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림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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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림 핀인은 13세기부터 핀란드 동부와 러시아 간의 국경 분쟁으로 인해 발생하여, 스웨덴 국왕들의 영토 확보 정책에 따라 화전 농업을 하며 이주를 시작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로의 이주 과정에서 사미인, 카렐리안과의 갈등, 열악한 생활 환경, 강제 이주 등의 어려움을 겪었으며, 1823년에는 삼림 핀인들의 권익을 위한 청원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17세기 초 철강 산업의 발달로 화전 농업이 쇠퇴하고 동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18세기 말에는 대부분 스웨덴 주류 사회에 동화되었고 언어도 소멸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남아 있으며, 2022년에는 삼림 핀인을 위한 문화 깃발이 제정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민속 보존에 기여한 칼 악셀 고틀룬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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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림핀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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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그룹 | 삼림 핀인 |
인구 | |
거주 지역 | 노르웨이 스웨덴 |
언어 | 역사적으로 핀란드어 (베름란드 사보 방언) 현재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
종교 | 기독교 (루터교) |
민족적 관계 | |
관련 민족 | 핀족 |
2. 역사
삼림 핀인의 역사는 13세기 핀란드 동부 국경 지역에서 노브고로드 및 후일 러시아와의 분쟁과 관련하여 시작되었다. 스웨덴 국왕들, 특히 구스타브 바사(재위 1523년–1560년)와 에리크 14세(재위 1560년–1568년)는 영토 확보를 위해 인구가 희박한 동핀란드 황무지에 농민 정착을 장려했다. 이주민들은 전통적인 화전 농업 방식으로 땅을 개간했다.
정착 과정에서 사미인, 카렐리안과의 갈등 및 혹독한 변방 생활 등의 어려움이 있었고, 화전 농업의 특성상 지속적인 토지 이동이 필요했다. 16세기 말, 인구 과잉 문제로 인해 사보니아와 북부 타바스티아 지역에서 새로운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주민들은 스웨덴 북부와 동부, 잉그리아 등지로 흩어졌으며, 약 10~15%는 화전 농업에 적합한 땅을 찾아 발트해를 건너 스웨덴 본토와 이후 노르웨이로 향했다.[2]
1580년대부터 스웨덴 중부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17세기 초에는 덴마크-노르웨이 국경 인근까지 도달했다. 1620년대부터는 노르웨이 동부, 특히 스웨덴 국경과 가까운 삼림 지대인 '핀스코겐'(Finnskogen)에 집중적으로 정착했다. 이 지역에서는 1751년 국경이 확정되기 전까지 비교적 자유롭게 양국을 오갔다.
초기에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당국 모두 이주를 장려했으나, 17세기 중반 이후 철강 산업 발달로 목재 자원 확보가 중요해지면서 화전 농업이 제한받기 시작했다. 또한, 각국 정부는 동화 정책을 강화하여 핀란드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압력을 가했다. 1823년에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삼림 핀인 대표들이 스톡홀름으로 가 칼 14세 요한 국왕에게 핀란드어 사용 교구 설립을 청원하기도 했다.[3] 이후 사회 경제적 변화와 지속적인 동화 압력 속에서 삼림 핀인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은 점차 희미해졌다.
2. 1. 이주의 배경
삼림 핀인의 기원은 13세기 핀란드 동쪽 국경 지역에서 시작된 노브고로드(후일 러시아)와의 분쟁과 관련이 깊다. 당시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던 동핀란드는 인구가 희박하여 노브고로드와 러시아로부터 지속적인 위협을 받았다. 이에 구스타브 바사(1523–1560 재위)와 에릭 14세(1560–1568 재위) 등 스웨덴 국왕들은 영토 확보를 위해 농민들에게 동핀란드의 광활한 황무지 개간을 장려했다. 이주한 농민들은 전통적인 화전 농업 방식을 이용해 땅을 개척했다.
그러나 정착민들은 원주민인 사미인 및 카렐리안과의 갈등, 국경 지역의 불안정한 상황과 혹독한 생활 조건 등 여러 어려움에 부딪혔다. 또한, 화전 농업은 지속적인 경작지 이동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인구 밀도가 낮아야 유지될 수 있었다. 새로운 개척지가 부족해지면서 과잉 인구 문제가 발생했고, 결국 16세기 말부터 사보니아와 북부 타바스티아 지역에서 삼림 핀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주민들의 상당수는 북쪽의 오스트로보스니아와 카이누, 동쪽의 북부 카렐리아, 남쪽의 잉그리아(당시 스웨덴령, 현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약 10~15%의 이주민들은 화전 농업에 적합한 미개척지를 찾아 발트해를 건너 서쪽, 즉 스웨덴 본토로 향했다.
스웨덴 본토에서의 첫 삼림 핀인 정착은 1580년대와 1590년대 노를란드 지방의 예스트리클란드, 오게르만란드, 헬싱글란드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또 다른 이주 흐름은 메델파드에서 시작하여 17세기 초에는 달라르나, 베름란드, 달슬란드의 왕령지를 거쳐 당시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왕국과의 국경 지대에 이르렀다.[2]
결국 1620년대부터 삼림 핀인들은 노르웨이에도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헤드마르크, 오플란, 아케르스후스, 오슬로, 부스케루드 등 노르웨이 동부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특히 스웨덴 국경과 인접한 헤드마르크주의 숲이 우거진 동부 지역에 정착촌이 집중되었는데, 이 지역은 오늘날 노르웨이어로는 ''핀스코겐''(Finnskogen), 스웨덴어로는 ''핀스코그''(Finnskogarna, 문자 그대로 '핀란드인의 숲들')라고 불린다. 이 외딴 지역에서 삼림 핀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스웨덴과 노르웨이 국경을 넘나들었으며, 당시 양국의 국경은 1751년에 이르러서야 명확히 확정되었다.
