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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파 (머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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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파는 8세기 머시아 왕국의 강력한 왕으로, 앵글로색슨 7왕국 시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앵글로색슨 연대기》, 앵글로색슨 헌장 등을 통해 그 시대를 파악할 수 있으며, 757년 왕위에 올라 잉글랜드 중부 지역을 통합했다. 켄트와 서식스를 정복하고 웨일스와의 충돌, 이스트앵글리아, 웨섹스, 노섬브리아 왕국과의 관계를 맺었다. 오파는 오파의 제방 건설, 화폐 제도 개혁, 리치필드 대교구 설립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으며, 기독교 신앙을 장려하고 교회와도 관계를 맺었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와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796년 사망 후 아들 에그프리드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짧은 기간 통치했다. 오파는 잉글랜드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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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파 (머시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파의 은화
오파의 통치 기간 동안 주조된 은화에 묘사된 오파의 모습, 범례: }}
통치 기간757년 – 796년 7월 29일
전임자베오른레드
후임자에그프리트
배우자키네스리스
자녀에그프리트, 머시아 왕
에아드부르흐, 웨식스 여왕
엘플레다, 노섬브리아 여왕
에셀부르흐
아버지싱프리스
사망일796년 7월 29일
매장지베드퍼드
가문
왕가이클링가스
머시아 왕국
주요 사건오파의 둑 건설
관련 인물
관련 인물에셀베르트
켄울프

2. 시대적 배경과 사료

8세기 전반 앵글로색슨족이 거주하던 잉글랜드는 여러 왕국으로 나뉘어 경쟁하던 시기였다. 오파가 통치하기 이전, 머시아의 왕 애설발드는 험버강 남쪽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상왕(overlord)으로 인정받고 있었다.[2][134] 애설발드를 비롯한 강력한 머시아 왕들의 우위는 9세기 웨섹스의 에그버트가 부상하기 전까지 이어졌다.[3][135]

오파는 초기 중세 영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통치자로 평가받지만,[4][136] 안타깝게도 그의 생애를 직접적으로 다룬 동시대의 전기는 남아있지 않다.[3][135] 따라서 그의 통치와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간접적인 사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오파 시대를 연구하는 데 활용되는 주요 사료는 다음과 같다.



이러한 사료들은 각각의 특징과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오파의 통치와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각 사료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분석은 하위 섹션에서 더 깊이 다룬다.

2. 1. 앵글로색슨 족의 7왕국 시대

오파 통치 시기 영국의 왕국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언급된 머시아 왕 오파


오파 시대 머시아 왕국의 판도(녹색 부분)


8세기 전반, 앵글로색슨 족의 여러 왕국 중에서는 머시아 왕국의 애설발드가 가장 강력한 지배자였다. 그는 731년까지 험버강 남쪽의 모든 지방에서 상왕(overlord)으로 인정받았다.[2][134] 애설발드는 7세기 중반부터 9세기 초까지 이어진 강력한 머시아 왕들 중 한 명이었으며, 머시아의 이러한 우위는 9세기 웨섹스의 에그버트 시대에 이르러서야 흔들리기 시작했다.[3][135]

애설발드의 뒤를 이은 오파는 초기 중세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4][136] 그의 삶을 기록한 동시대의 전기는 남아있지 않다.[3][135] 따라서 오파와 그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간접적인 자료에 의존해야 한다.

이 시대의 주요 자료 중 하나는 고대 영어로 쓰인 연대기 모음집인 《앵글로색슨 연대기》이다. 하지만 이 연대기는 웨섹스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웨섹스 중심적인 시각을 보이며 머시아 왕 오파가 실제로 누렸던 권력의 크기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한계가 있다.[5][137]

오파의 권력은 그가 발행한 앵글로색슨 헌장(charter)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헌장은 왕이 자신의 신하나 교회에 토지 또는 특권을 부여하는 문서로,[138] 토지를 하사할 권한을 가진 왕들이 증인으로 참여했다.[6][7][139][140] 헌장에 기록된 증인 목록에는 해당 지역의 왕과 그를 상위 군주로 섬기는 상왕(overlord)의 이름이 함께 기재되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이스메레 칙허장(Ismere Diploma)에는 후이체(Hwicce)의 왕 오셔(Oshere)의 아들 애설릭(Æthelric)이 머시아의 왕 애설발드의 '부왕'(subregulus)으로 기록되어 있어 당시 왕들 간의 위계 관계를 보여준다.[8][9][141][142]

8세기 수도사이자 역사가인 성 비드가 저술한 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영국 교회 역사la 역시 중요한 자료이다. 이 책은 731년까지의 사건만을 다루지만, 앵글로색슨 시대 영국의 역사, 특히 오파 통치기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10][143]

오파의 통치력을 보여주는 가장 가시적인 증거는 웨일스와의 국경 지대에 건설된 거대한 토목 구조물인 오파의 제방(Offa's Dyke)이다. 이 제방의 건설은 오파가 막대한 자원을 동원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11][144] 이외에도 '부족의 히데지'(Tribal Hidage)라는 문서가 있는데, 이는 앵글로색슨 부족들의 목록과 각 부족의 규모를 기록한 것으로 오파의 지배 영역을 추정하는 데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지만, 이 문서가 정확히 오파 시대에 작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이견이 있다.[12][145]

또한, 샤를마뉴 대제의 궁정에서 활동했던 잉글랜드 출신 학자 알쿠인이 남긴 편지들도 중요한 사료이다. 알쿠인은 샤를마뉴의 주요 조언자로서 잉글랜드의 여러 왕, 귀족, 성직자들과 서신을 교환했는데,[13][146] 이 편지들은 오파와 유럽 대륙, 특히 카롤링거 왕조와의 관계를 밝혀준다. 오파가 발행한 주화가 카롤링거 왕조의 화폐 제도를 모방했다는 사실 등도 알쿠인의 서신을 통해 알려졌다.[14][15][147][148]

2. 2. 주요 사료



오파는 초기 중세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4][136] 그에 대한 동시대의 전기는 남아있지 않다.[3][135] 따라서 오파의 통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사료들에 의존해야 한다.

  • '''앵글로색슨 연대기''': 고대 영어로 쓰인 연대기 모음으로, 앵글로색슨족의 역사를 다루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연대기》는 웨섹스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웨섹스 중심적인 시각을 가지며, 이로 인해 머시아의 왕이었던 오파가 실제로 누렸던 권력의 크기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5][137]

  • '''앵글로색슨 헌장''': 왕이 자신의 신하나 성직자들에게 토지를 하사하며 발행한 문서이다. 이 헌장들은 토지를 하사할 권한을 가진 왕들이 증인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당시의 권력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6][7][139][140] 헌장에는 토지를 받는 왕과 그의 상위 군주(overlord)의 이름이 함께 기록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이스미어 외교 문서(Ismere Diploma)에는 후이체(Hwicce)의 왕 애설릭(Æthelric)이 머시아의 왕 애설발드의 '하위 왕'(subregulusla)으로 기록되어 있다.[8][9][141][142] 오파의 통치 시기부터 작성된 헌장들을 통해 그의 강력했던 권력을 엿볼 수 있다.

  • '''영국 교회 역사''' (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la): 8세기 초 베다가 저술한 영국의 교회 역사서이다. 비록 731년까지의 사건만을 다루고 있지만, 앵글로색슨족 역사 연구의 핵심 자료 중 하나로서 오파 통치기의 중요한 배경 정보를 제공한다.[10][143]

  • '''오파의 제방''' (Offa's Dyke): 오파 시대에 대부분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토목 구조물이다. 이는 오파가 광대한 자원을 동원하고 이를 조직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던 능력을 보여주는 실질적인 증거이다.[11][144]

  • '''부족 히데지''' (Tribal Hidage): 7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로,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여러 부족들의 토지 규모(hide)를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가 오파의 통치 시기에 작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만약 그렇다면 오파의 지배 범위를 파악하는 데 추가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12][145]

  • '''알쿠인의 편지''': 잉글랜드 출신의 학자이자 부제였던 알쿠인은 10년 이상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의 궁정에서 주요 고문으로 활동하며 잉글랜드의 왕, 귀족, 성직자들과 폭넓게 서신을 교환했다.[13][146] 그의 편지들은 오파의 대륙과의 외교 관계를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오파가 발행한 주화가 카롤링거 왕조의 화폐 제도를 참고했다는 사실 등을 알려준다.[14][15][147][148]

3. 가계와 가족

오파의 가계는 앵글로색슨 족 계보와 『앵글리안 컬렉션』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7세기 초 머시아를 통치했던 피바 왕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16][149] 또한 오파는 약 40년간 머시아를 다스렸던 선대 왕 애설발드와도 혈연관계에 있었다.[17][15][150][153]

오파의 아내는 시네트리드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에그프리스와 최소 세 명의 딸이 있었다.[18][153]

3. 1. 앵글로색슨 족 계보

오파 가계도


오파 왕의 아내 시네트리드의 페니


오파의 가계는 머시아 왕가의 계보를 모은 『앵글리안 컬렉션』(Anglian collection) 및 앵글로색슨 족 계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는 머시아 왕 4명의 계보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7세기 초 머시아를 통치했던 피바의 후손이다. 오파의 계보는 피바의 아들 이오와로부터 시작하여 오스모드(Osmod), 에안울프(Eanwulf), 그리고 오파의 아버지인 씽프리스(Thingfrith)를 거쳐 오파 본인에게 이어진다.

