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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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한민은 일제강점기에 언론인, 교육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900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항일 사상을 고취했다. 1920년대에는 도쿄에서 문화신문을 창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용정에서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에 힘썼다.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광복 후에는 수원농대에서 잠농업을 강의하고 인하대학교 설립에 참여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으며, 201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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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방한민 |
한자 이름 | 方漢旻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온양 |
출생일 | 1900년 1월 6일 |
출생지 | 대한제국 충청남도 은진군 김포면 (現 대한민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
사망지 | 대한민국 경기도 인천 |
사망일 | 1968년 2월 9일 |
직업 | 독립운동가, 언론인, 대학 교수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학력 | 니혼 대학(日本大學) 사회경제학부 |
배우자 | 김한배(金漢培) |
자녀 | 아들 방준영(方駿榮) |
부모 | 방규석(부), 조현정(모) |
경력 |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동아일보 기자 인하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수원농대(서울대학교 농대 전신) 강사 |
웹사이트 | 국가보훈처 - 방한민 |
2. 생애
2. 1. 출생과 성장 (1900~1919)
방한민은 1900년 1월 16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 황금정 175번지에서 온양 방씨 아버지 방규석(方圭錫)과 어머니 조현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방달주(方達周)는 선약장군과 종2품 용양위부사과를, 백부(伯父)인 방관석(方觀錫)은 사헌부감찰을 역임한 양반 집안이었다. 그의 부친 방규석은 조선 철종 13년인 1862년 임술 농민항쟁 시기에 태어나 조선 고종 22년(1885년) 무과에 합격하여 무반 3품직인 해방영간역청상가좌통정대부(海防營看役請賞加資通政)를 지냈고, 1908년 민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면민들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도 15년간 강경면과 성동면장으로 추대된 바 있다.방한민은 성질이 온순하고 영특하였으며 다섯 살 때 서당에서 수학하였고, 여섯 살 때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마치고 보습과(補習科) 2년과정을 졸업하였다. 15세 때 공주농학교를 3년 수료 후, 수원권업모범농장에서 약 1년간 잠업을 공부하고 자신이 배운 잠사업종 제조방법을 농민들에게 전수시켰다.
방한민은 19세에 부모님의 권유로 김해 김씨 김현규의 딸 김한배(金漢培)와 결혼한 후 슬하에 독자 방준영(方駿榮)을 두었다. 1919년 동경에 있는 서원(西原) 잠계(蠶系) 전문학교에 유학했으나, 건강 문제로 1년 후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하였다. 이 무렵 방한민은 3.1 운동을 겪으면서 점차 일제에 저항하는 정치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일본 도쿄의 600여명 조선유학생들이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발표, 재일 한국인국민회가 발족되어 조선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치던 일, 삼천리 금수강산에 우레마냥 울려퍼진 3.1 독립만세소리등은 그에게 있어서 정치의식에 눈을 뜨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2. 2. 항일 언론 독립운동 (1920~1922)
방한민은 1920년 고향인 논산을 떠나 서울로 상경하여 '새문명, 진보주의'를 표방하며 창간을 준비하던 조선일보에 입사하였다.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에 창간되었으며, 방한민은 창간 멤버로 참여하였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방한민 외에도 최국현, 홍덕유 등 반일사상이 투철한 젊은 기자들이 있었다. 방한민은 일제의 문화정치 회유책동을 분쇄하고 민족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1920년 6월 9일 '朝鮮民衆의 民族的 不平 : 骨髓에 深刻된 大血恨의 眞髓'라는 기사에서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하였다.이 기사는 총독부의 압력으로 10회 연재로 중단되었다. 방한민은 1920년 7월 12일 3.1 운동 관련자 48인의 공판 내용을 보도하며, 7월 14일자부터 48인의 심문 모습을 게재하여 일제의 발매금지 명령을 받았다. 1920년 7월 15일자 조선일보에는 언론의 자유를 잃고 입에 자물쇠를 잠근 모습을 그린 풍자만화와 함께 '긴 악몽'이라는 글이 실렸다. 조선일보는 1920년 8월 27일 '자연의 化'라는 사설에서 "어찌하여 철저하게 죽이려고만! 그것이 왜놈의 조선통치 정신이냐?"는 논설을 발표하여 1920년 8월 27일부터 9월 2일까지 7일간 한국 민간 신문사상 처음으로 정간 처분을 당했는데, 이 기사는 방한민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방한민은 최국현 등과 함께 조선일보에서 해직되었다.
