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북조 (일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북조는 일본의 남북조 시대에 무로마치 막부의 지원을 받아 교토에 존속한 천황가이다. 1331년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 타도 계획 실패로 유배되면서 고곤 천황이 즉위했으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겐무 신정을 무너뜨리고 고묘 천황을 옹립하면서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북조는 남조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며, 무로마치 막부의 지원을 받아 지속되었으나, 1392년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이 북조의 고코마쓰 천황에게 삼종신기를 넘겨주면서 남북조가 통일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남조가 정통으로 인정되었으나, 현재는 남북조 모두를 인정하며, 천황의 대수는 남조를 기준으로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무로마치 시대 교토 - 오닌의 난
    오닌의 난은 1467년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로 시작되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11년간 교토를 중심으로 벌어진 대규모 내전이며, 아시카가 막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센고쿠 시대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다.
  • 무로마치 시대 교토 - 무로마치 막부
    무로마치 막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1336년에 세워 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한 일본의 무가 정권으로, 남북조 시대와 오닌의 난을 거치며 쇼군의 권위가 약화되어 멸망에 이르렀다.
  • 야마시로국 - 교토
    교토는 혼슈 중앙부에 위치하며 약 천 년간 일본의 수도였던 도시로, 헤이안쿄로 설계되어 전란과 화재를 겪었으나 복구 노력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고, 에도 시대에는 문화와 상공업의 중심지로,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관광 도시로 번영하며 수많은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야마시로국 - 교토 미마와리구미
    교토 미마와리구미는 1864년 교토 치안 유지를 위해 결성된 도쿠가와 막부 직속 무사 조직으로, 사카모토 료마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보신 전쟁 패배 후 해체되었다.
  • 난보쿠초 시대 - 남조 (일본)
    남조는 14세기 일본 남북조 시대에 고다이고 천황이 세운 천황가의 분파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세운 북조와 대립하다가 1392년 종결되었으며, 메이지 시대에 정통으로 인정받았다.
  • 난보쿠초 시대 - 태평기
    《태평기》는 14세기 무로마치 막부 관련 지식인들이 편찬한 군담소설로, 남북조 시대를 배경으로 겐무 신정, 남북조 분열, 무장들의 활약상을 유교적 대의명분론과 불교적 인과응보론에 기반하여 극적으로 묘사하며 역사적, 문학적, 사상적 영향력을 지닌다.
북조 (일본)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난보쿠초 시대의 황실 수도를 보여주는 지도, 이 중 북조의 수도는 헤이안쿄였다.
난보쿠초 시대 수도 지도
기본 정보
일반 명칭북조
고유 명칭북조 (北朝, Hokuchō)
존속 기간 시작1331년/1336년
존속 기간 종료1392년
군기[[파일:Nishiki no Mihata.svg|군기]]
문장[[파일:Imperial Seal of Japan.svg|황실 문장]]
이전 정부겐무 신정
다음 정부아시카가 막부
수도헤이안쿄
정부 형태군주제
종교신불습합
공용어중세 일본어
역대 천황
천황고곤 천황 (1331년–1333년)
천황고묘 천황 (1336년–1348년)
천황스코 천황 (1348년–1351년)
천황고코곤 천황 (1352년–1371년)
천황고엔유 천황 (1371년–1382년)
천황고코마쓰 천황 (1382년–1392년/1412년)
역사적 배경
주요 사건남북조 시대의 분열 중 북조
해체일1392년 8월 11일
해체 사유남북조 통합
기타
지묘인 계통지묘인통

2. 성립 배경

가마쿠라 막부는 몽골의 일본 침입 이후 여러 문제에 직면하여 권위가 약화되었다. 고다이고 천황왕정복고를 꿈꾸며 막부 타도를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오키 제도로 유배되었다. 고곤 천황이 즉위하고 고후시미 천황이 원정[58]을 실시했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이에 저항했다.

1333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과 연합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으나,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은 무사 계층의 불만을 샀다.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반기를 들고 교토를 점령하여 무로마치 막부를 세웠다. 그는 고후시미 천황의 아들 유타히토 친왕을 고묘 천황으로 옹립하여 북조를 성립시켰고, 고다이고 천황은 삼종신기[62]를 가지고 요시노로 탈출하여 남조를 세움으로써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북조는 고사가 천황[3]에서 기원한다. 고사가 천황은 임종 직전 두 아들인 고후카쿠사 천황[4]가메야마 천황[5]의 계보에서 번갈아 황위를 계승하도록 하였으나,[6] 이는 황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을 초래했다.

