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비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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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비는 오호 십육국 시대 전진의 장락공이자 황제로, 비수대전 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부견의 서장자였으나, 이복 동생 부홍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비수대전 무렵 업을 지키다 모용수의 후연 건국으로 위기에 처했으며, 동진의 지원을 받아 포위를 풀고 진양에서 황위에 올랐다. 이후 후진, 서연과 대립하며 세력을 규합하려 했으나, 모용영에게 패하여 낙양을 공격하려다 동진군에게 전사했다. 사후 애평제로 시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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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비 (전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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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부비 (苻丕) |
풀 네임 | 부비 (苻丕) |
휘 | 부비 |
자 | 영숙 (永叔) |
통치 정보 | |
칭호 | 황제 |
시호 | 애평황제 (哀平皇帝, "애도할 만하고 평화로운") |
묘호 | 없음 |
국가 | 전진 |
재위 기간 | 385년 – 386년 |
연호 | 태안 (太安) : 385년 – 386년 |
계승 | 부견 |
계승자 | 부등 |
출생과 사망 | |
사망 | 386년 |
가계 | |
아버지 | 부견 (서장자) |
어머니 | 알 수 없음 |
배우자 | 알 수 없음 |
기타 | |
왕조 | 부씨 (苻氏) |
2. 생애
부비는 부견(苻堅)의 서장자(序長子)로 장락공(長樂公)에 봉해졌다. 이복 동생인 부홍은 천왕태자(天王太子)로 세워졌다.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 무렵에 업(鄴)에 주둔하여 하북 일대를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부견이 비수에서 대패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부비는 모용수(慕容垂)를 시켜서 적빈(翟斌)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부비는 모용수가 모반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견제하도록 부비룡(苻飛龍)을 함께 파견하였으나 모용수는 부비룡을 죽이고 384년 후연(後燕)을 건국하였다.
부비가 업에서 농성하는 가운데 모용수는 업을 포위하고 하북 각지를 점령하였다. 385년 4월까지 치열하게 농성전을 벌인 부비는 동진(東晉)의 원군에 힘입어 포위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업을 버리고 장안으로 돌아가려던 부비는 8월에 부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양(晉陽)으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부비는 농서(隴西) 지역에서 후진(後秦), 서연(西燕)에 항전하는 세력들을 규합·통제하는 한편 당면한 적인 후연에 맞서서 전쟁을 벌였다. 농서 지역과 부비의 진양은 후진, 서연 등에 의해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서의 전진 세력들은 사실상 독자적인 세력이었다.
386년 8월, 부비는 후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여 진양을 버리고 남하하였는데, 평양(平陽)에서 서연 모용영(慕容永)의 공격을 받아 패주하였다. 부비는 일족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잔병을 모아 낙양(洛陽)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동진의 반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부등(苻登)이 황제에 즉위한 후에 애평제(哀平帝)라고 시호를 올렸다.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부비는 부견(苻堅)의 서장자(序長子)로, 생모가 정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자로 세워지지 못했다. 357년 부견이 대진천왕(大秦天王)으로 즉위하자 장락공(長樂公)에 봉해졌다. 이복 동생인 부홍은 천왕태자(天王太子)로 세워졌다. 부비는 통치와 군사 모두에 재능을 보였으나, 그의 숙부 부융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받았다.368년 옹주(간쑤성 동남부의 전원현) 자사에 임명되었다가, 370년 옹주가 폐지되면서 관직에서 면직되었다. 371년 옹주가 다시 설치되면서 옹주 자사에 임명되었고, 사지절(使持節)·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을 제수받았다. 이후 상서령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했다.
378년, 부비는 동진의 양양(현대 후베이성 샹양시)을 공격하는 대군을 지휘했다. 379년, 부비는 맹렬한 공격을 가해 양양을 함락시켰다.
