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가잔의 세 보고서에는 영국, 러시아 등 주요국의 정보가 담겨 있었는데, 『초고 서양 사정서』에는 서양에 대한 긍정적 소개와 쇄국 정책 비판이 포함되어 있어 제출되지 못했다. 『재고 서양 사정서』에서는 쇄국 철폐를 시사하는 부분을 삭제했지만 여전히 에가와의 의도와 맞지 않아 수정을 요구받았다. 최종본인 『외국 사정서』에서도 서양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줄였지만 해안 방어 강화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결국 에가와는 가잔의 보고서 내용을 자신의 복명서에 반영하지 않았으며, 이 시점에서 가잔이 단순한 해안 방어 강화론자가 아님을 인지했을 것이라고 다나카는 분석한다. 또한 다나카는 만사의 옥의 목표가 『외국 사정서』 상신 저지였다면, 상관인 토리이가 부하인 에가와의 보고서 제출을 단순히 반려하면 될 일이었고, 당시 명확한 개명파와 수구파(守旧派)의 구분도 불분명했기 때문에 통설적인 해석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비판한다[5]。
3. 4. 무인도 도항 계획
오가사와라 제도는 간분 10년(1670년)에 일본에 알려졌고, 엔포 3년(1675년) 막부가 탐험선을 보내 영유를 선언했으나, 19세기에는 이국선 타격령 등으로 인해 관심에서 멀어져 반쯤 방치된 상태였다. 그러던 중 덴포 원년(1830년)에는 서양인과 하와이인 등이 아버지 섬에 정착하여 포경선 등을 상대로 생활하면서 막부의 위기감을 자극했다.통설에 따르면, 덴포 9년(1838년) 영국인의 오가사와라 제도 입식 소문에 대응하여 막부는 대관 하쿠라 간도를 현지 조사에 파견했으며, 와타나베 가잔은 이 조사에 동행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나카 히로유키는 하쿠라의 조사는 이즈 제도 순시에 불과했으며 무인도 도항은 단순한 소문이었고, 오히려 서양에 긍정적인 인식을 가졌던 가잔이 가장 가까운 서양으로 여겨지던 무인도에 대한 동경심 때문에 도항을 희망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5]. 당시 마쓰우라 세이잔의 『갑자야화』나 혼다 도시아키의 『서역 이야기』 등 무인도에 대한 이야기가 유행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히타치국 무료수사의 주지 준센과 그의 아들 준도는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 통람도설』 등에 영향을 받아 무인도 도항을 꿈꾸게 되었다. 이 계획에는 여관 야마구치야의 후견인 긴지로, 마키에사 야마자키 슈조, 사(士) 은거 모토기 도헤이, 배신(陪臣) 의사 아베 도신, 어푸신 역 형 오쓰카 도안, 전 기하타 가신 사이토 지로베에, 그리고 후에 동료들을 배신하게 되는 하급 막신 하나이 도라카즈 등이 관심을 보이며 참여했다. 이들의 무인도 도항 계획은 막부의 허가를 얻어 실행될 예정이었으나, 자금, 배, 식량 조달 등 구체적인 준비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관련자들이 모여 지도나 기록을 보며 기대를 나누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한편, 『무술몽어(戊戌夢物語)』의 유포는 덴포 10년(1839년) 봄 무렵 노중 미즈노 타다쿠니에게도 알려졌고, 미즈노는 토리이 요조에게 "모리슨"이라는 인물과 『몽어』의 저자를 찾도록 명령했다. 