광엄 천황


가마쿠라 막부가 붕괴되자, 지묘인토의 광엄 상황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니타 요시사다 토벌을 명하는 원선을 내렸다. 다카우지는 1336년 교토에 입성하여 겐무 정권을 무너뜨렸고, 광엄 상황은 인정을 시작했다.[20] 다카우지는 무가 정권 건설에 착수했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잔 엔랴쿠지로 피신하여 저항했다. 광엄 상황은 다카우지의 요청으로 그의 동생인 도요히토 친왕(고묘 천황)을 천황으로 즉위시켰다.[21] 이 즉위는 삼종신기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으나, 이후 고다이고 천황이 북조에 신기를 넘겨주면서 고묘 천황은 정식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같은 해 말, 무로마치 막부는 『겐무시키모쿠』를 발표하여 무가 정권 수립을 선언했지만, 고다이고 상황은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로 가서 북조에 넘긴 신기는 가짜라고 주장하며 남조를 세워 대항했다.[22]

초기에는 남조와 북조가 대등하게 맞섰지만,[23] 시간이 지나면서 북조가 우세하게 되었다.[24] 광엄 상황은 고묘 천황과 스코 천황 2대에 걸쳐 치텐노키미로서 인정을 행하며 법 정비를 추진했고,[25] 공가와 협력하여 백성을 위한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26] 또한, 문화적으로는 교고쿠파의 와카집인 『후가와카슈』가 편찬되었고, 조가쿠의 부흥도 이루어졌다.[27]

2. 1.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

가마쿠라 막부는 몽골의 일본 침입 이후 국내적으로 여러 문제에 직면하며 쇠퇴의 길을 걸었다. 특히, 유력 고케닌(御家人)들의 권력 다툼과 경제적 어려움은 막부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

2. 2. 고다이고 천황의 왕정복고 시도

1331년 고다이고 천황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계획했으나 발각되어 오키 제도로 유배되었다. 고곤 천황이 즉위하고 고후시미 천황이 원정[58]을 실시했으나, 고다이고 천황은 퇴위를 거부하며 고곤 천황과 대립했다. 넓은 의미에서 이를 남북조 시대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1333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과 동맹을 맺고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면서 고곤 천황의 북조는 2년 만에 몰락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겐무 신정을 통해 천황 친정을 실시했으나, 지나치게 전통과 관습을 무시하고 개혁을 서둘렀으며, 무사 계급을 경시하여 많은 무사들의 불만을 샀다.[59] 결국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가마쿠라 막부 잔당인 호죠씨 토벌 후 고다이고 천황에게 반기를 들고 교토로 진군했다.[60] 1336년 고다이고 천황 군대를 격파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황도에 입성, 무로마치 막부를 세우고 숭무억문(崇武抑文)의 무사 정권을 수립했다.[61] 고다이고 천황은 삼종신기[62]를 가지고 교토를 탈출했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후시미 천황의 아들 유타히토 친왕을 고묘 천황으로 옹립했다. 이로써 무로마치 막부가 지지하는 교토의 북조와 고다이고 천황의 요시노 남조가 경쟁하는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3. 북조의 성립과 전개

1333년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을 일으켜 호조 가문의 가마쿠라 막부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새로 임명된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의 사촌이자 이전 천황인 고후시미 천황의 아들인 고곤 천황을 새로운 천황으로 선포했다. 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후 고곤 천황은 황위 계승권을 잃었지만, 그의 형제인 고묘 천황과 그의 두 아들은 새로운 아시카가 쇼군들에 의해 정당한 황위 계승자로 인정받았다.

1336년, 고다이고 천황의 군대를 격파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황도에 입성해 무로마치 막부를 세우며 숭무억문(崇武抑文)의 무사 정권을 수립하였다.[61] 고다이고 천황이 삼종신기[62]를 가지고 교토를 탈출하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후시미 천황의 아들 유타히토 친왕을 고묘 천황으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무로마치 막부가 지지하는 교토의 북조와 고다이고 천황이 이끄는 요시노의 남조가 각각 경쟁하는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북조는 아시카가 쇼군의 지배 아래 있어 실질적인 독립성이 거의 없었다. 무로마치 막부에게 북조는 막부의 권위를 보장하는 동시에 남조와의 전쟁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재원이 될 수 있는 존재였다. 북조는 사사본소령의 병량료소화를 받아들이는 대신 공가(公家)들의 소령을 안도시켰고, 막부는 그 대가로 즉위식 등 천황의 권위를 세우는 데 필요한 의식의 재원을 지원했다.