1823년 4월에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삼림 핀인 대표 각 6명, 총 12명이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12인의 행진'(노르웨이어: Tolvmannamarsjen)을 감행했다. 이들은 노르웨이-스웨덴 국경 지역에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사제를 두고 독자적인 교구를 설립해 달라는 600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서를 전달했다. 같은 해 5월 4일, 이들은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 칼 14세 요한을 알현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전달했다.[3]
2. 2. 스웨덴과 노르웨이로의 이주
삼림 핀인의 이주는 13세기부터 이어진 핀란드 동부 국경 지역의 불안정성에서 비롯되었다. 동쪽의 노브고로드와 이후 러시아는 인구가 희박한 동핀란드의 스웨덴 주권을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이에 스웨덴의 구스타브 바사 (재위 1523–1560)와 에릭 14세 (재위 1560–1568) 등은 영토 확보를 위해 광활한 황무지에 농부들을 정착시키려 했고, 이들은 전통적인 화전 농업 방식을 사용했다.
이 정착민들은 사미인 및 카렐리안과의 갈등, 전쟁 시기 변방 지역의 혹독한 생활 환경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또한, 화전 농업 방식 자체가 낮은 인구 밀도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개척지를 계속 찾아야 했기 때문에, 16세기 말에는 사보니아(Savolax)와 북부 타바스티아(Tavastland)에서 인구 과잉 문제가 발생하며 삼림 핀인들의 강제 이주가 시작되었다.
삼림 핀인의 주요 이주 방향은 북쪽의 오스트로보스니아(Österbotten)와 카이누(Kajanaland), 동쪽의 북부 카렐리아(Karelen), 남쪽의 잉그리아(Ingermanland, 당시 스웨덴 영토, 현재 러시아 일부)였다. 그러나 약 10~15%는 그들의 농업 방식에 더 적합한,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을 찾아 발트해를 건너 서쪽으로 향했다.
스웨덴 본토에 삼림 핀인 정착지가 처음 생긴 것은 1580년대와 90년대로, 노를란드의 예스트리클란드, 옹에르만란드, 헬싱글란드 지역이었다. 또 다른 이주 경로는 메델파드에서 시작하여 17세기 초까지 달라르나, 베름란드, 달슬란드 지역의 왕령지를 거쳐 덴마크-노르웨이 국경 인근 지역까지 퍼져나갔다.[2]

결국 1620년대부터 삼림 핀인들은 노르웨이에도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헤드마르크, 오플란, 아케르스후스, 오슬로, 부스케루드의 동부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특히 정착지가 집중된 곳은 스웨덴 국경과 가까운 헤드마르크의 삼림 지대로, 오늘날 노르웨이어로는 ''핀스코겐''(Finnskogen), 스웨덴어로는 ''Finnskog[arna]'' (문자 그대로 "핀란드인의 숲")라고 불린다. 이 비교적 외진 지역에서 삼림 핀인들은 양국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는데, 국경 자체가 1751년까지 명확히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웨덴에서 삼림 핀인의 이주는 초기에 환영받았으며, 특히 칼 9세 (재위 1604–11)와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재위 1611–32) 국왕은 이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이는 왕국의 북부, 동부, 서부의 광활한 국경 지역에 인구를 정착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스웨덴으로 이주하는 핀란드 농부들에게는 7년간의 세금 면제와 넓고 비옥한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전망이 매력적인 유인책으로 작용했다.[2]

그러나 17세기 초, 초기 단계의 철강 산업이 성장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제련 과정에 필요한 목탄 생산이 중요해지면서, 삼림 핀인의 화전 농업은 귀중한 목재를 태워 없애 목탄 비용을 상승시키는 경제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1647년, 삼림 방화(화전)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핀인들은 인위적으로 낮은 가격에 목탄을 생산하여 제철소를 지원하도록 강요받았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삼림 핀인의 후손 상당수는 문화적으로 스웨덴 주류 사회에 동화되었다. 이전 두 세기 동안, 핀란드어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를 포함하여 삼림 핀인의 "스웨덴화"를 강제하기 위한 여러 법률과 규제가 시행되었다. 크리스티나 여왕 통치 시기인 1646년에는 프리크스달(Fryksdal)에서 스웨덴어를 배우려 하지 않는 모든 핀인들을 살해하고 집을 불태우라는 극단적인 포고령이 내려지기도 했다.[4] 18세기에는 핀란드어로 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투옥될 수 있었다.[5]
덴마크-노르웨이 연합(당시 노르웨이는 연합의 일부)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코펜하겐의 덴마크-노르웨이 당국은 초기에는 삼림 핀인의 호밀 생산량이 기존 노르웨이 농업에 비해 높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민과 화전 농업을 어느 정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7세기 중반부터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자, 1648년 프레데리크 3세 국왕은 "삼림 핀인에 관한 칙령"(노르웨이어: ''Forordning om skogfinner'')을 발표했다. 이는 삼림 핀인들에게 스웨덴으로 돌아가거나 노르웨이 원주민과 동일한 세금을 납부할 것을 요구하는 사실상의 최후통첩이었다.
1673년에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었음에도 이주는 계속되었고, 1686년 당국은 삼림 핀인 인구 조사(노르웨이어: ''Finnemanntallet'')를 실시했다. 이는 당시 노르웨이에서 가장 상세한 인구 조사 중 하나로, 남성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까지 포함했다. 이 조사는 현재까지 남아있어 당시 노르웨이로 이주한 삼림 핀인의 규모(총 1,225명, 핀란드-노르웨이 혼혈 160명 포함)와 대부분이 사보니아 출신 이민자들의 2~3세대 후손이었다는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1823년 4월, 스웨덴 삼림 핀인 6명과 노르웨이 삼림 핀인 6명이 수도 스톡홀름으로 여행하여 칼 14세 요한 국왕을 알현하는 사건이 있었다. "12명의 행진"(Tolvmannamarsjen)이라 불린 이 여정에서 그들은 노르웨이-스웨덴 국경 지역에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사제를 둔 독자적인 교구를 설립해달라는 600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서를 제출했다.[3]
이후 세기 동안 전통적인 화전 농업을 할 기회는 점차 줄어들었다. 목초지를 기반으로 한 농업 모델로의 전환, 교육 및 통신의 발달 등 사회 변화는 삼림 핀인의 생활 기반을 흔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축 사육이 생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목재 가치가 상승함에 따라 임업이 새로운 소득원이 되었다.
