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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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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호성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군인이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에서 독립군 활동을 했으며, 광복군에서 훈련처장, 지대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육군 창설에 기여하여 초대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육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인민군에 협력했으며, 이후 반혁명분자로 몰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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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성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송호성
한글송호성
한자宋虎聲
가타카나ソン・ホソン
로마자 표기Song Ho-seong
기본 정보
출생일1889년 11월 20일
사망일1959년 3월 24일
출생지조선 함경도 함주
사망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양덕군
거주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
자녀송무성(아들)
경력
소속 정당무소속
주요 경력한독당 당무위원 겸 광복군군사행정위원장 (1943년)
통위부 차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책군무부 예하 광복군 훈련처장
임기1943년 5월 31일 ~ 1944년 2월 29일
주석김구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부주석김규식 대한민국 임시 정부 부주석
군무부장김원봉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장
군무차장윤기섭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차장
광복군 총사령관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광복군 총참모장이범석 광복군 총참모장
군사 경력 (미군정청)
소속 군대미군정청 국방경비대
직책통위부 제2대 차장
임기1948년 6월 19일 ~ 1948년 7월 27일
주한미군사령관존 리드 하지 주한미군사령관
민정장관안재홍 미군정청 민정장관
군사 경력 (대한민국)
소속 군대대한민국 국군
복무 기간1914년 ~ 1950년 5월 12일
주요 지휘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육군 총사령관
육군 제5사단장
육군 제2사단장
육군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
주요 참전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국방부
직책국방부 차관 직무대행 서리
대통령이승만
부통령이시영
국무총리이범석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이범석 국방부 장관
임기1948년 8월 15일 ~ 1948년 8월 20일
후임최용덕

2. 학력

3. 생애

송호성은 1889년 9월 19일 함경도 함주에서 태어나 함경도 흥남에서 유아기를 보냈고, 함경도 함흥에서 성장했다. 대한독립군에 투신하여 김구 계파로 활동했으며, 광복군에서 훈련처장과 지대장을 역임했다. 1913년 6월 보성 이공 전문학교에 재학했고,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독립군단에 참가했다. 1921년 산시성으로 퇴각하여 옌시산에게 투항한 후, 송수창으로 이름을 바꾸고 중국 국적을 취득하여 보정 육군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1922년에는 허난의 한단 군관강습소에 입소했다.

일본의 항복과 함께 귀국하여 유동열의 주선으로 조선 경비 사관학교(제2기)에 특별 입학했다.[3] 미군 고문관의 요구로 시험을 보았고, 장창국의 도움으로 입학했다.[3] 1946년 10월 17일 소령으로 임명되어 김백일 대신 제3연대장(2대)으로 보임되었다.[4]

1946년 12월 조선경비대 초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11]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947년 5월부터 10월까지는 육사 교장도 겸임했다. 그러나 광복군 출신을 중용하여 군내 파벌 의식을 조장했고, 군사 지식과 통솔력 부족으로 건군의 기초를 그르쳤다는 평가를 받았다.[4]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이 발발하자 이범석 국방부 장관의 질책을 받고 진압 작전에 참여했지만, 지휘력 부족으로 작전은 실패하고 부상까지 입었다.

1949년 3월 호국군 사령관, 5월 제5사단장, 7월 제2사단장 겸 태백산맥 지구 전투 사령관을 역임했다. 1950년 2월 참모학교를 수료하고, 6월 10일 청년방위대 고문단장을 맡았다.[14]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후, 군사 경험자 회의에 소집되었으나 특별한 발언은 하지 않았다. 서울 함락 당시 자택에 머물렀고,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으로 남하하지 못하고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한군에게 납치되었다.[1] 이후 조선인민군에 협력하여 1952년 제22여단 여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4년경 북한에서 반혁명 분자로 체포되어 1958년 평안남도 양덕군으로 유배되었고, 1959년 3월 24일 뇌출혈로 사망했다.[1] 김일성은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도록 하였고,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였다. 2003년 다른 월북자들과 함께 평양의 묘지에 매장되었다.[10]

3. 1. 독립운동

송호성은 함경도 함주에서 태어나 함경도 흥남에서 유아기를 보냈고, 함경도 함흥에서 성장했다. 그는 대한독립군에 투신하여 김구 계파로 활동했으며, 홍범도, 김원봉 등과는 대립하기도 했다.[11] 광복군 훈련처장과 지대장을 역임했다. 1946년 12월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 초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정부 수립 후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1] 그는 대한민국 육군 창군의 주역 중 한 사람이다.