3. 1.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반란

1331년 고다이고 천황가마쿠라 막부 타도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오키 제도로 유배되었다. 고곤 천황이 즉위하고 고후시미 천황이 원정[58]을 실시했으나, 고다이고 천황은 퇴위를 거부하며 대립했다. 1333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자 고곤 천황의 북조는 2년 만에 몰락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겐무 신정을 통해 천황 친정을 실시했지만, 무사를 경시하여 많은 무사들의 불만을 샀다.[59]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호죠씨 토벌 후 고다이고 천황에 반란을 일으켜 교토로 진군했다.[60] 1336년 고다이고 천황 군대를 격파하고 황도에 입성, 무로마치 막부를 세우며 숭무억문의 무사 정권을 수립했다.[61] 고다이고 천황이 삼종신기[62]를 가지고 교토를 탈출하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후시미 천황의 아들 유타히토 친왕을 고묘 천황으로 옹립했다. 이로써 무로마치 막부가 지지하는 교토의 북조와 고다이고 천황의 요시노 남조가 경쟁하는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남북조 시대의 황궁 위치. 북조는 교토, 남조는 요시노에 위치했다.


가마쿠라 막부 붕괴와 함께 폐위되었던 지묘인통의 고곤 상황은 고다이고 천황군인 니타 요시사다를 토벌하라는 원선[20]을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주었다. 1336년 다카우지는 교토에 입성했고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정권은 붕괴되었다. 고곤 상황은 인정을 시작했고, 다카우지는 무가 정권 건설에 착수했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비에이산 연력사로 도망쳐 저항하였다. 고곤 상황은 다카우지의 요청으로 고토바 천황의 선례를 따라 동생인 도요히토 친왕(광명 천황)을 천황즉위시켰다.[21] 삼종 신기가 없는 상태에서 즉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강화가 성립된 후 고다이고 천황은 신기를 북조에 넘겨주었고, 광명 천황은 고다이고 천황에게 존호를 바쳤다. 같은 해 말, 무로마치 막부는 『겐무 시키모쿠』를 발표하여 무가 정권 성립을 선언했지만, 고다이고 상황은 교토를 탈출하여 남조를 성립시켜 대항하였다.

3. 2. 북조의 천황들

3. 3. 북조 내부의 갈등

1370년 고코곤 천황이 황태자에게 양위하려는 의사를 보이면서 황위 계승 분쟁이 발생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막부의 지지를 얻은 고엔유 천황이 즉위했지만, 스코 천황 역시 황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하고 대신 후시미궁을 창설하게 하는 등, 천황가 및 조정에서는 내부 분열이 치열하게 전개되기도 했다.[1]

명덕 3년(1392년), 남조의 고가메야마 천황(後亀山天皇)과의 화목이 성립되어 신기(神器)가 반환되었고(북조로부터 징수한 것인지, 남조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덕의 화약(明徳の和約)에 의해 남조가 북조에 흡수되는 형태로 남북조 통일(南北朝合一)이 실현되었다.[1] 그러나 고코마쓰 천황은 남조의 황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아시카가 요시미쓰와의 강화에서 결정된 양위(讓位)의 형태로 삼종신기의 도고(渡御)는 단순한 이동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요시미쓰가 강압적으로 결정한 고카메야마에 대한 존호 선하(尊號宣下)도 불즉위 천황에게 수여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1]

4. 남조의 저항과 쇠퇴

고다이고 천황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화친하여 삼종신기를 넘겨주었으나, 요시노로 가 남조 정권을 수립하고 북조에 넘겨준 삼종신기는 위조품이라고 선언했다.[63] 1351년 남조와 북조는 일시적으로 화약을 맺었지만,[63] 남조 군대가 교토를 공격하면서 깨졌다. 남조는 1353년1354년 등 여러 차례 교토를 점령했으나, 1362년 막부 군대에 의해 완전히 밀려났다.[63]

남조는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북조에 대한 정통성을 주장하며 저항했다. 그러나 북조는 막부의 추대를 받아 성립되었고, 군사적, 경제적으로 막부에 의존했기 때문에 남북조 통일 이후에도 막부가 실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1년 (메이지 44년) 남북조 정윤론을 수습하기 위해 메이지 천황의 칙재에 의해 남조가 정통으로 인정되었다. 이에 따라 메이지 이전까지 역대 천황으로 여겨졌던 북조의 천황들은 역대 천황에서 제외되었으나, 칭호와 제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전후에도 역대 천황의 계산 방식은 남조에 의존하지만, 남북 양쪽의 조정을 인정하는 것이 정설이다.

