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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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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 서씨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부여융이 당나라에서 서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 시대 서존을 1세조로 하여 부여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조선 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4명 등 다수의 인물을 배출했다. 이천 서씨의 분파 중 하나로, 학계에서는 부여융이 서씨 성을 받았다는 기록의 신빙성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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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여 서씨 - 서필원
    서필원은 조선 시대 문신으로, 대동법 시행, 서원 개혁, 육진 지역 폐단 개선 등 민생 안정과 지방 행정 개혁에 힘썼으며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내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공헌하여 시호는 정의이고 저서로는 《육곡유고》가 있다.
부여 서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한자 표기扶餘 徐氏
로마자 표기Buyeo Seo ssi
기원
시조부여융(扶餘隆)
원시조온조왕
중시조서존(徐存)
집성촌
인구 통계
2015년17,145명
주요 인물
기타 정보
관련 웹사이트서씨일가연합회

2. 역사

부여 서씨(扶餘 俆氏)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시조로 한다. 부여융당나라에서 서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병부상서를 지낸 서존(徐存)을 1세조로 하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서존의 11대손은 서수손(徐秀孫)이다.

2. 1. 시조 및 기원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첫째 아들(혹은 셋째 아들이라고도 하며, 아직 학계의 설이 분분함)인 부여융이다.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 멸망하여,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 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에게 서씨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여 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의 원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서존의 11대손은 서수손(徐秀孫)이다.

2. 2. 조선 시대

부여 서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다.



무과
서경은서귀남서내원서대인서시현
서인일서필후서행보서행진서호인



생원시
서경복서규훈서내석서내익서병기
서상민서상훈서석록서영로서응로
서익서정민서희적



진사시
서경성서기도서병규서병덕서병호
서복일서숭수서승교서영택서필원



율과
서경식서병숙서응호서종건서홍선
서홍수서홍적서홍진


3. 분파

서문중(徐文重)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 서씨(南陽), 당성 서씨(唐城)가 이것이라고 하였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 서씨(南陽), 당성 서씨(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4. 주요 인물


  • 서익(徐益):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만죽헌(萬竹軒). 아버지는 진사 서진남(徐震男)이며, 어머니는 광주 이씨(廣州李氏)로 직제학 이약해(李若海)의 딸이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삼당시인, 팔문장, 정철과 더불어 이십팔숙회라 칭하여졌다. 저서로는 『만죽헌집(萬竹軒集)』 1권과 시조 2수가 있다. 유품으로 장검 1점, 옥피리 1점이 전해지고 있으며 시조 2수는 청구영언, 국조시산, 기아 등에 실려 있다.
  • 서필원(徐必遠)[1]
  • 서성[2]
  • 서한범[3]
  • 서승직[4]
  • 서승진
  • 서정식
  • 서의식
  • 서희석

4. 1. 조선 시대


  • 서익(1542년 ~ 1587년):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 병조·이조좌랑, 병조정랑, 교리, 수찬, 사인(舍人)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고창현감, 안동부사, 평양서윤, 서천군수·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이이·정철 등으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으며, 1585년 5월 의주목사 재직 시 박순, 정철, 이이 등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동인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충청남도 은진(恩津)의 갈산사에 배향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불타 우암 송시열이 현 가야곡면 산노리에 효암서원에 배향되었다가 다시 가야곡면 육곡리 행림사에 모셔져 있다.
  • 서필원(1614년 ~ 1671년): 164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69년 형조판서를 거쳐 1671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왕에게 직언을 잘하여 당대의 오직(五直)이라 불렸다. 시호는 정의(貞毅)이다.[1]

4. 2. 현대

5. 본관

부여 서씨(扶餘徐氏)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첫째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1] 660년(의자왕 20)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하여 멸망한 뒤,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 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1]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에게는 서씨(徐氏)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1]

부여 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의 원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1] 서존의 11대손은 서수손(徐秀孫)이다.[1]

부여(扶餘)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으로, 660년(백제 의자왕 20)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당나라에 예속되었다. 같은 해 백제도호부, 665년에 웅진도독부의 산하에 들어가 우이현(隅夷縣)이 설치되었으나 나당 전쟁에서 당나라가 패배해 신라에 예속되었다.[1] 751년(경덕왕 10)에 부여현(扶餘縣)으로 개칭되었다.[1] 757년(경덕왕 16)에 부여군으로 고치고 웅주(熊州) 영현에 두었다.[1] 1018년(고려 현종 9) 공주에 예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면서 독립하여 부여현으로 조선 말까지 유지되다가 1896년에 충청남도 부여군이 되었다.[1]

6. 집성촌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 부여 서씨 재실이 있다.

7. 학계 평가

학계에서는 당 고종부여융에게 성을 부여씨에서 서씨로 바꾸어주었다는 내용에 대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부여융과 손녀 부여태비는 계속 부여씨를 썼고,[2] 중국 역사서의 기록에 당 고종이 부여씨를 서씨로 고쳐 하사했다는 내용을 고증할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융의 묘지석에는 ‘부여융(扶餘隆)’이라 쓰였고,[3] 중국 산시성에서 발견된 의자왕의 손녀 묘지명에도 ‘부여태비(扶餘太妃)’라는 칭호가 쓰였다.[4]

그럼에도 백제 왕족의 후손들이 ‘부여(扶餘)’ 씨에서 ‘서(徐)’씨로 성을 바꾸었을 것이란 주장에 대해서는 신빙성이 있다고 평가한다. 백제가 멸망한 뒤, 한반도에서 살아남았던 왕족은 신라의 지배 아래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제의 왕족이‘부여(扶餘)’씨가 ‘부여(夫餘)’씨, 그리고 ‘서(徐)’씨로 글자를 변형시켰을 것이란 이야기다.[1]

참조

[1] 서적 의자왕 후예들의 과거와 현재 백제문화 2004
[2] 논문 부여융묘지명 http://gsm.nricp.go.[...] 백제학회 2010
[3] 서적 자치통감
[4] 뉴스 백제 의자왕 증손녀 부여태비 묘비석 中서 발견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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