오파 이전에 약 40년간 머시아를 통치했던 애설발드 역시 이 계보에 따르면 이오와의 후손으로, 오파의 할아버지인 에안울프는 애설발드의 사촌이었다.[16][149] 애설발드는 에안울프에게 휘체 지역의 토지를 하사하는 칙허장을 내린 바 있어[149], 오파와 애설발드가 같은 가문 출신일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실제로 오파는 한 칙령에서 애설발드를 자신의 친족이라고 언급했으며, 애설발드의 형제인 헤어드베르트(Heardberht)는 오파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칙령의 증인으로 계속 이름을 올렸다.[17][15][150][153]

오파의 아내는 시네트리드(Cynethryth)였으나 그녀의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부부 사이에는 아들 에그프리스와 최소 세 명의 딸, 앨플래드(Ælfflæd), 에드버그(Eadburh), 애설버그(Æthelburh)가 있었다.[18] 애설버그는 휘체의 왕 올드레드(Ealdred)의 친족으로 수도원장이었다는 추측이 있지만, 동시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유명한 여성들도 있었다.[20][153]

3. 2. 가족 관계



오파의 가계는 머시아 왕 네 명의 계보를 포함하는 앵글로족 계보(Anglian collection)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 왕은 모두 7세기 초 머시아를 통치했던 피바의 후손이다. 오파는 피바의 아들 이오와(에오와)의 후손으로, 그 혈통은 오스모드(Osmod), 에안울프(Eanwulf), 그리고 오파의 아버지인 씽프리스(Thingfrith)를 거쳐 이어진다. 오파 이전에 약 40년간 머시아를 다스렸던 애설발드 역시 이 계보에 따르면 이오와의 후손이며, 오파의 할아버지 에안울프는 애설발드의 사촌이었다.[16][149] 애설발드는 에안울프에게 휘체(Hwicce) 지역의 땅을 하사하기도 했으며, 이는 오파와 애설발드가 같은 가문 출신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오파는 한 칙령에서 애설발드를 자신의 친족으로 언급했고, 애설발드의 형제 헤어드베르트(Heardberht)는 오파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칙령의 증인으로 계속 참여했다.[17][15][150][153]

오파의 아내는 시네트리드(Cynethryth)였으며, 그녀의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에그프리스(Ecgfrith)와 최소 세 명의 딸, 앨플래드(Ælfflæd), 에드버그(Eadburh), 애설버그(Æthelburh)가 있었다.[18] 애설버그는 휘체 왕 올드레드의 친족으로 수도원장이었다는 추측이 있지만, 당시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유명한 여성들도 존재했다.[20][153]

4. 초기 통치와 잉글랜드 중부 지역 통합

757년 에설발드 왕 암살 이후 혼란스러운 왕위 계승 과정을 거쳐 오파가 왕위에 올랐다.[19] 이 과정에서 약화된 머시아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오파는 휘체, 매그넌세테, 린지 왕국 등 전통적인 종속국들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확립해야 했다.[1][20][21][22]

오파는 또한 런던미들섹스를 포함한 에섹스 왕국 일부 지역에 대한 머시아의 지배력을 통치 초기에 공고히 했다.[23][24] 비록 에식스 왕가 자체는 존속했지만, 이 지역들은 사실상 오파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25]

그러나 오파의 초기 영향력은 머시아의 전통적인 핵심 지역과 그 주변부에 한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에설발드가 확보했던 잉글랜드 남부에 대한 패권은 왕위 계승 분쟁 동안 약화되었으며, 오파가 켄트 등 남부 지역으로 다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은 764년 이후의 일이다.[26]

4. 1. 왕위 계승 분쟁

716년부터 머시아를 통치하던 에설발드는 757년에 암살되었다. 베다의 영국 민족 교회 역사 속편(베다 사후 익명으로 덧붙여진 부분)에 따르면, 왕은 "밤에 자신의 호위병들에게 배신당해 살해되었다"고 하지만, 그 이유는 기록되지 않았다.[152]

에설발드의 뒤를 이어 베온레드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베다의 속편은 베온레드가 "짧은 기간 동안 불행하게" 통치했으며, "같은 해 오파가 유혈 사태를 통해 머시아 왕국을 차지하려 하여 베온레드를 몰아냈다"고 덧붙인다.[152]

오파의 은화


그러나 789년의 한 헌장에 "오파의 통치 31년째"라고 기록되어 있어, 오파가 실제로는 758년에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도 있다.[153]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은 오파가 휘체나 매그넌세테와 같이 전통적으로 머시아에 속했던 지역들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확립해야 했음을 시사한다. 오파의 통치 초기 2년간 발행된 헌장들은 휘체의 왕들을 그의 권위 아래 있는 '레굴리'(reguli|레굴리la, 작은 왕)로 묘사한다. 그는 740년 이후 독립적인 통치자에 대한 기록이 없는 매그넌세테에 대한 통제권도 빠르게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다.[154][153][155] 오파는 아마도 초기부터 린지 왕국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이며, 린지의 독립 왕조는 이 시기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154]

8세기 에섹스 왕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기존 자료에 따르면 에섹스 왕국의 일부였던 런던미들섹스는 에설발드의 통치 기간 동안 이미 머시아의 통제하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에설발드와 오파 모두 미들섹스와 런던의 토지를 자신의 의지대로 하사했다. 767년 오파의 헌장에는 지역 통치자의 증인 없이 할로우의 토지를 처분한 기록이 있다.[157] 런던과 미들섹스는 오파의 통치 초기에 빠르게 그의 통제하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158] 에섹스 왕가는 8세기에도 존속했으므로, 에섹스 왕국은 8세기 대부분 또는 전체 기간 동안 머시아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서 자체적인 통치자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다.[159]

오파는 통치 초기 몇 년 동안 전통적인 머시아의 핵심 지역 밖에서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에설발드가 확보했던 잉글랜드 남부에 대한 우위는 왕위 계승 분쟁 동안 무너진 것으로 보이며, 머시아의 세력이 다시 확장되기 시작한 것은 764년 켄트에서 오파의 영향력에 대한 증거가 나타난 이후이다.[160]

4. 2. 주변 지역 통합



선왕 에텔발드가 757년 암살되고 베온레드가 잠시 왕위를 차지했다가 축출되는 등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있었다.[19] 이는 오파가 휘체나 매그넌세테와 같이 전통적으로 머시아에 속했던 지역들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확립해야 했음을 시사한다. 오파의 통치 초기 2년간 발행된 헌장을 보면, 휘체 왕들을 오파의 권위 아래 있는 '소왕'(reguli)으로 칭하고 있다.[20][1][21] 매그넌세테의 경우, 740년 이후 독립적인 통치자에 대한 기록이 없어 오파가 빠르게 통제권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다.[1][20][21] 린지 왕국 역시 오파가 초기부터 통제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에 린지의 독립 왕조가 사라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1][22]

8세기 동색슨족의 역사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기존 자료에 따르면 에식스 왕국의 일부였던 런던미들섹스는 에텔발드 통치 시기부터 머시아의 영향 아래 있었다. 에텔발드와 오파 모두 이 지역의 토지를 자유롭게 하사했으며, 특히 767년 오파의 헌장에서는 지역 통치자를 증인으로 세우지 않고 해로우의 토지를 처분한 기록이 있다.[23] 이를 통해 런던과 미들섹스는 오파 통치 초기에 빠르게 그의 통제하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24] 하지만 에식스 왕가 자체는 8세기까지 존속했으므로, 에섹스 왕국 본토는 오파의 통치 기간 대부분 동안 머시아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서 자체적인 통치자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다.[25]

오파는 통치 초기 몇 년 동안 머시아의 전통적인 핵심 지역 밖에서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을 수 있다. 에텔발드가 확보했던 잉글랜드 남부에 대한 우위는 왕위 계승 분쟁 중에 약화되었으며, 764년 켄트에서 오파의 영향력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머시아의 세력이 다시 확장되지 않았다.[26]

5. 켄트와 서식스 정복

오파와 관련된 지역을 보여주는 남동부 잉글랜드 지도


오파는 머시아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남동부의 주요 왕국이었던 켄트서식스에 대한 정복 활동을 벌였다.

760년대 들어 켄트 왕국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은 오파에게 개입의 기회를 제공했다.[27][161] 오파는 764년경부터 켄트의 토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하사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으며, 현지 왕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 시도했다.[29][163][27][161] 776년 오트퍼드에서 머시아군과 켄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으나[32][166], 그 결과와 이후 한동안 오파의 켄트 지배 여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785년부터 오파는 켄트를 머시아 왕국의 일부처럼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사실상 켄트 왕국의 독립을 종식시키고 머시아에 병합한 것으로 평가된다.[33][167][34][168] 이러한 머시아의 지배는 오파가 사망한 796년까지 이어졌다.[35][169]

서식스 왕국에 대해서도 오파는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서식스는 여러 지역 왕들이 동시에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오파는 통치 초기에 서부 서식스의 왕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았으나 동부 서식스 지역은 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38] 771년경 오파가 '헤이스팅스 사람들'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지만[38], 서식스 전체에 대한 확실한 지배권을 확립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일부 증거들은 오파가 켄트를 완전히 장악한 7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서식스에 대한 지배력도 공고히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39]

5. 1. 켄트 왕국과의 관계



오파는 762년 이후 켄트에서 발생한 정치적 불안정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27][161] 켄트는 전통적으로 동부와 서부를 각기 다른 왕이 다스렸지만, 보통 한 명의 왕이 우위를 점하는 공동 왕국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28][162] 762년 이전에는 애텔버트 2세와 에드버트 1세가 켄트를 통치했으며, 에드버트 1세의 아들 에아드울프도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762년 애텔버트 2세가 사망하고, 같은 해 에드버트 1세와 에아드울프에 대한 기록도 사라졌다. 이후 2년간 시게레드(켄트), 에안문드(켄트), 헤아베르트(켄트) 등 다른 인물들이 켄트의 왕으로 언급된다.

764년, 오파는 로체스터의 토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하사하는 칙허장을 내렸는데, 이때 헤아베르트가 켄트의 왕으로서 증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765년에는 에그버트 2세가 헤아베르트와 함께 켄트 왕으로 등장하는 칙허장이 발행되었고, 이는 나중에 오파에 의해 승인되었다.[29][163] 이를 통해 당시 오파가 켄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으며, 헤아베르트는 오파에 의해 왕위에 오른 그의 의뢰인(client)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7][161]

오파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켄트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오파는 에그버트 2세가 발행한 칙허장을 "자신의 봉신(에그버트)이 주군(오파)의 증인 없이 주군이 할당한 토지를 다른 이에게 넘겨주는 것은 잘못"이라는 이유로 취소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칙허장의 발행 시점과 오파의 취소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30][164] 오파는 764년부터 최소 776년까지 켄트의 실질적인 종주였을 수 있다. 765년에서 776년 사이에 오파가 켄트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제한적인데, 774년에 그가 켄트의 토지를 하사한 두 건의 칙허장이 있지만 이 문서들의 진위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어, 776년 이전 오파의 켄트 개입은 764년에서 765년 사이의 일로 한정될 수도 있다.[31][165]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776년경 "머시아인과 켄트인들이 오트퍼드에서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전투의 결과는 명시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는 머시아의 승리로 해석되었으나, 785년까지 오파가 켄트에서 확실한 권위를 가졌다는 증거가 부족하다. 특히 784년의 칙허장에는 에알문드라는 켄트 왕만이 언급되어 있어, 오트퍼드 전투에서 오히려 머시아가 패배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2][166] 분쟁의 원인도 불분명하다. 만약 오파가 776년 이전에 켄트를 지배하고 있었다면, 오트퍼드 전투는 머시아의 지배에 대한 켄트의 반란이었을 수 있다.[1][154]

하지만 에알문드는 이후 역사 기록에 다시 등장하지 않으며, 785년부터 789년까지 발행된 일련의 칙허장은 오파의 권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시기 오파는 켄트를 "머시아 왕국의 평범한 지방(주)으로 취급"했으며,[33][167] 그의 행동은 단순한 종주권 행사를 넘어 켄트를 병합하고 지역 왕가를 제거하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한 역사가의 표현처럼, 785년 이후 "오파는 켄트 왕들의 종주가 아닌 경쟁자"였다.[34][168] 머시아의 켄트 지배는 오파가 사망한 796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그해 에드버트 프렌이 잠시 켄트의 독립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35][169]