19세기에는 이러한 경제적 현실 변화로 인해 화전 농업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감소했다. 교육 시스템의 확립과 통신 발달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가속화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적응 압력과 경제적, 사회적 변화, 그리고 기존 스칸디나비아 인구와의 혼합은 결국 삼림 핀인으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을 점차 희미하게 만들었다.
2. 3. 정착과 갈등
삼림 핀인의 기원은 13세기부터 시작된 핀란드 동쪽 국경 분쟁과 관련이 있다. 당시 노브고로드와 이후 러시아는 인구가 희박한 동핀란드의 스웨덴 주권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이에 구스타브 바사(1523년–1560년 재위)와 에리크 14세(1560년–1568년 재위)를 비롯한 스웨덴 국왕들은 영토 확보를 위해 광활한 황무지에 농부들을 정착시키고자 했다. 이주민들은 전통적인 화전 농업 방식으로 땅을 개간했다.
그러나 이 정착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주민들은 사미인 및 카렐리안과의 갈등, 전쟁 시기 변방 지역의 혹독한 생활 조건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또한, 화전 농업은 비교적 낮은 인구 밀도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개척지를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기 때문에, 기존 정착지에서는 곧 인구 과잉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16세기 말, 사보니아(Savolax)와 북부 타바스티아(Tavastland)에서 삼림 핀인들이 강제 이주되기 시작했다.
삼림 핀인들은 여러 방향으로 이주했다. 주요 이주 경로는 북쪽의 오스트로보스니아(Österbotten)와 카이누, 동쪽의 북부 카렐리아(Karelen), 남쪽의 잉그리아(당시 스웨덴령, 현재 러시아령)였다. 그러나 약 10~15%는 그들의 농업 방식에 더 적합한,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을 찾아 발트해를 건너 서쪽으로 향했다.
스웨덴 본토에 삼림 핀인 정착지가 처음 건설된 것은 1580년대와 90년대 노를란드의 예스트리클란드, 오게르만란드, 헬싱글란드 지역이었다. 또 다른 이주 물결은 메델파드에서 시작되어 17세기 초까지 달라르나, 베름란드, 달슬란드 지역의 왕령지를 거쳐 덴마크-노르웨이 국경 인근 지역까지 도달했다.[2]
결국 1620년대부터 삼림 핀인들은 노르웨이에도 정착하기 시작했다. 주로 헤드마르크, 오플란, 아케르스후스, 오슬로, 부스케루드의 동부 지역에 정착했다. 특히 정착지가 집중된 곳은 스웨덴 국경과 가까운 헤드마르크의 삼림 지대로, 오늘날 노르웨이어로는 Finnskogen|핀스코겐nob, 스웨덴어로는 Finnskog[arna]|핀스코그[아르나]swe (문자 그대로 "핀란드인의 숲")라고 불린다. 이 비교적 외진 지역에서 삼림 핀인들은 두 나라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는데, 당시 두 나라의 국경은 1751년까지 명확히 확정되지 않았다.
1823년 4월,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삼림 핀인 대표 각 6명씩 총 12명이 수도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Tolvmannamarsjen|톨브만나마르셴nob (12명의 행진)이라는 길을 떠났다. 이들은 노르웨이-스웨덴 국경 지역에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사제를 둔 자체 교구를 설립해달라는 600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서를 칼 14세 요한 국왕에게 전달하고, 5월 4일 국왕을 알현했다.[3]
스웨덴에서는 초기에 삼림 핀인의 이주를 환영하고 장려했다. 특히 칼 9세(1604년–1611년 재위)와 구스타브 2세 아돌프(1611년–1632년 재위)는 왕국의 광활한 북부, 동부, 서부 국경 지역에 인구를 채우기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스웨덴으로 이주하는 핀란드 농부들에게는 7년간의 세금 면제와 비옥한 토지 소유의 기회 같은 혜택을 제공했다.[2]
그러나 17세기 초, 원시적이지만 성장하던 철강 산업으로 인해 상황이 변했다. 제련에 필수적인 목탄 수요가 늘어나면서, 삼림 핀인의 화전 농업은 귀중한 목재를 태워 없애 목탄 비용을 상승시키는 경제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1647년에는 삼림 방화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핀인들은 인위적으로 낮은 가격에 목탄을 생산하여 철강 공장을 지원하도록 강요당했다.
덴마크-노르웨이(당시 노르웨이는 연합 왕국의 일부)에서도 상황도 비슷했다. 초기 코펜하겐의 덴마크-노르웨이 당국은 삼림 핀인의 높은 호밀 생산량을 고려하여 이민과 화전 농업을 선호했다. 하지만 17세기 중반부터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제기되자, 1648년 프레데리크 3세 국왕은 Forordning om skogfinner|삼림 핀인에 관한 칙령nob을 발표했는데, 이는 삼림 핀인들에게 스웨덴으로 돌아가거나 노르웨이 원주민과 동일한 세금을 납부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 것이었다.
