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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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프로이센은 비스툴라 강 하류, 발트 해 연안, 그리고 주변 지역을 포괄하는 역사적 지역으로, 현재는 폴란드에 속한다. 지형은 비스툴라 강과 발트 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발트 고지, 헬 반도, 비스툴라 삼각주 등의 특징을 갖는다. 1466년 폴란드 왕령으로 편입된 후,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로 프로이센 왕국에 병합되었다. 프로이센은 이 지역의 인프라를 정비하고 독일화 정책을 추진했으며,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대부분의 영토가 폴란드에 할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폴란드에 완전히 편입되었고, 독일인들은 추방되었다. 1910년 인구는 약 170만 명이었으며, 독일어 사용자가 다수를 차지했지만 폴란드어와 카슈브어 사용 인구도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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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로이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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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서프로이센 |
위치 | 폴란드 |
수도 | 마리엔베르더 (1773년–1793년, 1806년–1813년), 단치히 (1793년–1806년, 1813년–1919년) |
언어 | 독일어, 폴란드어 등 |
데모님 | 서프로이센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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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프로이센 |
역사 | |
존속 기간 | 1773년–1829년, 1878년–1919년 |
주요 사건 | 나폴레옹에 의한 분할 (1806년) 빈 회의에 의해 복원 (1815년) 프로이센 주로 통합 (1824년–1878년) 베르사유 조약 (1919년) |
이전 국가 | 왕령 프로이센 바르샤바 공국 단치히 자유시 (나폴레옹 시대) 프로이센 주 |
이후 국가 | 바르샤바 공국 단치히 자유시 (나폴레옹 시대) 프로이센 주 포모제 주 (1919년–1939년) 단치히 자유시 서프로이센 (지역)서프로이센 지역 포젠-서프로이센 |
인구 통계 | |
면적 (1910년) | 25,534 km2 |
인구 (1910년) | 1,703,474 명 |
행정 구역 | |
하위 구역 | 단치히 (지역), 마리엔베르더 (지역) |
기타 | |
현재 국가 | 폴란드 |
국가 | 프로이센 |
주 | 프로이센 주 |
속주 | 서프로이센 |
노래 | 베스트프로이센리트 "서프로이센의 노래" (1878년–1919년) |
2. 지리
서프러시아는 비스툴라 강(독일어: Weichsel, 폴란드어: Wisła) 하류와 발트 해 연안, 그리고 서쪽과 동쪽의 인접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2. 1. 지형
서프로이센의 지형은 비스툴라 강(독일어: Weichsel, 폴란드어: Wisła) 하류와 발트 해 연안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서쪽으로는 브란덴부르크 동부와 접경을 이루었고, (포제넨 주)와 폼머란 주 사이의 땅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발트 고지가 특징이며, 남쪽으로 흐르는 강들이 노테치 강(독일어: Netze)에 합류했다. 브르다 강(독일어: Brahe)은 이 지역의 많은 부분을 배수하며, 비드고슈치(독일어: Bromberg)를 통과한 후 비스툴라 강에 합류한다. 투홀라 숲을 포함한 많은 넓은 삼림 지대가 이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북쪽으로 바다 근처에는 카슈비 호수 지대가 있으며, 이곳에는 서프러시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비제이차(독일어: Turmberg)가 해발 329미터에 달한다. 스우피아 강(독일어: Stolpe)과 웨바 강(독일어: Leba)과 같은 폼머란 강의 발원지는 이 고지대에 위치한다.
북쪽에는 발트 해 연안이 있었는데, 헬 반도가 그단스크 만으로 35킬로미터나 뻗어 있는 완만한 해안선과 비스툴라 습지가 있었다. 비스툴라 삼각주는 약 2,000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경작지로 대부분이 해수면보다 낮았다. 이 지역의 가장 큰 도시인 그단스크(독일어: Danzig)는 삼각주의 북서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비스툴라 강의 지류인 노가트 강은 말보르크(독일어: Marienburg)를 지나 북동쪽으로 흘러 비스툴라 석호로 들어간다. 엘블롱크(독일어: Elbing) 근처 동쪽에서는 동프러시아와의 경계가 비스툴라 사주, 비스툴라 석호 및 엘블롱크 고지를 가로지른다.
남동쪽에는 비스툴라 강의 흐름이 넓고 평평한 평야를 형성하고 있으며, 인접한 절벽은 강 계곡보다 60미터 이상 높은 곳도 있다. 이 지역에는 비옥한 헤우우므노 땅(독일어: Kulmerland)이 있으며, 헤우우므노(독일어: Kulm), 토룬(독일어: Thorn), 그루드용츠(독일어: Graudenz)와 같은 역사적인 도시들이 있다. 헤우우므노 땅은 동쪽으로 동프러시아와의 경계까지 뻗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부분적으로 드뷴차 강(독일어: Drewenz)의 흐름에 의해 경계를 이루며, 이 강은 폴란드 입헌 왕국과 러시아 제국과의 서프러시아 남동쪽 경계를 형성하는 일부였다.
