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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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남작은 독일의 군인이자 루프트바페의 장군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895년 슐레지엔에서 태어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사촌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기병으로 복무하다가 공군으로 전출하여 8번의 격추를 기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콘도르 군단, 제8 항공 군단 등을 지휘하며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발칸 전역,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에 참여하여 근접 항공 지원 전술을 발전시켰다. 그는 나치즘을 지지하고 게르니카 폭격, 바르샤바 폭격 등 민간인 피해를 초래한 행위로 비판받았으며, 1945년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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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남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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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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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름 | 볼프람 카를 루트비히 모리츠 헤르만 프라이헤르 폰 리히트호펜 |
출생일 | 1895년 10월 10일 |
출생지 | 바르츠도르프, 실레시아, 프로이센, 독일 제국 |
사망일 | 1945년 7월 12일 |
사망지 |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오버외스터라이히 바트이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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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없음) |
복무 정보 | |
소속 | 독일 제국 나치 독일 |
복무 기간 | 1913년–1944년 |
군종 | (정보 없음) |
최종 계급 | 원수 |
부대 | 제11전투비행대대 |
지휘 | 콘도르 군단 제8비행군단 제2공군함대 제4공군함대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제1차 세계 대전 스페인 내전 게르니카 폭격 제2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 폴란드 침공 네덜란드 공방전 벨기에 공방전 프랑스 공방전 영국 본토 항공전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전투 크레타 전투 동부전선 바르바로사 작전 크림 전역 청색 작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
친척 |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남작(10촌) 로타르 폰 리히트호펜 남작(10촌) |
훈장 | 2급 철십자 훈장 1급 철십자 훈장 스페인 십자장 2급 철십자 약장 1급 철십자 약장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 |
경력 | |
임기 | 1939년 7월 19일 - 1942년 6월 30일 |
전임 | (신설) |
후임 | 마르틴 피비히 |
임기 | 1942년 7월 20일 - 1943년 9월 4일 |
전임 | 알렉산더 뢰어 |
후임 | 오토 데슬로흐 |
임기 | 1943년 6월 11일 - 1944년 9월 27일 |
전임 | 알베르트 케셀링 |
후임 | (부대 해산) |
2. 초기 생애 및 제1차 세계 대전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남작은 1895년 10월 10일 폴란드 바르토슈오베크(과거 바르츠도르프)에 위치한 리히트호펜 가문의 영지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니더슐레지엔의 스트리게아우(슈체고룸) 근처였다. 그의 아버지 볼프람 프라이헤어 폰 리히트호펜(1856–1922)과 어머니 테레제 고츠 폰 올렌후젠(1862–1948)은 슐레지엔 귀족 출신으로, 리히트호펜 가문은 볼프람이 태어나기 350년 전에 귀족 작위를 받았다.
리히트호펜은 4명의 자녀 중 둘째이자 장남이었다. 누나 소피-테레제는 1891년에 태어났고 (1971년 사망), 남동생 만프레트는 1898년에, 게르하르트는 1902년에 태어났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유명했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남작("붉은 남작")과 그의 동생 로타르 폰 리히트호펜의 4촌이었다. 귀족의 아들로서 그는 특권적인 삶을 누렸다. 리히트호펜 가문의 귀족 지위는 15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700년대에는 니더슐레지엔에 16개의 영지를 소유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1740년에 슐레지엔을 합병했을 때, 그는 리히트호펜 가문의 직계 조상 중 한 명에게 직접 남작(Freiherr) 작위를 수여했다. 리히트호펜 가문은 그 후 3세대 동안 슐레지엔에 머물렀다.
리히트호펜의 집은 18세기 영지였으며, 리히트호펜 가문 소유의 25개 영지 중 하나였다. 이 영지들의 총 면적은 140 km2에 달했다. 그가 살았던 바르츠도르프는 350 헥타르 규모의 소박한 영지로, 이 중 269 헥타르는 경작지였고 나머지는 숲이었다. 장남이었던 볼프람은 영지를 상속받지 못했다. 대신, 1922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그의 남동생 만프레트에게 영지가 주어졌다. 몇 년 전, 볼프람의 삼촌이자 기병대 장군인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아버지의 형제)은 그에게 자녀가 없었기에 가문을 위해 자신의 영지를 상속받도록 요청했다. 볼프람은 만프레트가 그를 법적으로 입양한 후 영지를 상속받았다. 장군은 1939년에 사망했다.
그는 막내 동생과는 소원한 관계였지만, 만프레트와는 가까운 사이였다. 대부분의 프로이센 귀족들과 달리,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사립 가정교사 없이 지역 김나지움(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는 스트리게아우에서 학교를 다녔다. 수학과 독일어 성적은 좋았지만, 외국어는 평균에서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 잘하지 못했다. 그는 언어 공부를 지루해했지만, 이탈리아어를 배워 나중에는 능숙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그는 사촌 로타르 및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과 친한 친구가 되었고, 그들과 함께 영지에서 정기적으로 사냥을 했다. 10대 후반이 되면서 그는 뛰어난 사냥꾼이자 승마가가 되었으며, 이러한 관심사는 평생 지속되었다. 그는 야외 활동을 즐겼으며, 학교에 다니는 동안 학문적인 길 대신 독일 제국 육군의 장교가 되기 위해 지원했다.
1913년, 18세의 나이에 그는 군대에 입대하여 베를린에서 장교 과정을 밟았다. 기병대는 가장 명망 있는 병과였으며, 그는 브레슬라우에 위치한 제6군단의 제12기병 여단에 속한 제4 후사르 연대에 입대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평화로운 시절의 군 복무를 경험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917년 가을에 비행 훈련을 마치고 1918년 봄에는 사촌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남작의 새로운 지휘 부대인 제11 전투 비행단에 합류했다. 1918년 4월 21일, 볼프람은 그의 비행대가 순찰을 하던 중 영국 비행기의 공격을 받았고,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은 같은 날 같은 사건으로 사망했다.
제12 기병 여단의 기병들은 제5 기병 사단에 배속되었으며, 이는 제1 기병 군단의 일부였다. 이 부대는 슐리펜 계획의 일환으로 1914년 8월 프랑스와 벨기에를 공격한 독일 제3군의 일부를 구성했다. 리히트호펜은 디낭에서 뫼즈강을 건넜고, 그의 부대는 프랑스 제8 기병 군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는 벨기에에서 도시 포위 기간 중 8월 23~24일에 나뮈르에서, 그리고 생캉탱에서 다시 전투를 벌였다. 제5 기병 사단은 국경 전투 이후 프랑스로 진격을 계속했지만, 9월 마른 강 전투에서 저지되었다. 전투에서의 용맹함을 인정받아 리히트호펜은 1914년 9월 21일에 철십자 훈장 2급을 받았다. 참호전의 새로운 전투 환경은 기병의 효과를 크게 감소시켰고, 따라서 리히트호펜의 사단은 동부 전선으로 이동하여 1915년 11월 폴란드에 도착했다.
동부 전선에서 기병 사단은 주로 남부에 배치되었다. 독일군은 기병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고, 사단은 주로 예비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전투를 거의 치르지 않았다. 리히트호펜의 여단은 1916년 핀스크 근처에서 복무했으며, 사단은 1915년 말부터 1917년 1월까지 프리피야트 늪에서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리히트호펜은 1916년 가을 여단의 기병 보급창을 맡았고, 분대장으로 진급하여 160명의 병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는 그의 사촌인 로타르와 만프레트가 당시 Luftstreitkräfte (제국 항공대)에서 얻고 있던 명성에 미치지 못할 것이었고, 그들은 그에게 공군으로 전출할 것을 개인적으로 권유했으며, 그는 마침내 1917년 6월에 그렇게 했다.
1920년 9월 18일, 그는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 브로츠와프)에 있는 루터교회에서 유타 폰 젤초(1896년 3월~1991년)와 결혼했다. 그들은 유타의 오빠 군터의 소개로 만났다. 유타 역시 슐레지엔 귀족 출신으로, 같은 사교계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전쟁에서 간호사로 복무했다. 그들은 볼프람이 공학 분야에서 학업을 재개하는 동안 하노버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1920년대에는 결혼 후 해외 여행을 거의 하지 않았다. 1930년대에는 스위스에서 스키 휴가를 보냈다. 이 부부는 볼프람(1922년 5월 25일 출생), 괴츠(1925년 11월 27일 출생), 엘렌(1928년 2월 15일 출생) 세 자녀를 두었다. 볼프람은 1944년 6월 5일 루마니아 북부에서 실종되었다. 그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기병대장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아들로, 당시 독일 제국 영토였던 슐레지엔 지방 슈트리가우(현 폴란드령 스트제고)에서 태어났다. 생가 리히트호펜가는 귀족으로, 남작 가문이다. 1913년, 18세에 사관 후보생으로 아우라우의 제4 유사르 연대에 입영. 카셀의 육군사관학교에서 배우고 1914년에 소위로 임관. 제1차 세계 대전에는 대대장으로 종군했지만, 1917년에 할레의 항공학교로 전임했다.