1673년 새로운 법률에도 불구하고 이주가 계속되자, 1686년 당국은 Finnemanntallet|핀네만탈레nob라는 삼림 핀인 인구 조사를 함으로써 대응했다. 이는 당시 노르웨이에서 가장 상세한 인구 조사 중 하나였으며, 남성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까지 포함했다. 이 조사는 현재까지 남아있어 당시 노르웨이로 이주한 삼림 핀인의 규모(총 1,225명, 핀란드-노르웨이 혼혈 160명 포함)를 파악하는 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조사 대상 대부분은 사보니아 출신 이민자들의 2세대 또는 3세대 후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삼림 핀인들은 점차 스웨덴과 노르웨이 주류 사회에 문화 동화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 동안, 핀란드어 사용을 금지하는 것을 포함하여 삼림 핀인의 "스웨덴화" 또는 "노르웨이화"를 강제하는 여러 법률과 규정이 시행되었다. 크리스티나 여왕 통치 시기인 1646년에는 프리크스달 백 개회에서 스웨덴어를 배우려 하지 않는 모든 핀인들을 죽이고 집을 불태우라는 포고령이 내려지기도 했다.[4] 18세기에는 핀란드어로 쓰인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투옥될 수도 있었다.[5]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전통적인 화전 농업의 기회는 점차 줄어들었다. 목초지 기반 농업 모델이 강조되고, 교육 및 통신이 발달하는 등 사회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삼림 핀인의 고유한 생활 방식은 점차 입지가 좁아졌다. 음식용 가축 및 기타 가축 사육이 생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목재 가치가 상승함에 따라 임업이 새로운 경제 활동으로 떠올랐다.
19세기에는 경제 현실의 변화, 교육 시스템 확립, 통신 발달 등으로 인해 화전 농업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줄어들었다. 장기간에 걸친 적응 압력과 경제적, 사회적 변화, 그리고 기존 스칸디나비아 인구와의 혼합은 결국 삼림 핀인으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을 점차 희미해지게 만들었다.
2. 4. 동화와 소멸
스웨덴에서 삼림 핀인의 이주는 처음에는 환영받았으며, 특히 칼 9세(1604–1611 재위)와 구스타브 2세 아돌프(1611–1632 재위) 국왕에 의해 주도되고 장려되었다. 이들은 왕국의 북부, 동부, 서부의 광활한 국경 지역에 인구를 정착시키고자 했다. 스웨덴으로 이주하는 핀란드 농부들에게는 7년간의 세금 전액 면제와 비옥한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전망 등이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2]
그러나 17세기 초, 원시적이지만 성장하던 철강 산업이 발달하면서 상황은 변했다. 제련 과정에 필요한 목탄을 생산하기 위해 많은 나무가 필요했는데, 삼림 핀인의 화전 농업 방식은 귀중한 목재를 태워 없애 목탄 비용을 상승시키는 경제적 위협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결국 1647년에는 삼림 방화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핀인들은 인위적으로 낮은 가격에 목탄을 생산하여 철강 공장을 지원해야만 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삼림 핀인의 후손 상당수는 문화적으로 스웨덴 주류 인구에 문화 동화되었다. 이전 두 세기 동안, 핀란드어 사용을 완전히 금지하는 것을 포함하여 삼림 핀인의 "스웨덴화" 과정을 가속화하기 위한 다양한 법률과 규정이 통과되었다.
크리스티나 여왕의 통치 기간인 1646년, 프리크스달 백 개회에서는 스웨덴어를 배우려 하지 않는 모든 핀인들을 살해하고 집을 불태우라는 포고령이 발표되기도 했다.[4] 또한 18세기에는 핀란드어로 쓰인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투옥될 수 있었다.[5]
덴마크-노르웨이(당시 노르웨이는 연합의 일부)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코펜하겐의 덴마크-노르웨이 당국은 처음에는 삼림 핀인의 비교적 높은 호밀 생산량을 고려하여 이민과 화전 농업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 지역 주민들이 새로운 이주민들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1648년 프레데리크 3세 국왕은 "삼림 핀인에 관한 칙령"(노르웨이어: ''Forordning om skogfinner'')을 발표했다. 이는 스웨덴으로 돌아가거나 노르웨이 원주민과 동일한 세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이었다.
1673년 새로운 법률에도 불구하고 이주가 계속되자, 1686년 당국은 삼림 핀인 인구 조사(노르웨이어: ''Finnemanntallet'')를 실시했다. 이는 당시 노르웨이에서 가장 상세한 인구 조사 중 하나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까지 포함했다. 1686년 인구 조사는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총 1,225명(핀란드-노르웨이 혼혈 160명 포함)의 삼림 핀인이 기록되어 당시 노르웨이로의 이주 규모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들 대부분은 사보니아에서 온 이민자들의 2세대 또는 3세대 후손이었다.
다음 세기 동안, 삼림 핀인들의 전통적인 화전 농업 기회는 점차 줄어들었다. 목초지 기반 농업 모델로의 전환, 교육 및 통신의 발달 등 사회적 변화는 삼림 핀인의 생활 방식의 기반을 흔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축 사육이 생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목재 가치가 상승함에 따라 임업이 삼림 핀인과 다른 주민 모두에게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19세기에는 새로운 경제 현실 속에서 화전 농업에 대한 의존도가 서서히 감소했다. 교육 시스템 구축과 통신 발달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가속화했다. 사회에 적응하라는 장기적인 압력과 경제적, 사회적 변화, 그리고 기존 스칸디나비아 인구와의 혼합은 결국 삼림 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칼 악셀 고틀룬드(1796–1875)는 핀란드의 주요 민족 각성가 중 한 명으로, 삼림 핀인의 민속을 보존하고 그들 사이에서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려 노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핀란드 계몽주의 사상가였던 아버지 마티아스 고틀룬드의 영향 아래 합리주의적 이상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1805년부터 사보니아의 유바에 거주하며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이웃들 속에서 핀란드화되었다.
고틀룬드는 삼림 핀인을 연구하기 위해 두 차례 여행했는데, 첫 번째는 1817년 달라르나로, 두 번째는 1820–1821년 베름란드로의 더 긴 여정이었다. 그는 민속 자료와 민족지학적 자료, 조상 정보를 수집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삼림 핀인의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고 스웨덴의 토지 소유를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는 19세기 초 중앙 스칸디나비아에 약 4만 명의 핀인이 있었고, 이 중 약 14,000명이 베름란드에 거주했다고 추정했다.