켄트 왕 에알문드는 웨섹스의 에그버트의 아버지로 추정되며, 780년대 중반 오파의 켄트 개입이 에그버트가 이후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하게 된 배경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825년 에그버트가 켄트를 침공했을 때 남동부 사람들이 그에게 협력한 이유를 "이전에 그의 친족(아마도 에알문드)으로부터 부당하게 쫓겨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36][170] 이는 에알문드가 켄트를 포함한 남동부 지역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졌을 수 있으며, 오파의 개입이 이러한 지역적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37][171]

5. 2. 서식스 왕국과의 관계

오파가 서식스 왕국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헌장에서 찾을 수 있지만, 켄트의 경우처럼 사건의 전개에 대해 역사가들 사이에 명확한 합의는 없다.[38] 서식스 왕들에 대한 생존 증거가 거의 없지만, 여러 왕이 동시에 통치했으며 단일 왕국을 형성하지 못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오파의 통치 초기에는 서부 서식스의 지역 왕들이 그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헤이스팅스 주변 지역인 동부 서식스는 쉽게 복종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12세기 연대기 작가인 더럼의 시메온은 771년에 오파가 "헤이스팅스 사람들"을 격파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오파의 지배가 왕국 전체로 확장되었음을 기록한 것일 수 있다.[38]

그러나 이 사건을 뒷받침하는 헌장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오파의 서식스 직접 개입은 770년에서 771년경의 짧은 기간으로 제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772년 이후부터 790년경까지는 서식스에 대한 머시아의 관여 증거가 더 이상 없으며, 오파는 켄트에서와 마찬가지로 780년대 후반에 서식스를 장악했을 가능성이 있다.[39]

6. 이스트앵글리아, 웨섹스, 노섬브리아와의 관계

오파의 치세 동안 주변 왕국들과의 관계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스트앵글리아 왕국은 베오르나 왕(즉위 추정 758년) 시기 독자적인 주화를 발행하며 머시아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했다.[40][174] 이후 에설베르트 2세(즉위 779년) 역시 자신의 주화를 발행하며 독립을 이어갔으나, 794년 오파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41][175] 이는 오파가 이스트앵글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음을 보여준다.

남쪽의 웨섹스 왕국과는 경쟁 관계에 있었다. 웨섹스의 키네울프 왕(즉위 757년)은 머시아가 빼앗았던 영토 일부를 되찾았으나, 오파는 779년 벤싱턴 전투에서 승리하여 템스강 유역 일부를 재정복했다.[45][179] 786년 키네울프가 살해된 후, 오파는 베오르트리치의 왕위 계승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베오르트리치는 오파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45][46][179][180] 오파의 화폐가 웨섹스에서 통용되었고,[47][181] 789년에는 자신의 딸 에드부르를 베오르트리치와 결혼시켜 웨섹스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46][180]

북쪽의 노섬브리아 왕국과는 결혼 동맹을 맺었다. 792년, 오파는 딸 앨플레드를 노섬브리아의 왕 에텔레드 1세와 캐터릭에서 결혼시켰다.[53][187] 하지만 이 결혼 동맹에도 불구하고, 노섬브리아가 오파의 통치 기간 동안 머시아에 종속되었다는 증거는 없다.[1][154]

6. 1. 이스트앵글리아 왕국

오파의 은 페니


이스트앵글리아 왕국에서는 베오르나가 대략 758년에 왕위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베오르나의 첫 번째 주화는 오파의 주화보다 먼저 주조되었는데, 이는 이스트앵글리아가 머시아로부터 독립적인 세력이었음을 시사한다. 이후 이스트앵글리아의 역사는 다소 불분명하지만, 779년 에설베르트 2세가 왕이 되어 독자적인 주화를 발행할 정도로 오랫동안 독립을 유지했다.[40][174]

그러나 794년, ''앵글로색슨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오파 왕은 에설베르트 왕의 머리를 베라고 명령했다." 오파는 790년대 초반 이스트앵글리아에서 페니를 주조했는데, 이는 에설베르트가 오파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그 결과로 참수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41][175] 에설베르트가 오파의 아내 키네트리드의 계략으로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 전설이 담긴 가장 오래된 기록은 11세기와 12세기의 것이어서 현대 역사가들은 신빙성이 낮다고 본다.[42][176] 또한 전설에 따르면 에설베르트는 서튼 세인트 마이클에서 살해되었고, 남쪽으로 약 6.44km 떨어진 헤리퍼드에 묻혔다고 한다. 이후 헤리퍼드에서는 에설베르트 숭배가 성행하여 한때 캔터베리 다음가는 순례지가 되기도 했다.[43][44][177][178]

6. 2. 웨섹스 왕국

머시아 남쪽의 웨섹스 왕국에서는 757년에 키네울프가 왕위에 올라, 이전 왕 에설발드가 웨섹스로부터 정복했던 국경 영토의 상당 부분을 되찾았다. 오파는 779년 벤싱턴 전투(옥스퍼드셔)에서 키네울프를 상대로 중요한 승리를 거두어 템스강을 따라 일부 지역을 재정복했다.[45] 이 전투 이전의 확실한 문서에서 키네울프가 오파의 종속자로 묘사된 것은 없으며,[37] 오파가 키네울프의 종주였다는 증거도 없다.[45]

786년에 키네울프가 살해되자, 오파는 베오르트리치를 웨섹스 왕위에 앉히기 위해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설령 오파가 베오르트리치의 왕위 계승을 직접 돕지 않았더라도, 베오르트리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오파를 어느 정도 자신의 종주로 인정했을 가능성이 높다.[45][46] 오파의 화폐는 웨섹스 왕국 전역에서 사용되었고, 베오르트리치는 오파가 죽은 후에야 자신의 화폐를 주조했다.[47] 789년, 베오르트리치는 오파의 딸 에드부르와 결혼했다.[46]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두 왕이 함께 엑버트를 프랑크 왕국으로 "3년" 동안 추방했다고 기록하며, "베오르트리치는 자신의 딸을 왕비로 두었기 때문에 오파를 도왔다"고 덧붙였다.[48] 일부 역사가들은 연대기의 "3년" 기록이 오류이며 실제로는 "13년"(789년~802년)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해석에는 논란이 있다.[49]

알프레드 대왕의 전기 작가인 9세기 수도사 아세르는 에드부르에 대해 언급하며, 그녀가 "거의 모든 왕국에서 권력을 가졌다"고 말하고 "아버지의 방식대로 폭군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50] 웨섹스에서 에드부르가 누린 권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버지 오파의 종주권과 관련이 있었다.[51]

만약 오파가 779년 벤싱턴 전투 이전까지 웨섹스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면, 템스 강 남쪽에서의 성공은 남동부(켄트)에 개입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784년경 켄트의 엑버트 2세 사망과 786년 키네울프의 죽음은 오파가 켄트를 장악하고 베오르트리치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이 해석은 오파가 764년~765년 이후 켄트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일부 역사가들의 견해를 전제로 한다.[52]

6. 3. 노섬브리아 왕국

오파의 결혼 동맹은 그의 딸 Ælfflæd|앨플레드ang가 792년 캐터릭에서 노섬브리아의 에텔레드 1세와 결혼하면서 노섬브리아 왕국까지 확장되었다.[53][187] 그러나 오파의 통치 기간 동안 노섬브리아가 머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1][154]

7. 웨일스와 오파의 제방

오파는 재위 기간 동안 서쪽의 웨일스 왕국들과 빈번하게 충돌했다.[54][55][188][189][190] 이 시기 가장 주목할 만한 유물은 그의 이름을 딴 오파의 제방이다. 이 거대한 흙으로 만든 제방은 잉글랜드웨일스 사이의 경계를 따라 길게 뻗어 있으며, 당시 머시아의 강력한 힘과 웨일스와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여겨진다.[56][57][191][192] 제방은 웨일스의 침입을 막고 그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며[57][192], 이는 막대한 노동력과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던 오파의 강력한 왕권을 상징한다.[61][196] 제방의 건설과 관련된 상세한 내용 및 웨일스와의 구체적인 충돌 기록은 하위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7. 1. 웨일스와의 충돌

오파는 다양한 웨일스 왕국과 자주 충돌했다. 760년에는 헤리퍼드에서 머시아인과 웨일스인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으며, 10세기의 ''캄브리아 연대기''에는 오파가 778년, 784년, 796년에 웨일스에 대항하여 원정했다는 기록이 있다.[54][55][188][189][190]

크닐 근처 오파의 제방 모습, 헤리퍼드셔


오파 시대와 관련된 가장 잘 알려진 유물은 오파의 제방(영어: Offa's Dyke, 웨일스어: Clawdd Offa)으로, 잉글랜드와 웨일스 사이의 경계를 따라 대략적으로 뻗어 있는 거대한 흙 제방이다. 알프레드 대왕의 전기를 쓴 수도사 아서는 이 제방에 대해 "오파라는 어떤 용감한 왕이 ... 웨일스와 머시아 사이에 바다에서 바다까지 거대한 제방을 세웠다."라고 언급했다.[56][191] 제방은 고고학적 방법으로 연대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아서의 기록을 신뢰하며[57][192] 웨일스어와 영어 모두에서 오랫동안 '오파의 제방'으로 불려온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58][193]

아서는 제방이 "바다에서 바다까지" 뻗어 있다고 썼지만, 현재는 원래 구조가 국경의 약 3분의 2 정도만 덮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북쪽 끝은 해안에서 약 8.05km 정도 떨어진 플린트셔의 란파니드(Llanfynydd) 근처에서 끝나고, 남쪽 끝은 브리스톨 해협에서 약 80.47km 정도 떨어진 헤리퍼드셔 킹턴 근처의 러쇼크 힐(Rushock Hill)에서 멈춘다. 이 구간의 총 길이는 약 약 103.00km이다.[57][192] 웨일스와의 국경을 따라서는 와트의 제방(Wat's Dyke) 등 다른 토공사도 존재하지만, 서로의 상대적인 연대를 추정할 수 없어 오파의 제방이 와트의 제방을 모방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단정하기 어렵다.[59][194]

오파의 제방 구조. 서쪽(웨일스 방향)에 해자, 동쪽(머시아 방향)에 둑이 배치되어 있다.


제방은 서쪽에 해자를, 동쪽에 둑을 둔 구조로[192], 이는 웨일스의 공격을 막고 동태를 살피기 위한 효과적인 장벽으로 건설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제방을 건설한 머시아인들이 제방에 가장 적합한 위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57] 제방 서쪽에는 8세기까지 영어권 지명으로 추정되는 정착지가 있어, 머시아인들이 제방 위치를 정하면서 의식적으로 일부 영토를 토착 켈트 브리튼인에게 양보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60][195] 다른 한편으로는, 이 정착지들이 이미 웨일스인에 의해 탈환되었을 수도 있으며, 이 경우 제방은 방어적인 성격이 더 강했음을 암시한다.