2. 1. 가문 및 유년 시절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남작은 1895년 10월 10일 독일 제국 슐레지엔 지방의 바르토슈오베크(현재 폴란드 바르츠도르프)에 위치한 리히트호펜 가문의 영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1500년대에 귀족 작위를 받았으며, 1700년대에는 니더슐레지엔에 16개의 영지를 소유한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1740년에 슐레지엔을 합병했을 때, 리히트호펜 가문의 직계 조상 중 한 명에게 직접 남작(Freiherr) 작위를 수여했다.그는 4남매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에이스 파일럿이었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붉은 남작")과 로타르 폰 리히트호펜의 4촌이었다. 귀족 자제로서 특권적인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지역 김나지움(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학업보다는 승마와 사냥 등 야외 활동을 즐겼다. 그는 사촌들과 함께 영지에서 정기적으로 사냥을 즐겼으며, 10대 후반에는 뛰어난 사냥꾼이자 승마가가 되었다.
1913년, 18세의 나이에 독일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장교 과정을 밟았다. 그는 브레슬라우에 위치한 제6군단의 제12기병 여단에 속한 제4 후사르 연대에 입대하기를 희망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3년, 18세의 나이로 독일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기병 장교 과정을 밟았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임관 직후 기병 제복을 입은 리히트호펜의 사진이 남아있다. 리히트호펜은 제12 기병 여단 소속으로 제5 기병 사단에 배속되었으며, 이는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와 벨기에를 공격한 독일 제3군의 일부였다. 그는 디낭에서 뫼즈강을 건너 제8 기병 군단과 전투를 벌였고, 나뮈르와 생캉탱에서도 전투를 치렀다. 마른 강 전투에서 저지될 때까지 프랑스로 진격을 계속했으며, 1914년 9월 21일에는 전투에서의 용맹함을 인정받아 철십자 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참호전으로 인해 기병의 역할이 축소되자, 리히트호펜의 사단은 동부 전선으로 이동하여 1915년 11월 폴란드에 도착했다. 동부 전선에서 기병 사단은 주로 남부에 배치되었고, 독일군은 기병을 자주 사용하지 않아 전투를 거의 치르지 않았다. 리히트호펜의 여단은 1916년 핀스크 근처에서 복무했으며, 1915년 말부터 1917년 1월까지 프리피야트 늪에서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1916년 가을, 여단의 기병 보급창을 맡아 분대장으로 진급하여 160명의 병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1917년, 리히트호펜은 Luftstreitkräfte (제국 항공대)로 전출하여 조종사 훈련을 받았다. 1918년 3월에는 제11 비행 보충 대대에서 고급 훈련을 받았고, 같은 해 4월 4일, 사촌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 지휘하는 제1 전투 비행단에 배속되었다. 종전까지 포커 D.VII를 타고 8번의 공중전에서 승리했다. 1918년 여름, 리히트호펜이 그의 포커 D.VII 전투기 앞에 서 있는 사진이 있다.

3. 전간기 활동
1913년, 18세에 사관 후보생으로 아우라우의 제4 유사르 연대에 입영하여, 카셀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소위로 임관하였다.[18]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으나, 1917년에 할레 항공학교로 전임되어, 1918년 3월에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 지휘하는 제11 전투기 중대에 배속되었고 종전까지 8기를 격추했다.[18]
1920년, 중위로 제대한 후, 1923년까지 하노버 공과 고등 전문학교에서 기계 공학을 전공하여 공학사가 되었다.[18] 졸업 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 다시 입영하여 소위로 제11 기병 연대에 배속되었으나, 극비리에 진행되던 공군 재건 계획에 참가하여 육군 무기국에서 근무하였다.[18] 이후 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 공과 고등 전문학교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18]
리히트호펜 남작은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 다시 입대하여 소위로 복무했다.[18] 국방군이 비밀리에 추진하던 공군 재건 계획에 참여하여 공식적으로는 베를린 지구 사령부에 소속되었지만, 실제로는 육군 무기국에서 신형 항공기 개발 및 시험을 담당했다.[1] 1929년부터 1931년까지는 로마 주재 독일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며 이탈리아 공군을 연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1]
1933년, 헤르만 괴링이 지휘하는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에 합류했다.[1] 그는 에른스트 우데트의 지휘 아래 ''Technisches Amt''(기술부)에서 새로운 항공기 개발 및 시험을 담당했다.[1] 리히트호펜은 도르니에 Do 23, 하인켈 He 111, 융커스 Ju 86과 같은 기종 개발에 참여했으며, 1932년 7월 ''Reichswehr''에서 추구했던 ''Schnellbomber''(고속 폭격기) 개념에 따라 전투기보다 빠른 폭격기를 개발하는 데 힘썼다.
하지만 괴링은 중폭격기 프로그램에도 관심을 보였고, 리히트호펜은 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리히트호펜은 발터 베버와 함께 디자인을 조정하고, 1935년 1월 22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사양을 별도의 디자인으로 분리하기도 했다.
1936년 베버가 사망하고, 에른스트 우데트가 개발 프로그램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중형 폭격기 개발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리히트호펜은 우데트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의 급강하 폭격에 대한 아이디어를 믿지 않았다.[2]
3. 1. 공학도의 길
1913년, 18세에 사관 후보생으로 아우라우의 제4 유사르 연대에 입영하여, 카셀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소위로 임관하였다.[18]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으나, 1917년에 할레 항공학교로 전임되어, 1918년 3월에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 지휘하는 제11 전투기 중대에 배속되었고 종전까지 8기를 격추했다.[18]1920년, 중위로 제대한 후, 1923년까지 하노버 공과 고등 전문학교에서 기계 공학을 전공하여 공학사가 되었다.[18] 졸업 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 다시 입영하여 소위로 제11 기병 연대에 배속되었으나, 극비리에 진행되던 공군 재건 계획에 참가하여 육군 무기국에서 근무하였다.[18] 이후 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 공과 고등 전문학교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18]
3. 2. 군 복무 재개 및 루프트바페 창설
리히트호펜 남작은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 다시 입대하여 소위로 복무했다.[18] 국방군이 비밀리에 추진하던 공군 재건 계획에 참여하여 공식적으로는 베를린 지구 사령부에 소속되었지만, 실제로는 육군 무기국에서 신형 항공기 개발 및 시험을 담당했다.[1] 1929년부터 1931년까지는 로마 주재 독일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며 이탈리아 공군을 연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1]1933년, 헤르만 괴링이 지휘하는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에 합류했다.[1] 그는 에른스트 우데트의 지휘 아래 ''Technisches Amt''(기술부)에서 새로운 항공기 개발 및 시험을 담당했다.[1] 리히트호펜은 도르니에 Do 23, 하인켈 He 111, 융커스 Ju 86과 같은 기종 개발에 참여했으며, 1932년 7월 ''Reichswehr''에서 추구했던 ''Schnellbomber''(고속 폭격기) 개념에 따라 전투기보다 빠른 폭격기를 개발하는 데 힘썼다.[2]
하지만 괴링은 중폭격기 프로그램에도 관심을 보였고, 리히트호펜은 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리히트호펜은 발터 베버와 함께 디자인을 조정하고, 1935년 1월 22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사양을 별도의 디자인으로 분리하기도 했다.
1936년 베버가 사망하고, 에른스트 우데트가 개발 프로그램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중형 폭격기 개발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리히트호펜은 우데트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의 급강하 폭격에 대한 아이디어를 믿지 않았다.[2]
4. 스페인 내전 참전
1936년 11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남작은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국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루프트바페 파견대인 콘도르 군단의 야전 지휘를 맡았다. 1937년 1월에 후고 슈페를레의 참모장이 되었다.[18]
1937년 4월에 콘도르 군단이 실시한, 일반 시민 수백 명이 사망한 악명 높은 무차별 폭격 "게르니카 폭격" 당시 군단 참모였다. 리히트호펜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quotation|
"250 (부대)은 많은 집과 수도를 파괴했다. 소이탄이 그 위력을 보여줄 때가 왔다. 기와집에 나무 구조라는 건축 구조는, 완전한 파괴를 가져왔다. ... 거리에는 폭탄 구멍이 아직 보인다. 훌륭하다."