토리이는 이를 빌미로 부하 오가사와라 코조 등에게 와타나베 카잔의 주변을 내탐하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하급 막신 하나이 도라카즈가 정보를 제공했는데, 그는 난학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가잔의 집에도 드나들었고 무인도 도항 계획에도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토리이에게 포섭된 하나이는 가잔과 준센 그룹 양쪽에 해외 도항을 부추기며 사건 조작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나이의 정보를 바탕으로 토리이는 준센 등의 계획이 막부에 허가 신청을 준비하던 합법적인 활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잔이 이 계획에 깊이 관여했으며 심지어 단독으로 미국 밀항까지 기도했다는 무고 내용을 담은 고발장을 미즈노에게 제출했다. 가잔이 과거 하쿠라의 오가사와라 조사에 동행하려 했던 사실까지 밀항 계획의 증거로 왜곡했다. 고발장에는 가잔 외에도 하쿠라 간도, 에가와 히데타츠 등 막부 내 정적들의 이름도 비판적으로 언급되어 있어, 토리이의 개인적인 원한 해소 및 정적 제거 의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타나카 히로유키는 토리이가 막부 고관들을 직접 고발할 의도는 없었고, 단지 가잔의 위험성을 부각시키려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5월 14일, 가잔과 무인도 도항 계획 관련자들에게 출두 명령이 내려져 덴마초 감옥에 투옥되었다. 미즈노 타다쿠니는 가잔 체포 직후 "등(카잔) 사건 몽어 일건에 있어서는 이렇다 할 것이 없고, 완전히 무인도 도항 사건의 괴수다"라고 언급하며, 초기에는 『몽어』보다 무인도 도항 계획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신분 | 나이 |
---|---|---|
와타나베 카잔 | 다하라번 연로(年寄) | 47세 |
타카노 쵸에이 | 마을 의사 | 36세 |
준센 | 무료수사 주지 | 50세 |
준도 | 동상 (준센의 아들) | 25세 |
야마구치야 킨지로 | 여관 후견인 | 39세 |
야마자키 슈조 | 마키에사 | 40세 |
모토기 도헤이 | 어보(徒) 은거 | 46세 |
사이토 지로베 | 전 하타모토 가신 | 66세 |
4. 사건의 전개
토리이 요조의 고발을 바탕으로 북마치 봉행 오오쿠사 타카요시 주관 하에 심문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와타나베 카잔 등의 해외 도항 계획이 주요 혐의였으나, 심문 결과 관련자들은 이를 부인했고 카잔과 준센 그룹 간의 관련성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토리이 요조의 지속적인 개입과 무고한 인물을 체포했다는 사실을 덮으려는 막부의 체면 문제로 인해 수사 방향은 막부 정치 비판으로 전환되었다. 카잔의 자택에서 압수된 문서 중 '신기관'과 '초고 서양 사정서'의 내용이 막부 비판이라는 이유로 문제 삼아졌다. 카잔은 이것이 정식 글이 아닌 초고일 뿐이라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막부의 실권자였던 노중 미즈노 타다쿠니는 막부에 비판적인 언사를 용납하지 않았기에 카잔 등에 대한 유죄 분위기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다른 피의자들이 먼저 죄를 인정한 후, 저항하던 카잔도 7월 24일 유죄 인정 문서(구서)에 서명하면서 재판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다만, 심문을 진행한 오오쿠사 봉행은 토리이의 무고와 심리 개입에 불신을 품고 카잔에게 동정적이었다는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5].