제방 건설에 투입된 노력과 비용은 상당했으며, 이를 지시한 왕(오파이든 다른 왕이든)이 막대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와트의 제방, 현재 독일의 다네비르케(Danevirke), 그리고 수천 년 전의 스톤헨지와 같은 다른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도 존재하지만, 오파의 제방은 문자 사용 이전 브리튼 섬 주민들이 만든 가장 크고 마지막 대규모 건축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61][196]

7. 2. 오파의 제방 건설

오파는 다양한 웨일스 왕국과 자주 충돌했다. 760년에는 헤리퍼드에서 머시아인과 웨일스인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으며, 10세기 ''캄브리아 연대기''에는 오파가 778년, 784년, 796년에 웨일스에 대항하여 원정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54][55][188][189][190]

오파 시대와 관련된 가장 잘 알려진 유물은 오파의 제방으로, 잉글랜드웨일스 사이의 경계를 따라 대략적으로 뻗어 있는 거대한 흙 제방이다. 이 제방은 알프레드 대왕의 전기를 쓴 수도사 아서에 의해 언급되었다. 아서는 "오파라는 어떤 용맹한 왕이 ... 웨일스와 머시아 사이에 바다에서 바다까지 거대한 제방을 세웠다"고 기록했다.[56][191] 제방은 고고학적 방법으로 연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아서가 오파의 업적으로 돌린 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57][192] 웨일스어(Clawdd Offa)와 영어(Offa's Dyke) 모두에서 제방의 초기 이름이 오랫동안 '오파의 제방'으로 불려온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58][193]

아서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뻗어 있다고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원래 구조가 국경의 약 3분의 2 정도만 덮었다고 여겨진다. 북쪽에서는 해안에서 약 8.05km 정도 내륙인 플린트셔의 란파니드(cy) 근처에서 끝나고, 남쪽에서는 브리스톨 해협에서 약 80.47km 정도 떨어진 헤리퍼드셔의 킹턴 근처 러쇼크 힐(en)에서 멈춘다. 이 구간의 총 길이는 약 약 103.00km이다.[57][192] 웨일스 국경을 따라 와트의 제방(Wat's Dyke)과 같은 다른 토공사도 존재하지만, 서로의 상대적인 연대를 추정할 수 없어 오파의 제방이 와트의 제방을 모방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결정하기는 어렵다.[59][194]

제방은 서쪽(웨일스 방면)에 해자를, 동쪽(머시아 방면)에 둑을 두는 구조로[196], 웨일스의 공격을 막는 효과적인 장벽이자 웨일스 측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건설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제방을 건설한 머시아인들이 제방에 가장 적합한 위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57][192] 제방 서쪽에는 8세기까지 영어권 지명으로 추정되는 정착지들이 존재하는데, 이는 장벽의 위치를 선택할 때 머시아인들이 의식적으로 일부 영토를 토착 켈트 브리튼인에게 양보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60][195]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정착지가 이미 웨일스인에 의해 탈환되었을 수도 있으며, 이 경우 제방의 건설 목적이 방어에 더 중점을 두었음을 암시한다.

제방 건설에 투입된 노력과 비용은 상당했으며, 이를 건설한 왕(오파이든 다른 인물이든)이 막대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와트의 제방, 현재 독일의 다네비르케, 그리고 수천 년 전의 스톤헨지와 같은 비슷한 시기 또는 그 이전의 다른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들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오파의 제방은 이러한 구조물들과 비교했을 때, 문자를 사용하지 않던 브리튼 섬 거주민들이 만든 가장 크고 마지막 시기의 대규모 건설로 간주될 수 있다.[61][196]

8. 종교 정책과 교회와의 관계

오파는 기독교 왕으로서 샤를마뉴의 조언자 알쿠인으로부터 경건함과 백성을 신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려는 노력을 칭찬받기도 했으나,[62][197] 캔터베리 대주교 재언버트와는 정치적 이유 등으로 갈등을 겪었다.[63][198] 이러한 긴장 관계 속에서 786년에는 교황 아드리안 1세가 잉글랜드 교회의 상황을 살피고 교회법을 정비하기 위해 교황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다.[64][199]

오파의 종교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787년 리치필드에 새로운 대교구를 설립하여 기존 캔터베리의 권한을 축소시킨 일이다.[66][201] 리치필드의 주교였던 히게베르트가 초대 대주교가 되었다.[66][201] 이 결정의 배경에는 재언버트 대주교와의 오랜 갈등뿐만 아니라, 머시아 왕국의 커진 위상과 오파의 아들 에그프리드를 왕으로 축성하려는 계획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68][69][205][73][209] 실제로 히게베르트는 대주교가 된 후 에그프리드의 축성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기록상 잉글랜드 최초의 왕 축성식이었다.[72][208]

오파는 교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사후에도 가족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는 성 베드로에게 헌정된 여러 교회와 수도원을 설립했으며,[80][216] 대표적으로 790년대 초 세인트 앨번스 대성당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1][154] 또한 매년 365 만쿠스를 로마에 기부하기로 약속했으며,[81][217] 교황의 특권을 얻어 여러 종교 시설이 사후에 아내 키네트리드나 자녀들의 소유로 남도록 조치하기도 했다.[80][216] 한편, 로마에 있는 앵글로색슨족 순례자 숙소인 Schola Saxonum|스콜라 삭소눔la을 설립한 인물로 오파 또는 이네 왕이 거론되기도 한다.[83][219]

8. 1.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갈등

오파는 기독교 왕으로 통치했지만, 샤를마뉴의 조언자 알쿠인으로부터 "신(God)의 가르침으로 [그의 백성]을 가르치라"는 경건함과 노력에 대해 칭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62] 캔터베리 대주교인 재언버트와 갈등을 겪었다. 재언버트는 켄트의 에그버트 2세를 지지했는데, 이는 오파가 켄트에 개입하기 시작한 760년대부터 갈등의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오파는 에그버트 2세가 캔터베리에 내린 보조금을 취소했으며, 재언버트가 오파 소유였던 쿡햄 수도원의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63]

786년, 교황 아드리안 1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상황을 평가하고 왕, 귀족, 성직자를 위한 교회법(종교적 법령)을 제공하기 위해 교황 사절을 잉글랜드로 파견했다. 이는 597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아우구스티누스를 파견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64] 사절은 오스티아의 주교 조지와 토디의 주교 테오필락트였다. 그들은 먼저 캔터베리를 방문한 뒤 오파의 궁정에서 환대를 받았다. 오파와 웨섹스의 왕 키네울프가 참석한 회의에서 사절단의 목표가 논의되었다. 이후 조지는 노섬브리아로 갔고, 테오필락트는 머시아와 "브리튼의 일부"를 방문했다. 교황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조지가 노섬브리아에서 개최한 회의와 그곳에서 발표된 교회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지만, 테오필락트의 사절단에 대한 내용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북부 회의 후 조지는 남부로 돌아와 오파와 재언버트가 모두 참석한 또 다른 회의를 열고 추가적인 교회법을 발표했다.[65]

오파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의 교구. 리치필드와 캔터베리의 대교구 경계는 굵게 표시되어 있다.


787년, 오파는 리치필드에 경쟁적인 대교구를 설립하여 캔터베리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문제는 786년 교황 사절과 논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존하는 기록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787년 첼시에서 열린 "논쟁적인 시노드(교회 회의)"에서 새로운 대교구 설립이 승인되었다고 기록한다. 이 시노드가 교황 사절이 개최한 두 번째 회의와 동일한 것일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갈린다. 이미 리치필드의 주교였던 히게베르트는 새로운 대교구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대주교가 되었고, 788년 말 로마로부터 권위의 상징인 팔리움을 받았다.[66] 새로운 대교구는 우스터, 헤리퍼드, 레스터, 린지, 돔목, 엘햄 교구를 포함했으며, 이는 본질적으로 미들랜드 앵글리안 영토였다. 캔터베리는 남부와 동남부의 교구들을 계속 관할했다.[67]

리치필드 대교구 설립 배경에 대한 기록은 오파 사후에 나타난다. 798년, 오파의 후계자인 코엔울프와 교황 레오 3세 사이에 오간 서신에서 두 가지 다른 설명이 제시된다. 코엔울프는 편지에서 오파가 재언버트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새 대교구를 원했다고 주장했지만, 레오 3세는 교황청이 동의한 유일한 이유는 머시아 왕국의 크기 때문이었다고 답했다.[68]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설명할 이유가 있었다. 코엔울프는 레오 3세에게 런던을 유일한 남부 대교구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고, 레오 3세는 코엔울프가 오파에게 돌린 부적절한 동기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려 했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은 다소 편향된 시각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파 영토의 크기와 재언버트 및 켄트와의 관계는 실제로 오파가 새 대교구 설립을 추진한 주요 요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69] 코엔울프의 주장은 알쿠인이 대주교 에델하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뒷받침되는데, 알쿠인은 캔터베리 대교구가 "합리적인 고려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어떤 욕망 때문에" 분할되었다고 보았다.[70] 에델하르드 자신도 나중에 리치필드에 팔리움을 수여한 결정이 "기만과 오해"에 근거했다고 말했다.[71]

리치필드 대교구 설립의 또 다른 가능한 이유는 오파의 아들 에그프리드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히게베르트는 대주교가 된 후 1년 안에 에그프리드를 왕으로 축성하는 의식을 거행했다.[72] 재언버트가 이 의식의 거행을 거부했기 때문에 오파가 이를 위해 다른 대주교를 필요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73] 이 축성식 자체는 두 가지 이유로 주목할 만하다. 첫째, 기록상 잉글랜드 왕의 첫 번째 축성식이며, 둘째,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아들의 왕위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오파는 샤를마뉴의 아들들인 피핀과 루이가 교황 아드리안 1세에 의해 왕으로 축성된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74] 아마도 프랑크 궁정의 위엄을 모방하고자 했을 수 있다.[75] 다른 선례도 있었다. 에텔레드 왕은 생전에 아들 코엔레드를 왕으로 지명했다고 전해지며, 오파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대관식 사례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73]

새로운 대교구가 설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언버트는 히게베르트가 그의 선례를 인정하면서, 그 지역에서 수석 성직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76] 792년 재언버트가 사망하자, 에델하르드가 그의 뒤를 이었고 히게베르트에 의해 축성되었다. 이후 에델하르드는 헌장에 증인으로 서명하고 히게베르트 없이 시노드를 주재했으므로, 오파는 계속해서 캔터베리의 권위를 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77]

교황 아드리안 1세가 샤를마뉴에게 보낸 편지 중 오파를 언급하는 것이 남아 있는데, 정확한 작성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784년에서 791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 편지에서 아드리안은 그에게 도달한 소문을 이야기한다. 오파가 아드리안에게 샤를마뉴에게 그를 폐위하고 프랑크 교황으로 교체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아드리안은 그 소문을 전혀 믿지 않는다고 부인했지만, 그것이 그에게 걱정거리였음은 분명하다.[78] 아드리안이 소문의 근원으로 묘사한 오파와 샤를마뉴의 적들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다. 이 편지가 786년 교황 사절단 파견과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만약 편지가 사절 파견 이전에 쓰였다면, 그 사절단은 부분적으로 화해의 사절이었을 수 있지만, 그 편지는 사절단 파견 후에 작성되었을 수도 있다.[79]