}}
1937년 10월, 스페인에서 귀환하였다.
4. 1. 콘도르 군단 참모
1936년 11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남작은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국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콘도르 군단의 야전 지휘를 맡았다.[3] 후고 슈페를레의 참모장이 된 그는, 1937년 1월부터 군단의 작전 계획 및 수행에 참여했다.[3]리히트호펜은 근접 항공 지원 교리 개발에 주력했으며,[3] 대공포를 전선에 배치하여 포병 부대를 강화하는 전술을 도입했다.[3] 또한, 항공기를 전선 근처 기지에서 운용하여 지속적인 항공 지원을 제공하는 '셔틀 항공 전술'을 채택했다.[3] 이러한 전술과 작전 방식은 빌바오 전투와 브루네테 전투에서 효과를 발휘했다.[3]
스페인에서의 경험은 독일 공군 내에서 근접 지원 항공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4] 리히트호펜은 공대지 통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방에 신호 요원을 배치하고 전화와 무전을 활용하는 표준 작전 관행을 확립했다.[3]
1937년 4월, 콘도르 군단은 게르니카 폭격을 감행했다.[5] 당시 군단 참모였던 리히트호펜은 이 작전에 관여했으며, 그의 일기에는 폭격의 결과에 대한 언급이 남아있다. 그는 게르니카 폭격을 "기술적 성공"이라고 평가했지만, 국민군이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아 적군을 차단할 기회를 놓친 것에 실망했다.[3]
4. 2. 콘도르 군단장
1936년 스페인 내전에 콘도르 군단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리히트호펜은 1938년 11월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콘도르 군단의 군단장으로 다시 스페인에 파견되었다. 융커스 Ju 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의 효용성을 입증하고, 저고도 지상 공격 전술의 효과를 확인하는 등 실전 경험을 축적했다. 1937년 4월에 콘도르 군단이 실시한 게르니카 폭격은 일반 시민 수백 명이 사망한 악명 높은 무차별 폭격으로, 당시 군단 참모였던 리히트호펜은 일기에 "소이탄이 그 위력을 보여줄 때가 왔다...완전한 파괴를 가져왔다"라고 기록했다. 1939년 5월, 스페인 내전이 종결되자 리히트호펜은 군단과 함께 독일로 귀환했다.5.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특무 항공 사령관으로 폴란드 침공에 종군, 제10군에 대한 항공 지원을 했다. 1939년 9월 1일, 리히트호펜은 정식 선전 포고 전에 비엘룬에 대한 공습을 명령했다.
리히트호펜은 1939년 9월 1일에 시작되어 빠르게 유럽 전쟁을 촉발한 폴란드 침공 동안 ''Fliegerführer z.b.V.'' (''zur besonderen Verwendung''—특별 배치용)을 지휘했다.[6] 이 부대는 전술적 부대였으며 브루노 뢰르처와 알렉산더 뢰르의 공동 지휘하에 제2 ''플리거사단''에 배속되었다. ''Fliegerführer z.b.V.''의 작전 목표는 발터 폰 라이헤나우의 지휘하에 있는 제10군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 군대는 대부분의 기계화 및 기갑 부대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폴란드에 대한 공세의 초점, 즉 ''슈베어푸unkt''를 형성했다.
리히트호펜의 전투 서열은 강력한 공격기 집중을 포함했다. 부대는 비르켄탈-오펠른에 본부를 두었지만, 그 부대는 분산되어 있었다. 슐로스발덴에는 Dornier Do 17P 항공기를 운용하는 1.(F)/''AufklGr'' (''Aufklärungsgruppe''—정찰 그룹) 124가 있었다. ''Lehrgeschwader'' 2 (훈련 비행대 2)는 니더-엘구트에 주둔했고, ''Sturzkampfgeschwader'' 77 (급강하 폭격 비행대 77 또는 StG 77)의 대부분은 Junkers Ju 87 ''Stuka''를 운용했으며 노이도르프에 주둔했다. 리히트호펜은 또한 슬로바키아 공군 부대(''Slovenske Vzousne Zbrane''), 제38 및 제48 전투 비행대, 제16 군단 비행대를 지휘했다.
5. 1.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남작은 특무 항공 사령관으로 폴란드 침공에 종군하여 제10군에 대한 항공 지원을 담당했다. 1939년 9월 1일, 리히트호펜은 정식 선전 포고 전에 비엘룬에 대한 공습을 명령하여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켰다.개전 첫날, StG 77은 폴란드 공군 기지를 공격하는 대공 작전에 투입되었다. 근접 지원 작전에는 II.(''Schlacht'')/''LG'' 2만이 남았고, 이 부대는 독일 기계화된 제16군단을 지원했다. 리히트호펜의 ''I./StG 77''은 Łódź 전투 동안 폴란드 ''Armii Łódź''의 기병 여단을 괴멸시키는 데 기여했다.
9월 8일, 제10군이 폴란드 깊숙이 진격하면서 리히트호펜은 그의 가장 경험 많은 급강하 폭격기 전문가인 귄터 슈바르츠코프를 폴란드 비행장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리히트호펜은 병참 요소의 기능을 유지하여 부대가 하루에 세 번의 출격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9월 첫째 주 말에 리히트호펜의 전투단은 ''제4항공대'' (Luftflotte 4)로 전출되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전선 상황으로 인해 군 본부와 최전방 부대 간의 통신이 붕괴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리히트호펜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따라 대응했지만, 이로 인해 아군 오사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번은 Ju 87이 비스툴라 강을 건너는 다리를 파괴했는데, 기갑 사단이 막 건너려고 할 때였다.
9월 11일, 연료 상황이 심각해지고 병참 문제가 발생하면서, 그의 부대는 하루에 한 번의 임무만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9월 8일까지 리히트호펜은 바르샤바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브주라에서 폴란드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리히트호펜은 공중 공격으로 이를 저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부대는 750번의 출격을 수행하고 388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폴란드군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독일 육군이 남은 폴란드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바르샤바 포위전에서 리히트호펜의 부대는 183~197번 출격하여 고성능 폭약과 소이탄을 투하했다. 9월 22일에는 620번 출격하여 560톤의 고성능 폭탄과 72톤의 소이탄을 투하, 도시 건물의 10분의 1을 파괴하고 40,00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리히트호펜은 바르샤바를 완전히 파괴하려는 의지를 보였으나, OKL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5. 2. 프랑스 침공

1940년 5월, 리히트호펜 남작은 제8 항공 군단장으로서 프랑스 침공에 참전했다. 메서슈미트 Bf 109를 장비한 ''Jagdgeschwader 27''(JG 27), Dornier Do 17을 장비한 KG 77, ''Sturzkampfgeschwader'' 2(StG 2)와 Ju 87 ''Stuka''를 장비한 StG 77, Ju 87, Bf 109, Ju 88 및 He 111을 장비한 LG 2로 구성된 제8 항공 군단은 지상 공격에 특화된 조직이었다.
벨기에에서 리히트호펜은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이끄는 독일 제6군과 파울 루드비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XXXXI 및 XIX 군단을 지원했다. 특히, 라이헤나우는 에벤-에마엘 요새 점령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리히트호펜은 요새 공략을 위해 ''Flakgruppe Aldinger''을 제공하여 지원했다.
네덜란드 침공 전투 초기, 리히트호펜은 헤이그 전투에서 독일군이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자 부대의 절반을 투입하여 지원했다. 또한 모에르데이크 교두보 근처에 프랑스군이 위치하기 전에 안트베르펜 인근의 셸데 강어귀를 공격하여 프랑스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수행했다.
네덜란드가 항복한 후, 리히트호펜은 다시 벨기에 전선에서 독일 제6군을 지원했다. 그의 부대는 한느 전투와 젬블루 갭 전투에서 프랑스 기갑 부대에 효과적인 공격을 가했다.[7] 리히트호펜은 5월 14일 세단 전투에서 프랑스 진지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주도했고, 제27전투비행단은 연합군의 공습으로부터 교두보를 방어했다.