건무정권 붕괴 후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이 가진 삼종신기가 진짜이며, 북조에 넘긴 것은 가짜라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대일본사』에서는 남조를 정통으로 여겼고, 메이지 정부도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삼종신기의 진위 및 소재가 천황의 정통성과 연결된다는 생각과 남조가 진짜 삼종신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자체에 대해 예부터 이의가 제기되어 왔다.

남북조 시대 삼종신기의 이동을 도식화한 것

4. 1. 남조의 천황들



1392년, 고카메야마 천황아시카가 요시미쓰의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고코마쓰 천황에게 삼종신기를 넘겨주고 퇴위함으로써 남북조 시대는 막을 내렸다.[18]

4. 2. 남조의 저항과 한계

고다이고 천황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화친한 뒤 삼종신기를 넘겨주었으나, 요시노로 가 남조 정권을 수립하고 북조에 넘겨준 삼종신기는 위조품이라고 선언했다.[63] 1351년 남조와 북조는 일시적으로 화약을 맺었지만,[63] 남조 군대가 교토를 공격하면서 깨졌다. 남조는 1353년1354년 등 여러 차례 교토를 점령했으나, 1362년 막부 군대에 의해 완전히 밀려났다.[63]

남조는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북조에 대한 정통성을 주장하며 저항했다. 그러나 북조는 막부의 추대를 받아 성립되었고, 군사적, 경제적으로 막부에 의존했기 때문에 남북조 통일 이후에도 막부가 실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1년 (메이지 44년), 남북조 정윤론을 수습하기 위해 메이지 천황의 칙재에 의해 남조가 정통으로 인정되었다.[7] 이에 따라 메이지 이전까지 역대 천황으로 여겨졌던 북조의 천황들은 역대 천황에서 제외되었으나, 칭호와 제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전후에도 역대 천황의 계산 방식은 남조에 의존하지만, 남북 양쪽의 조정을 인정하는 것이 정설이다.

건무정권 붕괴 후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이 가진 삼종신기가 진짜이며, 북조에 넘긴 것은 가짜라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대일본사』에서는 남조를 정통으로 여겼고, 메이지 정부도 남조를 정통으로 여겼다. 그러나 삼종신기의 진위 여부 및 소재가 천황의 정통성과 연결된다는 생각과 남조가 진짜 삼종신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자체에 대해 예부터 이의가 제기되어 왔다.

5. 남북조 통일

1392년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중재로 남북조가 통일되었다. 요시미쓰는 남조에 평화적인 통일 방안을 제의했고,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교토로 상경하여 삼종신기고코마쓰 천황에게 양도하고 퇴위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북조는 약속을 어기고 고코마쓰 천황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고카메야마 천황은 요시노에서 다시 남조를 부활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8]

5. 1. 메이토쿠 화약(明徳の和約)

1392년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남조에 대해 평화적 통일 방안을 제의했다. 이는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이 교토로 상경해 삼종신기고코마쓰 천황에게 양도하고 퇴위하는 대신, 고카메야마 천황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즉, 황통을 북조와 남조가 번갈아가면서 계승하자는 의미였다.[31][32] 북조와의 대결에서 수세에 몰려 쇠퇴하고 있던 남조는 이 제안을 수락했다. 고카메야마 천황이 상경해 삼종신기를 건네줌으로써 60년에 이르는 남북조 내란은 종결되었고, 북조가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5. 2. 통일의 의미와 한계

1392년,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남조에 대해 평화적 통일 방안을 제의했다. 이는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교토로 상경해 삼종신기를 양도하고 퇴위하는 대신, 고카메야마 천황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는다는 내용이었다. 즉, 황통을 북조와 남조가 번갈아 계승하자는 것이었다.[8] 북조와의 대결에서 수세에 몰려 쇠퇴하고 있던 남조는 이 제안을 수락했다. 고카메야마 천황이 상경해 삼종신기를 건네줌으로써 60년에 걸친 남북조 내란은 종결되었고, 북조는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조는 남조와의 약속을 어기고 고코마쓰 천황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고카메야마 천황은 요시노에서 다시 남조를 부활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고카메야마 천황은 고코마쓰 천황과 10년 주기로 번갈아 즉위하기로 합의했지만, 고코마쓰 천황은 이 약속을 어기고 20년 동안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8]