오파는 교회의 관대한 후원자였으며, 성 베드로에게 헌정된 여러 교회와 수도원을 설립했다.[80] 그중에는 790년대 초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인트 앨번스 수도원도 있다.[1] 그는 또한 매년 365 만쿠스를 로마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만쿠스는 은화 30개에 해당하는 계정 용어였으며, 당시 프랑키아에서 유통되던 아바스 왕조 금화에서 파생된 것이었다.[81] 당시 통치자들은 종교 시설에 대한 통제를 통해 가족을 부양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파 역시 교황 특권을 획득함으로써 많은 종교 시설이 사후에 그의 아내 키네트리드나 자녀들의 소유로 남도록 했다.[80] 이처럼 종교 시설을 세속적 재산처럼 다루는 방식은 8세기 초와는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많은 헌장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평신도에게 할당하는 대신 소규모 성직자의 설립과 기증을 보여주었다. 770년대에, 아델버그라는 이름의 수도원장(오파의 딸일 가능성이 있음)이 휘체 영토 내 종교 시설에 대한 여러 임대 계약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획득은 "포트폴리오를 조립하는 투기꾼처럼" 보였다고 묘사되었다. 아델버그의 이러한 토지 소유는 키네트리드의 종교 토지 통제를 예고했고, 이러한 패턴은 9세기 초 코엔울프 왕의 딸 코엔트리드에 의해 계속되었다.[82]

오파 또는 이네는 전통적으로 오늘날 로마의 리오네 또는 구역인 보르고에 있는 로마의 Schola Saxonum을 설립한 것으로 여겨진다. Schola Saxonum은 로마에서 복무한 색슨족 민병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지만, 결국 도시를 방문하는 잉글랜드 방문객을 위한 숙소로 발전했다.[83]

8. 2. 리치필드 대주교구 설립

오파는 기독교 왕으로 통치했지만, 샤를마뉴의 조언자 알쿠인으로부터 그의 경건함과 백성을 신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려는 노력에 대해 칭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62][197] 캔터베리 대주교인 재언버트와 갈등을 겪었다. 재언버트는 켄트의 에그버트 2세를 지지했는데, 이는 오파가 켄트에 개입하기 시작한 760년대부터 갈등의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오파는 에그버트가 캔터베리에 제공하던 보조금을 취소했으며, 재언버트는 오파의 소유였던 쿡햄 수도원의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63][198]

786년, 교황 아드리안 1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상황을 평가하고 왕, 귀족, 성직자를 위한 교회법을 제정하기 위해 교황 사절을 잉글랜드로 보냈다. 이는 597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아우구스티누스를 파견하여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키려 한 이후 처음 있는 교황 사절단의 파견이었다.[64][199] 사절단은 오스티아의 주교 조지와 토디의 주교 테오필락트였다. 그들은 먼저 캔터베리를 방문한 뒤 오파의 궁정으로 초대받았다. 오파와 웨섹스의 왕 키네울프가 참석한 회의에서 사절단의 목표가 논의되었다. 이후 조지는 노섬브리아로 갔고, 테오필락트는 머시아와 "브리튼의 일부"를 방문했다. 사절단이 교황 아드리안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조지가 노섬브리아에서 개최한 회의와 그곳에서 발표된 교회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있지만, 테오필락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북부 회의 후 조지는 남부로 돌아와 오파와 재언버트가 모두 참석한 또 다른 회의를 열었고, 여기서 추가적인 교회법이 발표되었다.[65][200]

787년, 오파는 캔터베리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리치필드에 경쟁적인 대주교구를 설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 문제는 현존하는 기록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786년에 교황 사절들과 논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787년 첼시에서 열린 "논쟁적인 시노드(contentious synod)"에서 새로운 대주교구 설립이 승인되었다고 기록한다. 이 시노드가 교황 사절단이 개최한 두 번째 회의와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당시 리치필드의 주교였던 히게베르트가 새로운 대교구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대주교가 되었으며, 788년 말 로마로부터 그의 권위를 상징하는 팔리움을 받았다.[66][201][202] 새로운 대주교구는 우스터, 헤리퍼드, 레스터, 린지, 돔목, 엘햄 교구를 포함하여 주로 미들랜드 앵글리안 지역을 관할했다. 캔터베리는 남부와 동남부의 교구들을 계속 관할했다.[67][203]

새로운 대주교구 설립의 동기에 대한 기록은 오파 사후에 나타난다. 798년경, 오파의 뒤를 이은 머시아의 왕 코엔울프와 교황 레오 3세 사이에 오간 서신에서 두 가지 다른 설명이 제시된다. 코엔울프는 오파가 재언버트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새로운 대교구를 원했다고 주장했지만, 레오 3세는 교황청이 설립에 동의한 유일한 이유는 머시아 왕국의 광대한 규모 때문이었다고 답했다.[68][204] 코엔울프와 레오 3세 모두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서 상황을 설명할 이유가 있었다. 코엔울프는 레오 3세에게 런던을 유일한 남부 대교구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는 입장이었고, 레오 3세는 코엔울프가 오파에게 돌린 부적절한 동기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들의 설명은 다소 편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오파의 영토 규모와 재언버트 및 켄트와의 불편한 관계 모두 오파가 새로운 대교구 설립을 추진한 실제 요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69][205] 코엔울프의 견해는 알쿠인이 에델하르드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뒷받침되는데, 알쿠인은 캔터베리 대교구가 "합리적인 고려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어떤 욕망 때문에" 분할되었다고 보았다.[70][206] 에델하르드 자신도 나중에 리치필드에 팔리움을 수여한 결정이 "기만과 오해"에 근거한 것이었다고 말했다.[71][207]

리치필드 대주교구 설립의 또 다른 가능한 이유는 오파의 아들 머시아의 에그프리드의 대관식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히게베르트는 대주교가 된 후 1년 안에 에그프리드를 왕으로 성별(축성)하는 의식을 거행했다.[72][208] 재언버트가 이 의식의 집전을 거부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때문에 오파가 독자적으로 의식을 거행할 수 있는 다른 대주교를 필요로 했을 수 있다.[73][209] 이 의식 자체는 두 가지 이유로 주목할 만하다. 첫째, 기록상 최초의 잉글랜드 왕의 성별식이며, 둘째, 아버지 오파가 살아있는 동안 아들 에그프리드의 왕위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었다. 오파는 샤를마뉴의 아들들인 피핀과 루이가 교황 아드리안 1세에 의해 왕으로 성별된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74][210] 프랑크 왕국의 위엄 있는 궁정 의례를 모방하고자 했을 수 있다.[75][211] 다른 선례도 존재했는데, 머시아의 에델레드는 생전에 아들 코엔레드를 왕으로 지명했다고 전해지며, 오파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대관식 사례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73][209]

새로운 대주교구가 설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언버트는 여전히 잉글랜드 교회의 수석 성직자로서 지위를 유지했으며, 히게베르트도 이를 인정했다.[76][212] 재언버트가 792년에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에델하르드가 임명되었고, 이번에는 히게베르트가 에델하르드를 성별했다. 이후 에델하르드는 헌장에 증인으로 서명하고 히게베르트 없이 시노드를 주재하는 등 활동했으므로, 오파는 계속해서 캔터베리의 권위를 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77][213]

교황 아드리안 1세가 샤를마뉴에게 보낸 편지 중 오파를 언급한 것이 남아있는데, 정확한 작성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대략 784년에서 791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 편지에서 아드리안은 자신에게 들려온 소문, 즉 오파가 샤를마뉴에게 아드리안 교황을 폐위시키고 프랑크 출신 교황으로 교체할 것을 제안했다는 소문에 대해 언급한다. 아드리안은 그 소문을 전혀 믿지 않는다고 부인했지만, 이 문제가 그의 우려 사항이었음은 분명하다.[78][214] 아드리안이 소문의 근원이라고 지목한 오파와 샤를마뉴의 적들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편지가 786년 교황 사절단 파견과 관련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편지가 사절단 파견 이전에 쓰였다면, 사절단 파견은 부분적으로 화해의 목적을 가졌을 수 있다. 반대로 편지가 사절단 파견 이후에 작성되었을 수도 있다.[79][215]

8. 3. 교회 후원

오파는 기독교 왕으로 통치했지만, 캔터베리 대주교인 재언버트와 갈등을 겪었다. 샤를마뉴의 조언자 알쿠인은 오파의 경건함과 백성을 신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려는 노력을 칭찬했으나,[62] 재언버트는 켄트의 에그버트 2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오파와 대립했다. 이는 오파가 켄트에 개입하기 시작한 760년대부터 갈등의 소지가 있었을 수 있다. 오파는 에그버트가 캔터베리에 내린 보조금을 취소했으며, 재언버트는 오파의 소유였던 쿡햄 수도원의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63]

786년, 교황 아드리안 1세는 교황 사절을 잉글랜드에 파견하여 교회의 상황을 평가하고 왕, 귀족, 성직자를 위한 교회법을 제공하게 했다. 이는 597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앵글로색슨족 개종을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를 파견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64] 사절단은 오스티아의 주교 조지(George)와 토디 교구의 주교 테오필락트(Theophylact)였다. 그들은 먼저 캔터베리를 방문한 뒤 오파의 궁정에서 환대를 받았다. 오파와 웨섹스의 왕 키네울프는 사절단의 목표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했다. 이후 조지는 노섬브리아로, 테오필락트는 머시아와 "브리튼의 일부"를 방문했다. 사절단이 교황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조지가 노섬브리아에서 개최한 회의와 그곳에서 발표된 교회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있지만, 테오필락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북부 회의 후 조지는 남부로 돌아와 오파와 재언버트가 모두 참석한 또 다른 회의를 열고 추가적인 교회법을 발표했다.[65]

787년, 오파는 리치필드에 경쟁적인 대교구를 설립하여 캔터베리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문제는 786년 교황 사절들과 논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존하는 기록에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787년 첼시에서 열린 "논쟁적인 시노드(contentious synod)"에서 새로운 대교구 설립이 승인되었다고 기록한다. 이 시노드가 교황 사절단이 개최한 두 번째 회의와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이미 리치필드의 주교였던 히게베르트가 새로운 대교구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대주교가 되었고, 788년 말 로마로부터 권위의 상징인 팔리움을 받았다.[66][202] 새로운 대교구는 우스터, 헤리퍼드, 레스터, 린지, 돔목, 엘햄 교구를 포함했으며, 이는 본질적으로 미들랜드 앵글리안 지역이었다. 캔터베리는 남부와 동남부의 교구들을 계속 관할했다.[67]

리치필드 대교구 설립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오파 사후에 작성되었다. 798년, 오파의 뒤를 이은 코엔울프와 교황 레오 3세 사이에 오간 편지에서 두 가지 다른 설명이 나타난다. 코엔울프는 오파가 재언버트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새로운 대교구를 원했다고 주장했지만, 레오 3세는 교황청이 설립에 동의한 유일한 이유는 머시아 왕국의 광대한 규모 때문이었다고 답했다.[68] 양측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유리하게 설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코엔울프는 런던을 유일한 남부 대교구로 만들기를 원했고, 레오 3세는 오파의 정치적 동기에 동조했다는 인상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은 다소 편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파 영토의 크기와 재언버트 및 켄트와의 불편한 관계는 실제로 오파가 새로운 대교구 설립을 추진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69] 코엔울프의 주장은 알쿠인이 에델하르드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뒷받침되는데, 알쿠인은 캔터베리 대교구가 "합리적인 고려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어떤 욕망에 의해" 분할되었다고 평가했다.[70] 에델하르드 자신도 나중에 리치필드에 팔리움을 수여한 결정이 "기만과 오해"에 근거한 것이었다고 말했다.[71]