세단 돌파 이후, 리히트호펜은 플리거군단 VIII이 해안까지 클라이스트를 지원하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Ju 87은 샤를 드골의 제4기갑사단을 몽코르네 전투와 크레시-쉬르-세르 전투에서 격퇴하여 프랑스 제9군을 사실상 파괴했다.[8] 무선 장비를 갖춘 전방 연락 장교는 "슈투카"를 호출하여 적의 위치를 공격하도록 지시할 수 있었으며, 루프트바페는 10~20분 안에 요청에 신속하게 응답했다.
5월 21일까지 연합군 군대는 포위되었고, 아라스에서 반격이 격퇴되었다. 리히트호펜은 덩케르크 전투와 칼레 포위전 (1940) 동안 A집단과 B집단의 진격을 지원했고, 영국 공군 (RAF) 전투기와 교전했다. 칼레 점령에 기여한 공로로 5월 23일 철십자 기사 훈장을 수여받았다.
프랑스 침공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리히트호펜은 1940년 7월 항공병 대장으로 진급했다.
5. 3. 영국 본토 항공전
프랑스가 항복한 후, 리히트호펜은 영국 본토 항공전 기간 동안 ''제8 항공군단''을 계속 지휘했다.[9] 영국이 독일과의 타협을 거부하자, 독일 공군 참모본부(OKL)는 독수리 공격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공중 우세를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준비했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국방군은 바다사자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영국 침공을 감행했을지도 모른다.[9]루프트바페는 처음으로 독일 육군의 지원 없이 공세적인 공중전에 참여했다. 리히트호펜의 군단은 원래 지상군을 지원하는 전문적인 지상 공격 부대였지만, 영국 본토에 대한 공격을 이끄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의 ''슈투카'' 부대는 루프트바페 최고의 정밀 공격 항공기였으며, 500kg 폭탄은 상선 격침 및/또는 군함에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1940년 6월, 리히트호펜과 그의 군단의 특정 임무는 잉글리시 채널 남부(프랑스 인근) 상공에서 공중 우세를 확보하고, 특히 포츠머스와 포틀랜드 섬 사이의 해상에서 영국 선박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었다. ''제8 항공군단''은 특별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 전투기들은 충분한 레이더 경고를 받지 못했고, 항속 거리의 한계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Ju 87에 작전에서 거의 자유로운 권한을 주었다.[10]
1940년 7월, 알베르트 케셀링의 ''제2 항공함대''와 후고 슈페를레의 ''제3 항공함대'' 사이에 영국 공군(RAF) 항공 부원수 키스 파크의 제11 비행단 RAF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초기 전투는 영국 남부 해안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잉글리시 채널에서 영국 선박을 방해하려는 독일 공군 함대의 시도는 RAF의 상당한 대응에 부딪혔고, 채널 상공에서 많은 공중전이 벌어졌다. 독일군은 이를 ''카날캄프''(채널 전투)라고 불렀다. 리히트호펜은 그의 Do 17P 정찰기를 사용하여 호송대를 찾았다. 호송대를 발견하면 그는 일반적으로 다른 ''슈투카'' ''그루펜''을 반복 공격을 위해 대기시키면서 ''그루페''(항공기 30대)를 파견하여 호송대와 교전했다. 이 작전은 오랜 기간 동안 군단을 지상에 묶어두는 날씨로 인해 복잡해졌고, Ju 87은 효과적임이 입증되었지만, RAF 전투기에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10] 1940년 7월 17일, 리히트호펜은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항공병 대장 계급으로 진급했다.[10]
채널 상공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리히트호펜의 부대는 격침된 선박 수를 심하게 과장했지만, 영국 해군이 일시적으로 채널을 통한 호송 작전을 중단하도록 하고, 도버를 기지에서 포기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1940년 8월 8일, 선박에 대한 마지막 작전 중 하나에서 그의 비행사들은 한 작전에서 48,500톤의 선박을 격침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수치는 3,581톤에 불과했다.[10]
8월 중순, 루프트바페는 영국 본토에 대한 주요 공격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이 작전은 1940년 8월 13일, 헤르만 괴링에 의해 독수리의 날(Adlertag)로 명명되어 시작되었다. 그날 하루 종일 독일군은 통신, 정보, 조정에서 반복적인 실패를 겪었다. 습격 목표였던 전투 사령부의 비행장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흐린 하늘이 습격 실패의 주요 원인이었다.[9]
8월 18일, 대규모 공중전으로 그날은 "가장 힘든 날"이라고 불렸다. 그날 리히트호펜은 그의 부대를 잉글랜드 남부의 비행장으로 보냈다. 잘못된 정보로 인해 그의 부대가 공격한 모든 목표는 중요하지 않았다. StG 77은 해군 항공대 기지를 공격했는데, 이는 전투 사령부와 거의 관련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전투단''은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10]
리히트호펜은 습격이 결과를 얻고 전투가 짧게 끝난다고 가정할 때 견딜 수 있는 15%의 Ju 87 총 손실에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았지만, 전체 ''그루페''가 거의 파괴된 것에 놀랐다. 손실률은 50%에 달했다. 이로 인해 작전에 사용될 항공기 유형을 재고해야 했다.[10] 영국 본토 항공전은 Ju 87의 패배로 귀결되었다.[10] Ju 87은 전투에서 제거되었고, 1941년 봄까지 소규모의 선박 공격으로 제한되었으며, 그 무렵 영국 본토 항공전은 끝나가고 영국 본토에 대한 공중전(블리츠)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리히트호펜의 부대는 10월에 100회 출격했지만, 1940년 7월에는 하루에 100회 출격했다. 1940년 12월, ''제8 항공군단''은 Ju 87 작전을 종료하고 봄에 작전을 재개할 준비를 위해 집중적인 동계 훈련에 들어갔다.[10]
5. 4. 발칸 전선
1941년 4월, 리히트호펜이 지휘하는 제8 항공군단(VIII. Fliegerkorps)은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그리스 전투에서 독일 육군을 지원했다.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에서 이탈리아군의 실패는 히틀러가 루마니아 유전 근처의 추축국 측면을 확보하기 위해 개입하도록 강요했고, 마리타 작전은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리히트호펜은 자신의 부대를 루마니아를 거쳐 불가리아로 이동시켰으며, 불가리아 비행장에서 120대의 항공기를 운용할 계획이었다. 준비 과정에서 불가리아의 보리스 3세와 함께 급강하 폭격 기술과 융커스 Ju 88과 같은 새로운 항공기에 대해 논의했다.
제8 항공군단은 이 임무를 위해 2개의 Ju 87 비행대를 지원받았고, 제4 항공함대(Luftflotte 4) 휘하의 독일 항공 부대는 수백 대의 수송기를 지원받아 총 946대의 전투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 전력은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영국 공군(RAF) 전력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리히트호펜은 연락 담당자를 통해 독일 제12군 항공 정찰 부대가 자신의 부대와 협력하도록 조치했다. 군단의 작전은 유고슬라비아 남부에서 독일 제12군을 지원하여 유고슬라비아군을 그리스와 그곳의 연합군으로부터 고립시켰다.
리히트호펜의 부대는 베오그라드 폭격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유고슬라비아 증원군을 공격하여 유고슬라비아군의 대규모 열을 초토화시켰다. 유고슬라비아는 4월 17일에 항복했다.
작전은 그리스로 전환되었다. 메탁사스 선 전투에서의 추축국의 성공으로 주요 그리스군의 위치를 우회하여 가장 강력한 그리스군을 포위할 수 있었다. 리히트호펜의 부대는 연합군 항공기의 간섭 없이 선에 대한 공격을 지원했다. 4월 15일까지 영국 공군은 철수했고, 이후 제8 항공군단의 주요 목표는 철수 항구를 메운 연합군 선박이었다. 1941년 4월 30일까지 파괴된 280,000톤의 선박(60척)에 대한 주장은 거의 정확했다.
영국 해군과 그리스 해군은 아테네를 포함하여 그리스 남부의 항구에서 철수를 시작했고, 리히트호펜 군단의 Ju 87 부대는 선박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소규모 그리스 해군을 제거하고 영국 선박에 피해를 입혔다. 2일 동안, 피레우스에 있는 그리스 해군 기지는 ''Stuka'' 공격으로 23척의 선박을 잃었고,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43척의 선박이 남부 해안에서 침몰했다. 연합군의 총 선박 손실량은 360,000톤에 달했다.
