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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리 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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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르바리 해적은 9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북아프리카 연안에서 활동하며 지중해를 위협한 해적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이슬람교도였으며, 기독교 국가의 선박을 공격하고 재물을 약탈하며, 유럽인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판매하는 행위를 일삼았다. 특히 16세기에는 바르바로사 하이레딘 형제와 같은 강력한 해적들이 등장하여 전성기를 맞이했다. 바르바리 해적의 공격은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등 먼 지역까지 미쳤으며, 노예 무역은 주요 수입원이었다. 유럽 열강들의 군사적, 외교적 대응과 미국의 바르바리 전쟁을 거쳐 19세기 초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으로 활동이 종식되었다. 바르바리 해적은 문학 작품의 소재로도 자주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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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리 해적
지도 정보
명칭
다른 이름바르바리 코르세어
오스만 코르세어
로마자 표기Barbary pirates
활동 시기
활동 기간16세기 ~ 19세기 초
활동 지역
주요 활동 해역지중해 서부
북아프리카 해안
대서양 서부
주요 근거지
근거지살레
알제
튀니스
트리폴리
주요 인물
주요 인물바르바로사 형제
드라구트
케말 레이스
무라트 레이스
툴리파노
세력
주요 세력오스만 제국
바르바리 해안의 여러 해적 국가
활동 내용
주요 활동해적 행위
노예 사냥
몸값 협상
해상 약탈
특징
특징기독교 선박 공격
노예 무역 관여
이슬람권 해적 세력
유럽 국가들과의 충돌
결과 및 영향
결과해적 활동 억제
바르바리 전쟁 발발
노예 무역 감소
영향유럽 해군력 강화
서구 열강의 북아프리카 진출
노예제 역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
기타
관련 문서바르바리 전쟁
오스만 제국
해적
노예무역

2. 역사

바르바리 해적은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즉 유럽에서 바르바리아 해안이라 불리던 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한 해적들이다. 이 지역은 원래 베르베르인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바르바리 해적의 약탈 행위는 지중해 전역은 물론, 서아프리카 대서양 연안, 남아메리카, 심지어 북대서양의 아이슬란드까지 미쳤다.[1] 그러나 주요 활동 지역은 서지중해였다. 이들은 선박 나포 외에도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브리튼 제도, 네덜란드, 아이슬란드 등지의 해안 도시와 마을을 습격하는 '라지아'라 불리는 약탈을 자행했다. 이러한 공격의 주된 목적은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이슬람 시장에 팔아넘길 기독교도 노예를 확보하는 것이었다.[2]

이러한 습격은 이슬람교도가 이 지역을 정복한 직후부터 시작되었지만, '바르바리 해적'이라는 용어는 주로 16세기 이후의 습격자들에게 사용된다. 16세기부터 습격의 빈도와 범위가 확대되었고, 알제, 투니스, 트리폴리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바르바리 제국'이라 불리는 자치 지역이 되었다. 모로코의 항구 살레에서도 유사한 습격이 있었지만, 모로코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아 바르바리 제국에 포함되지 않았다.

해적들은 수많은 선박을 나포했으며,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80만 명에서 125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잡아 노예로 삼았다고 추산된다.[2] 스페인과 이탈리아 해안선은 거의 버려졌고, 19세기까지 정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적들 중에는 존 워드나 지멘 단스카처럼 유럽 출신 탈주자나 개종자도 있었다.[3] 16세기 초, 바르바로사 형제의 하이레딘과 오르치는 오스만 제국을 위해 알제를 지배하며 해적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1600년경, 유럽 해적들이 바르바리아 해안에 최신 항해술과 조선술을 전파하면서 해적 행위는 대서양까지 확대되었고, 17세기 초중반이 전성기였다.