방한민은 1921년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 편집기자로 활동하였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창간되었으며,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을 자임'한다는 창간 취지를 내걸고 있었다. 방한민은 동아일보에서도 반일 색채가 짙은 글과 기사를 게재하였다. 3.1 운동 2주년을 맞아 연재한 동아일보 社說 '일본 친구여'는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압수당하였다.
{{인용문2|"아! 일본친구여, 우리로 하여금 속에 서리고 서린 說話와 가슴이 아프고 쓰린 심정을 충분히 토로케 하라. … 아! 일본친구여, 우리로 하여금 忌憚없이 터놓고 말하고자 하노라. 한일병합 후 과거 10년간에 그대는 총독부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 朝鮮 全道에 그물 늘어놓듯 하였던 저 유명한 '헌병제도'는 무엇을 의미하며 조선 전체에 자갈을 물려 일언반구의 심사를 吐치 못하게 하였던 저 유명한 '언론압박'은 무엇을 의미하였던가.
우리는 솔직하게 말하노라. 이 모든 것은 곧 조선인이 당시 총독정치에 대하여 불평을 抱한 까닭이며 불평의 폭발을 막고자 한 까닭이라 하노라. 그러나 타는 불을 옷깃으로서 가리울 수 있으며 흐르는 물을 손으로 막을 수 있는가. 이 不平은 폭발되고 말았도다 …}}
1922년 방한민은 유학생을 가장하여 도쿄로 건너가 문화신문을 창간하였다. 도쿄에서 방한민이 발행한 조선어 신문인 '문화신문'이 발행되었다는 소식은 국내에 전해져 1922년 7월 ~ 12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기사가 실렸다. 방한민은 정창선 등 10여명과 1921년 6월15일 경 월간지《문화신문》을 창간하였는데, 그 내용은 '민족성 철학으로 본 조선문화의 장래', '교육의 혁명',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등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유학생들을 모아 '문화신문'을 조선유학생들과 동포들에게 배포하였다. 1922년 7월에 니가타현에서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이 발생하자, 《문화신문》은 이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보도하고 조선 유학생들의 항의 데모를 조직하여 일본의 살인만행을 규탄하였다.
2. 3. 교육자 및 독립투사로서의 삶 (1923~1937)
방한민은 1923년 1월 초, 중국 북경에 도착하여 조선인 학생 및 혁명가들과 교류하며 자유, 독립,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주장에 공감하였다. 그러나 학생 단체가 두 파로 나뉘어 대립하는 상황에 실망하고, 민중과 함께 투쟁하기 위해 용정(龍井)으로 이동했다.1923년 1월, 방한민은 용정(龍井)에 도착하여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교편을 잡았으나,[2] 학교가 일본의 교육 이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폐쇄되자, 김정기(金正琪), 김사국(金思國) 등과 함께 대성학교 내에 졸업생들을 모아 동양학원(東洋學院)을 설립하였다.[2] 동양학원에서는 민족 주권 찾기와 조국 광복을 위한 투쟁 방법 등을 가르쳤으며, 사회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인간 평등을 역설하고, 신채호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이론을 통해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2]
동양학원은 사회주의 선전부와 특별부를 설치하여 청년 학생들을 선도하는 전투적 집단으로 기능했으나, 일제는 이를 탄압하기 위해 '작탄매설사건'을 조작하여 동양학원을 폐교시켰다.[2] 1923년 8월, 일제는 학교 마당에 작탄을 매설하고 50여 명의 학생들을 체포하는 '작탄매설사건'을 일으켜 동양학원을 폐교했다.[2]
일제는 동양학원 설립 과정과 관련하여 방한민 등이 일제 공관 파괴 및 요인 암살을 계획했다고 주장했다. 1923년 12월 24일, 방한민은 '폭발물 취체벌칙' 제4조와 '지나재류제국신민취체법' 제8조, 제61조 위반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2]
방한민은 청진(淸津)지방법원 공판정에서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 들어와서 조선 사람을 공판한다는 이 자체가 무법"이라며 항변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청진(淸津)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24년 4월 대전형무소(大田刑務所)로 이송되었다.