본토에서의 캠페인이 끝나면서 남은 유일한 목표는 크레타 섬이었다. 크레타 전투 동안 리히트호펜의 Ju 87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 낙하산 부대는 크레타 섬에서, 점령해야 할 크레타 비행장에 고립되었고, 리히트호펜이 그들을 압박 완화에 쏟은 노력은 독일 부대의 파멸을 막았을 가능성이 크다.
1941년 5월 21일~22일, 독일군은 해상으로 크레타에 증원군을 보내려 했지만, Irvine Glennie 소장 지휘 하의 "D 부대"에 10척의 선박을 잃었다. ''Stuka''는 영국의 해군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5월 21일, 구축함 가 침몰했고, 다음 날 전함 가 손상되었으며, 순양함 가 침몰했다. Ju 87은 또한 순양함 를 무력화시켰고, 구축함 를 침몰시켰다. 크레타 전투가 끝나갈 무렵, 연합군은 또 한 번 철수를 시작했다. 5월 23일 영국 해군은 구축함 와 가 침몰했고, 26일에는 가 침몰했다. ''Orion''과 도 심하게 손상되었다. 약 8척의 영국 구축함과 4척의 순양함이 (모두 공습으로 침몰한 것은 아님) 그리스 해군의 5척의 구축함과 함께 침몰했다.
5. 5. 독소전쟁
1941년 6월 22일, ''국방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즉 소련 침공을 시작했다. 리히트호펜은 JG 27, StG 2, StG 3, 10./LG 2, 그리고 II.(S)./LG 2로 구성된 ''제8 항공군단(Fliegerkorps VIII)''의 지휘를 계속했다. 초기에는 그의 부대가 케셀링의 ''제2 항공함대''(Luftflotte 2) 지휘 하에 있는 중부 집단군을 지원했다.[18]1941년 여름까지 루프트바페와 지상-항공 연락 팀은 아군의 오사격 사건 수를 극적으로 줄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초기 단계에서 리히트호펜의 부대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항공 지원에 대한 응답 시간은 보통 2시간을 넘지 않았다.[18]
초기 단계에서 리히트호펜은
6월 23일, 그의 군단은 그로드노 근처에서 반격을 시도한 소련 제6 기병군단(서부 전선)을 궤멸시켰다. 리히트호펜은 투입 가능한 모든 항공기를 투입하여 이들의 격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련 군단은 공습으로 인해 50%의 사상자를 냈다. 리히트호펜의 군단은 500소티에서 30대의 전차와 50대의 차량을 격파했다고 주장했다. 중부 집단군은 계속 진격하여 비테브스크에 도달했다. ''제8 항공군단''은 며칠 후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육군을 지원했다. 이 단계에서 그는 또한 남쪽으로 이동하여 구데리안 기갑군을 지원했는데, 이는 오르샤 점령을 지원하는 데 성공했다. 1941년 7월 17일 스몰렌스크에서 소련군의 포위가 완료되었다. 3주 후, 포위망 내의 마지막 소련군이 제거되었다. ''제8 항공군단''의 업적은 소련군의 반격과 탈출 시도를 격퇴하는 데 중요했다. 리히트호펜은 인상적인 활약으로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에 오크 잎을 추가로 수여받았다. 전투의 결과, 특히 소련 제13군과 제24군에 의한 소련 반격의 격퇴는 인상적이었다. 리히트호펜의 부대는 증원을 방해하고 7월 24일에만 40대의 차량을 파괴한 것으로 알려졌다.[18]

7월 30일에 중부 집단군에게 전략적 방어를 맡도록 명령했다. 지시 34에서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주된 노력을 레닌그라드에 집중시켰는데, 이는 모스크바 서쪽에 적군이 강력하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리히트호펜과 그의 ''항공군단''은 ''제1 항공함대''(Luftflotte 1)에 배속되었다.[18]
리히트호펜은 거의 모든 부대를 북부 집단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했다. 심한 교전 속에서 리히트호펜의 부대는 ''제1 비행 군단''과 협력하여 8월 10일에 1,126회 출격하여 독일군의 나르바 진격을 지원했다. 그들은 전차 10대, 200대 이상의 차량 및 15개의 포병 기지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추가 지원은 독일 제16군에 일멘 호 근처 노브고로드에서 제공되었다. 리히트호펜 군단의 숙련된 승무원들은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철도를 공격하여 증원을 방해했다. 8월 15일, 주요 작전으로 볼호프 강을 가로지르는 주요 소련 보급 다리가 파괴되었다. 노브고로드 요새는 리히트호펜의 Ju 87에 의해 파괴되었고, 버려졌다. 도시는 8월 16일에 함락되었다. 불과 24시간 후, 소련 북서부 전선의 주요 소련 반격 작전으로 도시를 탈환하려 했다. 리히트호펜은 ''제1 비행 군단''과 함께 스타라야 루사 근처에서 공격자들을 거의 완전히 파괴했다.[18]
독일 제18군과 제16군은 노브고로드 북쪽의 에스토니아 잔여 지역을 점령하여 레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두 개의 주요 보급선 중 하나를 끊어 놓았다. 이러한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리히트호펜 군단은 1941년 8월 10일부터 20일까지 5,042회의 공격으로 3,351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8월 20일 리히트호펜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무르만스크에서 차단하는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타격 및 전투기를 노브고로드에서 북동쪽으로 40km 떨어진 스파스카야 폴리스트로 이동시켰다. 독일 제41 기갑 군단은 일멘 호-루가-노브고로드 지역에서 소련군을 봉쇄했다. 레닌그라드 전선은 그들을 구출하려 했고, 리히트호펜은 그들의 공격을 무력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련군은 강력한 공군 부대의 지원을 받았고,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졌다. 독일군은 전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고, 이제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18]
주요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레닌그라드는 소련 배후에서 완전히 차단되어야 했는데, 이것은 레닌그라드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독일 제18군을 지원하여 소련 제54군을 라도가 호 해안에서 몰아내 레닌그라드를 고립시킨 ''제8 비행 군단''에 의해 달성되었다. 그 후 ''제8 비행 군단''과 ''제1 비행 군단''은 레닌그라드 상공 16제곱 킬로미터에 집중하여 수적 우위를 달성했다. 리히트호펜의 폭격기들은 레닌그라드를 공중에서 파괴하는 데 대대적으로 참여하여, 일부 승무원들은 밤에 두 번의 임무를 수행했다. 9월 8일에는 6,327개의 소이탄이 투하되어 183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마지막 자원을 투입하고 제54군(나중에 제48군으로 개명)을 증원하여 9월 25일 독일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다. 공세가 중단되자 히틀러는 리히트호펜을 ''제2 항공 함대''로 돌려보냈다.[18]

5. 5. 1. 초기 작전 (1941년)
1941년 6월 22일, ''국방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즉 소련 침공을 시작했다. 리히트호펜은 JG 27, StG 2, StG 3, 10./LG 2, 그리고 II.(S)./LG 2로 구성된 ''제8 항공군단(Fliegerkorps VIII)''의 지휘를 계속했다. 초기에는 그의 부대가 케셀링의 ''제2 항공함대''(Luftflotte 2) 지휘 하에 있는 중부 집단군을 지원했다.1941년 여름까지 루프트바페와 지상-항공 연락 팀은 아군의 오사격 사건 수를 극적으로 줄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초기 단계에서 리히트호펜의 부대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항공 지원에 대한 응답 시간은 보통 2시간을 넘지 않았다.
초기 단계에서 리히트호펜은
6월 23일, 그의 군단은 그로드노 근처에서 반격을 시도한 소련 제6 기병군단(서부 전선)을 궤멸시켰다. 리히트호펜은 투입 가능한 모든 항공기를 투입하여 이들의 격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련 군단은 공습으로 인해 50%의 사상자를 냈다. 리히트호펜의 군단은 500소티에서 30대의 전차와 50대의 차량을 격파했다고 주장했다. 중부 집단군은 계속 진격하여 비테브스크에 도달했다. ''제8 항공군단''은 며칠 후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육군을 지원했다. 이 단계에서 그는 또한 남쪽으로 이동하여 구데리안 기갑군을 지원했는데, 이는 오르샤 점령을 지원하는 데 성공했다. 1941년 7월 17일 스몰렌스크에서 소련군의 포위가 완료되었다. 3주 후, 포위망 내의 마지막 소련군이 제거되었다. ''제8 항공군단''의 업적은 소련군의 반격과 탈출 시도를 격퇴하는 데 중요했다. 리히트호펜은 인상적인 활약으로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에 오크 잎을 추가로 수여받았다. 전투의 결과, 특히 소련 제13군과 제24군에 의한 소련 반격의 격퇴는 인상적이었다. 리히트호펜의 부대는 증원을 방해하고 7월 24일에만 40대의 차량을 파괴한 것으로 알려졌다.