6. 남북조 시대의 유산과 역사적 평가

무로마치 막부북조를 추대하여 정권을 수립했지만, 초기에는 정통성이 부족했다. 그러나 남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남북조 통일 이후 일본 황실은 모두 북조의 후예이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북조가 정통으로 인식되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제일주의가 강화되면서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역적으로 보는 견해가 나타났다. 이에 따라 일본제국 시절에는 공식적으로 남조가 정통으로 규정되었다.[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제국이 멸망하고 천황제일주의가 약화되자,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남북조 정통성 논쟁이 다시 심화되었다. 현재 일본에서는 천황의 대수는 남조를 기준으로 하지만, 정권 자체는 남북조 모두를 인정한다. 일본 황실에서는 남북조 천황 모두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7]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이 가진 삼종신기가 진짜이며, 북조에 넘긴 것은 가짜라고 주장했다. 『대일본사』와 메이지 정부는 이를 근거로 남조를 정통으로 보았지만, 삼종신기의 진위와 소재가 천황의 정통성과 연결된다는 생각, 그리고 남조가 진짜 삼종신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자체에 대해 예부터 이의가 제기되어 왔다.

에도 시대 중기 유학자 미야케 칸란(三宅観瀾)은 명분론으로 남조 정통을 주장하면서도 삼종신기로 인한 남조 정통론을 비판했다.[49] 메이지 시대 이후 타나카 요시나리(田中義成)는 "신기의 진위라는 설은 명료하지 않다. 그러므로 다만 신기의 소재를 가지고 정당하다고 하는 설은 학술적으로 가치가 없다"라고 일축했다.[50] 타키가와 마사지로(瀧川政次郎)도 키타바타케 친부(北畠親房) 이전에는 삼종신기의 소재를 황위의 소재로 하는 주장이 없었다며, "신기가 없다면 천황의 자리가 없다고 한다면, 신기가 자연재해로 소실되었을 때에는 일본국이 멸망한다는 어리석은 일이 된다"라고 비판했다.[51]

북조 초대 고겐 천황(光厳天皇)은 삼종신기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무라타 마사시(村田正志)는 삼종신기 없이 즉위했지만 이후 신기를 받은 고토바 천황(後鳥羽天皇)이나 고코마쓰 천황(後小松天皇)의 황위를 인정한다면, 북조 고겐 천황의 황위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2]

남조에 삼종신기가 있었다 해도, 고토바 천황이 삼종신기 없이 고시라카와 천황(後白河天皇)의 원선(院宣)으로 즉위(践祚)했고, 고겐 천황고메이 천황 모두 이에 준하므로, 고토바 천황이 역대에 포함되는데 유사한 북조 천황이 포함되지 않는 것은 모순이다. 무라타는 "만약 고메이 천황에게 봉납된 삼종신기가 가짜였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고다이고 천황 한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다. 신기가 사물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에 선다면, 고메이 천황에게 봉납된 신기가 가짜였다고 해도,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고메이 천황 이하 북조 천황의 황위를 물리고, 고다이고 천황 이하 남조 천황의 황위가 정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53]

이처럼 삼종신기의 진위나 소재를 근거로 한 남조 정통론은 부정되고 남북 양조 병립(南北両朝並立)의 입장이 채택되었으며, 이것이 통설이 되고 있다.

6. 1. 무가 정치의 강화

겐무 신정 이후, 고다이고 천황은 황위 계승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서 아시카가 쇼군에게 권력을 빼앗기게 되었다.[6] 이들은 1867년까지 일본을 통치했다.

고곤 천황 가계는 교토에 대항하는 황궁을 형성했는데, 경쟁 세력보다 북쪽에 위치하여 북조라고 불렸다.[6]

1396년(응영 3년) 숭광상황 만년에, 무로마치 막부가 후시미노미야령을 모두 빼앗아 후고마쓰 천황에게 헌상하려 한 배경에는 지명원통 내 황위를 둘러싼 알력이 있었다. 양 파의 대립은 쇼코 천황 요절로 인한 후광엄류 황통 단절을 넘어 후가에나 천황 대까지 이어졌다.