2. 2. 해안
서프로이센의 해안은 발트 해 연안으로, 완만한 해안선을 가지고 있었다. 헬 반도는 그단스크 만으로 35킬로미터나 뻗어 있었고, 비스툴라 강이 바다와 만나는 비스툴라 습지가 있었다. 비스툴라 삼각주는 약 2,000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경작지로 대부분이 해수면보다 낮았다. 이 지역의 가장 큰 도시인 그단스크(독일어: Danzig)는 삼각주의 북서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노가트 강은 말보르크(독일어: Marienburg)를 지나 북동쪽으로 흘러 비스툴라 석호로 들어간다. 엘블롱크(독일어: Elbing) 근처 동쪽에서는 동프러시아와의 경계가 비스툴라 사주, 비스툴라 석호 및 엘블롱크 고지를 가로지른다.2. 3. 수계
서프로이센의 수계는 비스툴라 강 하류와 발트 해 연안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비스툴라 강의 지류인 노가트 강은 말보르크(독일어: Marienburg)를 지나 북동쪽으로 흘러 비스툴라 석호로 들어간다. 엘블롱크(독일어: Elbing) 근처 동쪽에서는 동프러시아 주와의 경계가 비스툴라 사주, 비스툴라 석호 및 엘블롱크 고지를 가로지른다.
북쪽의 발트 해 연안은 헬 반도가 그단스크 만으로 35km 뻗어 있는 완만한 해안선을 이루며, 비스툴라 강이 바다와 만나는 비스툴라 습지가 있다. 비스툴라 삼각주는 약 2,000 제곱킬로미터의 경작지로 대부분 해수면보다 낮으며, 그단스크(독일어: Danzig)가 삼각주 북서쪽 끝에 위치한다.
서쪽에는 발트 고지가 있으며, 남쪽으로 흐르는 강들이 노테치 강(독일어: Netze)에 합류한다. 브르다 강(독일어: Brahe)은 비드고슈치(독일어: Bromberg)를 통과하여 비스툴라 강에 합류하며, 투홀라 숲을 포함한 넓은 삼림 지대가 이 지역에 있다. 카슈비 호수 지대에는 서프로이센 최고봉인 비제이차(독일어: Turmberg)가 해발 329m에 달하며, 스우피아 강(독일어: Stolpe)과 웨바 강(독일어: Leba)의 발원지가 있다.
남동쪽에는 비스툴라 강의 넓고 평평한 평야가 펼쳐져 있고, 인접한 절벽은 강 계곡보다 60m 이상 높다. 비옥한 헤우우므노 땅(독일어: Kulmerland)에는 헤우우므노(독일어: Kulm), 토룬(독일어: Thorn), 그루드용츠(독일어: Graudenz) 등의 도시가 있으며, 동쪽으로 동프러시아, 남쪽으로는 드뷴차 강(독일어: Drewenz)을 통해 폴란드 입헌 왕국 및 러시아 제국과 경계를 이룬다.
2. 4. 남동부 지역
남동쪽에는 비스툴라 강(독일어: Weichsel, 폴란드어: Wisła)의 흐름이 넓고 평평한 평야를 형성하고 있으며, 인접한 절벽은 강 계곡보다 60미터 이상 높은 곳도 있다. 이 지역에는 비옥한 헤우우므노 땅(독일어: Kulmerland)이 있으며, 헤우우므노(독일어: Kulm), 토룬(독일어: Thorn), 그루드용츠(독일어: Graudenz)와 같은 역사적인 도시들이 있다. 헤우우므노 땅은 동쪽으로 동프러시아와의 경계까지 뻗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부분적으로 드뷴차 강(독일어: Drewenz)의 흐름에 의해 경계를 이루며, 이 강은 폴란드 입헌 왕국과 러시아 제국과의 서프러시아 남동쪽 경계를 형성하는 일부였다.3. 역사
1454년-1466년 13년 전쟁 동안, 포메라니아 도시 연맹과 서프로이센(프로이센 동맹)은 독일 기사단에 대항하여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4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27] 1466년 제2차 토룬 조약으로 포메라니아와 서프로이센은 왕령 프로이센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특히 그단스크(단치히)를 비롯한 서프로이센 도시들은 특별한 권리를 부여받았다.[27] 왕령 프로이센은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일부가 되었고, 원주민인 프로이센인들의 자치를 유지했다. 한편 동프로이센은 제1차 토룬 조약에서 폴란드의 속령이 되었지만, 독일 기사단 소유지로 남게 되었다.[27] 이 지역은 1525년 프로이센 공국의 영토가 되었고, 1657년 브롬베르크 조약으로 폴란드의 종주권이 제거되었다.[27]
