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시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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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머시아 왕국은 5세기 중반부터 잉글랜드 중부에 존재했던 앵글로색슨 왕국이다. 앵글로색슨족의 이주와 칠왕국 시대를 거치며 성립되었으며, 7세기에는 펜다 왕의 팽창 정책으로 강성해졌다. 8세기 에설발드와 오파 왕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으나, 9세기 웨섹스 왕국의 에그버트에게 패배하며 쇠퇴, 918년 웨섹스에 병합되었다. 머시아는 독자적인 사회 계급 구조와 기독교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오파의 방벽과 같은 유산을 남겼다. 현대에도 미들랜드 지역의 정체성과 군사 조직, 상업 활동 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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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시아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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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토착 이름 | 머시아 왕국 로마자 표기: Miercna rīċe (고대 영어) 로마자 표기: Merciorum regnum (라틴어) |
일반적인 긴 이름 | 머시아 왕국 |
일반 이름 | 머시아 |
상태 | 왕국 |
상태 설명 | 독립 왕국 (527년–879년) 웨식스의 종속국 (879년–918년) |
존속 기간 | 527년–918년 |
시대 |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
오늘날 | 잉글랜드 베드퍼드셔 버크셔 버킹엄셔 체셔 더비셔 헤리퍼드셔 하트퍼드셔 랭커셔 레스터셔 링컨셔 옥스퍼드셔 슈롭셔 스태퍼드셔 서리 워릭셔 우스터셔 요크셔 웨일스 덴비셔 플린트셔 |
별칭 | 머시아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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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수도 | 탬워스 리치필드 |
통치자 칭호 | 군주 |
통치자 | 이켈 (초대) 펜다 울프헤레 애설발드 오파 코엔울프 체올울프 1세 베오른울프 부르그레드 체올울프 2세 |
통치자 연도 | 527년–기원후 535년경 기원후 626년경–655년 658년–675년 716년–757년 757년–796년 796년–821년 821년–823년 823년–826년 852년–874년 874년-879년경 |
입법부 | 위탄 |
언어 및 종교 | |
공식 언어 | 머시아 앵글로색슨어 |
종교 | 앵글로색슨족 이교 (7세기 이전) 기독교 (7세기 이후) |
화폐 | |
통화 | 스케트 페니 |
역사 | |
시작 사건 | 해당 없음 |
시작 날짜 | 해당 없음 |
시작 연도 | 527년 |
종료 사건 | 웨식스에 합병 |
종료 날짜 | 해당 없음 |
종료 연도 | 918년 |
이전 국가 | 하위 로마 브리튼 위체 린지 |
이후 국가 | 잉글랜드 왕국 |
2. 시대 배경
고대 로마의 세력이 약해진 중세 초기 잉글랜드에서는 브리튼인과 북방의 픽트인, 스코틀랜드인 등과의 세력 다툼이 격화되었다. 브리튼인의 여러 왕국은 고대 로마를 따라 이민족으로 이민족을 공격하게 하였다. 즉, 북유럽 윌란반도의 앵글로색슨족 전사단을 잉글랜드에 초청하여 고용, 전력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앵글로색슨족 전사단은 브리튼 섬이 정주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앵글로색슨족 전사단은 독립 세력이 되어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고 브리튼인과 대립하게 되었다.
2. 1. 앵글로색슨족의 도래와 칠왕국 시대
고대 로마의 힘이 약해진 중세 초기의 브리타니아는 브리튼인, 픽트인, 스코트인 등과의 세력 다툼이 일어나고 있었다. 브리튼의 여러 왕국은 고대 로마를 모방하여 이민족으로 이민족에 대항하였다. 즉, 북유럽 윌란반도의 앵글로색슨 용병단을 고용해 전력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때 앵글로색슨 용병단은 브리튼 섬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이들이 스스로 독립 세력을 구축하여 왕국을 세웠다. 이들은 브리튼인과 대립하게 된다.앵글로색슨족의 이주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는 것이 현재 지배적인 견해이다. 먼저 전사단이 브리튼인의 왕에게 고용되는 형태로 이주하고, 그들이 독립 세력이 되어 토지를 개척했으며, 이어서 대량의 일반 농민을 초청했다는 것이다. 일반 농민의 정주를 통해 처음으로 그들은 잉글랜드에 뿌리내린 세력이 될 수 있었다.