383년 비수대전 무렵에는 업(鄴)에 주둔하여 하북 일대를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부견이 비수에서 대패한 후, 부비는 모용수(慕容垂)에게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으나, 모용수는 384년 후연(後燕)을 건국하였다. 385년 4월까지 농성전을 벌인 부비는 동진(東晉)의 원군에 힘입어 포위를 물리치고, 8월에 부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진양(晉陽)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386년 8월, 부비는 후연의 공격을 받아 진양을 버리고 남하하다가 평양(平陽)에서 서연 모용영(慕容永)에게 패하고, 낙양(洛陽)을 공격하려다 동진의 반격으로 전사하였다. 부등(苻登)이 황제에 즉위한 후 애평제(哀平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2. 2. 양양 공략
부비는 378년, 부견의 명을 받아 동진의 도시인 양양(현대 후베이성 샹양시)을 공격하는 대군을 지휘했다. 이 때, 부비는 정남대장군(征南大将軍)·도독정토제군사(都督征討諸軍事)에 임명되었고, 상서모용위·무위장군구창과 함께 보병과 기병 7만 명을 이끌고 상양 정벌에 나섰다. 또한 형주 자사양안이 군의 선봉이 되었고, 정로장군석월 역시 정예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노양관에서 출격했으며, 경조윤모용수·양무장군요장은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향에서 출격했으며, 영군장군구지·우장군모당·강노장군왕현은 정병 4만 명을 이끌고 무당에서 출격하여 상양 공격에 합류했다.부비는 도시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포위하여 보급로를 차단해 굴복시키려 했다. 378년 4월, 전진군은 한양에서 합류하여 면북까지 군대를 진군했고, 부비는 제 장수를 통솔하여 중성을 공격했다. 구지·석월·모당에게 병사 5만 명을 주어 강릉으로 향하게 했다.
부비는 상양을 급히 공격하려 했지만, 구창은 "우리 군은 적보다 10배나 많고, 군량도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한·면의 백성을 허·락으로 옮기고,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막아 외원을 끊으면, 군량도 사람도 다 떨어져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반대했고, 이에 따랐다.
379년 새해 즈음에, 부견은 도시를 점령하는 것을 갈망하여 부비에게 검을 보내, 봄까지 도시를 점령하지 못하면 그 검으로 자결하라고 했다. 검을 받은 부비는 두려움에 떨며 맹렬한 공격을 가해 도시를 함락시켰다.
378년 12월, 부비는 상양 포위를 계속한 지 8개월 이상이 지났지만, 여전히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어사중승이유는 부견에게 부비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부견은 부비에게 검을 하사하며 "내년 봄까지 승리하지 못하면, 네가 스스로 처결하라. 다시 나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379년 1월, 부견의 질책이 부비의 진영에 전해지자 정남주부왕시는 부비에게 포위를 강화하고 공격으로 전환할 것을 간언했고, 부비는 이를 받아들였다.
2월, 동진의 상양독호이백호는 몰래 아들을 전진의 진영으로 보내, 전진군이 공세를 펼치면 내부에서 호응할 것을 약속했다. 이를 받아들인 부비는 제 군에게 일제 공격을 명령했고, 마침내 상양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여 주서를 사로잡아 장안으로 보냈다.