왕령 프로이센의 대부분은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에서 프로이센 왕국에 병합되었고, 이듬해 옛 왕령 프로이센 지역 중 바르미아를 제외한 지역이 서프로이센 주가 되었으며 바르미아는 동프로이센 주의 일부가 되었다.[27]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는 새로운 영토의 인프라 정비를 신속하게 추진했고, 폴란드식 행정과 법 체계는 프로이센식으로 개정되었으며, 교육 수준이 향상되었다.[27] 1772년부터 1775년 사이에 750개의 학교가 세워졌으며[27], 서프로이센에서는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사 모두가 강의를 했다. 교사와 행정관은 독일어와 폴란드어에 능통한 것이 권장되었고, 그들은 후계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폴란드어를 사용하도록 지도했다.[27] 그러한 관습은 프리드리히 3세가 빌헬름 2세에게 폴란드어를 배우지 않도록 결정할 때까지 호엔촐레른가에 의해 계속되었다.[27]
프리드리히 2세는 새로 프로이센 영토에 들어온 시민들을 낮게 보았고, 폴란드 귀족 계급인 슈라흐타에 대해서도 경멸적인 감정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폴란드 정부는 오스만 제국을 제외하면 유럽에서 최악이다"라고 적었다.[28] 프리드리히 2세는 서프로이센을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캐나다만큼 야만적이라고 적었으며,[29] 폴란드인을 북아메리카 원주민 이로쿼이족과 동일시했다.[28] 그의 동생 하인리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 지역에 대해 "경제적, 정치적 관점에서 매우 훌륭하고 유리한 획득이었다. 다만, 모든 사람을 질투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말하자면, 내가 여러 번 내 눈으로 본 것은, 넓게 펼쳐진 모래, 소나무, 황야, 그리고 유대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이 많다. 질서도 계획성도 없고, 도시는 형편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라고 적혀 있다.[30]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인 이주민을 초청하여 지역 재개발을 촉진했고,[30] 그들이 폴란드인을 대체하기를 바랐다.[31] 많은 독일인 공무원들도 폴란드인을 경멸했다.[29]
1793년 제2차 폴란드 분할에서 더 이상 독립할 힘을 잃은 한자 동맹 도시 그단스크(단치히)는 토룬과 함께 프로이센 왕국의 서프로이센 주에 편입되었다. 원래 대폴란드 지역의 일부로, 1772년 분할에서 병합되어 네체 지역이 된 영토도 이때 서프로이센에 편입되었다.
1807년부터 1813년까지의 나폴레옹 전쟁 중에는 나폴레옹에 의해 서프로이센 남부가 바르샤바 공국의 구성 지역이 되었지만, 1815년 프로이센 왕국에 의해 회복되었고, 그단스크(독일 행정구역)과 마리엔베르더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다. 1824년부터 1878년까지 서프로이센은 동프로이센과 합쳐져 프로이센 주가 되었지만, 그 후 다시 동서로 나뉘었다. 1871년 독일 통일로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독일 패전 후인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서프로이센 영토의 대부분(폴란드 회랑)이 폴란드 제2공화국에 할양되었고, 단치히는 국제 연맹 관할 하의 "자유 도시"가 되었다. 서프로이센의 서쪽과 동쪽의 아주 적은 지역이 바이마르 공화국 독일의 영토로 남았고, 서쪽은 1922년 포젠-서프로이센 주가 되었고, 동쪽은 동프로이센 주 서프로이센 현의 일부가 되었다.
나치 독일 정권 하에서는 이 지역이 단치히-서프로이센 제국 관구에 포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의 말기 전장이 되었고, 붉은 군대가 침공함에 따라 많은 프로이센 독일인들이 서쪽으로 도망쳤다. 1945년 포츠담 협정에 의해 이 지역 전체가 폴란드에 편입되었고, 이 지역에 남아 있던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서쪽으로 추방되었다. 그들의 집을 포함한 모든 재산은 약탈되었고, 그들이 떠난 지역에는 폴란드인들이 이주해왔다.
많은 독일 시민들이 소련의 보르쿠타 등에 있던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어 많은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했다고 보고되었다. 1949년 그러한 난민들이 서프로이센인 대표로 서독(독일 연방 공화국)에서 비영리 단체인 서프로이센향우회를 설립했다.