앵글로색슨 시대의 잉글랜드는 7왕국 시대라고 하지만, 실제로 존재한 왕국은 100여 개가 넘는 것으로 추측된다. '7왕국'이라는 명칭은 앵글로색슨 연대기 등에서 비롯된 것인데, 실제로 7왕국이라고 불리는 왕국들과 그렇지 않은 왕국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왕국들은 세력 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패배한 왕국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왕국에 굴종함으로써 일종의 서열 구조를 이루었다. 이 왕국 간의 서열 구조 관습을 지배권 또는 종주권이라고 부른다. 여러 왕국은 안정적인 왕위 계승 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는데, 왕이 서거하면 왕국과 왕국의 힘은 쉽게 와해되는 일이 자주 있었다.
3. 머시아의 성립과 발전
757년 머시아의 에텔발드가 경호원에게 살해된 후 내전이 발발했고, 오파가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다. 오파(757~796년 재위)는 선왕이 잉글랜드 남부에 행사했던 패권을 재건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머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잉글랜드 남부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왕국 행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장 도시를 건설하고, 영국 최초의 대규모 금 주화 발행을 감독했다. 그는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회 행정에 참여했으며(단명한 리치필드 대주교 관구를 후원, 787~799), 샤를마뉴와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하기도 했다. 오파는 웨일스와 머시아 사이의 경계를 표시하는 오파의 방벽을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파의 사후, 왕위는 아들 에그프리드에게 계승되었으나, 그는 5개월밖에 생존하지 못했다. 796년 12월 코엔울프가 왕위를 이었다. 821년 코엔울프의 형제 세올울프가 왕위를 계승했고, 그위네드의 데간위 요새를 공격하여 파괴했다. 그러나 이 시기 웨섹스의 에그버트(802~839년 재위)의 세력이 성장했고, 825년 엘렌던 전투에서 베오른울프를 격파했다.
엘렌던 전투로 머시아는 켄트 왕국, 서식스 왕국, 서리, 에섹스 왕국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베오른울프는 동 앵글족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죽었고, 후임자 루데카 (826~827년 재위)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위글라프는 웨섹스의 에그버트에 의해 쫓겨났으나, 830년 머시아의 독립을 되찾았다. 840년경 베오르트울프가 위글라프를 계승했다.
3. 1. 초기 머시아

머시아의 정확한 발전 과정은 앵글로-색슨 시대 초기에 노섬브리아, 켄트, 웨섹스보다 불분명하다. 머시아는 효과적인 정치 구조를 발전시켰고, 다른 왕국들보다 늦게 기독교화되었다.[5]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6세기까지 앵글족이 템스강 북쪽 땅에 정착했음이 밝혀졌다. '머시아'라는 이름은 '경계의 사람들'을 뜻하는 머시아 고대 영어이며(웨일스 변경 지역 참조), 전통적으로 이 왕국이 토착 웨일스인과 앵글로-색슨 침략자 사이의 경계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피터 헌터 블레어는 노섬브리아와 트렌트 강 계곡 거주자 사이의 경계에서 머시아가 등장했다는 대안적 해석을 제시했다.