고틀룬드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은 이상주의적이었다. 그는 스웨덴-노르웨이 국경 양쪽의 핀 숲 지역에 강력한 경제적, 정치적 독립을 가진 "페니아(Fennia)"라는 자치 지역을 만들고자 했다. 이 계획에는 세금 경계 철폐, 스웨덴인과 노르웨이인의 토지 소유 제한, 철 공장 폐쇄 등이 포함되었으며, 스스로는 계획된 핀란드 교구의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은 실패했고, 고틀룬드 자신은 스톡홀름에서 웁살라로 추방되었다.[7]
이러한 정치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고틀룬드는 삼림 핀인에게 긍정적인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삼림 핀인을 위한 세 개의 교회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삼림 핀인 사이에서 전설적이고 영웅적인 인물로 기억되었다.

오늘날 삼림 핀인은 노르웨이와 스웨덴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었으며, 그들의 언어인 핀란드어는 소멸되었다. 스웨덴에서 마지막으로 핀란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삼림 핀인은 요하네스 요한손-오이노이넨(니타혼 유시, 1965년 사망)과 칼 페르손(1969년 사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림 핀인의 문화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그들이 정착했던 지역에는 핀란드 기원을 나타내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이는 미국의 델라웨어 계곡에서도 마찬가지인데,[10] 펜실베이니아주 모턴은 미국 독립 선언 서명자이자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존 모턴의 아들 이름을 딴 것이다. 존 모턴은 핀란드 라우탈람피 출신 이민자 마르티 마르티넨(영어식 이름 모턴)의 후손이다. 노르웨이 그루에 자치구에서는 지명의 4분의 1 이상이 여전히 핀란드어이다.[11]
오늘날 노르웨이에서 소수 민족으로 인정받는 삼림 핀인은[12] 스칸디나비아의 다른 핀란드계 집단, 즉 스웨덴-핀란드 국경 지역의 토르네달리안, 노르웨이 북부 트롬스 및 핀마르크 카운티의 크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웨덴으로 이주한 핀인들과는 구별되는 별개의 집단이다. 하지만 이들 집단은 모두 핀란드 민족성을 공유한다.
삼림 핀인의 후손들은 여전히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살고 있다.[13]
3.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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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언어
"삼림 핀인"이라는 용어는 1648년 덴마크-노르웨이 국왕이 발효한 제재 조치에서 처음 보고되었지만, 그들(적어도 노르웨이 지역에서는) 더 일반적으로 '''Savolaksfinner|사볼락스핀네르swe'''(''사보니아 핀인''), 주요 작물에서 유래된 '''Rugfinner|루그핀네르swe'''(''호밀 핀인'') 또는 특히 '''Svedjefinner|스베디에핀네르swe'''(''화전 핀인'')으로 알려졌다. 사람들 스스로는 종종 '''Finnskoginger|핀스코깅게르swe'''(''핀인의 숲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3. 2. 농업 방식
삼림 핀인은 전통적인 화전 농업(Svedjebruk)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주요 작물인 호밀에서 유래한 '호밀 핀인'(Rugfinnerswe) 또는 농업 방식 자체를 가리키는 '화전 핀인'(Svedjefinnerswe)으로 불리기도 했다. 스스로는 '핀인의 숲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의 Finnskogingerswe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초기 삼림 핀인의 이주는 스웨덴 왕국의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6세기 구스타브 바사 국왕(재위 1523–1560)과 에릭 14세 국왕(재위 1560–1568)은 동쪽 국경 지대의 광활한 황무지를 개간하고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핀란드 농부들의 정착을 장려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화전 농업 방식을 이용하여 땅을 개간했다. 특히 칼 9세(재위 1604–1611)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재위 1611–1632) 국왕 시대에는 스웨덴 북부, 동부, 서부의 넓은 국경 지역에 인구를 늘리기 위해 삼림 핀인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장려했다. 스웨덴으로 이주하는 핀란드 농부들에게는 7년간의 세금 면제와 넓고 비옥한 땅을 소유할 수 있다는 전망이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2]
화전 농업은 특성상 비교적 낮은 인구 밀도를 유지하거나 지속적으로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이동해야 했다. 이로 인해 16세기 말에는 인구 과잉 문제가 발생했고, 사보니아(Savolax)와 북부 타바스티아(Tavastland)에서 삼림 핀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초, 스웨덴에서 원시적이지만 성장하던 철강 산업이 발달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제련 과정에 필요한 목탄 수요가 증가하자, 삼림 핀인의 화전 농업은 귀중한 목재를 태워 없애 목탄 비용을 상승시키는 경제적 위협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결국 1647년 스웨덴에서는 삼림 방화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삼림 핀인들은 인위적으로 낮은 가격에 목탄을 생산하여 철강 공장을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덴마크-노르웨이 연합(당시 노르웨이는 연합의 일부)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있었다. 초기 코펜하겐의 덴마크-노르웨이 당국은 삼림 핀인의 높은 호밀 생산량을 고려하여 그들의 이민과 화전 농업을 어느 정도 선호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7세기 중반부터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커졌고, 1648년 프레데리크 3세 국왕은 "삼림 핀인에 관한 칙령"(Forordning om skogfinnernor)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삼림 핀인들에게 스웨덴으로 돌아가거나 노르웨이 원주민과 동일한 세금을 납부하라는 최후통첩이었다.