1933년, 중앙 육군 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반 편련처장을 맡았다.

황포 군관학교 군관반에서 국민정부군의 정식 군사 교육을 받은 후에는 제88사 부사단장, 중앙 전시 공작 간부 훈련단 한국 청년반 주임교관, 7분교 교관, 제34집단군 제1기병사 부사단장을 역임했다.

1942년 3월 1일, 광복군의 나월환이 암살당하자 후임으로 제5지대장에 취임하고, 암살 사건 해명 후에는 제34집단군에 복직했다.

광복군에서는 총사령부 총련처장, 제1지대장(1945년 5월 1일자[2]), 총사령부 고급 참모를 역임했다.

김구의 부하로서 광복군 출신이고 나이가 많았기에, 1946년 12월 13일부터 남조선 국방 경비대 총사령관(2대)이 되어 1948년 11월 20일까지 재임했다.[1] 1947년 5월부터 10월 사이에는 육사 교장도 겸임했다. 광복군 출신이 수뇌가 되어 중국계, 특히 광복군 출신이 등용되어 군내에 불명확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파벌 의식을 조장했다. 때문에 건군의 최중요기에 총사령관을 맡았지만 학식, 군사 지식, 통솔력이 부족하여 파벌 인사에 치중하여 건군의 기초를 그르쳤다고 평가받았다.[4]

3. 2. 대한민국 국군 활동

대한민국 육군 창군 주역 중 한 명으로, 1946년 12월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 초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11] 정부 수립 후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1]

김구의 측근이었던 그는 김구 암살과 함께 권력에서 밀려났으며, 1950년 5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강제 예편되었다.[14]

육군 총사령관 직위에서 밀려난 이후, 1948년 6월 통위부 차장,[12] 1949년 3월 호국군 사령관, 1949년 5월 12일 육군 제5사단장,[13] 1949년 7월 12일 육군 제2사단장(육군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 겸임)을 역임하였다. 1950년 2월 참모학교를 수료하고, 1950년 5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예편, 이후 1950년 6월 10일 청년방위대 고문단장을 역임하였다.[14]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이 발발하자 이범석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진압 작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지휘 및 통솔력 부족으로 작전은 실패하고, 송호성은 부상까지 입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군사 경험자 회의에 소집되었지만, 특별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7] 서울 함락 당시 육군 본부와 함께하지 않고 자택에 머물렀다.[7]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으로 남하하지 못하고,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한군에게 납치되었다.[1]

3. 3. 납북과 북한에서의 활동

한국 전쟁 발발 직후, 한강 인도교 폭파로 인해 남하하지 못하고 납북되었다.[15] 서울 함락 당시 육군 본부와 함께 이동하지 않고 자택에 머물렀다. 인민군이 의정부시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피난하려 했으나,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으로 인해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1] 이후 김규식의 집에 은신했으나, 인천 상륙 작전 이후인 9월 27일 서울 계동에서 북한군에게 납치되어 10월 2일 평양에 도착했다.[8]

납북 후, 전향하여 조선인민군에 협력하였다. 이것이 자발적인지 강요에 의한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전쟁 중 군의 전 고위 간부로서 북한에 협력한 것은 송호성이 유일하다.[9][7] 이 때문에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송호성을 독립유공자로 추천하지 않았다.[1]

1953년 인민군 해방전사 여단장을 지냈고,[15] 1952년에는 주로 포로로 편성된 제22여단 여단장을 역임했다. 이 여단의 대대장에는 한국 전쟁 이전에 월북한 강태무표무원이 있었다.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을 지냈다.[15] 통일신보 2018년 3월 13일 자 기사에 따르면, 1956년 5월 중순 송호성은 재북인사로서 내각청사에서 김일성의 접견을 받았고, 1957년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며 김일성을 다시 만나 조국통일에 앞장서 달라는 당부를 받았다.

