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바실리 베레샤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바실리 베레샤긴은 1842년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난 화가로, 군 복무 후 미술을 공부하여 유럽과 아시아를 여행하며 다양한 풍경과 문화를 그렸다. 그는 특히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평화주의적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이국적인 풍경과 종교적 주제를 탐구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러일 전쟁에 종군하여 전사했으며, 그의 작품은 전쟁의 비극을 고발하고 평화를 옹호하는 데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러일 전쟁 참전 군인 사망자 - 히로세 다케오
    히로세 다케오는 메이지 시대 일본 해군 중좌로 러일전쟁 중 전사하여 일본에서 군신으로 추앙받았으나, 군국주의 미화에 이용되었다는 비판과 함께 그의 삶과 죽음은 다양한 문화적 작품의 소재가 되어 역사적 재평가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 러일 전쟁 참전 군인 사망자 - 로만 콘드라첸코
    로만 콘드라첸코는 러일 전쟁 당시 뤼순 요새 방어를 지휘하며 일본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격퇴했으나, 1904년 전사한 러시아 제국의 군인이다.
  • 러시아의 화가 - 안드레이 루블료프
    15세기 러시아의 이콘 화가이자 수도사인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러시아 정교회 미술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성삼위일체」 이콘은 성삼위일체 묘사의 표준으로 인정받았으며 금욕적인 아름다움과 비잔틴 양식의 조화로 '루블료프파'라는 독자적인 예술 사조를 형성했다.
  • 러시아의 화가 - 카지미르 말레비치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의 선구자이자 절대주의 미술 운동의 창시자로서, 기하학적 추상을 통해 순수한 예술적 표현을 추구했으며, 대표작 〈검은 사각형〉과 〈흰색 위의 흰색〉은 추상 미술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 러시아의 러일 전쟁 참전 군인 - 라브르 코르닐로프
    라브르 코르닐로프는 러시아 제국 군인으로,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러시아 혁명 당시 쿠데타 시도 실패 후 백군에 가담하여 의용군을 지휘하다 전사했고, 그의 사건은 러시아 혁명의 주요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 러시아의 러일 전쟁 참전 군인 - 아나톨리 스테셀
    아나톨리 스테셀은 러시아 제국 장군으로 러일 전쟁 당시 뤼순 요새 사령관을 지냈으며,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의화단 운동에도 참전했으나 뤼순 요새 항복 후 러시아에서는 무능하다는 비판을, 일본에서는 초기 방어 성공을 인정받는 등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바실리 베레샤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바실리 베레샤긴
바실리 베레샤긴
본명바실리 바실리예비치 베레샤긴
출생1842년 10월 26일
출생지러시아 제국 노브고로드 주 체레포베츠
사망1904년 4월 13일
사망지러시아 제국 뤼순커우 (현재의 중국 뤼순커우)
국적러시아
직업화가, 작가, 군인, 여행가
경력
교육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사사황실 예술 아카데미 교수
스타일사실주의
주요 작품《전쟁의 신격화》, 1871년
수상성 게오르기우스 훈장 (4등급)

2. 생애

바실리 베레샤긴은 러시아 제국 노브고로드주 체레포베츠의 부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8세에 군 유년학교에 입학했고, 185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1859년 장교가 되었으나 제대하고, 페테르부르크 미술 학교에서 공부했다. 성적은 우수했지만 3학년 때 퇴학당했다. 트빌리시를 거쳐 프랑스로 가 피레네산맥 등지를 방문하고 파리에서 1년간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하며, 장레옹 제롬에게 사사했다.

1867년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 장군의 투르키스탄 원정에 종군하여 사마르칸트 공격 등을 목격하고, 1868년 투르키스탄을 주제로 한 개인전을 열었다. 1870년 뮌헨에서 종군 중 스케치를 바탕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당시 그의 관심사는 중앙아시아의 건축과 풍속이었다. 1874년 인도를 여행하며 영국의 식민 지배 실태를 보았다.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종군, 부관 지위와 자유 행동권을 부여받고 시푸카 고개 전투를 목격했다. 플레벤 공방전에서 형제가 전사하고 자신도 중상을 입으며, 이 경험은 그의 세계관을 바꾸었다.