17세기 후반, 유럽 각국의 강력한 해군이 바르바리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고 자국 선박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하면서 해적 행위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호받지 못하는 기독교 국가의 선박과 해안은 19세기까지 피해를 입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1814년부터 1815년까지 열린 빈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바르바리 해적을 완전히 진압하기로 합의했고, 그 위협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해적 행위는 간헐적으로 계속되었고,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침략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2. 1. 초기 역사 (9세기 ~ 15세기)

9세기 크레타 섬 무슬림 정권(824년 - 961년) 시대부터 지중해에서 이슬람교도에 의한 해적 행위가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해안 지대를 습격하여 재산과 사람을 빼앗고 노예 무역을 했다. 그러나 노르만족의 시칠리아 탈환과 이탈리아 해양 도시의 세력 확장으로 이들의 세력은 약해졌다. 14세기 후반 튀니지 해적이 위협이 되면서 1390년에는 “바르바리십자군”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와 제노바의 마지아 공격을 초래했다. 레콩키스타로 인한 무어인 추방과 마그레브(바르바리 제국) 해적의 증가는 사실이지만, 바르바리 해적이 기독교 국가 선박에 진정한 위협이 된 것은 오스만 제국이 확장하고 1487년에 사략선과 케말 레이스 제독이 북아프리카에 온 이후였다.[4]

2. 2. 전성기 (16세기 ~ 17세기)

16세기에서 17세기는 바르바리 해적의 전성기였다. 오스만 제국의 지원 아래, 바르바로사 형제와 잭 워드와 같은 유명한 해적들이 등장하며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다.

미틸레네 출신의 하이레딘과 오르치 형제는 스페인의 무어인들과 레반트의 이슬람교도 모험가들 중 가장 성공한 이들이었다. 15세기에서 16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들의 급습 횟수가 늘어났다. 스페인은 이에 맞서 오랑, 알제, 튀니스 등의 해안 도시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518년 오르치가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하이레딘은 셀림 1세에게 군대 파병을 요청했다. 1529년, 하이레딘은 알제 앞 요새 섬에서 스페인인들을 몰아내고 오스만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1518년경부터 1587년 우르치 알리가 죽을 때까지 알제는 북아프리카 베일러베이(주총독) 정부의 중심지였으며, 트리폴리, 튀니지, 알제를 통치했다. 1587년부터 1659년까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파견된 파샤가 통치했지만, 이후 알제에서 일어난 군사 혁명으로 파샤의 권력은 유명무실해졌다. 1659년부터 이들 아프리카 도시들은 여전히 오스만 제국 영토였지만, 실제로는 군사 공화국이었으며, 독자적인 통치자를 선출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으로 생활했다. 시난 레이스와 사무엘 팔라체와 같은 세파르딤(스페인계 유대인)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탈출하여 오스만 제국의 깃발 아래 스페인 제국의 선박을 공격하는 예도 있었다.[10][11]

초기(1518년~1587년) 베일러베이는 술탄의 제독이었고, 대함대를 이끌고 정치적 목적으로 전쟁 작전을 지휘했다. 그들은 노예 사냥꾼이었으며, 그 수단은 잔혹했다. 1587년 이후, 그 후계자들의 목표는 육지와 바다에서의 약탈자가 되는 것이었다. 해상 작전은 선장 즉 "레이스"가 수행했고, 그들은 하나의 계급, 또는 법인조차 형성했다. 전리품의 10% 상당이 파샤 또는 그 후계자("아가", "데이", "베이" 칭호를 받음)에게 지불되었다.[12]