대전형무소(大田刑務所) 수감 중, 방한민은 소화불량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이 조선일보에 보도되기도 했다. 1926년 11월, 고향 논산(論山) 강경(江景) 주민들은 방한민의 가출옥 진정 운동을 벌였고, 1928년 6월 2일, 방한민은 형기 1년 3개월을 남기고 대전형무소(大田刑務所)에서 가출옥되었다.
출옥 후, 방한민은 조선일보에 복직하여 항일 기사를 작성했으나, 1929년 '열성자대회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안상훈(安相勳)의 '열성자대회 사건' 배후 인물로 체포된 방한민은 징역 7년과 미결 구류 300일을 선고받고 다시 대전형무소(大田刑務所)에 수감되었다. 1937년 10월, 형기를 마친 방한민은 오랜 감옥 생활과 고문으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정신이상자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해방을 맞았다.
2. 4. 대한민국 광복 이후 (1945~?)
대한민국 광복 후 서울대학교 농대의 전신인 수원농대에서 잠농업을 강의하였다.[3] 1952년 하와이 교포 이주 50주년 기념사업으로 뒤떨어진 대한민국의 공업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 박사의 발의로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 국내 유지의 성금 및 국고보조금등을 기금으로 인하대학을 출범할 당시 설립위원으로 참여하고 경제학 교수로 활동했다.[3] 한국 최초로 고구마재배법을 전수시켜 굶주리던 주민들의 식생활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3]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한국전쟁 중 실종되었다.[3]3. 사상과 활동
3. 1. 언론 활동
방한민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조선일보 편집 사회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3.1 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라는 기만적인 통치에 맞서 항일 언론 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6월 9일 자 '朝鮮民衆의 民族的 不平 : 骨髓에 深刻된 大血恨의 眞髓'라는 기사에서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하며 민족의 울분을 대변했다. 이 기사는 총독부의 압력으로 10회 연재로 중단되었다. 3.1 운동 관련자 공판 내용을 생생히 보도하고, 언론의 자유를 잃은 현실을 풍자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 보도를 이어갔다. 일제는 방한민의 기사를 문제 삼아 조선일보에 발행정지를 명령했고, '자연의 化'라는 사설을 문제 삼아 1920년 8월 27일부터 9월 2일까지 한국 민간 신문 사상 처음으로 정간 처분을 내렸다. 결국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방한민은 최국현 등 3명의 기자와 함께 해직되었다.
1921년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긴 방한민은 편집기자로 활동하며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3.1 운동 2주년을 맞아 연재한 동아일보 사설 '일본 친구여'는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압수당했다. 이 사설에서 방한민은 한일병합 후 10년간의 일제 헌병제도와 언론 압박을 비판하며 조선인의 불평이 폭발했음을 주장했다. 동아일보에서도 반일 색채가 짙은 글과 기사를 게재하던 방한민은 총독부에 의해 발행정지를 당하자 다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1922년 4월, 방한민은 유학생을 가장하여 일본 도쿄로 건너가 문화신문을 창간했다.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경제학부에 입학하여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며, 조선인 유학생들과 동포들에게 문화신문을 배포했다. 문화신문은 '민족성 철학으로 본 조선문화의 장래', '교육의 혁명',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등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구성되었으며, 1922년 7월 니가타현에서 발생한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의 진상을 보도하고 조선 유학생들의 항의 데모를 조직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문화신문에 발행 정지 처분을 내리고 방한민을 요주의 인물로 감시하면서, 결국 방한민은 다시 일본을 떠나야 했다.