시프카 전장


이후 평화주의자가 된 베레샤긴은 전쟁의 비참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동파에 가까운 민주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영웅 중심의 전쟁화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투르키스탄 원정(1871~1874년),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1878년, 1880년 이후), 러시아 원정을 주제로 한 연속작을 그렸으며, 특히 러시아 원정 연작 중 보로디노 전투를 그린 ‘보로디노의 나폴레옹’이 대표적이다. 그의 그림은 선전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1881년부터 비엔나, 베를린 등을 여행하고, 1884년 인도를 거쳐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다. 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작품들은, 유럽화된 그리스도 상이 아닌 현지 풍속과 풍경을 담아 중동인으로 묘사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미국에서 미국-스페인 전쟁 전장 쿠바, 필리핀을 방문하고, 1903년 일본을 방문하여 문화와 인물상을 남겼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후 러시아 조차지 뤼순에서 종군, 여순 함대 사령관 스테판 마카로프 초대로 기함 페트로파블롭스크에 탑승하여 전쟁화를 그렸다. 4월 13일 페트로파블롭스크가 기뢰에 피격, 폭발하여 마카로프 제독과 함께 전사했다.[17]

적국 일본에서도 그의 죽음을 보도했고, 고토쿠 슈스이, 나카자토 카이잔 등이 추모글을 남겼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해군 사관학교 졸업 당시의 베레샤긴 (1860년대)


바실리 베레샤긴은 1842년 러시아 제국 노브고로드주 체레포베츠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의 지주였고, 어머니는 평민 출신으로 타타르족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2][3][4] 8세 때 차르스코예 셀로로 보내져 알렉산더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3년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58년에 첫 항해를 했다.[2] 그는 프리깃함 Камчатка|캄차카ru에서 복무했으며, 이 배는 덴마크, 프랑스 제2제국, 이집트로 항해했다.

베레샤긴은 해군 학교에서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곧바로 군복무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2년 후인 1863년, 그는 작품 ''율리시스의 구혼자 살해''로 러시아 제국 예술원에서 메달을 받았다. 1864년, 파리로 가서 장레옹 제롬에게서 그림을 배웠지만, 스승의 방법론과는 크게 달랐다.[2]

2. 2. 중앙아시아 여행과 투르키스탄 시리즈

1867년,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 장군과 함께 투르키스탄 원정에 종군하여 사마르칸트 공격 등을 목격했다. 1868년 카우프만 장군의 후원으로 투르키스탄을 주제로 개인전을 개최했다.[2] 1870년 뮌헨에 머물면서 종군 중에 그린 스케치와 연구를 바탕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당시 그의 관심사는 전투 장면보다는 중앙아시아의 이국적인 건축과 풍속에 있었다.[2]

1871년, 독일 제국 뮌헨에 아틀리에를 설립했다. 1873년 영국 런던의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자신의 작품(나중에 "투르키스탄 시리즈"로 불림) 개인전을 열었다. 1874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다시 작품 전시회를 열었는데, ''전쟁의 신격화''와 ''남겨진 사람들'' 두 그림은 러시아 군대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전시가 거부되었다.[2]

베레샤긴의 초기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타청의 극장 폐허'' (1869–1870)


''타청의 폐허'' (1869–1870)


''아편 중독자'' (1868)


''의사들. "항복하라!" — "꺼져!"''

2. 3. 인도 여행과 작품 활동

1874년 인도를 장기간 여행하며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는 인도의 실태를 견문했다.[14]

2. 4. 러시아-튀르크 전쟁 종군과 평화주의

베레샤긴은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의 비참함을 현지에서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사실적인 그림으로 표현했다. 전쟁을 그린 그의 그림에는 사망자, 부상자, 약탈, 야전병원, 눈에 덮인 병사의 시신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그림들은 평소 그림이나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의 민주주의 사상은 이동파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영웅 예찬이었던 전쟁 회화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투르키스탄 원정 (1871년 ~ 1874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 ~ 1878년, 1880년 이후), 러시아 원정을 테마로 한 연속작을 많이 그렸는데, 특히 러시아 원정을 테마로 한 작품 중에서는 보로디노 전투를 그린 대표작 ‘보로디노의 나폴레옹’이 탄생했다. 그의 그림은 그 주제로 인해 선전(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다른 대표작 ‘전쟁의 결말’은 두개골의 산을 그린 것이지만, 1980년에 출판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해 쓰여진 책 표지에 ‘1916년 서부 아르메니아에서 터키에 의한 잔학 행위’라는 캡션을 달아 게재된 후에 베레샤긴의 작품으로 판명되었다.[2]