2. 3. 동부 지역 통치와 후연의 건국
380년, 부비는 전연의 옛 영토였던 동부 지방 총독으로 임명되어 수도 장안을 떠나 야성으로 부임했다.[2] 그해 부견은 저족을 제국의 여러 지역에 분산시키는 계획을 시행했고, 부비는 3천 호를 거느리고 야성에 주둔했다.[2]383년, 비수 전투에서 전진이 대패한 후, 선비족 출신의 모용수는 후연 건국을 계획하며 반란을 일으켰다.[2] 부비는 모용수를 의심하면서도 모용농, 모용개, 모용소 등을 감시하지 않아 이들이 야성을 탈출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지 못했다.[2]
384년 봄, 모용수는 후연을 건국하고 연왕을 칭했다.[2] 부비는 모용수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황하 북쪽과 태행산 동쪽의 대부분의 도시가 후연에 넘어가면서 야성은 고립되었다.[2] 후진, 서연 등의 공격으로 전진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부비는 동진에 평화를 요청하며 지원을 받았지만, 임시 동맹은 곧 깨졌다.[2]
384년 말, 모용수는 야성 포위를 잠시 풀었지만, 곧 다시 포위했다. 385년, 부비는 야성을 버리고 북서쪽 진양(현재의 산서성 태원)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부견이 요장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를 칭했다.[2]
부비는 380년 6월 도독관동제군사(都督関東諸軍事)·정동대장군(征東大将軍)·기주목(冀州牧)에 임명되어 업에 출진하여 관동(關東)을 통치하게 되었다. 383년 비수 전투에서 전진이 크게 패배하여 전진에 복속되어 있던 여러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수는 전연 황제 모용황의 아들로, 부견의 호위를 맡고 있었지만, 낙양까지 후퇴한 후 관동 각지로 가서 이반한 부족들을 위무하겠다고 자청하여 부견의 허락을 받았다. 안양에 도착한 모용수는 부비에게 서신을 보내 업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부비는 모용수의 모반을 의심했지만, 그를 맞이했다.[2]
당시 정령족인 전진의 위군 종사 중랑 적빈이 하남에서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공격하고 있었다. 부견은 모용수에게 서신을 보내 낙양으로 가서 부휘와 함께 적빈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석월은 부비에게 모용수에게 병력을 주는 것에 반대했지만, 부비는 "두 마리의 호랑이를 싸우게 하여, 나는 그 동향을 살피면서 이를 제어할 것이다"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2] 부비는 부비룡에게 저족의 기병 1천 명을 주어 부장으로 삼고, 모용수를 감시하게 했다. 또한, 모용농, 모용개, 모용소, 모용주는 업에 머물게 했다.[2]
모용수는 출진 전 업에 있는 종묘에 참배하고 싶다고 청했지만, 부비는 허락하지 않았다. 모용수는 허가 없이 몰래 입성하려 했지만, 관리에게 입성을 거부당하자 격분하여 그 관리를 살해하고 정자를 불태운 뒤에 돌아갔다. 석월은 이를 이유로 모용수를 제거해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부비는 듣지 않았다. 모용수는 업을 출발하여 낙양으로 향했지만, 기회를 틈타 부비룡을 살해하고 그 병사들을 모두 생매장했다. 모용농 등은 모용수의 반란을 알게 되자, 몰래 업을 탈출하여 부비의 준마 수백 마리를 훔쳐 갔다.[2]
384년 1월, 부비는 모용농이 도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달, 모용수는 적빈의 세력과 합류하여 영양에 거점을 마련하고 연왕을 칭하며 정식으로 자립했다('''후연의 건국''').[2] 모용농 역시 열인에서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모용수에 호응하여 관도・돈구를 함락시켰다.[2]
부비는 석월에게 1만여 명의 병력으로 모용농 토벌을 명했지만, 석월은 조추・기무등에 의해 격파되었다. 모용농은 성 서쪽에 진을 치고, 유목은 장사 400명을 이끌고 책을 넘어 석월의 진영으로 돌입하여 전진군을 크게 혼란시켰다. 모용농은 대군을 이끌고 후속하여 전진군을 대패시키고 석월을 죽였다.[2] 석월의 전사로 민중은 충격을 받았고, 도적들이 여기저기서 봉기하기 시작했다.[2]
부비는 강양을 모용수에게 보내 귀순을 설득했지만, 모용수는 거절했다. 부비는 모용수의 답에 격노하여 다시 서신을 보내 모용수의 불의(不義)를 꾸짖었다. 같은 달, 모용수의 군세가 업에 도착하여 공세를 시작했다. 성의 외곽은 곧 함락되었고, 부비는 군사를 물려 중성을 지켰다.[2]