4. 1. 토리이의 암약
덴포 10년(1839년) 봄 무렵, 유포된 『무술몽어(戊戌夢物語)』는 노중(老中) 미즈노 타다쿠니에게도 알려졌다. 미즈노는 "모리슨"이라는 인물과 『몽어』의 저자를 찾아내도록 토리이 요조에게 명령했다. 4월 19일, 토리이는 부하인 오가사와라 코조와 오하시 겐로쿠 등에게 『몽어』 저자 수색을 핑계 삼아 와타나베 카잔의 주변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토리이는 이미 전년부터 카잔의 신변을 조사하고 있었으며, 이 기회를 통해 "난학에 능한 대시주"로 알려진 카잔을 체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열흘 뒤인 4월 29일, 오가사와라는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영국인 모리슨에 대한 정보
- 『몽어』는 타카노 쵸에이의 번역서를 바탕으로 카잔이 집필했다는 소문
- 하타자키 테이의 인물 정보 및 그와 가까운 인물들(마츠다이라 이세노카미, 카와지 토시미치, 하구라 간도, 에가와 히데타츠, 우치다 야타로, 오쿠무라 키사부로)의 이름. 또한 이들이 하타자키 체포 후 카잔, 쵸에이와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
- 카잔의 인품과 그가 해외 도항을 계획하고 있다는 점
오가사와라는 이러한 정보와 함께, 준센과 준도 등 조슈 무료수사(無量壽寺) 사람들이 무인도(오가사와라 제도)로 건너가려 하며, 더 나아가 미국까지 가려 한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이는 『몽어』와는 관계없고 미즈노의 수색 지시에도 없던 내용이었다. 이 정보들은 하급 막신(幕臣)인 하나이 토라이가 제공한 것이었다. 하나이는 난학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카잔의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고, 무인도 도항 계획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토리이는 만사의 옥 발생 1년 전부터 하나이를 이용해 카잔을 내탐했으며, 하나이는 토리이 측에 완전히 포섭되어 카잔과 준센 그룹 양쪽에 해외 도항을 부추기며 범죄 사실을 만들려 했다. 보고를 받은 토리이는 무료수사에 대한 추가 조사를 명령했다.
조사 결과, 준센 등의 계획은 막부에 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합법적인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토리이는 이 계획에 카잔이 관여했으며, 심지어 단독으로 미국으로 가려 한다는 내용의 고발장을 작성하여 미즈노에게 제출했다. 몇 년 전 카잔이 하구라의 오가사와라 제도 조사에 동행하려 했던 사실까지 밀항 계획의 증거로 삼았다.
고발장의 상당 부분은 카잔에 대한 무고였지만, 카잔의 동조자로 지목된 하구라, 에가와, 견문에 동행했던 우치다, 오쿠무라 등 막신들의 이름도 비판적으로 언급되었다. 이는 토리이가 카잔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 외에도, 정적을 제거하고 견문 조사에 개입했던 인물들에 대한 사적인 불쾌감을 해소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카와지 토시미치의 이름은 고발장에서 빠져 있었다. 미즈노는 토리이의 보고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부하에게 재조사를 명령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결과, 대상이 된 막신들(마츠다이라 이세노카미, 하구라, 에가와, 우치다, 오쿠무라, 시모소네 노부아츠)은 모두 혐의를 벗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설에 대해 타나카 히로유키는 다른 주장을 편다. 그는 토리이와 에가와가 친밀한 관계였음을 지적하며, 토리이가 카잔의 친구 중에 막부 고관들이 있다는 점을 이용해 미즈노에게 카잔의 위험성과 영향력을 강조하려 했을 뿐, 처음부터 막신들을 고발할 의도는 없었다고 본다. 또한 미즈노가 재조사를 명령했다는 근거로 제시되는 다른 상서 역시, 미즈노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심문 과정에서 토리이의 고발에 의문을 품은 기타마치 봉행소가 작성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타나카는 만약 미즈노가 신임하는 하구라나 에가와에게 의혹이 있었다면 직접 추궁했을 것이며, 이 시점에서 미즈노는 토리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고 본다.