6. 2. 문화적 영향

남북조 시대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지만, 문화와 예술은 꾸준히 발전했다. 이 시기에는 렌가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가 등장하여 인기를 얻었다. 렌가는 여러 사람이 모여 앞 구절에 이어 뒷 구절을 지어가는 형식의 문학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또한, 선종(禪宗) 불교가 융성하여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종은 간결하고 직관적인 깨달음을 중시하는 불교의 한 종파로, 무사 계급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선종의 영향으로 다도와 수묵화 등 다양한 예술 분야가 발전했다.[49][50][51]

6. 3. 정통성 논쟁과 현대적 의의

무로마치 막부북조를 추대하면서 정통성이 부족했으나, 남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결국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남북조 통일 이후 일본 황실은 북조의 후예이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부터 북조가 정통으로 인식되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제일주의가 강화되면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천황을 몰아낸 역적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따라 일본제국 시절에는 공식적으로 남조가 정통으로 규정되었다.[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제국이 멸망하고 천황제일주의가 약화되면서,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남북조 정통성 논쟁이 다시 심화되었다. 현대 일본에서는 천황의 대수는 남조를 기준으로 하지만, 정권 자체는 남북조 모두를 인정하고 있다. 또한 일본 황실에서는 남북조 천황 모두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7]

고다이고 천황은 건무정권 붕괴 후 자신이 가진 삼종신기가 진짜이며, 북조의 고묘 천황에게 넘긴 것은 가짜라고 주장했다. 『대일본사』와 메이지 정부는 이를 근거로 남조를 정통으로 여겼지만, 삼종신기의 진위 여부 및 소재가 천황의 정통성과 연결된다는 생각, 남조가 진짜 삼종신기를 가졌다는 것 자체에 대해 예부터 이의가 제기되어 왔다.

에도 시대 중기 유학자 미야케 칸란(三宅観瀾)은 명분론으로 남조 정통을 주장하면서도 삼종신기로 인한 남조 정통론을 비판했다.[49] 메이지 시대 이후 타나카 요시나리(田中義成)는 "신기의 진위라는 설은 명료하지 않다. 그러므로 다만 신기의 소재를 가지고 정당하다고 하는 설은 학술적으로 가치가 없다"라고 일축했다.[50] 타키가와 마사지로(瀧川政次郎)도 키타바타케 친부(北畠親房) 이전에는 삼종신기의 소재를 황위의 소재로 하는 주장이 없었다며, "신기가 없다면 천황의 자리가 없다고 한다면, 신기가 자연재해로 소실되었을 때에는 일본국이 멸망한다는 어리석은 일이 된다"라고 비판했다.[51]

북조 초대 고겐 천황(光厳天皇)은 삼종신기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무라타 마사시(村田正志)는 삼종신기 없이 즉위했지만 이후 신기를 받은 고토바 천황(後鳥羽天皇)이나 고코마쓰 천황(後小松天皇)의 황위를 인정한다면, 북조 고겐 천황의 황위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52]

남조에 삼종신기가 있었다 해도, 고토바 천황이 삼종신기 없이 고시라카와 천황(後白河天皇)의 원선(院宣)으로 즉위(践祚)했고, 고겐 천황고메이 천황 모두 이에 준하므로, 고토바 천황이 역대에 포함되는데 유사한 북조 천황이 포함되지 않는 것은 모순이다. 무라타는 "만약 고메이 천황에게 봉납된 삼종신기가 가짜였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고다이고 천황 한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다. 신기가 사물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에 선다면, 고메이 천황에게 봉납된 신기가 가짜였다고 해도,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고메이 천황 이하 북조 천황의 황위를 물리고, 고다이고 천황 이하 남조 천황의 황위가 정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53]

이처럼 삼종신기의 진위나 소재를 근거로 한 남조 정통론은 부정되고 남북 양조 병립(南北両朝並立)의 입장이 채택되고 있으며, 이것이 통설이 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논쟁은 대한민국(민주당)의 관점에서 볼 때, 권위주의적 체제에 대한 비판과 민주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훈으로 이해될 수 있다.