3. 1. 중세 시대
1454년-1466년 13년 전쟁이 2차 토룬 조약으로 끝나면서, 폼렐리아와 헬름노 땅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이 폴란드에 의해 회복되었고, 이전 구 프로이센인 영토인 포메사니아, 포게사니아, 바르미아의 일부가 추가되어 왕립 프로이센이 형성되었다.[1] 이 지역은 초기에는 자체적인 지방 의회인 프로이센 지방 의회를 가지고 자체 법률, 관습, 권리를 유지하는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1569년 루블린 연합 이후 결국 폴란드 왕국 왕관에 직접 흡수되었다.[2]

사회 계급에 따라 언어 사용이 달랐는데, 귀족과 도시 시민들은 초기에는 이전 튜턴 기사단 정책의 결과로 독일화가 매우 심했지만, 후대에 점차 폴란드화되었고, 농민들은 주로 카슈브어와 폴란드어를 사용했다.[2] 폼렐리아 서부의 작은 지역인 라우엔부르크와 뷔토프 땅은 1637년 폴란드에 재통합되기 전에 폴란드의 봉토로 폴란드 포메라니아 통치자에게 주어졌고, 나중에 다시 폴란드의 봉토가 되어 폴란드 1차 분할까지 그 상태를 유지했다.
3. 1. 1. 왕립 프로이센 시대 (1466년-1772년)
1454년-1466년 13년 전쟁이 2차 토룬 조약으로 끝나면서, 폼렐리아와 헬름노 땅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이 폴란드에 의해 회복되었고, 이전 구 프로이센인 영토인 포메사니아, 포게사니아, 바르미아의 일부가 추가되어 왕립 프로이센이 형성되었다.[1] 이 지역은 초기에는 자체적인 지방 의회인 프로이센 지방 의회를 가지고 자체 법률, 관습, 권리를 유지하는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1569년 루블린 연합 이후 결국 폴란드 왕국 왕관에 직접 흡수되었다.[2]사회 계급에 따라 언어 사용이 달랐는데, 귀족과 도시 시민들은 초기에는 이전 튜턴 기사단 정책의 결과로 독일화가 매우 심했지만, 후대에 점차 폴란드화되었고, 농민들은 주로 카슈브어와 폴란드어를 사용했다.[2] 폼렐리아 서부의 작은 지역인 라우엔부르크와 뷔토프 땅은 1637년 폴란드에 재통합되기 전에 폴란드의 봉토로 폴란드 포메라니아 통치자에게 주어졌고, 나중에 다시 폴란드의 봉토가 되어 폴란드 1차 분할까지 그 상태를 유지했다.
3. 2. 근세: 프로이센의 부상과 폴란드 분할
1618년, 쾨니히스베르크 주변의 동프로이센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과 인적 동군 연합으로 통치되었다. 호엔촐레른 가문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통치자들은 1657년 벨라우 조약을 통해 러시아-스웨덴 대홍수를 이용하여 폴란드의 종주권을 제거하였다.[3]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에서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폴란드 왕립 프로이센 대부분을 합병하여 포메라니아 주와 동프로이센 사이의 육로 연결을 확보하고, 폴란드의 발트해 접근을 차단했다.[27] 1793년 제2차 폴란드 분할에서는 단치히(Gdańsk)와 토룬(Toruń)을 포함한 더 많은 폴란드 지역이 프로이센에 합병되었다. 분할 세임은 1773년 9월 30일에 이 양도를 비준했고, 폴란드 국왕이 프로이센에 대한 왕위를 포기했다.[27]
폴란드의 행정 및 법률 체계는 프로이센 체계로 대체되었고, 1772년부터 1775년까지 750개의 학교가 세워졌다.[4][27]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 교사 모두가 가르쳤고, 교사와 관리들은 독일어와 폴란드어 모두를 구사할 수 있도록 장려되었다.[4][27] 프리드리히 2세는 또한 후계자들에게 폴란드어를 배우도록 권고했는데, 이 정책은 프리드리히 3세가 빌헬름 2세에게 폴란드어를 배우게 하지 않기로 결정할 때까지 호엔촐레른 왕조에 의해 이어졌다.[4][27]
프리드리히 2세는 폴란드인을 "더럽고 비열한 원숭이"[5]로 칭하고, 이로쿼이족과 비교하는 등[6][28] 폄하했으며, 폴란드는 "오스만 제국을 제외하고 유럽에서 최악의 정부"를 가지고 있다고 썼다.[6][28] 그는 서프로이센을 식민지 시대 캐나다보다 문명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6][29]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의 재개발을 위해 독일 이민자들을 초청했다.[4][9][30] 많은 독일 관리들 또한 폴란드인들을 경멸했다.[7][29]
3. 3. 근대: 나폴레옹 전쟁과 독일 통일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에 패배하고 틸지트 조약이 체결된 후, 서프로이센은 토룬과 헤움노(쿨름) 근처의 남부 영토를 바르샤바 공국에 할양해야 했으며, 단치히는 1807년부터 1814년까지 자유 도시가 되었다. 1815년 빈 회의의 결의에 따라 단치히, 쿨름, 토룬은 서프로이센에 반환되었고, 1772년에 합병된 그레이터 폴란드 지역 중 네체 지구를 형성했던 일부 지역도 서프로이센에 추가되었다.비엔나 의회는 해체된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 명목상 지도 아래 39개의 독일어 사용 국가의 연합체인 독일 연방을 설립했다. 라우엔부르크-뷔토프 지역과 이전 드라이하임 스타로스트보를 제외한 프로이센 영토는 연방 밖에 남았다.