결국 5월 14일, 카잔과 무인도 도항 계획 관련자들에게 출두 명령이 내려졌고, 전원이 덴마초(伝馬町) 감옥에 갇혔다. 기독교 관련 서적을 번역하고 있던 코세키 산에이는 자신도 체포될 것을 우려하여 5월 17일 자택에서 자살했다. 타카노 쵸에이는 잠시 몸을 숨겼으나 5월 18일 자수했다. 이로써 체포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신분 | 나이 |
---|---|---|
와타나베 카잔 | 다하라번 연로(年寄) | 47세 |
타카노 쵸에이 | 마을 의사 | 36세 |
준센 | 무료수사 주지 | 50세 |
준도 | 동상 (준센의 아들) | 25세 |
야마구치야 킨지로 | 여관 후견인 | 39세 |
야마자키 슈조 | 마키에사 | 40세 |
모토기 도헤이 | 어보(徒) 은거 | 46세 |
사이토 지로베 | 전 기인(旗本) 가신 | 66세 |
카잔 체포 직후 미즈노는 "카잔 사건은 몽어(『무술몽어(戊戌夢物語)』)와는 별 관계없고, 완전히 무인도 도항 사건의 주모자이다"라고 말하며, 『몽어』보다 무인도 도항 문제를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드러냈다.
4. 2. 체포와 심문
소환된 이들을 대상으로 북마치 봉행 오오쿠사 타카요시가 심리를 시작했다. 토리이 요조의 고발장을 바탕으로 심문한 결과, 해외 도항 계획 등은 모두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와타나베 카잔은 하나이 토라치가 자신에게 해외 도항을 부추겼으며, 자신은 쥰센 일행과는 무관하다고 답변했다. 오오쿠사는 카잔에게 "그대에게 앙심을 품은 자가 있는가"라고 물었다.다음 날인 15일에는 쥰센 그룹과 카잔의 대질 심문이 이루어졌다. 오오쿠사의 심문에 대해 쥰센 부자는 카잔이라는 인물은 이름도 모른다고 답했으며, 고발장에 언급된 구체적인 도항 계획은 하나이가 종용했지만 막부의 허가가 내려지지 않아 거절했다고 진술했다. 다른 멤버들도 카잔과 도항 계획은 무관하다고 증언하여, 카잔의 혐의는 풀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카잔의 자택에서 압수된 문서류의 검사는 계속되었다. 5월 17일, 토리이는 에가와 히데타츠에게 편지를 보내 '초고 서양 사정서'를 확보했음을 암시하며 압박했고, 이로 인해 에가와는 '외국 사정서' 상신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5월 22일, 봉행소에서 심리가 재개되었다. 카잔 체포 후 토리이가 추가로 제출한 고발장에 기재된 오시오 헤이하치로와의 내통 혐의, 하급 막신 오오츠카 도안에 대한 불신 혐의 등도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하지만 무고한 자를 체포한 것으로는 막부의 체면이 손상되므로, 봉행소는 조사할 혐의를 해외 도항에서 막부 정치 비판으로 전환했다. 카잔의 서류 중에서 '신기관'과 '초고 서양 사정서' 두 권이 문제시되었고, 그 안에 막부 정치를 비판하는 언사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카잔은 그 글들이 정식 문서가 아닌 '급하게 휘갈겨 쓴 초고(난고)'이며, 그런 글귀들을 꺼내어 죄를 묻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노중 미즈노 타다쿠니는 막부 정책에 비판적인 언론이나 주장을 펼치는 풍조(처사 횡설)를 싫어하여, 카잔과 초에이의 체포를 옳다고 여겼기에 막부의 분위기는 유죄론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카잔은 취조가 계속되는 중에도 에가와의 '외국 사정서' 상신에 지장이 없도록 하려고 '초고 서양 사정서'를 발전시켜 '신기관'으로 만들었다는 허위 답변을 했다. 하지만 에가와는 이미 상신을 포기했고, 5월 25일 외국에 관한 매우 간략한 단문만을 제출했다.
이상의 통설과 달리, 다나카 히로유키는 북마치 봉행 오오쿠사가 하나이의 위증과 토리이의 날조 및 심리 개입에 불신감을 품고 카잔 등에게 동정적이었다고 주장한다[5]. 또한 다나카는 '외국 사정서'가 처음부터 상신될 의도가 없었고 에가와의 의도에도 부합하지 않았기에 에가와의 보고서(복명서)에도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본다.