3. 2. 교육 활동
방한민은 1923년 1월 용정촌에 와서 대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2] 그러나 대성학교가 일본의 교육이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학교 폐쇄조치가 내려지자 뜻을 같이하는 김정기(金正琪), 김사국(金思國) 등과 함께 대성학교 내에 졸업생들을 모아 동양학원(구, 대성중학교 현; 용정중학교)을 설립하였다.[2]동양학원의 설립 목적은 우리 동포의 지식을 깨우쳐 주면서 민족의 주권찾기, 조국의 광복을 위한 투쟁 방법등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인력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과 끌고 다니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인간의 평등이란 바로 사회주의 이론으로 뭉쳐야 한다고 역설하며, 단재 신채호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론을 내세워 조선사람과 조선사람이 아닌 일본사람과 싸워서 반드시 조선의 독립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당시 청진지방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방한민은 동양학원내에 사회주의 선전부와 군사부를 조직하여 1923년 8월 12일, 13일경 일제가 天寶山 광산의 은광석과 동광석을 약탈해 가기 위하여 이른바 '중. 일합작'의 간판을 내걸고 제1단계로 개산툰 - 용정사이에 '천도경편 철도'를 부설하고 '개통기념식'을 개최할 예정이었는데, 그때 참석할 예정인 일본총독을 살해하고 용정, 국자가 등에 있는 일본영사관과 공관 및 일본 은행 등을 폭파하여 일제의 통치기관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여 그것을 신호로 민중 봉기를 일으킬 행동계획을 완료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거사 직전 발각되여 체포되었다.
이 '동양학원사건'에 대해 일제는 1923년 12월 24일 방한민에게는 '폭발물 취체벌칙 '제4조와 '支那在留帝國臣民取締法' 제8조, 제61조를 위반했다고 징역10년을 언도하였다.
3. 3. 독립운동
방한민은 1923년 1월 용정촌에 와서 대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2] 대성학교가 일본의 교육이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폐쇄되자, 김정기(金正琪), 김사국(金思國) 등과 함께 대성학교 내에 졸업생들을 모아 동양학원(구, 대성중학교 현; 용정중학교)을 설립하였다.[2] 동양학원에서는 사회주의 이론을 가르치고, 신채호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론을 내세워 조선 독립을 역설하였다.[2] 동양학원 내에는 사회주의 선전부와 특별부가 설치되어 학생들을 선도하였다.[2]당시 청진지방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방한민은 동양학원 내에 사회주의 선전부와 군사부를 조직하여 1923년 8월 12일, 13일경 천도경편 철도 개통식에 참석할 예정인 일본 총독을 살해하고, 용정, 국자가 등에 있는 일본 영사관, 공관, 일본 은행 등을 폭파하여 일제의 통치기관에 타격을 가하려 했다.[2] 이를 통해 민중 봉기를 일으킬 계획이었으나, 거사 직전 발각되어 체포되었다.[2] 당시 폭탄 30여 개와 선전문이 압수되었고, 주모자인 방한민과 동아일보 지국장 김정기, 김사국 외 23명이 체포되었다.[2]
이 '동양학원사건'으로 1923년 12월 24일 방한민은 '폭발물 취체벌칙' 제4조와 '支那在留帝國臣民取締法' 제8조, 제61조 위반으로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2] 차병욱, 박종주는 징역 8년, 한금복은 징역 4년, 김시룡·김대규·정기형·김병진·이용운은 징역 3년, 강희적은 징역 1개월 집행유예 2년, 이병운·김진택·김정기는 무죄를 선고받았다.[2]
방한민의 체포는 조선 서울의 신문들에도 크게 보도되었다.[2] 조선일보는 1923년 7월 12일 "간도 용정촌에서 적화음모를 세우던 사건이 발각되여... 방한민과 동아일보 지국장 김정기와 김사국외에 아홉명을 체포하는 동시에 폭발탄 30개와 선전문 다수를 압수하였다더라"라고 보도했다.[2] 동아일보는 1923년 7월 13일 "간도 4일밤 국민신문 도착전에 의하면... 방한민, 김정기, 김사국외 4명이 체포되었으며 동시에 폭발탄 30여개와 선준문 다수를 압수하였다더라."라고 보도했다.[2]