1815년에 서프로이센 주는 행정적으로 단치히와 마리엔베르더로 세분되었다. 1829년부터 1878년까지 서프로이센은 동프로이센과 결합하여 프로이센 주를 형성한 후 다시 별개의 주로 재설립되었다. 1840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국왕은 폴란드어를 주요 언어로 사용하는 지역의 학교에서 폴란드어 교육을 재개하는 등 폴란드 신민들과 화해를 시도했다.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이 지역은 점점 더 공격적인 독일화 노력의 표적이 되었다. 독일화 조치에는 정부 계약에서 민족 독일인 우대, 투자 계획 및 공급 계약에서 민족 독일인 승진, 폴란드 영토의 독일 장인들에게 도시에서 최고의 위치 제공, 군인들의 폴란드 상점 구매 금지, 독일 상인들의 폴란드 영토 정착 장려, 폴란드인이 거주하는 지방에 정착하는 독일 관리와 서기에게 세금 감면 및 유리한 재정적 조치 제안 등이 있었다.[13]
1871년 독일 통일 당시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 제국의 가장 크고 지배적인 부분이었다.
3. 4.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 독일화 정책
19세기 후반,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서프로이센 지역은 독일화 정책의 표적이 되었다. 호엔촐레른 가문은 이 지역에서 독일인 정착, 반가톨릭 운동(문화투쟁), 폴란드인 참정권 박탈 및 재산 몰수 등을 추진했다.[13][23]독일화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13]
- 정부 계약에서 민족 독일인이 우대받았고, 폴란드인은 계약을 따낼 수 없었다.[13]
- 민족 독일인들은 투자 계획과 공급 계약에서도 승진했다.[13]
- 폴란드 영토의 독일 장인들은 당국으로부터 도시에서 최고의 위치를 받아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고 번창할 수 있었다.[13]
- 군인들은 체포의 위협 아래 폴란드 상점이나 폴란드인으로부터 물건을 사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받았다.[13]
- 독일 상인들은 폴란드 영토에 정착하도록 장려되었다.[13]
- 폴란드인이 거주하는 지방에 정착하는 경우 독일 관리와 서기에게 세금 감면 및 유리한 재정적 조치가 제안되었다.[13]
1871년 독일 통일 당시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 제국의 전신인 북독일 연방에서 가장 크고 지배적인 부분이었다. 1910년 독일 인구 조사에 따르면 서프로이센 인구는 1,703,474명이었으며, 그중 약 64%가 모국어를 독일어로, 28%가 폴란드어로, 7%가 카슈브어로 기록했다. 폴란드 학자들에 따르면 폴란드인과 카슈브인의 실제 비율은 43%였지만, 많은 수가 프로이센 인구 조사 담당자들에 의해 가톨릭 독일인으로 집계되었다.[23]

1454년부터 1466년까지 일어난 13년 전쟁 동안, 포메라니아 도시 연맹과 서프로이센(프로이센 동맹)은 독일 기사단에 대항하여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4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466년 제2차 토룬 조약으로 포메라니아와 서프로이센은 왕령 프로이센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특히 그단스크(단치히)를 비롯한 서프로이센 도시들은 특별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왕령 프로이센은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일부가 되었고, 원주민인 프로이센인들의 자치를 유지했다. 한편 동프로이센은 제1차 토룬 조약에서 폴란드의 속령이 되었지만, 독일 기사단 소유지로 남게 되었다. 이 지역은 1525년 프로이센 공국의 영토가 되었고, 1657년 브롬베르크 조약으로 폴란드의 종주권이 제거되었다.