바르바리 해적들은 유럽 해안 도시들을 습격하고 주민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았다. 1544년, 하이레딘은 나폴리만이스키아섬을 점령하여 4,000명을 포로로 잡고, 리파리섬의 거의 전 인구를 노예로 삼았다.[13] 1551년, 튀르구트 레이스는 몰타고조섬 전 인구를 오스만 리비아로 보냈다. 1554년, 해적은 이탈리아 남부 비에스테를 습격하여 7,000명을 노예로 삼았다. 1555년, 튀르구트 레이스는 코르시카섬의 바스티아를 습격하여 6,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1558년, 바르바리 해적은 메노르카섬의 시우타델라 데 메노르카를 점령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하고, 생존자 3,000명을 이스탄불로 노예로 보냈다.[14] 1563년, 튀르구트 레이스는 스페인의 그라나다 지방 해안에 상륙하여 알무니에칼 등 지역 해안 도시를 점령하고 4,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바르바리 해적은 발레아레스 제도를 여러 번 습격했기 때문에, 해안 지역에는 많은 망루와 요새화된 교회가 건설되었다. 해적의 위협은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포르멘테라섬 등은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이 시기 유럽 국가들도 반격했다. 리보르노의 기념비 "콰트로 모리"는 성 요한 기사단(몰타 기사단)과 성 스테판 기사단이 16세기에 바르바리 해적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또 다른 대응책은 독자적인 프리깃 함선을 건조하는 것이었다. 경량이고 빠르며 조작이 용이한 갤리선은 바르바리 해적이 전리품과 노예를 가지고 도망치려 할 때 추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해안의 망루에서 주민들에게 요새화된 장소로 피신하도록 경고하고, 해적과 싸우기 위해 지역 병력을 모으는 방법이 있었지만, 해적은 기습이라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무력에 의한 대응은 특히 어려웠다.

역사학자 애드리언 티니스우드에 따르면, 가장 악명 높은 해적들은 잉글랜드와 유럽의 반역자들이었는데, 사략선으로 일을 시작하여 평화로운 시기에 그 직업을 추구하기 위해 바르바리 해안으로 이동한 자들이었다. 이러한 떠돌이들은 최신 항해술과 조선술을 해적 행위에 도입하여, 해적들은 아이슬란드뉴펀들랜드섬 등 멀리까지 노예 사냥을 위한 장거리 공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3] 잉글랜드인 해적 헨리 메인워링은 나중에 왕실로부터 사면을 받고 잉글랜드로 돌아와 기사 작위를 받고 의회 의원이 되었으며, 심지어 영국 해군 중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3]

2. 2. 1. 바르바로사 형제

바르바로사 형제는 16세기 초 알제를 근거지로 활동한 그리스계 이슬람교도 해적이다. 형제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바르바로사 오르치와 바르바로사 하이레딘이다. '바르바로사'는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을 뜻하며, 맏형 오르치가 붉은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르치는 1502년 또는 1503년에 오스만 제국을 위해 젤라바 섬을 점령했다. 그는 북아프리카 해안의 스페인령을 자주 공격했으며, 1512년에는 공격 중 포탄에 맞아 왼팔을 잃었다. 1516년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알제를 점령하고, 반대하는 알제 통치자와 지역 지배자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1518년 스페인군에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하이레딘은 오르치의 동생으로, 유능한 기술자이자 6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형처럼 보이기 위해 머리카락과 수염을 붉게 염색했다. 오스만 술탄의 함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하이레딘의 지휘 아래 오스만 제국은 30년 이상 동지중해를 장악했다. 하이레딘은 1546년에 열병(아마도 페스트)으로 사망했다.[3]

2. 2. 2. 잭 워드

잭 워드(Jack Ward) 또는 존 워드(John Ward)는 베네치아 주재 잉글랜드 공사가 "잉글랜드에서 바다로 나간 악당들 중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큰 자"라고 칭한 잉글랜드 출신 해적이다.[3]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스페인과의 전쟁 중 사략선원으로 활동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해적이 되었다.[3] 1603년경 동료들과 함께 배를 나포하여 투니스로 건너갔으며,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해적 활동으로 부를 쌓았다.[3] 그는 북아프리카 지역에 중무장한 횡돛선을 도입하여 갤리선 대신 사용했는데, 이는 바르바리 해적이 지중해를 지배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3] 1622년 페스트로 사망했다.[3]

3. 활동 범위 및 대상

바르바리 해적은 지중해 전역은 물론, 대서양 연안의 서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심지어 북대서양의 아이슬란드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1] 그러나 이들의 주요 활동 무대는 서지중해였다.