2월, 모용수는 정령(丁零) · 오환(烏桓)의 병사 20만여 명을 동원하여 중성을 공격했지만, 부비는 이를 막아냈다. 이에 모용수는 지구전 태세를 취하고, 깊은 해자를 갖춘 광대한 포위진을 구축했다.[2]
7월, 정령의 적빈은 모용수와 대립하여 몰래 부비와 내통하게 되었지만, 실행 전에 작전이 발각되어, 적빈과 그의 동생들은 주살당했다. 적진은 한단으로 도주했다.[2]
8월, 업 안에서는 군량이 다 떨어져 소나무를 깎아 말의 사료로 삼을 정도가 되었다. 모용수는 부견에게 은혜를 입었기에, 감히 포위를 풀고 신성까지 물러나 부비가 서쪽의 장안으로 도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부비는 여전히 업성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2]
9월, 부비는 광조를 사자로 적진에게 파견하여 동맹을 맺어 후연을 고립시키려 했다. 이때 후연의 군세는 점차 피폐해지고, 전진군은 기세를 되찾았기에 기주의 군현 대부분은 어느 쪽에도 붙지 않고 추세를 지켜보았지만, 조속 등은 거병하여 후연을 배반하고 소흥에게 호응했다. 후연의 모용륭은 상국에서 소흥을 격파하여 포박했다. 광조는 소흥과 상국에서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듣고 서산에서 업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조속 등도 모두 토벌당했고, 이로 인해 기주의 군현은 다시 후연을 따랐다.[2]
10월, 부비는 양응의 동진 귀순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달, 동진의 사현이 기주로 침공해오자, 부비는 사현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업을 넘겨주는 것을 조건으로 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사자로 뽑힌 부취, 초규, 강양은 양응과 함께 모의하여, 동진군에 항복하는 대신 구원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서신을 고쳐 쓴 다음 사현에게 보냈다.[2]
12월, 사현은 유뢰지에게 2만 명의 병사를 주어 업을 구원하게 했다. 부비가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자, 사현은 수륙으로 쌀 2천 곡을 운송하게 했다.[2]
모용수가 업의 포위를 풀었지만, 부비는 여전히 업을 떠나려 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병사를 이끌고 업성을 포위하고, 서쪽으로만 도주로를 열어두었다. 이때, 전진의 옛 신하인 주숙 등은 무리를 이끌고 동진에 항복했다.[2]
385년 2월, 환관 맹풍과 정동참군 서의는 부비에게 양응과 강양 등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고했다. 이에 부비는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이때 유뢰지(劉牢之)는 방두에 도착했지만, 업에서의 내분을 알고 진격을 보류했다.[2]
3월, 유뢰지는 후연의 려양군 태수 유무가 지키는 손취책(려양의 경계에 위치)을 공격했다. 모용수는 모용농에게 업 포위를 맡기고, 직접 구원에 나섰다. 부비는 이를 기회로 삼아, 밤을 틈타 출병하여 후연의 진영을 기습했지만, 모용농에게 격퇴당했다. 모용수 또한 유뢰지 군을 격파하고 려양으로 후퇴시킨 후 업으로 귀환했다.[2]
4월, 유뢰지는 다시 공세를 시작하여 업으로 진격했다. 모용수는 이를 막았지만 패배하여 포위를 풀고 신성까지 후퇴한 후, 다시 북쪽으로 물러났다. 유뢰지는 부비와 합류하지 않고 모용수를 추격하기 시작했고, 부비 또한 모용수의 퇴각을 듣고 군사를 내어 뒤따르게 했다. 유뢰지는 동당연에서 따라잡아, 여러 차례 퇴각하는 후연군에게 피해를 입혔다. 유뢰지 군은 더욱 200리에 걸쳐 추격을 계속하여, 오교택에서 후연의 군수 물자를 습격했으나, 여기서 모용수는 군사를 돌려 이를 격파하고 적군을 대파하여 수천 명의 수급을 얻었다. 유뢰지가 단기로 도주하자, 모용덕과 모용륭은 오장교를 차단하여 퇴로를 막았지만, 유뢰지는 말을 달려 오장간을 뛰어넘어 후속 부비 군에게 의탁했다.[2]
같은 달, 업(鄴) 안의 기근은 더욱 참기 어려워졌고, 부비(苻丕)는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업을 떠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방두(枋頭)로 들어갔다. 유뢰지(劉牢之)는 대신 업으로 입성하여 패잔병을 수습했고, 그 군세는 조금 회복되었지만, 이번 패전으로 본국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았기에 군대를 귀환시켰다.[2]