리치필드 대교구 설립의 또 다른 가능한 이유는 오파의 아들 머시아의 에그프리드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히게베르트는 대주교가 된 후 1년 안에 에그프리드를 왕으로 축성(consecration)하는 의식을 거행했다.[72] 재언버트가 이 의식 집전을 거부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때문에 오파가 자신에게 협조적인 대주교를 필요로 했을 수 있다.[73] 이 축성식 자체는 두 가지 이유로 주목할 만하다. 첫째, 기록상 잉글랜드 왕의 첫 번째 축성식이며, 둘째,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아들의 왕위를 공고히 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오파는 샤를마뉴의 아들들인 피핀과 루이가 교황 아드리안 1세에 의해 왕으로 축성된 사실을 알고 있었고,[74] 프랑크 왕국 궁정의 위엄 있는 의식을 모방하고 싶었을 것이다.[75] 이전에도 에텔레드가 생전에 아들 코엔레드를 왕으로 지명한 사례가 있었으며, 오파가 비잔틴 제국의 황제 축성 관습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73]

새로운 대교구가 설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언버트는 여전히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으로서 지위를 유지했으며, 히게베르트도 이를 인정했다.[76] 재언버트가 792년에 사망하자, 에델하르드가 후임 대주교가 되었고 히게베르트가 그를 축성했다. 이후 에델하르드는 헌장에 증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히게베르트 없이 시노드를 주재하는 등, 오파가 계속해서 캔터베리의 권위를 존중했음을 보여준다.[77]

교황 아드리안 1세가 샤를마뉴에게 보낸 편지 중 오파를 언급한 것이 남아있는데, 정확한 작성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784년에서 791년 사이로 추정된다. 편지에서 아드리안은 오파가 샤를마뉴에게 자신(교황)을 폐위시키고 프랑크 출신 교황으로 교체할 것을 제안했다는 소문에 대해 언급한다. 아드리안은 이 소문을 믿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상당한 우려를 표명했다.[78] 이 소문의 출처나 오파와 샤를마뉴의 적으로 지목된 인물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편지가 786년 교황 사절단 파견과 관련이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만약 편지가 사절단 파견 이전에 쓰였다면, 사절단 파견은 일종의 화해 제스처였을 수 있다. 반대로 사절단 파견 이후에 쓰였다면, 다른 정치적 맥락을 가질 수 있다.[79]

오파는 교회의 관대한 후원자로서 성 베드로에게 헌정된 여러 교회와 수도원을 설립했다.[80] 그중 하나가 790년대 초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인트 앨번스 대성당이다.[1] 그는 또한 매년 365 만쿠스를 로마에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만쿠스는 당시 프랑크 왕국에서 유통되던 아바스 왕조 금화를 모방한 금화로, 은화 30펜스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녔다.[81] 당시 종교 시설에 대한 통제는 통치자가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오파는 교황의 특권을 얻어 자신이 사망한 후에도 많은 종교 시설이 아내나 자녀의 소유로 남도록 조치했다.[80] 이처럼 종교 시설을 세속적인 재산처럼 다루는 방식은 8세기 초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당시에는 많은 헌장이 토지 소유권을 평신도에게 넘기기보다는 소규모 성직자 공동체 설립과 기증에 초점을 맞추었다. 770년대에는 에델버그(Æthelburh, 오파의 딸일 가능성이 있음)라는 이름의 수녀원장이 휘체 영토 내 여러 종교 시설의 임대 계약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마치 "투기꾼이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것"처럼 묘사되기도 했다. 에델버그의 이러한 토지 소유는 이후 오파의 아내 키네트리드(Cynethryth)가 종교 토지를 통제하는 것을 예고했으며, 이러한 패턴은 9세기 초 코엔울프의 딸 코엔트리드(Cwoenthryth)에게까지 이어졌다.[82]

오파 또는 이네 왕은 로마의 보르고 지역에 Schola Saxonum|스콜라 삭소눔la(앵글로색슨 학교)을 설립한 인물로 전통적으로 여겨진다. 스콜라 삭소눔은 원래 로마에서 복무하던 색슨족 민병대의 이름에서 유래했지만, 나중에는 로마를 방문하는 잉글랜드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로 발전했다.[83]

9. 유럽 대륙과의 관계

오파는 그의 통치 말기에 유럽 대륙, 특히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와 중요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78][214] 이 시기 두 군주 사이에는 카롤루스 대제의 고문이었던 알쿠인의 편지 교환,[84][85][220][221] 자녀들의 혼인 문제로 인한 외교적 갈등과 봉합,[86][87][222][223]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공의회에서의 협력 등[88][224] 다양한 교류가 있었다. 796년에 카롤루스 대제가 오파에게 보낸 편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잉글랜드 외교 문서로 평가받으며,[78][214] 당시 두 왕국 간의 무역 및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한다.[86][222][89][226] 또한 카롤루스 대제는 오파에게서 도망친 웨섹스의 에그버트와 같은 망명자들을 보호하며 오파를 견제하기도 했다.[90][227] 비록 두 군주 사이에 교류와 갈등이 있었지만, 대서양에서 헝가리 대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한 카롤루스 대제와 오파 사이에는 상당한 국력 차이가 존재했다.[91][228]

9. 1. 프랑크 왕국과의 외교

오파의 유럽 대륙과의 외교 관계는 기록이 잘 남아 있지만, 주로 그의 통치 마지막 십여 년 동안의 일들이다.[78][214] 780년대 후반 또는 790년대 초에 쓰인 편지에서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의 고문이었던 수도사 알쿠인은 오파가 교육을 장려하는 것을 칭찬하며, 오파의 아내 키네트리드와 아들 에그프리스에게 안부를 전했다.[84][85][220][221]

789년경, 카롤루스 대제는 자신의 아들 카를(샤를)과 오파의 딸 중 한 명(아마도 앨플래드)과의 결혼을 제안했다. 이에 오파는 자신의 아들 에그프리스도 카롤루스 대제의 딸 베르타와 결혼해야 한다고 맞대응했다.[86][87][222][223] 카롤루스 대제는 이 요구에 분노하여 잉글랜드와의 교류를 단절하고, 잉글랜드 배가 프랑크의 항구에 기항하는 것을 금지했다. 알쿠인의 편지에 따르면 790년 말까지도 이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알쿠인 자신은 평화를 위해 파견되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결국 생트-방드르유 수도원의 원장 게르볼드의 중재 등으로 양국 간의 외교 관계는 회복되었다.[86][87][222][223]

카롤루스 대제는 794년 프랑크푸르트 공의회에 잉글랜드 교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잉글랜드 주교들을 참여시켰다.[88][224] 이 공의회에서는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통과된 법령을 거부하고, 스페인 주교 펠릭스와 엘리판두스 두 명을 이단으로 정죄했다.[88][225]

796년, 카롤루스 대제는 오파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는 오파가 이전에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이 두 왕 사이의 서신 교환은 현존하는 잉글랜드 외교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서로 여겨진다.[78][214] 편지의 주요 내용은 대륙에 있는 잉글랜드 순례자들의 지위와 외교 선물에 관한 것이었지만, 잉글랜드와 프랑크 왕국 간의 관계에 대해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86][222] 카롤루스 대제는 편지에서 오파를 자신의 "형제"라고 언급하고, 대륙에서 잉글랜드로 보내진 검은 돌과 잉글랜드에서 프랑크 왕국으로 거래된 망토(또는 옷감) 등 무역에 대해서도 언급했다.[89][226] 또한 편지에는 잉글랜드에서 망명한 이들에 대한 언급도 있었는데, 에드버트 프렌과 거의 동일 인물로 여겨지는 오드베르트(Odberht)의 이름이 거론되었다.[90][227] 웨섹스의 에그버트 역시 오파를 피해 프랑크 궁정에서 피난처를 찾은 망명자 중 한 명이었다.[90][227] 카롤루스 대제가 에그버트와 에드버트를 보호하고 노섬브리아애설레드 1세에게도 선물을 보내는 등, 오파에 반대하는 세력을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90][227]

796년까지 잉글랜드 남부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때때로 오파와 카롤루스 대제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두 군주 사이의 힘의 격차는 상당했다. 당시 카롤루스 대제는 대서양에서 헝가리 대평원까지 뻗어 있는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고 있었으며, 오파나 그의 후계자인 코엔울프는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세력을 가진 인물이었다.[91][228]

9. 2. 프랑크푸르트 공의회

샤를마뉴는 794년 프랑크푸르트 공의회를 개최하여 잉글랜드 교회의 지지를 구했다.[88][224] 이 공의회에서는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부정하고,[88][225] 스페인의 두 주교인 펠릭스와 엘리판두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했다.[88][225]

796년, 샤를마뉴는 오파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오파가 이전에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잉글랜드 외교 문서이다.[78][214] 편지의 주요 내용은 대륙을 여행하는 잉글랜드 순례자들의 지위와 외교적 선물 교환에 관한 것이었지만, 잉글랜드와 프랑크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여러 단서를 담고 있다.[86][222] 샤를마뉴는 오파를 "나의 형제"라고 칭하며,[89] 대륙에서 잉글랜드로 보내진 검은 돌과 잉글랜드에서 프랑크 왕국으로 수출된 망토(또는 옷감) 등 무역에 대해서도 언급했다.[89][226]

샤를마뉴의 편지는 또한 잉글랜드 출신 망명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그중에는 에드버트 프렌과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오드베르트(Odberht)가 포함되어 있었다.[90][227] 웨섹스의 에그버트 역시 오파를 피해 프랑크 궁정에 망명해 있던 인물이었다.[90][227] 샤를마뉴는 에그버트와 에드버트를 보호하고 노섬브리아의 애설레드 1세에게 선물을 보내는 등, 오파에 반대하는 세력을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90][227]

796년 무렵 남부 브리튼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때때로 오파와 샤를마뉴 사이의 경쟁 구도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두 군주 사이의 힘의 격차는 상당했다.[91][228] 당시 샤를마뉴는 대서양에서 헝가리 대평원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고 있었으며, 오파나 그의 후계자인 머시아의 코엔울프는 이에 비하면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군주였다.[91][228]

10. 통치 체제와 법률

머시아의 왕권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는 남아있는 자료가 적어 명확히 알기 어렵다. 오파 이전 시대에는 왕족 내 여러 가문이나 지역 유력 집단들이 왕위를 두고 경쟁했을 가능성이 있다.[92][93][229][230] 오파는 이러한 분권적인 상황 속에서 왕권의 안정을 꾀하고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려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들 에그프리드의 왕위 계승을 위해 경쟁자를 제거하고, 복속된 왕들의 지위를 에알도르만 수준으로 낮추기도 했다.[94][231]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에그프리드는 짧은 기간만 통치했으며, 이후 머시아에서는 다시 여러 가문 출신의 왕들이 등장했다.[95][232]