바르바리 해적은 선박을 나포하는 것 외에도 해안 도시와 마을을 습격하는 '라지아'라 불리는 약탈을 자행했다. 주요 공격 대상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었으며, 브리튼 제도, 네덜란드, 아이슬란드까지 공격했다.[2] 이들은 북아프리카중동의 이슬람 시장에 팔아넘길 기독교도 노예를 잡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았다.[2]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바르바리 해적에게 잡혀 노예가 된 사람들은 80만 명에서 12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2] 1798년에는 사르데냐 근처의 작은 섬이 튀니지인들에게 공격당해 900명 이상의 주민이 노예로 끌려가기도 했다.[9]

바르바리 해적의 습격 사례는 다음과 같다.


  • 1544년, 바르바로사 하이레딘은 나폴리만이스키아섬을 점령하여 4,000명을 포로로 잡고, 리파리섬의 거의 전 인구를 노예로 삼았다.[13]
  • 1551년, 튀르구트 레이스는 몰타고조섬의 전 인구를 오스만 리비아로 보냈다.
  • 1554년, 이탈리아 남부의 비에스테를 습격하여 7,000명을 노예로 삼았다.
  • 1555년, 코르시카섬의 바스티아를 습격하여 6,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 1558년, 메노르카섬의 시우타델라 데 메노르카를 점령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하고, 생존자 3,000명을 이스탄불로 노예로 보냈다.[14]
  • 1563년, 튀르구트 레이스는 스페인그라나다 지방 해안에 상륙하여 알무니에칼 등 지역 해안 도시를 점령하고 4,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 발레아레스 제도는 여러 번 습격당했고, 포르멘테라섬 등은 사람이 살지 않게 될 정도였다.

4. 노예 무역

바르바리 해적의 주요 수입원은 노예 무역이었다. 이들은 납치한 유럽인들을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이슬람 시장에 노예로 팔았다.[2] 이슬람교도가 이 지역을 정복한 직후부터 이러한 습격이 시작되었지만, '바르바리 해적'이라는 용어는 주로 16세기 이후의 습격자들에게 사용되었다. 이 시기부터 습격의 빈도가 높아지고 범위가 넓어졌으며, 알제, 투니스, 트리폴리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바르바리 제국이라 불리는 자치 지역이 되었다. 모로코의 항구 살레에서도 유사한 습격이 발생했지만, 모로코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아 바르바리 제국에 포함되지 않았다.

해적들은 수많은 선박을 나포했으며,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80만 명에서 125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잡아 노예로 삼았다고 추산된다.[2] 해적들 중에는 존 워드나 지멘 단스카처럼 유럽의 탈주자나 개종자도 있었다.[3]

1631년 6월, 무라트 레이스가 알제 해적, 오스만 제국 군대와 함께 아일랜드 코크주 볼티모어의 작은 항구 마을을 습격했다.[12] 주민 거의 전부를 북아프리카로 끌고 가 노예로 삼았는데, 이들 중 2명만이 다시 아일랜드를 볼 수 있었다.[18]

알제에만 2만 명 이상이 감금되었다고 한다. 부유한 사람들은 몸값을 내고 풀려났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노예로 남았다. 이탈리아인, 스페인인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여행하다 잡힌 독일인, 영국인 등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12] 구속 수도회나 라자로 수도회 등 종교 단체들이 포로 석방을 위해 노력했고, 많은 국가에서 그 목적으로 기금이 마련되었다.

4. 1. 노예의 삶

바르바리 해적에게 잡힌 노예들의 주된 목적은 몸값을 받거나 노예로 파는 것이었다. 노예들은 북아프리카에서 팔리거나 여러 가지 힘든 일에 동원되었다.