왕령 프로이센의 대부분은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에서 프로이센 왕국에 병합되었고, 이듬해 옛 왕령 프로이센 지역 중 바르미아(Varmia)를 제외한 지역이 서프로이센 주가 되었으며 바르미아는 동프로이센 주의 일부가 되었다.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는 새로운 영토의 인프라 정비를 신속하게 추진했고, 폴란드식 행정과 법 체계는 프로이센식으로 개정되었으며, 교육 수준이 향상되었다. 1772년부터 1775년 사이에 750개의 학교가 세워졌으며[27], 서프로이센에서는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사 모두가 강의를 했다. 교사와 행정관은 독일어와 폴란드어에 능통한 것이 권장되었고, 그들은 후계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폴란드어를 사용하도록 지도했다. 그러한 관습은 프리드리히 3세가 빌헬름 2세에게 폴란드어를 배우지 않도록 결정할 때까지 호엔촐레른가에 의해 계속되었다.[27]
프리드리히 2세는 새로 프로이센 영토에 들어온 시민들을 낮게 보았고, 폴란드 귀족 계급인 슈라흐타에 대해서도 경멸적인 감정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폴란드 정부는 오스만 제국을 제외하면 유럽에서 최악이다"라고 적었다.[28] 프리드리히 2세는 서프로이센을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캐나다만큼 야만적이라고 적었으며,[29] 폴란드인을 북아메리카 원주민 이로쿼이족과 동일시했다.[28] 그의 동생 하인리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 지역에 대해 "경제적, 정치적 관점에서 매우 훌륭하고 유리한 획득이었다. 다만, 모든 사람을 질투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말하자면, 내가 여러 번 내 눈으로 본 것은, 넓게 펼쳐진 모래, 소나무, 황야, 그리고 유대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이 많다. 질서도 계획성도 없고, 도시는 형편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라고 적혀 있다.[30]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인 이주민을 초청하여 지역 재개발을 촉진했고,[30] 그들이 폴란드인을 대체하기를 바랐다.[31] 많은 독일인 공무원들도 폴란드인을 경멸했다.[29]
1793년 제2차 폴란드 분할에서 더 이상 독립할 힘을 잃은 한자 동맹 도시 그단스크(단치히)는 토룬과 함께 프로이센 왕국의 서프로이센 주에 편입되었다. 원래 대폴란드 지역의 일부로, 1772년 분할에서 병합되어 네체(Netze) 지역이 된 영토도 이때 서프로이센에 편입되었다.
1807년부터 1813년까지의 나폴레옹 전쟁 중에는 나폴레옹에 의해 서프로이센 남부가 바르샤바 공국의 구성 지역이 되었지만, 1815년 프로이센 왕국에 의해 회복되었고, 그단스크(독일 행정구역)과 마리엔베르더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다. 1824년부터 1878년까지 서프로이센은 동프로이센과 합쳐져 프로이센 주가 되었지만, 그 후 다시 동서로 나뉘었다.
3. 5.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1910년 당시 서프로이센 주민의 36%에서 43%는 폴란드계 폴란드인이었다.[23]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이후, 전쟁 전 서프로이센 영토의 대부분(62%)과 인구(57%, 대부분 폴란드인)는 폴란드 제2공화국 또는 단치히 자유시(영토의 8%, 인구의 19%)에 할양되었고, 이전 주의 서부(영토의 18%, 인구의 9%)와 동부(영토의 12%, 인구의 15%)는 바이마르 독일에 남았다.[14] 서부 잔여 지역은 1922년 그렌츠마르크 포제니아-서프로이센이 되었고, 동부 잔여 지역은 레기어룽스베치르크 서프로이센 내 동프로이센의 일부가 되었다.1920년 동프로이센 주민투표는 "마리엔베르더 주민투표 지역"으로 알려진 서프로이센 동부에서도 실시되었는데, 이 지역에는 마리엔베르더, 슈툼, 로젠베르크, 마리엔부르크 군이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포함되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92.4%의 압도적인 다수로 독일에 남는 것을 찬성했다.[15]
서프로이센 | 1910년 면적 (km2) | 영토 비율 | 1910년 인구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소속 | 참고 |
---|---|---|---|---|---|
할양됨: | 25,580 km2 [16] | 100% | 1,703,474 | 분할됨: | |
폴란드 | 15,900 km2 [16] | 62% [17] | 57% [17] | 폼메라니아 주 | |
단치히 자유시 | 1,966 km2 | 8% | 19% | 단치히 자유시 | |
독일 | 2,927 km2 | 11% | 15% | 동프로이센 | |
4,787 km2 | 19% | 9% | 포제니아-서프로이센[18] |
3. 6.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1939년 나치 독일은 서프로이센 지역을 침략하여 단치히-서프로이센 관구에 편입시켰다.[19] 이 과정에서 13만 명의 독일 식민지 개척민이 정착했고, 12만 명에서 17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은 추방, 학살, 노예화되거나 절멸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20] 폴란드인과 유대인은 독일 국가에 의해 "하인젠"으로 분류되었으며, 폼머른 지식인 학살 작전과 슈투트호프 강제 수용소에서 노예화와 절멸의 대상이 되었다.[20]전쟁 후반부 붉은 군대가 동부 전선에서 진격하자 많은 서프로이센 독일인들이 서쪽으로 피난했다. 1945년 포츠담 협정에 따라 나치가 점령했던 모든 지역은 폴란드에 반환되었고, 피난하지 않고 남아 있던 독일인 대다수는 서쪽으로 추방되었다.[19] 많은 독일 민간인들이 소련의 보르쿠타와 같은 강제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어 그곳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19] 1949년, 독일 난민들은 서프로이센향우회를 설립하여 서프로이센인들을 독일 연방 공화국에서 대표하는 비영리 단체로 활동했다.