심리 자체는 6월 16일에 종료되었다. 초에이를 포함한 다른 체포자 전원은 유죄를 인정하고 구서(죄를 자백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카잔 혼자 저항했기 때문에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결국 7월 24일 그 역시 유죄를 인정하는 구서에 서명했다. 카잔의 서명으로 재판은 일단락되었고, 형량을 결정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4. 3. 구원 활동
와타나베 카잔이 체포되자, 막부나 여러 번의 고위 관료, 유학자 등 폭넓은 교우 관계를 가졌던 이들 대부분은 그와의 관계를 부인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마츠자키 켄도와 그의 제자 오다기리 요스케, 우미노 요스케 등 소수는 달랐다.투옥된 카잔을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은 주로 신분이 낮고 새로운 학문과는 거리가 먼 그림 제자들과 친구들이었다. 구원 활동의 중심에는 카잔의 그림 제자 츠바키 친잔이 있었다. 이외에도 같은 문하의 이치키 헤이조, 오다 호센, 사이토 코우교쿠를 비롯해 화우(그림 친구)인 타치하라 쿄쇼, 타카쿠 아이가, 타고 잇사이 등이 힘을 보탰다. 카잔의 고향인 타하라 번에서는 그의 의붓아버지 와다 덴, 코데라 다이하치로, 카네코 타케시로 등이 주요 활동가로 나섰다. 카잔의 투옥 소식이 전해지자 이들은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돈을 모아 옥중의 카잔과 간수들에게 음식과 뇌물을 전달했고, 덕분에 카잔은 5월 21일경에는 옥 안에서 비교적 편안한 상태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카잔의 안전을 확보한 후, 이들은 각자의 인맥을 동원하여 막부 요인들에게 카잔의 석방과 감형을 청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았다.
- 마츠자키 켄도와 우미노 요스케는 오타 스케모리(당시 로주)에게 접근했다.
- 오다기리 요스케는 미즈노 타다쿠니(당시 로주 수좌)에게 탄원했다. (오다기리는 미즈노의 시강(侍講)이었다.)
- 타츠노 번의 한 번사는 와키사카 야스토(타츠노 번주, 당시 로주)에게 호소했다.
- 시모소네 노부아츠는 아버지인 미나미마치 부교(남쪽 거리 재판관) 츠츠이 마사노리를 통해 사건 심리를 담당하는 키타마치 부교(북쪽 거리 재판관) 오오쿠사 타카요시에게 영향을 주려 했다. 시모소네는 토리이 요조의 고발장에 이름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하타모토 신분으로 서양 포술을 연구하던 인물이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구원 시도가 있었다.
- 타하라 번 측근인 야기 센에몬은 번주 미야케 야스나오를 설득하여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에게 카잔의 사면을 청원하도록 하려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 츠바키 친잔의 사촌 츠바키 료손은 하나와 지로를 통해 오오쿠사 타카요시에게 청원했으며, 카잔의 스승 사토 잇사이와 린 가문을 찾아갔으나, 잇사이는 움직이지 않았고 린 가문은 이미 문인 명부에서 카잔의 이름을 삭제한 상태였다.
- 그림 제자 사이토 코우교쿠는 매형인 막신(幕臣) 마츠다 진베에를 통해,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애첩 오미요노카타의 양아버지 나카노 세키오에게 접근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카잔은 오오쿠의 힘으로 구원받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고, 주군 미야케 공의 안위에 관련된 경우의 비상 수단으로 제한하도록 옥중에서 지시했다. 또한 코우교쿠의 아버지 사이토 이치노신은 칸에이 사 영지 대관을 맡고 있었던 관계, 칸에이 사의 궁에게 막부에 요청하도록 하는 작전도 세워졌지만, 이것은 카잔의 사형이 결정적일 경우에만 의지할 것으로 역시 실행은 보류되었다.