7월 30일에 중부 집단군에게 전략적 방어를 맡도록 명령했다. 지시 34에서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주된 노력을 레닌그라드에 집중시켰는데, 이는 모스크바 서쪽에 적군이 강력하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리히트호펜과 그의 ''항공군단''은 ''제1 항공함대''(Luftflotte 1)에 배속되었다.
리히트호펜은 거의 모든 부대를 북부 집단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했다. 심한 교전 속에서 리히트호펜의 부대는 ''제1 비행 군단''과 협력하여 8월 10일에 1,126회 출격하여 독일군의 나르바 진격을 지원했다. 그들은 전차 10대, 200대 이상의 차량 및 15개의 포병 기지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추가 지원은 독일 제16군에 일멘 호 근처 노브고로드에서 제공되었다. 리히트호펜 군단의 숙련된 승무원들은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철도를 공격하여 증원을 방해했다. 8월 15일, 주요 작전으로 볼호프 강을 가로지르는 주요 소련 보급 다리가 파괴되었다. 노브고로드 요새는 리히트호펜의 Ju 87에 의해 파괴되었고, 버려졌다. 도시는 8월 16일에 함락되었다. 불과 24시간 후, 소련 북서부 전선의 주요 소련 반격 작전으로 도시를 탈환하려 했다. 리히트호펜은 ''제1 비행 군단''과 함께 스타라야 루사 근처에서 공격자들을 거의 완전히 파괴했다.
독일 제18군과 제16군은 노브고로드 북쪽의 에스토니아 잔여 지역을 점령하여 레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두 개의 주요 보급선 중 하나를 끊어 놓았다. 이러한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리히트호펜 군단은 1941년 8월 10일부터 20일까지 5,042회의 공격으로 3,351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8월 20일 리히트호펜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무르만스크에서 차단하는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타격 및 전투기를 노브고로드에서 북동쪽으로 40km 떨어진 스파스카야 폴리스트로 이동시켰다. 독일 제41 기갑 군단은 일멘 호-루가-노브고로드 지역에서 소련군을 봉쇄했다. 레닌그라드 전선은 그들을 구출하려 했고, 리히트호펜은 그들의 공격을 무력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련군은 강력한 공군 부대의 지원을 받았고,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졌다. 독일군은 전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고, 이제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주요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레닌그라드는 소련 배후에서 완전히 차단되어야 했는데, 이것은 레닌그라드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독일 제18군을 지원하여 소련 제54군을 라도가 호 해안에서 몰아내 레닌그라드를 고립시킨 ''제8 비행 군단''에 의해 달성되었다. 그 후 ''제8 비행 군단''과 ''제1 비행 군단''은 레닌그라드 상공 16제곱 킬로미터에 집중하여 수적 우위를 달성했다. 리히트호펜의 폭격기들은 레닌그라드를 공중에서 파괴하는 데 대대적으로 참여하여, 일부 승무원들은 밤에 두 번의 임무를 수행했다. 9월 8일에는 6,327개의 소이탄이 투하되어 183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마지막 자원을 투입하고 제54군(나중에 제48군으로 개명)을 증원하여 9월 25일 독일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다. 공세가 중단되자 히틀러는 리히트호펜을 ''제2 항공 함대''로 돌려보냈다.
5. 5. 2. 케르치 반도 전투 및 세바스토폴 공방전 (1942년)
1941년-1942년 겨울, 남부 전선에서 육군 집단 남부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했고, 캅카스와 로스토프 외곽에 위치해 있었으며, 크림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러나 12월에 소련군은 케르치 반도에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세바스토폴 포위전에 참여하고 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독일 제11군을 고립시킬 위험이 있었다.[18] 만슈타인은 "Trappenjagd"(대사냥) 작전계획을 세우고, 4월 17일, 공세를 위해 집중적인 근접 지원 항공 지원을 요구했다. 만슈타인은 휴식을 취하고 독일에서 재정비를 마친 후 전선으로 복귀한 리히트호펜과 ''제8비행군단''에 의지했다.[18]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지지했고,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가능한 최대 규모의 항공 전력을 집중시킬 것을 요구했다.[18]리히트호펜은 4월 18일 한스 예쇼넥으로부터 케르치로 즉시 떠나라는 전화를 받았다. 히틀러는 리히트호펜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고, 군단의 전문적인 근접 지원 부대로서의 기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성공을 보장할 것이라고 믿었다.[18] 리히트호펜의 군단은 독일에서 휴식을 취하며 재건하고 있었고, 4월 21일 미콜라이우에 있는 ''제4항공함대''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도 이 작업은 진행 중이었다. 리히트호펜은 ''제4항공함대''와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고, ''제8비행군단''은 항상 그의 지휘하에 있었으며 근접 지원 작전의 대부분을 제공했다. 모든 공격적인 공중 작전은 리히트호펜의 책임이었으며, 그는 오직 헤르만 괴링에게만 답변했다.[18]
리히트호펜은 4월 28일 만슈타인을 만났고, 대체로 만슈타인과 잘 지냈다. 만슈타인과 리히트호펜은 가용한 육군 병력이 제한되어 육군과 공군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결정했다.[18] 리히트호펜은 공세를 5월 7일로 연기했고 증원군이 도착했을 때, 그는 11개의 폭격기, 3개의 급강하 폭격기, 7개의 전투기 ''그루펜''을 보유하게 되었다.[18]
리히트호펜의 부대는 케르치 반도 전투에서 빠르게 제공권을 확보하여 첫날에 82대의 적 전투기를 파괴했다. 리히트호펜은 5월 7일에 비행한 2,100회의 출격에 감명을 받았다. 부대 간의 통신은 ''플리에거페르빈둥오피지에어''(항공 연락 장교)에 의해 이루어졌다.[18]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군단은 5월 9일에 1,700회 출격하여 2대의 손실로 42대의 적 항공기를 파괴했다. 5월 12일, 크림반도의 소련 전선이 붕괴되었다. 아조프 해 근처에서, 뭉쳐서 보호받지 못하는 소련 보병은 집속탄을 사용하고 있는 리히트호펜 부대에 큰 피해를 입었다. 리히트호펜은 파괴를 "끔찍하다! 이전 공격으로 시체가 널려 있는 들판... 나는 이 전쟁에서 이와 같은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묘사했다.[18]
같은 날 저녁, 리히토펜은 제2차 하르코프 전투를 돕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케르치는 5월 15일에 함락되었다. 리히트호펜은 해상으로 탈출하는 소련군을 막을 적절한 병력이 없다고 불평했지만, 추축국 항공은 해변의 소련 부대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고 여러 척의 선박을 침몰시켰다. 독일 포병과 공습으로 됭케르크 스타일의 철수는 5월 17일에 종료되었다. 만슈타인은 리히트호펜의 지원을 칭찬하며 그의 공중 작전을 케르치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묘사했다. 군단은 하르코프 철수 전까지 하루에 1,000~2,000회, 이후에는 300~800회 출격했다. 이는 10일 만에 해당 지역의 소련 공군력을 300대에서 60대로 줄였다.[18]
1942년 5월 20일, 리히트호펜은 만슈타인과 다시 만나 세바스토폴 요새 항구를 점령하기 위한 준비에 대해 논의했다. 케르치에서 제공된 것과 동일한 수준의 항공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5월 22일, 리히트호펜은 히틀러를 만났는데, 히틀러는 다시 한번 루프트바페 사령관과 그의 능력에 대해 칭찬하며 그를 "그의 전문가"라고 지칭했다. 히틀러와 참모총장 한스 예쇼네크는 리히트호펜을 제4 항공군 사령관으로 승진시킬 의향이 있었다.[18]

리히트호펜은 쿠르트 플루그바일의 ''제4 비행 군단''과 자원을 합쳤다. 이를 통해 루프트바페는 만슈타인을 지원하기 위해 약 600대의 항공기를 확보했다. 그는 3개의 급강하 폭격기, 6개의 중형 폭격기, 3개의 전투기 그룹을 작전에 투입했다. 그는 소련 방공망의 60여 대의 항공기보다 많았기 때문에 즉시 근접 지원 작전을 시작할 수 있었고, 제공권 전투를 벌이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리히트호펜은 VVS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하여 그의 대공포 부대를 육군에 빌려주었지만, 작전 통제는 유지했다.[18]
공중 작전의 단계는 세 가지로 관리되었다. 독일 포병대 뒤의 소련 예비군 공격; 항만 시설, 비행장, 요새 및 선박에 대한 공습; 소련 박격포 및 대포 진지를 제거하기 위해 독일 포병과 협력. 리히트호펜은 끈질긴 공중 폭격을 통해 요새를 파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선택했다. 이를 위해 리히트호펜은 대부분의 항공 부대를 육상 작전을 지원하는 데 투입했다.[18]
1942년 6월 2일, "철갑상어 포획" 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리히트호펜은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제8 비행 군단''의 항공 부대는 전선 가까이에 배치되었다. 리히트호펜의 부대는 723회 출격하여 525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폭탄에는 요새 파괴용 1,400, 1,700 및 1,800 kg 폭탄이 포함되었다. 6월 3일부터 6일까지 2,355회의 임무에서 1,800톤의 폭탄과 23,000개의 소이탄이 쏟아졌다. 정비공들은 40도까지 치솟는 무더위 속에서 항공기를 작동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다. 리히트호펜의 병참은 일주일간의 작전 이후 한계에 다다랐다. 6월 11일, 또 다른 작전에서 1,070번 출격하여 1,000톤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리히트호펜은 이제 36시간 동안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물자만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18]