역사가 로버트 C. 데이비스는 1530년부터 1780년 사이에 100만 명에서 125만 명의 유럽인들이 북아프리카(주로 알제, 튀니스, 트리폴리)와 이스탄불, 살레에서 노예로 쓰였다고 추산한다.[20]

붙잡힌 노예들은 북아프리카로 돌아오는 긴 항해 동안 질병, 식량 및 물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 경매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구경거리가 되었고, 경매에서는 구매자들이 경쟁했다. 알제의 데이는 경매에서 낙찰된 가격으로 노예를 구입할 수 있었다. 노예들은 힘과 체력을 보여주기 위해 뛰거나 날아다녀야 했다. 이들은 힘든 육체 노동부터 가사까지 다양한 일에 사용되었다. 밤에는 "바그니오"라고 불리는 덥고 비좁은 감옥에 갇혔지만, 18세기에는 예배당, 병원, 상점, 노예 운영 바까지 갖춘 곳도 있었다.

바그니오의 조건은 엄격했지만, 갤리선 노예들의 조건보다는 나았다. 바르바리 해적 갤리선은 연간 80일에서 100일 동안 해상에 있었고, 노예들은 육지에서 혹독한 육체 노동을 강요받았다. 이스탄불의 오스만 술탄 갤리선 노예들은 영구적으로 갤리선에 구속되어 평균 19년 동안 일했다.[21] 이들은 갤리선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고, 수년 동안 족쇄와 사슬에 묶여 생활하며 수면, 식사, 배변을 모두 앉은 채로 해결했다. 한 개의 노에 5~6명이 매달렸고, 감독관은 채찍으로 이들을 감시했다.

노예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해방되기를 기대했지만, 자금 부족과 높은 우편 요금, 긴 배달 시간 때문에 어려웠다. 몸값이 지불되어도 전염병 우려 때문에 항구에서 검역을 받아야 했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구출에 의존할 수 없었다. 빈민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구출금은 배에서의 유용성에 따라 달라졌다. 탈출은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돈키호테의 저자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는 4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가족에게 구출되었다. 가장 유명한 탈출 노예는 토마스 페로우였으며, 1740년에 그의 이야기가 출판되었다. 그는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738년 7월 지브롤터로 탈출할 수 있었다.

4. 2. 노예 구출 노력

바르바리 해적에게 잡힌 노예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기를 기대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자유를 얻는 과정은 매우 어려웠다. 중개인이나 자선 단체를 통해 몸값을 마련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노예 구출 자금 모금이 활발해지면 몸값을 올려버리는 방식으로 대응했다.[1]

몸값만 충분하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노예는 가족에게 자신이 붙잡혔다는 사실을 알리고 몸값을 보내도록 요청해야 했는데, 이를 위한 우편 요금은 엄청나게 비쌌다. 노예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고, 편지가 배달되기까지 몇 달씩 걸리기도 했다. 설령 몸값이 지불된다 하더라도, 노예는 항구에서 구출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17세기18세기에는 전염병 때문에 검역을 받아야 해서 항구에 더 오래 머무르는 경우도 있었다.[1]

대부분의 바르바리 해적 노예들은 구출에 희망을 걸기 어려웠다. 구출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희박했다. 노예의 몸값은 배에서 얼마나 유용한지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연히 선장이 일반 선원보다 몸값이 높았다. 탈출을 시도할 수도 있었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돈키호테의 작가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도 포로로 잡혀 노예 생활을 했으며, 네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가족이 몸값을 지불하여 풀려났다. 가장 유명한 탈출 성공 사례는 토마스 페로우(Thomas Pellow)로, 그의 이야기는 1740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페로우는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마침내 1738년 7월 지브롤터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1]

5. 대응

이전 단계에서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내용을 작성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수정할 내용도 없습니다.