- 미토 번사 타치하라 쿄쇼를 중심으로, 키쿠치 탄가, 안자이 운엔, 타카쿠 아이가와 같은 풍류의 친구와 시모노(下野)의 문인들이, 공통의 친구인 카잔을 위해 많은 기부를 했다. 쿄쇼는 서양 학문에도 관심을 가지고 타카노 쵸에이와도 친분이 있었고, 처분은 추방 정도로 끝날 것이라고 옥중에서 낙관한 쵸에이가, 그럴 경우 미토 근처에 거처를 마련해 줄 것을 편지로 부탁한 상대는 바로 이 쿄쇼였다.
그 외 다수의 사람들이, 카잔 구원을 위해 작은 연줄을 의지하여 마치 부교와 봉행소(奉行所) 관리에게 진정이나 접촉을 시도했다. 또한, 당시 에도에 머물던 사쿠마 쇼잔이 옥중의 카잔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낸 것은, 카잔이 서간 중에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권력을 두려워하여 지금까지의 언동을 뒤집은 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당시 에도에서는 새로운 지식과 개명성을 존중하는 기운이 높아져, 카잔의 곁에는 많은 유학자·명사 고관들이 모여 있었지만, 옥이 시작되자 그들은 모두 일제히 카잔과 서양 학문과의 무관계를 선전했다. 문예계 친구 중에서도, 팔덕(八德)을 설파한 『난소 사토미 팔견전』의 저자 쿄쿠테이 바킨은 구원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또한 "막말의 삼필"로 서도사(書道史)에 명성이 높은 이치카와 베이안은 카잔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할 정도로 친했지만, 한 서화회(書画会)에서 "카잔이라는 인간은 전혀 모른다"라고 단언하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 "그럼 당신의 초상화를 그린 분은 누구셨습니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분주하게 활동한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마츠자키 켄도일 것이다. 켄도는 원래 린 가문의 문인이었다. 25세 연하의 토리이 요조와도, 그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친밀한 교제를 해왔다. 만사의 옥은 켄도에게 있어서, 카잔의 체포와 토리이의 음모의 소문으로 인해 이중으로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건이었다. 켄도의 일기 『켄도 일력(慊堂日歴)』에는, 토리이의 결백을 믿으려고 하는 심정이 적혀 있다.
7월 24일에 이르러 카잔은, 봉행소 작성의 구술서(口書)에 서명 날인을 하게 되었다. 이 구술서는 마지막에 "별도로 불온(不届)"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고, 당시의 관습상 이것은 사형을 면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이 구술서의 내용을 알게 된 마츠자키 켄도는 카잔의 사형을 예상하고 아연실색하여, 병을 무릅쓰고, 카잔의 인품의 고결함과, 정치 비판을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를 호소하는 장문의 탄원서를 써서, 정서(淨書)하여 29일에 오다기리 요스케를 통해 미즈노 타다쿠니에게 제출했다. 키타마치 부교소가 구술서를 바탕으로 작성하여 막부에 제출했던, 카잔 참형의 건의서(伺書)가 되돌려진 것은 8월 3일이었다.
원래 당시 로주 4명 중 오타 스케모리·와키사카 야스토가 카잔에게 동정적이었던 데다가, 켄도의 진심 어린 노고를 헤아린 미즈노의 의향이 더해져, 12월 18일에 카잔에게 거주지 유폐 판결이 내려졌다.