이후 세기에 걸쳐 전통적인 화전 농업을 할 기회는 점차 줄어들었다. 목초지를 기반으로 한 농업 모델이 강조되고, 교육 및 통신이 발달하는 등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삼림 핀인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은 변화의 압력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음식용 가축 및 기타 가축 사육이 점차 생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또한 목재의 가치가 상승함에 따라, 임업이 삼림 핀인을 포함한 지역 주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중요한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19세기에는 새로운 경제 현실 속에서 화전 농업에 대한 의존도가 서서히 감소했다. 교육 시스템의 구축과 통신의 발달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가속화했다. 장기적인 적응 압력, 경제적 및 사회적 변화, 그리고 기존 스칸디나비아 인구와의 혼합은 결국 삼림 핀인 고유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3. 3. 민속 문화
스웨덴에서는 삼림 핀인의 이주가 초기에는 환영받았으며, 특히 칼 9세(1604–1611 재위)와 구스타브 2세 아돌프(1611–1632 재위) 왕이 주도하고 장려했다. 이는 왕국의 넓은 국경 지역에 인구를 정착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스웨덴으로 이주하는 핀란드 농민들에게는 7년간의 세금 면제와 비옥한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전망이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2]
그러나 17세기 초, 철강 산업이 성장하면서 상황이 변화했다. 제련 과정에 필요한 목탄 수요가 증가하자, 화전 농업을 하는 삼림 핀인은 귀중한 목재를 태워 목탄 비용을 상승시키는 경제적 위협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1647년에는 삼림 방화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핀인들은 인위적으로 낮은 가격에 목탄을 공급하여 제철소를 지원해야 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삼림 핀인의 후손 상당수는 문화적으로 스웨덴 주류 인구에 문화 동화되었다. 이전 두 세기 동안, 핀란드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삼림 핀인의 "스웨덴화" 과정을 가속화하기 위한 다양한 법률과 규제가 시행되었다. 크리스티나 여왕 통치 시기인 1646년 프리크스달에서는 스웨덴어를 배우려 하지 않는 모든 핀인을 처형하고 집을 불태우라는 포고령이 발표되기도 했다.[4] 18세기에는 핀란드어로 쓰인 책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투옥될 수 있었다.[5]
덴마크-노르웨이(당시 노르웨이는 연합의 일부)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코펜하겐의 당국은 초기에는 삼림 핀인의 비교적 높은 호밀 생산량을 고려하여 이민과 화전 농업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제기되었고, 1648년 프레데리크 3세 왕은 "삼림 핀인에 관한 칙령"(Forordning om skogfinner|포로르드닝 옴 스코그핀네르no)을 발표하여, 스웨덴으로 돌아가거나 노르웨이 원주민과 동일한 세금을 납부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1673년 새로운 법률에도 불구하고 이주가 계속되자, 1686년 당국은 삼림 핀인 인구 조사(Finnemanntallet|핀네만탈레트no)를 실시했다. 이 조사는 당시 노르웨이에서 가장 상세한 인구 조사 중 하나로 여겨지며, 남성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까지 포함했다. 1686년 인구 조사 기록은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총 1,225명(핀란드계-노르웨이계 혼혈 160명 포함)의 삼림 핀인 인구가 집계되어 당시 노르웨이로의 이주 규모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들 대부분은 사보니아에서 온 이민자들의 2세대 또는 3세대 후손이었다.
이후 세기 동안, 전통적인 화전 농업의 기회는 점차 줄어들었다. 목초지 기반 농업 모델로의 전환, 교육 및 통신 개선 등 사회적 발전은 삼림 핀인의 생활 방식 기반을 변화시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축 사육이 생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목재 가치가 상승함에 따라 임업이 삼림 핀인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19세기에는 이러한 경제적 현실 변화로 인해 화전 농업에 대한 의존도가 서서히 감소했다. 교육 시스템 구축과 통신 발달은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했으며, 장기적인 적응 압력과 기존 스칸디나비아 인구와의 혼합은 결국 삼림 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칼 악셀 고틀룬드(1796–1875)는 핀란드의 주요 민족 각성가 중 한 명으로, 삼림 핀인의 민속을 보존하고 그들 사이에서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려 노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고틀룬드는 핀란드 계몽주의 사상가 중 한 명인 마티아스 고틀룬드의 아들로 태어나 계몽주의 정신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가족은 1805년부터 사보니아의 유바에 거주했으며,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어머니 때문에 가정에서는 스웨덴어를 사용했지만,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이웃 환경 속에서 어린 칼 악셀은 핀란드화되었다.
고틀룬드는 삼림 핀인을 연구하기 위해 두 차례 여행을 떠났는데, 첫 번째는 1817년 달라르나로, 두 번째는 1820–1821년 베름란드로의 더 긴 여행이었다. 그는 민속 자료와 민족지학적 자료를 수집했으며, 조상에 대한 정보도 조사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삼림 핀인의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고 스웨덴의 토지 소유를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는 19세기 초 중앙 스칸디나비아에 약 4만 명의 핀인이 있었고, 이 중 약 14,000명이 베름란드에 거주했다고 추정했다.
삼림 핀인을 위한 그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은 이상주의적이었다. 그는 스웨덴-노르웨이 국경 양쪽의 핀 숲 지역에 강력한 경제적, 정치적 독립을 갖는 "페니아(Fennia)"라는 자치 지역 창설을 구상했다. 이 계획에는 세금 경계 제거, 스웨덴인과 노르웨이인의 토지 소유 제한, 철 공장 폐쇄 등이 포함되었으며, 스스로는 계획된 핀란드 교구의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은 실패했고, 고틀룬드 자신은 스톡홀름에서 웁살라로 추방되었다.[7]
이러한 정치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고틀룬드는 삼림 핀인에게 긍정적인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삼림 핀인을 위한 세 개의 교회를 설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삼림 핀인 사이에서 전설적이고 영웅적인 인물로 기억되었다.