6. 한국의 관점

바르바리 해적 문제는 한국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해상 무역과 안보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노예 무역의 비극성과 인권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7. 대중 문화

바르바리 해적은 에밀리오 살가리의 소설 《알제의 표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 케네스 그레이엄의 《두꺼비 마법사》, 라파엘 사바티니의 《바다의 독수리》와 《이슬람의 검》, 로열 타일러의 《알제의 포로》,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오브리 & 머튜린 시리즈 《신예 함장, 전란의 바다로》, 닐 스티븐슨의 《바로크 사이클》, 루이 르무르의 《걷는 북》, 클라이브 커슬러의 《예루살렘의 보물을 찾아라!》, 앤 고롱의 《앙젤리크, 바르바리에서》 등 많은 유명 소설에 등장한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알제의 갤리선 노예로 5년을 보냈으며, 그 경험을 《돈키호테》의 포로 이야기나, 알제를 배경으로 한 《알제의 조약》과 《알제의 목욕탕》이라는 두 편의 희곡, 그리고 다른 많은 작품의 에피소드에 묘사하고 있다.

바르바리 해적은 많은 성애 문학(포르노 소설)에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1828년에 출판된 《The Lustful Turk》에서는 백인 여성을 납치하여 성적 노예로 만드는 것이 주요 관심사이다.[22]

대중문화에서 해적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예 중 하나는 안대이며, 아랍 해적 라마 이븐 자빌 알 자라히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알 자라히마는 18세기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은 후 안대를 착용했다.

리틀 조니 잉글랜드의 노래 「바르바리의 백합」은 바르바리 해적에게 노예로 잡혀 알제에서 팔렸지만, 주인이 죽자 해방된 영국 여성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이후 상인이 되어 다른 영국 소녀를 노예 신분에서 사들여 해방시켰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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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British Slaves on the Barbary Coast http://www.bbc.co.uk[...] 2013-11-10
[3] 뉴스 Review of ''Pirates of Barbary''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201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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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Captives: Britain, Empire, and the World, 1600–1850 Anchor Books
[6] 서적 Thomas Barclay (1728–1793: Consul in France, Diplomat in Barbary Lehigh University Press
[7] 웹사이트 Milestones of American Diplomacy, Interesting Historical Notes, and Department of State History http://www.state.gov[...] 2007-12-17
[8] 웹사이트 Cohen Renews U.S.-Morocco Ties http://www.defenseli[...] 2009-03-12
[9] 서적 Christian Slaves, Muslim Masters: White Slavery in the Mediterranean, the Barbary Coast and Italy, 1500–1800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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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웹사이트 The mysteries and majesties of the Aeolian Islands http://www.iht.com/a[...] 2013-11-10
[14] 웹사이트 History of Menorca http://www.holidays2[...] 2013-11-10
[15] 서적 Flying the Black F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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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웹사이트 Palazzo Pitti http://www.florenceh[...] 2013-11-10
[18] 서적 The Stolen Village - Baltimore and the Barbary Pirates OBrien
[19] 웹사이트 The Middle East and the Making of the United States, 1776 to 1815 http://www.columbia.[...] 2005-11-03
[20] 서적
[21] 서적 The Stolen Village - Baltimore and the Barbary Pirates OBrien
[22] 서적 The other Victorians: a study of sexuality and pornography in mid-nineteenth-Century England Transaction Publishers
[23] 서적 해적의 세계사 AK커뮤니케이션즈
[24] 백과사전 네이버 국어사전
[25] 백과사전 바르바리 [Barbary] 두산백과
[26] 서적 해적의 세계사 AK커뮤니케이션즈
[27] 서적 The Naval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P. F. Collier
[28] 서적 Our Naval War With France [[iarchive:ournavalw[...] Houghton Mifflin Company
[29] 웹사이트 Launching the New U.S. Navy https://www.archives[...] 2018-11-26
[30] 서적 해적의 세계사 AK커뮤니케이션즈
[31] 서적 해적의 세계사 AK커뮤니케이션즈
[32] 서적 해적의 세계사 AK커뮤니케이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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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백과사전 알제리의 역사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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