4. 4. 판결과 그 후
1839년 12월 18일에 내려진 판결 내용은 다음과 같다.인물 | 판결 내용 | 비고 |
---|---|---|
와타나베 가잔 | 다하라에서 칩거 | 막정 비판 혐의 |
다카노 조에이 | 영구 금고 (종신형) | |
야마구치야 긴지로 | 영구 금고 | 심문 중 옥사 (고문 추정) |
야마자키 슈조 | 에도 추방 | 심문 중 옥사 (고문 추정) |
사이토 지로베에 | 영구 금고 | 심문 중 옥사 (고문 추정) |
준도 | 미결 | 심문 중 옥사 (고문 추정) |
준센 | 압금 | 승려 신분으로 투기 |
아베 유신 | 100일 압금 | 가잔의 친구이자 의사. 무인도 개발 계획 언급, 총기 전달 상담 등 |
모토키 도헤이 | 100일 압금 | 무단 총기 제작 |
오쓰카 도안 | 100일 압금 | 야마구치야 긴지로에게 총기 전달 |
스즈키 손스케 | 압금 | 오시오 헤이하치로 서신 소각 (직접 관련 없음) |
무인도 도항 계획과 관련하여, 고문으로 옥사한 백성들과 비슷한 죄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부의 관리나 번의 신하들은 별개의 건으로 취급되어 '압금'이라는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이에 대해 다나카 히로유키는 만사의 옥이 "막부가 느슨해지기 시작한 쇄국의 배타적 폐쇄성을 다잡으려 한 사건"이며, 죄의 유무보다는 서양과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 약화를 경고하기 위한 본보기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막부 관료들은 제외되고 백성들만 억울하게 희생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토리이 요조가 『무술몽어』의 저자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난학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가잔을 백성들과 함께 "무인도 도항 모의" 혐의로 엮어 처벌하고, 이를 통해 쇄국 정책의 해이에 대한 경종을 울리려 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판결 이후, 와타나베 가잔은 다음 해 1월 다하라로 보내져 칩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생활고, 번 내 반대파의 공작, 그리고 그들이 퍼뜨린 번주 문책설 등으로 고통받다가, 만사의 옥이 있은 지 2년 반 후인 1841년 10월 11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49세였다.
다카노 조에이는 판결 4년 반 후인 1844년 6월 30일, 감옥에 불을 지르고 탈옥했다. 이후 난학 서적 번역을 계속하며 전국을 도망 다녔으나, 탈옥 6년 후인 1850년 10월 30일, 에도의 자택에서 봉행소 관리들에게 급습당해 살해되었다. 향년 47세였다.
모토키 도헤이는 옥중 생활로 건강이 악화되어 출옥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준센은 무료수사로 돌아가 1867년 2월 15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편, 하나이 도라카즈는 무고죄로 중추방되어야 마땅했으나, 범죄 적발에 기여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무혐의 처리되었다. 그는 다음 해 4월 6일 쇼헤이코 근번으로 발탁되는 이례적인 승진을 했는데, 이는 쇼헤이코를 관할하던 린 가문과 미즈노 타다쿠니의 의중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후 하나이는 오가사와라 코조의 양녀와 결혼하여 나가사키 봉행 부요리키로 승진했다. 그는 양아버지 오가사와라와 함께 나가사키로 부임하여, 토리이 요조가 다카시마 슈한을 함정에 빠뜨리는 데에도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슈한의 체포와 나가사키 회소 숙청은 토리이가 아닌, 회소의 재정 문란이 구리 자리의 정동 생산을 저해할 것을 우려한 노중 미즈노 타다쿠니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설도 있다).
5. 만사의 옥을 다룬 작품
- 스기우라 아키히라, 『소설 와타나베 가잔』(아사히 신문사): 『아사히 저널』에 1968년 1월부터 1970년 10월까지 연재되었다.
- 요시무라 아키라, 『조에이 도망』: 신초 문고 등에서 출판되었다.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2]
서적
Practical Pursuits: Takano Chōei, Takahashi Keisaku, and Western Medicine in Nineteenth-Century Japan
https://books.google[...]
BRILL
2020-03-17
[3]
서적
Samurai to Soldier: Remaking Military Service in Nineteenth-Century Japan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2016-07-09
[4]
뉴스
19世紀後半、黒船、地震、台風、疫病などの災禍をくぐり抜け、明治維新に向かう(福和伸夫)
https://news.yahoo.c[...]
2020-08-24
[5]
서적
「蛮社の獄」のすべて
[6]
서적
鹿児島県史
[7]
간행물
天保改革と長崎会所
196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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