리히트호펜의 작전 참여는 1942년 6월 23일에 갑작스럽게 종료되었다. 세바스토폴 함락 이후 예쇼네크와 히틀러로부터 ''제4 항공군'' 사령관직을 맡게 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은 그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그에게 쿠르스크로 가서 그의 사령부를 맡도록 명령했고, 그의 군단을 남겨두고, 세바스토폴 공중 작전은 빌트의 지휘하에 두었다. 리히트호펜은 역겨움을 느꼈다. 그는 "동부에서 시작한 일을 끝낼 수 없다는 것은 유감이다. 잠시 후 모든 즐거움을 빼앗아간다."라고 썼다.[18]
리히트호펜 없이, ''제8 비행 군단''은 성공적이지만 많은 희생을 치른 작전에 계속 기여했다. 군단은 23,751회 출격하여 20,000톤의 폭탄을 투하했고, 31대의 항공기만 손실했다. 축군은 1942년 7월 4일 마지막 방어군이 패주하면서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18]
5. 5. 3.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1942년 6월 28일, 추축군은 대규모 하계 공세인 청색 작전(Case Blue)을 시작했다. 남부 집단군(Army Group South)의 목표는 스탈린그라드와 코카서스 산맥 지역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당시 ''제4 항공군'' 사령관이었던 리히트호펜 남작(Generaloberst Richthofen)은 이 작전을 지원하는 최대 규모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9월 3일, 루프트바페는 파괴적인 여러 차례의 공습을 시작하며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차 세계 대전으로의 항공 전술의 퇴행을 야기했다. 소수의 항공편이 적 보병에 대한 정밀 공격을 가하고 보병의 연장선 역할을 했다. 물류는 어려움을 겪었고, 스탈린그라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으며,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중부와 남부를 점령했다.
11월 19일, 붉은 군대는 우라노스 작전이라는 반격을 시작했다. 며칠 안에,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시에서 약 30만 명의 독일군, 이탈리아군, 루마니아군, 헝가리군 병사를 포위했다. 히틀러와 OKL은 공군으로 추축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리히트호펜은 경악했다. 그는 베르히테스가덴에 전화해 히틀러에게 통화를 시도했지만, 그의 보좌관들은 그를 연결해 주지 않았다. 그는 괴링에게 그의 공군이 공수 작전을 유지할 자원이 없으며, 소련군이 자리를 잡기 전에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설득하려 했다. 그는 만슈타인의 사령부로 날아가 육군 원수는 탈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동의했다. 제6군을 보존하면 나중에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히틀러에게 이 요청을 했다. 소련 사단은 독일군보다 작았지만, 97개의 사단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를 지키는 것은 이제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히틀러는 공수 작전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는데, 아마도 데미얀스크 포위전에서의 루프트바페#REDIR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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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 후, 리히트호펜은 2월 11일에 히틀러를 만났다. 리히트호펜은 히틀러에게 세부적인 관리를 비판했지만, 고문들에게 실망했다고 주장하면서 히틀러의 자존심을 달랬다. 히틀러는 이 모든 것을 침착하게 받아들였고, 공수 작전 실패에 대한 최종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한다고 인정했다. 리히트호펜은 지휘관들에게 더 많은 전술적, 작전적 자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히틀러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이후 작전에서 히틀러의 발언이 진실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리히트호펜은 히틀러가 그를 좋아했고 그가 충성스럽다고 믿었기 때문에 대결을 피했다. 나흘 후 리히트호펜은 육군 원수로 진급했는데, 괴링 다음으로 베르마흐트에서 이 계급에 오른 가장 젊은 장교였다.


5. 5. 4. 이후의 활동
1943년 제3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독일군의 반격을 지원하며 전선을 안정화하는데 기여했다.[18] 이 전투는 동부 전선에서 리히트호펜이 참여한 마지막 전투였고, 이후 지중해 전역으로 이동하여 이탈리아 전역에서 독일 공군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18] 그는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공군의 약세를 문제점으로 인식하고, 독일 공군이 이탈리아가 설계하고 생산한 항공기, 특히 피아트 G 55 전투기를 채택할 것을 권고했지만, 이는 대부분 무시되었다.[18] 살레르노 전투 이후에는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위해 대규모 공군을 구축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아돌프 히틀러는 이탈리아 재무장에 대한 반대로 이를 거절했다.[18]6. 죽음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1944년 뇌종양 진단을 받고 오스트리아 바트 이슐에 있는 공군 신경외과 병원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1944년 10월 27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교수이자 독일의 저명한 뇌외과 의사인 빌헬름 퇀니스에게 수술을 받았으나, 종양의 진행 속도만 늦춰졌을 뿐이었다. 1944년 11월, 리히트호펜은 이탈리아에서의 지휘를 공식적으로 면하고 총통 예비대로 전출되었다. 1945년 초, 그의 건강 상태는 꾸준히 악화되었고, 퇀니스는 두 번째 수술을 시도했지만 종양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하면서 리히트호펜은 미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그는 1945년 7월 12일, 오스트리아 바트 이슐에 있는 공군 병원에서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그의 묘지는 바트 이슐 묘지에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보존되지 않았고, 묘지 십자가에 당시 전쟁 묘지에 묻힌 다른 사람들의 이름과 함께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7. 유산 및 평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남작은 근접 항공 지원 전술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3]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상군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항공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했다.[4] 전술적으로, 리히트호펜은 비행장 방어를 위한 대공포를 최전선에 배치하여 포병 부대를 강화했다.[3] 급속 발사 20mm 구경 및 88mm 무기가 스페인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그 효과는 곧 루프트바페 교리의 일부가 되었다.[3] 또한, 셔틀 항공 전술을 채택하여 전선 근처 기지에서 항공기를 운용함으로써 지속적인 항공 지원을 가능하게 했다.[3]
작전 수준에서, 리히트호펜은 기계화된 물류 부대를 통해 연료, 탄약 및 예비 부품을 신속하게 조달할 수 있도록 했다.[3] 스페인에서의 경험은 항공 수송 부대의 중요성을 보여주었고, 그의 노력으로 루프트바페는 1939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유능한 수송 서비스를 갖게 되었다.[3] 빌바오 전투와 브루네테 전투에서 이러한 전술과 작전 방식이 활용되었다.[3] 특히 브루네테 전투에서 기계화된 물류는 신속한 재배치를 가능하게 했고, 항공 지원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화국군의 공세를 격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
리히트호펜은 지상군과 공군 간의 통신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항공 연락 장교(Flivo)를 활용했다.[4] 그는 특수 차량을 제공하여 육군과 공군이 최전선에서 공습을 지휘할 수 있도록 했다.[4] 이러한 노력은 1939년과 1940년 독일군의 성공에 기여하여 연합국보다 3년 앞서게 했다.[4] 그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의 협력을 통해 "두 명의 뛰어난 작전적 지성"을 보여주었다.[3] 그의 군사적 지성은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면에 집중되었으며, V-1 비행 폭탄과 V-2 개발 계약을 체결하여 독일 제트 엔진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3]
하지만,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나치즘 정권에 적극 협력하여, 그의 군사적 업적은 나치즘과의 연관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스페인 내전 중 콘도르 군단의 게르니카 폭격은 민간인 사상자를 초래하여, 역사가들은 이를 민간인의 사기를 꺾기 위한 의도적인 테러 폭격으로 간주한다. 리히트호펜은 게르니카가 군사적 요충지이며, 군사적 관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기술적 성공이라 평했지만,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태도를 보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바르샤바와 베오그라드 등 도시 폭격에 관여하여 민간인 희생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바르샤바 폭격은 방어된 도시 폭격이 허용되던 당시 국제법에 기반하였다고 주장되지만, "잔혹한 전쟁 행위"였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다.