삼림 핀인의 문화적 깃발은 2022년 12월 29일에 채택되었으며, 노르웨이 부부 프레데릭 M. 린드보와 베티나 굴하겐이 디자인했다. 이 깃발은 2021년 여름에 열린 삼림 핀인 공식 문화 깃발 디자인 공모전을 통해 선정되었으며, 수백 개의 제안이 접수되었다.[14] 현재 깃발의 초안이 처음 선정되었을 때는 노란색과 녹색 사이의 빨간색 테두리가 없었으나, 채택 전에 깃발 위원회에서 추가했다.[15]
깃발은 녹색 바탕에 빨간색 테두리가 있는 노란색 북유럽 십자 디자인이다. 십자 중앙은 오래된 삼림 핀인 정착지에서 발견되는 전통적인 다산의 상징에서 파생된 검은색 마름모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십자의 비율과 배치는 스웨덴의 국기와 동일하며, 십자에서 빨간색과 노란색의 상대적인 두께 비율(1:2)은 노르웨이의 국기와 일치하여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삼림 핀인을 나타낸다.
깃발의 색상은 각각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녹색은 삼림 핀인의 화전 문화에서 숲의 중요성을, 빨간색은 불과 신성한 산사나무를, 노란색은 화전 농업으로 얻는 호밀을, 검은색은 화전의 그을음을 나타낸다. 이 색 구성표는 삼림 핀인의 기원지인 사보니아와 타바스티아의 핀란드 지역 깃발과도 일치하도록 의도되었다.[16]
이 깃발은 1823년의 "톨브마나마르센" 200주년을 기념하여 2023년 5월 4일, 오슬로 시청에서 정부 깃대에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게양되었다.[17]
4. 현대의 삼림 핀인
17세기 초, 스웨덴에서 원시적이지만 성장하던 철강 산업이 발달하면서 삼림 핀인에 대한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 제련 과정에는 목탄이 필수적이었는데, 화전 농업을 하는 삼림 핀인이 가치 있는 목재를 태워 목탄 비용을 상승시키는 경제적 위협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결국 1647년 스웨덴에서는 삼림 방화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삼림 핀인들은 낮은 가격에 목탄을 공급하여 철강 공장을 지원해야만 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삼림 핀인의 후손 상당수는 문화적으로 스웨덴 주류 인구에 문화 동화되기 시작했다. 이전 두 세기 동안 스웨덴 당국은 핀란드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삼림 핀인의 "스웨덴화"를 가속하기 위한 여러 법률과 규정을 시행했다. 특히 크리스티나 여왕 통치 시기인 1646년에는 프리크스달 백 개회에서 스웨덴어를 배우지 않으려는 모든 핀인들을 살해하고 집을 불태우라는 포고령까지 발표되었다.[4] 18세기에는 핀란드어로 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투옥될 수 있었다.[5]
덴마크-노르웨이 연합(당시 노르웨이는 연합의 일부)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초기 코펜하겐의 덴마크-노르웨이 당국은 삼림 핀인의 높은 호밀 생산량을 고려하여 이민과 화전 농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중반부터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커졌고, 1648년 프레데리크 3세 국왕은 "삼림 핀인에 관한 칙령"(Forordning om skogfinnernor)을 발표하여 스웨덴으로 돌아가거나 노르웨이 원주민과 동일한 세금을 내도록 요구했다.
1673년 새로운 법률에도 불구하고 이주는 계속되었고, 1686년 당국은 삼림 핀인 인구 조사(Finnemanntalletnor)를 실시했다. 이 조사는 당시 노르웨이에서 가장 상세한 인구 조사 중 하나로, 남성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까지 포함하여 총 1,225명(핀란드-노르웨이 혼혈 160명 포함)의 삼림 핀인 인구를 기록했다. 이들 대부분은 사보니아에서 온 이민자들의 2세대 또는 3세대 후손이었다.
이후 세기 동안 전통적인 화전 농업의 기회는 점차 줄어들었다. 목초지 기반 농업 모델이 강조되고 교육 및 통신이 발달하는 등 사회 변화가 가속화되면서 삼림 핀인의 생활 방식은 변화를 맞이했다. 가축 사육이 생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목재 가치가 상승하면서 임업이 새로운 주요 산업으로 떠올랐다.
19세기에는 새로운 경제 현실 속에서 화전 농업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감소했다. 교육 시스템 구축과 통신 발달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촉진했다. 장기간에 걸친 적응 압력, 경제적·사회적 변화, 그리고 기존 스칸디나비아 인구와의 혼합의 영향은 삼림 핀인 고유의 정체성을 점차 희미하게 만들었다.
4. 1. 문화적 유산
오늘날 삼림 핀인은 노르웨이와 스웨덴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었으며, 그들의 언어는 소멸되었다. 스웨덴에서 유창하게 핀란드어를 구사했던 마지막 삼림 핀인은 요하네스 요한손-오이노이넨(일명 니타혼 유시, 1965년 사망)과 칼 페르손(1969년 사망)이었다.
그러나 삼림 핀인의 문화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다양한 정도로 살아 있으며, 그들이 정착했던 다양한 지역의 핀란드 기원을 기념하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미국의 델라웨어 계곡도 포함되는데,[10] 펜실베이니아주 모턴, 델라웨어 카운티는 존 모턴의 아들 스케치리 모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존 모턴은 미국 독립 선언의 서명자이자 미국 독립 혁명 기간 동안 대륙 회의 대표로 활동하며 연합 규약을 작성한 위원회의 의장을 역임한 인물로,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는 핀란드 라우탈람피에서 이민 온 마르티 마르티넨(영어식 이름은 모턴)의 후손이다. 노르웨이 그루에 자치구에서는 지명의 4분의 1 이상이 여전히 핀란드어이다.[11]
오늘날 노르웨이에서 소수 민족으로 정의되는 삼림 핀인은[12] 스칸디나비아의 다른 핀란드계 집단, 즉 스웨덴-핀란드 국경 지역의 토르네달리안, 노르웨이 북부 트롬스 및 핀마르크 카운티의 크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웨덴으로 이주한 핀인들과는 다른 별개의 집단이다. 그러나 이들 집단은 모두 핀란드 민족성을 공유한다.