오파는 통치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방어 거점인 ''버러''(burh)를 건설했다. 베드퍼드, 헤리퍼드, 노샘프턴 등이 후보지로 거론되는 이 요새 도시들은 단순한 방어 시설을 넘어 행정 중심지이자 지역 시장의 역할을 수행하며, 머시아의 행정 및 경제 시스템 정비에 기여했다.[96][233][234] 이는 후일 알프레드 대왕이 데인족의 침입에 맞서 구축한 방어망의 기초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96][97][233][234] 또한 오파는 트리노다 네체시타스(trinoda necessitas), 즉 국가 방위를 위한 요새 및 다리 건설 등의 의무를 켄트와 같은 머시아 외부 지역까지 확대 적용하려 했는데, 이는 중앙 권력 강화 및 외부 위협("이교도 선원")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해석된다.[100][101][102][103][237][238][239][240]

법률 분야에서도 오파는 자신의 이름으로 법을 공포했다고 전해진다. 비록 그 내용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후대의 알프레드 대왕이 자신의 법전을 만들면서 웨섹스의 이네, 켄트의 애설버트의 법과 함께 오파의 법 중 일부를 포함시켰다고 언급하여 그 존재를 알 수 있다.[104][241] 이 법이 독립된 법전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형태의 법령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105][242]

10. 1. 중앙 집권화 강화

머시아 왕권의 성격은 현존하는 자료가 제한적이어서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오파 이전 시대에는 왕족 내 여러 가문이나 지역 기반을 둔 유력 집단(휘치, 톰세테 등)이 왕위를 놓고 경쟁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어떤 경우에는 왕이 단지 유력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 지도자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92][93][229][230]

오파는 이러한 분권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들 에그프리드에게 안정적으로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복속된 지역 왕들의 지위를 에알도르만(Ealdorman)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94][231] 하지만 이러한 중앙 집권화 노력은 장기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에그프리드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몇 달 만에 사망했고, 9세기 머시아에서는 다시 여러 왕족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95][232]

오파는 왕국의 방어력을 강화하고 행정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일련의 방어 거점인 ''버러''(burh, 요새화된 도시)를 건설했다는 증거가 있다. 베드퍼드, 헤리퍼드, 노샘프턴, 옥스퍼드, 스탬퍼드 등이 그가 건설한 버러의 후보지로 여겨진다.[96][233] 이 버러들은 단순한 군사적 요새 기능을 넘어 행정 중심지이자 지역 시장의 역할을 수행하며, 머시아 경제가 점차 중앙 집권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약 1세기 후 알프레드 대왕이 데인족의 침략에 맞서 성공적으로 구축한 방어 네트워크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받는다.[96][97][233][234] 다만 오파 자신이 버러 건설이 가져올 모든 경제적 파급 효과까지 예상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11][144]

중앙 권력 강화의 또 다른 예로, 오파는 트리노다 네체시타스(trinoda necessitas, 요새 및 교량 건설 등 국가 방위에 필요한 의무)의 부담을 왕국 전역으로 확대하려 했다. 749년 머시아의 애설발드 왕은 교회 소유지에 대해 이 의무 일부를 면제해주었으나,[98][99][235][236] 오파는 켄트와 같이 머시아 외부에 있는 지역의 토지 소유자들에게도 동일한 의무를 부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머시아 왕권의 영향력을 왕국 외부로 확장시키려는 시도였으며,[100][101][237][238] 당시 점증하던 "이교도 선원들"(바이킹)의 위협에 대한 대응책의 일환이기도 했다.[102][103][239][240]

오파는 자신의 이름으로 법전을 공포했다고 전해지지만, 아쉽게도 그 내용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후대의 알프레드 대왕이 자신의 법전을 편찬하면서 웨섹스의 이네, 켄트의 애설버트 왕의 법과 함께 오파의 법 중에서 "가장 정의롭다"고 판단한 조항들을 포함시켰다고 언급한 것을 통해 그 존재만을 알 수 있다.[104][241] 이 법이 독립된 형태의 법전이었는지, 아니면 786년 머시아를 방문했던 교황 사절단이 발표하고 머시아인들이 준수하기로 약속한 법령들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105][242]

10. 2. 방어 도시 건설

오파가 일련의 방어적인 버러(burh), 즉 요새 도시를 건설했다는 증거가 있다.[96][233] 그 위치가 어디인지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도시들이 후보로 거론된다.



이러한 ''버러''는 방어적인 용도 외에도 행정 중심지이자 지역 시장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여겨진다.[96][234] 이는 머시아 경제가 단순히 중부 지방 사람들의 집단으로서의 성격에서 벗어나 변화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96][234] 이 ''버러''들은 약 한 세기 후 알프레드 대왕이 데인족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성공적으로 구축한 방어 네트워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96][97][233][234] 그러나 오파가 ''버러'' 건설에 따른 경제적 변화까지 완전히 이해하고 모든 혜택을 예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11][144]

한편, 749년 머시아의 애설발드는 교회 소유 토지에 대해 트리노다 네체시타스(trinoda necessitas)의 일부인 요새 및 다리 건설 의무를 제외한 모든 의무를 면제하는 헌장을 발행한 바 있다.[98][99][235][236] 오파가 켄트에서 발행한 헌장을 보면, 그곳의 토지 수령자들에게도 이러한 동일한 부담(요새 및 다리 건설 의무)을 부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해당 의무가 머시아 외부로 확산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징후일 수 있다.[100][101][237][238] 이러한 부담은 당시 "이교도 선원"으로 지칭되는 세력의 위협에 대한 오파의 대응책 중 하나였다.[102][103][239][240]

10. 3. 법률 제정

오파는 자신의 이름으로 법률을 공포했지만, 그 자세한 내용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이 법률에 대한 정보는 후대의 알프레드 대왕이 자신의 법전을 편찬하면서 남긴 기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알프레드 대왕은 자신의 법전 서문에서, 웨섹스의 이네, 켄트의 애설버트와 더불어 오파의 법률 중 "가장 정의롭다"고 판단한 내용을 자신의 법전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104][241] 오파의 법률이 독립적인 법전 형태였는지, 아니면 알프레드 대왕이 786년 머시아를 방문했던 교황 특사가 남긴 보고서나 당시 발표된 법령을 참조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105][242]

11. 화폐 제도 개혁

오파는 잉글랜드 화폐 제도를 개혁했다. 그가 집권하기 전에는 주로 스케아타(sceattas) 또는 샤트라는 작은 은화가 유통되었으나, 왕이나 주조자의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106][107][108][243][244][245] 오파는 동시대 카롤링거 왕조의 통화 개혁(데니에 은화 도입)[84][220] 영향을 받아 새로운 형태의 은화인 페니를 도입했다. 이 새로운 페니는 기존 스케아타/샤트보다 더 무겁고 넓으며 얇아졌고,[106][243] 예술적인 디자인과 함께 거의 항상 오파 자신의 이름과 주조자의 이름이 새겨졌다.[106][243] 이러한 화폐 개혁은 오파의 영향력 아래 있던 동앵글리아, 켄트, 웨섹스 등 다른 왕국에도 영향을 미쳐 새로운 형태의 주화가 발행되기 시작했다.[110][247] 또한 아바스 왕조의 디나르 금화를 모방한 만쿠스 금화도 발행하였다.[117][253][118][254] 오파가 발행한 페니 은화는 품질과 무게가 일정하여 널리 통용되었으며, 이후 수 세기 동안 이어지는 잉글랜드 화폐 제도의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1. 1. 은화 주조

오파의 주화. 주화 제작자 에셀노스(Ethelnoth)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대영 박물관, 런던.


8세기 초에는 스케아타(sceattas)가 주요 유통 주화였다. 이들은 작은 은화였으며, 제작된 주화에 주조자나 주화를 위해 제작된 왕의 이름이 새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페니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웨섹스의 이네 법전에도 언급된 주화이다.[106][107][108][243][244][245] 이 가벼운 주화는 아마도 760년대 후반과 770년대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790년대 초 이전에 오파에 의해 새로운 중간 무게의 주화가 발행되기 시작했다.[109][246]

이 새로운 중간 무게의 주화는 이전의 페니보다 더 무겁고, 더 넓고, 더 얇았으며,[106][243] 당시 카롤링거 왕조의 통화 개혁(데니에 은화 도입)에 의해 촉진되었다.[84][220] 새로운 페니는 거의 항상 오파의 이름과 주화를 찍어낸 주화 공방의 주조자 이름을 함께 새겨 넣었다.[106][243] 이러한 화폐 개혁은 오파 자신의 주화 공방을 넘어 확장된 것으로 보이며, 동앵글리아, 켄트, 웨섹스의 왕들은 이 기간 동안 새로운 더 무거운 무게의 주화를 모두 생산했다.[110][247]

오파 통치 기간의 일부 주화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재인버트의 이름이나, 792년 이후에는 애설하드 대주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재인버트의 주화는 모두 나중의 중간 주화가 아닌 가벼운 주화에 속한다. 또한 780년대에 런던 주교였던 에드버트(Eadberht)가 주화를 발행했다는 증거도 있다. 오파는 재인버트와의 분쟁 때문에 에드버트에게 주조권을 허용했을 수 있으며, 이후 리치필드 교구가 대주교구로 승격되면서 이 권한이 취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11][248]

오파(왼쪽)와 그의 아내 시네트리드(오른쪽)의 초상이 새겨진 은화 페니.


중간 무게의 주화는 종종 높은 예술적 품질의 디자인을 가지고 있으며, 당시 프랑크 통화의 디자인을 능가한다.[109][246] 오파의 주화 초상화는 "앵글로색슨 주화 전체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정교함을 보여준다"라고 묘사되었다.[81][217] 주화에 묘사된 오파는 풍성한 컬 헤어를 한 "눈에 띄고 우아한" 초상화와, 앞머리와 꽉 찬 컬을 한 다른 초상화를 포함한다. 일부 주화는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착용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묘사의 다양성은 오파의 다이 커터(die-cutter, 주화 금형 제작자)가 다양한 예술적 자료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112][249]

오파의 아내 시네트리드는 앵글로색슨 여왕 중 주화에 이름이 명시되거나 묘사된 유일한 인물이며, 주화 제작자 에오바(Eoba)가 찍은 일련의 놀라운 페니에 등장한다.[113] 이들은 아마도 당시 비잔틴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가 어머니인 후일의 황후 이레네의 초상화를 보여주는 일련의 주화(솔리두스)를 찍은 것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114][250] 그러나 비잔틴 주화는 이레네의 정면 흉상을 보여주는 반면, 시네트리드의 주화는 측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직접적인 모델이 될 수는 없었다.[115][251]

재인버트가 사망하고 792–93년 애설하드로 교체될 무렵, 은화는 두 번째로 개혁되었다. 이 "중량 주화"(heavy coinage)에서 페니의 무게가 다시 증가했으며, 모든 주화 공방에서 표준화된 비초상 디자인이 도입되었다. 이 시기 주화에는 재인버트나 시네트리드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지 않지만, 애설하드의 주화는 모두 새롭고 더 무거운 무게의 것이었다.[116][252]

오파의 만쿠스 또는 금 디나르. 아바스 왕조의 디나르(774년 발행) 복제품이다.