7월, 부비는 방두를 떠나 다시 업으로 향했다. 도중에 곡구(谷口)에서 동진(東晉)의 용양장군(龍驤將軍) 단현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부비는 격퇴하고 업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관동(關東)의 정세는 날마다 후연(後燕) 우세로 기울었기에, 더 이상 업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8월, 마침내 업의 포기를 결단하고, 장안(長安)으로 가려고 생각했다. [2]
호관(壷関)에 할거하고 있던 전진(前秦)의 유주 자사 왕영(왕맹의 아들)은 사자를 파견하여 부비를 초빙했다. 이를 받아들여, 부비는 업 안의 남녀 6만여 호를 거느리고 서쪽의 노천(潞川)으로 향했고, 표기장군(驃騎將軍) 장호(張蚝), 병주 자사 왕등(王騰)의 영접을 받아 진양(晉陽)으로 들어갔다. 왕영 또한 평주 자사 부충에게 호관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1만 기병을 이끌고 진양으로 들어갔다. 용종복사(冗従僕射) 광조(光祚), 황문시랑(黄門侍郎) 봉부(封孚), 거록군 태수 봉권(封勧)은 진양으로 따라가지 않고, 함께 동진에 항복했다.[2]
2. 4. 황제 즉위와 통치
부비는 부견(苻堅)의 서장자로,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패배한 후 혼란한 상황 속에서 385년 황제에 즉위했다. 모용수(慕容垂)가 384년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업(鄴)을 포위하자, 부비는 동진(東晉)의 도움으로 포위망을 뚫고 진양(晉陽)으로 이동하여 황제에 즉위했다.부비는 즉위 후, 후진(後秦)과 서연(西燕)에 맞서 싸우는 한편, 산시성과 간쑤성 등지에 남아있는 전진에 충성하는 세력을 규합하려 노력했다. 386년 가을, 서연의 모용영(慕容永)이 동쪽으로 이동하며 통과를 요청했으나, 부비는 이를 거부하고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부비는 왕영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을 등용하여 내정을 정비하고, 각지의 전진 세력에 사자를 보내 규합하려 했다. 장호를 사공, 왕영을 상서령, 왕등을 사례교위, 부충을 상서좌복야, 구석자를 복양공, 양보를 우복야, 왕량을 호군장군, 강익·양창을 시중, 서의를 이부상서로 임명하는 등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또한, 양씨를 황후로, 아들 부녕을 황태자로 삼았다.
여광이 서역 정벌에서 돌아와 후량을 건국하고, 부찬이 진양으로 도망쳐 오는 등 주변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부비는 두충, 왕통, 모흥, 왕광, 양벽, 양정 등 농서 지역의 장군들과 연합하여 후진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들의 세력권은 진양과 멀리 떨어져 있어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386년 8월, 부비는 모용영의 공격으로 진양을 버리고 남하하다가, 낙양(洛陽)을 공격하려다 동진의 반격으로 전사했다. 부등(苻登)이 즉위한 후 애평제(哀平帝)라는 시호를 받았다.
2. 5. 최후
부비는 386년 8월, 후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진양(晉陽)을 버리고 남하하던 중, 평양(平陽)에서 서연 모용영(慕容永)의 공격을 받아 패주하였다. 일족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 한 부비는 잔병을 모아 낙양(洛陽)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동진의 반격을 받아 전사하였다.386년 가을, 서연(西燕)의 통치자 모용영은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관중 지역을 버리고 동쪽으로 향하면서 부비에게 통과 허가를 요청했다. 부비는 이를 거부하고 그들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대패하여 왕용과 주취거시지(沮渠俱石子) 장군이 사망하고, 부비의 대부분의 관리들과 그의 아내 양황후가 포로로 잡혔다. 10월, 모용영은 부비에게 사자를 보내 관동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비의 영토를 통과할 것을 다시 요청했다. 부비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왕영과 부찬에게 토벌을 명령하고 구석자를 전봉도독으로 삼았다. 그리고 모용영 군과 양릉에서 교전했으나, 전진 군은 대패하여 왕영과 구석자가 전사했다.