부족 히데이지에 따르면, "최초의 머시아인"의 영토는 남부 더비셔, 레스터셔, 노팅엄셔, 노샘프턴셔, 스터퍼드셔, 북부 워릭셔의 대부분을 포함했다.[6]
기록에서 머시아 왕으로 언급된 최초의 인물은 크레오다로, 이셀의 증손자라고 전해진다. 그는 584년경 권력을 잡고 태머스 워스에 요새를 건설했는데, 이곳은 머시아 왕들의 거점이 되었다.[7] 593년 그의 아들 피바가 왕위를 계승했다. 606년 크레오다의 친척 체얼이 피바의 뒤를 이었고, 615년 체얼은 자신의 딸 퀘운부르가를 망명 중인 데이라의 왕자 에드윈과 결혼시켰다.[8]
머시아 왕들은 앵글로-색슨 칠왕국의 지배 가문 중 유일하게 이주 이전 대륙 게르만 군주제와 직접적인 가족 관계를 주장했다.[9]
3. 2. 펜다 왕과 머시아의 팽창
펜다는 626년경부터 655년까지 머시아를 통치했다. 베다는 펜다를 이교도로 싫어했지만, 펜다가 린디스판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머시아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다는 점은 인정했다.[10] 펜다는 633년 해트필드 체이스 전투에서 카드왈론과 동맹을 맺고 노섬브리아의 왕 에드윈을 격파하고 살해했다.[10] 642년에는 마세필드 전투에서 오스왈드를 전사시켰다.[10]655년, 펜다는 오스위와의 윈웨드 전투에서 30명의 부왕을 이끌고 참전했으나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10] 이 전투로 머시아는 일시적으로 붕괴되었다. 펜다의 아들 페다는 653년 렙턴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머시아의 왕위를 이었지만, 656년 봄에 살해당했다. 이후 오스위가 머시아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으나, 658년 머시아의 반란으로 펜다의 또 다른 아들인 울프헤어가 왕위에 올라 머시아를 독립 왕국으로 회복시켰다.[10]
3. 3. 울프헤어 왕과 머시아의 부흥
펜다의 아들 울프헤어(재위 658년-675년)는 658년 머시아의 반란을 통해 노섬브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머시아를 독립 왕국으로 재건했다.[5] 울프헤어는 초기에 머시아의 세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으나, 통치 말기에는 노섬브리아에게 심각한 패배를 겪기도 했다.[5] 그는 남부 잉글랜드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기독교를 수용하여 왕국의 안정과 발전을 도모했다. 울프헤어는 켄트 왕국과 와이트 섬 등을 정복하고, 린지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며 머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다음 왕인 에텔레드는 679년 트렌트 전투에서 노섬브리아를 물리치고 린지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최종적으로 확립했다.[5]4. 머시아의 전성기와 쇠퇴
757년 에설발드가 경호원에게 살해된 후 내전이 발발했고, 이는 오파의 승리로 끝났다. 오파(757~796년 재위)는 머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으며, 전투에서 승리하고 잉글랜드 남부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시장 도시를 건설하고 영국 최초의 대규모 금 주화 발행을 감독하는 등 왕국 행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오파의 방벽을 건설하여 웨일스와의 경계를 표시했다.
오파는 아들 에그프리드가 왕위를 계승하도록 노력했지만, 796년 7월 오파가 사망한 후 에그프리드는 불과 5개월밖에 통치하지 못했다. 결국 왕국은 코엔울프라는 먼 친척에게 넘어갔다. 821년 코엔울프의 형제 세올울프가 왕위를 계승했고, 그위네드의 데간위 요새를 공격하여 파괴하는 등 군사적 능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 시기 웨섹스의 에그버트(802~839년 재위)의 세력이 성장했고, 825년 에그버트는 엘렌던 전투에서 머시아 왕 베오른울프를 격파했다.
엘렌던 전투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머시아는 켄트 왕국, 서식스 왕국, 서리, 그리고 아마도 에섹스 왕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베오른울프는 동앵글족의 반란을 진압하다 사망했고, 그의 후임자인 루데카(826~827년 재위)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후 위글라프가 왕위에 올랐으나 2년도 채 되지 않아 웨섹스의 에그버트에게 쫓겨났다. 830년 위글라프는 머시아의 독립을 되찾았지만, 이미 웨섹스가 잉글랜드의 지배 세력이 된 후였다. 840년경 베오르트울프가 위글라프의 뒤를 이었다.