4.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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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로이센의 인구는 1819년 630,077명에서 1910년 1,703,474명으로 70년 동안 두 배 이상 증가했다.[21][23] 1819년에는 폴란드인이 52%(327,300명), 독일인이 46%(290,000명), 유대인이 2%(12,700명)를 차지했다.[21] 1831년 칼 안드레(Karl Andree)는 서프로이센의 인구를 700,000명으로 추정하면서 폴란드인 50%, 독일인 47%, 유대인 3%로 구성되었다고 기록했다.[22]
1875년, 1880년, 1890년, 1900년, 1905년, 1910년의 인구는 다음과 같다.[23]
- 1875년 – 1,343,057명
- 1880년 – 1,405,898명
- 1890년 – 1,433,681명 (가톨릭 717,532명, 프로테스탄트 681,195명, 유대인 21,750명, 기타)[23]
- 1900년 – 1,563,658명 (가톨릭 800,395명, 프로테스탄트 730,685명, 유대인 18,226명, 기타)[23]
- 1905년 – 1,641,936명[23]
- 1910년 – 1,703,474명[23]
1910년 독일 통계에 따르면 폴란드인은 35.5%였다.[23] 그러나 1910년 독일 인구 조사에서는 1918년 이후 폴란드 영토가 된 지역에서 독일인이 42%였던 반면, 1921년 폴란드 인구 조사에서는 같은 지역에서 독일인이 19%로 나타났다.[24] 이는 독일 측 인구 조사에서 독일군, 공무원, 식민 개척자를 포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자료에 따르면 카슈브인의 수는 80,000~200,000명으로 추정된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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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인구 변천
서프로이센의 인구는 1819년 630,077명에서 1910년 1,703,474명으로 70년 동안 두 배 이상 증가했다.[21][23] 1819년에는 폴란드인이 52%(327,300명), 독일인이 46%(290,000명), 유대인이 2%(12,700명)를 차지했다.[21] 1831년 칼 안드레(Karl Andree)는 서프로이센의 인구를 700,000명으로 추정하면서 폴란드인 50%, 독일인 47%, 유대인 3%로 구성되었다고 기록했다.[22]1875년, 1880년, 1890년, 1900년, 1905년, 1910년의 인구는 다음과 같다.[23]
- 1875년 – 1,343,057명
- 1880년 – 1,405,898명
- 1890년 – 1,433,681명 (가톨릭 717,532명, 프로테스탄트 681,195명, 유대인 21,750명, 기타)[23]
- 1900년 – 1,563,658명 (가톨릭 800,395명, 프로테스탄트 730,685명, 유대인 18,226명, 기타)[23]
- 1905년 – 1,641,936명[23]
- 1910년 – 1,703,474명[23]
1910년 독일 통계에 따르면 폴란드인은 35.5%였다.[23] 그러나 1910년 독일 인구 조사에서는 1918년 이후 폴란드 영토가 된 지역에서 독일인이 42%였던 반면, 1921년 폴란드 인구 조사에서는 같은 지역에서 독일인이 19%로 나타났다.[24] 이는 독일 측 인구 조사에서 독일군, 공무원, 식민 개척자를 포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자료에 따르면 카슈브인의 수는 80,000~200,000명으로 추정된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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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1910년 서프로이센의 구별 민족언어 구조
프로이센 주는 Kreis (단수: Kreis, 약자 Kr.)라고 불리는 구로 세분되었으며, 도시는 자체 Stadtkreis (도시 구)를, 주변 시골 지역은 Landkreis (농촌 구)를 가졌다.[26] 1910년 서프로이센의 구별 민족언어 구조는 다음과 같다.[26]구(Kreis) | 행정구역(Regierungsbezirk) | 폴란드어 명칭 | 인구 | 독일어 사용자 | % | 폴란드어/카슈브어/이중언어 사용자 | % |
---|---|---|---|---|---|---|---|
Berent | 단치히 | Powiat kościerski | 55,976 | 23,682 | 42.3% | 32,287 | 57.7% |
Danziger Höhe | 단치히 | Powiat Gdańskie Wyżyny | 53,506 | 47,397 | 88.6% | 6,071 | 11.3% |
단치히 저지대(Danziger Niederung) | 단치히 | Powiat Gdańskie Niziny | 36,345 | 36,008 | 99.1% | 327 | 0.9% |
슈타트크라이스 단치히(Stadtkreis Danzig) | 단치히 | 그단스크 시구(Powiat grodzki 그단스크(Gdańsk)) | 170,337 | 164,343 | 96.5% | 5,521 | 3.2% |
Dirschau | 단치히 | Powiat tczewski | 42,723 | 27,865 | 65.2% | 14,846 | 34.7% |