리히트호펜은 아돌프 히틀러의 노골적인 추종자였으며, 나치즘을 지지했다. 1938년 뤼네부르크에서 열린 나치 후원 집회에서 연설을 통해 히틀러의 지도력을 칭찬하고, 나치당이 독일을 강대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연설했다. 그는 히틀러 신화를 따랐으며, 독일의 군사적 실패는 히틀러가 아닌 참모 본부의 잘못이라고 믿었다.
국방군 장교 매수와 관련하여, 1943년 원수로 진급한 리히트호펜은 매달 4,000 제국 마르크를 받아 챙겼는데, 이는 일반 노동자 연봉 수준의 금액이었으며, 소득세를 회피하여 사기를 저지르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소련 전쟁 포로에 대한 독일의 학대에 대한 책임 문제도 제기된다. 리히트호펜의 항공대가 비행장으로 이동할 때, 소련 지상 승무원들을 격납고에 가두고 며칠 동안 음식과 물을 제공하지 않은 사건은 그가 전쟁 범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종합적으로,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근접 항공 지원 전술 및 작전 수준을 포함하는 현대적인 공지 합동 작전 개발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2년 그의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의 관계는 "두 명의 뛰어난 작전적 지성"의 협력 관계였다. 리히트호펜은 "탁월한" 군사적 지성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그의 지성은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면에 치중되었다. 그는 문학, 문화 또는 사상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론을 개발하기보다는 지상군과 공군 간의 협력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개척한 몇 안 되는 공군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1939년과 1940년 독일군의 성공은 연합국보다 3년 앞서게 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육군에 항공 요원을 파견하여 육군과 공군이 최전선에서 공습을 지휘할 수 있도록 특수 차량을 제공한 것이다. 그의 모든 방법이 혁신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지점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것과 같은 오랜 원칙은 수세기 동안 표준적인 군사적 관행이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리히트호펜의 전기 작가는 그가 항공기 및 항공력 개발이 어떻게 전장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와 이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점으로 보아 "항공력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리히트호펜은 또한 다른 주요 강대국 지도자들이 더 큰 왕복 엔진 항공기에 안주하던 시기에 기술 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로켓 기술과 제트 추진을 지지했다. 그는 최초의 실용적인 순항 미사일인 V-1과 최초의 장거리 탄도 미사일인 V-2 개발을 이끌어낸 계약을 체결했다. 이러한 명령으로 독일 제트 엔진 개발이 가능해졌다.
7. 1. 군사적 업적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남작은 근접 항공 지원 전술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3]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상군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항공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했다.[4]전술적으로, 리히트호펜은 비행장 방어를 위한 대공포를 최전선에 배치하여 포병 부대를 강화했다.[3] 급속 발사 20mm 구경 및 88mm 무기가 스페인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그 효과는 곧 루프트바페 교리의 일부가 되었다.[3] 또한, 셔틀 항공 전술을 채택하여 전선 근처 기지에서 항공기를 운용함으로써 지속적인 항공 지원을 가능하게 했다.[3]
작전 수준에서, 리히트호펜은 기계화된 물류 부대를 통해 연료, 탄약 및 예비 부품을 신속하게 조달할 수 있도록 했다.[3] 스페인에서의 경험은 항공 수송 부대의 중요성을 보여주었고, 그의 노력으로 루프트바페는 1939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유능한 수송 서비스를 갖게 되었다.[3]
빌바오 전투와 브루네테 전투에서 이러한 전술과 작전 방식이 활용되었다.[3] 특히 브루네테 전투에서 기계화된 물류는 신속한 재배치를 가능하게 했고, 항공 지원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화국군의 공세를 격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
리히트호펜은 지상군과 공군 간의 통신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항공 연락 장교(Flivo)를 활용했다.[4] 그는 특수 차량을 제공하여 육군과 공군이 최전선에서 공습을 지휘할 수 있도록 했다.[4] 이러한 노력은 1939년과 1940년 독일군의 성공에 기여하여 연합국보다 3년 앞서게 했다.[4]
그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의 협력을 통해 "두 명의 뛰어난 작전적 지성"을 보여주었다.[3] 그의 군사적 지성은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면에 집중되었으며, V-1 비행 폭탄과 V-2 개발 계약을 체결하여 독일 제트 엔진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3]
7. 2. 논란과 비판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나치즘 정권에 적극 협력하여, 그의 군사적 업적은 나치즘과의 연관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스페인 내전 중 콘도르 군단의 게르니카 폭격은 민간인 사상자를 초래하여, 역사가들은 이를 민간인의 사기를 꺾기 위한 의도적인 테러 폭격으로 간주한다. 리히트호펜은 게르니카가 군사적 요충지이며, 군사적 관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기술적 성공이라 평했지만,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태도를 보였다.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바르샤바와 베오그라드 등 도시 폭격에 관여하여 민간인 희생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바르샤바 폭격은 방어된 도시 폭격이 허용되던 당시 국제법에 기반하였다고 주장되지만, "잔혹한 전쟁 행위"였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다.
리히트호펜은 아돌프 히틀러의 노골적인 추종자였으며, 나치즘을 지지했다. 1938년 뤼네부르크에서 열린 나치 후원 집회에서 연설을 통해 히틀러의 지도력을 칭찬하고, 나치당이 독일을 강대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연설했다. 그는 히틀러 신화를 따랐으며, 독일의 군사적 실패는 히틀러가 아닌 참모 본부의 잘못이라고 믿었다.
국방군 장교 매수와 관련하여, 1943년 원수로 진급한 리히트호펜은 매달 4,000 제국 마르크를 받아 챙겼는데, 이는 일반 노동자 연봉 수준의 금액이었으며, 소득세를 회피하여 사기를 저지르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소련 전쟁 포로에 대한 독일의 학대에 대한 책임 문제도 제기된다. 리히트호펜의 항공대가 비행장으로 이동할 때, 소련 지상 승무원들을 격납고에 가두고 며칠 동안 음식과 물을 제공하지 않은 사건은 그가 전쟁 범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7. 3. 종합 평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근접 항공 지원 전술 및 작전 수준을 포함하는 현대적인 공지 합동 작전 개발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2년 그의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의 관계는 "두 명의 뛰어난 작전적 지성"의 협력 관계였다. 리히트호펜은 "탁월한" 군사적 지성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그의 지성은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면에 치중되었다. 그는 문학, 문화 또는 사상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그는 이론을 개발하기보다는 지상군과 공군 간의 협력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개척한 몇 안 되는 공군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1939년과 1940년 독일군의 성공은 연합국보다 3년 앞서게 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육군에 항공 요원을 파견하여 육군과 공군이 최전선에서 공습을 지휘할 수 있도록 특수 차량을 제공한 것이다. 그의 모든 방법이 혁신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지점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것과 같은 오랜 원칙은 수세기 동안 표준적인 군사적 관행이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리히트호펜의 전기 작가는 그가 항공기 및 항공력 개발이 어떻게 전장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와 이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점으로 보아 "항공력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리히트호펜은 또한 다른 주요 강대국 지도자들이 더 큰 왕복 엔진 항공기에 안주하던 시기에 기술 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로켓 기술과 제트 추진을 지지했다. 그는 최초의 실용적인 순항 미사일인 V-1과 최초의 장거리 탄도 미사일인 V-2 개발을 이끌어낸 계약을 체결했다. 이러한 명령으로 독일 제트 엔진 개발이 가능해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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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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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198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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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Los gernikarras hemos recibido desde niños por transmisión oral lo que fue el bombardeo
https://www.euskonew[...]
201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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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For an explanation of the terms Fliegerkorps and Luftflotte, see [[Organization of the Luftwaffe (1933–1945)|Luftwaffe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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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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