6. 3. 1. 메이지 시대의 남조 정통론

메이지 시대 1911년 3월 3일 칙령에 따라, 이 시대의 정통 군주는 나라 근처 요시노로 망명하여 남조(南朝)를 세운 고무라카미 천황을 통해 고다이고 천황의 직계 후손으로 규정되었다.[8] 이는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현재 황통보에서는 메이지 정부의 결정을 따라 남조를 정통으로 보고 북조의 천황을 역대 천황으로 계승하지 않지만, 『본조황인소운록』 등 그 이전에는 북조 천황이 역대 천황으로 계승되었다. 일부 저서에서는 천황 계보에 본조황인소운록 식의 대수를 사용하기도 한다.

다음은 여러 저서에서 나타내는 북조 천황의 대수이다.

북조 천황황통보본조황인소운록운상명람속신황정통기비고
광엄천황북조 1대96대96대96대
광명천황북조 2대97대97대98대본조황인소운록에서는 고다이고 천황의 중조도 포함하여 1대로 하지만, 속신황정통기에서는 중조한 고다이고 천황을 97대 천황으로 하고, 그 다음 광명천황을 98대 천황으로 한다.
숭광천황북조 3대98대98대99대
고광엄천황북조 4대99대99대100대
고엔유 천황북조 5대100대100대101대
고코마쓰 천황100대101대101대102대


6. 3. 2. 현대 일본의 역사 인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남북조 정통성 논쟁이 다시 심화되었다. 현재는 남북조 모두를 정권으로 인정하고, 남조를 기준으로 천황의 대수를 세는 것이 일반적이다.[7]

1911년 3월 3일, 메이지 시대의 칙령으로 이 시대의 정통 군주는 요시노에 망명하여 남조(南朝)를 세운 고무라카미 천황을 통해 고다이고 천황의 직계 후손이라고 규정했다.[8]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남조의 후손인 구마자와 히로미치(熊澤弘道)는 자신이 일본의 정통 천황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히로히토 천황(裕仁天皇)이 사기꾼이며, 히로히토의 계보 전체가 북조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궁정모독죄(lèse majesté)로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황실 문장(Imperial Crest)을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지 않았으며, 요시노의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혈통을 상세히 기록한 호적(koseki)을 제시할 수 있었지만, 그의 주장과 주장은 동정심 이외에는 아무것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7]

에도 시대 중기의 유학자인 미야케 칸란(三宅観瀾)은 명분론(名分論)으로 남조 정통을 주장하면서도 삼종신기로 인한 남조 정통론을 비판했다.[49]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역사학으로부터 비판이 가해져, 타나카 요시나리(田中義成)는 "'''신기의 진위라는 설은 명료하지 않다. 그러므로 다만 신기의 소재를 가지고 정당하다고 하는 설은 학술적으로 가치가 없다'''"라고 일축했다.[50] 타키가와 마사지로(瀧川政次郎)도 삼종신기의 소재를 가지고 황위의 소재로 하는 주장은 키타바타케 친부(北畠親房) 이전에는 볼 수 없었다고 한 뒤, "신기가 없다면 천황의 자리가 없다고 한다면, '''신기가 자연재해로 소실되었을 때에는 일본국이 멸망한다는 어리석은 일이 된다'''"라고 했다.[51]

또한, 북조(北朝) 초대 고겐 천황(光厳天皇)은 삼종신기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무라타 마사시(村田正志)는 진짜 삼종신기의 유무라는 관점에서, 삼종신기 없이 즉위했지만 그 후 신기를 받은 고토바 천황(後鳥羽天皇)이나 고코마쓰 천황(後小松天皇)의 황위를 인정한다면, 북조의 고겐 천황의 황위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52]

만약 남조에 삼종신기가 있었다고 해도, 이미 고토바 천황(後鳥羽天皇)이 삼종신기 없이 고시라카와 천황(後白河天皇)의 원선(院宣)에 의해 즉위(践祚)했고, 고겐 천황(光厳天皇)과 고메이 천황(光明天皇) 모두 이에 준하고 있으므로, 고토바 천황이 역대에 포함되어 있는데, 유사한 북조 천황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모순이 생긴다. 무라타는 "만약 고메이 천황에게 봉납된 삼종신기가 가짜였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한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다. 신기가 사물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에 선다면, 고메이 천황에게 봉납된 신기가 가짜였다고 해도,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고메이 천황 이하 북조 천황의 황위를 물리고, 고다이고 천황 이하 남조 천황의 황위가 정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53]

이처럼 삼종신기의 진위나 소재를 근거로 한 남조 정통론은 부정되고 남북 양조 병립(南北両朝並立)의 입장이 채택되고 있으며, 이것이 통설이 되고 있다. 현재의 황통보에서는 메이지 정부의 결정을 따라 남조를 정통으로 보고 북조의 천황을 역대 천황으로 계승하지 않고 있지만, 『본조황인소운록』을 비롯하여 그 이전에는 북조 천황이 역대 천황으로 계승되었다.