7세기 초, 노섬브리아 왕국은 북쪽의 픽트족, 스코트족, 웨일스의 브리튼족 등을 압박하며 세력을 확장하여 브레토왈다 칭호를 얻었다. 이 시기 베다가 남긴 사료가 알려져 있는데, 베다는 노섬브리아 출신이기에 머시아 왕국과 그 왕에 대한 기술은 공정성을 잃었다고 여겨진다. 베다가 머시아 왕국을 싫어한 데에는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다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머시아 왕국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국력이 강해졌다. 펜다(? - 655년) 왕 시절에는 잉글랜드 중부의 패권을 놓고 노섬브리아 왕국과 자주 다투었으며, 해트필드 체이스 전투(633년), 매저필드 전투(642년)에서 승리하여 머시아는 강국으로 부상했다. 655년 윈웨드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여 펜다가 전사하고 노섬브리아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울프헤르(? - 675년)는 노섬브리아 왕국의 종속 상태에서 벗어나 켄트 왕국이나 와이트 섬 등 남부 및 남서부를 지배하에 두었으며, 기독교로 개종했다. 머시아는 착실하게 세력을 넓혀 갔지만, 잉글랜드 남반부에 한정되었고, 서쪽의 웨섹스 왕국의 발흥에 어려움을 겪었다. 잉글랜드 전역으로 지배를 넓힌 것은 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머시아는 8세기 후반에 에델발드(재위: 716년 - 757년) 와 오파(재위: 757년 - 796년) 두 명의 브레토왈다를 배출했다. 에델발드는 교회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여 국력을 축적하고, 서쪽의 웨섹스 왕국을 굴복시켰다. 에델발드는 자신의 호위에 의해 암살되었다. 뒤를 이은 오파 시대가 머시아 왕국의 절정기였다. 오랜 숙적 노섬브리아 왕국을 굴복시켜 상위 지배권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하에 있던 소왕국을 해체하고 오파의 친족과 복심을 통치자로 보냈다.
Offa's Dyke영어은 하드리아누스 장벽에도 뒤지지 않는 오파의 역사적 위업으로 꼽힌다. 쳐들어오는 브리튼 족을 막기 위한 것인지, 잘라낸 지역을 지키기 위한 것인지, 그 건설 의도는 분명하지 않다. 이 방벽에 관해 알려진 것은 이미 있던 "워트의 방벽"을 연장하는 형태로 잉글랜드와 웨일스 사이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또한 프랑크 왕국과도 대등한 외교를 펼쳤고, 이처럼 힘을 과시한 오파는 렉스 앙글로룸(Rex Anglorum), 즉 모든 앵글인의 왕이라고 스스로 칭했다.
4. 1. 에설발드 왕과 오파 왕의 통치
8세기 머시아는 에설발드 왕(재위 716년-757년)과 오파 왕(재위 757년-796년)의 통치 아래 전성기를 맞이했다.[23] 에설발드는 웨섹스를 굴복시키고 남부 잉글랜드에 대한 패권을 확립했다. 오파 왕은 머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는다.[23]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잉글랜드 남부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왕국 행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장 도시를 건설하고, 영국에서 최초의 대규모 금 주화 발행을 감독했다. 그는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회 행정에 참여했으며(단명한 리치필드 대주교 관구를 후원, 787~799), 심지어 샤를마뉴와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하기도 했다.[23] 오파의 방벽을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3]4. 2. 쇠퇴와 웨섹스와의 통합
오파 왕(757~796년 재위) 사후, 머시아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796년 7월 오파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에그프리드는 불과 5개월밖에 생존하지 못했고, 왕국은 같은 해 12월 코엔울프라는 먼 친척에게 넘어갔다. 821년 코엔울프의 형제 세올울프가 머시아의 왕위를 계승했고, 그는 그위네드의 데간위 요새를 공격하여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과시했다.그러나 이 시기 웨섹스의 에그버트(802년부터 839년까지 웨섹스 왕)의 세력이 성장했고, 825년 에그버트는 엘렌던 전투에서 세올울프를 쫓아낸 머시아의 왕 베오른울프를 격파했다.[37][38][39][40][41][42] 엘렌던 전투는 결정적이었다. 이 시점에서 머시아는 켄트 왕국, 서식스 왕국, 서리, 그리고 아마도 에섹스 왕국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베오른울프는 동 앵글족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죽었고, 그의 후임자였던 전 에덜만 루데카(826~827년 재위)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또 다른 에덜만인 위글라프는 그 후 2년이 채 안 되어 웨섹스의 에그버트에 의해 머시아에서 쫓겨났다. 830년 위글라프는 머시아의 독립을 되찾았지만, 이때쯤 웨섹스는 분명히 잉글랜드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 840년경 베오르트울프가 위글라프를 계승했다.