부비 휘하에서 아직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유일한 장군은 그의 사촌 동해왕 부찬(苻纂)이었는데, 그는 진양에 머물렀지만 부비는 부찬의 의도를 의심하여 진양으로 돌아가는 것을 감히 하지 못했다. 동해왕 부찬이 관중으로부터 왔을 때, 휘하의 용사 3천여 명을 이끌고 있었고, 부비는 이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번 패전에 편승하여, 부찬이 정변을 일으켜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고 두려워하여 기병 수천을 이끌고 남쪽의 동원으로 도주하여 낙양을 침공하려 했다. 하지만, 동진의 양위장군 풍개가 섬에서 출격하여 이를 공격했고, 부비는 패배하여 살해당했다.
부비의 아들 태자 부녕(苻寧)과 창락왕 부수(苻壽)는 진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혔지만 사면되어 이전에 진나라에 항복한 그의 숙부 부홍(苻宏)에게 넘겨졌다. 서의는 모용영에게 사로잡혔지만 탈출하여, 동진의 장군 양전기에게 망명했다. 부찬과 그의 동생인 상서·영평후 부사노는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행성으로 도주했고, 그 외의 왕공과 백관은 모두 모용영에게 투항했다.
뒤를 이은 부등(苻登)은 상을 발표하고 부비를 애평황제(哀平皇帝)로 시호했다.
3. 연표
4. 가계
부비의 아버지는 선소황제이다. 부비는 양황후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양황후는 385년에 책봉되었으나 386년 모용영의 서연에 의해 살해되었다.
부비의 자녀로는 태자 부녕, 장락왕 부수, 평원왕 부강이 385년에 책봉되었다. 발해왕 부의는 385년에 책봉되었고, 이후 부등 치하에서 헌애태자로 387년에 책봉되었으나 388년에 사망했다. 제북왕 부창도 385년에 책봉되었다. 이외에도 부휘, 부굉, 부희, 부예, 부린, 부선, 순양공주, 양정의 아내, 부보, 부금 등이 있었다.
5. 평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와 역사에 널리 통달했다. 부견과 군략에 대해 이야기하면 부견은 그의 식견을 크게 칭찬하고, 등강에게 명하여 병법을 가르치게 했다. 문무에 재능이 뛰어나 백성을 다스리고 죄를 다스리는 모습은 부융에 버금갔다. 장군으로서도 사졸들을 잘 위무하여 크게 신뢰를 받았다.
5. 1. 긍정적 평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와 역사에 널리 통달했다. 부견과 군략에 대해 이야기하면 부견은 그의 식견을 크게 칭찬하고, 등강에게 명하여 병법을 가르치게 했다. 문무에 재능이 뛰어나 백성을 다스리고 죄를 다스리는 모습은 부융에 버금갔다. 장군으로서도 사졸들을 잘 위무하여 크게 신뢰를 받았다.5. 2. 부정적 평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와 역사에 널리 통달했다. 부견과 군략에 대해 이야기하면 부견은 그의 식견을 크게 칭찬하고, 등강에게 명하여 병법을 가르치게 했다. 문무에 재능이 뛰어나 백성을 다스리고 죄를 다스리는 모습은 부융에 버금갔다. 장군으로서도 사졸들을 잘 위무하여 크게 신뢰를 받았다.6. 기타
참조
[1]
서적
十六國春秋別本·卷四前秦錄(Annals of the Sixteen Nations, ch. 4 - records of Former Qin)
[2]
서적
晉書·苻丕傳 (The Book of Jin - Biography of Fu Pi)
[3]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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