북조 천황황통보본조황인소운록운상명람속신황정통기비고
광엄천황북조 1대96대96대96대
광명천황북조 2대97대97대98대본조황인소운록에서는 고다이고 천황의 중조도 포함하여 1대로 하지만, 속신황정통기에서는 중조한 고다이고 천황을 97대 천황으로 하고, 그 다음 광명천황을 98대 천황으로 한다.
숭광천황북조 3대98대98대99대
후광엄천황북조 4대99대99대100대
후엔유천황북조 5대100대100대101대
후고마쓰천황100대101대101대102대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archive.toda[...] 2012-05-24
[2] 서적 A Topical History of Japan https://books.google[...] UM Libraries
[3]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Embracing Defeat: Japan in the Wake of World War II https://archive.org/[...]
[8] 서적 Reconfiguring modernity: concepts of nature in Japanese political ideology https://books.google[...]
[9] 웹사이트 コトバンク 「光厳天皇」 https://kotobank.jp/[...] 2017-07-23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Jinnō Shōtōki
[16] 서적 Jinnō Shōtōki
[17]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8] 서적
[19] 간행물 대각사통 중, 목사궁(고이조천황 후예), 화정궁(고이조천황 후예), 상반정궁(거산천황 후예) 등은 남조 건립 이후에도 교토의 북조에 따랐다. 목사궁의 강인친왕은 북조 초대 광엄천황의 황태자가 되고, 화정궁의 방성친왕은 북조 3대 숭광천황의 황태자에 입후보하고 있어, 대각사통이 그대로 남조가 된 것은 아니다.
[20] 서적 光厳天皇
[21] 서적 光厳天皇
[22] 서적 南北朝史論
[23] 서적 南朝の真実
[24] 서적 南朝の真実
[25] 서적 光厳天皇
[26] 논문 貞和年間の公武徳政構想とその挫折―光厳上皇と足利直義の政治的関係から 日本史史料研究会企画部
[27] 서적 南北朝期公武関係史の研究
[28] 서적 新北朝の人と文学 三弥井書店
[29] 서적 室町期公武関係と南北朝内乱 吉川弘文館
[30] 서적 室町期公武関係と南北朝内乱 吉川弘文館
[31] 서적 乱世の天皇
[32] 서적 乱世の天皇
[33] 논문 伏見宮貞成親王の尊号宣下
[34] 서적 竹むきが記全注釈(ペーパーバック版) 笠間書院
[35] 서적 光厳院御集全釈
[36] 서적 南北朝史論
[37] 서적 図説 歴代天皇紀 秋田書店
[38] 서적 南北朝史論
[39] 서적 地獄を二度も見た天皇 光厳院
[40] 서적 地獄を二度も見た天皇 光厳院
[41] 서적 太平記の群像 南北朝を駆け抜けた人々
[42] 서적 南北朝史論
[43] 서적 南北朝史論
[44] 서적 地獄を二度も見た天皇 光厳院
[45] 서적 内乱のなかの貴族―園太暦の世界
[46] 서적 南北朝史論
[47] 서적 南北朝史論
[48] 서적 南北朝史論
[49] 서적 南北朝史論
[50] 서적 南北朝時代史
[51] 논문 南北朝を論ず
[52] 서적 南北朝史論
[53] 서적 南北朝史論
[54] 논문 安定的な皇位継承と南北朝正閏問題 : 明治天皇による「御歴代ニ関スル件」の「聖裁」とその歴史的影響
[55] 간행물 尋常小學日本歴史―教師用 https://nieropac.nie[...] 文部省
[56] 서적 室町・戦国天皇列伝
[57] 기타
[58] 기타
[59] 서적 하룻밤에 읽는 일본사 랜덤하우스
[60] 서적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김영사
[61] 뉴스 심훈 한림대 교수의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 - 사무라이 이야기Ⅰ- 태조 이성계의 재발견 http://www.segye.com[...]
[62] 기타
[63] 기타
[64] 기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