청진지방법원 공판에서 판사는 방한민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2] 방한민은 "일본인들이 조선땅에 들어와서 조선사람을 공판한다는 이 자체가 무법"이라며 항변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2] 이로 인해 방한민은 10년 징역형 외에 10일간 편지와 책을 읽지 못하는 처벌을 추가로 받았다.[2]
방한민은 청진감옥에서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어 수감 생활을 했다.[2] 1928년 6월 2일, 논산군 강경면 유지 319명의 가출옥 운동으로 형기를 1년 3개월 남겨둔 상황에서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2]
출감 후 조선일보에 복직하여 항일 기사를 작성했다.[2] 1929년 6월, '열성자대회 사건'의 배후 인물로 체포되었다.[2] 안상훈은 이 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방한민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7년과 미결구류 300일을 통산하는 판결을 받았다.[2] 방한민은 다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1937년 10월에 출옥하였다.[2]
4. 평가 및 유산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이 봉오동 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 전투(1920년 9월)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여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면, 아성 방한민 선생은 붓으로 일본에 항거한 기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고 청소년에게 조국 광복의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던 언론, 출판, 교육, 계몽, 문화, 의열 투쟁 등 다방면의 항일 운동가로서 애국 애족의 국가관을 심어준 선구자적인 독립투사로 평가된다.[4]
정부는 일제강점기 평생을 독립과 민족 해방을 위해 투쟁한 선생에게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독립유공자로 숭배하며 애국 애족의 민족 지도자로 추앙하고 있다.[4]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선일보 창간 멤버로서 배일 기사를 연재하고 간도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에 앞장선 방한민 선생을 201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4]
5. 가족
방한민은 충청남도 논산의 온양 방씨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방달주(方達周)는 조선 후기 선약장군(종4품)과 용양위부사과(종2품)를 역임하였다. 백부 방관석(方觀錫)은 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방규석은 1884년 무과를 합격하고, 해방영(海防營) 간역(看役) 소임을 다해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도 15년간 논산 강경면과 성동면장으로 추대되었다.
형 방한승(方漢昇)은 동아일보 창립 기자를 거쳐 매일신문, 경성일보 기자로, 동생 방한호(方漢昊)는 중외일보, 매일신보 기자로서 3형제가 모두 기자로 활동하였다.
부인은 김한배(金漢培)이며, 아들은 방준영(方駿榮)이다. 손자 방병건은 '독립유공 애국지사유족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참조
[1]
뉴스
1월의 독립운동가 방한민 선생
http://www.newdaily.[...]
뉴데일리
2009-12-30
[2]
뉴스
방한민 선생이 민족교육을 펼쳤던 대성학교
https://news.naver.c[...]
뉴시스
2010-01-02
[3]
간행물
1월의 독립운동가 방한민(方漢旻)선생
http://www.korea.kr/[...]
정책브리핑
2009-12-30
[4]
뉴스
1월의 독립운동가 방한민 선생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9-12-31
[5]
뉴스
전국서 태극기 물결…다양한 광복절 기념행사
http://news.kbs.co.k[...]
KBS 뉴스
201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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