오파 통치 기간의 금화도 남아 있다. 그중 하나는 774년에 아바스 왕조의 알 만수르 칼리프가 주조한 디나르를 모방한 금화로,[117][253] 뒷면 중앙에는 Offa Rex|오파 왕la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주화 제작자는 아랍어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새겨진 아랍어 텍스트(유사 쿠픽)에는 많은 오류가 있다. 이 금화는 알안달루스(이슬람 스페인)와의 교역을 위해 생산되었거나, 오파가 로마에 약속한 연간 365 만쿠스 지불의 일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18][254] 이 시대의 다른 서부 아바스 디나르 복제품도 있지만, 그것이 잉글랜드 것인지 프랑크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대의 다른 두 개의 잉글랜드 금화는 주조자 펜드레드(Pendraed)와 치올하드(Ciolhard)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펜드레드의 금화는 오파의 통치 기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지만, 치올하드의 금화는 오파의 통치 기간 또는 796년에 왕위에 오른 코엔울프의 통치 기간에 속할 수 있다. 이 금화들의 정확한 용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구호품(alms, 자선기부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주조되었을 수 있다.[119][120][255][256]

많은 주화에 주화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각 주화가 어디에서 주조되었는지에 대한 표시는 없다. 따라서 오파가 사용한 주화 공방의 수와 위치는 불확실하다. 현재의 견해는 캔터베리, 로체스터, 동앵글리아, 런던에 4개의 주화 공방이 있었다는 것이다.[119][255]

오파가 발행한 페니 은화는 품질과 무게가 일정하고 널리 통용되어, 14세기 중반까지 잉글랜드 화폐 제도의 기반이 되었다.

11. 2. 주화 명문



8세기 초 잉글랜드에서는 스케아타(sceattas) 또는 샤트라는 작은 은화가 주로 유통되었는데, 이 주화들에는 발행한 왕이나 주조자의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페니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웨섹스 왕 이네의 법전에도 언급된 화폐 단위이다.[106][107][108][243][244][245]

오파는 통치 기간 중 카롤링거 왕조의 통화 개혁[84][220] 영향을 받아 새로운 형태의 페니를 발행했다. 이 주화는 기존의 스케아타/샤트보다 더 무겁고 넓으며 얇아졌고,[106][243] 거의 예외 없이 오파 자신의 이름과 주화를 만든 주조자의 이름이 함께 새겨졌다.[106][243] 이러한 주화 개혁은 동앵글리아, 켄트, 웨섹스 등 다른 왕국에도 영향을 미쳐, 이들 지역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주화가 발행되기 시작했다.[110][247]

오파 시대의 일부 주화에는 캔터베리 대주교인 재인버트(Jaenberht)나 그의 후임자인 애설하드(Æthelhard, 792년 이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재인버트의 이름이 새겨진 주화는 모두 오파의 초기 경량 주화에 해당한다. 또한 780년대 런던 주교였던 에드버트(Eadberht)가 주화를 발행했다는 증거도 있는데, 이는 오파가 재인버트와의 갈등 속에서 에드버트에게 주조권을 잠시 허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권한은 이후 리치필드가 대주교구로 승격되면서 취소되었을 수 있다.[111][248]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오파의 아내인 시네트리드(Cynethryth)의 이름과 초상이 새겨진 페니이다. 시네트리드는 앵글로색슨 왕비 중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이나 모습이 주화에 등장한 인물로, 이 주화들은 주조자 에오바(Eoba)에 의해 만들어졌다.[113] 이 주화의 도안은 동시대 비잔틴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가 그의 어머니이자 후일 여제가 되는 이레네의 초상을 넣어 발행한 주화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14][250] 다만, 비잔틴 주화가 이레네의 정면 흉상을 보여주는 반면 시네트리드의 주화는 측면을 묘사하고 있어 직접적인 모방은 아니었다.[115][251] 시네트리드의 주화를 포함한 오파 시대의 중량 주화들은 동시대 프랑크 왕국의 주화 디자인을 능가하는 높은 예술적 수준을 보여주며,[109][246] 특히 오파의 초상은 "앵글로색슨 주화 전체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정교함"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81][217]

오파 시대에는 금화도 발행되었다. 현존하는 금화 중 하나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만수르가 774년에 발행한 디나르 금화를 모방한 것으로,[117][253] 뒷면 중앙에는 라틴 문자로 "오파 렉스(OFFA REX)"라고 새겨져 있다. 하지만 함께 새겨진 아랍어 문구에는 오류가 많아, 제작자가 아랍어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금화는 알-안달루스(이슬람 지배 하의 스페인)와의 교역이나, 오파가 로마 교황청에 약속한 연간 365 만쿠스의 기부금을 지불하기 위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18][254]

많은 주화에 주조자의 이름은 새겨져 있지만, 주조된 장소를 나타내는 표시는 없다. 따라서 오파가 운영한 주조소의 정확한 수와 위치는 불확실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캔터베리, 로체스터, 동앵글리아, 런던 등 네 곳에 주조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19][255]

11. 3. 금화 주조



오파의 통치 기간에는 은화뿐만 아니라 금화도 주조되었다.[117][253] 현존하는 금화 중 하나는 774년에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만수르가 발행한 디나르 금화를 모방한 것이다.[117][253] 이 금화는 뒷면 중앙에 라틴어로 "OFFA REX"(오파 왕)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만, 함께 새겨진 아랍어 문구에는 오류가 많아 제작자가 아랍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118][254] 이 금화는 알-안달루스(이슬람 지배 하의 스페인)와의 무역을 위해 만들어졌거나, 오파가 로마에 보내기로 약속한 연간 365 만쿠스의 지불금의 일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18][254]

이 시대에 아바스 왕조 디나르 금화를 모방한 다른 서유럽 금화들도 존재하지만, 그것이 잉글랜드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프랑크 왕국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119][255]

또한 펜드레드(Pendraed)와 치올하드(Ciolheard)라는 두 명의 화폐 주조자가 만든 잉글랜드 금화도 남아 있다. 펜드레드가 만든 금화는 오파의 통치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치올하드가 만든 금화는 오파의 통치 시기 또는 796년에 즉위한 코엔울프의 통치 시기에 속할 수 있다.[119][120][255][256] 이 금화들의 정확한 용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자선(구호품) 목적으로 주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19][120][255][256]

12. 오파에 대한 평가

오파는 대부분의 헌장에서 rex Merciorum|렉스 메르키오룸la, 즉 "머시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때때로 "머시아와 주변 국가의 왕"으로 확장하기도 했다.[121][257] 일부 헌장에서는 Rex Anglorum|렉스 앙글로룸la, 즉 "잉글랜드인의 왕"이라는 칭호도 사용되었는데, 이는 그의 강력한 권력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칭호가 사용된 헌장 중 일부는 진위가 의심스러우며, 이 칭호가 잉글랜드 왕의 표준적인 칭호였던 10세기에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67][203] 오파가 이 칭호를 실제로 사용했다는 더 확실한 증거는 동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일부 페니 동전에 "Of ℞ A"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것이 "Offa Rex Anglorum"의 약자인지는 명확하지 않다.[111][248]

역사가 프랭크 스텐턴은 그의 저서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오파를 잉글랜드 왕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하며, "다른 어떤 앵글로색슨 왕도 그처럼 날카로운 정치적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본 적이 없다"고 기술했다.[122][258] 많은 현대 역사가들은 오파의 업적을 알프레드 대왕 다음가는 것으로 평가한다.[123][259] 한때 오파의 통치가 통일 잉글랜드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현재는 이러한 견해가 일반적이지 않다. 역사가 사이먼 케인스는 "오파는 잉글랜드 통일이라는 비전이 아닌 권력에 대한 갈망에 의해 움직였고, 그가 남긴 것은 유산(legacy)이 아닌 명성이었다"고 평가했다.[1][154] 현재 학계에서는 오파가 스스로를 "머시아의 왕"으로 인식했으며, 그의 군사적 성공은 머시아가 미들랜드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강력하며 공격적인 왕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의 일부였다고 본다.[1][124][154][260]

13. 죽음과 왕위 계승

오파는 796년 7월 29일에 사망했으며[261][262][263][264], 그의 아들 에그프리드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에그프리드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41일 만에 사망하여[267] 머시아 왕국은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다. 알쿠인은 오파가 아들의 왕위를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268], 이는 오히려 오파의 직계 후계자가 끊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 에그프리드 사후 왕위는 오파와는 먼 친척 관계였던 켄울프에게 계승되었다[269].

13. 1. 오파의 죽음

오파는 796년 7월 29일에 사망했으며[261][262][263][264], 베드퍼드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당시 칙허장에 기록된 "Bedford"가 오늘날의 베드퍼드와 동일한 장소인지는 불분명하다[265][266].

사후 그의 아들 에그프리드(Ecgfrith)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에그프리드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41일 만에 사망했다[267].

알쿠인이 797년에 머시아의 에알도르만 오스버트(Osbert)에게 보낸 편지는 오파가 아들 에그프리드의 왕위 계승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알쿠인은 편지에서 에그프리드의 죽음에 대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왕국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흘린 피의 복수가 아들에게 닿은 것"이라며, "아들에게 왕국을 물려주기 위해 그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268]. 이는 오파가 787년 에그프리드의 대관식 즈음에 왕위 계승 경쟁자들을 제거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왕조적 관점에서 볼 때, 오파의 이러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역효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오파나 에그프리드의 가까운 남성 친척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에그프리드의 후계자가 된 켄울프는 오파의 직계 혈통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269].

13. 2. 왕위 계승 문제

오파는 796년 7월 29일에 사망했으며[261][262][263][264], 베드퍼드에 묻혔을 가능성이 있지만, 당시 문서에 언급된 "Bedeford"가 현재의 베드퍼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265][266]. 그의 왕위는 아들인 에그프리드가 계승했다. 그러나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에그프리드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41일 만에 사망했다[267].

알쿠인이 797년에 머시아의 귀족(에알도르만) 오스버트(Osbert)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오파가 아들 에그프리드의 왕위 계승을 확실히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알쿠인은 편지에서 에그프리드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왕국을 지키기 위해 그의 아버지가 흘린 피에 대한 복수가 아들에게 미친 것이다. 당신도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왕국을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268] 이는 오파가 787년 에그프리드의 대관식을 전후하여 왕위 계승 경쟁자들을 제거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왕위 계승 경쟁자들을 제거한 것은 왕조 유지라는 관점에서 오히려 역효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오파나 에그프리드의 가까운 남성 친척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에그프리드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결국 오파와는 먼 친척 관계였던 켄울프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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