제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시작되자 베레샤긴은 파리를 떠나 러시아 제국군에 현역으로 복귀했다. 그는 십카 고개 통과와 플레벤 공방전 (1877년)에 참여했으며, 이 전투에서 그의 형제가 사망했다. 그는 루스추크 근처 다뉴브강 도하 준비 중 위험한 부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미하일 스코벨레프 장군의 비서로 산 스테파노에 있었다.[2]

2. 5. 세계적 명성과 논란

188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비엔나와 베를린 등 긴 여행을 떠났으며, 1884년에는 시리아팔레스타인을 방문했다.[2] 팔레스타인 성지를 방문한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작품에서, 유럽화된 그리스도 상이 아닌 현지 풍속과 풍경을 담은 자연주의적 기법으로 중동의 인간상을 묘사하여 논란을 일으켰다.[2]

그의 작품은 고향 러시아, 동유럽, 미국까지 전시되었다. 미국-스페인 전쟁의 전장이었던 쿠바, 필리핀을 방문했고, 1903년에는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문화와 인물상을 남겼다.[2]

뮌헨에 정착하여 전쟁 그림을 빠르게 제작하여 조수를 고용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여 평화를 증진시키려는 교훈적인 목표를 담고 있었고, 파리, 런던, 베를린 등 여러 도시에서 전시회를 열어 대중들을 이끌었다.[2]

''전쟁 포로의 길'' (1878–1879). 브루클린 박물관


베레샤긴은 영국령 인도의 통치를 묘사한 여러 장면을 그렸는데, 특히 ''1876년 웨일스 공의 자이푸르 입성''은 196x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유화로 알려져 있다.[5] 그는 1882–1883년에 다시 인도를 여행했다.[6]

그는 ''로마인의 십자가 처형 (1887)'', 영국령 인도에서의 총살형, 니힐리스트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처형, 이 세 개의 그림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2] 영국령 인도에서의 총살형은 세포이총구에 묶여 처형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1857년 인도 반란에서만 발생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림은 1880년대의 현대 군인들을 묘사하여 그 관행이 당시에도 유효했음을 암시했다. 베레샤긴은 말레르코틀라의 열병식장에서 남다리 시크교도 그룹을 총으로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은 J. L. 코완의 사례를 언급하며, 만약 다른 반란이 일어난다면 영국인들은 이 방법을 다시 사용할 것이라고 변호했다.[7][8]

영국령 인도에서의 총살형


19세기 후반, 베레샤긴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었으며, 그의 이름은 유럽과 미국의 언론에서 끊이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묘사했는데, "나는 평생 태양을 사랑했고 햇볕을 그리고 싶었다. 전쟁을 보게 되어 그것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할 기회가 생겼을 때, 나는 다시 태양에 전념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그러나 전쟁의 분노는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라고 썼다. 헬무트 폰 몰트케 (대선배)는 베를린 전시회에서 그의 그림 ''전쟁의 신격화''를 보고 독일 군인들의 방문을 금지했고, 오스트리아 전쟁 장관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러시아에서는 베레샤긴의 작품 전시 금지뿐만 아니라, 러시아 군대를 비방했다는 비난 속에 책과 정기 간행물에 그의 작품을 복제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는 부당한 비난을 심하게 받아들여 ''잊혀진 병사'', ''그들은 포위했다'', ''추격하여 들어갔다''를 불태웠다.