1954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1958년 평안남도 양덕군으로 유배되었고, 1959년 3월 24일 뇌출혈로 사망했다.[1][15] 김일성은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도록 하였고, 조국해방 45돌이 되는 해에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였다. (주일봉 기자, 통일신보 2018년 3월 13일) 2003년, 다른 월북자들과 함께 평양의 묘지에 매장되었다.[10]

3. 4. 사후

한국 전쟁 발발 직후, 한강 인도교 폭파로 인해 남하하지 못하고 납북되었다.[1] 1953년 인민군 해방전사 여단장을 지냈고,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을 지냈다.[15] 1954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1958년 평남 양덕으로 유배되었고, 1959년 뇌출혈로 사망했다.[15]

1956년 5월 중순 송호성은 재북인사로서 내각청사에서 김일성 주석의 접견을 받았으며, 1957년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김일성 주석을 다시 만나 조국통일에 앞장서 달라는 당부를 받았다.(통일신보 2018년 3월 13일)

1959년 3월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일성 주석은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도록 하였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애국의 길을 걸은 그를 기려 조국해방 45돌이 되는 때에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였다.

1950년 2월, 참모학교 수료 후, 6월 10일, 청년 방위대 고문단장을 역임하였다.[14]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이튿날 26일, 군사 경험자 회의에 소집되었지만, 특별한 발언은 하지 않았다.

당시 청년 방위대는 아무런 기능도 없는 청년들의 집단에 지나지 않았고, 따르는 부하들에게 전황을 알려주는 자도 없었으며, 송호성은 자택에서 시간의 경과를 기다릴 뿐이었다.[7] 27일 오후, 청년 방위대 고문 장흥 대령이 송호성의 자택을 방문하여 피난을 권유했지만, 송호성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장흥은 혼자 한강을 건넜다.

서울 함락 당시, 육군 본부와 함께하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인민군이 의정부시까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와 자식을 남겨두고 남쪽으로 가려 했지만,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으로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1] 이후 김규식의 집에 숨어 지냈지만, 인천 상륙 작전 후인 9월 27일, 서울 계동에서 북한군에게 납치되어, 10월 2일에 평양에 도착했다.[8] 그 후, 전향하여 조선인민군에 협력하였다. 자발적인 것인지 강요된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전쟁 중 군의 전 고위 간부로서 반역한 자는 송호성뿐이다.[9][7] 이 때문에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 의한 독립유공자로서의 추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

1952년, 주로 포로로 편성된 제22여단 여단장을 지냈으며, 대대장에는 한국 전쟁 전에 월북한 강태무표무원이 있었다.

1954년경, 북한에서 국제 스파이 및 반혁명 분자 혐의로 체포되었다. 1958년, 평안남도 양덕군으로 유배되어, 이듬해 1959년 3월 24일에 뇌출혈로 사망했다.[1] 2003년, 다른 월북자와 함께 평양의 묘지에 매장되었다.[10]

참조

[1] 웹사이트 北に行った将軍の父、台湾のスパイになった息子 http://weekly.donga.[...] 2005-09-20
[2] 웹사이트 『앞길』 제42기(1945년 6월 1일) http://db.history.go[...] 国史編纂委員会 2017-06-21
[3] 뉴스 (3596)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49) 장창국 https://www.joongang[...] 1982-12-23
[4]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5]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6]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7]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中巻
[8] 서적 戦争と平和:朝鮮半島1950 社会評論社
[9] 문서 崔徳新이 越北
[10] 웹사이트 北朝鮮、拉致・越北62人の平壌墓地を公開 http://japanese.dong[...] 2005-06-27
[11] 서적 한국전쟁사 1권 해방과 건군
[12] 뉴스인용 統衛部發表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48-06-19
[13] 뉴스인용 각 여단을 사단을 승격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49-05-20
[14] 서적 한국전비사 상권
[15] 웹사이트 北으로 간 장군 아버지, 대만 스파이 된 아들 http://weekly.do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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