5. 머시아의 사회와 문화
머시아는 앵글로색슨 사회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으며, 비교적 로마와 기독교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었다. 런던을 세력 하에 둔 이후에는 상업에 힘썼으며, 왕의 초상과 이름을 새긴 화폐를 많이 주조했다.
머시아의 상징인 솔티어는 오파 왕 시대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44] 13세기에 머시아 왕국의 귀속 문장이 되었으며,[45] "청색 바탕에 금색(또는 노란색) 솔티어"로 블레이즈되었다. 이 문장은 오파 왕이 설립한 세인트 알반스 대성당에서 사용되었고, 세인트 올반스 자치구 합병 후 도시의 법인 인장에 사용되었으며, 1634년 문장 시찰에서 공식 문장으로 기록되었다.[46] 솔티어는 깃발과 문장으로 모두 사용되며, 탬워스 성에서 오늘날까지 휘날리고 있다.[44] 2014년에는 깃발 연구소에 의해 머시아 깃발로 인정받았다.[47]
금색 삼지창을 얹은 은색 쌍두 독수리는 1958년 이후 머시아 연대 등 여러 영국 육군 부대에서 머시아의 문장 도안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11세기 머시아 백작 리오프릭의 귀속 문장에서 유래했다.[48]
와이번은 19세기에 머시아와 강한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 미들랜드 철도는 레스터 앤 스와닝턴 철도에서 물려받아 다리가 없는 흰색(은색) 와이번을 문장으로 사용하며 "와이번은 머시아 왕국의 기치"라고 주장했다.[50] 그러나 1897년 ''철도 잡지''는 "와이번이 머시아 왕국과 연관되었다는 근거가 없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51]
브람 스토커의 1911년 소설 ''하얀 벌레의 소굴''은 머시아를 배경으로 하며, 미들랜드 철도의 머시아 흰색 와이번은 소설 속 괴물 벌레로 변형되었다.
언어학자이자 톨킨 학자인 톰 시피는 J. R. R. 톨킨의 ''해밀의 농부 자일스''에서 용이 지배하는 중간 왕국이 톨킨이 자란 잉글랜드의 머시아를 기반으로 한다고 제안했다.
5. 1. 사회 계급 구조
앵글로색슨 시대의 머시아는 3~4개의 신분 계급으로 구성된 사회였다.[56] 최상위 지배 계급은 소왕국의 왕족 출신인 에얼도르만(Ealdorman)이었다. 그 아래에는 에얼도르만의 종사(従士)인 예시스(Gesith)와 세인(Thegn)이라는 토지 소유 계급이 있었다. 이들이 소유한 토지는 일반 농민인 체오를(Ceorl)이 경작했으며, 노예도 존재했다.[56] 노예는 전쟁에서 패배한 국가의 백성이나 빚을 진 채무자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중요한 '거래 상품'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앵글인의 노예가 로마에서 매매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56] 에얼도르만, 예시스, 세인과 함께 무역 상인과 성직자도 특권 계급을 형성했으며, 당시 기록에는 사회를 '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일하는 자'의 세 계급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었다.[57]5. 2. 종교
머시아의 초기 왕들은 이교도였으며 앵글로색슨 칠왕국에서 다른 왕국들보다 더 오랫동안 기독교의 침략에 저항했다.[31] 머시아 통치자들은 656년 페다의 통치 때까지 이교도 신앙을 유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를 믿는 웨일스 통치자들과 연합하여 노섬브리아에 저항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머시아에서 기독교가 처음 나타난 것은 적어도 30년 전인 628년 사이렌체스터 전투 이후였으며, 이때 펜다는 이전 서색슨 영토인 휘체(Hwicce)를 자신의 왕국에 편입시켰다.[32]머시아의 기독교 개종은 7세기 후반에 일어났으며, 펜다가 패배하고 사망할 무렵 머시아는 기독교 국가들에 의해 거의 포위되었다. 디우마는 아일랜드의 수도사이자 오스위의 선교사 중 한 명이었으며, 이후 주교로 서임되었는데, 머시아에서 활동한 최초의 주교였다. 기독교는 오스위가 페다를 미들 앵글의 부왕으로 지지하면서 마침내 머시아에서 발판을 마련했고, 그에게 오스위의 딸 알치플래드와 결혼하고 그녀의 종교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33]