1884년 오스만 제국의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 지방으로의 여행은 신약 성서에서 영감을 받은, 똑같이 논란이 된 일련의 주제를 제공했다.[2] 베레샤긴의 그림은 당시 부적절한 현실주의로 여겨졌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한 것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예수의 특징 묘사는 지나치게 저속하고 과도하게 셈족의 민족성을 강조한 것으로 여겨졌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영감을 받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관한 ''1812'' 연작은 모스크바에서 1893년에 그려졌다.[2][9]

베레샤긴의 아틀리에; 1890년대

2. 6. 말년과 러일 전쟁

1904년 러시아일본 사이에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베레샤긴은 러시아 조차지 뤼순으로 갔다. 스테판 마카로프의 초대를 받아 여순 함대 기함 페트로파블롭스크에 탑승하여 전쟁화를 그렸다. 그러나 4월 13일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일본군이 부설한 기뢰에 닿아 폭발했고, 화약고가 폭발하며 마카로프 제독과 베레샤긴을 비롯한 승무원 대부분이 전사했다. 베레샤긴의 마지막 작품이 된 마카로프 회의 모습 스케치는 파도에 떠다니다 무사히 회수되었다.[17]

그의 죽음은 적국 일본에서도 보도되어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와 나카자토 카이잔 등이 추모글을 남겼다.[2][10]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1901)는 필리핀-미국 전쟁 (1898–1899)을 주제로 한 연작 중 하나

3. 주요 작품 경향

바실리 베레샤긴은 평화주의 화가로,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에는 사망자, 부상자, 약탈, 야전병원, 눈 덮인 병사의 시신 등이 자주 등장하며, 이는 당시 그림이나 미술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17] 베레샤긴은 민주주의적 사상을 가진 이동파 화가들과 유사한 경향을 보였으며, 영웅 숭배 위주의 전쟁 회화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로디노의 나폴레옹 (1897년)


전쟁의 결말 (1871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베레샤긴은 투르키스탄 원정(1871-1874),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1878, 1880년 이후), 러시아 원정 등 여러 전쟁을 소재로 한 연속 작품을 남겼다. 특히 러시아 원정을 다룬 작품 중 보로디노 전투를 묘사한 '보로디노의 나폴레옹'(1897년)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의 작품은 전쟁의 참상을 드러내는 주제 때문에 선전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일례로, 두개골 더미를 그린 '전쟁의 결말'은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다룬 책 표지에 터키의 잔학 행위를 묘사한 그림으로 잘못 사용되기도 했다.[17]

3. 1. 이국적인 풍경과 문화 묘사

베레샤긴은 1881년부터 이듬해까지 비엔나와 베를린 등지를 여행했다. 바트엠스에 체류하면서 성 알렉산드라 교회의 제단화를 그렸다. 1884년에는 두 번째 인도 여행을 떠나 시리아팔레스타인을 방문했다.

팔레스타인 성지를 방문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작품들에서 서구의 유럽화된 그리스도 상이 아닌, 현지 풍속과 풍경을 담은 자연주의적 기법으로 그리스도를 중동인으로 묘사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정교회의 성상은 원래 중동인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고향 러시아, 동유럽, 미국까지 여행했다. 미국에서는 미국-스페인 전쟁의 전장이었던 쿠바필리핀을 방문했다. 1903년에는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인물화 등을 남겼다.

1866년 파리 살롱에서 베레샤긴은 ''두호보르의 찬송가''를 전시했다. 이듬해 중앙아시아와 투르키스탄에서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카우프만 장군의 원정에 동행했다. 1868년 사마르칸트 포위에서의 공로로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다.[2]

1871년 독일 제국 뮌헨에 아틀리에를 설립한 그는 1873년 영국 런던의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투르키스탄 시리즈" 개인전을 열었다. 187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전시회에서는 ''전쟁의 신격화''와 ''남겨진 사람들'' 두 작품이 러시아 군대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전시가 거부되었다.[2]

1874년 말, 베레샤긴은 북아시아동아시아로 떠나 히말라야 산맥, 영국령 인도, 청나라 치하 몽골, 청나라 치하 티베트를 2년 이상 여행하고 1876년 말 파리로 돌아왔다.