엘빙 군(Landkreis Elbing) | 단치히 | Powiat elbląski | 38,611 | 38,558 | 99.9% | 48 | 0.1% |
슈타트크라이스 엘빙(Stadtkreis Elbing) | 단치히 | 엘블롱크 시구(Powiat grodzki 엘블롱크(Elbląg)) | 58,636 | 58,330 | 99.5% | 248 | 0.4% |
Karthaus | 단치히 | Powiat kartuski | 69,891 | 19,319 | 27.6% | 50,568 | 72.4% |
Marienburg | 단치히 | Powiat malborski | 62,999 | 61,050 | 96.9% | 1,924 | 3.1% |
Neustadt | 단치히 | Powiat wejherowski | 61,620 | 30,932 | 50.2% | 30,661 | 49.8% |
Preußisch Stargard | 단치히 | Powiat starogardzki | 65,427 | 17,165 | 26.2% | 48,250 | 73.7% |
푸치크(Putzig) | 단치히 | Powiat pucki | 26,548 | 7,970 | 30.0% | 18,561 | 69.9% |
단치히 합계 | 단치히 | 그단스크 행정구역 합계(Rejencja gdańska łącznie) | 742,619 | 532,619 | 71.7% | 209,312 | 28.2% |
브리젠(Briesen) | 마리엔베르더 | Powiat wąbrzeski | 49,506 | 24,007 | 48.5% | 25,487 | 51.5% |
쿨름 | 마리엔베르더 | Powiat chełmiński | 50,069 | 23,345 | 46.6% | 26,709 | 53.3% |
도이치 크로네 | 마리엔베르더 | Powiat wałecki | 62,182 | 61,143 | 98.3% | 1,022 | 1.6% |
플라토 | 마리엔베르더 | Powiat złotowski | 69,186 | 50,648 | 73.2% | 18,531 | 26.8% |
그라우덴츠 | 마리엔베르더 | Powiat grudziądzki | 48,818 | 28,755 | 58.9% | 20,046 | 41.1% |
슈타트크라이스 그라우덴츠(Stadtkreis Graudenz) | 마리엔베르더 | 그루드지옹츠 시구(Powiat grodzki 그루드지옹츠(Grudziądz)) | 40,325 | 34,193 | 84.8% | 6,076 | 15.1% |
코니츠(Konitz) | 마리엔베르더 | Powiat chojnicki | 63,723 | 28,032 | 44.0% | 35,670 | 56.0% |
뢰바우 | 마리엔베르더 | Powiat lubawski | 59,037 | 12,119 | 20.5% | 46,911 | 79.5% |
마리엔베르더 | 마리엔베르더 | Powiat kwidzyński | 68,426 | 42,465 | 62.1% | 25,944 | 37.9% |
로젠베르크 | 마리엔베르더 | Powiat suski | 54,550 | 50,194 | 92.0% | 4,321 | 7.9% |
슐로하우 | 마리엔베르더 | Powiat człuchowski | 67,157 | 56,648 | 84.4% | 10,488 | 15.6% |
슈베츠 | 마리엔베르더 | Powiat świecki | 89,712 | 42,233 | 47.1% | 47,465 | 52.9% |
슈트라스부르크(Strasburg) | 마리엔베르더 | Powiat brodnicki | 62,142 | 21,097 | 33.9% | 41,026 | 66.0% |
슈툼 | 마리엔베르더 | Powiat sztumski | 36,527 | 20,923 | 57.3% | 15,583 | 42.7% |
토룬 군(Landkreis Thorn) | 마리엔베르더 | Powiat toruński | 59,317 | 27,751 | 46.8% | 31,493 | 53.1% |
슈타트크라이스 토룬(Stadtkreis Thorn) | 마리엔베르더 | 토룬 시구(Powiat grodzki 토룬(Toruń)) | 46,227 | 30,505 | 66.0% | 15,576 | 33.7% |
투헬 | 마리엔베르더 | Powiat tucholski | 33,951 | 11,265 | 33.2% | 22,656 | 66.7% |
마리엔베르더 합계 | 마리엔베르더 | 크비드진 행정구역 합계(Rejencja kwidzyńska łącznie) | 960,855 | 565,323 | 58.8% | 395,004 | 41.1% |
서프로이센 합계 | - | - | 1,703,474 | 1,097,942 | 64.5% | 604,316 | 35.5% |
1910년 인구조사를 기반으로 한 서프로이센의 언어 분포와 행정 구역은 오른쪽의 이미지와 같다. 1890년 프로이센 및 프로이센 주 인구 조사 결과 서프로이센의 인구는 1,433,681명이었고, 그 중 외국인은 1,976명이었다. 1885년부터 1890년까지 서프로이센 인구는 1% 감소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당시 정보원에 따르면 카슈브어인 인구는 8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된다.[33]
[[File:https://cdn.onul.works/wiki/source/194fd31c3e0_4db3dfbc.svg|thumb|1910년 인구조사를 기반으로 한 서프로이센의 언어 분포와 행정 구역
원 그래프 설명:
독일어
폴란드어
카슈브어
기타 또는 다국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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