머시아를 기독교화하는 결정적인 조치는 머시아에서 활동한 다섯 번째[34] 주교인 체드 (베데가 라틴어로 ''Ceadda''로 표기)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논쟁적인 인물은 울프헤어 왕으로부터 리치필드에 수도원을 세울 땅을 받았다. 증거에 따르면 리치필드 복음서는 730년경 리치필드에서 만들어졌다. 다른 앵글로색슨 왕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머시아 왕들이 세운 많은 소규모 수도원은 정치/군사 및 교회 지도자들이 혈연 관계를 통해 그들의 통합을 강화할 수 있게 해주었다.[35]
6. 머시아의 유산
머시아는 앵글로색슨 사회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특히 7왕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에델발드 (재위: 716 - 757) 와 오파 (재위: 757 - 796) 같은 강력한 왕들에 의해 통일 왕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에델발드는 교회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여 국력을 축적하고, 서쪽의 웨섹스 왕국을 굴복시켰다. 오파 시대에는 오랜 숙적 노섬브리아 왕국을 굴복시켜 상위 지배권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하에 있던 소왕국을 해체하고 오파의 친족과 복심을 통치자로 보냈다.[58]
오파가 건설한 방벽은 하드리아누스 장벽에 뒤지지 않는 역사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이 방벽은 쳐들어오는 브리튼 족을 막기 위한 것인지, 잘라낸 지역을 지키기 위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잉글랜드와 웨일스 사이의 경계를 확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파는 프랑크 왕국과 대등한 외교를 펼쳤고, 스스로 렉스 앙글로룸(Rex Anglorum), 즉 모든 앵글인의 왕이라고 칭했다.
6. 1. 행정 구역
10세기 초 머시아가 웨섹스에 합병된 후, 웨섹스 통치자들은 머시아의 전통적인 구역을 따라 셔(Shire)로 나누었다. 이 셔들은 1974년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원래 경계를 따르고 있다.6. 2. 상징
머시아를 상징하는 문양으로는 X자형 십자가(솔티어)와 쌍두 독수리가 있다. 솔티어는 오파 왕 시대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13세기에는 머시아 왕국의 귀속 문장이 되었다. 금색 삼지창을 얹은 은색 쌍두 독수리는 11세기 머시아 백작 레오프릭의 문장에서 유래했으며, 1958년 이후 머시아 연대를 비롯한 여러 영국 육군 부대에서 머시아의 문장으로 사용되었다. 와이번(Wyvern, 날개 달린 뱀)은 19세기에 머시아와 강한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 미들랜드 철도는 와이번을 문장으로 사용했으며, 이는 레스터와 관련이 있는 상징으로 여겨졌다.6. 3. 현대의 머시아
'미들랜드'라는 용어는 1475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37] 19세기 후반부터 머시아라는 이름이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토마스 하디의 웨섹스 소설과 브램 스토커의 소설 ''하얀 벌레의 둥지''에서 현대 머시아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타났다.[39] 1908년 버밍엄 대학교 총장 올리버 로지 경은 머시아를 관할하는 대학교가 브리스틀의 새 대학교와 협력할 것이라고 언급했다.[39]오늘날 '머시아'라는 이름은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영국 육군에서는 머시아 연대와 로열 머시아 앤 랭커스터셔 요먼리에서 이 이름을 사용한다.[40] 1967년 헤리퍼드셔, 슈롭셔, 우스터셔의 경찰이 통합되어 웨스트 머시아 경찰서가 되었고, 2009년 웨스트 머시아 경찰로 이름이 변경되었다.[40]
미들랜드 전역의 전화번호부에는 "머시아"를 사용하는 단체들이 많이 있으며, 2012년에는 머시아 지역 축구 리그가 결성되었다.[41] 상업 라디오 방송국인 히츠 라디오 코번트리 & 워릭셔는 원래 머시아 사운드로 시작하여 여러 번 이름을 변경했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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