3. 2. 전쟁의 참상 고발

그는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의 비참함을 현지에서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사실적인 그림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전쟁을 그린 그의 그림에는 사망자, 부상자, 약탈, 야전병원, 눈에 덮힌 병사의 시신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테마는 평소 그림이나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17] 또한 그의 민주주의 사상은 이동파에 가까웠다. 그전까지 영웅 숭배였던 전쟁 회화에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연속작이 많으며, 투르키스탄 원정 (1871년~1874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1878년, 1880년 이후), 러시아 원정을 테마로 그린 것이 있는데, 특히 후자에서는 보로디노 전투를 그린 대표작 ‘보로디노의 나폴레옹’(1897년)이 탄생했다.

그의 그림은 그 주제로 인해 선전(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다른 대표작 ‘전쟁의 결말’은 두개골의 산을 그린 것이지만 1980년에 출판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해 쓰여진 책 표지에 ‘1916년 서부 아르메니아에서 터키에 의한 잔학 행위’라는 캡션을 달아 게재된 후에 베레샤긴의 작품으로 판명되었다.[17]

3. 3. 종교적 주제에 대한 탐구

1881년부터 이듬해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이나 독일의 수도 베를린 등지로 장기 여행을 떠났다. 온천 치료를 위해 체류 중이던 독일 서부 바트 엠스에서는 성 알렉산드라 교회의 제단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렸다. 1884년에는 두 번째 인도 여행을 떠났고, 시리아팔레스타인에도 발길을 뻗었다.

팔레스타인의 성지를 방문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일련의 작품에서 그동안 서구에서 표현되던 유럽화된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닌, 현지에서 실제로 보고 들은 풍속과 풍경을 묘사하는 자연주의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중동 사람으로 묘사하여 물의를 빚었다(단, 정교회의 성상은 서구의 회화와 달리, 원래 중동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다).[13]

4. 유산 및 영향

페름 지방의 베레시차기노와 소련의 천문학자 류드밀라 주라블료바가 1978년에 발견한 소행성 3410 베레시차긴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1] 체레포베츠의 베레시차긴 거리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체레포베츠에는 역사적인 가옥 박물관과 베레시차긴 기념비가 있다. 그는 체코 록 가수 알레시 브리히타의 먼 친척이다. 체코 헤비메탈 밴드 아라카인은 앨범 《파라오》의 표지로 《전쟁의 찬미》를 사용했다.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2] EB1911 Vereshchagin, Vassili Vassilievich
[3] 논문 Tracing the Turkestan Series – Vasily Vereshchagin's Representations of Late-19th-century Central Asia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2003
[4] 서적 Portraits of Russian Painters V. Visson 1987
[5] 웹사이트 The 'Jaipur Procession' that inspired the world's second largest oil painting https://www.theherit[...] 2020-06-02
[6] 웹사이트 War Painter: Russia attacks Ukraine: time to remember a 19th century Russian artist Vasily Vasilyevich Vereshchagin https://www.telegrap[...] 2022-09-04
[7] 간행물 The Orient estranged: Vasilii Vereshchagin’s Blowing from Guns in British India https://doi.org/10.7[...]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23
[8] 간행물 Art in December: M. Verestchagin on his Critics – Art and Politics https://archive.org/[...] Cassell 1878–1904
[9] 서적 "1812" Napoleon I in Russia; with an Introduction by R. Whiteing https://archive.org/[...] William Heinemann 2018-08-14
[10] 뉴스 State Historical Museum Opens 'The Year 1812 in the Paintings by Vasily Vereshchagin' http://www.artdaily.[...] Art Daily 2010-03-11
[11] 서적 Directory of Minor Plant Names https://books.google[...]
[12] 웹사이트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Верещагин, цикл полотен «1812 год» http://www.museum.ru[...] 2024-04-12
[13] 뉴스 海外通信@モスクワクワ/ヴェレシャーギン展 世代を超える反戦の願い 朝日新聞 2018-04-17
[14] 웹사이트 Vasily Vereshchagin. Defeated. Servise for the dead. http://www.tanais.in[...]
[15] 뉴스 State Historical Museum Opens 'The Year 1812 in the Paintings by Vasily Vereshchagin' http://www.artdaily.[...] Art Daily 2010-03-11
[16]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17] 뉴스 State Historical Museum Opens 'The Year 1812 in the Paintings by Vasily Vereshchagin' http://www.artdaily.[...] Art Daily 2010-03-1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