삼림 핀인의 후손들은 여전히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살고 있다.[13]
삼림 핀인의 문화적 깃발은 2022년 12월 29일에 채택되었으며, 노르웨이 부부 프레데릭 M. 린드보와 베티나 굴하겐이 디자인했다. 이 깃발은 삼림 핀인을 위한 공식적인 문화 깃발을 채택하기 위한 깃발 디자인 공모전의 일환으로 디자인되었다. 이 공모전은 2021년 여름에 개최되었으며 수백 개의 제안을 받았다.[14] 현재 깃발의 초안이 처음 선정되었을 때, 노란색과 녹색 사이의 빨간색 테두리가 없었지만, 채택 전에 깃발 위원회에서 나중에 추가했다.[15]
이 깃발은 녹색 바탕에 빨간색 테두리가 있는 노란색 북유럽 십자 디자인이다. 십자 중앙은 전통적인 삼림 핀인의 다산의 상징에서 파생된 검은색 마름모 모양으로 변형되었으며, 이는 오래된 삼림 핀인 정착지에서 발견된다. 십자의 비율과 배치는 스웨덴의 국기와 동일하다. 십자에서 빨간색과 노란색의 상대적인 두께는 1:2이며, 이는 노르웨이의 국기와 일치한다. 이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삼림 핀인을 나타낸다.
깃발의 색상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색 구성표는 또한 삼림 핀인이 기원한 사보니아와 타바스티아의 핀란드 지역의 깃발과 일치하도록 의도되었다.[16]
이 깃발은 2023년 5월 4일, 오슬로 시청에서 정부 깃대에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게양되었다. 이는 1823년의 "톨브마나마르센" 2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17]
4. 2. 소수 민족으로서의 인정
오늘날 삼림 핀인은 노르웨이와 스웨덴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었고, 그들의 언어는 사라졌다. 스웨덴에서 핀란드어를 유창하게 사용했던 마지막 삼림 핀인으로는 요하네스 요한손-오이노이넨(1965년 사망)과 칼 페르손(1969년 사망)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삼림 핀인의 문화는 노르웨이와 스웨덴 곳곳에 남아 있으며, 이들이 정착했던 지역에는 핀란드계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미국 델라웨어 계곡 지역도 마찬가지이다.[10] 예를 들어, 펜실베이니아주 모턴은 미국 독립 선언 서명자이자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존 모턴의 후손 이름을 딴 것이다. 존 모턴 자신도 핀란드 라우탈람피에서 이주한 삼림 핀인의 후손이었다. 또한 노르웨이 그루에 자치구에서는 지명의 4분의 1 이상이 여전히 핀란드어에서 유래했다.[11]
현재 노르웨이에서는 삼림 핀인을 공식적인 소수 민족으로 인정하고 있다.[12] 이들은 스칸디나비아의 다른 핀란드계 집단, 예를 들어 스웨덴-핀란드 국경 지역의 토르네달리안, 노르웨이 북부 트롬스 및 핀마르크 지역의 크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웨덴으로 이주한 핀란드인들과는 구분되는 별개의 집단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 핀란드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다.
삼림 핀인의 후손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거주하고 있다.[13]
5. 주요 인물
칼 악셀 고틀룬드(1796–1875)는 핀란드의 주요 민족 각성가 중 한 명으로, 삼림 핀인의 민속을 보존하고 그들 사이에서 민족 의식을 일깨우려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7]
고틀룬드는 핀란드 계몽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성직자 마티아스 고틀룬드의 아들로 태어나 계몽주의 정신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사고방식은 합리주의적인 계몽주의 이상에 기반을 두었다. 1805년부터 가족과 함께 사보니아의 유바에 거주했으며, 어머니는 스웨덴어를 사용했지만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핀란드화되었다.[7]
그는 삼림 핀인을 연구하고 돕기 위해 두 차례 여행을 떠났다. 첫 번째는 1817년 달라르나로, 두 번째는 1820년부터 1821년까지 베름란드로 떠난 더 긴 여정이었다. 이 여행들을 통해 그는 민속 자료와 민족지학적 자료를 수집했으며, 조상에 대한 정보도 모았다. 이는 삼림 핀인의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고 스웨덴이 그들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는 19세기 초 중앙 스칸디나비아에 약 4만 명의 핀인이 있었고, 이 중 약 14,000명이 베름란드에 거주했다고 추정했다.[7]
고틀룬드는 삼림 핀인을 위해 이상적인 사회 정치적 활동을 펼쳤다. 그는 스웨덴-노르웨이 국경 양쪽의 핀란드 숲 지역에 강력한 경제적, 정치적 독립을 갖춘 '페니아(Fennia)'라는 자치 지역 설립을 구상했다. 이 구상에는 세금 경계 철폐, 스웨덴인과 노르웨이인의 토지 소유 제한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철 공장 폐쇄를 주장했으며, 스스로 계획된 핀란드 교구의 목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고틀룬드 자신은 스톡홀름에서 웁살라로 추방당하는 처지가 되었다.[7]
이러한 정치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고틀룬드는 삼림 핀인에게 긍정적인 문화적 영향을 남겼다. 그는 삼림 핀인을 위해 세 개의 교회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삼림 핀인들 사이에서 전설적이고 영웅적인 인물로 기억되었다.[7]
참조
[1]
웹사이트
Skogfinner har nå fått eget flagg
https://www.nrk.no/t[...]
2022-12-30
[2]
서적
Medieval Scandinavia: from Conversion to Reformation, Circa 800–1500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6-02-28
[3]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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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ogfinner har nå fått eget fla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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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är är skogsfinska flaggan: En ny symbol för samhörighet och urspr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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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sk da flagget til skogfinnene ble heist for første 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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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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